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Baby Runs A Romance Fantasy With Cash RAW novel - Chapter (322)
아기님 캐시로 로판 달린다 외전 (1)화(322/353)
외전 1화
북부의 파에라톤 공작령.
거대한 공작성은 마치 오래된 퇴옥처럼 어두침침하고 싸늘했다.
사람의 온기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는 그곳을, 한 남자가 거닐고 있었다.
‘……파에라톤의 영광이 깃든 성이 하루아침에 이렇게까지 변할 줄이야.’
남자, 에르켈 자작은 착잡한 심정으로 캄캄한 복도를 바라보았다.
‘꼭 아가씨께서 집에 돌아오시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군.’
네 살배기 루아티샤가 파에라톤 공작령에 오기 전.
공작성은 어린아이 웃음소리는커녕, 사람 냄새 하나 없이 삭막하기만 했다.
그랬던 곳을 단번에 활기차고 밝게 만든 것은 루아티샤였다.
햇살 같은 환한 웃음으로 얼어붙은 북부를 순식간에 녹이던 아이.
‘아가씨께서 계시기만 했어도…….’
에르켈 자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루아티샤를 잃어버린 지금.
파에라톤 성은 다 무너진 폐허와 같았다.
기실 과거의 공작성보다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태양을 잃어버린 자들이 어찌 멀쩡히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그 태양을 지켜내지도 못했는데……!’
에르켈 자작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여 회랑을 지났다.
모퉁이를 돌자 희미한 불빛이 유령처럼 새어 나오는 방이 보였다.
에르켈 자작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불빛은 거울 수정이 유일했다.
다섯 남자가 그 앞에서 망부석처럼 우뚝 굳어 있었다.
거울 수정 안에는 지금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가 환히 웃고 있었다.
[루루는 아빠랑 평생 살 거예요!]루아티샤 파에라톤.
파에라톤 공작가의 막내가 그렇게 말하며 해사하게 손을 뻗었다.
파에라톤 공작은 저도 모르게 거울 수정 속 딸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닿는 것은 차갑고 무기질적인 거울 수정의 표면뿐이었다.
“…….”
파에라톤 공작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영상 속 루아티샤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꽃받침을 만들어 보였다.
[루루꽃!]훌쩍.
“……?”
작게 들린 울음소리에 에르켈 자작이 고개를 돌렸다.
제온이 붉어진 눈가를 누르고 있었다.
‘저 제온 파에라톤이 눈물이라니……!’
세상이 멸망할 징조인가.
아니, 세계 멸망까지는 가지 않아도 파에라톤 공작가는 이미 멸망한 분위기였다.
“크흠, 공작 각하, 후작 각하 그리고 도련님들.”
파에라톤의 충신 에르켈 자작은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심정은 알겠습니다만 이럴 때일수록 굳건하셔야 합니다.”
“굳건? 루루꽃이 꺾였는데 굳건이라고?”
“내 막내가 내 곁에 없는데.”
“내 동생을 영상으로만 만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미 살아갈 의미 따위 없어.”
“그딴 말 할 거면 내 솜뭉치를 돌려줘.”
“에르켈 자작, 말을 가려 하게.”
순식간에 다섯 남자의 표적이 된 에르켈 자작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물러서고 싶은 발에 힘을 꾹 주고 버텼다.
‘아가씨께서 떠나시기 전 내게 신신당부하셨는걸……!’
남은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고.
“그, 멀리 계신 아가씨께서도 이러시는 걸 바라지 않을 겁니다. 가족분들이 잘 계시길 원하겠지요.”
“…….”
파에라톤 공작이 아픈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밤하늘에 촘촘한 별.
그중 유독 밝게 빛나는 별을 눈에 담으며 파에라톤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 딸은 분명 그걸 원하겠지. 다정한 아이니까.”
“각하…….”
“저 하늘의 별처럼 먼 곳에 있으면서도 이 아빠를 밝게 비춰 줄 아이다.”
파에라톤 공작의 말에 가족들이 전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루루별이라도 바라보듯 애처롭고 처량한 시선.
에르켈 자작의 등 뒤로 또다시 식은땀이 흘렀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식은땀이었다.
결국 에르켈 자작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아니, 별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아가씨께 큰일이라도 난 것 같잖아요!”
자신 역시 아가씨가 없는 공작성을 보며 허전함에 잠겼지만, 이건 좀 오버 아닌가!
