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201
200화.
“성벽을 붙잡아라!”
백작의 외침에 병사들은 곧바로 성벽을 붙잡거나 바짝 엎드렸다.
땅을 뒤흔드는 폭발. 하늘에서의 폭발과 달리 그 여파가 직접적으로 성벽에 느껴졌다. 백작은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인간의 싸움이 아니야.”
인간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이미 그 수준을 벗어났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아들과 백작 부인에게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탄성을 흘렸다.
“…하-”
웃음과도 비슷한 탄성이었다.
어느새 일어선 아들이 다시 작은 방패를 펼치며 백작 부인과 치료사, 신관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백작은 그제야 느꼈다.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싸움.
이제 시작인 저 싸움의 중심에 내 아들이 있구나.
굳건하게 서 있는 아들의 모습이 걱정과 함께 백작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백작은 성벽을 짚고서 천천히 일어섰다.
한편 케일은 백작의 마음을 모른 채, 폭발하는 빛 사이로 번쩍하고 한순간 불타오른 어둠을 보았다.
“…저건 또 뭐야?”
무술 실력이 떨어지는 케일에게 동체 시력 따위는 당연히 없었으므로, 뭐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그건 최한의 힘이었다.
아주 찰나.
미완성의 어둠이 죽은 마나를 집어먹고 폭발했다.
빛과 어둠이 뒤섞인 폭발. 그 폭발이 끝나고 난 자리.
투둑, 투둑.
여전히 빗방울은 떨어졌다.
그 빗방울은 땅이 아닌 죽은 와이번과 죽은 곰족들 위로 떨어졌고, 피와 함께 땅을 적셨다.
툭.
폭발이 지나가고 떠오른 수많은 먼지들을 바람과 비가 순식간에 지워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보였다.
투욱, 툭.
갑옷이 메마른 사막처럼 금이 가며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용을 잡으려는 드워프가 만들었던 갑옷.
그 갑옷에 실금이 생기고, 속절없이 떨어져 진흙 속에 박혔다
“…이 새끼들이……!”
투구의 기사는 이를 깨물며 욕설을 내뱉었다.
“…커헉!”
그는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백호.
백호 가샨이 일으킨 주술로 보호된 한 남자.
최한.
그가 고대의 힘이 만든 검으로 꿰뚫린 어깨를 부여잡은 채 투구의 기사, 드래곤 슬레이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 슬레이어는 시선과 달리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하, 하하-“
최한은 투구의 기사가 피를 토했지만 몸에 상처 하나 없는 것을 확인했다.
저 기사의 갑옷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 갑옷을 파괴한 이는 라온이었다.
기사의 눈빛이 소름 끼치게 변했다. 그의 몸에서 온갖 재해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몸이 검인 것처럼 검 형상의 기운이 기사를 감쌌다.
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용이 있구나. 여기 용이 있었어.”
화염의 드워프족 물건을 부술 존재는 용뿐이다.
그저 자신의 흉내를 낸 뛰어난 마법사의 마법 정도일 줄 알았건만.
분명 용이 어딘가에서 그 고고한 고개를 치켜든 채 구경하고 있을 터. 그러다가 힘 한번 보태는 걸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드워프는 갑옷을 만들어주며 말했다.
‘이건 브레스는 막을 수 없지만, 평범한 성룡의 마법 정도까지는 막을 겁니다.’
‘드래곤 로드도?’
‘없는 존재 이야기를 왜 합니까? 드래곤 로드는 마법의 제왕, 그 마법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진짜’ 드래곤 로드가 있다면 우리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이 갑옷은 고룡의 마법도 한 번만 막아줄 겁니다. 그게 저희 한계입니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고룡, 혹은 그 이상의 용.
그 정도 마법 실력을 지닌 용이 여기에 있다고 판단했다.
고룡은 한 마리뿐일 텐데?
그는 다 죽어가는 고룡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룡이 또 있다고?
