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280
279화.
하지만 기가 찬 심정과 별개로 케일은 묘한 기류를 파악했다.
툰카와 세트처럼 여겨지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참모장은 어디에 있지?”
참모장 헤롤 코디앙. 마탑주와 부족민 사이에서 태어났던 불운한 운명의 미친놈이 보이지 않는다.
마법사를 증오하며 세상에서 마법을 없애 버리고 싶은, 얌전하게 돌아버린 놈.
‘클로페도 이놈에 비하면 평화로운 놈이지.’
그런데 그런 놈이 자신과 최한이 왔는데 보이지 않았다.
마법에 반감을 지닌 위퍼 왕국민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텔레포트 진은 왕궁 지하에 은밀히 만들어졌다.
왕족 일부와 왕국 수뇌부들이 이용하는 공간으로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엔 툰카와 그의 수족들, 그리고 로운 왕국 파견 마법사만이 있었다.
그 사이에 전쟁과 관련된 모든 작전을 지휘하는 헤롤 코디앙이 없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뭔가 일이 있구나.’
케일은 위퍼 왕국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케일의 눈빛을 알아챈 것일까. 툰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 그래도 큰 덩치와 험상궂은 얼굴인지라 찡그린 표정은 살벌했다.
케일은 그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저 얼굴로 싸우면 제국 기사들은 다 기겁하겠네.’
그러나 살벌한 얼굴과 달리 툰카는 제 수하들을 한 번 보고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따라와라. 참모장이 있는 곳으로 갈 거다.”
툰카는 케일에게서 등을 돌리며 먼저 입구로 향했다. 그의 등 뒤에서 케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문제지?”
툰카는 잠시 망설였다가 입을 열었다.
헤롤 참모장이 케일과 만나서 할 이야기였지만, 미리 말해준다고 해서 차이는 없을 터.
“황태자 연설 직후, 제국에서 위퍼 왕궁으로 비밀 서신이 왔다.”
뭐라고?
제국이, 황태자가 위퍼에 서신을 보냈다고?
황태자 연설 후, 드워프와 곰족들을 만나고 다른 준비들을 마무리하기 바빴던 케일은 처음 듣는 소식에 미간을 찌푸렸다.
선전포고를 한 놈들이 왜 갑자기 위퍼 왕국에 서신을 보낸 거지?
끼이익.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선 툰카는 케일도 수하들도 보지 못하고 앞만 보며 이어 답했다.
“제국이 제안했다.”
대장군 툰카는 지금 화가 나고 답답했다.
다 때려 부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던 과거가 떠올렸다. 그때가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빌어먹게도 그때의 툰카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갑갑함을 참으며 툰카는 현 상황을 케일에게 알려주었다.
“제국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위퍼 왕국의 모든 인간들이 죽는 걸 보기 싫다면 마이플성을 반환하라더군.”
하!
케일은 기가 찼다.
제국은, 황태자는 정정당당하게 싸우자고 말하면서 제국민들의 마음속에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한껏 자랑스러운 황태자를 연기하더니 뒤에서는 협상과 협박을 펼치고 있었다.
그게 나쁜 것인가?
‘전혀. 오히려 잘하는 거지.’
전쟁은 피가 흐른다.
누군가는 죽는다.
그런 상황에서 협박이든 회유든 뭐든 간에, 제국이 전쟁이 아닌 형태로 위퍼 왕국에 마이플성 반환을 요구하는 건 영리한 행동이었다.
어쩌면 제국의 위치를 이용한 현명한 행동이라 볼 수 있었다.
‘더욱이 툰카와 위퍼 왕국은 외톨이로 알려졌지.’
서대륙 외톨이.
그렇게 알려진 위퍼 왕국은 제국이 은밀히 압박하기가 더욱 쉬웠다.
이러니 케일은 황태자 아딘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로운의 왕세자 알베르라면 아딘처럼 하지 않을 것이다.
‘알베르는 왕국민과 한 약속은 지키니까.’
왕국민에게 정정당당히 싸운다고 했으면 싸우는 사람이 왕세자 알베르다.
