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Baby Runs A Romance Fantasy With Cash RAW novel - Chapter (284)
아기님 캐시로 로판 달린다-284화(284/353)
☆ 제284화 ☆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
초봄의 새순 같은 연둣빛 눈동자.
어렸을 때 본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서 조금 낯설었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 있었다.
클라티에.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사촌 언니.
클라티에는 에스테반 황태자의 곁에 바짝 붙어선 채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걸린다.
훌쩍 자랐지만 그 미소만큼은 어렸을 때와 똑같았다.
정말 클라티에다.
하지만一.
‘어째서 클라티에가 여기에……?’
* * *
시간을 조금 되돌려서.
나는 신전에 들려 크레센티오를 데리고 황제의 침전으로 들어왔다.
침전 안의 공기는 소독 냄새와 약향(藥香)이 섞여 텁텁했다.
“공녀님.”
고개를 숙이는 시종의 뒤로 누워있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를 엄청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호탕하고 자신만만하던 모습과 달리 이렇게 쓰러져서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황제의 안색은 기묘할 정도로 창백하고 푸르스름했다.
마치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보다 상태가 더 안 좋은데…….’
힐끗 크레센티오를 바라보니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황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
“크레센티오.”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눈치를 줬다.
이 자리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황제의 시종들과 체시아 백작 그리고 황궁의들이 있었다.
크레센티오는 ‘진실을 말하는 것인데 뭐가 잘못이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긴 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시종들과 황궁의들의 시선이 따끔했다.
얘도 진짜 신전에서만 자라서 그런가?
사회성이 정말 최악이었다.
“크레센티오 신관께서는 과거 신성 시대의 신관들에 비견해도 신성력이 더 강대할 정도라고 들었소. 해서 얼마 전 공녀와 함께 얼마 전 병자들을 치유하기도 했다고…….”
체시아 백작의 말에 시종들과 황궁의들이 시선을 거뒀다.
비록 크레센티오의 언행이 불손하지만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상기한 것이다.
“어떻게, 황제 폐하의 환후에는 방도가 없겠소?”
“소용없다.”
그러나 크레센티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다는 말로 끝입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황제 폐하십니다!”
“신성력을 쏟아부어 봤자 아무 효과도 없을 것이기에 소용없다고 말한 것뿐이다.”
“하지만 얼마 전에는 다리를 못 쓰던 아이의 다리까지 고쳤다고 들었습니다.”
“완전히 회복되진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차도는 보일 수 있지 않습니까?”
“한 번 시도라도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크레센티오 신관!”
처음에는 화를 내던 시종들과 황궁의들이 애걸복걸하며 매달렸다.
크레센티오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윽고 뻗어진 그의 양손에서 신성한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참으로 아름답고 고결한 빛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정화될 것 같은 느낌.
다른 신관들이 발하는 신성력은 이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 같았다.
마치 황제를 감싸고 보호하듯 빛이 그의 전신에 어렸다.
황제의 얼굴에 옅게나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보, 보십시오! 폐하의 안색이!”
“역시 차도가一.”
시종들과 황궁의들이 기뻐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신성력이 이상하게 뒤틀리더니 황제의 몸이 튕겨 올랐다.
그리고 황제에게 스며들었던 빛이 탁한 빛깔로 변해 터져 나왔다.
크레센티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거뒀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내가 소용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
“하, 한 번만 더 해주십시오. 아까 분명 안색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걸 보시지 않았습니까?”
“같은 결과만 나올 뿐이다. 그리고 신성력은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황궁의가 재빨리 황제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바라보다 크레센티오에게 물었다.
“폐하의 옥체가 신성력을 거부하는 거야?”
“제대로 봤군.”
“…….”
체시아 백작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말을 아꼈다.
지금은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았다.
‘신성력을 거부하는 거라면 그냥 원인불명의 불치병이 아니야.’
황궁의들이 진단한 결과 음독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였다.
