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Baby Runs A Romance Fantasy With Cash RAW novel - Chapter (122)
아기님 캐시로 로판 달린다-122화(122/353)
☆ 제122화 ☆
* * *
“하아…….”
한참을 걸어 딜루쿨룸 홀로 돌아오고 나서야, 커다란 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제야 내가 숨까지 죽여가며 긴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니 라파엘이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넌 어째 바람 잘 날이 없다. 대체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
“그러게.”
뭐라 말할 수 없어서 그냥 웃었다.
라파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더니 내 팔을 툭 쳤다.
“답지 않게 왜 약한 척이야?”
“넌 기운 내라는 말을 못 하냐?”
“……뭐, 기운 내든가 말든가.”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는 라파엘을 보고 피식 웃었다.
“조금 더 생각은 해봐야겠지만, 아무래도 난 이번에 새로운 황자랑 파트너를 해야 할 거 같아.”
라파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알아.”
짜식, 그래도 친구라고 내 걱정해주는구나.
“그래서 좀 더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 거야. 파에라톤은 그간 가문 외부의 일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살았으니까.”
“중앙 정치에 아예 나오지 않았던 거나 마찬가지지.”
“이제는 달라질 때야.”
이게 바로 내가 제도에 온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라파엘이 내 머리칼을 마구마구 흐트러트렸다.
“뭐, 뭐야!”
“넌 무슨 애가 이렇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냐?”
내 머리칼에 손을 얹은 채, 라파엘이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그냥 사고도 좀 치고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고.”
나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새벽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도 점잔 빼고 있지만, 우리 나이 때는 다 그랬을걸.”
노란색과 초록색이 오묘하게 섞인 올리브그린 빛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라파엘의 눈동자는 이런 색이었구나.
라파엘은 멈칫하더니 내 머리칼을 다시 마구마구 헝클어트렸다.
“크흠, 예선에 통과한 사람들은 다들 우리보다 서너 살은 많고, 어쨌거나 우린 막내 라인이잖아. 좀 사고 쳐도 지들이 이해해야지, 어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땡땡이치고 다녔어?”
“땡땡이도 한 번쯤 쳐봐야 좋은 거야.”
“한 번이 아니잖아.”
“아무튼! 사실 걔네들도 앞에 서만 점잔 떨지 뒤에서는 아직도 사고뭉치들이야.”
그가 개구진 표정으로 비밀 이야기하듯 속닥거려서 나는 피식 웃었다.
라파엘은 내가 열 살로 있게 만들어준다.
이런 친구를 사귄 것만으로도 이번 새벽 축제는 내게 의미가 있었다.
“라파엘.”
“왜, 감동했냐?”
“내가 충고 하나 해줄게.”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라파엘을 바라봤다.
“나중에 좋아하는 여자애 생기면 절대 이딴 식으로 머리 헝클어트리지 마라.”
“…….”
“진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니까 누나 말 대뇌피질에 잘 새겨.”
라파엘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도 슬금슬금 내 머리칼에서 손을 뗐다.
“누나는 무슨.”
그가 괜히 뻘쭘하지 않은 척 손을 슥슥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나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픽 웃었다.
가족들은 내가 열 살처럼 굴든, 어른처럼 굴든 상관하지 않고 나를 나로 봐준다.
처음 공작성에 갔을 때, 어리다고 가문의 일에서 배제하려고 하지 않아서 얼마나 기뻤던가.
그러면서도 내 어깨에 짐을 지워주지 않으려고 한다.
재밌게 즐기고 올 것.
아빠가 새벽 축제에 참여하는 나를 보고 걸었던 조건이다.
‘그걸 내 또래한테 듣다니 좀 색다르네.’
나는 아무래도 어깨에서 힘을 완전히 빼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지금이 평화로워도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내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웅크려 있다.
‘그래도 내 곁에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힘을 낼 수 있는 거겠지.’
나는 괜히 라파엘의 팔을 툭 쳤다.
라파엘이 “뭐야?” 하며 내 팔을 툭 친다.
우리는 티격태격하면서 딜루쿨룸 홀을 나섰다.
그리고.
“헤에, 둘이 친해 보이네.”
“내 동생한테 친한 친구가 생긴 걸 보니 기분이 좋네. 잠시 이야기 좀 할까?”
“근데 설마 막내의 팔을 친 거야?”
라파엘은 살기 위해 튀었다.
* * *
새로운 황자의 등장에 온 제국이 난리가 났다.
