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186
185화.
응접실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안토니오는 자신의 꽉 쥔 주먹을 내려다보다가 펼쳤다. 텅 빈 손바닥이 보였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한 가지를 깨달았다.
단지 대화를 청했을 뿐인데, 어찌하여 케일 헤니투스가 거래를 청할 것이라, 권력을 탐할 것이라 생각했을까.
안토니오는 자신의 텅 빈 손바닥에 가면이 보이는 듯했다. 귀족이라는 이름의 가면. 자신도 귀족의 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문을 연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의미를 묻는 안토니오에게서 긴장감이 드러났다.
왕국이 원할 때 제국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라.
잘못 알아들으면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특출한 것 없는 로운 왕국이 제국을 향해 칼을 들이민다는 것으로 들릴 수 있었다.
“안토니오 공자.”
하지만 오히려 케일은 그에게 되물었다.
“제국과 전쟁이라도 하자고, 그게 왕세자 저하의 뜻일까 봐 걱정되는 겁니까?”
맞다.
왕세자가 원하는 욕망이 혹여나 제국이나 타국과의 전쟁일까 봐. 그것이 걱정되었다.
안토니오는 상대방의 슬쩍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난 분명히 말했습니다.”
케일은 자신이 했던 말을 한 번 더 내뱉었다.
“왕국이 원할 때라고요.”
왕세자가 아니라, 왕국이 원할 때.
그 둘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담겨져 있었다.
안토니오는 그 차이를 그제야 깨달았다. 케일은 그가 깨달은 것 같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왕국을 위해 일하는 기예르 공작가라면 이 말뜻을 알겠지요?”
왕국을 위해.
안토니오는 그 말이 속에 훅 들어왔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왕국 전체가 제국으로 향하는 문을 열지도 모를 상황.
그건 제국에서 로운 왕국이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만큼의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의미했다.
왕국 전체에는 왕가와 귀족, 백성, 모두가 담겨져 있었으니까.
‘…제국이 무슨 짓을 한 건가?’
제국과 가장 가까운 서남부를 지배하는 기예르 공작가. 그 공작가의 후계자임에도 안토니오는 제국이 할 만한 짓이 무엇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게 더 심각한 일임을 깨달은 그의 입이 곧바로 케일을 불렀다.
“케일 공자-”
“스스로 알아내세요.”
제국이 무슨 짓을 저질렀냐고 물으려던 안토니오는 선을 그어버리는 대답에 입을 닫아야 했다.
딱히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현재 약점이 잡힌 상태라, 안 그래도 요구하는 것은 웬만하면 군말 없이 해야 할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왕국과 관련된 제국 일이라면 기예르 공작가 스스로 알아내는 것이 맞았다.
직접 조사하거나, 아니면.
“…왕세자 저하께 여쭤보겠습니다.”
공작가 위의 왕가에 물어보아야 한다.
안토니오는 자신의 대답을 당연하게 여기는 케일을 보며 은밀히 제국에 대해 조사하고 서남부 방어책을 한 번 더 점검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반응이 케일이 원한 반응이었다.
긴장감을 가진다.
더불어 은밀히 제국을 주시한다. 동시에 권력이 아닌 왕국 전체에서 벌어지는 흐름에 관심을 가진다.
왕국 한 지역의 권력을 쥔 귀족가가 이런 태도를 취하면 케일 입장에서는 이득이었다. 케일은 기대고 있던 탁자에서 몸을 떼며 안토니오와 마주했다.
“그럼 생각해 보시고 올바른 결정을 하시길 바랍니다.”
케일은 더 대화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리고 뭐든 요구는 짧게 말하는 편이 좋았다.
물론 협박도 잊지 않았다.
“건넨 자료들은 복사본입니다. 원본은 제 손에 있으니, 약점이 잡힌 입장이라는 거 잊지 말고 결정을 하셨으면 좋겠군요.”
하.
안토니오는 실소를 흘렸다.
그 행동에 케일은 인상을 찡그렸다. 협박을 했는데, 웃는다.
‘…이상한데.’
분명히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은데, 안토니오는 고뇌는커녕 말끔한 얼굴에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왜 웃지?
케일이 의문을 가졌을 때, 안토니오는 반대로 시원한 기분을 느꼈다.
‘할머니 말씀이 모두 맞는 건 아니었어.’
약점을 쥐고서 요구하는 것이 왕국을 위한 일뿐인 귀족은 제대로 된 귀족이었다. 그런 귀족을 만난 기분에 안토니오는 무언가 머릿속에 막혀 있던 것이 트인 기분이었다.
“케일 공자는 귀족이군요.”
“당연한 말씀을.”
케일은 그래도 안토니오에게 자신의 말이 제대로 먹혔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안토니오의 기준을 넘었나 보군.’
사람을 나누는 안토니오에게 ‘귀족’이란 말을 들었으면, 그럭저럭 좋게 평가되었다는 소리였다.
‘이러면 나머진 왕세자가 알아서 하겠지.’
자신이 가진 자료를 넘기면, 왕세자는 알아서 안토니오의 목줄을 쥐고 그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조종할 것이다.
