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Baby Runs A Romance Fantasy With Cash RAW novel - Chapter (174)
아기님 캐시로 로판 달린다-174화(174/353)
☆ 174화 ☆
* * *
나는 머리카락을 쓸었다.
어깨선보다 더 짧게 끝나는 머리카락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했다.
본래의 내 시야보다 훌쩍 높은 눈높이도 마찬가지.
‘수르아의 모습으로 다닌 적이 그만큼 많았으니까.’
그건 내가 에첸을 만난 적이 꼭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서 와.”
자리에 앉아있던 에첸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반겼다.
내 주변의 화려한 생김새를 지닌 남자들에 비하자면 한없이 평범한 인상의 남자.
하지만 그 여유로운 미소를 보자 나는 어쩐지 조금 어색해졌다.
묘한 긴장감.
괜히 에첸 같은 타입이 실질적으로 이성에게 인기 많은 게 아니다.
나는 공연히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바렌은 안 보이네?”
“……왜 그놈을 찾는 거지?”
말에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싸웠나?
바렌이 말투는 곱지 않아도 에첸에게 대항하지 못할 성격인데.
산적 같은 덩치와 달리 은근히 머리가 잘 돌아가고 정이 많은 자 아니던가.
“아니, 뭐……. 저번에 바렌이 내 얼굴 본 지 오래되었다는 말을 했다길래.”
아즐이 나를 대신해서 용병단에 갔을 때, 바렌과 수다 떨며 그런 말을 들었다고 전해주었다.
“보고 싶어?”
무슨 질문이 저렇지?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서서 만나자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며 가며 마주치면 반갑겠지.
“왜?”
“왜라니. 안 본 지 꽤 됐으니까? 바렌이랑 얘기하면 재밌기도 하고.”
나는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 초코와 커다란 청크 초콜릿이 잔뜩 박힌 쿠키가 놓여 있었다.
내가 카이셴 영식과 만날 때 종업원一 정확히는 에첸이 서비스라면서 줬던 바로 그 쿠키였다.
내가 좋아하는 쿠키.
“…….”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렸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에첸은 날 만나는 날이면 일부러 이런 걸 준비해놓는 걸까?
‘아니, 근데 에첸은 내가 파에라톤 공녀라는 걸 모르잖아.’
파에라톤 공녀인 나에게도 준 걸 보면 그냥 용병단 내에서 흔하게 굴러다니는 쿠키인지도 모른다.
“…….”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또 기분이 가라앉았다.
한순간에 기뻤다가 한순간에 시무룩하고.
‘……갱년기인가?’
전생의 나이와 현생을 나이를 꼽아봤지만 그 전부를 합쳐도 갱년기가 올 때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신체는 망아지 같은 열한 살 꼬꼬마였고.
나는 괜히 쿠키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곧장 에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주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나는 괜히 어색함에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가 미소 지었다.
“네 의뢰는 완벽하게 처리했어. 황후에게는 이렇게 전달했고.”
에첸이 보고서를 슥 내밀었다.
“고마워.”
얼른 보고서를 향해 손을 뻗는데一.
‘아.’
에첸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이 우연찮게 맞닿았다.
흠칫.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오므리자 철이 안 된 종이가 흐트러지며 바닥에 떨어지려 했다.
“으아?”
허둥지둥하는데 에첸이 후두둑 떨어지는 종이를 잡아 다시 내 손에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떨어트리지 말라는 듯,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완전히 감싸 쥐었다.
손가락이 얽혔다.
에첸의 손은 생각보다도 더 오래 머물렀다.
“에첸?”
“제대로 잡아.”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에첸이 손을 물렸다.
그의 손가락이 내 손등을 스치며 떨어지는 감각이 아주 생경했다.
나는 서류를 테이블에 탁탁 쳐서 정리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단단했어.’
그야 손가락이 물렁하기보다는 단단하겠지만.
나는 힐끔 에첸의 손가락을 훔쳐봤다.
길쭉해.
그가 잔을 잡자 매끈하던 손 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나는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재빠르게 시선을 휙 돌렸다.
“어디 보자, 내용이…….”
괜히 중얼거리며 종이를 넘기는데一.
“……응?”
이건 무슨 소설이지?
보고서 안에서는 부유한 미망인인 레이디 샤본느를 빤들빤들한 얼굴을 한 제비, 펠릭스 카이셴이 꼬시고 있었다.
아니, 뭐.
레이디 샤본느가 부유한 미망인인 것도 맞고, 카이셴 영식 얼굴이 빤들빤들한 것도 맞는데.