이것이 알베르가 자신과 제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닮지 않았다고 여기는 이유였다.
또한 황태자 아딘이 왕세자 알베르와 비슷하면서도 결국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케일은 아딘이 껄끄러웠다.
아딘이 왕세자와 비슷하다는 건, 케일과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래서 케일은 툰카의 등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이플성 반환.
그게 끝이 아니다.
고작 그 정도가 끝일 리가 없었다.
제국의 자존심과 야망이 겨우 마이플성에서 끝날 리 없었다.
그 정도면 툰카 저놈이 고민하며 힘없이 말하겠는가?
툰카는 헛웃음을 흘리며 케일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위퍼 왕국민 10만 명의 80년을 원한다.”
“…뭐?”
뭘 원한다고?
이번에는 케일도 바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떠오른 것은 있었지만 그걸 답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헤롤이 설명해 줄 거다. 따라와라.”
툰카는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케일은 불길한 기분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제국이 위퍼 왕국민 10만 명의 80년을 원한다.
왜 이 말이 ‘제국이 위퍼 왕국민 10만 명을 노예로 80년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원한다’로 들릴까.
그는 툰카의 뒤를 따라 지하를 벗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
“헤롤에게 빨리 가도록 하지.”
무엇보다도 지금은 헤롤 참모장, 그 녀석을 만나야 했다.
***
케일은 툰카의 뒤를 따라 위퍼 왕궁 중앙궁을 거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운 왕성보다 화려하군.’
화려하다 못해 번쩍이는 중앙성은 그 외관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황폐하군.’
사람들이 몇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현재 신관 모습인 케일은 주위를 둘러보며 위퍼 왕국의 중심, 왕성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싸우기도 전에 진 분위기야.’
어째서 그런 것일까?
병사들과 전사들은 중앙성에 없기에 그들의 분위기는 알 수 없었지만, 왕성 내 관리와 기사, 경비병들의 표정에선 벌써부터 패배의 기운이 풍겼다.
-인간, 벌써 우리 진 것 같다! 다들 얼굴이 왜 이러나?
내 말이.
케일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힐끗, 옆의 최한을 쳐다봤다. 로브로 모습을 가린 최한도 케일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아마 저놈도 이런 분위기는 처음일 것이다.
모든 게 가라앉고 축 처진 분위기.
케일은 그 분위기를 기억해 두며 앞선 툰카에게 물었다.
“그 서신을 아는 이들은 몇이지?”
“우리 쪽을 제하면 2, 3명 정도 안다.”
우리 쪽.
그 단어는 툰카와 헤롤을 비롯한 비마법사 연맹 출신들을, 즉 툰카의 측근들을 가리키는 뜻이리라.
‘하!’
케일은 그제야 지금 이 분위기를 파악했다.
‘지금 힘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은 툰카 편이 아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중앙성에는 우리 측이 별로 없나 보군.”
툰카는 멈칫하다가 답했다.
“…그렇다. 역시 넌 똑똑하군.”
똑똑하기는. 당연한 거다.
케일은 그제야 툰카의 눈치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건 불만과 두려움, 겁이 뒤섞인 눈빛들이었다.
툰카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여기 중앙성은 왕족이 머무는 곳이다.”
위퍼 왕국은 아직 왕조가 이어지고 있었다.
툰카를 포함한 비마법사 연맹은 마탑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왕국의 실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왕족은 그대로였으며, 왕족파인 귀족과 관리들이 왕국 내에 존재했다.
케일은 어느덧 중앙성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주위엔 더 이상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익숙한 모습의 전사들이 곳곳에 보였다.
이곳은 ‘툰카의 장소’임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여기가 작전실이다.”
툰카가 작전실 문 앞에 섰다. 그런데 문 양옆에서 툰카의 눈치를 보는 부족민 출신 전사들이 보였다.
툰카가 전사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대장군님, 그게 말입니다.”
부족민 전사 한 명이 케일 쪽을 보며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에 툰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냅다 문을 열었다.
달칵.
여전히 성질이 급하고 거침없는 툰카였다. 그 덕에 케일은 열린 문 너머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참모장, 왜 제국의 제안을 거부하는가?”
