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Baby Runs A Romance Fantasy With Cash RAW novel - Chapter (121)
아기님 캐시로 로판 달린다-121화(121/353)
☆ 제121화 ☆
“또 만나는군, 공녀.”
고개를 돌리니 에스테반 황자가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 네. 황자 전하께서도 새벽 축제에 참여하시는군요.”
“그래, 황족들은 본선부터 참여 가능하니까.”
“네, 그럼. 새벽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간단히 인사하고 이야기를 끝내려는데 에스테반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가호를 공녀와 함께 받고 싶은데.”
“네?”
“파티에서 공녀와 함께 하는 영광을 주겠나?”
에스테반 황자는 내게 한 손을 내밀며 한쪽 무릎을 굽혔다.
“와…….”
“어머나…….”
“역시 황자 전하께서는 우아하시고 기품 있으셔…….”
흥미진진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음, 별론데.’
내게는 다른 이야기였다.
“루아티샤는 저랑 먼저 이야기 중이었습니다만, 황자 전하.”
“공녀가 파트너 자리에 응한 건 아니었지.”
“전하께서 끼어드시지만 않았어도 응했을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에스테반이 비뚜름한 미소를 머금었다.
“파에라톤 공녀는 새벽 축제에서 가장 촉망받는 레이디야. 참가한 영식들은 모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지. 그런데 날치기하듯 파트너 삼겠다고?”
“가장 먼저 파트너 요청을 하는 게 언제부터 날치기가 되었습니까.”
뭐야.
왜 양쪽에서 난리야?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씹어먹을 듯 노려보는 두 소년을 바라보고 있자니 골이 아파져 왔다.
그때였다.
서늘한 것이 내 손을 부드럽게, 아주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놀라서 몸을 돌리는데一.
“시……드?”
여름 햇빛보다도 더 찬란한 금발.
푸른 빛과 붉은빛이 오묘하게 섞인 보랏빛 눈동자.
길고 우아한 눈매와 오뚝한 코, 도드라진 턱선.
꿈인가, 환상인가 헷갈릴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순간, 소리마저 잦아든 것 같았다.
시드의 눈 안에 담긴 내 모습이 비현실적이었다.
‘왜, 여기…….’
찰나인지, 영겁인지 모르는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한 채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넌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유리되었던 세계를 파삭 깨트렸다.
* * *
갑자기 웬 불청객이 끼어든 것부터 마음에 안 드는데 루아티샤의 반응마저 심상치 않았다.
그걸 확인한 에스테반은 짜증과 분노로 초조했다.
“새벽 축제 참가자 중에서 보지 못한 얼굴인데, 어떻게 들어 왔지?”
그는 부러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내보이며 상대를 꾸짖었다.
“자격 없는 자가 멋대로 들어올 곳이 아니야. 썩 물러가지 못할까!”
에스테반의 호통에도 불청객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서 개가 짖나 하고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에스테반이 태어나서 이런 취급을 당한 건 처음이었다.
“네 녀석이 감히 황자인 나를……!”
“오셨습니까, 황자 전하.”
말을 끊으며 들린 목소리에 에스테반은 미간을 찌푸린 채 옆을 돌아봤다.
그런데 체시아 백작의 고개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 숙여져 있었다.
“……?”
에스테반은 물론이고 딜루쿨룸 홀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는 새벽 축제의 주관을 맡은 체시아 가의 가주, 요하네스라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
마치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이어지는 말.
에스테반을 향한 인사라고 오해할 수 없는 언사였다.
의문이 가득했던 사람들의 얼굴에 서서히 다른 감정이 번지기 시작했다.
쥐 죽은 듯 조용했던 홀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황자?”
“지금 저분한테 황자 전하라고 한 거야?”
“황자 전하는 에스테반 전하 한 분 아니었어?”
아무리 사람들의 충격이 크다고 한들 에스테반 황자가 받은 것만 할까.
“뭐……라고? 체시아 백작, 지금 뭐라…….”
“두 분 전하께서도 오늘 처음 인사 나누시겠군요.”
체시아 백작이 담담하게 소개했다.
“시드리한 전하, 이쪽은 에스테반 전하십니다. 에스테반 전하, 시드리한 전하십니다.”
