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Baby Runs A Romance Fantasy With Cash RAW novel - Chapter (286)
아기님 캐시로 로판 달린다-286화(286/353)
☆ 제286화 ☆
* * *
나는 시드의 궁에서 비밀통로를 통해 내궁에 있는 켈란 정원 쪽으로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네. 크레센티오는 갔겠지?’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한 번 가볼까.
정원에서 나가 아까 크레센티오와 헤어졌던 길로 가니 파고라에 긴 다리를 꼰 채 앉아있는 크레센티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크레센티一.”
“너.”
크레센티오가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늦었一.”
“다가오지 마.”
귀족적이고 결벽적인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차갑게 응시했다.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크레센티오가 한쪽 눈매를 살짝 일그러트렸다.
“넌 역시 짜증 나는 인간이야.”
경멸하듯 내려다보는 시선.
“그간 내가 너무 장단을 맞춰줬나 보군.”
쯧, 혀를 찬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불쾌하니까 앞으로 더 이상 다가오지 마.”
“…….”
크레센티오가 몸을 돌렸다.
냉랭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나는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채 크레센티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며칠 후.
황궁 외궁의 하비에르 홀.
황제의 쾌유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회합이 열렸다.
황제가 병중인지라 예정된 황실 연회는 전부 다 취소된 상황이었다.
그런 때에 굳이 하비에르 홀 같은 대형 홀을 개방하며 귀족들을 모은 이유는 하나였다.
“슈리엘 공주님.”
“토렌시아는 탄자나이트로 유명하지요?”
“황태자 전하와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신가요?”
“슈리엘 공주님!”
바로 황태자가 자신의 연인인 슈리엘이 제국 귀족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슈리엘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짜릿해.’
얼마 만에 받는 주목인가.
몸에 걸친 아름다운 드레스.
팔과 목, 귓가에서 반짝거리는 보석.
‘그래. 맞아. 나는 원래 이런 삶을 살아야 했어. 이게 나와 맞는 삶이야.’
앞으로 계속 이렇게 관심과 선망을 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
[즐거워하는 건 상관없는데 목적을 잊지는 마.]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슈리엘은 찻잔을 쥔 손을 움찔했다.
“공주님?”
“아, 차가 조금 뜨거웠나 봐요.”
슈리엘은 사람들에게 미소 지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걱정하지 마.’
[…….]‘이 내가 고작 여기서 만족할 리가 없잖아.’
그래, 겨우 이 정도로 마음이 풀릴 리가 없다.
구질구질하게 드레스샵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쇼윈도 앞을 서성이다가 후다닥 도망쳤던 기억.
손가락질하며 욕하는 사람들로부터 피해 도망치던 기억.
미소 짓는 루아티샤의 모습이 광장에 내걸렸을 땐 그 자리에서 그림을 다 찢어서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불행한 자신과 달리 루아티샤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파에라톤 공녀라는 분에 넘치는 신분으로도 모자라서 거대 상단의 주인에다 성녀까지……!’
대체 어디까지 가져야 만족하는 거지?
루아티샤가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빛나면 빛날수록 자신의 삶에는 그림자가 드리웠었다.
슈리엘은 매끄러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노동으로 푸석푸석하고 거칠었는데 이제는 고귀한 자신의 태생에 걸맞게 반들반들하니 윤까지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산 건 다 너 때문이야. 루아티샤.’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말에 만족스레 미소 짓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파에라톤 공녀님!”
“성녀 예하!”
“어머나, 정말 오랜만이시네요.”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루아티샤 파에라톤의 등장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슈리엘의 시선이 루아티샤를 향했다.
루아티샤는 언제나처럼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위선적인 얼굴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남을 불행하게 만든 주제에 이렇게 모든 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니 말도 안 되지.’
자신이 당했던 고통의 수십 배, 아니, 백배, 천배로 갚아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불구덩이에 빠져 죽어도 상관없어.’
때마침 시선을 느낀 루아티샤가 슈리엘을 바라보았다.
슈리엘은 그녀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 * *
하비에르 홀 안은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웠지만, 그 안에는 살얼음 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황제가 이대로 승하할 시, 에스테반 황태자는 자연히 황제가 된다.
그런 에스테반의 연인인 슈리엘 공주.
에스테반에게는 황태자비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슈리엘 공주가 차기 황후가 될지도 모르니까.’
토렌시아의 공주라면 신분도 괜찮다.