“아가씨께서는 그냥 약혼자분과 여행을 떠난 것뿐인데!”
그 말에 가족들이 흉흉한 얼굴로 에르켈 자작을 돌아보았다.
다섯 쌍의 안광이 사납게 번뜩였다.
“그게 큰일이 아니면 대체 뭐가 큰일이지?”
으르릉거리는 맹수들의 모습에 에르켈 자작은 침착하게 뒷걸음질 쳤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지금 자신이 제일 큰일 났다는 걸.
* * *
“으음…….”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어?”
‘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나는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침인데도 붓기 하나 없이 완벽한 얼굴.
대충 걸친 셔츠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대흉근과 복근이 아주—
‘으아, 아침부터 코피 터질 뻔.’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시드의 손바닥이 내 얼굴을 따라왔다.
“……?”
“눈부실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면서 시드가 슬쩍 웃는데.
‘하.’
얘는 아직도 잘 모르는구나.
아침햇살 따위보다 네 얼굴이야말로 눈부시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계속 햇빛을 가려주고 있었던 거야? 그냥 커튼 계속 치고 있지. 팔 아팠겠다.”
“그럼 주인님 얼굴이 잘 안 보이니까.”
“뭐야, 내가 자고 있는 거 구경했어? 깨우지.”
나는 머쓱해서 입가를 슬쩍 닦았다.
다행히 침은 안 흘리고 잔 것 같았다.
“여행 첫날부터 내가 늦잠 자서 심심했겠다.”
“재밌었어.”
“응?”
“이대로 계속 보고 있기만 해도 좋을 정도로.”
“……?!”
나, 대체 어떤 자세로 잠을 잔 거야?
설마 이상한 잠꼬대를 한 건 아니겠지?
어느 정도여야 자는 모습이 재밌다는 말까지 나오지?!
‘잠버릇이 그 정도로 험하진 않을 텐데?!’
“왜 그래?”
끙끙거리는 날 보고 시드가 물었다.
“아니, 그게……. 내가 뭐라고 했어?”
“흠?”
“아니, 자면서— 그,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하구.”
내 말에 시드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라 하긴 했지.”
“뭐, 뭐라고 했는데?”
“알고 싶어?”
“…….”
알고 싶지 않았다.
모르고 싶었다.
이왕이면 내가 잠꼬대했다는 사실도.
“나보고 인류에 이바지하라던데.”
“으응……?”
시드는 황태자.
임금을 갈아 넣는 조선 행정의 계승자인 나는 당연히 황제와 황태자는 열일해서 백성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잠꼬대로 말할 정도라고?’
평소에 내내 그런 생각 하면서 사는 것도 아닌데?
의아한 내 눈빛에 시드가 미소 지었다.
스윽—.
그가 내게로 몸을 숙였다.
셔츠 사이로 단단한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이 다 보였다.
무게가 실리며 침대가 기울어졌다.
체열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귓가에 시드의 숨결이 닿았다.
솜털이 바짝 일어난다.
나도 모르게 숨까지 멈춘 순간.
아침이라 살짝 잠긴, 나른한 목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그러려면 애 열둘은 낳아야 한다고.”
“……!!!”
화아아아악—!
내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정작 폭탄 발언을 한 시드는 미소 지은 채 유유히 몸을 물렸다.
“우리 힘내야겠다, 그치.”
—라는 요망한 말을 남기며.
‘지, 진짜 내가 그런 잠꼬대를 했다고?!’
“노, 농담이지?”
“글쎄.”
“거짓말 아냐?!”
“그렇게 생각해?”
“…….”
솔직히 자신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내가 할 생각이긴 해!’
무의식 중에 계속 생각해서 잠꼬대로 튀어나올 정도로.
내 얼굴을 본 시드가 중얼거렸다.
“진짜 그런 생각 계속했나 보네.”
“어?”
“조금 기쁜데.”
“내가 잠꼬대했다는 거 거짓말이지!”
“지금 그게 중요해?”
시드가 씨익 웃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웃는 얼굴이 엄청 섹시했다.
‘열둘이 아니라 열넷은 낳아야—는 무슨!’
나는 정신 차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나른한 시드의 얼굴과 하얀 셔츠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시드의 몸은 너무 고자극이었다.
“황태자 전하는 은근히 여우야, 여우.”
“은근히는 무슨. 대놓고 여우지.”
“저 여우짓에 루아티샤가 완전 말린다니까.”
친구들이 했던 말이 뇌리에 스쳤다.
