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647
646화.
이미 광폭화를 펼친 채 케일과 라온을 맞이하는 수백의 곰족.
살아남은 암 잔당들이 모두 케일과 라온을 향해 날을 세우는 모습.
그리고 그들의 앞에 선 곰족 왕 사예르를 휘감은 빛.
그 모든 것들을 케일과 라온은 뚫어야 했다.
하지만 케일은 그 장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피.”
원래는 붉었을 것이 검게 변해 말라붙어 있는 왕궁 바닥이 보였다.
하지만 코에 닿는 것에 피 냄새는 없었다. 오히려 산뜻한 숲 향이 그의 코를 잠식시켜갔다.
“이,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라온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케일은 라온도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크흐흑.”
“으읍, 읍.”
“…으…으…….”
케일과 라온의 앞에 자리한 수많은 적들. 그 너머 다크엘프들을 가둔 감옥 마차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외의 감옥 마차에 가둬진 다크엘프들은 넋을 놓았거나 각기 다른 모습으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두웅- 둥, 두둥—
그 와중에도 북소리는 계속되었다. 적. 그다음은 감옥 마차. 그 너머에 회색 신관복을 입은 자들이 북을 두드리며 코와 입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감싼 원형 제단 위.
“인간아! 우리가 알던 조각상이 아니다!”
조각상이 이미 회색으로 물든 채, 각기 다른 기이한 빛을 뿜어내었다.
케일의 시선이 사예르에게로 향했다.
“…도르프 연락을 받고 소환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군.”
“그래. 이른 아침부터 소환 준비를 끝마치느라, 꽤 힘들었지.”
사예르의 눈동자에 작은 희열이 담겼다. 드디어 케일에게 한 방 먹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피어오른, 대의를 앞둔 채 가진 작은 기쁨이었다.
“엔더블에서 소환을 펼치고 그것이 성공하면 넥스 산에서 2차 소환을 펼칠 예정이었어.”
씨익. 사예르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케일 헤니투스, 왜 그런 표정이지?”
그는 가소롭다는 듯 케일을 바라봤다.
“왜 텅 빈 감옥 마차를 보면서, 이 말라붙은 피를 보면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군. 죽어간 제물들의 피를 보는 게 슬픈가? 화나는가?”
급박함이 사라진 케일의 표정에서는 무엇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예르는 그 표정과 달리 요동치는 눈동자를 보며 비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놈에게로 돌아섰던 뱀파이어도 아니고, 네놈의 동료들을 공격하고 죽인 그 다크엘프들인데. 오히려 그 수가 줄었다고 좋아해야 하지 않나? 네놈들의 적이 죽은 건데?”
라온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은 마나를 일으켰다.
“이 쓰레기 같은 곰족 왕아, 내, 헉!”
그 순간. 라온은 곰족 왕을 향해 쏘아지는 거대한 수창을 보았다. 케일이 쏘아 보낸 고대의 힘이었다.
콰아아아-
빛과 물이 부딪치며 잘게 부서졌다. 그 사이로 곰족 왕은 저를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는 케일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보며 곰족 왕 사예르는 자신의 한쪽 팔을 앗아간 적들의 수장에게 말했다.
“이미 늦었어.”
동시에 그는 팔을 들어 올렸다. 그 수신호에 맞춰 곰족이 케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쿵. 쿵. 쿵.
광폭화한 수백 명의 곰족이 일시에 움직이면서 낸 소리는 땅을 진동시켰다. 암 요원은 일시에 퍼지며 케일의 사각을 노렸다.
바람. 그리고 물.
케일은 두 가지 힘을 동시에 일으켰다.
-무리하는 것 아닌가?
짱돌이 물었지만, 케일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할 틈이 없다.
소환은 이미 케일이 넥스 산을 덮치는 것보다 먼저 시작되었다.
이미 시작했다면, 그것을 늦었다고 탓하기 전에 일단 막아야 했다.
“인간아! 무리하지 마라! 내가 다 막는다!”
하지만 라온의 앞에 나타난 것은 사예르였다.
그리고 케일의 앞은.
“크하하하! 이 순간을 기다렸다!”