낯선 이의 목소리였다.
툰카가 열린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케일은 틈새로 참모장 헤롤과 그의 참모진들이 왕관을 쓰고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이와 대치하는 것이 슬쩍 보였다.
왕관을 쓰고 말하고 있는 사람. 지금 입을 뗀 자가 위퍼 왕국의 왕이었다.
케일은 위퍼 왕국을 떠올렸다.
마탑이 부족민들을 실험체로 사용하고, 왕국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기며, 그들에게 패악을 부리면서 노예 취급을 할 동안, 위퍼 왕궁은 조용히 마법사 연맹이 주는 혜택을 받아먹으며 방관했다.
대륙의 유일한 마탑에서 만든 마법 물품 덕에 부유했던 위퍼 왕국.
왕국민들이 빈곤에 시달리는 것과 달리, 그 어느 때보다도 풍족한 삶을 살았던 위퍼 왕궁.
그런 왕궁과 왕국을 다스리는 왕은 툰카를 보고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툰카를 외면하며 참모장 헤롤을 바라봤다.
“참모장! 뭐라 말을 해보게!”
위퍼 왕족은 마법사 연맹을 방관했지만, 또한 비마법사 연맹이 나타났을 때 그들을 탄압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비마법사 연맹은 마탑을 무너뜨리고 난 뒤 왕조를 그대로 유지시켰다.
위퍼의 왕은 늘 왕국 일에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런 이가 제국이 쳐들어온다는 소리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절박한 얼굴로 헤롤에게 외쳤다.
“제국이 공격하면 우린 끝이라고!”
우린 끝.
참모장 헤롤은 그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실소를 참기 위해서였다.
왕이 말하는 ‘우리’는 바로 왕족과 제 편의 권력자들을 말했다.
저 안에 위퍼 왕국민은 없었다.
헤롤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툰카와 케일 일행이 보였지만 왕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하, 제국은 마이플성만을 원한 게 아닙니다.”
왕은, 왕족파는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전하, 제국에서 내건 다른 조항도 있지 않습니까?”
참모장 헤롤은 케일을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제국이 내건 제안이 흘러나왔다.
“마이플성을 반환하며 그 일대의 위퍼 왕국 땅을 일부 함께 포함한다. 더불어 지난 전쟁으로 황폐화된 마이플성 일대의 제국 영토와 이번에 포함할 땅을 발전시킬 인력을 위퍼 왕국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케일은 침음을 삼켰다.
그러나 헤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 인력은 오로지 위퍼 왕국민으로 충당하며 그 수는 10만 명, 노동이 가능한 인원으로 80년간 매해 그 수를 충족시켜 땅의 발전을 도모한다.”
케일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라온의 말이 울려 퍼졌다.
-인간! 저거는 그냥 일은 위퍼 왕국 사람들이 다 하는데, 마이플성이랑 근처 땅의 이권은 자기들이 갖겠다는 소리 아닌가?
맞다.
무상으로 매해 노동 가능한 10만 명을 80년간 제공하라는 것은 위퍼 왕국민 10만 명을 제국 땅으로 불러들여 80년 동안 노예처럼 부려먹겠다는 소리였다.
헤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전하, 이 말의 뜻을 아시지 않습니까?”
왕은 멈칫했지만 이내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큰맘 먹고 툰카와 헤롤을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자신은 왕이니까 지금 상황에 죽이지는 않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기도 했다.
그는 차분하고 위엄 있게 말했다.
“나는 비마법사 연맹을 지지하네.”
그러면서 유한 얼굴로 말했다.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헤롤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즉에 죽여야 했는데!’
마탑을 쓸어버릴 때 죽여야 했는데. 더 심한 혼란이 야기되는 게 싫어 살려놓았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 왕을 함부로 죽일 수도 없었다. 전쟁을 앞둔 이때 왕을 죽이는 반역을 일으키면, 하나로 모여 제국을 상대해야 할 위퍼 왕국민들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헤롤은 화를 꾹 참으며 말했다.
“…전하, 십만 명의 인원은, 저건 누가 봐도 노예로 부린다는 소리 아닙니까?”
