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86)
오른팔인 알렉스 포터가 가져온 촬영 영상. 디에고는 그걸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나는, 그간 무언가를 크게 잘못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군.”
그리고는 끝내 탄식하듯 말했다.
“나는 그간 웰메이드에는 뭔가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믿어왔네. 현석이나, 곤잘레스와 같은 이들에게는 내게 없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도.”
“디에고, 그건······.”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결국 나는 변명을 하고 있었던 거야.”
화면 안의 여배우는 땀에 흠뻑 젖은 중에도 계속 어딘가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당장이라도 잡아다 으깨버리고 싶어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디에고에게는 그게 조금 다르게 비친 모양이었다.
“보게. 리테이크가 수십 번인데 배우는 전혀 불만을 표하지 않고, 나아가 감독과 아이콘택트만으로 의사를 교환하고 있어.”
어느 정도의 열정을 갖고 믿음을 사면 저런 게 가능할까.
디에고는 가만히 자신의 과거를 반추해보았다.
한때는 그 역시 열정에 불탈 때가 있었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싸구려 카메라 한 대로 사흘 밤낮을 새워 불과 5분짜리 영상을 뽑아내는데 매진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렇지 않게 되었지.”
텔레노벨라나 소프 오페라 모두 역사가 깊은 장르들이다.
깊이 없이 역사만 쌓이면 자연히 클리셰가 넘쳐흐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그걸 차용해 적당히 넘기는 걸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해 시청자가 원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대부분이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디에고. 세간이 무어라 말하든 자네는 뛰어난 감독이야.”
“저걸 봐, 알렉스. 고작 18초짜리 씬이야. 저걸 몇 차례나 다시 찍었다고 생각하나? 얼마나 타협의 여지가 있었겠느냔 말이야.”
하지만 감독은 타협하지 않았다. 배우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 18초에서 촉발된 무언가가 전체를 지배하게 만들었지. 나는 기본적으로 자세가 틀려먹었던 거야.”
비로소 디에고는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내게는 절실함이 빠져 있었네, 친구.”
한쪽에는 알렉스가 가져온 영상이, 다른 한 쪽에는 『연극처럼』의 메인작가가 보내온 – 어마어마하게 과장된 – 이현석의 성공담이 있었다.
“알렉스. 자네는 이 설정을 속행하는 데 반대였지?”
말할 것도 없이 ‘아빠 찾기’에 관한 얘기였다.
“그랬지.”
“미안하지만 속행하겠네.”
알렉스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설정이 멋지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멋지게 만들 생각이야.”
“음.”
“분명, 현석도 내게 그걸 전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하네.”
본인이 들으면 몹시 아리송해할 이야기였지만 디에고는 진지했다.
“촬영을 다시 하지, 처음부터.”
“하지만, 지금 일정으로는······.”
“휴방해야겠지.”
주변은 잠시 술렁였지만 이내 진정되었다. 디에고의 각오는 굳었다.
“뭐, 내가 싹싹 빌면 해결될 일이니 염려 말게나.”
#
디에고 로드리게즈란 감독의 장점은 무엇일까?
소프 오페라의 제왕인 그를 아는 대중들은 대개 ‘베드씬을 잘 찍는 능력’이라고 비웃곤 한다.
하지만 10년은 물론 20년을 이어온 작품마저 존재하는 미국의 소프 오페라 시장에 남미 출신 감독이 쉬이 진입할 수 있었던 건 그 나름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의 트랜지션은 무척 독특해.”
언젠가 이현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트랜지션이란 간단히 말해 장면 전환이다. 디졸브, 페이드, 커트 등으로 씬에서 다른 씬으로 연결하는 그 자체를 일컫는다.
디에고는 조금 저어했다.
“···그런 얘긴 처음 듣는군.”
“아니야.”
그리고 이현석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콘티뉴이티에 매달리지 않고 진부한 아이라인 매치나 팔로우 포커스에 집착하지 않지 않나? 심지어는 대담한 크로스 커팅도 서슴지 않지. 정말 훌륭한 연출이야.”
말인즉슨 사건의 연속성에 매달리지 않고 움직이는 피사체나 그 시야를 따라가는 데 집착하지 않으며 생뚱맞은 교차편집도 서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세간에선 그렇게 촬영된 영상을 보통 개막장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현석 역시 같은 의미로 말한 것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존중의 뜻이 듬뿍 담겨있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달랐다.
생각을 끝낸 디에고가 진지하게 말했다.
“일찍이 현석이 그렇게 말한 건 내게 무언가 보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물론 아니었다. 완벽한 헛다리였다.
“아마 내 최고의 장기가 그거라고 본 거겠지.”
어느 쪽이냐면 최대의 단점이었다.
“그렇다면 간단하지. 거기에 현석이 했듯 혼을 실으면 시청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거야.”
끝내는 정신 나간 결론이 나왔다. 전제부터가 정신이 나갔으니 당연했다.
디에고란 사람이 본래 그리 바보가 아니건만 이현석과 얽히자 그만 정신이 흐려지고 만 것이었다.
“음······.”
“···그런 건가?”
하지만 오른팔인 알렉스를 포함해 당연히 이걸 뜯어말려야 할 주변도 그리 능동적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원작인 『연극처럼 살다』부터가 시놉만 따보면 심히 맛이 간 물건이 아니었던가?