“흐, 흐흐.”
그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쓰레기 같은 드래곤 새끼들.
분명 고룡은 도도한 표정으로 저를 포함한 자연의 존재들이 싸우는 걸 유희처럼 지켜보았을 터. 그렇지 않다면 지금에서야 나설 이유가 없었다.
진작 나섰다면, 이미 성룡의 힘인 드래곤 피어와 브레스를 뿌려 자신을 죽였을 터.
아직 자신은 완전하지 않았으니까.
“…커헉.”
기사는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갑옷이 부서지는 순간 고대의 힘을 최한에게서 거둬들여 몸을 보호했지만, 그럼에도 내부는 죽은 마나와 최한의 오러로 충격을 받았다.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도 오랜만이었다.
‘…왕관만 있었다면!’
그것 때문에 그 미친놈한테 머리를 숙였건만!
기사는 완전해지지 못했던 이유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아쉬움이 밀려왔다. 어떤 빌어먹을 놈들이 왕관을 훔쳐가는 바람에 완전해지지 못했다.
재해의 검도 몇 번 부서지며 몸에 한계가 다가왔다. 이 전투에서는 이제 한 번만 더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은 몸이, 그릇이 버티지 못한다.
물론 용잡이의 힘이 하나 더 있었으나, 그것은 어차피 우스운 힘이라 필요하지도 않았다.
지배하는 아우라.
사기꾼이나 가질 법한 그 우스운 힘은 드래곤 슬레이어, 그 이름의 품격에 맞지 않았다.
아우라는 순수한 힘이 없는 허상이었으니까.
투구의 기사는 왕관을 훔쳐간 놈들을 반드시 잡겠다 다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독한 것들.”
하늘 위로 또다시 자신의 힘을 흉내 낸 화살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검은 오러.
마지막으로.
철퍽, 철퍽.
하나둘 진흙을 밟고 일어서는 죽은 와이번과 곰족의 시체들.
거기에 백호를 중심으로 한 호족과, 성벽에서 화살과 투석기를 겨누는 인간들.
기사는 눈을 감았다.
“…졌네.”
이건 누가 보아도 진 싸움이었다.
최한은 기사의 입가에 허무한 웃음이 내걸렸음에도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어깨가 뚫린 왼쪽. 막판에 힘을 거두지 않았다면 최한의 왼쪽 어깨는 불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최한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때였다.
투욱.
마지막 갑옷이 떨어져 나갔다.
투구가 벗겨졌다.
그의 얼굴이 세상에 드러났고, 동시에 기사는 움직였다.
그의 몸 전체를 감싼 기운이 뾰족한 검의 모양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검이 한곳으로 쇄도했다.
“막아!”
가샨이 외치자 호족들이 기사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미 최한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끼이이-!
죽은 와이번들이 느릿하게나마 움직이며 기사의 앞길을 막고서, 어떻게든 기사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다. 죽은 곰족들도 진흙을 밟으며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언제 아군이었냐는 듯 죽은 자들이 기사의 숨통을 조였다.
죽어버린 와이번과 곰족은 기사의 뒤를 미친 듯이 쫒아갔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투구의 기사를 감싼 고대의 힘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기사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달리고 달렸다.
그렇게 성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케일,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푸하, 하하하!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하늘에 자리한 화살이 움직이지 않았다.
재해의 힘을 흉내 낸 화살은 성벽으로 날아오지 못했다.
케일과 투구 기사의 눈이 마주쳤다.
투구 기사는 말했다.
“넌 용의 비호를 받는구나!”
고대의 힘을 쓰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건만, 인간이 용의 비호를 받는다니!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
투구 기사의 눈동자에 악독한 빛이, 깊은 증오가 박혀들었다.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기운이 기사의 몸을 휘감았다.
“네놈은, 이 성은 내가 무너뜨린다!”
하늘에서 빛나고 있던 화살이 사라졌다.
