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84)
이제 7년차에 접어드는 무명배우 유명우는 최근에야 이름이 좀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었다.
처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오디션에서 이현석이 로켓맨의 샤이를 까버리고 발탁하면서부터.
큰 배역은 아니었지만 유명우는 필사적으로 배역을 연구했고, 드물게 피디가 직접 신경을 써준 탓도 있어 나름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았다.
이어 『연구일지』의 시청률이 반석에 오르며 유명우의 이름도 알음알음 알려지기 시작했다.
항상 그를 걱정하던 친지들은 이제야 좀 풀리는구나, 하고 모두가 기뻐했다.
최근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 내가 이름을 잘못 지었어··· 유명, 유명 하니까 자꾸 무명 만들라고 끌어내리는 거여, 세상이······.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유명우가 애써 웃었다.
“엄마도 참.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그리고 정말로 별 일 아니라니까.”
– 별 일이 아니기는! 어휴, 아주 사방이 시끌시끌한데······.
“그러니까 다 호들갑이라고, 그거.”
유명우의 어머니 안에서 이번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흐른 모양이었다.
실제로 유명우의 무명 경력 대부분이 그렇게 엎어지고 메쳐지며 휩쓸려왔으니 그런 반응부터 나올 만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도 『연구일지』의 시청률에는 거의 타격이 없었다. 드라마 자체에 대한 저격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걸 자세히 설명해도 목소리는 전혀랄 정도로 밝아지지 않았다.
– 지금에야 몰라도 그 서예린 작가님이라는 분이 어디 멀쩡히 일을 하시겠니? 이렇게나 말이 많은데.
“음······.”
– 도대체가 그 작가님은 그냥 잘 가면 될 걸 왜 전작을 끌어들여서 이 사단을 만들었대냐, 어휴 속 터져.
···뭐, 결국은 거기서부터 촉발된 일이긴 했다.
세계관 통합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하늘을 그렇게 애매하게 등장시키지 않았다면 장연철이 끼어들 여지도 없었을 터다.
“···알았으니까 끊어, 일단. 진짜 별 일 아니니까 걱정 말고.”
유명우는 적당히 달래가며 끊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대본을 바라보았다.
이현석의 신신당부가 떠올랐다.
···이걸 어디다 떠들 수도 없고, 참.
유명우는 한숨을 푹 쉬고는 다 헤진 대본을 다시금 넘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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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누군진 몰라도 참 유치한 수를 다 쓰는군요.”
한창 바쁘게 움직이던 중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묘한 흐름이 생겨나 있었다.
[하지만 먹히고 있지.]김철 선배의 심드렁한 말에 나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랬다. 그게 문제였다.
“이게 정말 큰 소동이면 제대로 대응하면 되겠지만요.”
[그러기엔 사이즈가 너무 애매하고 말이지. 역효과 나기 십상일 거다.]링 밖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척 심기만 박박 긁고 있는 꼴이다.
뭐, 서예린 작가 본인은 “솔직히 욕먹어도 할 말 없는걸요.” 하고 웃으며 쿨하게 넘어갔지만.
“저번에 멘탈이 간당간당한 걸 봐서 걱정했는데 어째 생각보다 괜찮더군요.”
[···글쎄다, 어째설까.]김철 선배가 기묘한 어조로 말했다.
“한 사람만 아니면 그렇죠.”
서수현.
이 아주머니는 분명히 끼어든다. 그러지 않을 리가 없다.
[조카 본인한테 말리라고 하면 되잖냐?]“···그런다고 되면 저도 예전에 고생 안 했습니다.”
회귀 전 서수현 작가가 조카와 대립각을 세우던 때의 촬영장 분위기를 떠올린 나는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먹을 리가 없다.
“그 사람은 전체적으로는 그럭저럭 이성적이지만 조카 일만 되면 이성을 잃어버리거든요.”
[···암만 그래도 막나가기야 하겠냐? 친딸도 아닌데.]“친자식보다 더합니다.”
[······.]진짜다.
둘 있는 아들이 죄다 체육 계통으로 빠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서수현 작가는 조카딸을 친아들들보다도 더 아끼는 경향이 있었다.
김철 선배가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악의적으로 말하자면 ‘포스트 서수현’을 싸고도는 걸 수도 있겠고.]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 인식을 토대로 볼 때 저번엔 사기를 쳐서 어찌어찌 넘어가긴 했지만 서수현 작가의 나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최악일 터다.
그리고 내 머리로도 서수현 작가가 조카를 구제하고 나를 엿 먹일 방법을 몇 가지쯤은 생각해낼 수 있었다.
“···국내에서 그쪽 인맥들하고 척지면서 드라마 만드느니 그냥 얌전히 외국에라도 나가는 게 나을 겁니다.”
서수현 작가를 달래지 못한다면 강제로 소프 오페라나 텔레노벨라를 연구해야 하게 생겼다.
그렇게 결론이 나지 않는 이야기를 이어가던 와중이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본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올 게 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이현석입니다.”
– 간만이네요.
목소리에는 그다지 화가 난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서예린 작가가 그렇듯 이 아주머니 역시 스팀이 제대로 받으면 되레 목소리가 평이해지는 부류의 인간이다.
고로 이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몇 마디 건넨 서수현 작가는 성격대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왔다.
– 그래요, 요즘 예린이 관련해서 좀 소란스럽던데, 알고 있나요?
“···예.”
– 대책은 있고요?
음···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반전시킬 대본이 나가기까지는 아직도 두 주가 남아있다.
그리고 2주일이면 이 아주머니가 나를 회치고 뜨거운 물에 잘 데쳐 내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여기서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
나는 애써 말을 골랐다.