에스테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 외에 다른 황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심지어 체시아 백작은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이건 자신보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르는 저놈을 더 윗사람 취급한 거다.
“비록 헤어져 있던 시간이 길지만, 두 분 황자 전하의 우애가 시간을 뛰어넘어 깊어지시길 바랍니다.”
에스테반은 당장 체시아 백작의 멱살을 틀어쥐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체시아 백작이 대놓고 저리 구는 것은 분명 아비인 황제의 명일 테니까.
그는 이를 으득 갈며 시드리한을 노려봤다.
에스테반은 황제의 유일무이한 자식으로, 제국의 단 하나뿐인 황자였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다음 황제 위가 자신에게 떨어질 것은 확실하다 여겼다.
후궁전에 황제의 다른 자식들이 있다는 걸 알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경쟁 상대조차 되지 못하는 반편이들이었다.
어디 감히 인지조차 받지 못한 것들이 적통인 자신과 겨룬단 말인가.
그런데.
저 시건방진 녀석은 감히 자신과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피식.
‘저게……!’
눈앞이 벌게진 에스테반이 앞뒤 가리지 않고 시드리한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음, 상황이 복잡해졌네요. 가족 사이에 외부인인 제가 끼는 것도 보기 그렇죠. 저는 이만 빠지도록 할게요.”
파에라톤 공녀의 목소리에 에스테반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시드리한이 어색한 미소를 지은 공녀의 손을 꽉 붙잡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공녀는 그 손을 빼내려고 살짝 흔들었지만, 시드리한은 미동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 시선.
‘뭐야.’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고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에스테반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든 말든, 시드리한은 루아티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주이…….”
루아티샤가 눈을 부릅떠서 시드리한은 작게 웃었다.
“공녀의 파트너 후보에 이름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에스테반이 대번에 끼어들었다.
“내가 먼저 공녀에게 파트너를 청했다. 황족이라면서 예의도 모르는 건가?”
“글쎄, 그쪽이 아까 했던 짓부터 돌아보는 게 좋겠군.”
라파엘의 파트너 요청을 무시하고 에스테반이 끼어든 것을 꼬집는 말이었다.
에스테반은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시드리한을 바라봤다.
그 누가 자신에게 이런 방만한 태도를 취한단 말인가.
“그리고 왜 벌써부터 공녀의 허락을 받은 것처럼 구는 거지?”
“뭐?”
“선택을 하는 사람은 파에라톤 공녀다. 네가 아니라.”
에스테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자이자, 황제의 적장자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을 받길 바란다.
파에라톤 공녀가 아무리 새침하게 군다고 해서 진심으로 자신의 파트너 자리를 거절할 리 없지 않은가.
다음 대 황후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인데.
마치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시드리한의 입매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한 걸음.
그가 에스테반에게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시드리한이 에스테반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까였어.”
내 주인님은 너 같은 타입 딱 질색이거든.
뒷말을 삼킨 시드리한이 고개를 들고 미소 지었다.
에스테반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 미친 새끼가 감히……!’
서둘러 입을 열었지만 정작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드리한이 등을 돌리고 나서야, 에스테반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는 압도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와, 분위기 진짜 난리 났다.’
설레는 마음으로 파트너를 맺으려 했던 본선 진출자들이 얼어붙은 채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럴 것이다.
새로운 황자의 등장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모를 사람들이 아니니까.
결국 아무도 파트너를 결정하지 못한 채 모임이 흐지부지 끝났다.
나로서는 굉장히 아쉬운 일이었다.
무뚝뚝한 아크린 영식이 수줍어하는 퀴렐 영애에게 과연 마음을 전할지 두근두근 기대하고 있었는데.
악연으로 유명한 나이젠 영애와 윈스텐 영식이 과연 파트너가 될지도 궁금했고.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게 확실한데 정작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앙숙처럼 구니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분명 서로 자존심 세우는 바람에 다른 파트너를 골랐다가, 질투 때문에 마음을 자각하고 관계가 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외에도 흥미진진하게 커플 성사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4D로 즐기는 로판이 아니겠는가.
‘자스민이랑 티리엘이 아쉬워하겠다.’
내가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기로 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여 죽겠네.’
