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90)
『에어리즈』의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후, 나는 곧장 서예린 작가를 찾았다.
“강아라? 에어리즈 막내인 그 아라 씨 말인가요?”
“예. 어떨까요, 그 배역에?”
서예린 작가는 약간 뜬금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만큼 별 비중이 없는 역할이기도 했다.
“뭐, 괜찮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전에 오디션에서도 나쁘지 않았는데 본인이 고사했던 거고요.”
“그럼 진행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를 끝내고 낸 후, 다음.
“으음.”
나는 사이토 놈의 원고를 넘겨보며 침음을 삼켰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번엔 반대로 서예린 작가가 물었다.
대표로서의 자격은 조금 부족했지만쓴 장본인은 얼어있고 그 누나는 드물게 정서불안이라도 온 것 같은 모습이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뭐, 나쁘지 않군요.”
“감사합니다, 이현석 피디님!”
사이토 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 모습이 꽤나 아니꼽긴 했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결과물에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야기는 지구방위군 EDF에 소속된 한 병사가 화자가 되어 주변을 그리며 전개되고 있었다.
지구에서 한지원이 살아온 삶, 타인의 눈에 비친 한지원과 정하늘의 관계 등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는 느낌이 꽤 신선했다.
동시에 본편에서는 그릴 수 없어 파기된 소재며 에피소드들을 대폭 차용하고 있는 것 역시 흥미롭게 느껴지는 점이었다.
다만.
나는 원고를 덮으며 결론을 내렸다.
“이건 말 그대로 팬픽션이군요.”
“···예.”
“오해하진 마십시오. 딱히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물론 딱히 좋은 의미도 아니지만.
작가 본인은 뒤에 삼킨 말을 잘 알아들은 눈치였다.
한 작품의 팬으로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이,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기쁠까를 생각하고 정신없이 써내려간 느낌이라고 할까.
“···저로서는 문제가 될 만 한 점을 수정해서 인터넷에 익명으로라도 공개했으면 합니다.”
시라카와 리카 프로듀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홍보효과도 거둘 수 있을 테고.”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못 내보낼 거 다 커트해버리면 제대로 된 내용이 안 남아요.”
“······.”
이 글의 기반에는 이전 서예린 작가가 풀어내 설명한 뒷설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다.
이걸 철저하게 솎아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얘기다. 약간이라도 남았다가는 공식이 2차 창작을 따라간다는 불명예스러운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고.
내가 단칼에 자르자 두 남매는 몹시 시무룩해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서 작가님은 이걸 그대로 폐기하는 건 아깝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아 너도?”
서예린 작가가 어려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 역시 열성적으로 손을 들며 자기주장에 나섰다.
···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토리 자체는 영상화하기 참 좋게 짜여지긴 했는데.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김철 선배가 입을 떡 벌렸다.
[진심이냐, 현석아? 여기서 더 시리즈를 늘릴 생각이냐?]‘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저 아직 안 미쳤습니다.’
김철 선배의 말대로 그럴 여유는 없다.
아니, 나는 반대로 어떻게든 『연구일지』를 잘 끝낸 뒤 이 지옥 같은 프랜차이즈에서 탈출할지의 계획을 짜고 있는 형편이었다.
‘적어도 현 『연극처럼』 세계관에서는 뭘 만들어도 막장도 90퍼센트를 찍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기분이 듭니다.’
[지금 시청자들 반응으로 미루어 보면 아마 그렇겠지.]김철 선배도 한숨을 쉬며 동의했다.
따라서 내 세 번째 작품은 서예린 작가나 지아는 물론 이설 등과도 철저히 거리를 둔 완전한 신작이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이 나와 선배가 함께 내린 결론이었다.
···뭐, 그렇다면 사실 눈앞의 원고를 가지고 크게 고민할 필요도 없긴 했다.
내가 말했다.
“뭐, 그러면 아예 작정하고 늘려보지 그러십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서 작가님이랑 지아가 본격적으로 검수 맡으시고 제대로 된 외전격 작품으로 만드는 거죠.”
나로서는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어차피 영상화가 아닌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을 테고, 작가 둘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딱 거기까지의 생각.
“······.”