“우리 종족의 적!”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가득 찬 적이었다.
타오를 듯한 적의로 가득 찬 공간. 곰족들은 하늘 아래 유일한, 가장 최악의 적이 홀로 뛰어든 것을 보며 제 무기를, 제 주먹을, 제 발을 휘둘렀다.
콰아앙! 콰쾅, 콰앙!
케일은 방패를 둘렀다. 그리고 바람을 여전히 타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땅이 진동했다.
-…나까지 쓰려는 거냐?
엔더블 왕국이 자리한 싱크홀. 그 절벽이 부서지며 수백 개의 석창이 나타났다.
그 석창은 일시에 제단으로 향했다.
“라온!”
“이미 가고 있다!”
그리고 라온이 그 석창 사이로 함께 원형 제단으로 향했다. 수백 개의, 셀 수 없는 검은 화살이 석창 사이를 빽빽이 채웠다.
검은 화살은 마치 밤처럼, 석창 사이를 채웠고, 석창은 땅으로 떨어지는 유성우와 같았다.
라온은 그 정도로 마나를 한껏 끌어올렸다.
온몸에 땀이 났다.
‘위험하다!’
회색으로 완전히 물든 채 기이한 빛을 뿜어내는 네 개의 조각상.
그리고.
‘유리관!’
죽은 마나 변형 액체가 들어간 유리관 4개. 조각상에 각기 연결된 것들이 거의 대부분 안에 든 액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라온은 제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힘. 마나를 향해 외쳤다.
“부숴라!”
흐.
얕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가능하겠어?”
라온은 너무나도 눈이 부신 빛의 장막이 원형 제단 위에 마치 우산처럼 드리우는 것을 보았다.
콰아아아아- 콰아, 콰아아-
쏟아지는 석창과 검은 화살. 그리고 그것들을 받아내는 빛의 장막.
셋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크윽, 쿨럭!”
사예르는 기침과 함께 검은 피를 토했다.
라온과 사예르의 시선이 마주쳤다. 사예르는 어린 용에게 말했다.
“너희만 배우고 성장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안 그래?”
빛의 창만을 사용하던 이가 이제 빛으로 방어도 가능했다.
“나는 오늘, 내 목숨을 걸었다.”
사예르는 삶을 포기하고 대의를 향한 집념만을 남겨둔 눈으로 라온을 바라봤다. 라온은 그 무게에 순간 숨이 턱 막혀오는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나오는 적의 모습을 처음 보는 라온이었다. 어린 용은 저도 모르게 케일이 있을 곳을 바라봤다.
“이, 인간아-”
그런데 케일이 보이지 않았다.
콰앙! 쾅! 쾅!
수많은 곰족이 마치 언덕처럼 쌓이며 케일의 방패조차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 사이로 암이 스며들며 공격을 해나갔다.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이제야 깨달았다.
케일이 모든 다수의 공격을 받아내어 자신이 자유로운 운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린 용이여.”
사예르는 라온에게 말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싸울 자세가 되었나?”
핼쑥함을 넘어 창백한 안색의 사예르는 초연한 얼굴이었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앞발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사예르는 그런 어린 용을 보며 그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직 어린 용에게 말로 노린 게 제대로 통한 듯싶었다.
두둥—둥-두둥-!
그 와중에도 북소리는 계속되었다. 라온은 무언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파직. 파직. 하늘에 내리운 회색 입이 어느새 싱크홀 전체를 덮을 만큼 커져 있었다. 회색 입 사이로 심연보다 깊어 보이는 어둠이 보였다.
또 하나 더.
쩌저적-. 회색으로 변한 조각상 두 개가 먼저 금이 가고 있었다.
“더 북을 쳐라!”
“기도를 올려!”
“제물을 더 바쳐야 돼! 제물을 가져와!”
마족을 섬기는 자들이 광기에 가득 차 피를 토하며 외쳐댔다. 동시에 제단 아래에서 검은빛이 피어올랐다.
“텔레포트 진!”
조금씩 텔레포트 진이 가동하며, 소환이 되는 즉시 마법을 펼칠 준비를 끝마친 듯했다.
