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737
7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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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은 미칠 듯이 답답했다.
“김 대리. 요즘 왜 이래요? 응? 이런 사소한 걸, 왜-.”
하아.
최한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한숨을 토해내며 더욱더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는 중이었다.
“아니, 이게.”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는, 맞은편 여자는 한숨만으로는 이 꽉 막힌 마음을 풀 수 없다는 듯 연신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가 봐요.”
더 이상 말할 힘도 여지도 없다는 태도였다.
최한은 숨 막힐 듯한, 자신으로 생겨난 사무실 분위기에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제자리로 돌아왔다.
털썩. 의자에 앉자마자 최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도 모르겠어.’
최한.
그는 김현수라는 사람의 몸으로 눈을 떴다. 평범한 회사원인 김현수는 현재 30대로 홀로 살고 있었다. 본디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것 같은데, 부모님은 시골로 떠나며 현재 김현수 혼자 가족들이 살던 빌라에서 거주 중이었다.
‘…김록수.’
현재 최한의 굴욕 시험 대상자는 ‘김록수’였다.
대상이 누군지 알자마자 최한은 당연히 ‘대격변’ 이후의 지구를 떠올렸다. 스무 살 초반의 김록수는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가 맞이한 세상은 대격변 이전의 지구였다.
그때부터 최한은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현재 김현수가 사는 때로부터 몇십여 년 전 한국에서 살던 최한. 그것도 고1, 겨우 17살까지 살았던 그는 지금 김현수의 한국에서 적응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차라리 대격변 이후의 세계가 최한에게는 익숙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김록수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이름과 나이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쉬이 개인 정보를 알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특히 어린아이의 정보를 타인이 알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인근 초등학교를 어슬렁거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니까.
‘같은 김 씨라서 혹시 친척인가 했는데.’
당연히 친척은커녕 김현수의 휴대폰을 뒤져도 김록수와의 연관성은 없었다.
눈을 뜬 날이 주말이라, 주변 사는 곳을 둘러보아도 김록수의 얼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정보를 얻기 위해 회사로 출근해야 했다.
그렇게 지금 목요일까지 김현수로서 나름 살아가고 있는데, 참 이게 할 짓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여기는 소드 마스터가 있는 세상도 아니며, 용병 길드도 없다. 정보 길드는 당연히 없었고, 결국 최한은 심부름센터를 통한 정보 습득을 고려해보는 중이었다.
‘일단 회사에서 김록수와의 연관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한은 회사를 다니는 것이 너무나도 고역이었다.
일단 지식을 떠나 휴대폰, 컴퓨터부터 시작해 그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새삼 최한은 지금의 자신은 한국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최한은 갑갑한 마음에 목의 넥타이를 풀었다.
‘일단 목표에 집중한다.’
묘족 온보다 어릴 때의 김록수. 그 당시가 굴욕이라니.
최한은 점점 더 불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회사는 그만둔다.’
인터넷을 뒤지며 쓴 사직서. 그 봉투를 꺼내 들고 최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날 저녁.
최한은 사직서를 제출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거주지인 빌라로 향했다.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직장 생활이 더 힘드네.’
진심으로 최한은 피곤에 쩔어있는 상태였다. 김현수의 몸은 체력이 엉망이었다. 물론 케일보다는 좋았지만.
‘…라면이나 사 가자.’
최한은 동네 슈퍼 겸 마트로 향했다.
일단 밥을 먹고 움직여볼 작정이었다.
“아유, 진짜?”
그때였다.
무심히 마트 안으로 들어서려던 최한의 발길을 잡아끈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네 마트 앞에 진열된 할인 품목 근처에 서 있는 두 아주머니. 그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니, 김 씨는 완전히 도박에 빠진 게 맞대요?”
김 씨.
왠지 그 성만 들리면 최한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니까! 요즘 아는 사람만 보면 돈 좀 빌려달라고 그런다니까! 눈도 퀭한 게 술 냄새가 진동을 한대!”
“세상에. 언니, 그러면 김성종 씨는 일은 안 한대요?”
“그 상태로 일은 무슨.”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중년 여성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그 집에 애가 있지 않아?”
“아! 그, 그 먼 친척 애를 한 명 데려왔다고 들었어요!”
같이 대화를 나누던 여자는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세상에… 혹시-”
“아. 이거 좀 걱정되는데.”
그때 중년 여성은 고개를 돌리다가 최한과 눈이 마주쳤다. 최한은 슬그머니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을 지나쳐 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피곤에 찌들어있던 평범한 직장인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김성종이라.”
먼 친척 애를 데려왔다고?
느낌이 왔다.
빌라로 돌아온 최한은 과거 김현수 부모님의 방이었지만 현재는 서재로 쓰이는 방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그곳엔 목검과 과도가 하나 자리해 있었다.
최한이 이곳으로 와서 가장 먼저 구매한 물건 목록이었다.
그는 이제 보통의 한국인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통용되는 기본적인 상식도, 사회생활도 모르는 최한은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목검을 집어 들어 그 뭉툭한 날을 매만졌다.
“김성종…….”
그 이름을 나직이 읊조리며 최한은 결심했다.
“예상대로라면 내 식대로 처리한다.”
그는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찾아온 금요일.
최한은 한 아이와 마주했다.
마르다 못해 삐쩍 곯은 아이. 초봄이라 아직 추운 날씨임에도 얇고 낡은 외투 하나 걸친 게 전부인 아이.
그럼에도 그 겉모습은 말끔했다. 물론 아이 스스로 한 것인지 그 손끝이 야무지지는 못했다.
“이름이 김록수니?”
최한은 물으면서도 아이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이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게 가라앉아 있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최한은 입을 다시 열었다.
“밥 먹었어?”
왠지 모르게 그 말이 생각났다.
* * *
케일은 생각했다.
‘아, 괜히 니가 제일 쎄다고 했나?’
식은땀이 났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철창 밖의 기사들 어느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쿠구구구—
동굴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원인은 케일 바로 앞에 있는 어린 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나였다.
“…다… 부순다…….”
어린 용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그 말을 중얼거렸다.
문제는 그 대상에 케일도 포함이 되는 것 같았다.
‘하긴 이게 맞지.’
케일이 족쇄를 풀어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몸은 그간 베니온의 따까리로서 직간접적으로 라온을 괴롭게 만드는 데에 상당한 일조를 해왔다.
케일은 역시 우리 라온은 마음이 무르지 않아 혼자 다녀도 어디 가서 배신은 안 당하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부숴라!”
안 그래도 조용하던 동굴 안이 더욱더 조용해졌다.
식탁 위에 엎어져 있던 베니온마저 덜덜 떨며 고개를 치켜들어 힘겹게 케일을 쳐다봤다. 그 눈동자에는 황당함이 맺혀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은 흥이 나서 말했다.