아무리 남들 연애사로 신경을 돌려봐도 어쩔 수 없다.
단 한 순간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시드.
그런 시드와 나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에스테반.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시선을 보내는 라파엘까지.
이렇게 엉망이 된 분위기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후, 어쨌거나 이야기를 해봐야겠네.’
나는 나서거나 자리를 비우지도 않고 조용히 있다가 모임이 끝날 때 사람들과 함께 홀에서 나왔다.
그리고 라파엘과 따로 가는 척하며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해서 이전에 시드와 마주쳤던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와 있었다.
“제가 올 줄 알고 있으셨나 봅니다.”
“내 주인님인데 모를까.”
시드가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서 있는 시드는 내가 그동안 상상했던 그 어떤 남주보다도 남주다웠다.
아무 옷이나 입었을 때도 빛났던 외모였지만, 이렇게 정복을 차려입으니 태생부터 다르다는 게 뭔지 느껴졌다.
그렇구나.
결국 너는 네 자리를 찾았구나.
이전에 황궁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실제로 마주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나는 치마를 넓게 폈다.
“파에라톤의 루아티샤가 황자 전하를一.”
“숙이지 마.”
시드가 그대로 고개 숙이려는 내 팔을 붙잡았다.
“주인님이 고개 숙이라고 황자가 된 거 아니니까.”
“그러면요?”
“주인님 파트너 되려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 많은 생각 중 무엇 하나 정답이다 싶은 게 없었다.
“……내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 황자의 지위를 되찾은 거라고요?”
“주인님이 나 데려가야 하잖아. 그렇죠?”
나를 내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색을 띄고 있었다.
그는 그때와 같은 미소 짓고 있었다.
내 손에 직접 열쇠와 구속구를 쥐여주었을 때.
“…….”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묻고 싶으면서도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주인님.”
그가 괜찮다는 듯, 무엇이든 말해보라는 듯 채근하듯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럼 둘이 있을 때는 불러도 된다는 건가?”
“……황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뭔지 알겠어요.”
시드가 아주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되고 싶은 거죠?”
“…….”
“황제가 되기 위해선 에스테반 황자를 제쳐야 하죠. 하지만 이제야 막 모습을 드러낸 전하로서는 꽤 힘들 거예요.”
황후는 황제가 경계할 정도로 세를 불렸다.
에스테반이 유일한 황자였기에 가능했지만, 그녀에게 끈을 댄 사람들이 한순간에 돌아설까?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밀어 주신다고 해도 한계가 있죠. 전하께서는 외척이 없으니 더더 욱 그럴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제 힘이, 파에라톤의 힘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새벽 축제에서 저와 파트너가 되면 동맹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아닌데.”
“……?”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맞을 텐데?
나는 조금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뭐죠?”
“일단…….”
그가 나를 내려다보더니 미소 지었다.
“주인님이 나한테 존대하지 않는 거.”
뭐?
이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란 말인가.
‘혹시…… 내가 저 녀석을 이상한 취향에 눈 뜨게 만들었나?’
어렸을 때 받았던 노예 취급이 위험한 취향을…… 아니지, 아니야.
애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이건 시험이다.
“제가 어찌 감히 황자 전하께 반말을 하겠습니까.”
“나는 황자이기 전에 주인님 노예였던지라.”
“……이미 버렸습니다.”
시드가 내 손을 쥐어 자신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내가 다시 돌려드렸잖아요.”
구속구가 있었던 위치.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내리깔린 속눈썹이 만들어낸 그림자 때문인지 몹시 깊었다.
나는 뜨거운 것을 만진 사람처럼 그의 손을 뿌리쳤다.
“협상은 서로 원하는 것을 진실하게 말할 때 비로소 진행되는 것이죠.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으신 듯하니 저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발걸음을 떼었다.
그는 나를 붙잡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햇빛이 내 눈을 찔렀다.
“다음엔 모자를 쓰거나 양산을 가져와요.”
그는 인사 대신 묘한 말을 했다.
“주인님 책이랑 서류 많이 봐서 눈이 약하잖아.”
나는 그제야 그가 내게로 쏟아지는 햇볕을 가려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걱정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끝까지 예를 차린 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상한 일이다.
이 순간 에첸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