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207
206화.
붉은 배들이 황금선을 빙 둘러쌌다.
최한과 왕가 제1기사단 단장이 황금선으로 넘어와 케일의 뒤에서 멈춰 섰다. 다크엘프 타샤와 아미르 영애도 케일의 뒤에 자리해 있었다.
“케일 님.”
최한이 대표로 케일을 불렀다. 그는 케일의 시선이 머문 바다를 바라봤다. 부서진 배들 위로 떠오른 시체들이 보였다.
최한은 천천히 케일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찡그린 인상의 케일이 보였다.
‘…역시 마음이 약하신 분.’
케일의 입이 열렸다.
“평온하군.”
지친 목소리였다.
온갖 피곤에 찌든 목소리. 그 음성을 듣자, 아까 전 기쁨으로 가득 찼던 사방이 조용해졌다. 분명 좋은 단어를 내뱉었음에도 목소리에 담긴 무게와 괴로움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귀족 중 한 명은 ‘평온’이라는 단어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전투 내내 헤니투스 백작가에 대해 생각했기에 떠올릴 수 있었던 글귀.
그 글귀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뱉었다.
“…역사에 기록될 필요는 없다. 대신 행복과 평온을 위해 살아라.”
갑작스러운 소리에 조용한 갑판 위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그 귀족에게로 향했다. 특히 귀족들은 어딘가 익숙한 글귀에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 번쯤 들어본 것 같은데,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 글귀.
그때 케일의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렸다.
“우리 가문의 가훈을 알고 있나 보군.”
헤니투스 백작가의 가훈.
귀족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글귀의 출처를 알게 되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들이 그들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애써 미소 짓는 듯 씁쓸한 표정의 케일을 볼 수 있었다.
갑판 위의 사람들은 ‘행복과 평온’이 헤니투스 가문에게 어떠한 무게를 지녔는지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허.”
짧은 탄성이 귀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역사에 기록될 전투의 주역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을 이끈 사람은 역사보다 행복과 평온을 원했다.
탄성을 흘리던 귀족은 깨달았다.
‘그런 마음가짐이기에 저럴 수 있구나.’
헤니투스 영지는 그간 모은 재산을 풀어 영지민들에게 식량과 농기구를 나눠주었다고 들었다. 또한 해군 기지에도, 성벽에도 쏟아부었다.
헤니투스 가문의 마음가짐.
지금껏 권력의 아귀다툼에서 물러나 있다가 이제야 나선 이유. 저들은 그저 로운 왕국의 행복과 평온을 위해 움직인 것이다.
다시 한번 갑판 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시각, 케일도 다른 이들처럼 제 가문의 가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역사에 기록될 필요는 없다. 대신 행복과 평온을 위해 살아라.
‘역시 옛사람들의 지혜란.’
케일은 백 번, 천 번 조상이 만든 가훈에 감탄했다.
역사는 얼어 죽을, 배부르고 등 따신 것이 최고였다. 그런 의미에서 케일은 지금 자신이 집 나와서 개고생 중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미간이 더 깊은 골을 만들었다.
이제는 배가 고픈 정도가 아니라 속이 쓰리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개고생인가.
케일은 이후 평온한 50년을 위해 생고생 중인 스스로를 위해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집에 가서 드러눕고 싶은 케일의 마음이 갑판 위를 지나 황금선을 둘러싼 붉은 배들에게도 전해졌다.
“돌아가자.”
그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들렸다.
“우리의 땅으로.”
돌아가자, 우리의 땅으로.
로운 왕국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댈 곳이 없는 바다 위, 그곳에서 이 말을 들으며 환호 대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돌아갈 곳이 있고, 우리는 돌아갈 수 있다.
압도적인 승리보다, 살아남았음에, 평온할 수 있음에 사람은 다시 한번 마음이 일렁였다.
철새의 이동과 같았던 불굴 함대의 삼백여 척 배들과 달리, 황금선을 필두로 한 붉은 배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물론 모든 배들이 돌아간 것은 아니다. 케일의 명에 따라 남은 몇몇 배들은 모든 것이 부서진 바다 위에 머물렀다. 떠오른, 혹은 가라앉고 있는 적군의 시체를 찾기 위한 배들이었다.
아군을 위해서라면 전쟁을 냉정하고 잔혹하게 이끌 필요가 있으나, 죄 없이, 어쩌다 살기 위해, 살다 보니 병사가 되어 죽어간 이들도 많다는 것을, 케일은 알고 있었다.
케일은 남겨진 배들이 주변 정탐과 통신 마법도 겸하는 것을 보고서야 되돌아섰다. 황금선은 우바르 해안가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케일은 황금 거북이 조각상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배가 너무 고픈데. 가서 밥부터 먹어야겠어.’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케일의 그 생각은 망했다.