어차피 환상이고, 내 몸도 아니니까!
“다 부숴! 나도 부숴버려! 이왕이면 네 앞발에 피 묻히지 말고 그냥 동굴을 무너뜨리면 알아서 다 부서질 거다!”
검은 용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때, 철창 밖의 상급 기사가 외쳤다.
“자네, 미쳤나?!”
케일은 태연히 답했다.
“그래. 미쳤다.”
“뭐, 뭐?”
남들이 기가 차서 쳐다보든 말든 케일은 라온을 보며 명확하게 말했다.
“나는 저 새끼가 짜증 나고 이 몸도 싫고 그래서 이러는 거야. 그냥 변덕 부리는 거지. 다 짜증 나서.”
괜히 라온이 어떠한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지니지 않게.
케일은 아직 상처가 덜 아문 용의 몸을 보며 일부러 밝게 말했다.
“그러니 다 부숴.”
그 순간이었다.
삐쭉. 검은 용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갔고, 용의 눈꼬리가 묘한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쿠웅!
동굴이 크게 흔들렸고, 베니온은 안간힘을 내며 겨우 외쳤다.
“감히 버러지같이 살아온 주제에! 도망쳐도 곧 잡힐 거다!”
라온을 향해.
하지만 검은 용은 피식 웃으며 앞발을 휘저었다. 고대하던 순간을 맞이한 용은 망설임도 어설픔도 없었다.
쿠구구구—
“안 돼! 공자님부터 구해야 돼!”
“서둘러! 밖에 구조 신호 보내!”
“미친!”
온갖 목소리들이 뒤섞이며 동굴은 이제 눈에 보일 정도로 거세게 흔들렸다.
투둑. 투둑.
부서진 돌 잔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쩌저적.
동굴 벽을 타고 천장까지 금이 가며 점점 그 사이가 벌어졌다.
‘라온은 이제 통과겠군.’
케일은 라온이 굴욕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굴욕 시험 두 개 중 하나는 이제 완료가 됐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제 낮밤 모두 시종으로 지내는 건가?’
그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그리되면 알베르의 시험도 하루 이틀 내로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음?’
그때, 케일은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함에 정신을 차렸다.
“어!”
저도 모르게 그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검은 용이 어느새 케일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동굴은 이제 곧 무너질, 일촉즉발의 상황. 검은 용은 케일에게로 다가오더니 그 앞발을 휘둘렀다.
퍽!
“크윽!”
케일은 마른 앞발에 뒤통수를 맞은 것과 동시에 검은 마나가 그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일단 넌 지켜본다.”
라온의 중얼거림과 함께 케일은 점차 시야가 어둡게 변해갔다.
‘아. 이건.’
케일은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단박에 깨달았다.
‘기절이다.’
그는 지금 기절 혹은 수면 마법에 당했다.
검은 용은 나쁜 놈 중 하나이며 미친 것 같은 베니온의 따까리를 일단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방향인데-’
케일은 이러면 앞으로 굴욕 시험은 어찌 되나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더 생각하기도 전에 기절해버렸다.
라온으로 인한 기절은 생각해보지도 못한 케일이었다.
깜박.
하지만 그가 눈을 뜨자 마주한 현실은 또 다른 현실이었다.
“…기절을 하면 다른 쪽으로 눈을 뜨는군.”
시종의 몸으로 눈을 뜬 케일은 자신의 침대에서 일어나 창으로 향했다.
고요한 왕궁의 밤이 눈에 들어왔다.
“잘됐네.”
안 그래도 밤에 움직여야 할 일이 있었던 케일은 시종복을 벗어던지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검은 옷을 꺼내 입었다.
‘루트는 확보했다.’
그간 오로지 베니온 따까리의 독을 알아내기 위해 왕궁 도서관에 간 것은 아니었다.
겸사겸사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알베르 크로스만.
그는 조금 복잡한 인물이었다.
‘단순히 좋은 의식주를 제공한다고 해서 굴욕을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조금 더 근본적인, 그의 마음가짐에 변화를 주어야 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알베르가 굴욕을 느끼지 않고 그저 잠시 스쳐 가는 방해물이라고 생각하게끔. 그럴 수 있는 기반을 하나 만들어 주는 방향으로.
‘도서관.’
언젠가 케일은 알베르와 함께 왕궁 도서관 지하 2층으로 간 적이 있었다.
오로지 크로스만 왕에게만, 아니, 크로스만 가문의 우두머리에게만 내려져 오는 비밀 공간.
그 지하에는 크로스만 가문이 태양신의 가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 고대 하얀 별의 핏줄로서 오히려 태양신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진실’이 감춰져 있었다.
이를 지금의 알베르가 알게 된다면, 그는 다크엘프 피를 숨겨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됨은 물론 스스로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일단 그 지하 2층으로 들어가려면 크로스만 가의 인장이 있어야 돼.’
정확히 말하자면, 로운 왕국의 옥새가 아닌 크로스만 가문의 우두머리에게만 전해지는 도장이 있어야 했다.
본디 알베르가 제드 국왕에게 이를 넘겨받아 케일에게 그 지하 2층 공간을 보여주었으나, 이 세상에서는 현재 국왕 제드 크로스만이 가지고 있을 터.
케일은 그 인장을 훔칠 자신이 없었다. 이 시종의 몸으로.
그러니 몰래 밤에 알베르를 이곳으로 데려와 여는 방법을 알려주고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만 넌지시 알리고자 했다.
분명 그런 의도였다.
며칠간 탐색을 통해 은밀히 한밤중 도서관 근처로 잠입한 케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지?”
현 국왕. 알베르의 아버지.
제드 크로스만.
그가 겨눈 검 끝이 케일의 목덜미 앞에 자리해 있었다.
“아.”
그는 케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인가, 알베르 궁에 난장판을 피운다는 시종?”
케일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저를 아십니까?”
제드 크로스만이 케일을 알고 있다.
아무리 궁을 뒤집어 놨다고 해도 한낱 신참 시종이건만.
이는 제드 크로스만이 알베르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케일은 오늘 그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지도 모르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알베르도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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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제드 크로스만은 무미건조한 웃음을 흘리고는 케일의 목에서 검끝을 치웠다.
저를 아냐고 묻는 케일. 그에게서 왕은 과감하게 등을 보였다.
“내가 내 궁에서 일어난 일을 모를 리가.”
스스슷-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케일은 도서관 주변에 심어진 나무들 사이로 슬그머니 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스윽. 제드가 손을 들어보였고, 다시 한번 바람이 불며 그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아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 이곳에 분명 존재하리라.
왕을 호위하는 그림자.
케일은 그 존재를 보았음에도 오로지 제드만을 주시했다.