‘다들 슈리엘 공주에게 연줄을 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내가 왔으니 눈치를 볼 수밖에.’
하나의 세계에 중심이 두 개가 될 수는 없는 법.
사람들의 대화는 황제의 병환에 대한 걱정처럼 무난한 화제로 흘렀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디스룸으로 가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보는데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 유명한 파에라톤 공녀라고 해도 별거 없네요.”
갑자기 걸어오는 시비.
거울을 통해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클라티에의 얼굴이 보였다.
“직책을 생각해서 사교계 참석을 줄였다고 들었는데. 내가 새로운 사교계의 중심이 될 것 같으니 꽁지 빠지게 달려오는 꼴이라니.”
“…….”
“이게 바로 한물간 사교계 퀸의 마지막 발악인 걸까요?”
툭, 클라티에가 일부러인 듯 실수인 듯 내 어깨를 건드렸다.
“가여워라.”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비웃는 클라티에를 바라보다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지금 꽁지 빠지게 날 따라온 사람은 너 아니야?”
“착각하지 마. 애쓰는 꼴이 가엽고 불쌍해서 더 이상 비참해 지지 말라고 알려주러 온 거니까.”
“아무리 봐도 날 견제하는 걸로 보이는데. 진짜 사교계의 중심이라면 ‘한물간 사교계 퀸’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견제질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클라티에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이렇게 안달복달하면서 내 신경을 긁으려 애쓰는 게 사교계에서의 내 위상을 증명해 주는 거 아닐까?”
아직 멀었다, 얘야.
사교계 싸움이라면 수천 번은 마인드 트레이닝한 로판 독자의 짬밥을 무시하면 안 되지.
거기다 나는 제도에 올라온 뒤 사교계라는 정글의 정점에서 단 한 번도 밀려난 적이 없었다.
클라티에가 이를 갈며 날 노려봤다.
“그건 네 생각이지. 그렇게 자존심 세우면서 억지 논리로一.”
“아, 맞다. 내가 네 수준을 깜빡했다.”
나는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너한테는 억지 논리겠구나. 머리가 나빠서 그 정도 생각은 못 하니까.”
“뭐……?”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클라티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혼자 생각하지 못해서 기껏 한다는 짓이 남의 답안지나 베끼던 머리가 어디 가는 건 아니지.”
“……!”
클라티에가 분노로 하얗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했던 잘못으로 정곡을 찌르면 그냥 욕 하는 것보다 더 빡치는 법이거든.
나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뭘 그렇게 화를 내. 그냥 머리 나쁜 거 인정하면 나도 네 수준 맞춰서 놀아줄게.”
“너!”
“클라티에.”
내 부름에 클라티에가 움찔했다.
“……대체 왜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건지. 나는 토렌시아의 공주一.”
“아, 머리가 나빠서 이렇게 부르면 못 알아듣나?”
나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한 뒤 클라티에와 눈을 맞춘 채 천천히 한 자, 한 자 발음했다.
“추라티에.”
[그렇죠!] [클하다, 추라티에야!]클라티에의 눈매가 움찔했다.
추라티에라는 말을 처음 들어도 기분이 더러울 거다.
악마 녀석이 얄미운 구석에는 일가견이 있어서 그런지 어감부터가 느낌이 오거든.
[……칭찬 맞죠?]그때였다.
클라티에가 문에 쿵, 하고 몸을 부딪치더니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울먹울먹거리는 눈동자.
‘아, 이건…….’
로판 단골 패턴이다.
아니나 다를까 준비된 것처럼 레이디스룸의 문이 열렸다.
클라티에가 문에 부딪히며 났던 큰 소리에 밖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문을 연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몰려 있던 이유야 클라티에가 잘 알 테고.
나는 조금 추억에 젖어 클라티에를 내려다봤다.
“제가…… 흑, 그 클라티에라는 분과 그렇게나 닮은 것인가요? 그래서 제게 이러시는 거예요?”
연기력이 늘었다.
클라티에는 진주알 같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그저…… 성녀님을 존경해서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차라리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왜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워서…….”
사람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클라티에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의도적으로 소리를 높인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클라티에라면 옛날에 그 사람 아니에요? 감히 황제 폐하를 기만한…….”
“그런데 왜 슈리엘 공주님께 그런 죄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거죠? 괜히 애먼 사람 잡고 있네요.”
“과연 아무런 의도가 없을까요? 비슷한 소문을 내려고 그런 건 아닐지.”