나는 얼굴이 발갛게 익은 채 힐끔 시드를 바라보았다.
시드가 해사하게 웃었다.
“우리 빨리 결혼해야겠다, 그치.”
“……거짓말하는 남편은 별로인걸.”
“커피 내려주는 남편은?”
시드가 내게 커피잔을 건넸다.
근사한 브런치가 담긴 트레이는 덤이었다.
“와…….”
침대 위에서 브런치라니, 로망 중의 로망이었다.
그리고 현실은 로망보다 더 완벽했다.
적당히 씁쓸하면서도 향미가 좋은 커피에 따끈따끈한 프렌치 토스트.
그리고 잘생기고 귀엽고 섹시한 남편까지.
‘이 정도면 완벽한—.’
“완벽한 결혼 생활이겠지?”
시드가 내 입에 귤을 까 넣어주며 말했다.
나는 그 귤을 받아먹다가 멈칫했다.
‘이 귤, 살짝 얼어 있는데?’
그것도 아예 막까지 다 제거한, 포들한 알맹이만 있는 귤이었다.
순간 예전에 시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약혼도 하기 전의, 날 꼬시면서 했던 말.
“결혼하면 매일 밤 같이 자고 매일 아침 같이 일어나자. 내가 아침에 침대로 커피랑 브런치 가져다줄게. 주인님 아침마다 커피 마시잖아.”
“진짜 잘할게. 나랑 결혼해주면 매일 과일 깎아주고 다리 마사지해줄게. 아니다. 그냥 걷지 마. 내가 안고 다닐게.”
“귤 먹을 때 하얀 거 하나하나 다 떼줄게. 아예 귤 막까지 다 까서 얼려줄게. 나는 바로 얼릴 수 있어.”
‘……그때는 진짜 아무 말이나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로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시드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짜로 해주고 있다.
“왜? 더 차갑게 해줘? 남부라서 좀 덥지?”
그것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하긴, 시드는 빈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라면 절대로.
“황태자 전하께서 차려주시는 브런치라니. 너무 호사스러워서 황공하네.”
“난 황태자이기 전에 주인님의 노예니까.”
“아직도 그 소리야?”
“아직도라니, 난 평생 주인님 노예로 살 건데.”
시드가 내 입에 새로운 귤을 넣어주며 이어 말했다.
“여기서 새로운 직군을 추가하자면 주인님 남편 정도일까?”
“이건 결혼 생활 미리보기야?”
“응, 별점 어때?”
시드에게도 어느새 내 말투가 옮았다.
나는 씨익 웃었다.
“흠, 나쁘지 않은데?”
“10점 받으려면 더 노력해야겠네.”
시드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안아 들었다.
“시드?”
“걷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안고 다닌다고.”
“아니, 진짜로?”
“주인님한테 하는 말은 전부 다 진심이야. 항상.”
나는 내려달라고 하려다가 얌전히 몸을 맡겼다.
솔직히 안정적으로 내 몸을 받치는 단단한 팔뚝이랑 탄탄한 가슴이 기분 좋은걸.
여긴 우리 둘밖에 없고.
거기다…….
‘코앞에서 보이는 시드 얼굴은…….’
힐끔 시드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시드가 눈매를 움찔하더니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혹하지 마.”
“내가 뭘 어쨌다구.”
“지금 나 유혹하고 있잖아.”
“아니, 내가 언— 읍……!”
어이없어서 항변하던 입술이 가로막혔다.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을 짓눌렀다.
이내 내 입술도 똑같이 뜨거워졌다.
내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발끝까지 짜릿해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시드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더 깊게 맞닿는다.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귤 맛으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시드의 머리칼을 헤집던 내 손이 그의 셔츠를 꽉 움켜쥐는 순간.
콰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마마! 파파!”
앳된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시드를 밀쳐냈다.
소드 마스터의 힘에 시드가 무방비하게 떨어져 나갔다.
“마마?”
“니, 니케!”
“마마, 왜 그렇게 얼굴이 새빨개?”
“어, 어어? 그냥 더워서.”
“왜 더워?”
니케가 고개를 갸웃하며 순진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양심이 아파 와서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우, 우리 니케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공작령에서 에르메스 짹과 쿠키나 먹고 있을 애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내 물음에 니케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니케 들었어!”
“뭐, 뭐를?”
“둘째가 생겼다며!!!”
“……어?”
“니케 동생!”
……뭔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