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249
248화.
용 혼혈은 기가 찼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비틀어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죽는 게 더 편하다면서 왜 바로 죽이지 않고 말해주는 거지?”
“편히 죽지 않았으면 하니까.”
답하는 이의 목소리는 잔인하리만큼 냉정했다. 용 혼혈은 편히 죽지 않길 바라는 케일 헤니투스의 모습에 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때, 케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너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거야.”
선택의 기회.
그 말이 용 혼혈의 입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케일은 용 혼혈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죽어가는 용 혼혈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네가 사는 쪽을 택한다면, 네 몸에 심어진 어둠의 힘과 네 빛 속성이 계속 부딪칠 거다. 하루에, 아니, 몇 초에 한 번씩 네 몸은 내부가 터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낄 거야.”
결국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용 혼혈은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흐흐, 말도 안 되는 소릴. 내가 살아나면, 내 몸 상태가 좋아지면 내 빛 속성이 이 불완전한 어둠을 잡아먹을 거다.”
“용이라면 그렇겠지.”
“…뭐?”
용 혼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케일은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해주었다.
“넌 인간이 될 거야.”
인간이 된다.
“속성인 빛의 힘은 희미하게 잔재만 남아 있겠지만, 용으로서의 힘은 모두 잃을 거야.”
용 혼혈에게 있어 지옥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살고자 한다면 초마다 고통을 느끼며 인간인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평범하고 약한 인간이 되어 매일매일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다가 결국 죽겠지.”
또 말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채워지는 족쇄의 열쇠는 케일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사는 걸 택하면 조금 더 살 수 있어.”
케일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엇도 내뱉지 못하는 용 혼혈을 응시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그런 그에게로 용 혼혈이 질문을 던졌다.
“너희는, 너는 암을 없앨 생각인가?”
“알아서 뭐 하게? 넌 내 편도 아닌데.”
하!
용 혼혈은 탄성이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즉각적인 케일의 대답은 칼 같았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행동만큼 칼 같지는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도록 하지. 죽든 더 살든, 난 너에게 알아내야 할 것들이 꽤 많으니까. 그걸 알아낼 시간이 필요하거든.”
케일과 용 혼혈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한은 멈칫했다.
‘어떻게 용 혼혈을 치료하신다는 거지?’
그만이 느끼는 의문이 아니었다. 까마귀로 만든 원형 장벽 안. 가샨과 위티라, 용 혼혈 본인도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일행은 곧 용 혼혈의 일그러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 이 선택하라더니! 이게 무슨 짓이냐? 그 끔찍한 것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었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자의 공포 섞인 외침은 절박했다.
하얀 왕관.
빛나는 그 왕관이 점점 용 혼혈에게 다가갔다. 끔찍한 물건. 용 혼혈은 제 피를 먹어치우던 그 왕관의 소리를, 아주 어릴 적부터 들어야만 했다.
아직도 잠이 들면 그 소리가 들려왔다.
고통과 공포에 어린 제 비명 소리와 함께.
“으으으, 이, 이, 윽!”
뭐라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공포에 어린 눈동자가 케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황이 되자, 가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냥 두시지는 않는군.’
케일은 어떨 때 보면 굉장히 손속에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이라, 주술사 가샨은 작은 영지의 장자로 자라온 그가 어떻게 이런 성격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죽음과 삶, 그 경계를 결정하는 판단력은 단순히 타고난 천성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다년간의 경험이 동반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케일에게 무슨 경험이 있는지 명확히 모르는 가샨은 공포에 어린 용 혼혈과 케일의 대치를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그러나 여기 당황한 사람이 있었다.
케일 헤니투스, 본인이었다.
‘조금 더 살려준다는데 왜 이래?’
케일은 황당했지만, 일단 저 벌벌 떠는, 패닉에 빠져들 듯한 용 혼혈을 향해 하얀 왕관을 뻗었다.
-왕관의 가운데 보석이 용의 피를 먹게 만들어라. 그러면 저 괴물은 더 살 수 있다.
지배하는 아우라가 가르쳐 준 대로, 케일은 용 혼혈의 피가 가장 많이 흐르는 곳으로 왕관을 옮겼다.
최한이 검흔이 남겨진 곳.
그곳에, 붉은 용의 피가 흐르는 곳에 빛나는 왕관의 중심에 있는 하얀 보석이 닿았다.
“끄으으윽.”
그리고 케일은 인상을 구겼다.
용 혼혈의 괴로움에 가득 찬 신음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허허-”
가샨의 놀라움이 담긴 웃음소리 때문도 아니었다.
끄륵, 끄르륵.