스르륵. 회색 신관복을 벗어던지는 자들이 보였다. 흑마법사였다.
사예르는 그 모습을 또 라온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변장은 너희만 하는 것이 아니지. 모두 너희에게서 배운 것. 자, 어떠냐?”
라온은 주먹을 쥔 앞발마저 땀으로 가득 찼다.
“나, 나는-”
그때였다.
“라온!”
케일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휘이이잉-
거대한 바람이 솟구쳤다.
“커허헉!”
“크윽!”
곰족들이 속절없이 튕겨져 나올 정도의 강한 회오리바람. 그 중심에 케일이 서 있었다.
고대의 힘을 연속으로 사용하여, 이미 입가에는 검은 피를 흘리고 있는 케일이었다.
라온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 인간아! 조각상 두 개에 금이 갔다!”
“이미 늦었단 소리지.”
사예르가 산뜻하게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케일 헤니투스가 이런 실패를 겪어본 적이 있겠는가!’
그 사실이 그를 웃게 만들었다. 저놈에게 한 방 먹이고 죽을 수 있다면, 대의에 큰 역할을 한다면 아쉬울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단 1, 2분만이 남았다.”
사예르는 라온과 케일을 고고히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공격을 하여도, 누구를 불러와도 단 2분 만에 저 조각상들을 부술 순 없을 것이다. 내 목숨을, 우리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을 테니.”
천년을 기다려 온 거대한 신화의 시작이 이제 2분만을 남겨두었다. 사예르는 기쁨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반면에 다른 의미로 라온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불가능하다!’
동료들을 불러와도 그 연락하는 시간 동안 이미 소환은 끝나버릴 것이다.
자신이 마법을 써도, 적들은 이미 목숨을 내놓은 상태인지라 어떻게든 1, 2분 정도는 막을 것 같았다.
“이, 인간아,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라온은 케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늘 방향을 알려준 존재였으니까. 어린 용이 피할 곳은 케일뿐이었다.
“라온. 저하께 연락해. 당장.”
그리고 케일은 늘 그렇듯 담담했다.
“하! 동료를 불러올 작정인가? 그사이에 소환이 끝난다니까?”
사예르는 자신만큼 창백한 안색, 아니, 그 이상으로 힘들어 보이는 케일에게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라온은 케일의 말을 바로 이루어냈다.
-음?
막 퍼슬시로 이동하려는 텔레포트 진 위에 올라선 알베르. 그는 영상통신을 연결한 채 나타난 광경에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그 곁의 최한을 비롯한 선발대로 나선 왕궁의 강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중에 있는 라온의 손에 들린 영상통신구. 그 덕에 알베르는 모든 전경이 보였다.
케일은 이를 알고 있었기에, 알베르라면 충분히 이 전경에서 파악할 것을 말했다.
“저하. 다크엘프를. 그리고 현재 여기 뒤처리에 필요하다 파악되는 인원을 보내주십시오.”
-케일! 에르하벤 님을 보낼,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서둘러도 에르하벤이 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니.
이미 지금도 늦었다.
“크크큭. 이제 1분도 남지 않았구나!”
사예르의 웃음소리가 암, 그리고 곰족의 웃음소리와 함께 뒤섞이며 마치 귀신들의 비명이 해일처럼 케일을 뒤덮는 것 같았다.
“인간아! 내가 뭐라도 시도해 보겠다!”
-…케일. 소용이 없다니, 그래도-
케일은 라온과 알베르, 최한을 보지 않았다.
“둘.”
-뭐?
“최대로 두 마리가 갈 겁니다. 대비하세요.”
휘이이이-
회오리바람이 더욱더 거세게 케일 주위를 감쌌다. 마치 로켓이라도 된 것처럼, 바람은 힘을 모으고 또 모았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그 회오리바람에게로 다가갔다.
알베르는 라온이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나머진?
그럼 나머지 두 마리는? 조각상 두 개는 어쩐단 소리냐?
늘 그렇듯 케일은 담담했다.
“내가 없앨 겁니다.”
어떻게?
알베르는 차마 묻지 못했다.