케일은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자 마음이 흡족해졌다.
그러나 계획보다 조금 틀어진 것이 있었다.
“바쁘실 테니,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접실을 나가려는 케일에게 안토니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습니다, 케일 공자.”
“…네?”
케일은 놀라서 되돌아봤다.
“여러모로, 고맙군요.”
말끔하게 웃어 보이는 안토니오에게서 알 수 없는 활기가 느껴졌다. 케일은 예상과 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안토니오를 보며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아졌다.
‘…제대로 협박해서 뭘 뜯어낼 걸 그랬나?’
대범한 귀족 행세를 한답시고, 기예르 공작가에게는 자잘하게 평가될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괜한 아쉬움이 찾아왔지만, 케일은 웃는 안토니오에게 슬쩍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곤 응접실을 벗어났다.
일단 오늘 해야 할 일은 대충 끝났다.
물론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오늘이 아닌, 그다음 날. 12시가 지난 새벽이 되어서야 처리할 수 있었다.
손님방 중 가장 큰 방. 케일은 자신에게 배정된 침실의 푹신한 침대에 기대어 영상 통신구를 쳐다봤다.
-연결했다!
지이잉.
영상 통신구 위로 화면이 나타났고 라온은 온과 홍이 있는 구석으로 날아갔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아이들 앞에는 먹을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케일은 조용히 고기를 씹어 뜯는 라온을 쳐다보다가 영상통신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케일 공자.
당연히 왕세자 알베르의 얼굴이 보였다.
마지막 남은 일은 왕세자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모름지기 선 난장판 후 보고 아니겠는가.
왕세자 알베르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다.
케일은 침대에 기댄 자신의 건방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알베르를 이해했다. 본인은 새벽까지 일을 하다가 간신히 짬을 내어 영상통신을 했는데 귀족 자제 나부랭이는 침대에 편히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배부르고 등 따신 케일은 그 정도 왕세자의 속상함은 이해했다.
그렇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저하-”
그런데 그 말을 끊고 알베르의 목소리가 침실 안에 울 려퍼졌다. 알베르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뇌에 가득 찬 목소리를 내었다.
-자네는 정말 이 왕국의 별이 아니라, 빛이네.
…뭐야.
케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베르는 오랜만에 혀에 기름칠을 해댔다.
-자네라는 빛이 있다면 이 로운 땅 위의 어둠도 두렵지 않을 걸세. 자넨 떠오르는 별이 아니라, 정말 이 왕국의 가장 빛나는 별이야.
…왜 이래?
배부르고 등 따신데, 기분이 안 좋아졌다.
“저하, 일어날까요?”
케일은 기대고 있던 침대 등받이에서 일어나 똑바로 앉으려 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네. 내 모두 들었어.
알베르는 언제 고뇌했냐는 듯 화사한 미소를 듬뿍 그려보였다. 누가 보면 어디 꽃밭에 구경 온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베르는 꽃밭보다 더 좋은 데에 온 심경이었다.
-기예르 영지에 인신매매범들을 잡는다고 피를 토하며 쓰러질 뻔했다지?
“…그렇긴 그렇습니다만.”
피를 토하거나 쓰러질 뻔하진 않았는데.
-엄청난 카리스마로 인신매매범들을 잡아내고, 그들의 건물을 은빛 방패로 부수고, 잡혀 있던 왕국민들을 구했지?
“…그렇죠?”
그렇긴 그런데.
조금 과장된 것 같은데.
-일부러 술을 주문해 위장한 상태로, 음식점 창가에서 인신매매범들의 동태를 살피다가 홀로 기사 한 명만 대동한 채 당당히 맞섰고?
“…그만하죠?”
결국 케일이 인상을 찡그렸고, 알베르는 음흉한 미소를 그렸다. 그는 피곤에 가득 차 보이는 얼굴과 달리 아주 상쾌해 보였다.
그 모습에 케일은 왕세자 알베르에게 자세한 보고는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대충 소식이 다 전해졌나 보군요.”
왕가 소속 정보원이 기예르 영지에 있을 줄은 알았다.
왕세자는 서툰 사람이 아니니까.
다만 조금 과장되었다 해도 상당히 사실에 근접한 정보가 이렇게 빨리 전해질 줄은 몰랐다.
-그래. 정보원을 통해 지금 영지 내에서 퍼지고 있는 소문을 들었지.
알베르 입에서 나온 이야기 그대로, 기예르 영지엔 빠르게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공작가에서 막을 방도가 없는 게 소문이라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소문을 들은 왕세자 알베르가 이번 일에 대해 평했다.
-좋게 미친놈.
알베르는 제 말에 히죽 웃어 보이는 케일의 꼴이 탐탁지 않았다.
소문 외 정보를 통해 듣기로는 피를 토한 건 아니지만, 피가 섞인 기침을 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저리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리라.
그러면 좀 자다가 아침에 보고해도 될 것을. 쓸데없이 성실해서 이 새벽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알베르는 그래서 이놈이 싫어도 가장 편했다.