‘1왕자 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안다고?’
이는 단순히 케일이 친 깽판을 알고 있다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아냐.’
하지만 케일은 느꼈다.
‘이건 그런 단순한 답이 아냐.’
궁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다.
너무나도 무심하게 던진 그 말의 깊이는 가볍지 않았다.
현재 보이는 사람은 케일과 왕뿐이었다.
어찌하여 오늘 하필 왕이 이곳에 있나, 케일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궁금했다.
계산은 끝났다.
케일은 환상이기에 물었다.
“그러면 다크엘프도 아시겠군요.”
제드 크로스만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뒤돌아 케일을 가만히 응시했다.
“제법이군.”
그 한마디에 케일은 터져 나오려는 탄성을 참아야 했다.
‘알고 있었어. 다크엘프를.’
제드 크로스만은 다크엘프를, 나아가 알베르의 몸에 흐르는 다크엘프의 피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더불어 어머니를 잃은 후 알베르 크로스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케일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이 자는 아버지가 아니군.’
그는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망설임이 없었다.
“전하께서는 1왕자님을 총애하십니까?”
제드는 맹랑하게 느껴질 법도 한 물음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왕이 어찌하여 애정에 기대어 결정을 할 수가 있지?”
케일의 비틀어진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제드 크로스만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저 왕일 뿐.
애초에 후계를 향한 총애 따위는 없었다.
그저 겉으로 총애하는 후계를 때에 따라 뒀을 뿐.
“어찌하여 저에게 이리 솔직하게 답해주시는 겁니까?”
케일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죽일 거니까.”
“역시 그렇군요.”
담담한 얼굴의 케일에 제드는 처음으로 눈동자에 감정을 담았다.
“정말, 제법이군.”
케일은 불경해 보일 수 있었지만,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달리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케일도 색다른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제드 크로스만이 이런 인간일 줄이야.’
시험 밖. 실제 케일이 아는 제드 크로스만은 현재 실권을 모두 알베르에게 넘겨준 채 뒷방 늙은이 신세였다.
아직 ‘왕’이었지만, 언제라도 알베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자리마저 알베르에게 주어야 했다.
물론 뒷방 늙은이를 자처하기에는 제드 크로스만은 아직 그 나이가 한창때였으며 건강한 편이었다.
케일은 지금까지 국왕 제드가 왕세자 알베르 크로스만의 권력을 누르지 못해 자연스럽게, 어찌 보면 주변 등쌀에 밀려 알베르에게 모든 것을 넘겨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틀렸어.’
하지만 적어도 오늘 마주한 제드 크로스만을 보자, 케일은 현실 왕궁에 있을 뒷방 늙은이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인간은 결단코 만만하지 않았다.
보라. 알베르는 지금 본인의 상태와 다크엘프를 왕에게 들켰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2왕자 측도.
3왕자 측도.
그들을 둘러싼 로운 왕국 귀족들도.
모두 저 제드의 민낯을 모를 수도 있었다.
“이야.”
케일의 입에서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핏줄은 핏줄인가 보네.”
알베르 크로스만은 확실히 제드 크로스만을 닮은 면이 있었다.
물론 다른 면이 더 많았다.
제드 크로스만.
케일은 이 자의 또 다른 면을 마주한 순간, 그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눈동자가 비어 있다.
딱 보면 감이 온다.
‘좋지 않아.’
제드 크로스만은 케일과 맞지 않은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왜 죽는 건지 궁금하진 않나?”
감히 왕 앞에서 불경하다 싶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케일에게 제드는 스스럼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그 질문 내용은 썩 좋지 못했지만, 그것을 답할 사람은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이가 아니었다.
“도서관을 밤에 침입하려고 해서 아닙니까?”
케일이 1왕자 궁을 중심으로 난장판을 피운 것?
현재 제드 크로스만은 방관하고 있었다. 이는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에게 지금 케일이 벌인 짓은 그냥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 관심을 가질 일이 아니었다.
도서관.
그리고 그 지하에 묻힌 크로스만 왕가의 비밀.
그 정도는 되어야 제드 크로스만이 한낱 시종을 죽일 이유가 될 터.
만약 케일이 제드가 이런 인물인 줄 알았다면 도서관 근처를 탐색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하네. 그 점 때문에 자네는 죽는 것이지.”
제드는 마치 지나가는 일을 언급하듯 툭 내뱉었다.
“도서관에 왜 가려고 했나?”
“짐작하는 그것이 맞을 겁니다.”
“…내가 짐작하는 이유가 맞다라.”
제드는 케일이 맴돌던 도서관 뒷문 근처 길을 거닐다가 뒷문 앞에 섰다.
달칵.
그는 뒷문을 망설임 없이 열며 입을 열었다.
“지하 2층을 노리는 건가?”
“거긴 인장이 없으면 못 들어가잖습니까? 그냥 도서관 근처만 보다가 가려고 했습니다.”
담담하게 크로스만가의 비밀을 토해내는 케일.
“호오. 인장도 아나?”
제드는 표정 없는 얼굴로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 표정과 어투의 괴리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고 기괴했다.
케일은 걸음을 옮겨 열린 뒷문 앞에 선 제드의 앞에 멈춰 섰다.
웃는 얼굴로 무심하게 말하는 케일.
그 역시도 제드에 비하면 만만치 않은 자였다.
“네. 압니다. 크로스만 가의 우두머리에게만 주는 인장이 있어야 지하 2층으로 갈 수 있잖습니까?”
“정답이야.”
제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 확신할 수 있겠군.”
케일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무엇을 확신할 수 있다는 소리지?
“자네 살려야겠어.”
제드는 미소를 지었다.
새삼 알베르의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고. 케일은 직감했다.
위험하다.
살린다고 말하지만.
다년간 쌓은 감이 말해주었다.
이게 더 안 좋다.
지금 나는 위험하다.
케일은 곧바로 제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제드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환상. 무슨 일이 터진다면, 왕을 붙잡고 있는 편이 나을 터.
또한 시험이고 가짜일지라도 베니온 따까리 몸도 아니고 이 몸이 나 때문에 죽게 하기는 좀 찝찝했다. 애초에 그럴 계획도 없었다.
“커억!”
하지만 케일은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의 입을 막는 것을 보았다.
입을 덮은 손안에 있는 천에 묻은 무언가를 들이마신 순간, 케일은 머릿속이 아득해져 왔다.
그때, 제드 크로스만. 현실에서 뒷방 늙은이라고 알려진 자가 낮은 웃음을 머금은 채 케일에게 다가와 아주 작게, 오로지 케일만이 들리게 속삭였다.
“자네, 사냥꾼은 아니군.”
…뭐? 사냥꾼?