회오리바람 사이로 언뜻 드러난 케일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이 있는 자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케일 눈 주위가 일그러져 갔다. 왠지 모르게 알베르는 최한의 팔을 움켜쥐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라온.”
“…인간아.”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라온은 멈칫하였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라온은 놀라서 회오리바람을 뚫고 케일에게 달려들 듯했다.
“라온, 내가 쓰러지는 순간. 바로 나를 로운으로 옮겨.”
“인간아, 쓰러지면 안 된-”
“라온. 이럴 때는 선택을 해야 해.”
다가오지 말라는 듯 케일은 손을 펼쳤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던 라온은 굳은 채로 케일을 바라봤다.
-이제 한계야.
허스키한 목소리로 바람의 소리가 말해왔다.
-곧 가장 빠른 속도로 바람이 휘몰아칠 거다.
회오리바람은 압축되고 또 압축된 채 가장 최대의 속도를 준비했다.
그 속에서 케일은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등급 외 괴물 모두가 로운 왕국으로 간다면, 로운은 이겨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사이에 수천, 수만 여명이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수천은 죽는다.’
등급 외 괴물은 일반적인 전투로는 장기간 싸워야 했다.
저번에 싸운 전기 장어 경우처럼, 약점을 알고 이를 집중 공략해야 단기간에 전투를 끝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네 마리면 단기일 수가 없었다. 특히 정보를 모르는 7, 8번째 등급 외 괴물은 장기로 갈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이럴 때는 선택을 해야 하지.’
케일에게는 아직 선택할 여유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다치는 일.
하나는 내가 뒤로 물러나는 일.
“라온. 나는 잊어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야.”
라온은 처음 듣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니, 영상통신구 너머 모든 이들이 처음 들어보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없는 목소리였다.
케일 헤니투스.
김록수는 잊어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물러나면 내 사람들이 다칠지도 모른다. 내 터전이 망가질지도 모른다.’
물러난 후, 혹 내 사람이 다친다면. 내 터전이 폐허가 된다면.
케일은 그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이 기록이 되어 머릿속에 되새겨졌다.
‘나는 그때 덜 아프려고 망설였던 결과로 누가, 세상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것을 잊을 수가 없다.’
단 하나, 지금 케일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이유가 있다면.
“라온.”
어린 나이의 라온 때문이었다.
라온은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케일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지랑이 같은 막에 가로막힌 케일의 눈동자가 일그러진 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라온은 그 눈을 보려 눈을 크게 떴지만, 케일의 목소리만이 온전히 들려왔다.
“나를 닮지 마라.”
케일은 라온에게 조언했다.
“나와 다른 선택을 해.”
이렇게 사는 것은 나 자신으로 충분했다.
그러니 어린 라온은.
“반드시 나를 구해, 도망쳐라.”
다른 선택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케일 헤니투스!
-케일 님!
“크크큭. 이제 십여 초도 남지 않았거늘. 무엇을 하고 도망친다는 소리냐?”
불길함을 느낀 알베르와 최한의 비명 같은 외침 사이로, 사예르는 케일을 비웃었다.
“그깟 바람으로 뚫을 수 있을 것 같나! 그 안에 못 닿아!”
그 순간, 사예르는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바람을 느꼈다.
“다행이야.”
오래전, 용병 길드의 인명부를 보러 갔을 때. 케일은 김록수로서 ‘기록’ 능력을 처음 사용하였다.
그는 1급 능력자 김록수의 능력을 일부 이 세상으로 가져왔고, 자신이 가진 다중 능력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봉인된 신의 시험.
또 다른 평행 세계 속 스무 살 김록수로서 등급 외 괴물을 물리치고 돌아온 후, 그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일부가 전체가 되었지.’
케일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첫 번째 능력 ‘기록’도 열과 함께 케일에게 상당한 부담감을 주었지만, 두 번째 능력은 그를 상회하는 고통을 주었다.
‘과부하가 걸리면 골치 아프겠지만. 써야 할 때 써야 한다.’
그 순간이었다.
쩌저적–!
