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80)
작가로서 말수가 적은 사람은 흔하지만 쓰는 글이 담백한 사람은 흔치 않다. 지아는 대표적인 후자였다.
뭐니뭐니해도 방송국에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교사들 중 지아가 글에 재능이 있다는 걸 눈치 챈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아니, 연락이 오고서도 믿지 않으려는 선생님들이 있었을 정도였지.’
최미나는 작게 혀를 내밀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유별난 법이라 그중 몇몇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되레 지아를 아니꼬운 눈으로 노려보곤 했다.
그게 저번 사태의 원인 중 하나기도 했고.
‘하지만 지아 글은 정말 읽기 쉬워. 가독성이 좋다고 해야 하나.’
세 줄 이상을 읽으면 대개 졸려지는 최미나다. 하지만 그녀도 지아가 쓴 글은 팬심을 접어두고도 쉽게쉽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딱 하나 예외가 지금 최미나가 들고 있는 ‘위인전’이다.
“저, 어떨까요?”
지아가 머뭇머뭇 물었다. 두툼한 원고다발을 든 최미나가 고개를 숙였다.
응, 무지 깬다. 옛날 소련도 레닌이 한 일을 이 정도로 경건하게 쓰지는 않지 않았을까?
“어··· 응. 난 글을 잘 모르지만, 좋은 게 아닐까.”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최미나는 그저 활짝 웃었다. 나는 해바라기다. 나는 코스모스다······.
“그런가요!”
지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노트를 덮었다. 뭐,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역작 같기는 하지만.
“···그리고 보면 걔네들, 퇴학 처분이 확정된 것 같더라.”
“그렇군요.”
지아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축 쳐진다.
“안타깝게 됐네요.”
피해자 입장에서 하는 말로는 가히 성스럽게까지 들린다. 대화를 훔쳐듣던 학생들이 작게 입을 벌렸다.
주가가 폭등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친구인 최미나는 이제 이 말의 의미를 능히 유추할 수 있다.
‘이건 십중팔구 더 때려줬어야 했다는 안타까움이네.’
이현석 피디에 대한 욕설에서 촉발된 5대 1의 난투.
최미나는 그 싸움에서 지아가 근소하게나마 우위를 점했다는 걸 아는 유일한 목격자다.
‘하여간, 그 아저씨 이름이 나오지만 않으면 완벽한데 말이지.’
▶『연구일지 속 보석함』 새 OST, 『로켓맨』이 부른다.
▶’원수’와의 극적인 화해? 팬들 일대 혼란.
▶로켓맨 샤이, ‘이현석 감독은 평소부터 존경해온 분’··· ‘그간 헛소문이 많아 안타까웠다’ 심정 고백.
▶이현석 PD, ‘『연극처럼』도 『연구일지』도 우주비행사가 필요’··· ‘좋은 인연이 되길 바란다’ 환영의 뜻 밝혀.
최근 이현석과 『로켓맨』과의 기적적인 화해가 대서특필되는 가운데도 1기 팬 최미나의 기분은 영 께적지근했다.
#
콘티의 대대적인 수정이 진행되던 최근. 이전 약속을 잡았던 KDS와의 미팅이 이루어졌다.
생각과는 꽤 다른 분위기였다.
찾아온 두 명중 높으신 분, 팀장은 줄곧 저자세였다.
“그래서 늦었지만 부하가 무례한 일을 한 걸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아··· 예.”
팀장이 고개를 숙이자 옆에 망연히 서있던 녀석도 “죄송했습니다.” 하고 따라 머리를 숙인다. 예전에 『로켓맨』 샤이 캐스팅과 관련해 악연이 있던 박준규 실장이다.
눈을 질끈 감고 부들부들 떠는 게 영 안쓰러워 보인다. 하지만 그런 감정보다도 먼저 어리둥절함이 앞섰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가 뭐지?
박진태 부사장이 슬쩍 눈짓을 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상호간에 오해가 있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이 피디님이 통이 크신 분이라 다행입니다. 뭐해, 다시 감사드리지 않고!”
박준규가 허리를 숙이고 있는 사이 KDS의 팀장은 영 솔깃한 제안을 이어왔다.
『로켓맨』의 곡을 『연구일지』의 OST로 사용하는 대가로 적잖은 금액의 투자를 제안한 것이다.
“가능하면 드라마 자체에 더해 귀사에도 투자하고 싶습니다.”
“···그건 솔직히 좀 이상한 말씀이시군요.”
매니지먼트 회사가 매니지먼트 회사에 투자하는 건 꽤 드문 일이다. 흡수합병이라도 할 게 아니라면.
“하하, 뭐. 화해의 뜻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적당히 합의를 마친 팀장은 흡족한 기색으로 떠났다. 막판에 사진 한 장 찍어줬더니만 홀가분해진 모양새다.
“다들 저희가 드라마 제작을 겸업할 거라고 생각중인 모양입니다. 증삼살인이라더니만.”
박진태가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처음 들인 게 유지아 작가인게 컸던 것 같네요. 다들 저희가 뭔가 크게 벌일 줄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
“거 김칫국도 어지간해야지. 판권이 이렇게나 꼬여있기도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하하.”
『연극처럼 살다』는 MBS, 『연구일지 속 보석함』은 SBC다.
안기식 사장이 있는 MBS라면 적당한 값에 쿨하게 넘겨줄지도 모르지만 최도정 사장은 그런 건 철저하게 따질 위인이다.
그리고 얼마 뒤의 촬영장에는 미리 합의했듯 손님들이 찾아왔다.
“안녕하셨습니까!”
점심시간에 맞춰 『로켓맨』 친구들이 선물을 사들고 찾아온 것이다.