화살 대신 케일은 제 몸을 감싸는 작은 몸통을 느꼈다.
덥석.
투명화한 라온이 케일의 앞에 방패처럼 찰싹 붙어버렸다. 마치 재해의 힘을 저가 받겠다는 듯 날개를 펼치며 케일을 껴안았다.
-난 안 떨어질 거다.
케일은 그 온기를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툭툭 라온의 몸을 두드렸다.
그 모습에 달려들던 최한이 멈칫했다.
이상하다.
저렇게 케일 님이 느긋하다는 건, 별로 위험하지 않단 얘긴데?
그때였다.
투구의 기사가 날아오른 순간이었다. 재해의 검이 당장에라도 성벽을 꿰뚫을 듯한 그 순간.
기사도, 라온도, 다가오던 다른 이들도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케일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곰족 새끼들은 영악하다니까.”
기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방금 전, 케일의 귓가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투명화한 채로 조용하던 메리가 처음으로 다급히 말했다.
“제가 조종하지 않는 곰족들이 움직여요!”
케일은 웃음이 나왔다.
지금 성벽으로, 마치 기사를 막을 듯이 달려오는 곰족 시체들.
저것들 중에 살아 있는 놈들이 있다니.
곰이 죽은 척했다는 소리 아닌가?
케일은 저를 향해 달려드는 척하는 기사를 노려보았다.
“저 새끼도 영악하고.”
다 포기하고 달려드는 척. 그래, ‘척’이었다.
“…다 알고 있었네?”
기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모든 게 연기였다는 듯 증오가 사라진 눈동자로, 품에서 마법 스크롤을 하나 빼 들었다.
곰족들도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마법 스크롤을 꺼냈다.
분명 텔레포트일 터.
호족 가샨이 외쳤다.
“잡아!”
곰족을 잡아라.
백작이 외쳤다.
“쏴라!”
투석기와 화살이 곰족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졌지만 살아야 하지 않겠어?”
뱀을 닮은 얼굴이 미소를 그렸다.
투구가 벗겨지고 드러난 얼굴은 마치 뱀과 같았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케일은 여전히 웃으면서, 제 행동을 유일하게 알아들은 놈을 쳐다봤다.
최한.
모두가 케일에게 다급히 달려갈 때, 이상함을 느꼈던 단 한 사람.
그는 어느새 죽은 와이번을 밟으며 위로 향하고 있었다. 기사의 움직임과 거의 대등했다. 이제 저기 일어서 있는 죽은 와이번의 머리를 밟고 날아오르면 투구의 기사와 닿았다.
케일은 제 몸에서 떨어지는 라온을 느꼈다.
라온의 앞발이 다시 마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최한의 발끝이 와이번 시체의 머리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동시에 투구의 기사는 케일을 응시했다.
그는 몇 초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용의 비호를 받는 네놈은.”
찌이익.
텔레포트 스크롤이 찢겨지고, 기사의 몸이 흐릿해졌다.
흐릿해지는 웃음 속에 진실한 분노가 나타났다.
용의 비호를 받는 자. 실로 죽어 마땅한 자였다.
기사는 여전히 달려드는 최한에게 재해의 검을 한번 휘둘러 쳐내곤, 케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그의 몸은 흐릿해져,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곧 내가 다시 죽이러 오마, 커헉!”
그러나 그는 사라지기 직전, 발목을 잡혔다.
기사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 검?”
아니다. 자신의 검은 아니다.
그러나 재해의 검과 비슷한 검.
폭풍우, 해일, 그리고 화산의 힘이 느껴지는 검.
가짜였지만, 아주 비슷한 검.
기사의 귓가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먼저 죽는다.”
허공.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두 개의 눈동자만이 나타났다.
검푸른 눈동자.
용 특유의 세로로 길게 찢어지고 빛나는 눈동자.
오로지 눈동자만이 나타나 기사를 마주했다.
파지지직.
