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254
253화.
케일은 론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흠칫했다. 그 움찔하는 반응을 본 론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시 평소처럼 인자한 얼굴을 그렸다.
“많이 힘드십니까?”
케일은 급변하는 암살자의 표정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괜찮아. 조금 힘들 뿐이야.”
맞다. 조금 힘들다.
-저번에 돈지랄할 때처럼 동전 좀 던져주면 안 돼? 한 번 생각해 봐! 이제는 그릇도 커져서 가능하거든!
이 시끄러운 불벼락 때문에 조금 힘들다.
갑자기 튀어나온 놈은 말이 많았다. 물론 종알거림은 금방 사그라졌다.
한번 생각해 보라는 말과 함께 불벼락은 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돈지랄은 당기는데.’
동전을 마구잡이로 뿌려댔을 때. 그때 케일은 행복했다. 안 그래도 동대륙 리브엔 시 뒷세계를 장악하면 검은 돈을 많이 털 텐데.
‘그걸 뿌려?’
케일의 심장이 조금 콩닥였다. 내 돈이 아닌 나쁜 놈의 돈으로 하는 돈지랄은 꽤 흥미진진했다. 케일의 표정이 언제 찡그려졌냐는 듯 평온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론의 주름진 눈가가 잘게 떨렸다. 남들은 알아차릴 수 없을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분명 론은 동요하고 있었다.
스무 살.
이 강아지 도련님의 나이는 이제 스무 살이다.
아무리 귀족가 출신이라 의무와 책임이 크다고 해도, 스무 살은 넓은 들판을 날아다니며 어릴 적 상상했던 것을 펼칠 나이다.
비크로스 몰란.
론은 제 아들을 떠올렸다. 10대 때 동대륙에서 서대륙으로 도망친 후 헤니투스 영지에 정착해서 자리를 잡는 과정. 그 시간 동안 비크로스는 어릴 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하지 못하고 빨리 어른이 되었다.
그 아들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더 오랜 세월을 산 사람처럼 말하는 어린놈이 눈앞에 자리해 있다.
‘그냥, 괜찮아. 조금 힘들 뿐이야.’
론은 살아온 세월만큼 그 말의 무게가 느껴졌다.
케일에게 심어진 몸 안의 폭탄이라고 하면 고대의 힘뿐이었다. 론은 에르하벤의 레어에 갔을 때 케일 몸 안의 문제점을 들었다.
분명 그 문제로 인한 일일 터.
론은 제 팔을 만들어주고 대신 복수를 해준 케일을 머릿속에 새겨두고 있었다.
“도련님이 부탁하신 대로.”
케일은 론에게 부탁했다.
‘평소처럼, 부탁해.’
그 말을 떠올리며 론은 케일에게 부드러이 답했다.
“평소의 저 자신처럼, 행동하겠습니다.”
“어. 뭐, 그래주면 돼.”
케일은 론의 말이 이상하게 살벌하고 매우 떨떠름하게 들렸지만, 어찌 되었든 제 말대로 해준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
케일은 이른 새벽부터 떠날 준비를 했다.
아무리 심장의 활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루에 최소 3~4시간은 자야 했다. 더불어 전쟁 동안 가중된 피로를 풀기 위해서라도 케일은 짧은 잠을 청했다.
그러나 일어나자마자 마주한 광경에 케일은 잠시 당황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는 평소처럼 레몬 꿀차를 내미는 론을 바라보며 찻잔을 받아 들였다. 신맛에 정신이 확 들었다. 론은 인자한 미소를 그렸다.
“에르하벤 님께 여쭤보니 라온 님은 함께 가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성장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라온은 가장 안전한 곳인 에르하벤의 옆에 있는 편이 나았다.
아픈 애를 계속 안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걸렸으나, 에르하벤은 그 정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라온이 안전하고 편하다고 여기지 않을 상황이 더 좋지 않다며, 자신과 케일 사이에 껴두는 편이 낫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물론 온과 홍은 빼고서.
둘을 데리고 갔다가 괜히 케일의 상황에 대해서 알게 되면 곤란했다. 아무리 남의 감정에 무심해도 어린애들한테 그러고 싶진 않았다. 라온에게도 알려진 것이 꽤 마음에 들지 않는 중이었으니까.
그래서 풀 죽은 온과 홍을 떼놓았다.
그런데 그 둘을 떼니 커다란 게 하나 붙었다.
“그래서 심부름꾼을 데려왔습니다. 숙식을 비롯한 모든 방면에 익숙하니 데리고 다니면 유익하실 겁니다.”
“…아버지, 전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비크로스가 론의 말을 부정하며 케일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먼지 하나 없는 깔끔한 모습이었으나, 아기띠와 비슷하지만 훨씬 큰 포대기 같은 것을 둘러매고 있었다.