정신을 잃어가는 케일의 눈에 비친 제드의 눈동자는 맹수처럼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텅 비어있던 눈동자를 채운 것은 타오르는 불.
누가 보아도 저 눈은 그저 그런 왕의 눈동자가 아니라 폭군을 떠올리게 했다.
“…….”
곧 케일은 정신을 잃었고, 제드는 케일을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등을 돌려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호위가 케일을 짊어진 채 뒤따랐다.
끼이익.
도서관 뒷문이 닫혔고, 제드는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고개를 돌려 문밖 어둠 속을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하 2층에, 석실에 가려고 하는 시종이라.”
불길은 사라진 텅 빈 눈동자.
국왕 제드로서 외부에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는 도서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탁.
도서관 뒷문은 닫혔다.
“…….”
도서관에서 꽤 떨어진 곳.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나무 기둥 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입을 틀어막은 채, 알베르 크로스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하 연무장에서 홀로 수련하고 나오다가 시종을 발견해 거리를 두고서 몰래 따라온 알베르.
그는 국왕과 케일의 대치를 보았다.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거리가 멀어 둘이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위험한 것 같은데.’
다만 시종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리고 제드 국왕이 숨어있는 알베르를 모른 척했다는 것을.
알베르는 알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조금 전 국왕의 모습은 멀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알베르가 알던 모습과는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알 수 없는 낯섦이 국왕에게서 느껴졌다.
아직은 어린 열다섯. 처음 겪는 상황에 알베르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 *
깜박.
“허억!”
케일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는 다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갔다.
‘그래. 제드 크로스만이 사냥꾼의 존재를 알고 있을 수도 있어.’
아니, 알 확률이 명백하게 높아.
케일 친모의 가문인 템스 가문의 몰락. 그 깔끔한 몰락에 분명 감춰진 무언가가 있었고 이는 왕과도 관련이 있을 터.
케일은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제드의 그림자에 의해 정신을 잃은 것이리라.
“골치 아프군.”
갑자기 큰 변수가 나타났다.
왕.
변수의 이름이다.
“확 뒤집어엎어?”
그때였다.
데구르르.
케일은 제 손에 닿는 것을 내려다봤다. 아직은 태양이 뜨지 않은 새벽과 밤 사이. 과일이 하나 굴러와 그의 손 앞에서 멈췄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뒤이어 또 다른 과일들이 굴러왔다.
케일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이렇게 눈을 뜨자마자 말을 내뱉으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뭘 봐?”
검은 용이 케일을 매섭게 노려보며 과일을 살포시 굴리고 있었다.
케일 쪽으로.
데굴데굴. 과일들이 굴러와 케일 주변을 채웠다.
‘역시 기절했다가 깨면 다른 쪽이군.’
케일은 별생각 없이 과일을 하나 집어 베어 물었다.
와삭.
입안에 달콤한 향이 맴돌며 과즙이 입안을 채웠다.
쿠구구구—
저 멀리서 밀려오듯 전해지는 굉음에 케일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웬 산 하나가 무너지고 있었다.
케일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산 내가 아는 산인데.”
라온을 가둔 동굴이 있는 산.
그 산이 실시간으로 폭삭 무너지는 중이었다.
케일은 눈동자를 굴려 저를 노려보는 검은 용을 쳐다봤다. 검은 용은 눈을 살짝 감듯이 얇게 뜬 채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뒤집었다.”
이야.
케일은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말했다.
“왕도 뒤집으면 다 말하려나.”
검은 용이 케일을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자다 깨서 헛소리하네.”
하지만 케일은 진심이었다.
케일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 다시 기절시켜서, 어둠의 숲 쪽으로 데려다주라.”
미친놈을 쳐다보 듯 검은 용의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케일은 제 할 말을 이어갔다.
“해 뜨면 내가 좀 미치거든. 그냥 해 떴을 때 나는 무시해.”
그러고는 케일은 손을 들어 산뜻하게 인사했다.
“밤에 봐.”
깜박.
케일은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침이 되었으니 베니온 따까리 몸이 아닌 알베르 시종으로 깨어나야 할 차례였다.
“읍…….”
케일은 재갈이 물린 채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감금된 건가?’
그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주변을 대충 훑어보며 생각했다.
‘여기가 어디지?’
케일은 이곳이 어딘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나 굴욕 시험 치르던 중 아니었나?’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된 거지?
그때였다.
“조용히 해!”
낮게 다그치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작은 불빛을 든 채 그에게 다가왔다.
“음?”
케일은 전혀 기대치 않았던 자였다.
알베르 크로스만.
그가 꼬질꼬질한 흙투성이인 채로, 내가 이러는 게 맞나? 그만 돌아갈까? 상당히 헷갈리는 표정으로 케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하… 씨.”
알베르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신속하게 다가와 케일의 재갈을 풀어주었다.
“…저하?”
알베르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빌어먹을. 저하는 무슨 저하.”
아주 격식 없는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러나 케일은 이를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저하, 여기 왜 오셨어요?”
“허!”
알베르는 철제 의자에 꽁꽁 묶이고 조금 전까지는 재갈까지 물려있던 이를 쳐다보았다.
‘이 자식 제정신인가?’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보면 푹 자고 일어난 줄 알 정도의 태연하고 상쾌한 얼굴. 그리고 어떠한 위기감도 없어 보이는 느긋함. 시종은 의자에 꽁꽁 묶인 채로 그런 분위기를 풍겼으니.
‘당연히 미친놈 같아 보이지.’
알베르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괜히 왔나?’
빌어먹을.
다시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흘러나왔고, 케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씀이 거치십니다.”
“…그냥 말을 말아야지. 내가 미쳤던 거야.”
알베르는 한탄을 숨기지 못했다. 케일은 그런 알베르를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냐고?
저렇게 한탄하면서도 품에서 꺼낸 단검으로 케일을 풀어주고 있었으니까.
“뭐 이리 질기게 묶어놨어. 너 지금 사태 파악이 안 되냐?”
알베르가 툭 던진 말에 케일은 곧바로 답했다.
“국왕 전하의 호위한테 당해서 감금되었죠. 아마 곧 죽을 거고. 지금 이 모습을 들킨다면 저하께서도 같이 죽겠죠? 아, 왕자님이시니 죽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확신은 못하겠군요. 국왕 전하께서 조금 갈피를 잡기 힘든 분이시라.”
“…사태 파악은 하고 있군.”
“네. 제가 좀 그런 건 잘합니다.”
“…그냥 버리고 갈까.”
알베르가 중얼거린 말을 케일은 가볍게 흘려들었다.
원래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할 거 다 하는 인간이니까.
“저하는 여기 어떻게 오셨습니까?”
