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77)
시계를 약간 돌려 몇 주 전, 나는 벼르고 벼르던 이사를 단행했다.
고르고 골라 아담하긴 해도 제법 괜찮은 입지의 아파트였다.
사실 그 전부터 좁고 낡은 월셋집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은 줄곧 있었다.
“일 없다. 어차피 현석이 너 집에도 별로 안 들어오잖아. 나 혼자 적적하게 사는 집이 넓어야 뭐하니.”
하지만 빙 돌아 내 가슴을 찌르는 어머니의 말씀 덕에 뾰족한 핑계를 찾지 못하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근 그렇게 완고하시던 어머니의 태도가 순식간에 변한 일이 있었다. 사실 이번 이사도 그 틈을 타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일을 마치고 떠난 사이 내가 슬쩍 말했다.
“뭐라도 드시고 하시죠? 적당히 정리된 거 같은데.”
“나 안 출출하다. 배고프면 저기 버너 있으니 라면이나 끓여먹든지.”
“······.”
그러고 있던 사이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이내 누군가가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 와봤는데요······.”
“어이구, 서 작가님!”
어머니의 태도 변화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환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서는 뭔가 깔고 앉을 걸 찾아 두리번거린다. 서예린 작가가 손사래를 치며 말리고서야 그만둔다.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대뜸 나에게 큰소리를 쳤다.
“뭐 하니, 현석아. 식사 안 하셨다잖아! 얼른 뭐라도 시켜야지!”
“······.”
뭐, 요즘 집에서 내 취급은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문제의 원흉이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연거푸 숙였다.
얼마 전, 서예린 작가가 처음 집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어머니는 크게 놀랐다. 다소 껄끄러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얼굴을 자주 보게 되자 금세 친숙해지더니 금세 아들내미보다 더 챙기는 사이가 되었다.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실로 극적인 비포 애프터였다.
서 작가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정리를 도왔다. 어느 정도 일이 정리되고 간단하게 배달음식을 시켜 마주앉았다.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요. 요즘 현석이가 힘들게 하지는 않고요?”
서예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천만의 말씀이세요, 어머님. 저는 이 피디님 이상으로 절 믿고 존중해주시는 분을 몰라요.”
“어쩜 말도 이리 참 곱게 하실까.”
눈이 반짝인다. 아무리 봐도 묘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나는 헛기침으로 말을 끊었다.
“참, 서 작가님. 혹 요즘 지아에게 들으신 얘기 있습니까?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지아의 얘기가 되자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언제나의 일이었다.
“조금 너무 신경 쓰시는 것 아닌가요?”
서예린 작가가 한숨을 쉬었다.
지아는 얼마 전부터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걱정이 앞섰지만 본인의 의지가 워낙 확고했다.
“전학 보내실 거 아니면 결국 거쳐야 되는 길이잖아요. 그리고 누가 이제 와서 지아를 건드리겠어요.”
“음······.”
“그보다도 이번 에피소드에 대한 상담이나 들어주는 게 어떠세요? 내색은 안 해도 저번 단막극의 평이 안 좋았던 게 조금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같던데.”
···물론 그 점은 신경 쓸 생각이다. 이제 그 녀석이 어지간히 땅을 파는 성격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니, 사실 그러니까 더 걱정이 되는 거긴 한데······.
내 태도에 서예린 작가는 살짝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뭐, 좋은 소식이 하나 있긴 해요.”
“뭡니까?”
“지아가 새 친구를 사귄 모양이에요.”
“······!”
#
“어··· 네. 맞아요.”
작가실, 지아가 펜을 든 채 얼떨떨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마구 캐묻고 싶은 심정을 가라앉히며 애써 점잖게 물었다.
“잘 됐네. 누군데?”
“최미나라고 하는데요. 그··· 좋은 애 같아요. 일단은.”
묘한 표정인 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지만.
처음에는 잔뜩 얼어붙은 채 쭈뼛쭈뼛 말을 걸었다가 순식간에 친분이 쌓였다는 모양이었다.
걱정이 삽시간에 스러지는 기분에 나는 몹시 흐뭇해졌다.
하지만 지아는 새로 생긴 친구보다는 눈앞의 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오빠. 이 에피소드, 정말 제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거예요?”
“서 작가님이 허락하셨잖아. 나중에 봐주신다고 하기도 했고.”
“그렇긴 한데요······.”
지아의 표정은 애매했다. 치킨이 생겨서 좋아라 뜯어보니 죄다 퍽퍽한 닭가슴살인 걸 본 것 같은 얼굴이다.
분명히 처음엔 좋아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솔직히 요즘의 예린이 언니는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해요.”
“뭐가?”
“이것저것이요.”
“······?”
지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 펜 끝부분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앞에는 그동안 방영된 『연구일지』의 대본들이 놓여 있다.
사실 그간의 『연구일지』의 스토리는 별반 통일성이 없었다.
1-2화의 연구일지 발견과 공룡 사냥.
3-6화의 막장스런 이웃들과의 휴먼드라마.
7-10화의 조선시대.
11-14화의 우주 행성.
이후는 다시 현대로.
좋게 말하면 철저한 옴니버스식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중구난방이다.
이런 구성으로 지금까지 좋은 평가를 받은 게 신기할 지경이다. 서예린 작가가 쓴 개별 스토리가 그만큼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지아식으로 끼워 넣는 게 큰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아는 고민이 깊은 얼굴이었다.
“생각나는 소재는 많은데···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어서요.”