“……레이디께선 참으로 피곤하시겠습니다. 온종일 내 머릿속에서 돌아다니시니까?”
우와.
무슨 쌍팔년도에나 통했을 거 같은 작업 멘트가 잔뜩 적혀 있었다.
‘어……. 근데 생각해보니 내가 가족들한테 주접떨어줄 때랑 그렇게 다른 것 같지 않은 느낌이…….’
갑자기 자괴감이 밀려오려고 했다.
나는 서둘러 생각을 흐트러트렸다.
“카이셴 영식이 이런 말을 했다고 보고한 거야? 어머, 세상에. 레이디 샤본느의 반응이 더 대박이네.”
완전히 두 사람을 불륜 남녀로 만들어 놨잖아?
병든 남편이 죽기 전에도…….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근데 뭐지? 멈출 수 없어.’
나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 다음 장을 보았다.
‘와, 장난 아니다. 헐. 그럼 둘이 남편 장례식에서도? 어머머, 세상에, 세상에! 이런 천인공노 할……!’
원래 불륜 막장은 욕하면서 보는 재미 아닌가.
나는 속으로 불륜 커플을 씹고 뜯고 맛보며 즐겼다.
그러다 시선을 느꼈다.
“크흠, 흠.”
나는 새침하게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거 누가 쓴 거야?”
“내가.”
헐. 에첸이?
‘와, 에첸. 글빨이 장난 아니다.’
얘는 지구에서 태어났으면 K-막장 드라마의 제왕이 되었을 사람이야.
시청률 70% 나오는 거 아니야?
아니, 이게 아니지!
“혹시 카이셴 영식에게 악감정이라도 있어? 사람을 완전…… 음, 그렇게 만들어 놨던데.”
생각해보면 그날 에첸이 쿠키를 가져다주며 카이셴 영식의 손을 후드려 팬 것부터 이상하다.
하지만 에첸은 말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어. 단순히 황후가 믿을 만하게 각색했을 뿐. 세 사람이 만나는 데에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줘야 했으니까.”
“흐음…….”
다른 각본이어도 충분했을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납득이 가는 말이긴 했다.
이 엄청난 막장 불륜 앞에서 의문은 전부 사라지니까.
“……다소 무리한 의뢰였을 텐데 들어줘서 고마워.”
에첸이 피식 웃었다.
“무리한 의뢰이긴 했지. 다른 의뢰인을 속여달라는 거였으니까.”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거절해도 됐는데.”
“거절 안 해.”
아주 단호한 말이었다.
“응?”
의외의 반응에 나는 고개를 들어 에첸을 바라보았다.
“네 의뢰는.”
“…….”
“절대 거절 안 해.”
그의 눈동자는 날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진득하고 헤어나 올 수 없을 것처럼 짙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흔하게 읽었던 문장.
그게 이런 걸까?
이렇게까지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인 걸까?
답답하고 조마조마하고 긴장되고 그러면서도一.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수르아.”
그의 나직한 부름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그러니까…….
‘수르아는…….’
나는 겨우겨우 그에게서 시선을 떼 고개를 숙였다.
마치 주박에서 풀린 사람처럼, 그제야 호흡이 자유로웠다.
‘나는 수르아가 아닌데.’
아니, 내가 수르아인 건 맞지만.
에첸이 알고 있는 수르아는 내가 아니야.
만약 내 진짜 모습으로 에첸을 만났다면 그는 나에게 이런 관심을 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나이가 말이야…….’
에첸은 성인이고 나는 이제 겨우 열한 살 꼬꼬마인데.
두근두근.
아니, 근데 심장은 왜 이렇게 뛰는 거야.
나는 고개를 푹 떨궜다.
“수르아?”
에첸이 깜짝 놀라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에첸의 얼굴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외모를 따져서 말이야. 잘생긴 남자가 좋아.”
옛날에 내가 그에게 했던 말.
미쳤나 봐.
에첸이 잘생겨 보여.
“나, 나 어쩌지?”
“왜 그래? 어디 아파?”
그가 초조하게 물었다.
세상에, 미간 찌푸린 것도 좀 섹시해 보이잖아.
‘……아픈 게 맞는 거 같긴 해. 내 정신이.’
나는 뺨을 감싸 쥐었다.
뜨끈뜨끈했다.
갑작스러운 체온의 상승.
이건 갱년기가 아니다.
‘이건…….”
나는 지금 에첸에게 설레고 있었다.