하얀 보석에 입이 생겼다. 입보다는 블랙홀이라는 표현이 맞는, 하얀 보석과 어울리지 않는 검은 소용돌이가 생기며 용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케일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너무 징그러운데?’
뭐야, 이 흉물스러운 건?
케일은 당장에라도 이 왕관을, 아니, 이 하얀 보석만을 집어 던져 버리고 싶었다. 왕관은 일단 비싸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내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호오.”
가샨의 감탄 소리를 배경음악처럼 들으며 케일은 용 혼혈의 안색을 살폈다.
한결 안색이 좋아졌다. 그걸 알아챈 것인지 용 혼혈의 표정도 기이해졌다. 아픈데, 아프지 않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끄륵, 끄르륵.
케일은 본능적으로 이만하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얀 보석을 천천히 용의 피가 흐르는 검은 배에서 떼어냈다.
‘움직이지는 못하겠지만, 죽지는 않겠어.’
일주일 정도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전신엔 조금의 기력도 없겠지만.
-용의 피만 사라지면 흔적은 남아도 결국 인간의 몸만 남지. 하지만 인간의 몸에 용의 속성이 남을 테니 결국 죽음이 덮칠 것이다.
케일은 용 혼혈의 파충류와 같은 비늘이 그대로인 것을 무심히 쳐다보며 왕관을 완전히 용 혼혈에게서 떨어뜨렸다.
끄르륵. 끄륵.
그런데 그 하얀 보석의 검은 흡입구가 아쉽다는 듯 우물거리다가 라온의 포대기가 있는 방향으로 살짝 움직였다.
최한이 그걸 보고 흠칫했을 때.
땡그랑!
왕관이 집어 던져졌다. 성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왕관은 흙바닥을 뒹굴며 더러워졌다. 케일의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미쳤나?”
보석의 검은 흡입구는 사라지고 매끈하고 성스러운 하얀 보석 면이 나타났지만. 케일을 하얀 보석을 발로 밟아 흙더미에 비벼댔다. 그리고 왕관을 툭툭 차댔다.
“역시 케일 님.”
위티라는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최한이 내뱉는 말에 그를 쳐다봤다. 최한은 뿌듯한 얼굴로 라온을 감싼 포대기를 꼭 안아 들었다.
그 모습에 위티라는 뭐라도 말을 해야 하나 싶어 입술을 달싹이다가 케일의 명령을 들어야 했다. 케일은 아공간 주머니 깊숙이 왕관을 집어넣어 버린 후 용 혼혈과 시선을 마주했다.
뭔가 황당해하는 용 혼혈의 얼굴이 보였지만, 케일은 제 할 말을 했다.
“구속구를 채워. 가샨, 주술로 묶어라.”
마나, 오러, 신체의 힘, 모든 것을 빼앗는 구속구. 더불어 케일은 용 혼혈의 감시를 한 사람에게 부탁했다.
“위티라.”
“네, 제대로 감시하죠.”
그녀라면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용 혼혈의 기운에 반응하며 변동 사항을 귀신같이 눈치챌 것이다.
케일은 가샨의 주술에 의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용 혼혈을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까마귀로 만든 장벽 너머.
수많은 소리들이 들려왔다.
파에른과 브렉, 로운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불굴 연합. 온갖 소리들이 뒤섞인 공간. 케일은 그 안에서 어떠한 결과도 도출해 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곰족, 드워프족, 더불어 아스코산과 노르란드의 수많은 보병들.
이들을 모두 몰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이쪽에 강자가 많더라도, 브렉과 로운의 사람들이 많은 희생을 해야 이기는 것이 가능할 터.
‘이걸 로잘린도 알겠지.’
그 순간, 장벽 너머 그녀의 목소리가 공간을 흔들었다.
“항복을 원하는 자들은 깃발을 찢어라!”
불굴 연합 소속원들을 향한 그녀의 협박과 함께 케일도 입을 열었다.
“장벽을 걷어.”
까악, 까악. 가샨의 까마귀들이 하나둘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장벽이 사라지며 케일의 모습이 다시 전장 속에 서서히 나타났다.
로잘린은 까마귀들 사이로 서서히 보이는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보였다. 동시에 위티라와 가샨, 최한이 눈에 담겼고, 모든 곳에 구속구가 채워져 들리지도, 보이지도, 움직일 수도 없는 용 혼혈의 모습도 시야에 들어왔다.
추락한 적과 건재한 아군의 강자들.
로잘린은 자신이 만든 다리를 향해 케일이 걸음을 내딛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장의 흐름을 바꿀 강자들이 온다.
적들도 그것을 깨달았다.
이윽고 로잘린은 곰족 한 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후퇴하라!”
제기랄. 곰족 관리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후퇴를 명했다.
용 혼혈이 잡혔다.