하지만 어째선지 내 말에 두 작가는 가만히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 후 서예린 작가가 입을 열었다. 무어라 해석하기 힘든 묘한 표정이었다.
“기사도 같이 낼 생각이신가요?”
“뭐,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어요. 드디어군요.”
나는 눈을 끔벅였다.
뭐가?
하지만 내가 내뱉은 말인데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한 건 나뿐인 모양이었다.
서예린 작가는 빙그레 웃었고 지아는 눈을 빛냈고 사이토 놈은 콧김을 뿜었다.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시라카와 리카 프로듀서는 희미한 미소로 축하를 건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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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지.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냥 별 것 아닌 기사거리 하나 던져줬을 뿐인데 떡밥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연구일지 속 보석함』 서예린 작가, 예정되었던 ‘이현석 사단’ 합류.
▶『연극처럼』 세계관을 아우르는 대규모 외전작 발매 예정! 미디어믹스의 시작은 책으로부터.
▶이현석 감독의 위즈톤 엔터테인먼트의 본격적인 출사표. 서예린, 유지아 작가 콤비에 더해 새로운 작가진도?
▶업계 관계자 ‘사실상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밝힌 것’ 귀띔, 유례없는 국산 대규모 프랜차이즈의 시발점 되나?
“결국 본색을 드러내셨네.”
이도나가 기사와 그 아래에 폭발적으로 달린 댓글을 보며 혼잣말로 비꼬았다.
“그렇게까지 자기 회사는 연예기획사지 다른 뜻은 없다고 눈 가리고 아웅하시더만, 벌써 질리셨나?”
“큭······!”
“···아니, 그렇게까지 분한 척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
나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숙였다. 망할 기자 놈들! 멋대로 헛소리를 지껄여대기는······!
독립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걸 바란다는 거냐.
난 그냥 평범하게 모두가 막장이라고 욕하며 보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이토록 지나친 과욕이란 말인가?
두통이 났다.
요즘 들어서는 흔한 증상이지만 오늘은 좀 심했다. 약한 감기기라도 있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이도나의 표정이 변했다.
“이봐요, 진짜 어디 아파요?”
“···아닙니다.”
“아닌 얼굴이 아니잖아요.”
이도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병원 가봤어요? 검사 받아봤어요?”
“멀쩡합니다. 적어도 저번 촬영 때 이도나 씨보단 나아요.”
“이봐요. 저는 철저한 자기관리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한 거예요. 그쪽처럼 주먹구구식으로 구는 게 아니라.”
내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별 것 아닌 감깁니다. 적당히 가서 의상이나······.”
“감기 무시하지 마세요.”
순간 이도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멍청하게 굴면 감기 따위에도 사람은 죽어요. 정신 차려요, 이현석 씨.”
드물 정도로 진지한 표정이라 나는 잠시 멍해졌다.
“아, 이현석 피디님!”
“···뭐, 병원 가기 전에 쟤 좀 내 시야 밖으로 치워주고 가시면 무척 고맙겠는데요.”
하지만 이내 눈의 착각이었던 양 본래의 재수 없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멀찍이서 설유미 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고 계셨다.
“아, 이도나 선배님도 계셨네요. 안녕하셨어요?”
“안녕했지. 네가 오기 전까지는.”
이도나가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친분이 없는 타인에게는 어느 정도 자제하는 그녀의 특성상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간만의 로케이션 촬영이네요.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물론 한유미는 아랑곳하지 않는 마이페이스다.
언제나의 일이다.
“마침 잘 됐군요. 두 분께 소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이진’ 역의 배우가 정해졌습니다.”
“···뭐, 별로 누구든 상관없지만 제대로 고른 거 맞아요?”
이도나가 불평했다. 누구든 상관없다면서 불평하는 건 뭔지 모르겠다.
“나이가 어리면서도 정하늘에 대해 꽤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역인데 그렇게 빨리······.”
이도나의 말이 멎었다. 내 뒤에서 쭈뼛쭈뼛 다가온 소녀가 고개를 90도로 푹 숙인 까닭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에어리즈』의 아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그래요.”
기합이 한껏 들어간 인사에 이도나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든 강아라가 조금 어색한 얼굴로 눈을 돌렸다.
“그··· 유미 언니도 오랜만이야.”