“에스테반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그 말과 함께 침실의 문이 열렸다.
에스테반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옆에는一.
“클라티에?”
클라티에가 딱 붙은 채 서 있었다.
내 말을 들은 클라티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클라티에……라니요?”
마치 생전 처음 그 이름을 들은 사람처럼.
“클라티에라면, 예전에 감히 황제 폐하를 기만하는 죄를 짓고 귀족 지위를 박탈당한 그 아이 말씀입니까?”
체시아 백작이 물었다.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침묵에서 긍정을 읽은 체시아 백작이 난처한 미소 지었다.
“공녀께서 오해하신 것 같군요. 이분은 토렌시아의 공주이신 슈리엘 님이십니다.”
“……슈리엘 공주?”
“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나는 다시 천천히 눈앞의 여자를 살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키도 훌쩍 컸고, 얼굴도 갸름하고 성숙해졌지만一.
그래도 클라티에였다.
“처음 뵙겠어요, 성녀님.”
생긋, 천사처럼 웃는 표정.
“얼마나 만나 뵙고 싶었는지 몰라요.”
날 바라보는 눈빛.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나는 내밀어진 클라티에의 손을 잡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아……. 제가 있어서는 안 될 곳을 온 건가요?”
클라티에가 상처받은 얼굴로 내밀었던 손을 물렸다. 그 가련한 모습.
‘가증스러운 것 역시 한결같아.’
“그럴 리가.”
에스테반이 부드럽게 클라티에의 어깨를 감쌌다.
“태도가 너무 심하군, 공녀.”
청회색 눈동자가 불쾌하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내 연인에게.”
뭐라고?
* * *
충격받은 루아티샤의 얼굴을 보고 에스테반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나 관심 없는 척, 싫어하는 척 굴었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거다.
자신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말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확실하지 않은가.
‘이미 늦었어.’
기회는 여러 번 줬다.
그러나 그 기회를 팽개치고 짓밟은 건 다름 아닌 루아티샤였다.
‘네가 그 고매한 자존심도 다 버리고 나를 원한다고 말하더라도一.’
“와, 연인이시구나!”
‘―응?’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릴까? 마치 한 쌍의 바퀴…… 어, 음, 바퀴처럼!”
에스테반이 멍하니 루아티샤를 바라보았다.
루아티샤는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
“바퀴……?”
“수레바퀴의 바퀴 말이에요. 원래 바퀴는 하나만 있으면 불안정하죠. 하지만 두 개가 있으면 얼마나 안정적인데요. 더 편하고.”
“…….”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이 그만큼 안정적으로 잘 어울린다는 뜻이죠. 서로 제 짝을 찾은 느낌?”
“진심인가?”
“어머! 그럼 설마 거짓이겠어요?”
루아티샤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바퀴벌레라고 절대, 절대 생각하지 않았어요!”
“…….”
그게 아니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거냐고 물었던 것이었는데.
알고 싶지 않은 바퀴의 뜻만 알게 되었다.
슈리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루아티샤는 생긋 웃고는 누워있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폐하께서 워낙 저를 딸처럼 아껴 주셔서 병문안 왔던 것뿐이거든요.”
“…….”
“그럼.”
에스테반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루아티샤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옆얼굴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정말 이대로 나간다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침실을 나갈 때까지 루아티샤는 단 한 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물론 뒤돌아보는 일조차 없었다.
대신.
‘……크레센티오一라고 했나?’
루아티샤와 함께 있던 신관이 슬쩍 그를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오만하리만큼 깔끔한 얼굴에 입술이 움직인다.
피식.
‘……!’
명백한 비웃음.
에스테반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크레센티오는 침전을 나갔다.
루아티샤에게 딱 붙은 채.
‘감히……!’
꽈악.
에스테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황태자 전하.”
속삭이며 주먹을 움켜쥐는 부드러운 손길에 에스테반은 정신을 차렸다.