케일은 그 포대기를 보고 비크로스를 쳐다보다가 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솔직한 감정을 내뱉었다.
“역시 론은 일을 잘하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도련님.”
비크로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공자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축 늘어져 있는 라온을 들어 올려 제 포대기 안에 넣었다.
그는 아버지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도련님을 모시고 갔다 와라.’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일이 있냐며 이유를 묻는 말에 아버지는 답했다.
‘내가 못 가니, 맡길 사람이 너뿐이다.’
이유를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앞으로 일어날 일이 꽤 심각하다는 것을, 그는 아버지의 저 말에서 모두 파악했다.
그렇기에 그는 라온을 포대기에 넣고 케일을 쳐다봤고, 케일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출발하도록 하지.”
***
부스럭.
케일은 발밑에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관이 있는 리브엔 시.
그리고 돌기둥이 존재하는 리브 산.
그 중간 지점에는 꽤 큰 숲이 존재했다. 케일은 비크로스와 포대기 안 라온의 모습을 확인한 후 에르하벤을 쳐다봤다.
“이 숲의 이름은 회색 눈 숲이다.”
회색 눈.
이름에서부터 깊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에르하벤은 케일과 비크로스에게, 그리고 라온에게 이곳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고룡의 일기장이 아닌, 이 숲에 대한 통상적인 정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 이름으로 불렸지만 아직 연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더군. 현재 리브엔 시 근처 모든 지역에 몬스터들이 꽤 출몰하는데도, 이 회색 눈 숲만은 몬스터들이 없다고 해.”
케일은 숲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평범하디평범한 숲이었다. 곳곳에서 숲에서 풍겨져 나올 법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몬스터가 없으니 용병도 상인들도 들를 일이 없는 숲이지. 다만 봄이 되면 이곳에 나는 열매들을 채집하러 오는 사람들은 있다고 하고.”
“그중 실종자가 있었습니까?”
심판하는 물은 사람도 몬스터도 심판했다고 했다.
“없어.”
죽은 고룡이 만든 결계 덕에 더 이상 죽는 몬스터도, 실종자도 없게 되었다.
에르하벤은 담담하게 묻는 케일을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목소리와 달리 케일의 상황은 그렇게 차분하지 않았다.
“케일 헤니투스,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만.”
파지직, 파직.
케일의 손끝에 붉은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불벼락이 조금씩 맴돌며 점점 더 선명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무엇보다도 심장의 활력이 반응했다.
몸을 유지하고 재생하는 힘은 몸을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았다는 듯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케일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그의 시선은 에르하벤의 주위를 향해 있었다.
“에르하벤 님은 이미 준비를 다 하시고 이런 질문을 하시면 되겠습니까?”
에르하벤 주위에 백금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케일의 질문에 웃으며 가볍게 땅을 박찼다.
결계.
죽은 고룡 올리엔의 흔적이 느껴졌다.
회색 눈 숲의 중앙. 그곳에서 나무의 향기가, 순도 높은 숲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에르하벤은 그 향기를 향해 움직였다.
“따라와라.”
케일은 먼저 움직이는 에르하벤을 보며 발끝에 바람의 소리를 피어 올렸다. 동시에 비크로스를 쳐다보자 그는 한숨과 함께 땅을 박찼다.
“제가 누굴 따라가는 건 잘하죠.”
이미 어릴 적 아버지 뒤를 따라 동대륙에서 서대륙으로 넘어오며 도망가는 것 하나는 제대로 배운 그였다.
아버지의 등만 보고 달려가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케일은 저를 스쳐 앞서가는 비크로스를 쳐다보다가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스스스스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케일의 옷자락에 이파리들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케일은 그 소리들보다 심장의 뜀박질이 느껴졌다. 동시에 묘한 감각을 느꼈다.
‘안 좋아.’
바람의 소리를 사용하고 불벼락이 손바닥에서 날뛰는 상황.
케일은 배고프고 피를 토할 때와는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울렁거린다.
내부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느낌이 들었다. 케일은 비로소 무엇이든 보호해 줄 피부와 달리 망가진 내부가 느껴졌다.
그릇은 커졌으나, 그릇이 너무나도 약했다.
유리그릇은 커져봤자 유리였다.
쿵. 쿵. 쿵.
케일이 뒤틀린 내부를 깨달을수록 심장의 활력이 더욱더 제 존재를 알려왔다. 그 순간, 케일은 굉음에 고개를 위로 들었다.
콰아아앙!
백금빛의 마나가 화살이 되어 앞으로 쏘아졌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숲을 향해 날아간 화살들.