케일은 알베르가 가져온 마법 전등 빛이 비추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모두 보이지 않았지만, 석벽으로 둘러싸인, 마치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여긴 일단 도서관 지하 1층이다.”
“그렇군요. 제 뒤를 쫓아오셨습니까?”
무심히 건넨 말에 알베르는 잠시 멈칫했다가 답했다.
“어. 쫓았지.”
“잘하셨습니다. 의심스러우면 확인해야죠.”
도통 알 수 없는 생명체를 보듯 케일을 쳐다보던 알베르는 태연한 것과 달리 차갑게 가라앉은 케일의 눈동자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묶은 줄을 푸는 일에 집중했다.
물론 입은 케일의 의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었다.
“전하께서 새벽쯤에 도서관을 빠져나가셨고, 나는 대기하고 있다가 이곳에 왔어.”
그러고 보니 알베르는 국왕 제드에게 아바마마가 아닌 전하라 칭했다.
“몰래 들어오셨군요.”
“사서가 오기 전에 와야 하니까.”
“능력이 좋으십니다.”
“어휴. 아무튼, 도서관에 사람 숨길만한 곳은 지하 1층뿐이라서 여기로 왔고 구석방에 자네가 있었어.”
흐음.
케일의 표정이 다시 묘해졌다.
“…도서관 지하가 이렇군요.”
“그렇지.”
도서관 지하 1층.
케일이 원래 알던 도서관 지하 1층은 서적을 보관하는 곳으로 마법 처리가 필요한 서적들이 있는 곳이라 다른 1, 2, 3층에 비하면 희귀한 서적이 많았다.
그 까닭에 나름 최첨단 시설을 구비하였고 지하임에도 지상인 듯 밝고 쾌적한 환경을 자랑했다.
‘엉망이군.’
하지만 지금 지하 1층은 불빛 하나 없었으며 오래되어 보이는 석벽으로 공간을 나누고 있는 듯했다.
흙먼지가 얼마나 많으면 알베르까지 그 흙먼지를 꼴딱 뒤집어쓴 꼴이겠는가.
“흙먼지가 많나 봅니다?”
“…그건.”
알베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답했다.
“…혹시 함정이나 혹은 감시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은밀히 온다고 이렇게 되었네.”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이곳에 온 알베르였다.
물론 지하 1층에 아무도 없음을 알아채곤 허탈했지만. 15살, 이런 쪽으로 경험이 없는 그로서는 최대한 조심하는 쪽을 선택해야 했다.
“잘하셨습니다.”
케일은 소년의 이런 판단을 정말 칭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알베르는 칭찬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스르륵. 케일은 밧줄이 모두 풀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점검했다.
‘괜찮군.’
특별히 생채기는 없었다.
알베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지하 1층에 아무도, 무엇도 없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깨달은 사실.
“전하는 아마 내가 이곳에 너를 구하러 온 걸 알 거다.”
“모를 수가 없죠.”
케일의 시선이 알베르에게로 향했다.
“그러니 나갈 때 도로 묶어놓고 가십시오.”
“뭐?”
알베르는 기가 차다는 듯 탄식을 터트렸다. 그런 그를 향해 케일은 툭 내뱉었다.
“책임지실 겁니까? 아니, 책임질 수는 있고요?”
알베르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는 눈앞의 어벙한 시종 말대로, 국왕에게 들킨 이상 그가 잡은 시종을 데려간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책임질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들은 아직 국왕 앞에서는 작은 불씨조차 되지 못하니까.
“그래도.”
알베르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이 시종을 모른 척하는 것이 이득임에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다시 묶이겠다고, 잡히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어떻게 외면한단 말인가.
만약 시종이 알베르에게 얼른 구해달라고, 도망치게 도와달라고 사정했다면 알베르는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시종은 도로 묶이겠다고 했다.
알베르에게 혹시 피해가 올까 봐.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이놈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지?
단순히 미래에 내가 왕이 되면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해서?
결단코 아니다.
이놈은 그런 것에 미련이 없다.
그것쯤은 알아챌 수 있는 알베르였다.
“어쨌든 나중에 도로 묶어놓고 일단은 저 따라오세요.”
“…뭐?”
갑작스러운 말에 알베르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케일을 쳐다보았다.
손목과 발목을 돌리며 상태 점검을 모두 끝낸 케일은 태연히 감금되어 있던 방을 벗어났다.
끼이익.
‘그래도 낡은 문은 달려 있네.’
그는 뒤를 돌아 알베르에게 손을 뻗었다.
“마법 전등 좀 요.”
“…….”
알베르는 마법 전등을 케일에게 건네고 일단 그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역시.”
케일은 태연히 걸음을 옮기며 지하 1층을 둘러보았다.
‘있네.’
케일은 유독 긴 그림자를 지닌 모서리에 스쳐 지나가듯 한 번 눈길을 두었다.
“같네요.”
“무슨 소리지?”
알베르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케일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기억하던 지하 1층은 아니었지만, 그 크기와 구조 자체는 본래의 것과 거의 같았다.
‘그럼 계속 이곳을 방치하다가 몇 년 사이에 내가 알던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단 소린데.’
왜 갑자기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케일은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음. 그래도 이상하긴 하네.’
그가 원래 알던 왕궁 도서관 지하 1층은 최첨단이었지만 그래도 꽤 오래 가꿔온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긴 그건 내 느낌이지.’
그는 이곳이 알베르의 과거를 보여주는 시험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저하.”
그는 한곳에 서서 알베르를 돌아보았다.
“왜?”
“제가 왜 죽어야 하는지 궁금하죠?”
“…….”
알베르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케일은 발로 바닥을 쿵쿵 두드렸다.
“자, 여기.”
케일은 알베르를 따라 지하 2층. 크로스만가의 비밀이 묻힌 곳에 갈 수 있었다.
지상 1층에서 바로 지하 2층으로 향했지만.
도서관의 형태를 기억하고 있는 케일에게 지하 2층의 대략적인 위치를 아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그가 딛고 서 있는 이 아래.
“이 바닥 아래에 제가 죽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지하 2층 석실.
태양신이 크로스만 가문에게 남겨놓은 말이 있는 장소.
로운 왕국의 크로스만 왕가는 태양신의 가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더불어 고대의 하얀 별이 크로스만가의 조상이라는 것을.
태양신이 감시하는 어둠은 다크엘프 피가 아닌, 마계라는 것을.
그 모든 것이 숨겨져 있는 곳.
“그리고 저하께 도움이 될 정보가 숨겨있죠.”
알베르는 입을 꾹 다문 채 케일을 응시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마법으로 부숴주세요.”
“……!”
알베르의 눈이 커졌다.
“마법이라니, 내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마법을 쓸 줄 아냐고.
나는 마법 쓸 줄 모른다고.
알베르는 그리 말하려 했다.