왕은 경기할 듯이 놀라며 외쳤다.
“노예라니! 그냥 노동력만 잠깐 동안 쓴다는 소리 아닌가? 그것만 받아들이면 우린 살 수 있다네.”
하.
헤롤은 기가 찼다.
80년이 잠깐인가? 그리고 노예가 아니라고?
헤롤은 제국이 건넨 속내를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왕이 가증스러웠다.
마법사 연맹과 비마법사 연맹이 싸울 때도, 왕은 모른 척하며 제 몸을 지키는 데에 몰두했었다.
참모장 헤롤은 결국 소리를 높여 답했다.
“전하, 그 십만 명은 어떻게 구할 겁니까!”
누구를, 도대체 어느 누구를 제국의 노예로 보낸단 말인가!
헤롤이 외치자 왕은 바로 답했다.
“많지 않는가!”
많다고?
헤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왕은 당당히 말했다.
“비마법사 연맹이나 부족민 출신이, 우리 왕궁 사람들이 가는 것도 아니고. 제국에 가서 일할 자랑스러운 위퍼 왕국민은 왕궁 밖에 많지 않은가!”
케일은 한숨을 삼켰다.
결국 왕은 왕족파가, 비마법사 연맹이 노예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왕궁 밖의 백성들이 가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거였다.
왕은 당당했다.
“아무도 안 죽고 싸울 일도 없고. 얼마나 평화적인가? 제국이 진심으로 쳐들어오면 우린 끝장이란 말일세!”
…왕은 자기가 죽을까 봐 무서운 것이겠지.
케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전에 툰카가 제국에 쳐들어갔을 때는 왕이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툰카의 힘이 무서워서 방관했다고 제국에게 말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제국이 쳐들어오는 일이라 조금 경우가 달랐다.
케일은 제 왕국민 10만 명을 80년간 버리고 제 목숨을 택하려는 왕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시야에 부들부들 떠는 툰카의 주먹이 잡혔다.
툰카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분노가 느껴졌다.
그때였다.
참모장 헤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 연맹과의 싸움 때, 사람들이 왜 우리 비마법사 연맹을 따랐는지 모르십니까?”
헤롤의 눈빛은 서늘했다.
그는 마법사를 없애고 싶어 비마법사 연맹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 저를 따르던 사람들의 심정을 알고 있었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래서 우릴 따른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마법사들의 억압이 백성들을 얼마나 괴롭게 한 줄 모르십니까? 마탑에 끌려가서 실험당하다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왕은 멈칫했지만, 조용한 툰카를 힐끗 보고 다시 말했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제국의 제안을 받으면 다 살 수 있는 거 아닌가? 전쟁이 나면 다 죽을지도 모르네! 저번에 마이플성에서의 제국을 생각하면 안 돼! 진심인 제국은 두렵다고!”
헤롤은, 사람 좋은 척하던 그 참모장은 외쳤다.
“살아도 제대로 살아야지요!”
마탑이 지배할 때도 사는 사람들은 살았다.
하지만 그건 사는 게 아니었다.
왜 위퍼 왕국이, 아니, 툰카와 헤롤이 연금술 종탑을 없애고자 하는 4왕국 1종족 연합에 참가했는가?
단지 제국과의 싸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탑과 연금술 종탑.
그들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헤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예처럼 사는 게 뭐 사는 겁니까? 전하, 살아도 그건 사는 게 아닙니다!”
참모장은 왕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왕은 분노했다. 아무리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왕이라도 참모장과는 근본부터 다른 고귀한 핏줄이 자신이었다.
“참모장, 지금 나를 향해 날을 세우는 건가? 난 자네들을 생각해서 부족민과 비마법사 연맹 사람들은 뺀다고 했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우리는 안 다치고 위퍼 왕국은 평화롭고, 모두에게 좋지 않은가!”
어이구.
케일은 기가 찬 심정을 속으로 삼키며 툰카의 바로 뒤에 섰다.
부들부들 떠는 손이 보였다.
그럼에도 툰카는 화를 내지 않았다.
참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케일은 하나를 깨달았다.
