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3
2화.
남자는 누군가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을 느꼈다. 거친 손이 마치 고단한 부모의 손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만큼 따뜻했다.
“도련님. 아침입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아주 중후했다. 순간 소름이 돋아, 저도 모르게 눈이 뜨였다. 그러자 창을 통해 비친 눈부신 햇살이 눈을 따스히 감싸기는커녕 웬 노인이 흐뭇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웬일로 한번에 일어나십니까?”
“예?”
“가주님께서 오랜만에 도련님과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오늘은 되겠군요.”
남자는 노인의 어깨 너머로 거울이 보였다. 거울 안에는 아직 스무살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적발의 남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과 눈을 마주했다.
아무래도 저 놈이 나인 것 같다.
“케일 공자님?”
남자는 염려 가득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시종으로 보이는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염려와 걱정이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는 분명 들었다.
케일 공자.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케일 헤니투스?”
노인 시종은 마치 친손자를 보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도련님이시죠. 아직 술을 덜 깨셨나 봅니다.”
긍정을 표하는 답에, 남자는 자연스레 케일 헤니투스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름이 떠올랐다.
“…비로크스.”
“제 아들 말씀이십니까?”
“…주방장.”
“네. 제 아들이 주방장이지요. 오늘 해장으로 부탁하실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남자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고개를 숙이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도련님, 숙취가 덜 풀리셨습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아님 바로 씻으시겠습니까?”
남자는 숙인 고개 사이로 흘러내리는 적발을 눈에 담았다. 자신의 검은색 머리카락과는 아주 다른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케일 헤니투스. 비크로스. 비크로스의 아버지인 론.
어젯밤 읽다가 잠들었던 소설 [영웅의 탄생] 속 초반부 등장인물이었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유럽을 떠올리게 하는 침실의 모습이 보였다. 또 하나 같이 호화롭고 멋있게 치장되어 있었다.
“도련님?”
남자는 다정한 척, 인자한 척 연기하는 노인 론에게 말했다.
“찬물.”
“예?”
정신이 번쩍 들 무언가가 필요했다. 노인 론을 바라보자 다시 그의 어깨 너머 거울 속 케일 헤니투스가 보였다.
‘아직은 멀쩡하네.’
아직은 주인공에게 얻어터지지 않았나 보다. 멀끔하게 잘생긴 얼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자는 눈 떠보니 케일 헤니투스가 되어 있었다.
[영웅의 탄생] 초반부에 주인공에게 숨만 붙어있을 정도로 얻어터졌던 그 망나니가 케일 헤니투스이자 나였다.
“도련님, 찬물로 목욕하시는 것은 아니실테고. 마실 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케일은 시선을 돌려 론을 바라봤다. 인자한 척 연기하지만 실상은 잔인한 성격과 자신의 정체를 숨긴 자였다. 그는 론에게 부탁했다.
“마실 물 좀 부탁해.”
일단 냉수 먹고 속 차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순간 멈칫하며 론의 표정이 미묘해졌지만 이를 남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침실에는 미지근한 물 밖에 없어 론은 찬물을 가지러 침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겨진 케일은 침대에서 벗어나 일단 욕실로 갔다. 소설 속이 맞다면 가장 큰 거울이 욕실에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전신 거울이 욕실에 있었다. 외모와 몸매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케일 헤니투스는 다른 이들과 달리 욕실에 전신거울을 커다랗게 박아놓았다.
전신 거울에 비친 남자는 적발에 꽤 좋은 몸을 지니고 있었다. 옷태가 나는 몸이라고 해야 할까.
“케일이 맞네.”
딱 거울 속 남자는 소설에 묘사된 케일 헤니투스였다. [영웅의 탄생]은 유독 얼굴 묘사를 자세히 했다. 그러니 거울을 보자마자 그 사람이 맞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워낙 놀라고 황당하면 사람은 담백해지는 것일까. 케일은, 아니 김록수는 담담하게 어젯밤을 떠올렸다.
별다를 것 없는 휴일이었다. 오랜만에 휴대폰이 아닌 종이로 된 판타지가 읽고 싶어 대여점에 들러서 책을 빌렸다. 하루 내내 읽을 것이라 완결까지 다 빌렸다.
그 책의 제목은 [영웅의 탄생]. 그걸 한 5권까지 읽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1권에서 주인공이 자잘하게 사이다 먹이는 대상 중 하나였던 케일 헤니투스가 되어 있었다.
‘이거 너무 소설 속 진행같은데?’
빙의인가. 황당함을 넘어서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러자 자연스레 초반부 내용이 떠올랐다.
영웅의 탄생.
이 책은 서대륙과 동대륙에 존재하는 영웅들의 탄생과 그들의 갈등, 그리고 성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주인공은 한국인이다. 그것도 고 1때 차원 이동한 남학생이다. 더욱이 수명이 드래곤만큼 늘어나서 늙지도 않는 인간이었다.
“…큰일인데?”
그런 인간에게 맞게 생겼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 맞지 않았다.