“응, 그러네.”
한유미는 살짝 놀란 기색으로 온화하게 웃었다.
“그간 잘 지냈어?”
“···응.”
하지만 줄곧 얼굴을 주시하고 있던 나는 처음, 아주 잠시나마 표정이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뭐, 언제까지 저럴 수 있나 보자.
강아라와 조금 이야기를 나눠본 이도나는 금세 태도가 풀어졌다.
강아라가 제 언니와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목소리를 살짝 죽이고 내게 속삭인다.
“솔직하고 좋은 애네요. 제 언니하고는 다르게.”
“···그렇게 보이십니까?”
내 말에 이도나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애매한 반응이에요? 유지아 작가님 관련해서는 맨날 질릴 정도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주제에.”
“지아는 그래도 됩니다.”
“그건 그렇지만요··· 아니, 가끔 생각하는데 암만 봐도 그쪽이 나에 대해 나쁜 인상을 불어넣고 있는 거 아니에요?”
“네?”
“아무리 그래도 유 작가님 나 너무 피하잖아요.”
“···자기나 좀 돌아보십시오. 걸어 다니는 조커가 뭐라는지 원.”
내가 한숨을 내쉬자 이도나의 눈이 험악해졌다.
“지금 지껄이면 단줄 알아요? 그럼 댁은 걸어 다니는 마이클 매드슨······!”
“바봅니까? 마이클 매드슨은 원래 걸어 다닙니다.”
내가 대놓고 비웃자 험악하던 눈은 이내 살벌하게까지 변했다.
강아라는 유치하게 투닥거리는 나와 이도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꽤나 기묘한 얼굴이었다.
“늘 이래, 언니?”
“···응.”
이도나는 스태프의 부름에 분장차로 향하면서도 언성을 높여 나와 입씨름을 이어갔다.
···뭐, 이것도 언제나의 일이다.
나는 헛기침을 한 후 강아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한테만 저러는 거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나저나 유미 씨랑은 간만이시죠?”
“···예.”
온화하게 웃고 있는 한유미와는 달리 강아라는 여전히 어색한 태도였다. 이미 짐작했던 일이라 나는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설이··· 이설 씨가 오늘 일정이 없어서 유감이군요.”
왠지는 모르지만 한유미 씨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신기하기도 해라.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한 번도 면식이 없으셨죠?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 예······.”
강아라는 미적지근한 태도였다. 나는 짐짓 턱을 괴었다.
“흠, 이설 씨 별로 안 좋아하십니까?”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뭐, 조금 어려운 성격이긴 하죠.”
우물쭈물한 태도에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아무래도 꽤 뿌리 깊은 감정이었던 모양이다.
“이설 씨가 조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구석이 있으니까요.”
“맞아요! 뒤에서 호박씨 엄청 깔 것 같은······! 아.”
강아라는 반사적으로 맞장구를 치다가 이내 하얗게 질려 눈치를 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표현법이 많이 안 좋았던 거 아시죠?”
“···네, 죄송합니다.”
“기회 되면 본인에게 사과하십시오.”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내가 어조를 바꿨다.
“하지만 뭐, 확실히 이설 씨에게 그런 건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뭔가 혼자 의미심장한 척은 다 하려는 성격이라고 할까.”
“······.”
“그런 주제에 결국은 혼자 헛다리짚고 땅 파다가 끝날 것 같은 모양새라고 할까.”
강아라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다시금 무어라 입을 열려다 간신히 꾹 틀어막고 귀를 쫑긋 세운다.
반면 우리의 한유미 씨는 어쩐지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는 모양새다.
···조금 재밌는데, 이거?
그렇게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적당히 누구씨를 놀려먹던 중이었다.
갑자기 멀찍이 있던 스태프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지?
“선배님!”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찰나 멀찍이서 정수아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하지만 그 녀석이 입을 여는 것보다 의외의 인물이 모습을 비춘 게 더 빨랐다.
그는 멀찍이서 소탈하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꽤나 익숙한 얼굴이지만, 암만 봐도 여기 있어야 할 인물은 아니었다.
“간만이구만, 이 피디. 잘 하고 있나?”
나는 눈을 끔벅였다.
“···최도정 사장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