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87)
옛날 학창시절 들은 얘기가 있다.
한 사람당 백 명씩의 지인이 있다고 한다면 다섯 단계만 걸치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알고도 남는다고.
물론 서로 그 백 명이 전혀 겹치지 않아야 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 정도로 세상이 좁을 수 있다는 비유일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 그걸 무척이나 절절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성재라고 합니다!”
“······.”
눈앞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지아의 예비 과외선생을 보며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진짜냐.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이 녀석이냐.
[얘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김철 선배는 한동안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 녀석 네 처남 아니냐?]‘···지금은 아니죠.’
나는 머리를 짚었다.
말이 되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확률이 이 모양이야.
내 태도가 영 언짢아보였는지 처남··· 강성재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옆에 있던 박진태도 조심스러운 어조가 되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지병인 두통이 좀······.”
적당히 갖다 댄 말이었지만 빈도를 생각하면 슬슬 지병이라고 칭해도 충분한 수준이 아닐까 싶다.
고개를 돌려 사무실 한쪽을 보았다. 적당히 뒹굴거리던 한유미가 눈썹을 추켜올리고 있었다.
실제 면식이 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기묘한 조합이 완성되었다.
음······.
나는 애써 할 말을 찾았다.
“반갑습니다. 어떻게 오시게 되셨습니까?”
되는 대로 내뱉다보니 어째 입사 면접에서나 나올 것 같은 말이 되었다. 하지만 강성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이현석 피디님을 크게 존경해왔기 때문입니다!”
영 핀트가 어긋난 소리였다.
“절 가르치시는 게 아닐 텐데요.”
“아, 물론 유지아 작가님께도 몹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내가 지적하자 허둥지둥 덧붙인다.
···뭐, 딱히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겠지.
힐끔거리며 한유미 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약간 복잡해 보인다. 정작 본인은 흥미를 잃은 듯 TV로 시선을 돌린지 오래였지만.
대화가 이어지며 나도 어찌어찌 마음을 정리했다.
“저로서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본인부터 만나보시죠.”
“감사합니다!”
사감을 떠나 강성재가 믿을만한 인물이라는 건 잘 아는 바였다. 예전에 공부 잘 했다는 소리는 허세로 넘겼었지만.
이야기가 잘 풀리는 기색이자 박진태도 금세 웃는 낯이 되었다.
각자 커피 한 잔씩을 비운 대화가 끝나고, 박진태 부사장은 배웅차 강성재를 데리고 나갔다. 사무실에는 자연히 나와 한유미 둘만이 남게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마.]그리고 김철 선배는 늘 그랬듯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났다. 여전히 한유미가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이내 한유미가 지나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의외의 인물이었네요.”
내 말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세상 참 좁다 싶습니다··· 혹 면식이 있으십니까?”
나로서는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한유미는 어째 조금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그럭저럭이요.”
“그럭저럭? 자칭 제 처형 아니셨습니까?”
한유미가 틈을 보이는 건 꽤 드문 경우라 나는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한유미가 읽기 어려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도 나중에 공채에 합격하는 건 알아요.”
···뭐, 그럼 다 아는 거지.
재미없는 심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방금 이 사람, 공채라고 한 건가?
···뭐, 잘 모르는 사람은 착각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넘어가려던 찰나 한유미가 덧붙였다.
“그리고 피디님하고 같은 부서에서 같은 일을 하게 되는 것도요.”
“······.”
나는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이제 문제가 두 개가 되었다.
첫째. 강성재는 소위 경채라 불리는 경력경쟁채용시험으로 들어온 케이스다. 여기까지는 보통 사람은 잘 모르니 착각할 여지가 있다.
둘째. 강성재와 나는 일단 같은 팀 소속이긴 했지만 하는 일은 전혀 겹치지 않았다.
자칭 처형에 회귀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하나면 모를까 두 가지를 동시에 착각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피디님?”
“아니, 아닙니다.”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가능성은 많았다. 가령 잘 모르는데 괜히 불끈해서 되는 대로 이야기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진지하게 따지자면 이쪽이 현실적이겠지.
하지만 순간 내 생각이 닿은 건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분명,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나는 그런 대화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상대가 눈앞의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당연히 우연으로 여기고 가위표를 치고 넘어가야 할 상황. 하지만 내게는 문득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 떠올랐다.
“···얘기를 좀 돌립시다.”
하지만 회귀니 뭐니하는 이 상황부터가 애초에 말이 안 되었다. 어차피 단서가 없는 지금 빈칸을 지워가는 면에서라도 시도할 가치는 있었다.
나는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그··· 설이 말입니다.”
“이설 씨요?”
“요즘 좀, 그렇지 않습니까?”
밑도 끝도 없이 생뚱맞은 전환이었다.
한유미가 눈을 깜박였다. 한동안 의아한 태도다가 이내 빙그레 웃는다.
“전 잘 모르겠던데··· 어디가요?”
흠.
나는 강도를 더욱 올렸다.
“이도나 씨 말씀이, 많이 건방지다더군요.”
“예···에?”
“뭔가 기분 나쁘다고도.”
“그······.”