내게 먼저 꾸벅 고개를 숙인 샤이는 이어 죄송하다며 지아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이 사람은 누구지’ 하고 슬쩍 고개를 빼는 지아의 표정이 인상 깊었다.
어쨌거나 뒤따르는 밥차와 커피차, 간식차 등과 쌓이는 선물들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이게 톱랭크 아이돌 그룹 팬클럽의 힘인가. 무슨 홍지호와 이도나를 합친 것과도 맞먹는 수준이다.
“와··· 대단하네요.”
“너는 감탄하면 안 되지. 너네도 받아야지.”
멍하니 입을 벌리는 한유미에게 이도나가 타박을 넣었다.
“설이는··· 오늘도 없고.”
주변을 둘러보다 작게 눈살을 찌푸린다.
“둘이는 어지간히 엇갈리네. 이 촬영장에서 같이 있었던 적 없지 않아?”
“뭐, 나오는 씬이 씬이니까요.”
한유미가 멋쩍게 웃는다. 이도나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도나는 신나게 한유미를 갈궈대다가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뒤 투덜거렸다.
“아, 괜스레 피곤하네.”
“괜스레 시비 거니까 그렇잖습니까?”
“쟤가 시비 걸게 만들잖아요?”
나는 한유미를 바라보았다. 싱글벙글 웃으며 스태프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어디가?
최근 이도나와 한유미의 사이는 신기할 정도로 나빴다. 대개는 아무리 봐도 이도나의 일방적인 시비였다.
내 시선을 읽었는지 이도나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저거 조심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다 연기니까, 저거.”
“···내숭 떨고 있다고요?”
설마 당신만 할까.
촬영장에서야 조금 본성이 나오는 편이지만 인터뷰할 때의 이도나를 보면 종종 온몸에 소름이 돋곤 했다.
“그런 소리가 아니라··· 후우, 됐어요.”
이도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를 떠났다.
스태프들이 두런두런 식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기라······.
[뭔 생각 하냐?]‘한유미 씨한테 저희의 목적을 밝힐까 말까 하는 생각이요.’
[목적?]‘5년 내에 달성해야 하는 목표 말입니다.’
한동안 눈을 끔벅이던 김철 선배가 이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반대로 지금까지 얘기를 안 했던 거냐? 그렇게 친한 체를 해두고서?]‘말 그대로 친한 체였으니까요.’
내 말에 선배가 우물거렸다. 거 드라이하구만, 하고 놀람인지 불평인지 모를 말을 흘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회귀자 한유미란 존재는 아, 그렇습니까 하고 순순히 환영하기에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수상쩍다.
처음에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10년 뒤의 얘기를 꺼내왔을 때는 나도 그야말로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이 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일단 저번에 ‘회귀 룰렛’ 가설을 세워두긴 했지만, 확신과는 거리가 멀다. 중대한 오류가 하나 있기도 하고.
아니, 사실 그 이전에 어떤 까닭 없는 직감이 들기도 했다.
“···감독님?”
“크흠. 무슨 일입니까, 유미 씨?”
너무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눈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한유미를 보며 나는 애써 당황을 수습했다.
“아뇨. 식사 안 하시나 해서요.”
“···가야죠. 갑시다.”
걸으며 슬쩍 얼굴과 동작을 살폈다.
‘어딜 봐도 한유미다.’
그건 틀림없다.
하지만 어째선지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 한유미의 10년 뒤가 과연 저런 걸까, 하는.
···스스로도 영문을 모를 생각이다.
한유미가 다시 묘한 눈빛으로 이쪽을 본다. 제 발이 저린 나는 일단 칭찬하기로 했다. 칭찬하면 대부분의 일은 해결된다.
“요즘 정말 잘 해주고 계십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에요!”
한유미가 생글거렸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뭐, 조금이랄 건 아닙니다.”
이건 사실이었다.
『연구일지』의 주연인 윤가연이라는 캐릭터를 이 정도로 빠르게 정립시키는 건 한유미와의 대립각을 활용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유미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해줬다.
칭찬을 이어가던 중 나는 적당히 과장된 칭찬을 내뱉었다.
“어쩌면 설이보다도 나으신 거 같습니다.”
“······.”
어째 갑자기 조용해진다. 돌아보자 한유미가 눈을 깜박이고 있다.
생글생글 웃던 안색이 걷히고 어째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짓고 있다.
“······?”
뭐지.
의아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자 한동안 헤엄치던 눈이 간신히 나를 포착한다.
“그······.”
“말씀하시죠.”
“그··· 한유··· 아니, 제 쪽이 이설 씨보다 타입이신가요?”
“······.”
···뭐라는 거지, 이 사람은.
내가 황당한 기분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이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하고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맙소사, 자뻑 하면 알아주는 이도나도 이 정도로 공주병은 아니었는데.
···나는 일단 한유미에게 사실을 전달하는 건 보류하기로 했다.
#
같은 시각.
디에고 로드리게즈 감독은 꽤나 드문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자네가 날 찾아오다니 별 일이군, 곤잘레스.”
“한 대 후려쳐줄 생각으로 찾아왔다가 바보 같아져서 그만둔 걸세.”
로이드가 으르렁거렸다.
『연극처럼』 프리퀄 1화에 격노한 것도 잠시, 디에고가 애써 수습에 나서는 기색이자 기분이 조금 가라앉은 것이다.
그럼에도 찾아온 것은 물론 묻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애써 마음을 굳히던 로이드는 문득 디에고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에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보면 디에고의 표정도 어째 기분이 나쁘다.
“···대체 뭘 보고 있나?”
“오오, 곤잘레스. 같이 보겠나?”
디에고가 촉촉이 젖은 눈으로 손을 들었다.
“『연극처럼 살다』의 메인 라이터가 현석에 대해 편지를 보내왔다네.”
“······?”
로이드가 눈을 끔벅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