스파크 소리와 함께 기사의 몸은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몸에 박힌 검은 여전히 회전하고 있었다.
검푸른 동공은 눈을 크게 뜨며 적을 놓치지 않았다.
“커헉! 컥!”
기사가 피를 토해냈다. 최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재해의 검이 약해진 틈을 타 흐려진 검사의 팔을 최한의 검은 오러가 그어버렸다.
촤악!
흐려지던 팔은 잘려 나감과 동시에 제 색을 찾으며 마법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기사는 이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재해의 검.
그것이 다시 기사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만든 가짜 자연을 지우는 파괴적인 힘이었다.
그러나 라온의 마법은 그의 심장에 닿았다.
흉내 낸 마법검이 용의 발톱 모양으로 변해 심장을 움켜쥐었다.
콰직.
기사는 심장 위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용과 가장 닮았으면서도 상극인 힘, 오로지 용의 브레스와 용의 몸만이 버틸 수 있는 재해의 힘이 라온의 마법검을 파괴했다.
채애앵-
마법이 깨지고, 기사의 배, 단전이 위치할 법한 장소에서 꿈틀꿈틀 뱀과 같은 힘이 치솟아 올랐다.
그가 가진 또 다른 고대의 힘.
그것이 움직였다.
케일은 순간 서늘함이 몸을 덮쳤다.
“아?”
그때, 메리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케일은 투구의 기사가 소리 없이 휘파람을 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설마?’
메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조, 조종이 안 돼요!”
케일은 저를 내려다보는 투구의 기사가 속삭이듯이 하는 입모양을 읽었다.
‘아직 안 된다니까?’
최한이 고개를 숙이고 제 발목을 잡는 존재를 내려다봤다.
와이번 시체였다.
와이번은 죽어도 드래곤 슬레이어의 노예였다.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와이번의 겉가죽이 부글거리며 끓는 물처럼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케일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피해라!”
터진다.
저건 누가 봐도 터지기 전의 모습이었다. 투구의 기사를 쫓아 성벽 가까이로 온 와이번들. 그 시체들이 터지면 성벽이, 호족이 위험했다.
투석기와 화살이 있는 곳엔 실드를 펼치지 못했다. 곰족을 향해 공격을 펼쳐야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곳엔 병사들이 있었다.
케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래서 전쟁이 싫었다.
“하하하!”
투구의 기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케일의 일그러진 꼴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파지지직.
그의 몸이 흐려졌다.
최한이 발목을 잡힌 순간, 메리가 와이번 조종을 할 수 없는 순간, 케일이 더 이상 힘을 쓸 여력이 없는 순간.
그리고 여전히 마법만 쓰는 용의 존재.
투구의 기사는 이를 모두 노렸다.
콰아앙!
와이번 시체 하나가 터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가장 가까이서 기사와 함께 달아나려던 이들이 터져 나갔다.
“으아악! 우릴 왜!”
와이번들은 적아의 구분이 없었다.
곰족도 함께 죽였다.
“으아아악! 어떻게 이런!”
“아, 안 돼! 크아악!”
호족들은 도망치며 그 광경을 허망한 얼굴로 쳐다봤다. 아군을 죽이다니? 기사는 곰족과 와이번을 죽이며 자신이 피할 틈을 만들었다.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케일은 다급하게 병사들을 향해 방패를 펼쳤다.
투구의 기사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왜 자연이 저 그릇도 안 되는 놈에게 고대의 힘을 허락했는지 몰라도, 고대의 힘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이를 주인으로 모셨다. 그래서 보통의 인간은 한 가지의 고대의 힘도 겨우 받아내는 법이었다.
‘나약한 놈.’
검보다 방패 같은 것이 저 자식을 주인으로 택한 이유가 있을 터.
세상에 이유 없는 것은 없었다.
기사는 저를 잡는 것보다 병사들을 살리려고 무리하게 방패를 펼치는 놈을 비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끼이이이-!