나머지 조각상 두 개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예르가 그 광경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너흰 끝이다! 우리, 엔더블에 영광이-!”
우우우웅-
동시에 조각상 아래 텔레포트 진이 진동하며 온전한 빛을 뿜었다.
조각상들은 빠르게 금이 갔다.
“어, 어떻게-”
라온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그 순간.
“웬만하면 보지 마라.”
라온은 그 말이 들렸고 눈을 크게 뜬 채 멈췄다.
아니, 멈춰졌다.
세상이 멈춘 듯했다.
그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신과 다른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용은 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
찰나.
빛처럼 나아가는 존재를.
그 존재는 우리 인간이었다.
찰나.
케일이, 김록수가 지닌 두 번째 능력이자 그가 공격대를 이끌 수 있게 만든 힘이었다.
누군가는 김록수에 대해 기록하고 말했다.
‘인간의 뇌는 인간의 신체를 지배한다고 하였다.’
‘김록수의 뇌는 인간의 신체를 극한까지 내몰아, 인간이 움직일 수 없는 속도로,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움직임을 할 수 있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는 그 순간만큼은 홀로 그 세상에서 움직일 수 있는 존재였다.’
‘다만 그 시간은 능력 이름처럼 ‘찰나’였다. 대략 5초 정도 사용 가능했다.’
한 발.
케일은 멈춘 것처럼 느려진 시간 속에서 또 한 발을 내디뎠다.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콰직-!
살갗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직, 콱!
다리, 몸, 팔. 모든 곳이 종이에 베인 듯 상처가 생겨났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피가 물결치듯 퍼졌다.
‘이 몸도 김록수 몸처럼 되겠네. 아니지, 케일 헤니투스 몸은 더 약하니, 더 심하겠군.’
김록수의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던 이유.
항상 긴 셔츠를 입어야 했던 수많은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를 떠올리며, 케일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찰나.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케일은 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이 순간 그는 홀로 자유로웠다.
능력을 쓰기 전, 바람을 도움닫기 삼아 내디뎠고.
찰나를 사용하자, 바람마저 멈추었다.
케일은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세계 속에서 평소 자신의 신체로는 할 수 없는 최상의 움직임을 선보였다.
곰족을 뛰어넘고 지나쳤으며, 놀란 얼굴의 사예르를 지나쳤다.
머리가 아팠다.
깨질 것 같았다.
열이 올랐다.
이럴 때는 눈을 감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케일은, 김록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목표를 향해. 조각상을 향해 다가갔다.
‘3.’
그에게만 주어진 찰나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전에 그는 목표를 이뤄야 했다.
‘2.’
한 발. 한 걸음.
다리, 팔, 몸. 모든 근육이 찢겨져 나갈 것 같지만.
그는 내디뎠다.
‘1.’
그리고 그 찰나가 끝난 순간.
케일의 눈앞을 차지하던 아지랑이 막이 사라졌고. 그는 손을 뻗어 바로 코앞의 조각상을 움켜쥐었다.
15초. 사예르의 말대로라면 그 정도 시간이 남았다.
손은 온갖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케일은 눈앞이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허억. 헉.”
숨이 가빠왔다. 온몸에 남은 힘을 쥐어짜야 조각상을 들 수 있었다.
곧.
조금 뒤 분명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은 해야 했다.
사이한 빛을 뿜어내는 조각상.
고대의 힘을 사용할 힘도 없고, 동료를 부를 수도 없는 상황.
이것을 부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쥘 게 이거밖에 없네.”
그는 두 손으로 움켜쥔 조각상으로 다른 조각상을 내리쳤다.
등급 외 괴물이 새겨진 조각상을 부수는 방법 중 하나.
그것은 또 다른 등급 외 괴물 조각상을 내리쳐 두 개 다 부수는 것이었다.
콰아앙!
일곱 번째 등급 외 괴물 조각상이 두 번째 등급 외 조각상을 내리쳤고, 두 번째 조각상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아, 안 돼—-!”
다시 움직이는 세상의 시간 속. 사예르의 외침이 들려왔을 때 케일은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원형 제단 위에는 피로 뒤덮인 한 사람이 지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멈출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