“솔직히 파에라톤 공녀의 성격이 자애롭고 관대한 편은 아니잖아요. 사교계에서 본인의 위치를 위협하는 것 같으니 초장에 밟으려고…….”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짓고 있던 클라티에가 일부러 나 보란 듯이 피식 웃었다.
겨우 이런 거 가지고 저렇게 의기양양해 하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이딴 짓은 로판에서 메인 악역도 못되고 초반부에 바로 하차당할 쪼렙 악역이나 할 짓인데.’
“뭐? 초장에 밟아? 대체 무슨 뜻이죠? 공녀님이 언제 아무 이유 없이 그러신 적이 있나요?”
“오히려 사교계에서 소외당하는 영애들의 손을 먼저 잡아주신 분이신데!”
“주목받는 영애가 있으면 키워주셨지 배척하신 적은 없는 분이세요.”
“공녀님의 추천으로 〈메티스〉에 입회하게 된 영애들도 있다는 걸 잊었나요?”
눈에 불을 켜고 내 편을 들어 주는 영애들을 보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일단 사람들의 반응으로 확실한 건 내 말이 바깥에는 안 들렸다는 거다.
‘하긴, 들렸으면 클라티에도 그렇게 시비를 걸진 않았겠지.’
나는 클라티에를 내려다봤다.
쪼렙 악역의 특징이 뭔가.
유치하고 저차원적인 짓을 저지르는데 그냥 무시하기에는 빡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는 조그마한 고구마도 용납하지 않는 로판 독자였다.
“공주.”
“……흐윽.”
“내가 때렸어요?”
“…….”
“아니면 뭐, 내가 욕이라도 했어요?”
아, 클라티에라는 이름 자체가 욕인가.
그럼 욕은 한 거네.
이건 내 실수.
“그런데 다짜고짜 이렇게 울음부터 터트리시다니.”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린 채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몇 살……이셨죠?”
“…….”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렇다.
다 큰 성인이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질질 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클라티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음…….”
나는 할 말을 찾듯 눈을 굴린 뒤 예의를 듬뿍 차린 미소를 지었다.
“토렌시아의 문화는 정말 독특한가 보네요.”
너네 나라는 니가 울면 다 우쭈쭈 해줬냐?
그 적나라한 의미에 영애들이 참지 못하고 조소를 흘렸다.
‘불쌍한 토렌시아. 괜히 추라티에 때문에 욕을 먹네.’
“……제가 감히 어떻게 성녀님께서 남을 해코지했다고 말씀하겠어요.”
클라티에가 문과 부딪친 어깨를 매만지며 가련하게 말했다.
마치 내가 폭력을 행사해서 문에 부딪친 것처럼.
물론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머? 토렌시아의 화법은 굉장히 특이하군요? 공주께서는 제국의 화법을 배우시는 게 좋겠어요.”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올려다보는 클라티에를 보며 나는 생긋 웃었다.
“제국의 화법이 딱히 독특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공주께서 말씀하시는 걸 보니 토렌시아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슨 의미죠?”
“음, 방금 공주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 그건 자칫하면 내가 공주를 밀쳤다고 다른 분들이 오해할 수 있는 언행이었어요.”
“…….”
“적어도 제국에서는 그렇답니다.”
클라티에가 빡친 채 나를 노려보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어쩌지?
내 말은 다 안 끝났는데.
“그리고 그건 바꿔말하자면 공주께서 나를 모함했다는 뜻이에요.”
내 말에 주변에 파란이 일었다.
타국의 공주가 파에라톤 공녀이자 신전이 공인한 성녀를 모함했다는 것은 쉽게 주워 담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함이라니요!”
희게 질린 클라티에가 이를 악물더니 가련하게 고개를 떨궜다.
“……공녀께선 정말 너무하시네요. 제가 언제 공녀께서 저를 밀쳤다고 말한 적이 있나요?”
“없지요.”
“그런데 제 의도를 멋대로 해석해서 모함했다며 없는 죄를 물으시다니. 너무 억울해요. 이거야말로 모함 아닌가요?”
클라티에의 눈동자가 살아났다.
아무래도 제대로 반박해서 내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一.
‘빙고.’
걸려들었구나.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뭐야. 그러면 역시 공녀님께서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으신 거잖아?”
“아까 성녀님이 밀쳐놓고서 아닌 척 발뺌하는 거 아니냐고 누가 중얼거린 거 들었어. 대체 누구야? 이제 말 좀 해보시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은 클라티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