일순간 성벽 근처에 그림자가 졌다.
모두가 잊고 있던 존재.
15m의 하얀 와이번.
그것은 결코 주인의 명령을 이겨낼 수 없었고, 결국 이곳까지 다친 몸뚱이를 이끌고 날아와야 했다.
주인은 와이번에게 명령했다.
“죽어라.”
끼이이이-
와이번은 울었다.
그러나 자유를 잃은 존재는 결국 명을 따라야 했다.
15m의 거대한 몬스터가 성벽을, 무엇보다도 최한을 덮쳤다.
콰아아아앙!
용에 버금가는 몸집의 존재.
그것은 주인의 앞길을 가장 막을 존재인 최한을 덮쳤다.
케일은 결국 입을 열었다. 최한은 이미 어깨가 뚫린 상처를 입은 상태. 라온도 더 드래곤 슬레이어와 싸울 방도가 없는 상황.
이미 도망가는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라온, 최한을 도와라.”
케일의 귓가로 가샨의 외침이 들려왔다.
“숙여라!”
케일은 눈을 감았다. 거센 바람이 그를 지나쳐 갔다. 폭발의 여파이리라.
***
케일은 한차례 바람의 지나가고 난 후 눈을 떴다.
초토화가 된 성벽 밖이 보였다.
나무도 돌도, 모든 것들이 망가진 땅.
모든 것들이 진흙으로 뒤덮인 곳에는 죽어간 곰족과 잘게 흩어진 와이번들의 뼛조각만이 보였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없었다.
땅 위로 호족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최한을 감싼 투명한 구가 천천히 성벽으로 다가왔다.
케일은 고개를 들었다.
흐린 구름이 걷히며 맑게 갠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 사이로 빛이 한 줄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케일 님.”
케일은 어느새 다가오는 최한을 보며 입을 열었다.
“흔적은 남겼나?”
질문에 대답한 이는 최한이 아닌, 그의 곁에서 투명화한 용이었다.
-남겼다.
케일은 걸음을 옮겼다. 무리한 그는 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케일은 백작 앞에 섰다.
“아버지.”
케일은 영주 데르트 백작을 일으켜 세웠다.
그 행동에 병사들도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봤다.
맑게 갠 하늘.
아직 병사들을 지켜주던 은빛 방패는 여전했다.
살았다.
병사들은 깨달았고.
달칵, 달칵.
영지민들 집의 문이 열렸다. 그들 눈에 더 이상 적은 보이지 않았다.
막았다.
영지민들이 깨달았으며.
“아버지.”
영주는 이제 시작임을 깨달았다.
케일의 얼굴에 깃든 피로가 보였다.
삐이이이-
저 멀리 차남 바센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의 품에는 영상 통신구가 안겨 있었다.
바센이 외쳤다.
“동북부 바다 1차 경계선에 적의 함대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백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불굴 연합은 아직 얼어붙어 있는 해안가를 뚫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로운 왕국의 하늘과 바다를 동시에 노렸다.
함대면, 와이번보다 적의 수가 더 많을 터.
백작은 저도 모르게 케일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멈칫했다.
백작은 웃는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케일은 라온의 목소리를 머릿속으로 듣고 있었다.
-내 마법의 흔적이 동북부 바다로 향했다.
라온이 드래곤 슬레이어의 심장에 남겨둔 마법의 흔적.
케일은 최한에게 말했다.
“사냥을 가야겠어.”
바다면 지켜야 할 병사도, 영지민도 없다.
용잡이든 뭐든.
패 죽이면 그만 아니겠는가?
케일은 백작에게 비로소 편히 말했다.
“방패는 부서지지 않았군요.”
걱정으로 가득 찼던 백작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아들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이 떨렸다. 그는 대답 대신 그저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케일의 그 한마디는 뜻하지 않게, 바센이 들고 온 영상 통신구를 통해 모두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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