***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케일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 하하-”
지하 감옥 안에 그의 웃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는 허탈한 웃음 뒤에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런 기분도 오랜만이었다.
‘내가 이 녀석들을 믿는 게 아닌데.’
케일은 두 손을 내리며 드러난 시야로, 제일 처음 지하 감옥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쳐다봤다.
붉은 별 하나가 새겨진 로브를 입은 노인.
‘암’ 소속의 노인 마법사였다.
케일은 그 노인을 보며 짧은 감상을 전했다.
“…진짜 간당간당하네.”
라온이 했던 말.
‘살려서 데려오랬는데, 간당간당한다. 죽기 직전이다. 숨은 붙어 있다.’
마법사 노인은 말 그대로 숨만 붙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온갖 마법에 다 적중당하고 독에 중독되었는지 피부가 시퍼렜다. 또 마나 서클이 부서졌는지, 마법사의 심장 부근이 연신 들썩이며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케일은 일행뿐이라 투명화를 풀고 모습을 드러낸 라온을 쳐다봤다. 라온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고, 온과 홍도 시선을 피해 라온과 지하 감옥 구석으로 갔다.
라온이 우물쭈물 말했다.
“우리 덜 약한 인간이 피 흘렸다. 저것들은 피를 흘리는 게 아니라 쏟아부어야 하고, 그냥 뎅강 죽는 게 아니라 갈기갈기 찢긴 뒤에 목이 따여야 한다.”
“맞는데!”
“이번엔 막내가 잘했는데. 우리도 잘했는데.”
케일은 은빛 고양이 온까지 수긍하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평균 9세.
이 꼬맹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일단 마법사 노인네와는 대화가 불가할 것 같다.
그게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으로 붉은 별 하나가 새겨진 다른 두 명을 쳐다봤다. 그들과 함께 흰 장갑이었던 것을 벗어 던지는 비크로스가 보였다.
툭.
고문 기구들이 놓인 탁자 위에 던져진 장갑. 그것은 흰색이 사라지고 피가 말라붙어 거멓게 변해 있었다.
비크로스가 포마드로 정갈히 정리된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보고했다.
“일단 지금은 기절 중이지만, 깨어나면 대화는 가능할 겁니다.”
대화만 가능할 상태.
케일은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가짜 용잡이와 힐러를 외면했다.
그러자 한 놈이 보였다.
“…허억.”
눈이 마주치자 숨넘어가는 목소리를 낸다.
마창사.
지금껏 암과 싸우며 자주 마주쳤던, 마법과 창술을 함께 쓰는 놈이었다.
이놈은 케일과 눈이 마주치자 숨을 들이마시며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리 도련님이 보시는데, 시선을 피하면 예의가 아니지요.”
마창사의 머리칼을 움켜쥔 시종 론이 마창사가 케일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창사는 론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의 목소리에 벌벌 떨어댔다.
케일은 이상했다.
‘마창사는 다친 데가 하나도 없는데. 왜 제일 겁을 집어먹었지?’
의문이 들어 케일의 시선이 론으로 향했다. 그러자 론이 인자하게 웃어 보였고, 그 모습에 케일은 납득했다.
‘하긴 제일 무서운 노인네가 옆에 있으니.’
무섭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다.
케일은 벌벌 떠는 마창사를 다시 쳐다봤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나 이번 전투에서 처음 보지?”
그 물음에 마창사는 아무 말도 못했다.
온갖 고민이 다 서린 눈동자였다.
그 모습에 케일은 미소를 그렸다.
온과 홍의 독안개, 그리고 최한의 검은 오러, 론의 은신과 암살 실력.
이걸 마창사는 분명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열 손가락 산. 엘프 마을이 있는 골짜기에서 마창사는 이 실력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가 본 자들은 ‘암’을 흉내 낸 조잡한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늘 암의 일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던 놈들.
암에서 이를 갈고 있는 놈들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던 놈들.
마창사는 그놈들의 힘을 이번 로운 왕국 전투에서 마주했다.
마창사는 케일 헤니투스를 올려다봤다.
아니, ‘암’을 훼방 놓던 무리의 우두머리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 우두머리는 천천히 자리에 쪼그려 앉으며 마창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누군지 알지?”
부드러운 물음. 마창사는 따스하게 던지는 물음에 더욱더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결국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때, 케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좀 똑똑하구나. 말을 해야 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할 줄 알아.”
그 말에 마창사는 뒷목이 섬뜩해져 왔다.
마치 지금 자신이 케일 헤니투스를 처음 본 것이 아니며 그의 정체가 누군지 말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란 뉘앙스이지 않은가?