살짝 움츠러든 태도다. 『연극처럼』 시절의 반짝반짝한 눈빛을 떠올리면 차이가 컸다.
···뭐, 이것저것 일이 많았으니까.
서예린 작가가 당부한 말이 생각났다.
“일단 나와 얘기를 해보자.”
나는 잠시 지아와 같이 의견을 나누며 방향을 잡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썩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지아의 표정은 더욱 풀이 죽어 있었다.
완전한 역효과였다.
어쩐다······.
고민하던 나는 문득 체스판을 뒤집는 발상을 떠올렸다.
애초에 고민하지 않으면 되지 않은가?
“지아야, 그냥 몽땅 넣어보는 게 어때?”
“네?”
“그냥 생각나는 걸 모조리 대본에 때려 넣어보는 거지.”
“······?”
지아가 눈을 깜박였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저기··· 오빠. 결국 촬영 대본이 나가려면 그 안에서 골라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고를 필요 없다고. 다 써봐. 그리고 내가 그걸 죄다 촬영하면 돼.”
그리고 그 한가득 촬영한 씬에서 괜찮아 보이는 걸 내가 이어붙이면 된다.
어렵지 않고, 오히려 흔한 얘기다. 어떤 게 나을지 모를 때 일단 모두 찍어보는 건.
하지만 지아는 입을 멍하니 벌리다가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어떻게 그래요! 스태프 분들도 어마어마하게 고생하실 테고··· 무엇보다 오빠가······.”
“모두 베테랑들이다, 지아야. 그 정도는 고생이라고 치지도 않아.”
나는 픽 웃었다. 얘가 스태프들을 우습게 아네.
고작해야 주연인 이도나나 좀 고생할 뿐이겠지.
그리고 그 이도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녀가 훌륭한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고결한 배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암, 그렇고말고.
“어··· 일단 써보긴 할게요.”
지아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수긍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중 문득 시선이 닿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뭐야?”
작업 중인 원고 사이 묘한 리스트 한 장이 눈에 띈다. 집어보자 더욱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지원 능력 정리표?”
설정 모음인가?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뭔가······.
“아, 그건 설이 언니가 물어보신 거예요.”
이설이?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나는 의아해졌다.
“본인 배역이셨던 만큼 한지원에 대한 애착이 좀 있으신가 보더라고요. 하도 물어보셔서 대충 정리해보는 중이에요.”
그렇다 해도 워낙 우겨대는 솜씨가 대단해서 없던 능력도 생기는 중이지만요 – 하고 지아는 한숨을 쉬었다.
음··· 뭐.
나는 애써 납득했다.
나도 어린 시절 공책에 나만의 캐릭터를 그려 무지 강한 능력을 잔뜩 넣어주곤 했었더랬다. 직접 연기한 역할이면 그만한 애착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나저나 『연극처럼』이 세계관의 오리지널의 노릇을 하게 된 상황이니 설정을 좀 정돈할 필요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시간이 되면 서예린 작가랑 얘기해볼까.
대수롭잖게 읽어나가던 중 문득 눈에 띄는 요소가 있었다.
“그, 한지원이 영혼을 보고 다루는 능력에 대해서는 그냥 스무스하게 넘어간 감이 있었잖아요? 그걸 몇 번이나 물어보시더라고요.”
“암만 그래도 이건 없었겠지.”
“···역시 그렇죠?”
뺨을 긁적인 지아가 별 것 아닌 태도로 ‘빙의 능력’에 줄을 쭉 그어 지웠다.
#
그리고 디에고가 멋지게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 지금.
나는 스스로의 놀라운 혜안에 전율하고 있었다.
내가 본래 지아에게 각본에 제한을 두지 말라고 권한 건 지아 본인의 리허빌리를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건 신의 한수가 되어 돌아왔다.
김철 선배가 눈을 끔벅였다.
[···대체 뭐라는 거냐.]“모르시겠습니까?”
현재 내 희망은 『연구일지』 20화를 ‘동시제작’에 더해 단번에 막장도를 달성하는 것이다.
현재 목표치는 32퍼센트와 42퍼센트 차이.
“본래라면 이 타이밍에 손을 댈 수 있는 요소는 없지요.”
촬영이 끝나고 편집만 남은 상태니까. 결국 뼈대를 바꿀 수는 없다.
통상적인 촬영이었다면 손도 발도 쓰지 못했을 상황.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지아의 대본을 일일이 씬으로 만든 덕에 편집으로 이어붙일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늘어 있다.
나는 그 씬들 중 최대한 막장도를 끼워 맞출 수 있는 씬들을 골라 연결하면 되는 거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기적처럼 내려온 답지······!
하지만 김철 선배는 어째 미적지근한 표정이었다.
“물론입니다.”
내가 코웃음을 쳤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하물며 내가 막장을 추구한지도 어언 70회. 미니시리즈로 따지면 서너 편을 훌쩍 넘긴다.
“이 정도면 눈 감고도 이게 어느 정도인지 맞출 수 있습니다.”
[······.]“이 동시제작, 저희들의 승리입니다, 선배님.”
#
최미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화면 안에 방영되고 있는 『연구일지』 20화에는 여느 때처럼 두 주인공이 비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함께였다.
「미안해요. 간만에 만나는 동향인···이라고 하기에는 그 녀석한테 속아본 세월이 너무 길어서요.」
「······.」
「자, 쏴버리기 전에 어디 행성에서 사시던 분들인지 소개나 좀 해주시겠어요?」
피곤한 눈으로 총을 겨눈 여자를 본 최미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로 나와 버렸다. 정하늘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