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491
490화.
“읍, 으읍!”
버드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조피스와 악수를 나누던 케일은 그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쯧.”
또한 론은 혀를 차며 버드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버드는 론마저 외면하자, 론 뒤에 서 있는 최한을 간절히 바라봤다.
“읍, 읍!”
씨익. 버드는 최한의 입가에 지어지는 순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최한은 살짝 목인사를 건네곤 아무렇지도 않게 버드를 지나쳤다.
-용병왕아, 나도 왔다! 네 친구는 담장 밖에서 혹시 감시자들 오는지 확인하고 있을 거라고 한다!
라온의 밝은 목소리가 버드의 머릿속에 박혔다.
-용병왕아, 대가리 안 날아가서 다행이다!
버드는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재갈을 꾹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친우인 그렌의 잔소리가 그리웠다.
하지만 침울해진 버드를 신경 쓰는 이는 아쉽게도 라온뿐이었다.
-인간아! 용병왕 왠지 모르게 우울해 보인다.
그러든가 말든가.
케일은 버드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조피스가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는 처음 그녀를 보았던 영상저장구 속 그 낡은 테이블과 의자였다. 낡은 테이블은 단 두 개의 나무 의자만이 있었고 케일과 조피스가 그 자리에 앉았다.
론과 최한은 아무 말 없이 케일의 뒤로 향했다.
“손님을 서 계시게 할 순 없지요.”
하지만 조피스가 그런 두 사람에게 한쪽을 가리켰다. 세 사람은 침대를 볼 수 있었다.
“눕든 뒹굴든 물구나무를 서든 마음대로 쓰세요.”
…역시 만만치 않아.
케일은 다시 한번 조피스의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고, 론이 인자한 미소를 그렸다.
“침대는 싫으니,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되겠습니까?”
조피스는 잠시 론을 바라보다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몰든 산맥의 돌아온 주인인데, 마음대로 하셔도 되지요.”
론과 조피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론은 당연히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조피스도 앞서 말했듯 개들을 통해 론은 물론이거니와 몰란 가의 정체도 파악하고 있었다.
조피스는 냉정한 눈길로 론을 마주 응시했고, 론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움직였다.
“음?”
그리고 그녀의 눈썹이 들렸다.
“도련님께서 즐기는 차가 따로 있어 준비해왔지요.”
살수복을 입고서 아주 여유롭게 아공간 주머니에서 찻주전자와 찻잔을 꺼내는 론이었다. 레몬차를 꺼내든 그를 본 조피스는 살짝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의 빨간 머리칼의 남자를 제외하곤 누구 하나 표정 변화가 없었다.
다만 빨간 머리칼의 남자만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론을 응시했다.
이 남자가 ‘도련님’이리라.
‘몰란 가문의 가주를 향해 저리 인상을 쓰며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건.’
…진짜 주인이란 소리겠지.
조피스는 그가 나타나자마자 용병왕의 반응을 살폈다. 하염없이 간절한 눈동자로 빨간 머리칼의 남자를 쳐다보는 것이 이 남자라면 구해줄 것이란 믿음이 보였다.
‘내가 아무리 바깥의 정보가 적다고 해도, 용병왕 정도 되는 자가 저리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눈앞의 이 자가 상당한 능력을 지닌 것을 뜻하리라.
쪼르르륵-
어느새 살수 가문의 가주가 끓인 차가 케일과 조피스 앞에 한 잔씩 놓였다.
조피스는 실로 오랜만에 낡은 찻잔이 아닌 귀족가에서나 쓸 법한 고급 찻잔을 들어 올렸다.
“왕궁에서 차를 마시던 때가 떠오르는군요.”
그 말과 함께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케일은 그 시선에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얼굴을 본다고 뭐가 보이십니까?”
싱긋.
조피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려요.”
그녀는 케일을 가리켰다.
“그리고 처음 보는 얼굴이에요. 당신은 누구죠?”
한 치의 틈도 없이 틀어 올린 머리칼처럼, 조피스의 빈틈없는 시선이 케일에게로 향했다.
