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Baby Runs A Romance Fantasy With Cash RAW novel - Chapter (103)
아기님 캐시로 로판 달린다-103화(103/353)
☆ 제104화 ☆
“이번 경연의 주제가 다소 무겁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서북 지역의 식량 부족은 영애들도 잘 알고 있을 게야.”
황후의 말에 영애들은 당황을 수습하며 입을 다물었다.
“제국민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깊게 숙고하는 자야말로 차세대 사교계를 이끌어갈 재원이라고 생각했네.”
황후는 심각해진 영애들을 바라보더니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너무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나. 어디 한 번 영애들의 생각이 들어보고 싶어서 그런 게니.”
황후가 체시아 백작을 바라보자 그가 앞으로 나섰다.
“서북 지방의 각 영지에서는 춘궁기마다 어려움을 읍소해왔습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구휼미를 베풀어 제국민의 배를 채우셨죠.”
‘그래, 그게 벌써 삼 년째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도 아니고 황실에서는 슬슬 다른 대책을 세우고 싶을 거다.
하지만 체시아 백작은 그에 관한 말은 일절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구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서북의 백성들이 평온할 수 있을지 폐하께선 영애들의 의견이 듣고 싶다 하십니다.”
그 말에 영애들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자신이 굶고 있는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영애들은 딜루쿨롬 홀부터 레포시토리움 도서관까지 자유롭게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레포시토리움 도서관은 황궁 외궁에 있는 도서관 중 하나였다.
‘아하, 그래서 외부인을 차단했구나.’
오늘은 황궁 외궁에 새벽 축제 참가자 외에 출입 금지라고 해서 나 혼자서 입궁했다.
원래는 항상 오빠들이나 아빠가 황궁까지 바래다주곤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영애들과 얼마든지 자유롭게 토론해도 좋습니다. 토론의 결과로 의견이 같아질 수도 있고 아예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겠죠?”
그 말에 한 영애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똑같은 의견을 내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요?”
“같은 의견이어도 어떻게 표현하느냐, 어떤 깊이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겠지요.”
체시아 백작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어 말했다.
“토론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되 의견은 오롯이 혼자 작성하는 게 서로에게 좋겠죠?”
‘과연.’
나는 감탄했다.
저렇게 되면 정말로 좋은 의견은 토론할 때 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아직 혈기 왕성한 영애들은 이야기하다가 이기고 싶은 마음에 가장 중요한 의견도 홀랑 말해버릴 수 있다.
때로는 자신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정보가 다른 사람에게는 커다란 힌트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입장과 정보를 최대한 숨기면서 상대의 의견을 얼마나 간파하느냐가 중요하겠지.’
그저 구휼에 관한 의견을 듣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사교술까지 확실하게 평가하겠다는 거구나.
물론 자유 토론의 이면에 담긴 뜻을 아예 모르는 영애들이 대다수였다.
오히려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다니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영애들이 넘쳐났으니까.
‘이런 방식을 누가 결정한 것인지는 몰라도 꽤 머리가 돌아가는 자야.’
“각자 의견을 적어 5시까지 제출하면 됩니다.”
체시아 백작이 미소 지으며 물러나자, 황후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럼 영애들의 활약을 기대 하겠네.”
황후와 황태후가 자리를 뜨자 다들 웅성거리며 이번 경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경합보다 다른 것이 들어왔다.
‘황태후는 나서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격려의 말이라도 한 번 할 법 한데 이상하다.
‘황궁에서 입지가 그만큼 약하다는 걸까?’
문을 나서는 황태후의 뒷모습을 힐끔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황태후가 슬쩍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황태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언제 뒤돌아봤냐는 듯 방을 나갔다.
“…….”
아무리 생각해도 위축된 채 앞으로 나서지도 못하는 자의 미소가 아니었다.
‘본선에 진출하고는 황족들과 만날 기회가 많으니까 좀 더 살펴봐야겠어.’
새벽 축제에 우승하는 것도 우승하는 거지만, 내가 사교계에 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지 않던가.
‘누가 적인지, 누가 협력할 수 있는 자인지 구별해야지.’
“으으, 전 구휼이 주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어쩌죠?”