“아, 하는 짓이 사시사철 연기에 여우꼬리가 열 개는 달려있으니 믿지 말라고도 하더군요.”
나는 이도나를 팔아 신나게 노골적인 뒷담을 까기 시작했다.
뭐, 전부 실제로 한 말이니 별로 미안하진 않았다. 이설이 아니라 눈앞의 처자를 상대로 한 말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한유미가 입꼬리를 올렸다. 한껏 얼어붙은 웃음이었다.
“피디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짐짓 심드렁한 체 말했다.
“뭐, 적당히 흘려듣고 있습니다만··· 저와 도나 씨는 친구니까요. 아무래도 그쪽 의견에 약간씩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더군요.”
‘도나 씨’에 ‘친구’라는 호칭을 발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자폭한 만큼 한유미도 적잖은 타격이 있어 보였다.
“친구요? 이도나 선배님과요?”
“뭐, 그렇게 됐습니다.”
“저··· 그럼 설이 씨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솔직히 좀 애매한 사이 아닙니까.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
한유미는 망연자실하게 굳었다.
이후로도 나는 내 추측이 틀렸다면 설이한테 석고대죄라도 할 각오로 열심히 뒷담을 까댔다.
그걸 한유미는 무어라 말도 못하고 듣고 있었다.
열심히 되는 대로 주워섬긴 내가 말했다.
“그래서, 유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그게요, 감독님.”
한유미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호칭이 ‘감독님’이 되었다.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그··· 이도나 선배님이 감독님 이상형인 건 알지만요. 그분 이야기는 조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
쓸데없는 정보가 하나 더 나왔다.
이후 더듬더듬 나오는 이야기를 나는 적당히 흘려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도 이도나는 내 이상형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착각할 만한 사람이 딱 두 명 있다.
그리고 눈앞의 녀석은 수염 난 촬영감독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우연이나 착각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아 미간을 꾹꾹 눌렀다.
삽시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말이 되냐,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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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어? 세상에 그 인간이 말이야!”
한편 배우 홍지호 역시 한껏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가 진저리난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 그래. 지금 열 번은 들었어. 이 피디님이 ‘지금까지 봤던 모든 연기 중 가장 좋았습니다’, 했다는 거.”
홍지호가 제법 그럴듯하게 흉내 내자 이도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까지’라고 했다니까. 너 제대로 들은 거 맞아?”
“······.”
토를 달았다가는 또다시 일장연설을 들을 분위기라 홍지호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요즈음 이도나의 들뜬 모습은 오랜 사이인 홍지호조차 조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홍지호는 고개를 젓고는 휴게실 벽에 걸린 TV로 시선을 올렸다.
「죽는 건 꽤 지루한 일이군. 두 번은 못 해먹겠어.」
화면 속 벌칸인이 유언을 남기고 있었다.
『연극처럼』 프리퀄 4화는 전체적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특히 저 장면은 이름 있는 배우의 연기력 덕에 킬링 포인트로 꼽히는 대목이었다.
“잘 하네.”
“그렇네.”
홍지호는 다시금 보면서도 감탄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도나는 담담했다.
“하지만 내가 더 나아.”
홍지호는 입을 닫았다.
늘 하던 자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쉬이 비꼬아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의 그는 24화 촬영 당시의 이도나를 상대로 압도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홍지호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뭐, 『연구일지』를 찍으려고 쫓아다닌 보람이 있어서 잘 됐네.”
“흥.”
이도나는 작게 코웃음을 친 뒤 이내 불평을 늘어놓았다.
“근데 이 망할 인간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나 잘났다고 해주기가 그렇게 배알이 꼴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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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땠어? 24화.”
서예린이 물었다.
『연구일지 속 보석함』의 방영이 시작한 이후, 그녀는 종종 제 고모에게 감상을 묻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평소의 조마조마한 느낌 대신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다.
서수현은 조카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마지못한 태도로 말했다.
“···뭐, 나쁘지는 않았지.”
서예린이 얼굴을 돌려 그 시선을 쫓아갔다.
“부럽지?”
“···뭐가?”
“고모는 이 피디님 없잖아.”
“······.”
진심으로 자랑하고 있는 표정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조카는 최근 심히 맛이 가기 시작하고 말았다.
하지만 작가 서수현은 타박을 하는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욕심을 부렸어.’
그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적어도 예린이한테는 내가 조금이나마 남아있었으면 했는데··· 잔인한 일이었지.’
조카의 저런 웃음을 본 게 얼마만이던가. 적어도 이현석이라는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얼굴을 생각하자 서수현은 다시금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보니 그놈은 왜 안 왔어?”
“이 피디님은 요즘 바쁘셔.”
“바빠도 시간을 내서 오게 해야지.”
서예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하는 표정이다.
서수현은 작게 혀를 찼다. 이런 것까지 닮지 않아도 될 텐데.
조만간 방송국에 한번 찾아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KBC나 MBS는 자주 들락거렸어도 SBC는 꽤 간만이다.
‘그나저나 MBS 하니 하루살이 같은 놈이 하나 있었지.’
서수현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장연철이라고 했던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