이 일이 겉으로는 평화로웠던 기존 판도를 뒤엎고 지각 변동을 일으킬 것은 자명했다.
어떤 자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몇 년간 황제가 기세등등한 황후를 견제해온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언젠가는 칼을 빼 들어 황후의 위세를 낮출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설마 다른 황자를 내보일 줄이야.
해봤자 한쪽 날개를 꺾는 것에서 그칠 줄 알았는데, 이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강수였다.
차기 황위를 두고 다투라고 깃발을 꽂아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예상보다도 훨씬 날카롭게 벼리진 칼에 황후궁으로 드나들었던 사업가나 귀족들의 발길이 줄어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후와의 연을 끊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물길이 어느 쪽으로 흐를지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이러한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당사자인 황후였다.
쨍그랑一!
분노한 황후가 집어던진 화병이 무참히 깨졌다.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거지?! 그 자식이 왜 멀쩡한 얼굴로 황궁에 돌아온 게야!”
황후는 거친 숨을 내쉬며 최측근 보좌들을 노려보았다.
그놈을 쫓아내기 전에 금제를 걸고 구속구까지 걸어 노예상에 넘겼다.
아무리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삶을 살 거라 생각했다.
황후는 아름답고 강하면서도 무력한 노예를 사들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잔혹한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최고의 묘수였다.
그런데 노예상이 몰살당하고 그놈이 탈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버러지가 탈출했다고 했을 때 너희가 뭐라고 했지? 어차피 금제를 풀 수 없으니 탈출해 봤자라며, 벌레처럼 살 거라 했었다!”
보좌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 당시에 황후 역시 맞다며 기분 좋게 동의했던 내용이지만 그걸 말할 순 없었다.
“한데 현실은 어떤가!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뻔뻔한 낯짝을 들고 황자랍시고 행세했다!”
“황공합니다, 폐하.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건히 하셔야 합니다.”
“굳건히? 굳건히 하라고? 지금 일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그딴 소리가 나와!”
소리를 내지를 황후가 이를 으득 갈며 중얼거렸다.
“역시 죽였어야 했어. 지금이라도一.”
“폐하, 잊으시면 안 됩니다. 황가의 적통을 죽인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황후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그 어렸던 황자를 죽이지 못하고 금제같이 품이 많이 드는 제약을 건 이유였다.
죽인 사람뿐만 아니라, 죽이라는 명을 내린 사람까지 저주를 받는다.
황후는 털썩 소파에 몸을 맡겼다.
잠시 심호흡하며 흥분을 가라앉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말해봐.”
“일부러 새벽 축제 본선 첫 모임에서 기습적으로 발표한 게 분명합니다. 체시아 백작을 제외하곤 아무도 몰랐던 모양입니다.”
“만약 정식으로 절차를 밟았다면 저희가 가만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면서도 어른들이 당장 반응하기 애매한 새벽 축제를 노렸다……. 황제께서 아주 작정하셨군.”
황후가 안광을 빛냈다.
“감히,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앉은 것인데.”
자신의 가문이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황제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파에라톤 공녀는 어때? 당연히 에스테반의 파트너가 되겠지?”
“그게, 저어……. 황자님께서 꽃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공작 가에서 아무런 연락도一.”
콰앙!
황후가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제까짓 게 좀 똘똘하다고 띄워줬더니 감히 황자의 성의를 무시해?!”
“아무래도 정치적 문제가 있다 보니 신중한 것이겠지요.”
“그걸 생각하면 더더욱 에스테반과 가까워야지. 평생 밖에서 나돌다 온 버러지가 에스테반의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황후는 분개했다.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때 아펠리아와 관련해서 얼마나 내가 망신을 당했는데.”
한동안 창피해서 사교계에 나가지도 못했다.
보좌들은 황후의 눈치를 보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결국 수석 보좌관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파에라톤 공녀를 잡아야 합니다.”
“감히 내 아들을 저리 무시하는데 그런 말이 나오는가?!”
“파에라톤 공녀가 황자 전하와 가까워진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황후 폐하께서도 공녀 이야기를 꺼내신 것 아닙니까.”
어느 쪽에 줄을 대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그건 굉장한 신호탄이 될 터.
황후는 분을 삭였다.
“내 대의를 위해서 자존심은 잠시 접어두지.”
이미 몇 번이나 파에라톤 공녀가 건방지게 구는 것을 참아 넘기며 봐주었다.
“하지만 감히 이 나라의 황후인 내 자존심에 상처 낸 빚은 언제고 꼭 갚아주겠어.”