자신과 비슷했으니까.
-보고할 게 뭐지?
아픈 놈을 오래 붙들고 있을 만큼 고약한 심성도 아니었다. 더욱이 곧 카로 왕국 경매장에 가서 자신 대신 일해야 할 녀석이었다.
“간단한 보고입니다. 서류는 곧 보내 드릴 건데, 크리쉬 남작가와 거래한 상단이 제국 출신이고, 크리쉬 남작가가 과거 어린아이 납치를 암살 길드에 의뢰한 증거가 있습니다.”
알베르는 순간 두통이 밀려왔다.
-그게 간단한 보곤가?
“네. 곧 기예르 공작가에서 연락을 할 겁니다. 목줄 채웠으니, 그 목줄 쥐고 이용해 먹으시면 됩니다.”
-…갑자기 피곤해지는군.
케일은 그 말과 달리 활기가 넘치려고 하는 알베르가 보였다. 가만히 보면 왕세자는 누구 부려먹을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제대로 목줄 쥐고 흔들어보지.
“네. 왕국의 별인 저하이시니 무슨 일이든 그 혜안으로 잘 해내실 겁니다.”
케일은 다 말하고 나서 기묘함을 느꼈다. 그리고 곧 이유를 깨달았다.
본론이 다 끝나고 자신이 아부를 했음에도 알베르가 영상 통신구를 끊지 않았다. 케일은 왕세자가 할 말이 있나 싶어 표정이 굳어졌다.
‘일시킬 건가?’
왕세자에게 기예르 공작가 뒤처리를 맡겨 꽤 흡족했던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때, 왕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푹 자라.
뚝.
그리고 영상통신이 끊겼다.
왕세자는 아주 먹기 싫은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것 같은 얼굴을 마지막으로 영상통신을 끝내 버렸다.
‘찜찜한데?’
케일은 얼른 영상 통신구를 저 멀리 치워 버렸다.
그리고 라온에게 하나를 부탁하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라온.”
“왜 그러나, 인간? 왕세자 말대로 푹 자라!”
“어, 잘 거야. 그리고 당분간 왕세자 영상통신 신호 오면 무시해.”
“알았다!”
케일은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는 라온의 앞발을 보며 당분간 왕세자의 연락을 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올해 안으로, 아니, 내년 안으로 북쪽, 제국 다 치워 버리고 별장에서 쉬자.’
정말 소박한 소망과 함께 케일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그를 두고 한쪽 구석에서 평균 9세들은 대화를 나눴다.
“카로 왕국은 저번에 사막만 구경했다! 이번에는 다 본다!”
“여행은 참 좋은 것 같은데!”
온은 조용히 케이크들을 먹어치우며 동생들의 대화를 가만히 경청했다. 라온과 홍은 다음 여행지에 대한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집도 좋지만 여행도 좋다!”
“맞는데! 계속 이렇게 다 같이 여행 다니니까 좋은데!”
“맞다! 동대륙도 궁금하다. 다 가보자! 우리는 위대해서 할 수 있다!”
케일이 들으면 경악할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온은 힐끗 잠든 케일을 쳐다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생들의 바람을 꼭 들어주고 싶었기에 꾹 입을 다물었다.
온의 침묵 속에서 홍과 라온의 전 세계 여행기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날 밤 케일은 악몽을 꿨다.
***
“공자님, 얼굴이 안 좋으신데요?”
“악몽 꿨어.”
케일은 지독한 악몽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주렁주렁 짐덩이 같은 놈들을 데리고 세계 일주를 하던 꿈은 실로 끔찍했다. 심장의 활력은 정신적인 대미지를 극복해 주지 못했고, 실로 오랜만에 케일은 창백했다.
“…공자님.”
오랜만에 케일을 만나러 온 이는 창백한 케일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파에른 수도가 악몽이던데요.”
플린 상단의 서자 빌로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케일이 자신의 말에 슬쩍 미소를 그렸다가 지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파에른 왕국 수도 바고 시. 전설이 담긴 장소인 신의 눈물 호수.
그 호수는 아직도 불을 끄지 못했고, 수도 안에선 신의 분노니, 신의 계시니 하며 말들이 많았다.
불 때문에 다친 이도, 피해를 본 이도 없건만, 불안감은 파에른 왕국 수도를 더욱더 잠식해 갔다.
빌로스는 그 일이 케일의 소행이 아닐까 반쯤 확신 중이었다.
“아직도 불 안 껐대?”
그리고 지금 내뱉는 말에 확신했다.
케일 헤니투스 공자가 또 큰일을 벌였구나!
“공자님,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왜?”
태연히 답하는 모습에 빌로스는 답답해져 왔다.
“북쪽이 난리입니다, 난리요. 완전히 난장판입니다!”
“잘됐네.”
“허, 참.”
빌로스는 처음으로 케일 앞에서 대놓고 탄식을 흘렸다. 케일은 이를 가볍게 무시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빌로스, 일단 카로 왕국으로 바로 가지.”
경매장에 가서 경매 대신 사람을 낚아와야 했다.
물론 덤으로 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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