“저하.”
시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법 쓸 줄 아신다는 거. 죽은 마나 보고 바로 알았습니다.”
“…으음.”
알베르는 침음을 흘렸다. 그는 손으로 제 눈가를 쓸어내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죽은 마나. 그 단어를 듣자마자 소년의 손끝이 떨렸다. 그때, 케일이 한마디를 더 건넸다.
“사고 쳐도 됩니다.”
“…뭐?”
알베르는 담담한 얼굴의 시종을 마주했다.
“죽은 마나.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시종의 눈동자 속 알베르는 손의 떨림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알베르는 그런 자신을 보지 못한 채 시종을 응시했다.
“태양신의 가호를 받는 크로스만 왕가의 금발? 그딴 것 없어도 됩니다. 애초에 태양신의 가호 따위 없죠.”
“무, 무슨 소릴-”
“다크엘프 피? 지금 인식이 좋진 않지만, 문제 될 것 없습니다.”
소년은 순간 숨이 막힌 것처럼 미동도 없이 시종을 응시했고, 시종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모든 답은, 이 아래에 있습니다.”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런데 입안이 바짝 말라 삼킬 침이 없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태양신의 가호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크엘프와 나의 연관성을 알아?
허무맹랑한 소린데, 귓가에 맴돌았다.
“사고 치세요. 제가 책임지고 나갑니다.”
저렇게 말하니까.
시종의 눈동자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정말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다.
알베르는 저를 돕겠다는 존재는 몇 보았으나,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어머니.’
갑자기 어머니가 떠오른 그때.
알베르의 눈이 커졌다.
“너-!”
씨익.
그 순간, 케일은 미소를 그렸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케일의 목 끝에 칼날이 닿은 채 멈춰져 있었다. 그의 등 뒤로 검은 옷으로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린 자가 서 있었다.
조금 전, 유독 그림자가 길었던 모서리는 이제 그림자가 줄어들어 있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지.’
제드 크로스만은 모든 것을 지켜보던 자다.
그런 자가 알베르와 케일의 만남을 놓칠 리 없을 터. 알베르가 지하 1층에 진입하게 둔 것만 봐도 그랬다.
‘내가 알베르 크로스만에게 무엇을 말할지 대략 짐작했을 것이고, 나아가 말해주길 바란 것이겠지.’
대신 수하를 보내 지켜보라 지시하고는 긴급할 때 끼어들라고 했겠지.
지금처럼, 지하 2층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내어 부수려고 할 때.
“언제 이렇게-!”
알베르는 제 뒤에도 선 왕의 그림자를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확실히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이런 부분에 서툴렀다.
케일은 담담하게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알베르가 놀라던 것도 멈추고 케일을 바라보았다.
“또 볼 수 있으면 봅시다.”
마치 다시 볼 수 없다는 듯 내뱉는 말투.
알베르는 뭐라 말하려 입을 벌렸다.
“읍!”
그때, 알베르 뒤에 선 그림자가 천으로 알베르의 입과 코를 막았다.
순간 알베르는 천에 묻은 것을 들이마셨고, 이것이 저 시종을 기절시켰을 때 썼던 것과 같은 것이라는 걸 대번에 깨달았다.
그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눈을 크게 떴다.
“저하, 하나만 기억하세요.”
시종의 목소리에 알베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왕을 믿지 마세요.”
아버지를 믿지 말라고.
“나도 믿지 마시고.”
자신도 믿지 말라고 말하는 시종.
“그럼 누굴-”
알베르는 제 말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점점 몸이 무거워져 왔다.
왕의 그림자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말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알베르는 잡다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 시종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누굴 믿을 수 있냐고.
알베르가 차마 다 잇지 못한 그 질문에 시종은 유쾌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모 있잖습니까?”
이모 타샤. 그리고 다크엘프들.
알베르가 그들을 떠올리려 할 때.
“그리고 본인을 믿으세요.”
알베르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는 이어진 시종의 말에 결국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저하는 이미 좋은 사람이니까요.”
훌륭하다.
능력 있다.
멋지다.
그런 것과 다른 말.
좋은 사람.
알베르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잠이 들려는 소년의 감겨 가는 눈동자에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시종이 담겼다.
그때 소년은 깨달았다.
본인을 믿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시종이었다.
스스로를 믿는 자라서 지을 수 있는, 당당한 미소.
그때, 영리한 소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턱도 없는 소린 아니었군.’
왕의 그림자를 본 순간, 알베르는 아버지가 자신과 시종의 만남을 허락했으며 일부러 대화를 할 기회를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림자가 나섰다. 그것도 다급하게.
이는 저 시종이 꽤 큰 진실 혹은 비밀을 말했단 뜻일 터.
‘시종의 말과 그의 행동은 진실일 확률이 높다.’
더불어 소년은 한 가지 더 깨달았다.
‘국왕은 다 알고 있었어.’
자신에 대한 것도 다크엘프도 죽은 마나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놔뒀다.
‘그랬단 말이지?’
그렇기에 소년은 알았다.
나는 이 왕국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국왕이 그냥 둔 것이겠지.
나는 틀리지 않았어.
내가 잘못해오지 않았어.
왕을 꿈꾸는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정신을 잃었다.
쓰러지는 소년을 왕의 그림자가 조심스럽게 받아들었을 때.
“자네, 누구지?”
케일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케일을 압박하던 칼날은 사라졌다.
파아앗–!
동시에 지하 1층에 환한 빛이 퍼져나갔다.
케일은 지하 1층으로 내려서는 제드 크로스만의 놀람을 감추지 못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 의외라는 듯,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하 2층을, 석실을 찾으러 온 게 아니라, 석실에 들어간 적이 있나?”
제드가 물었을 때, 케일은 다른 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굴욕 시험 1/2 완료.
-대상자 알베르 크로스만의 굴욕을 변화시킬 실마리 ‘자신감’을 제공하였습니다.
-남은 시험 1/2을 위해 조정 필요.
-조정 완료 후 이동합니다.
케일은 손을 들어 보였다.
“시간이 얼마 없어 핵심만 간단하게 빨리 말할 테니, 알아서 잘 들으세요.”
“지금 뭐라고 했나?”
제드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케일은 정신을 잃고 잠든 알베르 쪽으로 턱짓하면서 덧붙였다.
“괜히 아무것도 모르는 애 건들지 말고.”
환상이라도, 케일은 알베르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만든다고 했으니 마무리는 깔끔하게 해놓고 갈 생각이었다.
-조정 중… 1%.
그리고 바빴다.
시험일지라도 라온도 얼른 굴욕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지 않겠나?
“두 번 말 안 합니다.”
어느새 케일은 저도 모르게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제드와 마주했다.
자. 사기를 쳐볼까?