케일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어 따뜻한 물이 채워져 있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는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서 천장을 바라봤다. 그 비싸다는 대리석이었다. 물론 이 케일이 사는 영지는 널리고 널린게 대리석이지만.
케일은 천장을 보며 툭 내뱉었다.
“딱히 미련은 없으니까.”
김록수로서의 삶. 딱히 미련을 가질만한 것이 없었다. 고아에, 돈도 없고. 그렇다고 죽을 듯이 사랑하는 사람도, 목숨을 내놓을만한 친구도 없다. 그냥 못 죽어서 살았을 뿐.
그래, 못 죽는다.
자신은 죽는 걸 아주 싫어한다. 아픈 것도 싫다. 어릴 적 교통 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홀로 살아남았다.
아픈 것도 죽는 것도 싫다. 뭐든,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안 맞고 살아야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케일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주인공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옆구리에 흉터가 없네.’
헤니투스 백작가의 망나니 케일 헤니투스. 그는 주인공을 만나기 전 술 먹고 저 혼자 행패를 부리며 다 집어 던지다가 부러진 책상 다리에 옆구리를 찔려 얕은 흉터를 가지게 된다.
참 웃긴 놈이다. 다른 놈들이랑 시비 붙은 것도 아니고 저 혼자 술이 맛 없다고 성질이 나서 때려부수다가 흉터를 가진 것이다. 그 뒤 상처가 난 채로 주인공을 만난다. 그렇게 몇번 만나다가 마침내 사이다 장면으로서 얻어 터진다.
“음.”
케일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1권에 사이다 장면 뒤 케일이 어떻게 되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다만 주인공 최한은 여러 기연을 만나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동료들과 함께 전형적인 영웅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그 영웅적인 면모를 펼칠만한 시대가 곧 펼쳐진다. 현재 케일이 살고 있는 로운 왕국. 이곳을 비롯해 동대륙과 서대륙 곳곳에서 전쟁이 펼쳐진다. 그야말로 영웅들이 활개를 치는 시대인 것이다.
케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케일이 된 김록수. 그의 인생 모토는 간단했다.
가늘고 길게. 아프지 않고. 소소한 즐거움을 위해.
마음 편히 살자.
“…일단 내가 안 맞고 그것 빼고는 그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 나머지는 알아서 주인공이 할테니까.”
초반부 내용은 이상하게도 외모 묘사 하나 하나까지 다 잊혀지지 않고 떠올랐다. 케일은 뜨거운 물에 피로를 풀며 동시에 반비례로 맑아진 머리로 결론 내렸다.
“해볼만 하네.”
일단 대륙의 전쟁을 피해 소소하게 살아남는 것은 해볼만 했다. 이 망나니의 배경은 김록수일 때보다 훨씬 좋았으니까. 위치도 서대륙 구석으로 전쟁 하나 피하기 아주 좋았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전쟁의 여파에서 물러난 영지들도 꽤 많았다.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피해는 덜 입을 수 있을 것이다.
“도련님, 욕실에 계십니까?”
문 밖에서 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일은 그의 정체를 떠올렸다. 배를 타고 동대륙에서 건너온 전직 암살자. 인자한 척 연기하지만 속내는 음험한 노인네였다.
“그래. 곧 나가지.”
자연스럽게 노인에게 반말이 흘러나왔다. 케일은 이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마음을 다졌다.
일단 저 노인네를 주인공에게 떠넘기고 내쫓아야 했다.
저 노인은 케일을 아주 한방에 죽일 수 있지만 안쓰러워서 놔두는 강아지 쯤 취급했다. 인자한 척 웃고 있지만 그 속내는 케일에 대한 정 하나 없었다. 주인공 최한에게 케일이 얻어 맞은 뒤 제 아들과 함께 주인공과 떠나는 론이었다.
케일은 목욕 가운을 몸에 걸치며 곧바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인자한 얼굴의 론이 물컵이 놓인 쟁반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도련님.”
케일은 컵을 집어들며 노인을 지나쳤다. 저런 무서운 노인네와 마주 보기 싫었다.
“그래, 고마워.”
론의 표정이 다시 미묘해졌지만, 케일은 이미 그를 지나친 이후였다. 케일은 냉수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여긴 곳곳에 강한 놈들이 너무 많아’
많아도 너무 많았다. 주인공이 가는 데마다 강하거나 무언가 비밀을 가진 인간과 인간 외 종족이 있었다.
‘일단 내 몸 하나 지킬 힘은 있어야지.’
곧 곳곳에서 전쟁이 펼쳐질 대륙에서 안 아프고 오래 살려면 어느 정도는 강해야 했다. 물론 너무 강하면 안된다. 그러면 꼭 더 아플 일이 생긴다.
케일은 초반에 등장한 무수한 기연들을 떠올렸다. 주인공과 그의 동료들을 강하게 하는 힘. 그 중 안 아프고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을 떠올렸다. 몇가지가 떠올랐다. 그 중에 하나를 고르면 될 것이다.