“···네, 있습니다. 그게, 정확히 설명 드리자면······.”
– 그럼 됐어요.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순간 벙 쪘다.
하지만 서수현 작가는 정말로 그걸로 됐다는 듯한 어조였다.
– 예린이는 잘 있죠?
“아··· 네.”
– 바쁜 건 이해하는데 얼굴 좀 비추라고 하세요. 나이 먹으면 그런 게 다 서운함으로 쌓이니까.
“그··· 꼭 비추라고 전하겠습니다.”
– 남 얘기하듯 하는 게 보기 안 좋네요. 당연히 이 피디도 같이 와야죠.
···내가 왜?
무어라 되묻기도 전에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쯧쯧.]그리고 어째선지 김철 선배가 그런 나를 가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뭐, 어쨌거나. 서수현 작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문제될 건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고마운 상황이지.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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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2주일이 흐른 후.
“···젠장,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장연철은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혀 대응이 없다고?”
하다못해 기사를 풀어서 맞싸움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서수현도 침묵, 이현석도 침묵. 그러다보니 장연철이 공을 들여 만든 분위기도 서서히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이현석은 이틀 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 『연구일지』 24화는 작중에서 일종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작금의 사태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좋다는 양 일언반구도 없었다.
완전히 무시당한 장연철은 이를 갈았다.
“···뭐,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거기에 따른 방법을 쓸 뿐이지.”
이현석은 태연한 체 하지만 타격이 없을 리 없다. 서수현 조카니 뭐니 해도 결국은 입봉 작가. 노릴 틈은 얼마든지 생길 것이다.
장연철은 곧장 움직이기 위해 『연구일지』 24화의 본방을 직접 챙겨보기로 했다.
하지만 광고가 끝나고 방영이 시작된 순간에는 무심코 눈을 끔벅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정적 안에서 작은 아기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화사한 색감의 연출이 포근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도저히 그 이전화와 연결을 찾을 수 없는 생뚱맞은 씬에 장연철은 무심코 자기가 다른 방송을 튼 게 아닌가 확인하기까지 했다.
포근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한 여자가 아기를 어딘가에 버리고 도망치는 사이 주변에 만개한 나팔꽃에서도.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 창문 너머로 비치는 맑고 공활한 하늘에서도.
그곳에서도 줄곧 홀로인 소녀의 주변은 그저 환한 색깔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주변이 너무도 화사했기에 드리우는 음영은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그건 여주인공 본인의 색깔이었다.
드라마라기보단 차라리 비디오 아트로 보일 정도로 빛이 형형했다. 그리고 여전히 소리는 없었다.
장연철이 입을 떡 벌렸다.
“뭐 이딴······.”
오후 10시 드라마에, 이런 정신 나간 연출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나.
“미쳤군. 평론가 놈들에게는 어찌어찌 호평을 받을지 몰라도 시청자들은······.”
하지만 장연철의 입은 이내 닫혔다. 그 빛이 이어 본편으로 연결된 까닭이었다.
남주인공과의 만남. 주변인물과의 만남. 공룡. 조선. 우주인.
그동안의 사건이 전부 진한 음영으로 되짚어져 흘러갔다. 본 적 없는 장면과 본 적이 있는 장면이 뒤섞인 채.
「···그건 제 거예요.」
그리고, 순간 소리가 돌아왔다.
여주인공, 윤가연은 정하늘과 마주하고 있었다.
「제가··· 절 아는 유일한 누군가에게서 받은 물건이란 말이에요!」
「시간을 넘나드는 기능 따윈 아무래도 좋아요! 저는 이 일지의 주인을 찾아야 해요. 찾아서······!」
전전화. 평가가 썩 좋지는 않았던 씬이다.
윤가연의 감정선을 이해할 수 없다. 정하늘은 왜 저렇게 까칠한 거냐 – 시청자들은 이런저런 불만을 쏟아냈다.
하지만 스쳐가는 장면들이 빛무리를 통해 음영을 드리우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제기랄.”
장연철이 입술을 깨물었다. 앞선 연출을 본 그는 윤가연이 어째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윤가연의 과거는 흔한 비극이다. 어릴 적 버려져 해외에 입양되어, 그곳에서도 불행한 삶을 살았다.
말로 꺼내자면 흔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한 내용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수십 번쯤은 우려 먹힌 얘기겠지.
하지만 그 흔한 뼈대와 10여 분의 시간이 윤가연이라는 캐릭터와 시청자를 동조시키는 데 필요한 전부였다.
여우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다.
“···빌어먹을.”
장연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다시금 욕설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그는 다른 누군가를 순수하게 인정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연출은 자연스레 자리를 비켜주었다. 정적인 미디엄 샷이 덩그러니 놓인 가운데 두 주연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빙긋 웃었다.
「···저는 당신이 싫어요.」
「마음이 맞네요. 저도 당신이 정말로 싫은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장연철은 문득 직감했다.
이건 『연구일지 속 보석함』의 24화가 아니다. 간신히 프롤로그를 지난 본편의 1화다.
한지원이 정체를 밝힌 『연극처럼 살다』의 15화 전까지가 단순한 빌드업이었던 것처럼, 이 드라마 역시 사실상 절반이 지난 지금부터가 시작인 거라고.
아마 맨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겠지.
“드라마를, 방송을 대체 뭘로 아는 거냐, 이현석 이 자식은······!”
장연철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삽질했다. 완벽하게 놀아났다ㅡ
완전한 착각이었으나 그렇게 생각한 이는 비단 장연철 혼자만이 아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