“방랑자라고 압니까?”
단생자 혹은 시련자라고 일컫는 존재. 그들은 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신이 되길 포기하거나 바라지 않는 자들을 부르는 명칭.
방랑자.
케일이 아는 방랑자로, 최한의 친척 어르신이자 초대 드래곤 슬레이어인 최정건이 있었다.
#
케일은 제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정말로 당황한 듯, 표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짧았던 순간.
“방랑자라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순식간에 제드는 표정을 다스렸지만.
“알고 있군요.”
“……!”
사냥꾼을 아는 자이니 방랑자도 알리라. 케일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그렸다. 제드는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군. 정신이 왔다 갔다 하나?”
역시 한 번 깨웠다가 다시 잠재웠군.
케일이 기절하고 라온 쪽으로 넘어가 해가 뜨기 전까지. 그사이에 제드는 진짜 이 몸의 주인인 시종을 본 듯했다.
“네.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죠.”
허.
제드는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냉정했다.
“연기인지 아니면 이중인격인가 싶었다만. 방랑자의 능력인가?”
제드는 알아서 답을 찾아갔다.
“그래. 방랑자이니, 타인의 몸을 조종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겠지. 신을 포기한 자들이니까. 그 능력이 특이하고 소름 끼치겠지.”
케일은 웃으며 허공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조정 25%…….
꽤 빠르게 퍼센티지가 올라갔다.
“네 녀석을 알아보니,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난 어리숙한 시종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갑자기 며칠 사이에 사람이 바뀐 것처럼 군다고. 특히 해가 떴을 때와 해가 졌을 때가 너무 다르다고 말이야.”
“혼자 중얼거려도 되는 시간이 아닙니다.”
“…….”
상당히 방자한 태도로 케일은 제드의 말을 가벼이 무시했다.
‘뭐 어쩔 건데? 방랑자가 왕이 겁나겠냐?’
사실, 방랑자가 아니어도 케일은 딱히 왕이 무섭지 않았다.
환상이니까.
“나는 방랑자로서 사냥꾼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자, 내 상황 설명은 이걸로 끝이고.”
상당히 허술하고 무성의한 설명이었다.
“이제 내가 질문을 하죠.”
케일은 제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가 움찔했지만, 무시했다.
“전하.”
-조정 57%…….
“크로스만 가문은 꼭두각시였죠?”
제드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것만으로도 답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고대의 하얀 별은 사냥꾼들에게 이용당한 거군요.”
케일은 그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지금 그에게 포용된 채 황금패에 갇혀있는 하얀 별.
그는 신이 되기 위해 끝없는 환생이라는 저주를 스스로에게 뒤집어씌웠다.
케일은 하얀 별이 반복된 환생 덕에 천년이 넘는 그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 봉인된 신을 첫 번째 환상 시험에서 마주하였고 새로운 정보를 듣는 순간, 다른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죽음의 신은 말했었다.
‘더, 더불어 온갖 세계에, 신, 신전을 출몰, 시키, 려는, 지지직-’
온갖 차원에 절망 신의 신전이 나타나 사람들의 절망을 잡아먹고 절망 신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봉인된 절망 신은 차원을 넘나드는 그런 큰일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시험이라는 매개가 있어야 가능하다.
‘즉, 누군가 봉인된 절망 신이 힘을 되찾도록 돕고 있다.’
그것도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들이.
그리고 케일은 고1 김록수 때 차원을 넘나드는 자를 보았다.
바로, 사냥꾼.
더불어 절망 신은 사냥꾼 출신의 신이다.
‘결론은 나왔다.’
케일은 정보의 조각을 맞췄다.
‘등급 외 괴물과 가디언. 그리고 신전. 이 모든 것들이 각 차원에 나타나는 배경에는 절망 신을 돕는 사냥꾼의 조력이 있다.’
즉, 하얀 별은 모든 것을 스스로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사냥꾼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터.
케일, 나아가 어쩌면 하얀 별과 그의 수하들도 모를 사냥꾼의 조력과 공작이 이 일련의 과정 속에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단지 그것이 지금의 하얀 별에게만 적용된 사항일까?’
고대의 하얀 별.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했다.
‘나는 영웅의 탄생 책을 통해 정보를 알았기에 고대의 힘을 여러 개 모을 수 있었어.’
케일 베로우, 지금의 하얀 별은 천년에 걸쳐 고대의 힘을 찾고 모아 왔다.
그런데 고대의 하얀 별은 애초부터 여러 개의 고대 힘, 그것도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짱돌이나 불벼락과 같이 대부분의 고대 사람들처럼 본래 타고난 힘일 가능성도 존재했지만.
‘이상하잖아?’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다양한 힘을, 그것도 특출 나게 강대한 힘을 타고날 수가 있지?
그리고 대뜸 신을 노리며 어떻게 많은 세력을 단번에 모았을까?
‘이건 분명 보이지 않는 조력이 있어야 가능해.’
그리고 그 조력한 자는?
‘사냥꾼이지.’
케일은 국왕 제드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고대의 하얀 별은 스스로 신이 되길 욕망했을 겁니다. 어찌 보면 사냥꾼과 협력을 한 것일 수도 있겠죠.”
고대의 하얀 별이 한 짓을 보면 그저 속고 이용당한 가련한 존재는 절대 아니다.
그들의 관계가 협력인지 이용인지 혹은 주종관계인지.
무엇일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냥꾼은 역사에 드러나지 않았고, 오로지 고대의 하얀 별만이 몰락했죠.”
한 걸음.
제드와 케일 사이의 거리였다.
“그래서 사냥꾼을 증오하는 것 아닙니까?”
제드는 고개를 들었다.
“하아.”
깊은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쁜 놈이 나쁜 놈 이야기에 혹해 나쁜 놈과 거래를 했고, 나쁜 놈에게 외면당했던 것뿐이지.”
고대의 하얀 별이 사냥꾼 이야기에 혹해 사냥꾼과 거래를 했고, 결국에는 사냥꾼에게 외면당했다.
케일은 조금 더 제드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추측이 아닌 진실이 알고 싶었으니까.
-조정 91%…….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붉은 피는 어딨습니까?”
찔러보았다.
방랑자 최정건이 케일에게 꼭 찾으라고 한 붉은 피 가문.
멸문했다고 알려진 사냥꾼 가문이었다.
그리고, 제드의 얼굴에 무엇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케일은 웃었다.
“아는구나?”
그 순간, 제드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그제야 케일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두 번 찔러보았다.
“아네.”
“……!”
제드는 비로소 ‘아는구나?’ 물어본 것도 찔러본 것임을 알고 아차 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조정 95%…….
케일은 이제 정말로 시간이 없다.
이 환상도 곧 끝이다.