케일은 생각보다 더 신 레몬차 맛에 흠칫할 뻔한 것을 겨우 참으며 입을 열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 선뜻 다 밝힐 수가 없군요. 일단 왕녀님께서 가진 정보가 내가 원하는 것인지부터 알아야 해서 말입니다.”
케일은 조피스를 믿을 수 없었다.
“폐위된 나에게 왕녀는 맞지 않는 칭호 같군요. 집어치워 주시죠.”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는 우아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가진 게 많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가진 것이 그것 하나뿐이라 선뜻 다 말할 수 없는 사람도 있어요.”
그녀는 붉은 머리칼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 다 말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해서 말해보죠.”
“…그게 무슨 말씀이실까요?”
차가 식어감에도 조피스는 찻잔을 든 채 케일만을 주시했다.
그 순간, 케일의 입이 열렸다.
“당신은 주술사라서, 환각사의 환각에 빠져들지 않았던 겁니까?”
조피스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환각사 말이죠?”
“다 아시면서 모르시는 척은. 당신 언니 말입니다. 엘리스네 1세요.”
“아하.”
조피스는 연극에서 할 법한 감탄사를 내뱉더니, 용병왕을 바라봤다.
“몰든 왕궁의 비밀이 필요하다더니, 그 미친년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찾아오셨군요.”
…응?
케일이 멈칫하며 입을 열었다.
“…우애 좋은 자매라고 들었습니다만.”
“왜요? 언니한테 미친년이라고 해서 그러시나요?”
달칵.
그녀는 찻잔을 내려두며 입을 열었다.
“가족을 이용하는 그딴 새끼는 내 가족이 아닙니다. 그러니 미친년이지요.”
달칵, 달칵.
론의 손에서 식은 차가 비워지고 따뜻한 새 차가 채워졌다.
조피스는 이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제 얘기를 될 수 있으면 안 하려고 했지만, 할 수밖에 없네요.”
그녀는 과거를 떠올렸다.
“어느 날, 저는 나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멍, 멍!”
그녀는 아까부터 함께했던 꼬질꼬질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깨달음은 이 아이의 어미와 친구가 되면서 알게 된, 나에게 ‘주술사’로서의 힘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주술사로서의 나를 자각한 순간, 내가 ‘환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안개가 걷히며, 조피스의 눈앞에 진실이 드러났다.
‘주술사임을 자각했다고 해서 환각에서 바로 빠져나올 수가 있나? 왕궁에 다른 주술사는 아예 없는 건가?’
케일은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또한 가족도, 왕실도, 나아가 이 몰든 전체가 그 빌어처먹을 새끼한테 속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엘리스네 1세가 몰든 왕국 전체에 환상을 보여주고 있단 말입니까?”
가만히 있던 최한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뇨.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는 자애로운 왕을 연기하며 자신의 추악한 짓을 숨겼지요.”
“그 추악한 짓은 왕궁에 있는 죽은 마나입니까?”
케일의 말에 조피스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런, 정말 거의 다 알고 계신 분이시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맞아요. 나는 환각을 걷어내고 죽은 마나 강을 보았지요.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그 강을요.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엘리스네 1세를 멈추기 위해 그녀에게 달려들었어요.”
“본인이 알아낸 사실을 왜 알리지 않았습니까?”
최한이 한 번 더 물었을 때, 조피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조차 기품이 흘러넘쳤다.
“왕가와 왕궁에서 일하는 관리와 시종, 시녀들 모두 환각에 빠져있어요. 그리고 왕국민들에게 엘리스네 1세는 자애로운 척 연기를 하였고요.”
더욱이 왕국을 발전시키고 있는 엘리스네였다.
어느 누가 그녀의 숨겨진 뒷면을 알아채겠는가.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아요. 지금 저 언덕 아래에 있는, 마지막까지 나를 따랐던 이들조차도 왕궁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이상 저 환상이라는 세뇌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어요.”
조피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들이 나를 따른 것은 엘리스네의 실체를 알아서가 아닌, 나를 조금 더 믿고 애정했기 때문이지요.”
“멍, 멍!”
그녀는 제 다리에 머리를 비비는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물론 이 아이들은 저를 믿지만요.”