아니, 지금뿐만 아니라 훨씬 예전부터.
에첸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커다란 손이 기분 좋았다.
“뜨거운데. 여름 감기야?”
“아니이…….”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진짜 돌았어.’
이건 그건가?
원래 학생 때 선생님한테 괜히 조금 설레고 그러잖아.
나도 지금 그런 나이가 된 건가?
‘아니, 근데 내 주변에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에첸한테.’
에첸이 뭐가 어때서!
피부 좋고! 단정하게 생겼고! 키도 크고! 어깨 넓고 몸도 좋고!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남자 흔한 줄 알아?!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뭐라 뭐라 항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열심히 그 목소리에 반박했다.
‘솔직히 우리 오빠들에 비하면……. 아니, 막말로 아직 한참 어린 시드한테 비교해도.’
시드.
“너네 뭐하냐? 사귀어?”
카이센 영식의 말에는 절대 아니라고 소리 질렀지만.
사실은 은근히 그 말이 기뻤어.
그때 시드가 날 구해주러 와서 좋았어.
새벽 축제가 끝난 뒤로 나랑 상관하지도 않더니 그래도 왔네, 하고.
내심 기뻤단 말이야.
인생 2회차, 연애 경력은 0.
하지만 내가 본 로맨스 판타지만 수천 권이 넘어간다.
수많은 대리 설렘을 느껴본 자로서 이 감정이 뭔지 모르지 않는다.
나는 울상을 한 채 에첸을 바라보았다.
“어떡해……
“왜 그래. 많이 아파?”
“나, 나 바람둥이인가 봐.”
내 말에 에첸의 얼굴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 * *
“단장! 왔一 흐억!”
바렌이 에첸을 향해 반갑게 손을 들다가 헉, 하고 놀라서 우당탕 뒤로 물러났다.
에첸의 등 뒤로부터 흉악한 기운이 넘실거리며 뻗어져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그 어떤 때보다도 살벌했다.
“왜, 왜 그러지?”
바렌이 입술을 뻐끔거리며 네미스에게 물었다.
네미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라고 알 리가 있나.
항상 수르아를 만나고 나면 배부른 맹수처럼 포악함이 가라앉았는데.
지금은 며칠은, 아니 몇 달은 굶은 맹수처럼 주변 모든 것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건들지 말자, 건들지 말자.’
눈짓으로 합의를 본 바렌과 네미스가 그대로 자리를 뜨려던 순간이었다.
“네 미스.”
“네, 네. 단장!”
항상 침착하던 네미스조차 바짝 긴장한 채 답했다.
“너 애인 있지?”
“예?”
에첸은 다시 묻지 않았다.
네미스는 딸꾹거리며 답했다.
“어, 없는데요.”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있습니다.”
“앉아 봐.”
에첸이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네미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눈물을 머금고 그 자리에 앉았다.
바렌은 은근슬쩍 눈치를 보다가 방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네미스가 죽으면 시신이라도 수습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애인에게 네미스의 죽음도 알려줘야 하고.
에첸은 맞은 편에 앉고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숨 막히는 침묵에 네미스와 바렌이 졸도할 무렵이 되어서야, 그의 입술이 열렸다.
“……조, 는 여자가.”
“네?”
“조는 여자?”
네미스와 바렌의 고개가 동시에 갸웃했다.
에첸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아…… 여자.”
“조아, 여자? 여자가 좋다고요?”
“허허, 우리 단장. 여자에게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구시더니!”
단번에 긴장을 푼 바렌이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에첸의 얼굴이 더 험악해졌다. 그가 짓씹듯 내뱉었다.
“하는……!”
“하는?
“조아, 여자, 하는?”
“설마 좋아하는 여자?”
네미스와 바렌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에첸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거, 이거?’
‘그거 맞는 거 같지?’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무려 그 에첸이 연애 상담을 하다니!
두 사람은 서둘러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잇몸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르아 씨 얘기겠지?’
‘수르아 말고는 없지.’
설마 에첸 같은 놈이 누군가를 좋아하겠냐며 처음에는 부정했지만.
그것도 몇 달이지 이제는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렌과 네미스는 은근슬쩍 두 사람의 연애를 응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두근두근하며 에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걸까?
대체 무슨 일일까!
“자신이 바람둥이라고 말하는데.”
“예?!”
“바, 바람둥이?”
뭔가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두 사람이 입을 떡 벌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
“어, 그건…….”
거절 아닌가?
우리 단장, 고백했다가 까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