그 화살들이 평범한 숲을 두드린 순간.
콰아아앙!
녹색의 나뭇가지들이 나타나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 역시 취향이 한결같은 놈이야.”
에르하벤은 징그러운 초록색 나뭇가지들이 갑자기 나타나 달려드는 광경에 웃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더 높여 가볍게 마나 화살을 날리며 말했다.
“바로 뚫는다.”
케일은 망설임 없는 고룡의 걸음을 바로 따랐다.
콰아아앙!
수십 개의 마나 화살에 닿을 때마다 나뭇가지들이 굉음과 함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 순간, 에르하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은 꼭 일반적인 자연물의 속성만을 가지진 않아. 추상적인 속성을 지니거나 특이한 것을 지닐 수도 있지.”
콰앙. 콰앙, 쾅!
백금빛의 드래곤은 결계를 뚫어나가며 제 속성을 꼬맹이와 케일에게 알려주었다.
“난 처음 속성을 알게 됐을 때, 비웃음을 당했다.”
1차 성장이 끝나고 속성을 깨달았을 때, 에르하벤은 같은 용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다. 그건 성룡이 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내 속성은 겉모습에 비해 하찮았거든.”
드래곤 중에서도 유독 아름다운 외양을 지닌 에르하벤은 겉모습과 다른 속성에 더 비웃음을 받아야 했다. 싸가지 없는 용 새끼들이 참으로 많았다.
케일은 에르하벤의 등을 쳐다봤다.
백금빛을 지닌 그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콰앙!
케일이 다시 결계의 나뭇가지가 굉음과 함께 공기 중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본 순간, 에르하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지, 혹은 가루.”
케일의 눈동자가 백금빛 마나에 부딪쳐 먼지처럼 사라져 가는 나뭇가지들을 비췄다.
에르하벤은 짱돌 저택의 거대한 돌기둥도 이렇게 먼지처럼, 가루처럼 없앴다.
“그게 내 속성이다.”
에르하벤은 제 속성이 좋았다.
왜냐고?
“그리고 꽤 좋은 속성이지.”
그는 자신을 비웃던 용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들과 싸웠다.
“왜냐면 나는 먼지가 날릴 정도로, 가루가 되도록 패는 게 성미에 맞았거든.”
그리고 성룡 이후로는 싸워서 져본 적이 없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놀리던 단어라도, 그 가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 되는 법이었다.
에르하벤이 이 말을 굳이 라온과 케일에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자연에, 혹은 이 세계에 언어로 불리는 존재들은 다 이유가 있고 글자에 뜻이 있는 법.”
죽은 고룡의 레어에서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케일에게 심판하는 물에 대해서 들었다. 또한 신을 닮은 오만한 힘이란 일기장의 내용도 읽었다.
“그러나 그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케일, 너의 재량이다.”
심판하는 물.
그 이름이 무섭고 신을 닮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 사용하는 힘이었다.
그 힘을 가질 인간의 생각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는 법.
에르하벤은 마지막으로 덤벼오는 나뭇가지를 가루로 만들며 결계 속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에르하벤의 옆에 선 케일은 그와 함께 결계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에르하벤은 그 말에 미소를 그렸다가 바로 지웠다.
툭.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에르하벤은 눈가를 찡그렸다.
“…이런.”
바늘이다.
수많은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듯한 난폭한 기운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에 호수가 보였다.
그의 귓가로 담담한 케일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회색 눈 숲인지 알겠군요.”
마치 인간의 눈과 같은 타원형 모양의 호수가 케일의 시야에 담겼다.
그 호수의 물 색은 회색이었다.
케일은 비크로스가 에르하벤의 뒤로 가는 것을 보았다. 라온을 안은 채, 본능적으로 가장 강한 존재의 뒤로 가는 것 같았다.
“…이리 강한 고대의 힘은 처음 보는구나.”
에르하벤은 이것이 오만한 힘이라고 불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피부를 찌르는 난폭한 기운이라니. 괜찮나?”
에르하벤이 제 뒤로 온 비크로스를 보며 물었고, 비크로스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행동에 고룡은 곧바로 실드를 쳐줬다.
그제야 비크로스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그는 호수를 보는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제 사지를 묶어두고서 살펴보는 듯한, 기분 나쁜 기운이었다.
정말 기분이 나빴다.
꺼림칙했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 힘이었다.
비크로스는 침을 삼키며 호수를 외면했다.
꿈틀.
그 순간, 그는 고개를 숙였다. 방금 포대기 안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비크로스는 라온이 깨어났나 싶어 고개를 숙였지만, 라온은 여전히 축 늘어져 있었다.
