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Baby Runs A Romance Fantasy With Cash RAW novel - Chapter (287)
아기님 캐시로 로판 달린다-287화(287/353)
☆ 제287화 ☆
‘등신.’
내가 왜 네 말에 순순히 대답해줬겠냐.
성녀가 된 이후로 한참 동안 사교계에 나오지 않고 행정업무만 봤다고 하지만, 내가 허투루 사교계의 중심이 된 건 아니었다.
내 안에는 여전히 로판 여주 언니들의 의지와 로판 독자의 영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단 말씀.
“공주께선 아직도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건가요?”
“제국에서는 남을 모함했으면 사과하는 것이 정상이랍니다. 토렌시아에서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요.”
“아, 설마 또 울려는 건 아니죠? 울지 마~ 울지 마~.”
카멜리아 쟤도 진짜 사람 속 잘 긁는다.
앞뒤 생각 안 하고 말해서 그런가.
클라티에는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꽉 틀어쥔 손에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피가 안 통하는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러게 쨉도 안 될 게 왜 먼저 시비 건담?
그때였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차가운 목소리가 물처럼 끼얹어졌다.
“이게 국빈을 대접하는 영애들의 태도인가?”
노기 어린 목소리.
영애들이 놀라서 옆으로 길을 텄다.
그 사이로 에스테반이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 전하. 흑…….”
클라티에가 가련하게 떨며 에스테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그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또르륵 흘렀다.
“……공주.”
에스테반이 클라티에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저, 저는 괜찮아요, 전하 ……. 흑!”
클라티에가 그 손에 얼굴을 묻었다.
꼴값이다, 진짜.
영애들은 당황한 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황제가 쓰러진 지금 황태자인 에스테반의 위상은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다.
아직 대리청정을 선언하기 전이었지만, 이대로 황제가 일어나지 못하면 결국 에스테반이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쥐게 될 것이다.
“그러게 왜 공주님을 괴롭혀선…….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한 영애가 중얼거리는 말에 에스테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괴롭혀?”
“괴롭히긴요! 저거 다 자기 혼자 쌩쇼一.”
“공주께서 먼저 잘못하셨습니다. 파에라톤 공녀를 모욕하셨어요.”
티리엘이 소리치던 카멜리아의 팔을 잡아당기며 대신 말했다.
“슈리엘 공주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하오나…….”
“설령 그렇다 해도 오해겠지. 겨우 그런 일로 이렇게 국빈을 핍박하다니一.”
에스테반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피어났다.
“파에라톤 공녀가 황족이기라도 한가?”
“……!”
에스테반의 말이 담고 있는 저의에 티리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감히 내 친구를 괴롭혀?
“황태자 전하께서도 너무 짓궂으십니다. 영애들이 감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겠습니까?”
에스테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청회색 눈동자가 나를 담고는 아주 기묘하게 빛났다.
“하면 이 상황을 뭐라 설명할 것인가. 아, 황녀가 아니라 성녀 예하셔서 그랬다고 할 텐가?”
“놀랍군요. 제가 성녀라는 것을 전하께서 잊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전하의 태도를 보고 잊고 계신 줄 알았지 뭐예요?”
“남을 핍박하는 것이 성녀가 할 짓인가?”
“모욕과 오욕을 당해도 그저 참고 수긍하는 것이 성녀의 일은 아니겠지요.”
허공에서 에스테반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한마디를 지지 않는군.”
“어머나? 이게 이기고 지는 문제였나요?”
나는 생긋 웃었다.
에스테반은 잠시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클라티에가 에스테반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제야 에스테반은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가 주저앉아 있는 클라티에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머……!”
위기에 빠진 가련한 공주님을 구해가는 왕자님 같은 모습에 영애들이 감탄을 흘렸다.
에스테반은 그대로 영애들을 지나쳐 이곳을 빠져나갔다.
“두 분의 사이가 생각보다 더 각별해 보이네요
“하아, 정말 잘 어울리네요.”
“이대로라면 슈리엘 공주가 황태자비가 되려나요?”
“으, 진짜 싫다. 곤란하면 울음부터 터트리는 황태자비라니.”
“공주씩이나 되시는 분이 괜히 눈물까지 지었겠어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 알겠죠.”
“뭐라고요? 아까 그 말 못 들었어요? 슈리엘 공주가 일부러 공녀님께一.”
“파에라톤 공녀님의 언변이 뛰어난 건 모두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거기 걸려들면 누구나 죄인이 되는 거죠.”
“흥, 본인이 저지른 잘못을 시인하는 거겠죠.”
영애들이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슬쩍 뒤로 빠졌다.