자스민이 울상인 얼굴로 말하자 다른 영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알았겠어요. 정말 당황스럽네요.”
“그런데 티리엘 영애는 좀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아, 별건 아니고……. 지난번 흑사병을 겪으면서 영지에 어려움이 있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거든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부끄러운 듯 말하는 티리엘을 보니 아데르센 영지의 미래가 밝다는 게 느껴졌다.
“와, 티리엘 영애 정말 대단하세요.”
“고, 공녀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티리엘 영애가 수줍게 웃었다.
“저는 일단 도서관부터 가야겠어요.”
“저도요.”
“루아티샤 공녀님은요?”
“아, 저는 딱히 도서관에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다녀오세요.”
“그래요, 그럼 이따 뵈어요.”
영애들은 조금 아쉬워하면서도 서둘러 도서관으로 갔다.
홀에 있던 영애들 대다수도 마찬가지로 도서관으로 갔다.
아무래도 역대 구휼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자료를 찾아보고, 그에 대해 토의한 다음 답을 쓸 생각인 듯했다.
‘아무래도 그게 정석적인 방법이지.’
홀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미첼로인 영애와 포셰트 영애 그리고 나뿐이었다.
“파에라톤 공녀께서는 도서관에 가지 않으실 건가 봐요?”
미첼로인 영애가 내게 말을 걸었다.
“지금으로선 생각이 없네요. 미첼로인 영애께서는…… 딱히 가실 필요 없겠군요. 방대한 자료가 머릿속에 들어있을 테니. 구휼에 대한 생각도 이미 해보셨을 거고요.”
미첼로인 영애가 미소 지었다.
“확신에 차서 말씀하시네요. 저를 이렇게 인정하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저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으니까.”
“숨어 있다고 해서 그 반짝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눈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죠.”
미첼로인 영애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공녀께서 이전에 제 가문을 끌어들이신 것, 저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공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더라도 공녀의 말에 동조할 거라고 예상했던 거죠?”
나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미첼로인 영애는 나를 보고 마주 미소 지었다.
“꽤 흥미로운 전략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수준 낮은 말싸움을 하는 멍청한 작자들보다 상황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낫더라고요.”
“영애께서 이용당한 거였어도요?”
“저 역시 그 상황의 일부였으니까.”
미첼로인 영애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쿨하게 말했다.
알림창 덕분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신선했다.
“본선에서 잘 부탁드려요.”
미첼로인 영애가 악수를 청해서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짧은 악수 후, 미첼로인 영애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뭔가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나는 묘한 기분으로 빈손을 바라보았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갑자기 들린 커다란 목소리에 옆을 보자 포셰트 영애가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부르르 떨고 있었다.
“왜 쟤랑 라이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거야! 내가 있는데!”
“아니, 딱히 라이벌 분위기는……. 그냥 악수 한 번 했을 뿐인데.”
하지만 포셰트 영애는 분해 죽겠다는 듯 “이익!”하고 진저리치더니 이미 사라진 미첼로인 영애 쪽을 노려봤다.
“나랑도 악수해!”
박력 있게 척, 손을 내밀어서 나는 잠자코 손을 맞잡았다.
나이가 있는 미첼로인 영애에 비해 나랑 동갑인 포셰트 영애의 손은 쪼꼬미였다.
“너도 지금쯤이면 나의 대단함을 알았겠지!”
악수하고 기분이 좋아진 건지 포셰트 영애가 당당하게 외쳤다.
“두고 봐! 내가 진짜 진짜 멋진 답을 써서 서북부 사람들을 구해버릴 테니까!”
“응, 그래. 기대할게.”
“좋아!”
포셰트 영애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고 나니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
“…….”
“안 가?”
미첼로인 영애처럼 퇴장할 줄 알았는데.
“나는 도망치지 않아! 너랑 정면 승부다!”
조금 귀엽기도 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가 일어났다.
포셰트 영애가 졸졸 나를 쫓아왔다.