툰카는 왜 도우려 온 케일을 반겼을까?
단지 싸울 시간이 다가왔으니까?
아니다.
말 그대로 ‘위퍼 왕국을 도우러’ 와서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이놈이 위퍼 왕국을 생각하기 시작했어.’
아직 서툴고 여전히 무식한 놈이지만.
앞만 보고 싸울 줄만 알던 놈이 나라를 다스리는 무게를 알아가고 있었다.
‘내 참.’
케일은 헛웃음을 삼켰다.
원래대로라면, 앞만 보고 싸워야 할 놈이.
그래서 전쟁만 하다 위퍼 왕국도, 비마법사 연맹도, 툰카 본인도 파멸해야 했을 미래가 어쩌다 뒤틀려졌다.
그 까닭에 툰카는 왕국에 남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케일이 신관 행세를 하며 병사들을 치료하고 그들이 감사해하는 과정을 보았다
툰카는 권력자로서 전쟁과 힘 외의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삶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저를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케일은 툰카의 뒤에 서서 작게 속삭였다.
“툰카.”
케일은 저의 부름에 움찔하는 놈을 보며 그래도 툰카는 툰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밥’이라 소개했던 때의 그놈은 아직 그대로였다.
가까이 있는 툰카와 최한만이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네 원래 성질대로 해.”
툰카는 멈칫했다. 그런 그의 등 뒤에서 케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뒤에 있다.”
피식.
툰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분노에 가득 찼지만 억눌리던 눈빛이 바뀌며, 그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콰앙!
문이 굉음과 함께 부서졌다.
툰카의 주먹이 문을 부쉈다.
“…대, 대장군-”
왕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삼키며 툰카를 바라봤다.
툰카는 왕족파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왕을 보며 말했다.
“입 닥치시오.”
오, 역시 막무가내 툰카.
케일은 감탄했다.
왕한테 반존대를 하며 막말을 막하는 놈은 툰카뿐일 것이다.
왕은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고 기사들은 검집에 손을 올렸다. 왕은 이전과 달리 요즘 들어 잠잠해진 대장군 툰카를 떠올리며 외쳤다.
“지, 지금 무슨 태도요! 대장군, 지금 나한테-”
“전쟁은 내 몫이오.”
그러나 툰카는 왕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케일은 그런 툰카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툰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성향이나 행동이 케일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툰카는 목숨의 무게를 아는 것 같았다.
그래, 툰카는 성장했다.
케일의 시간이 흐른 만큼, 툰카의 시간도 흘러 그를 조금 변화시켰다.
툰카는 위퍼 왕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우리는 승리할 테니, 지금처럼 찌그러져서 살 궁리나 하시오.”
케일은 오늘 처음, 툰카가 하는 행동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는 꼭 아딘과 알베르 같은 인간만 필요한 게 아니다.
비마법사 연맹. 광기에 가득 차고, 어찌 보면 약자였던 자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툰카 같은 리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폭군은 폭군답게 행동할 때 힘을 발휘하는 법.
그리고 왕국민을 생각하는 폭군이라면.
‘나쁘지 않아.’
채앵!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검날이 툰카의 목덜미를 향했다. 권력에 밀리는 기사들은 직접 싸우지는 못하고 그저 검날만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툰카는 검날을 겁내지 않고 왕에게 다가갔다. 툰카의 목이 살짝 검날에 찔려 피가 났다. 그럼에도 툰카는 거침없이 왕에게로 향했다.
“대장군!”
왕이 다급하게 툰카를 불렀지만, 툰카는 칼들에 둘러싸여 왕을 노려보았다.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전쟁에서 지지 않았소.”
마법사 연맹과의 전쟁 때도, 제국과의 전쟁 때도, 한 번도 지지 않았다.
툰카는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제 뒤에 있을 케일과 최한을 떠올렸다.
늘 앞만 보고 싸우던 툰카는 제 뒤에 누가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그는 분노를 담아 왕을 노려보며 막무가내 툰카가 되어 말했다.
“그러니 겁쟁이는 꺼져.”
겁쟁이 왕은 꺼져라.
케일은 툰카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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