회랑을 조용히 걷는데 한구석에서 뭉쳐있는 영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오늘 미첼로인 영애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거 보셨어요?”
“솔직히 아까 황태자 전하께서 뭐라고 할 때는 앞에 나설 줄 알았어요.”
“아, 그때 티리엘 영애가 나섰죠. 평소라면 미첼로인 영애가 나섰을 텐데.”
“……솔직히 파에라톤 공녀가 없는 동안 미첼로인 영애가 사교계의 중심이나 다름없었잖아요?”
“아무리 두 사람 사이가 좋았다고 한들 이제 슬슬 갈라설 때가 됐죠.”
“그러면 설마一.”
더 멀어진 바람에 속닥거리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어찌나 대화에 열중했는지 내가 지나가는 줄도 모른다.
‘흠.’
제국에는 정말 수많은 귀족들이 있다.
아무리 명성이 높다고 해도 모두가 내 편일 수는 없다.
어쨌든 권력은 제로섬 게임이나 마찬가지고 귀족끼리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또한 시국이 시국인 만큼 클라티에를 통해 에스테반에게 연을 대려는 사람들이 꽤 있을터.
하지만.
‘과연 대놓고 파에라톤과 타렌카와 척을 지면서까지 그럴까?’
클라우디아와 내 사이를 놓고 궁예하는 것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러나一.
‘아까 클라티에가 피해자 코스프레할 때 대놓고 날 욕하며 함께 모함하던 사람들은 다르지.’
에스테반이 클라티에를 데리고 나갈 때 은근슬쩍 나를 까던 말도 그렇고.
저런 이야기는 적어도 내가 없는 데에서, 내 귀에 안 들리도록 했던 것 같은데.
단순히 내가 요즘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배짱을 부리는 걸까?
회랑 모퉁이를 한 번 더 돌자 완전히 한적해졌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는 내 뒤로 거리를 둔 채 따라붙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회랑 끝에 있는 작은 오픈형 휴게공간에서 멈춰 섰다.
소파를 지나 서가에 가서 책을 구경하다 입을 열었다.
“어때?”
“아까 얼굴을 다 확인했어. 그 중 몇몇은 내가 알기로 은밀한 모임에 참여한 전적이 있어.”
사이비 모임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할 일 많아 죽겠는데 짜증 나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꽤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아주 못된 짓을 꾸미는 사람처럼.”
나는 서가에서 뒤를 돌았다.
곧장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기묘한 것은 그렇게 말한 상대의 얼굴에도 꽤나 짓궂은 웃음이 떠올라 있다는 것이다.
못된 짓을 꾸미는 사람처럼.
“착각이야.”
나는 씨익 웃었다.
* * *
“성녀 예하께서 요즘 자주 얼굴을 비추셔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너무 바쁘셔서 그간 얼굴을 뵙지 못해 너무 슬펐어요.”
“어머, 그랬어요?”
흐앙, 어린 영애들 너무 귀여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또랑또랑 말하는 애기들을 보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저는 그래서 광장에 걸린 예하의 얼굴을 감상하기도 한답니다.”
“…….”
아니, 그건 좀.
“저어, 그런데……. 혹시 미첼로인 영애와 싸우셨어요?”
“네?”
“아니, 두 분 사이가 예전 같아 보이지 않아서.”
“어머, 그런 적 없어요. 저희 아직도 서로 잘 지내요.”
“죄송해요. 제가 실례를…….”
영애는 멋쩍어하며 사과했지만, 내 말을 믿는 것 같진 않았다.
그야 그럴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클라우디아는 내가 있는 테이블이 아니라 다른 테이블에 앉은 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는一.
‘클라티에.’
나와 요즘 대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클라티에가 앉아있었다.
클라티에가 동석할 것을 권했고 클라우디아가 받아들인 것이다.
두 사람이 동맹을 맺은 거나 다름없는 상황.
‘덕분에 관람자들 입장에서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돌아가고 있겠지.’
슬슬 움직여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어머, 저길 봐.”
각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영애들이 대화를 멈춘 채 한쪽을 바라보았다.
루아티샤가 슈리엘 공주와 클라우디아가 있는 테이블에 다가간 것이다.
“웃기지 않아? 바빠서 사교계에 나오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계속 얼굴 비추면서 저러는 거.”
“성녀 예하께서 일로 바쁘셨던 건 사실이야. 성녀란 이유로 얼마나 많은 재해를 수습하셨는지 잊었어?”
“흥, 그럼 계속 수습이나 하던가. 사교계 퀸 자리를 빼앗길 거 같으니까 저러는 거잖아. 성녀라는 사람이 어쩜 저렇게 속물적이고 권력만 추구할까? 속 보여!”