케일은 그녀의 말을 듣다가 아까 전부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엘리스네는 왜 당신을 살려둔 겁니까?”
왕궁 안에서 유일하게 환각과 환상을 알아챈 존재. 엘리스네는 그런 위험 요소를 왜 살려두었을까?
동생이라서? 가족에 대한 애정으로?
씨익.
케일은 조피스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보았다.
동시에 처음으로 천천히 휘어지는 눈꼬리를 볼 수 있었다.
“제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다더군요.”
가족들이 왕실에 있다. 세뇌당한 그들은 엘리스네의 손아귀에 있었고, 조피스에게는 그들이 인질이 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엘리스네는 제가 자신의 앞길을 막았으니, 그 대가로 죽음은 너무 쉽고.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괴로워하다 미치라고 하더군요.”
조피스의 얼굴 전체가 일그러진 웃음을 담아내었다.
“그래서 미쳤어요.”
천천히 웃음이 사라져가며 기품 있는 여인이 케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난 당신이 누군지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것을 준다면, 나는 기꺼이 악마에게도 내 영혼을 팔 수 있습니다. 난 나에게 기회를 줄 존재를 기다렸어요.”
“그게 납니까?”
조피스는 수긍하기보다 몸을 앞으로 숙이며 케일에게 속삭였다.
“나에게 자유를 주면 됩니다.”
“그저 자유만을 바라기에는 욕심이 많은 눈빛입니다만? 아닌가요?”
잠시 침묵하던 그녀의 입이 열렸다.
“사람 잘 보는 분이시네요.”
케일은 손을 들어 올렸다. 최한이 그에 반응하자, 케일은 입을 열었다.
“버드 재갈 풀어줘.”
“네.”
조피스는 가만히 있었다.
“어이구야, 살 것 같네!”
버드의 재갈이 풀렸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이곳을 찾은 연유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몰든 왕궁을 조사하다가, 그 지하에 미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얻었어. 그리고 그 미로는 오로지 왕족들만이 드나든다고 해.”
그가 조피스를 찾은 이유였다.
유독 몰든 왕족은 조피스 왕녀를 제외하고 똘똘 뭉쳐서 애정이 넘치기로 유명했다. 그러니 그나마 미로의 정보를 얻을 상대는 조피스 왕녀뿐이었다.
‘미로라.’
케일은 엘프 사제 아디테에게 미로에 대한 정보는 듣지 못했다. 그저 세계수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죽은 마나 액체에 대해서만 들었을 뿐이었다.
물론 아디테와 다시 한번 더 만나기로 했으니, 그때 케일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려고 아직 아디테가 설명을 안 해준 것일 수도 있었다.
킁킁.
케일은 고개를 숙였다.
킁킁.
강아지가 그의 주위를 맴돌며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꼬리를 흔들며 조피스를 향해 짖었다.
“멍, 멍멍!”
조피스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악마가 아니라고 하는군요. 오히려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턱도 없는 소리군요. 전 나쁜 사람입니다.”
순간 론과 최한, 버드가 침묵하며 케일을 쳐다봤지만, 원래 조용하던 셋이기에 케일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톡. 톡. 케일은 팔걸이를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그는 몸을 앞으로 숙였고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는 속삭였다.
“일단 당신을 미로, ‘길’의 안내자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군요. 원하는 대가는 그저 ‘자유’이고. 그 이후는 당신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그래요.”
“이런 사기꾼.”
“…뭐라고요?”
기품 넘치는 되물음과 달리 조피스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하지만 사기꾼이라 말한 케일은 담담했다.
“너무 당신에게만 이득인 거래 같군요.”
왕권을 노리던 조피스였다.
단순히 미로를 안내해주는 것만으로, 그녀는 자유와 더불어 뒤집히는 왕궁을 보면서 엘리스네를 무너뜨릴 기회를 얻을 것이다.
“사기 치기 힘드네요?”
조피스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케일은 품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우리가 원하는 걸 제시하지요.”
인질로 잡힌 버드. 그를 만나러 온 후부터 주도권은 거의 다 조피스에게로 가 있었다.