나는 정원으로 나가 볕 잘 드는 명당에 누워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포셰트 영애는 내 옆에 앉아서 빈 종이를 펼쳐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선이 힐끗힐끗 날 향하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 분도 안 됐을 텐데 결국 포셰트 영애는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뭐야, 너 답 안 써? 벌써 포기야? 그럼 진짜 실망이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좀 정리하려고.”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봄바람이 산들산들 이마를 간지럽혔다.
‘클라티에가 포셰트 영애를 두고 간 이유가 뭘까.’
구휼 문제에서 포셰트 영애의 의견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남겠다는 포셰트 영애를 그냥 두고 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체시아 백작은 자유롭게 토의해도 좋다고 했다.
‘그 말은 바꿔 말해서, 토의할 때의 태도와 기여도도 보겠다는 거지.’
포셰트 영애는 분명 마구잡이로 의견을 낼 것이다.
그러다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화를 내겠지.
그때 클라티에가 중재하는 역할을 맡으면 큰 점수를 딸 수 있을 거다.
‘다른 건 몰라도 남 이용해 먹는 거엔 잔머리가 잘 굴러가는 클라티에가 그걸 안 써먹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눈을 뜨자 포셰트 영애가 심통 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정말 포기하는 건지 불안한가 보다.
나는 미소 짓곤 다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으로 수만 가지 정보가 떠올랐다.
이게 내가 도서관이 굳이 가지 않는 이유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내 머릿속에 이 많은 정보가 가득하겠는가.
‘다 능력 덕분이지.’
새벽 축제에 참여하면서 설마 아무런 준비도 안 했겠는가.
특히 나는 다른 영애들과 달리 아는 사람 한 명 없는데.
마침 나는 능력〈훗, 저는 천.재.아.기.라고요?〉를 적용 중인 상태였다.
이 능력의 효과는 아주 단순 했다.
‘원하는 정보를 전부 내 머릿 속에 넣어 주지.’
브란테 영애 패거리에게 사이다를 먹일 때, 각 가문의 주요 사업을 줄줄이 꿰고 있었던 것도 다 이 능력 덕분이었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물론 그걸 어떻게 활용하는 지는 전적으로 내게 달렸지만.’
서북부의 사정과 역대 구휼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덕분에 다 꿰고 있다.
‘도서관에 가도 알 수 있는 정보지만. 자료를 일절 참고하지 않았는데, 정확하다는 것도 가산점을 받겠지.’
나는 떠오르는 정보를 차근히 선별하고 그러모은 후,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황제와 황후, 황비와 황태후는 모처럼 한자리에 앉았다.
오늘 영애들이 제출한 구휼에 대한 의견서를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어떤가.”
“어린 영애들의 의견입니다. 그다지 큰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다만 제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기특하군요.”
황후가 눈앞의 의견서를 몇 장 넘겨보며 말했다.
그 말에 황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끔씩 머리 굳은 어른들이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하지요.”
황후가 싸늘한 눈으로 황비를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황비의 말도 일리 있습니다. 하지만 기발한 것은 현실과 동떨어질 때가 많지요. 특히 이번에는 열 살짜리 참가자도 있지 않습니까?”
황후가 포셰트 영애의 의견서를 팔랑팔랑 흔들며 입매를 뒤틀었다.
“이거야 원, ‘내가 세계 최고의 짱짱 부자가 되어서 사람들을 다 도와줄 거다!’같은 수준이군요.”
황제가 껄껄 웃었다.
“그렇게 된다면 제국에 걱정이 없겠군. 하지만 열 살이라고 해도 우습게 볼 순 없지. 포셰트 영애야 그렇다 치고 파에라톤 공녀가 있지 않은가?”
황제의 말에 모두 눈을 빛냈다.
“이 늙은이도 파에라톤 공녀가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그 아이가 똘똘하고 영민한거야 이미 드러난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뿐인지, 파에라톤다운 특출남이 있는지는 오늘 판가름 날 겁니다.”
“이미 흑사병 치료제를 개발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특출남은 증명이 됐지요.”
황비가 공녀의 역성을 들자 황후가 피식 웃었다.
“황비께서는 파에라톤 공녀가 꽤 탐이 나나 봅니다?”
“황후께서도 탐을 내시는 것 같은데요.”
“나야 아들이 있으니 이리 영특한 영애가 있으면 자연히 시선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황비께서는…….”