비크로스는 유심히 관찰하다가 포대기를 안았다. 제 착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예민한 용은 보이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었지만, 들렸고 느껴졌다.
기분 나쁜 기운.
라온은 저 힘을 얻으러 갈 케일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검은 용의 심장이 어느 때보다도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이를 모른 채, 에르하벤은 케일을 보며 물었다.
“이렇게 날이 서고 난폭한 기운은 오랜만이야. 실드를 해줄까? 방패가 있어도 힘들 텐데-”
그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쿠웅-
땅이 크게 울렸다.
그 순간, 케일은 다시금 불벼락의 목소리를 들었다.
-야이, 씨. 역시 멋진 녀석이야!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이제 선빵부터 치는구나!
뭐?
케일은 그 목소리에 반응하기도 전 발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에 고개를 돌렸다. 호수가 치솟아 올랐다.
촤르르륵-
회색의 물은 거대한 창이 되어갔다.
‘…이거 당장에라도 공격할 태센데?’
고대의 힘은 그냥 희한한 방법으로 얻는 거 아니었어?
케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전히 땅은 진동했고, 호수에서 치솟아 오른 창은 점점 더 날을 세워갔다.
촤르르륵. 그리고 그 창끝은 정확히 케일을 향했다.
고대의 힘을 얻기 위해선, 주변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힘을 얻고자 하는 자가 모두 감당하며 마주해야 얻을 수 있었다.
‘싸워야 하나? 저 창이랑?’
욕하고, 선빵 치고, 사고 치자고 꼬이면 된다며?
이 정신 나간 고대의 주인들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케일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그 순간이었다.
“으윽.”
실드 안의 비크로스가 신음을 토했다. 난폭한 기운에 저도 모르게 두통을 느낀 것이다. 에르하벤은 실드를 하나 더 둘러주며 케일을 바라봤다. 그도 이 정도는 상상치 못했다.
“이렇게 날이 서고 난폭한 고대의 힘 기운은 처음이구나! 괜찮겠나? 할 수 있겠어?”
걱정을 담아 물음을 건네던 고룡은 멈칫했다.
“…난폭한 기운이요?”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르하벤은 찡그렸으나 아파 보이지 않는 케일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 느낌이 안 드나? 이 공간에 대한 느낌이?”
“네. 그저 그런데요? 그냥 저 창에 뚫리면 아프겠다 정도?”
에르하벤은 말문이 막혀왔다.
아무런 느낌이 안 든다고? 고룡인 그에게조차 조금의 망설임을 안겨주는 힘인데? 그는 지금 이곳에 결계를 두른 고룡 올리엔의 선택을 충분히 수긍하고 있었다.
그러나 케일은 정말로 괜찮았다.
하지만 비크로스와 에르하벤의 반응을 보고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쿠웅-
다시 한번 땅이 진동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호수가 진동하며 그 여파가 케일에게도 전해졌다.
촤르르.
회색 창의 끝이 케일을 향했다. 꼭 싸우자는 태세였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불벼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싸워야겠는데. 결투를 워낙 좋아하던 녀석이어서. 시련을 결투로 정했나?
케일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빌어먹을.”
안 그래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싸워야 한다고?
케일이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회색 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르르르-
다가오는 창에 에르하벤이 멈칫했다. 케일을 도와야 할까? 그러면 고대의 힘을 못 가질 텐데? 고룡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발걸음이 케일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뎌졌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걸음을 내딛지 않았다.
케일의 얼굴이 보였다.
케일이 미소 짓고 있었다.
촤르르르-
케일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회색 창이 보였다.
동시에 불벼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쟤는 한 번도 우리 중 누군가를 이기지 못했어.
파괴하는 불은 오래된 기억을 꺼내었다.
-비긴 적이 많았지.
억압된 힘은 결코 자유로운 힘을 이기지 못한다. 스스로가 억압을 택했다면 몰라도 타의에 의해 억압당한 힘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이길 수 없다.
불벼락은 심판하는 물과 달리 스스로의 의지로 의무와 책임을 만들었던, 자유로웠던 두 존재를 언급했다.
-하지만 쟤는 먹보와 고집불통 짱돌에게는 맨날 졌다.
먹보와 고집불통.
나무와 땅.
부서지지 않는 방패와 무서운 짱돌.
억압된 힘은 한 번도 그들을 이기지 못했다.
-거기에 지배자는 심판자도 지배하는 법이지.
케일은 소량이지만 ‘지배하는 물’을 떠올렸다.
쿠웅.
그는 다시 한번 땅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창을 향해 펼쳐지는 은빛 방패가 보였다.
고대의 힘을 얻기 위한 시련.
그 벽을 넘어설 힘이 아직 케일에게는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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