이제는 그 흐름을 바꿀 때였다.
조피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는 문서 첫 장에 찍힌 인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로운?”
머나먼 서대륙 한 왕국의 인장이 찍힌 문서.
그녀는 케일을 바라봤다.
“…동대륙 사람이 아니야?”
용병 길드, 몰란 가문.
모두 동대륙에서 시작한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모르는 동대륙 뒷세계의 실력자라 예상했다. 아니면 그 정도 급의 떠오르는 권력자이거나.
그러나 상대의 정체는 그녀의 생각을 벗어났다.
“로운 왕국 대리자로 온 케일 헤니투스 사령관입니다.”
케일이 정체를 밝힌 순간, 모순되게도 그녀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정말 누구죠?”
정말로 상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때였다. 슬쩍 눈치를 보던 버드가 어깨를 쫙 펴며 입을 열었다.
“서대륙 최고의 영웅이죠.”
“…영웅?”
조피스가 ‘영웅’을 읊조렸을 때, 케일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조피스는 이를 보지 못했다.
또르륵-
찻잔에 따뜻한 찻물이 다시 부어지며 론이 말했다.
“또한 제 주인님이시죠.”
버드는 놀란 조피스를 보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비서로서 모시는 분이기도 하지요. 용병 길드 전체가 덤벼도 저 녀석 일행은 못 이길 걸요? 제국 하나를 뒤집어놓은 녀석이라. 하하하하!”
조피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 돈도 많아요!”
버드가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호탕하게 웃었을 때, 조피스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저 케일 헤니투스란 사람 일행만으로 용병 길드와 제국을 뒤집어버릴 수가 있다고?
거기다가 저 사람은 서대륙 로운 왕국을 대표하는 자이고?
“…그렇게 사실대로 모두 말해도 되나요? 나는 당신과 아직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만. 내가 이대로 엘리스네에게 모두 말하면 어쩌려고요?”
멍, 멍!
강아지가 허공을 보며 짖었다.
조피스는 흠칫했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더 강한 존재가 있는 것 같다고?’
이 꼬질꼬질한 외양의 강아지는 보통 강아지가 아니었다.
제 어미를 닮아 영특한 아이였다. 조피스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특별함을 품은 강아지 같았다.
그런 아이가 지금 허공을 보며 여기에 알 수는 없지만 특별한 존재가 있다고 했다.
자신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존재라고.
조피스는 그제야 버드의 말에 미간을 찌푸릴 뿐, 담담한 케일이 보였다.
‘더 있어.’
지금 저렇게 버드가 다 밝혀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의 강대한 힘이 저자에게 있구나.
그래서 별것 아닌 것처럼 이런 정보를 나에게 밝히는구나.
조피스는 케일이 내민 서류를 움켜쥐었다.
그녀보다 가진 것이 훨씬 더 많은 자가 내민 조건.
“나를 시험하러 왔군요. 내가 쓸 만한지 아닌지.”
그녀의 말에 케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시험은 얼어 죽을. 버드 저놈 데리러 온 거지.’
케일은 버드의 과장된 설레발과 되지도 않는 자랑에 내뱉고 싶은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조피스에게는 그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용병 길드와 제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라면, 몰든 왕국도 어렵지 않게 무너뜨릴 자다.
“…무서운 인간이시군요. 잘못하다간 내 대가리를 날려 보내실 분을 집에 들였네요.”
“음? 아니-”
대가리를 날린다니. 무슨 그런 위험한 표현을-!
케일이 입을 열려고 했다.
“됐어요. 일단 이 조건부터 읽어보죠.”
조피스는 기품 있는 미소를 띤 채 우아하게 서류 첫 장을 넘기며 케일에게 말했다.
“내 각오는 악마도 무섭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마족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니. 난 마족 아닌데?
오히려 마족과 계약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하얀 별을 없애야 한다고.
“마족보다는 마족을 이겨 먹을 예정인 사람 같습니다만.”
케일은 진실을 말했고.
“정말 무서운 분이시군요. 제 목은 따지 마시길.”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나 케일은 미처 항변할 시간을 놓쳤다.
킁킁.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케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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