그것도 가공할 만한 힘에 당했다.
곰족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이대로 우리 곰족이 더 다칠 수는 없다. 아직 사자족도 오지 않았는데, 우리만 힘을 잃어선 안 된다.
‘적들도 우릴 쫓아오지 못해.’
브렉 왕국이 아스코산의 영역으로 올 리는 없다.
강자가 많다 해도 이 수많은 숫자를 이겨낼 수 없으니까.
“후퇴해!”
“후퇴하라!”
곰족의 명령은 다른 이들의 입을 타고서 전군에 알려졌고, 그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브렉 왕국군은 그 뒤를 쫓지 않았다.
로잘린 사령관의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잘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법병단 마법사들의 짙은 피로가 보였다. 또한 벼락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다친 병사들도 많았다.
더불어 폐허가 되다시피 한 죽음의 협곡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복귀한다.”
그녀는 돌아갈 것을 정했고, 그 목소리가 병사들에게 전해졌다. 그뒤이어 한 사람의 목소리가 화답하듯 이어졌다.
“적은 후퇴했고, 우리는 살아남았군요.”
로잘린을 향한 케일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병사들은 무기를 쥐고 있던 손에 조금 힘을 풀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
“후퇴를 하던 적들은 죽음의 협곡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지점에서 멈춰 다시 진영을 설치했습니다.”
불굴 연합은 완전히 후퇴하지 않았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이대로 도망가면 진짜 끝이라는 것을. 그들은 아직 저들이 가진 병력 숫자를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상태였다.
미련이 남을 터.
“그리고 현재 저희 브렉 왕국군은 로잘린 사령관님께서 만드신 다리를 중심으로 병력을 집결시키며 진영을 설치 중입니다.”
다섯 곳에 흩어져 있던 병력들이 하나둘 다리가 만들어진 곳으로 모여들었다.
“이제부터는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1차전은 브렉 왕국의 완승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서로 계속 대치 상태를 유지하며 서로의 틈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고하는 사람은 궁정 수석 마법사의 수제자이자 백작인 에크러스였다. 그는 괜히 주변을 힐끗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장기전이 될 경우 적들은 식량 보급 문제가 생겨 우리 쪽에게 유리해지지만, 우리 쪽도 손실이 클 것 같습니다.”
결국 브렉이 이기겠지만, 역시나 브렉 쪽의 손실도 컸다.
“백작,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단기전으로 끝내면 좋다는 소리입니까?”
에크러스 백작은 멈칫하며 말을 꺼낸 이를 쳐다봤다.
케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전쟁 내내 담요로 무언가를 꽁꽁 감싼 희한한 포대기를 들고 다녔던 사령관. 그가 건네는 눈빛에 괜히 예전 일이 떠오른 에크러스 백작은 침을 삼키며 긴장감을 숨겼다.
그런 그에게 케일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가보세요.”
“네?”
“나가시라고요.”
“…아, 네.”
에크러스 백작은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천막을 벗어났다. 그는 천막 밖 광경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걸음을 옮겼다.
브렉 왕국 진영.
그곳엔 로운 왕국군도 있었다.
또한 파에른 왕국군도 자리해 있었다.
불굴 연합의 배신자이자, 브렉 왕국의 새로운 아군.
에크러스 백작은 파에른 왕국의 기사와 보병들을 보며 본인이 나왔던 천막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 천막 안에 있던, 파에른 왕국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부단장.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수호기사 클로페 세카의 심복으로서, 단장인 클로페 세카가 사라지자 록 세카 공작에 의해 그의 자리를 대신 맡게 된 사람이었다. 직책은 부단장이었다.
그는 가장 상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케일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허공을 바라봤다.
‘사, 살아 계셨습니까?’
그는 클로페 세카를 만나고 느꼈던 놀라움을 떠올렸다. 휠체어를 탄 주인은 힘이 없어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간악했다.
‘그분의 말씀을 따라라.’
‘네?’
‘케일 헤니투스 님. 그분은 나를 넘어선 분이야.’
수하도 망설임 없이 죽이는 클로페 세카.
전설을 만들려는 그자의 뒤처리를 해왔던 부단장은 클로페 세카의 얼굴에 드리운 두려움과 환희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케일 헤니투스가 무서웠다. 그 클로페 세카를 완전히 미친놈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때, 몇 사람이 없는 천막 안에 로잘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케일 공자, 어떻게 할 건가요?”
“단기전으로 끝내야지요.”
케일은 장기전을 할 생각이 없다.
“곧 로운 왕국 사람이 올 겁니다.”
왕세자 알베르가 보내는 로운 왕국 사람이 곧 온다.
불굴 연합은 장기전을 노릴 것이다.