“도련님. 의복 시중을 들겠습니다.”
“아, 그래. 고마워.”
곧 문을 열고 시종들이 둘 들어와 론과 함께 의복 시중을 도왔다. 케일은 론이 평소와 달리 무표정한 것도 모른 채 시종이 들고오는 옷을 보며 말했다.
“아, 이번엔 간단한 걸로.”
치렁치렁한 옷은 사절이었다. 뭐든 편하게 쉴 수 있는 간편한 옷이 좋았다.
“네. 공자님.”
의복 담당 시종은 얼른 간편한 옷들을 꺼내들었고 케일은 그 중 가장 심플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옷을 모두 갈아입은 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간편하다고 가져온 옷이 여전히 화려했고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은 꽤 멋있었다.
‘역시 얼굴이 잘나고 옷발이 서는 몸이라니까.’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옷 매무새를 정돈한 후, 론을 바라봤다. 여전히 인자한 척 웃고 있었다.
“론, 가지.”
“네. 도련님.”
케일은 론의 뒤를 따라 걸었다. 딱히 저택 내의 지도를 몰라도 론을 따라다니면 될 것 같았다. 케일과 마주친 시종과 시녀들은 모두 몸을 움츠러트리며 공손히 인사 후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그래도 케일이 사람을 때리지는 않았는데.’
다만 술을 많이 마시고 놀기를 좋아할 뿐. 그리고 가끔씩 술에 취하면 물건들을 부쉈다. 하긴 그게 망나니이지.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몇명을 빼고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뭐, 아무도 안 건들면 좋지.’
케일은 속 편하게 생각했다. 사실 모범적인 사람 몸에 들어갔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망나니니 오히려 구속 없이 편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모범적으로 살 생각이 없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문 열겠습니다.”
“그래.”
케일은 론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책 속에서 케일은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처럼 키워준 론을 자신의 아버지만큼 친절하게 대했다고 한다. 론에게는 꼬박꼬박 대답도 했고 사람답게 대했다고 한다. 물론 론의 속마음은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그러니 케일은 론을 대하기 편했다. 꼬박꼬박 대답하고 사람처럼 대하면 되는 일이니까.
“맛있는 아침 식사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 론, 너도 챙겨 먹어.”
케일은 미련 없이 론을 지나쳐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케일의 가족들이 보였다. 아버지인 현 헤니투스 백작가의 가주 데르트. 그리고 케일에게 새어머니인 백작 부인, 그리고 그 백작 부인의 아들과 딸. 총 네 사람이 케일을 바라봤다.
“오늘도 늦었구나.”
케일의 시선이 방금 말을 건넨 가주 데르트에게로 향했다. 영웅의 탄생 책에서 아버지를 향한 케일의 마음을 이리 표현했다.
‘유일하게 케일은 아버지의 말은 따랐다. 망나니가 그마나 영지 밖으로 안 나가고 그 안에서 목줄이 채워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인 데르트 헤니투스 백작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케일의 아버지는 이 소설 속의 무수한 강한 아버지들과 달리 특출한 힘도 권력도 없었다. 그냥 돈이 많았을 뿐. 물론 케일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적당하게 살기에 딱 좋은 가정환경이었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알고 피하는 새어머니.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형을 어려워하는 더 똑똑한 차남.
오빠를 피해다니는 귀여운 막내 동생.
그렇다고 이들이 케일을 괴롭히거나 케일도 그들을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남처럼 지냈다.
이 얼마나 조용히 홀로 삶을 즐기기에 좋은 환경인가.
“앉거라.”
“네. 아버지.”
케일은 아침 식사라는 말과 달리 화려한 식탁 위를 보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니, 없다.”
데르트가 빤히 케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케일은 그런 가족들과 한명씩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그들은 저마다 시선을 황급히 돌려 식사를 이어갔다.
‘어지간히도 내가 불편한가 보네.’
케일도 식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홀로 살아오며 대충 끼니만 때우던 아침식사와는 너무나도 다른 화려한 식탁에 케일은 절로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는 일단 소시지부터 나이프로 반을 갈랐다.
‘육즙부터 다르네.’
수제 소시지인지, 아니면 잘 구운 탓인지 나이프로 자르는 순간 육즙이 흘러나왔고 그 잘 구워진 빛깔이 그의 식욕을 자극했다. 케일은 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챙그랑.
그 때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케일은 남동생 바센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곧 그의 손에 들린 포크가 떨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바센은 책에 서술된 성격처럼 차분하게 죄송하다고 말했고 그 사이에 재빨리 식사 담당 시종이 다가와 새 포크를 건넸고 떨어진 포크를 주워갔다. 그 모습에 케일은 새삼 귀족은 편한 자리라 여기며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책 속으로 들어와 첫번째로 좋은 점을 케일은 하나 찾았다. 아침 식사가 풍족하다 못해 위장을 기쁘게 만들 정도로 훌륭했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허.”
그렇기에 그는 동생 바센의 탄식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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