론이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케일과 마창사의 눈을 마주치게 만들려 했지만, 마창사는 끝까지 케일을 쳐다보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쳐다봐야 할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았다.
“역시 똑똑해.”
케일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마창사는 안도와 함께 다시금 긴장감을 품었다. 아직도 자신을 응시하는 케일 헤니투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분명 그저 선하고 요양이 필요한 공자라고 들었는데, 지금 이런 냉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마창사는 그런 의문 따위는 품지 않았다.
의문은 품으면 티가 나는 법. 그는 그저 숨을 죽이는 쪽을 택했다.
케일은 그런 마창사를 가만히 응시했다.
가짜 성녀 하나. 그녀와 오빠 동생 하며 남매처럼 친해 보였던 놈. 물론 하나는 진심으로 남매처럼 믿었으나 이쪽은 단지 연기였다.
역시 남 뒤통수 잘 치는 놈은 눈치가 빨랐다.
케일은 입을 열었다.
“넌 따로 둬야겠구나. 나를 아니까.”
마창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큰일 났다. ‘암’이고 뭐고, 벌어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가짜 성녀를 놓친 때부터 모든 게 엉켰다. 마창사는 고개를 푹 숙였고, 케일은 론에게 명했다.
“따로 둬. 대신 고문은 하지 말고 도망 못 가게 결박해 놓도록. 아, 마나와 오러도 묶어두고.”
고문은 하지 말고.
그 말에 마창사는 안도했다.
‘암’에게 정체를 숨기며 온갖 훼방을 놓던 귀족. 그 귀족의 무시무시한 마수에서 자신은 일단 살아남았다.
그러나 마창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케일 일행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마창사는 론에게 잡혀 다른 지하 감옥으로 이동되었다. 마창사의 뒷모습을 보던 최한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제일 힘들게 죽겠군요.”
“그렇지. 하나가 죽일 테니까.”
마창사는 가짜 성녀 하나의 손으로 고이 전해질 것이고, 아마 론이나 비크로스에게 고문받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고통받으며 죽을 것이다.
케일은 비크로스와 최한에게 ‘암’ 세 명의 감시를 맡겼다. 사지 힘줄이 끊기고 마나 구속구, 그리고 독도 넘겼으니 알아서 할 터.
“제대로 감시해.”
케일의 말에 비크로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마 실수를 한다면, 실수로 죽이는 일. 그것뿐일 겁니다.”
역시 론의 아들.
케일은 비크로스를 떨떠름하게 쳐다보다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최한을 보고 그냥 둘을 외면했다.
저 둘이라면 자신보다 더 꼼꼼하게 할 것이다.
‘하얀 별. 그놈의 외양을 들어야 돼.’
암이 모신다는 그놈을 제대로 본 사람 중 케일 손아귀에 들어온 이는 가짜 용잡이, 힐러, 마법사 노인 이 셋뿐이니, 정보를 모으려면 일단 한 번은 깨워서 대화를 해야 한다.
그 과정이 저들에게는 정말로 괴로울 것이나, 그것이 케일 알 바는 아니었다.
저를 죽이려던 놈들의 사정을 왜 생각하나?
저 녀석들 때문에 다친 내 영역 안 사람들은?
케일은 다른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이곳으로 몰래 데려왔던 놈.
“안녕?”
케일의 인사에 수호 기사 클로페 세카, 그가 온몸을 떨어대며 쇠줄에 묶인 팔을 움직여 케일의 앞에 절을 했다.
마치 신을 모시는 듯 경건한 모습이었다.
그는 조금 치료가 된 모습이었다. 그 옆에서, 수호 기사의 치료를 맡았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내비게이션을 닮은 목소리. 케일은 저번 전투에서 무리를 해 해상전에서는 뺐던 네크로맨서 메리에게 말했다.
“가자.”
“네.”
메리는 수호 기사를 감시하고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그녀가 조립하던 뼛조각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케일은 어느새 투명화해 따라온 라온에게 수호 기사를 가리켰다.
“쟤 좀 싸라.”
짐 좀 싸라.
케일은 그런 투로 말했다.
고래족이 파에른 왕국을 치러 갔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뭘 해야 할까?’
케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
고래족은 파에른 왕국을 정복할 생각은 없다. 단지 이번 전쟁을 뒤흔들고 복수를 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케일은 결심했다.
‘뒤통수를 치자.’
불굴 연합에 스파이를 심어두자.
전설을 조작하며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 했던 야비한 왕국 파에른.
그 왕국을 로운 왕국 발밑에 두고 스파이로 굴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케일의 시선이 천천히 클로페에게로 향했다.
불굴 연합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움직임이 절정에 달했을 때.
뒤통수를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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