브렉 왕국도 장기전을 하면 유리하다. 이길 확률이 높으니까.
하지만 피해를 쌓으며 질질 끄는 건 케일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는 저를 쳐다보는 이들에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천막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왕세자 저하께서 보내신 분이 오나 보군요.”
이번 일을 위해 알베르는 수족을 보내기로 했다. 애초에 전쟁 전에 정해진 내용이었다.
케일은 천막이 걷히는 것을 보며 새로 올 이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섰다.
끼릭. 끼리릭.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케일은 멈칫했다.
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지?
천막 입구의 천이 걷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보였다.
“아니, 왜?”
케일이 황당함을 참지 못하고 말이 튀어나왔을 때, 앞서 걸어오던 이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움직이는 게 빠를 것 같아서 말이야.”
알베르 크로스만.
그가 특유의 왕자님 미소를 지으며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끼릭. 끼리릭.
그리고 알베르 뒤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사실은 너무 특급 인물을 데리고 오느라, 나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알베르 크로스만은 케일만큼 꽤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는 적이 강한 만큼 비수가 될 존재를 준비해 왔다. 그 덕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여러 번 가동시켜야 했지만, 꽤 흡족했다.
끼릭. 끼리릭.
휠체어 바퀴가 구르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로브를 쓴 자는 천막 입구의 천이 내려가며 밖이 가려지자, 로브를 벗었다.
“단장님!”
파에른의 기사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의 주인인 클로페 세카의 얼굴이 보였다.
클로페 세카. 그의 등장에 로잘린은 멈칫하며 그를 관찰했다. 헤니투스 영지에서 패배했던 자. 하지만 소드 마스터이고, 기사단을 이끌던 강자였다.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기사의 상징. 로잘린은 그를 멀리서밖에 본 적이 없었기에, 아무리 아군이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로브를 벗어 던진 클로페 세카는 두 손을 모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케일 님!”
반가움과 기쁨이 서린 목소리.
“…어?”
로잘린은 이상함을 느꼈다.
물론 알베르 크로스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클로페 세카와 케일이 함께 있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뭐야?”
하지만 케일은 둘의 반응을 모른 척했다. 그는 괜히 사령관 천막에 놓인 지도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아스코산과 노르란드를 한 번씩 찍었다.
“노르란드와 아스코산.”
현재 이 두 왕국은 상당한 전력을 죽음의 협곡으로 집결시켰다.
그걸 이용하면 된다.
케일은 로잘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항복하려는 자는 깃발을 찢어라!’
곧 아스코산과 노르란드는 깃발을 찢을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왕국으로 갑니다.”
“…어떻게?”
로잘린이 의문을 드러냈을 때, 케일은 클로페 세카를 바라봤다.
“수호기사, 파에른 왕국이 가진 두 왕국의 왕궁 좌표를 불러주십시오.”
왕궁 좌표.
로잘린의 표정이 변했다. 동시에 왕세자 알베르가 미소를 지었다. 불굴 연합은 죽음의 협곡에 머물며 장기전을 준비하는 케일 측 병력들을 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케일과 로운, 브렉은 적들의 뒤통수를 노릴 작정이었다.
“항복 문서를 받아 오죠.”
항복. 케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단어에 천막 안의 분위기가 고양되어 갔다.
동시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각자의 머릿속은 미래의 계획으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적막이 깨졌다.
기쁨이 서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케일 님. 역시 훌륭하십니다.”
클로페의 멀쩡한 듯하면서도 맛이 간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려 퍼졌다.
“역시 영웅이시고, 전설을 이을 분이십니다.”
제기랄. 저 미친놈!
케일은 저를 쳐다보는 로잘린과 알베르의 눈빛을 모른 척했다. 두 왕족의 눈빛이 상당히 떨떠름하고 괴상했지만, 케일은 끝까지 그들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왕궁 하나씩만 없애면 될 겁니다.”
듣고 있던 파에른 기사단 부단장은 기가 찼다.
간단하게 궁을 없앤다고?
그게 간단한가?
하지만 케일은 제대로 깽판 칠 인원들을 떠올렸다.
아치, 최한, 메리 등등. 충분하고도 넘쳤다.
“서두르죠.”
“네, 케일 님. 파에른은 성심성의껏 전부 도울 예정입니다.”
케일은 클로페의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목소리에 다시 멈칫했고, 알베르의 한탄이 들려왔다.
“…기가 차네.”
“…어, 음, 새로운 광경이네요.”
알베르와 로잘린, 두 사람의 목소리에 케일은 아무 말도 못했다.
‘빌어먹을.’
그는 최대한 후딱 빨리 이 불굴 연합 놈들을 치워 버리고 저 맛이 심하게 간 놈과 엮이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정신 건강에 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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