커다란 연둣빛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스테반은 슈리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이제 시작일 뿐이야.’
지금은 저렇게 굴더라도 결국 루아티샤는 자신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 * *
“병이 아니라고요?”
체시아 백작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이라면 신성력을 튕겨내지 않았을 테니까요.”
“흠……. 하지만 신성력을 사용한다고 다 낫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병세에 비해 신성력이 부족할 경우에나 그런 거지. 아니면 노환처럼 신성력으로 치유할 수 없는 종류의 병이거나.”
크레센티오가 체시아 백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건 그 머리에 똑똑히 박아두도록. 내 신성력은 부족하지 않다.”
“뭐, 이 말은 차치하고서라도 단순히 신성력이 부족한 경우면 차도가 없거나 컨디션이 약간 좋아지는 정도로 끝나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신관들의 신성력을 영양제처럼 쓰지 않았던가.
“그 말씀은 신성력을 거부하거나 튕겨내진 않는다는 뜻이군요.”
“맞아요.”
체시아 백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결론은 하나군요.”
“네.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황제 폐하께 저주나 술법을 걸었다.”
“…….”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차라리 황제가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라는 결론이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최근 황궁 밖으로 외출하신 적이 없습니다.”
“황궁 안에서라도 술법에 당할 수 있죠.”
“황궁에서 술법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깔려 있는 방어진과 결계진이 몇 개인데……. 특히 폐하의 침전은 더 합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뚫린 적이 있어요. 폐후의 일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
체시아 백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런……. 그 후로 궁의 결계를 전부 다 강화하고 이상을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체계를 만들었습니다만…….”
체시아 백작이 중얼거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다 무용지물이었군요.”
자신이 몇 달 동안 야근한 결과가 아무 소용도 없는 헛짓이라는 걸 깨닫고 있는 사람에게 무어라 말하겠는가.
그저 어깨를 토닥일 뿐.
“중요한 건 이거예요. 폐하께서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상대가 누구인가요?”
“그건…….”
체시아 백작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시드리한 황자님이십니다.”
“……!”
시드리한이라고?
“……시드일 리는 없어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만약 폐하의 병이 평범한 병이 아니라는 게 알려지면一.”
가장 먼저 시드가 의심을 살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에스테반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상황.
에스테반이 황제의 대리 권한으로 시드를 황제 시해범으로 지목한다면?
뱃속에 소름이 쫙 끼쳤다.
“폐하의 환후에 관한 말은 함구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체시아 백작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조금 주저하다 물었다.
“아까 그 슈리엘 공주. 정말 토렌시아의 공주가 맞나요?”
“그럼요?”
체시아 백작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걸리시는 점이라도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클라티에라고 말씀하셨죠.”
“…….”
“음,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토렌시아의 슈리엘 공주님이 맞습니다. 토렌시아의 사절단과 함께 오셨고요.”
나와 한 배를 탄 체시아 백작이 내게 거짓을 말할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정황이 있었다면 묻지 않아도 알려 주었을 텐데…….’
“……워낙 닮아서 내가 착각했나 봐요.”
“그 정도로 닮았나요? 오래전에 잠시 봤던 아이라 저는 그런지 딱히 그런 인상은 못 받았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시아 백작은 새벽 축제 기간 정도에만 클라티에를 봤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혹시라도 폐하께 이상이 생기면 연락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오자 크레센티오가 내게 물었다.
“어쩔 셈이지?”
“뭘 어쩌긴 어째.”
나는 원래부터가 타인의 말보다 로판 독자로서의 내 판단을 믿었다.
쟤는 클라티에가 맞다.
그리고 황제가 당했다는 술법에도 관련되어 있는 게 확실하다.
거기다가 ‘리엘’로 끝나는 이름까지.
‘어쩐지 좀 뒷맛이 찝찝하다 했지.’
“사이다나 만들어야지.”
이번에는 안 찝찝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