그런 게 히트하는 괴상한 상황이고 보니 슬프게도 다들 스스로의 판단력을 믿을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연극처럼 살다』 프리퀄 4화는 그렇게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상태로 나가게 되었다.
물론 설정에도 변함은 없었다. 여전히 한지원 – 갓난아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이 나간 후, 시청자들은 그런 건 개의치 않아했다.
「적습입니다, 사령관. 적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4화에 이르러 벌칸 문명은 비로소 뒤로는 태양의 폭주, 앞으로는 외세의 위협에 따른 내우외환에 직면했다.
시작은 외곽을 맡고 있던 함대 사령관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후퇴한다면 모성까지는 일직선이다. 적어도 원정 함대들이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은 벌어야 한다.」
「그것은······.」
「돌아갈 이는 잡지 않도록 하지.」
디에고는 이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수십 번의 리테이크를 거듭했다.
감독이 진지해지자 자연히 배우도 진지해졌고 결국은 제법 볼만한 씬이 나왔다.
하지만 더욱 볼만한 건 이후의 장면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후의 카메라의 움직임은 가히 천변만화에 가까운 것이었다.
초점도 없고, 중심도 없었으며, 정신없는 클로즈업과 초점 거리를 무시한 팔로우 샷이 난무했다.
연출만으로 보면 옛날 캣우먼이 농구하던 씬이 차라리 귀엽게 보일 수준.
하지만, 이 문제가 많은 연출도 힘이 거하게 들어가고 상황마저 따라주자 일종의 영상미가 되었다.
특히나 지난 3화간 나름 비중 있게 등장하던 이들이 마구잡이로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3분함대 사령관과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런, 이제 소문을 퍼뜨려줄 친구도 없게 되었군.」
사령관은 전선에서 머무르며 계속 지시를 내렸다.
초계가 꺾이고, 본대가 차례로 꺾이고, 예비대마저 꺾이고, 끝내 기함 내에 적이 몰려온 상황에서도 사령관은 계속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복을 권합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합니다.」
「거절하지.」
「···실로 어리석군요.」
「어리석을 수밖에.」
함장이 껄껄 웃었다.
「그거 아나? 저기 안쪽 모성에 내 딸이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 장난스런 한 마디가 그의 유언이 되었다.
비슷한 상황이 사방에서 반복되었다.
숨 막히는 장면의 전환이 반복되는 가운데 한지원의 친부는 더 이상 막장스런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비장함을 키우는 무언가였다.
“맙소사!”
4화가 마무리된 후 시청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렸다.
“이건 정말로 로드리게즈가 아니잖아!”
“제기랄, 내가 『은하의 체스게임』을 잘못 틀기라도 했나?”
뒤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밀어붙이면 가끔은 천금을 얻는다.
이미 어디의 두 사람이 실증한 바 있는 결과물이었다.
#
세상은 언제나 이럴 리가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 오늘은 좀 뼈아팠다.
“···오, 그렇습니까.”
“······음, 그렇군요.”
나는 멍하니 로이드 감독과의 통화를 끝냈다. 무어라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끊기가 무섭게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전부 내가 조언해준 덕이라고 감사를 표하는 디에고의 전화였다.
도대체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적당히 끊어버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금 전화가 울렸다. 1화 방영 당시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열기였다.
이도나의 전화를 마저 수신거부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또 망한 모양이었다.
[기운 내라. 늘 있던 일이잖냐.]김철 선배가 반쯤 득도한 태도로 위로했다.
[결국 너나 나나 거기서 거기인 게지.]“······.”
물론 쓸데없는 헛소리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메시지 창. 그리고 보면 왜 메시지가 표시되지 않은 거지?
얼른 보니 표시는 되어 있었다.
『’연극처럼 살다 – The Fall of Vulcan’ 4화의 방영이 종료되었습니다. 연동 결과를 집계합니다······.』
『사용자의 정신건강을 위해 임시로 막장도를 표시하지 않습니다.』
『굳이 확인하고 싶다면 요청해주시기 바랍니다.』
“······.”
···거 친절하기도 하시군.
내가 머리를 짚고 있자 같이 있던 박진태가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그로서는 상황이 잘 풀리는데 왜 궁상을 떠는지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자 박진태가 헛기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저, 대표님. 유지아 작가님 건으로 괜찮은 과외선생을 하나 찾았습니다.”
“···그렇습니까.”
불쾌한 기분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정도의 소식이었다. 한시가 급한 일이었으니까.
내가 반응을 보이자 박진태가 얼른 말을 이었다.
“지인을 통해 아는 사이인데 꽤 믿을만한 청년입니다. 학교도 잘 나왔고, 무엇보다 입이 무겁습니다.”
마지막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까?”
“아니오. 지금은 『연예투데이』라고 작은 신문사에 다니고 있는데, 마땅치가 않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고 슬쩍 말을 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근 사태에 MBS 쪽의 압력이 있었다고 우리 쪽에 익명으로 알려준 친구 같습니다.”
흠.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되묻는 대신 자세를 고쳤다.
“이름은 뭐라고 합니까?”
“강성재라고 합니다.”
어째 익숙한 어감이었다.
···뭐, 흔한 이름이긴 한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