황후가 말을 흐리며 한쪽 입 꼬리를 틀어 올렸다.
아픈 곳을 쿡 찔러 공격하는 언사에도 황비의 미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테이블 아래 그녀의 손은 창백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자자, 그만들 하시게. 이 늙은이 귀가 민망해지는군. 어쨌든 파에라톤 공녀의 의견서를 보면 결론이 나지 않겠는가?”
그 말이 옳다.
옆에서 분류를 맡던 관료가 재빠르게 파에라톤 공녀의 의견서를 올렸다.
황제와 황후, 황태후와 황비가 모두 의견서를 살펴보았다.
다른 영애들 대다수는 구휼의 배분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의견을 냈다.
확실히 파에라톤 공녀의 의견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있었다.
유통 구조와 재정적으로 구휼미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까지 쓰여 있었으니까.
“흐음……. 분명 좋은 의견이긴 하지만, 짐의 기대가 컸던 것인가.”
황제가 턱을 쓸었다.
“조금 아쉽군.”
“차라리 미첼로인 영애의의견서가 훨씬 낫군요. 미첼로인 영애는 구휼을 통해 살리는 게 아니라 서북부 지역이 자급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서북부 지역과 타지역의 교역에 관해서 기술했지. 조금은 이상론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훌륭했어.”
“……어쩌면 소문처럼 파에라톤 공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치료제를 개발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속단이지요. 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띤다고 해서 다른 분야까지 완벽하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때 관료가 끼어들었다.
“파에라톤 공녀는 도서관에 가지도 않고, 다른 영애들과 토론도 하지 않았습니다.”
“호오? 그건 꽤 흥미롭군. 아무런 참고 자료가 없는데도 이토록 정확한 수치라니. 이걸 다 외우고 있었던 건가?”
“뭐, 어쨌든 그동안의 행적도 충분히 합격선이고 이번 의견서도 다른 영애들에 비하면 뛰어난 편이니, 무난하게 본선에 진출시키도록 하지.”
황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다른 의견서를 더 살펴보던 황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파에라톤 공녀와 똑같은 답안지가 있어요.”
황제는 얼른 그 답안지를 받아들었다.
황태후의 말대로였다.
몇몇 문장만 다를 뿐, 파에라톤 공녀와 완전히 똑같은 의견이 적혀 있었다.
황후가 옆에서 의견서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클라티에 타렌카. 타렌카 영애가 낸 의견서군요.”
황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감히 내가 평가하는 경합에서 이딴 장난질을 치다니! 먼저 제출한 영애는 누군가.”
“타렌카 영애입니다.”
“……그럼 파에라톤 공녀가?”
황비가 굳은 얼굴로 서둘러 입을 열었다.
“속단하긴 이릅니다. 한 번 두 영애를 대질심문해보시죠.”
황제가 진노한 얼굴로 명했다.
“당장 새벽 축제 참가자들을 불러들여라!”
* * *
의견서를 제출한 후, 새벽 축제 참가자들은 모여서 저녁 만찬을 즐겼다.
다들 머리를 쓰느라 배가고 팠는지, 경합이 끝났다는 기쁨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떠들썩했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참가자들이 돌아갈 준비를 하던 때였다.
“영애와 영식들은 모두 조속히 딜루쿨롬 홀로 오십시오.”
체시아 백작이 드물게 굳은 얼굴로 참가자들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지?”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 아니었나?”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딜루쿨롬 홀로 향했다.
그곳에는 딱딱한 표정의 황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즐거워야 할 축제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황제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아무리 토론해서 비슷한 의견이 나왔어도 의견서 자체가 같을 순 없다. 실제로 영애들의 의견서에는 비슷한 논조가 많았지만, 똑같진 않았지.”
이쯤 되자 다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눈치챘다.
부정행위.
소리 없이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그 가운데 황제가 입을 열었다.
“파에라톤 공녀와 타렌카 영애는 앞으로 나오라.”
새벽 축제의 유력한 우승 후보 둘이 거론되자 모두 경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클라티에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앞으로 나가면서 힐끔 루아티샤를 바라보았다.
연둣빛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승리감이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