“……너 왜 그래?”
“뭐가?”
“예전엔 누구보다 성녀 예하를 좋아했잖아.”
“그땐 내가 미쳤었지.”
혀를 쯧, 하고 찬 영애가 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슈리엘이 생긋 미소를 지으며 루아티샤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머. 어서 앉으세요, 공녀.”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먼저 테이블로 찾아오는 것.
이건 보통 서열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하는 짓이다.
후작 부인이 황후의 테이블로 찾아가지, 황후가 후작 부인의 테이블로 찾아가진 않으니까.
‘흥, 첫판은 내가 이겼어.’
기선제압 성공이다.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정도로 초조했나 봐?’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던 미첼로인 영애가 루아티샤를 배신하고 자신과 힘을 합칠 것 같으니 당연하겠지.
슈리엘은 “아아…….”하며 머리를 짚었다.
“시차 적응이 아직 안 되어서 그런지 요즘 통 잠을 제대로 못 자요. 머리가 계속 아프네요.”
“저런……. 제가 잘 아는 명의가 있는데 혹시一.”
“아, 약은 괜찮아요. 에스테반 전하께서 제게 황궁의를 붙여주셨거든요.”
“황궁의를요?”
“네, 아슬란 자작이요.”
“아슬란 자작이라면一.”
“황제 폐하를 비롯해 직계 황족만 진료하는 황궁의 아니에요?”
영애들의 말에 슈리엘은 놀란 척 입술에 손을 대었다.
“어머?! 그래요? 저는 몰랐어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정말 다정하시네요.”
“역시 황태자 전하만한 사람이 없는 거 같아요.”
“공녀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모두의 시선이 루아티샤를 향했다.
당연하지만 이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은 슈리엘의 사람들이었다.
루아티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애매하게 끄덕였다.
“예에, 뭐.”
“어머? 공녀님께서는 어째 별로 동의하시지 않나 보네요?”
“왠지 모르게 탐탁지 않으신 느낌인데.”
“슈리엘 공주님이 황태자 전하의 사랑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게 아니면요?”
“하아……. 남의 연애사니까 굳이 말을 얹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루아티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영애들도 참 눈치가 없으시군요.”
“네?”
“황태자 전하께서 슈리엘 공주를 아껴서 아슬란 자작을 붙이신 거겠어요?”
“그게 무슨…….”
“황제 폐하께서 환후로 와병 중이세요.”
“…….”
“아슬란 자작은 황제 폐하의 환후를 치유하는 황궁의 중 한 명이고요. 그런데 그런 아슬란 백작에게 공주가 시차 적응할 수 있게 돌보라고 했다?”
루아티샤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소올직히 슈리엘 공주 더러 욕먹으라는 거죠.”
“…….”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슈리엘은 찻잔을 꽉 쥔 채 루아티샤를 노려봤고, 영애들은 숨을 죽인 채 눈치를 살폈다.
‘뭐, 뭐야. 오늘 공녀가 좀 평소와 다른데?’
물론 지지 않고 반박하고 받아치는 거야 원래 파에라톤 공녀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하는 태도가 어째서 인지一.
“그리고…… 설령 눈치 없이 칭찬으로 들으셨어도 에스테반 황태자 전하에게 대한 걸 저한테 물으시면 안 되죠.”
루아티샤가 푹 한숨을 내쉬며 영애들에게 물었다.
“일부러 슈리엘 공주에게 꼽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꼬, 꼽?”
“다들 알고 있잖아요. 에스테반 황태자 전하께서 몇 년째 저를 쫓아다녔다는 거.”
“고, 공녀!”
영애들이 하얗게 질린 채 루아티샤를 바라보았다.
루아티샤가 원래 대담한 발언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선을 가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다니?!
“슈리엘 공주는 타국에서 와서 모르셨을 거 같은데. 굳이 이런 상황에서 저한테 묻는 건…….”
전여친一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구애를 받은 여자에게 얘 남친 어떠냐고 묻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루아티샤가 슬쩍 눈을 들어 슈리엘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슈리엘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나는 에스테반 황태자 전하께 관심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하지만 친구는 골라서 사귀는 게 좋겠어요. 지금 여기 있는 영애들은 전부 공주의 편을 드는 척하면서 놀리고 있잖아요?”
아니거든?!
슈리엘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어디로 보나 지금은 슈리엘을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로 치켜올리며 루아티샤를 기죽이는 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약삭 빠른 루아티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루아티샤의 눈동자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 가득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슈리엘과 영애들의 의도를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마치 눈새라도 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