까드득.
소파의 가죽이 황후의 손톱에 긁히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 * *
에체시스 용병단의 아지트 안.
나는 수르아의 모습을 한 채 에첸과 다음 의뢰 협상을 마쳤다.
일이 다 끝났음에도 일어날 생각이 없는 나를 보고도 에첸은 딱히 아무런 재촉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에첸이 준비한 아이스 초코를 마시며 긴장한 속을 달랬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 데?”
에첸이 내 앞에 얼그레이 쿠키를 밀어주며 물었다.
단 음료를 먹을 땐 쌉쌀한 쿠키.
얘도 어느새 내 취향을 알았다.
나는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입을 열었다.
“있지, 파티에서……. 아,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말이야.”
“그래, 당연히 친구 이야기겠지.”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저번에 말했던 노예였다가 소드 마스터가 되어서 돌아온 바람에 고민이라던 그 친구 이야기야.”
에첸이 알겠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아, 그 친구가 왜?”
“그 소드 마스터가 파티에서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청했어.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이긴. 보통 관심 있는 사람한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하지 않아?”
“그게, 상황이 좀 복잡해. 그 친구가 세 명한테 파트너 신청을 받았거든.”
“흐음.”
“인기 많지?”
나는 엣헴, 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네가 왜 뿌듯해해? 친구 이야기라며.”
아차.
가문 외의 파티에 나가고 파트너 신청받은 게 처음이라 들떠서 그만.
“이, 인기 많은 친구 두면 나도 덩달아 기분 좋지. 당연한 거야.”
나는 화끈거리는 뺨을 감추며 서둘러 말을이었다.
“실은…… 그 남자애들이 딱히 내 친구를 좋아해서 파트너를 요청한 게 아니거든.”
에첸은 아주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어쩐지 나를 좀 한심하게 보는 것 같은…….
‘왜 그러지?’ 하다가 곧 이유를 깨달았다.
“아니! 친구 질투하거나 욕하려고 그렇게 말한 거 아니야!”
나는 서둘러 손을 휘저었다.
“내 의견이 아니라 친구의 말에 따르자면,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래!”
“전부터 생각했지만 눈치 더럽게 없는 친구네.”
“아니거든? 어디 가서 똑똑하다는 말만 들어.”
에첸은 씩씩거리는 나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다들 각자의 이유가 있어 한 명은 그냥 친구 없는 아싸여서 그렇고, 다른 두 명은 내 친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해서 그래.”
“아싸?”
“친구 없고 혼자 외로운 늑대에 빙의해 있는 애 있어.”
“……불쌍한 놈.”
에첸이 고개를 돌리며 뭐라 중얼거렸는데 워낙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중요한 거 아니야. 근데, 그 생각이 확실해?”
“응, 둘 다 목표가 분명한데 내 친구가 파트너가 되면 한결 편해지거든.”
“정작 그 소드 마스터한테 물어보면 아니라고 답했을 거 같은데.”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너 점집 차려도 되겠다!”
계속 연애 감정이라면서 헛다리만 짚길래 영 촉이 없다고 살짝 무시했는데!
반짝반짝한 눈으로 바라보자 에첸이 피식 웃었다.
“뻔하지.”
“어떻게 뻔해?”
내 물음에 에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
복채를 달라는 걸까.
“뭔데?”
“네 취향.”
“내 취향?”
“여전히 자기감정에 둔한 남자가 좋아?”
“어?”
“좋아해도 좋아하는 줄 모르고, 오히려 자기감정을 부정하고 밀어내기만 하는……. 그런 남자가 좋냐고.”
아니, 여기서 그런 질문이 왜 나와?
나는 쿠키를 먹는 것도 멈추고 에첸을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는 에첸의 시선이 아주 깊었다.
어쩐지 가슴이 조금 떨렸다.
‘아니, 이건 아니야.’
에첸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침대를 굴렀던 기억 때문이야.
이건 절대로 설레는 게 아니야.
“에첸.”
“응, 수르아.”
“…….”
그래, 쟤한테 나는 수르아잖아.
20대의 여성.
나는 힘을 바짝 줘서 허리를 곧게 폈다.
사실은 오늘 만나기 전부터 생각했다.
에첸에게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한다고.
그걸 괜히 미루고 또 미룬 건…….
그냥, 나도 썸이 처음이라서.
그것뿐이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에첸, 한 가지 확실히 할게.”
내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건지 에첸의 표정 역시 덩달아 심각해졌다.
“난 사실…… 할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