‘괜찮아.’
얻을 건 다 얻었다.
‘하얀 피에 대한 건.’
하얀 피. 사냥꾼들을 배신한 가문.
케일은 크로스만 가문이 하얀 피가 아닐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배신한 가문이 이렇게 왕가를 이룰 수 있을까?
‘제드는 사냥꾼에게 적의를 보였을 뿐, 도망치려는 생각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배신자의 행동이 아니었다.
‘하얀 피에 대한 건, 현실에서 묻도록 하지.’
제드 크로스만.
현실에서 그를 만나야 할 이유가 생겼다.
여러모로.
-조정 98%…….
케일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전하.”
제드의 텅 빈 눈동자. 사냥꾼을 향해 분노하던 눈동자.
그래서 이상하다.
자그마치 만 년 전 조상인 고대의 하얀 별.
그 사람이 사냥꾼과 거래해서 배신당하거나 외면당한 일이 지금에서야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왕이 분노할 일인가?
다른 이유가 있다.
분명히.
그래서 케일은 마지막 질문으로 택했다.
“사냥꾼이 무섭죠?”
왕의 속마음을.
“목숨 협박이라도 받았습니까?”
사냥꾼에게 분노하고 극도로 증오하는 이유.
그럼에도 사냥꾼을 상대하려는 낌새는 알베르가 왕세자가 될 때까지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뒷방 늙은이로 지냈을 뿐.
오히려 숨어들었다.
그것이 비수를 만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겁먹어 외면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케일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니면 가까운 누군가가 사냥꾼에게 죽은 겁니까?”
찰나. 제드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그러나 왕은 침착하게 답했다.
“알 것 없다.”
그러나 케일은 보았다.
-조정 100% 완료.
국왕의 눈동자가 아주 찰나 알베르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왕세자의 어머니를 누가 죽였을까?
그녀의 죽음을 의문의 죽음이라고 일컬었다.
“전하. 다음에 뵙겠습니다.”
-대상자 라온 미르에게로 이동을 시작합니다.
케일은 백수 라이프를 꿈꾸지만. 좀 쉬고 싶지만.
그는 잠든 열다섯 소년을 잠시 바라보다가 제드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볼 때.
“그때는, 모든 것을 다 듣도록 하죠.”
제드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붙잡아!”
케일은 눈을 감았다.
그림자가 그를 붙잡았으나 실소를 흘렸다.
‘붙잡긴 뭘 붙잡아. 내 정신을 어떻게 붙잡게?’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읍…….”
그는 나무 기둥에 꽁꽁 묶여 있었다.
당연히 재갈을 물고 있었다.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주변에 검은 실드가 둘러졌고, 낯익은 숲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케일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역시 살벌한 용이구만.’
그는 축 늘어진 채 라온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라온이 세 살 때이면, 여기 최한도 있을 텐데.
그것도 해리스 마을에서 따뜻한 정을 아직 느끼지 못했을 때의 최한일 텐데.
‘설마 만나겠어?’
그때였다.
콰아아앙!
케일은 엄청나게 큰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으으읍.”
숲의 나무 몇 개가 가루처럼 사라지며 라온과 최한이 한판 붙고 있는 광경이 드러났다.
“나는 쎈 용이다!”
“하. 이제는 어린 용인가.”
아이고, 머리야.
케일은 그냥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일어났군.”
라온이 갑자기 진중하게 말하더니 최한은 무시하고 곧장 케일의 앞으로 날아왔다.
“허?”
최한이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보았다.
“먼저 시비 걸 땐 언제고?”
황당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으나, 귀담아 들어줄 대상은 이미 눈을 감고 있는 케일의 앞에 서서 그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으음.’
케일은 눈을 감고 있음에도 그 눈빛을 느꼈다.
결국 케일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이번에는 제정신이군.”
라온이 내뱉는 말에 케일이 움찔했지만, 라온은 케일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먹잇감을 살펴보는 맹수 같았다.
“아까는 나쁜 놈이 맞았는데. 그놈은 가만 두면 안 되는데.”
베니온 따까리와 케일을 저도 모르게 구분하는 라온이었다.
케일은 살벌한 기운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하, 안녕?”
라온은 뚱한 얼굴로 가만히 케일을 쳐다봤고, 케일은 활발하게 말했다.
“그 멀리에서 어둠의 숲까지 벌써 온 거야? 지리도 몰랐을 텐데. 대단하네?”
그 순간, 어린 용의 꼬리가 살짝 움찔거렸다.
최한이 묘한 표정으로 케일에게로 다가왔다.
“사람이네. 진짜 사람.”
그 멍한 목소리가 이상하게 케일은 살벌하게 들려왔다.
그 순간, 갑자기 시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대상자 라온 미르의 굴욕을 잊게 만들 실마리의 단서 ‘칭찬’ 발견.
실마리의 단서라고?
칭찬?
케일은 조금 전 알베르 때를 떠올렸다.
‘대상자 알베르 크로스만의 굴욕을 변화시킬 실마리 ‘자신감’을 제공하였습니다.’
알베르 크로스만은 ‘자신감’이 실마리였다.
그렇다면, 라온의 실마리는 무엇일까?
‘일단 칭찬을 하다 보면 나오려나?’
그런데 이 시험 목소리, 은근 친절한데?
시험을 통과하는 방향을 잡아주잖아?
확실히 굴욕 시험부터는 이전 시험과 뭔가 달랐다.
* * *
최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냉장고에 붙은 거울로 김현수의,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대상자 김록수의 굴욕을 덮게 만들 실마리의 단서 ‘밥’을 발견.
-대상자 김록수의 굴욕을 덮게 만들 실마리의 단서 ‘따뜻한 집’을 발견.
-대상자 김록수의 굴욕을 덮게 만들 실마리의 단서 ‘깨끗한 옷’을 발견.
-대상자 김록수의 굴욕을 덮게 만들 실마리의 단서 ‘풍족한 저녁밥’을 발견.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최한은 주방에서 홀로 격한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토로하다가 이내 표정을 바로 하고는 거실로 향했다.
그곳엔 애니메이션을 보며 치킨을 먹고 있던 김록수가 최한을 말끔한 눈동자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 여기 컵. 콜라 담아줄게.”
이제 배달 음식도 시켜먹을 줄 알게 된 최한이었다.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답하는 김록수를 보며 최한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환상이건 뭐건 간에 일단 애 살부터 찌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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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먹을래?”
“괜찮아요.”
최한은 김록수의 답에 얼른 빵을 뒤로 치우고는 과일을 주섬주섬 꺼냈다.
“이건?”
“괜찮아요. 배불러요.”
“…고작 치킨 몇 조각을 먹고 배가 부르다니……!”
사과파이를 꺼내던 최한은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꾹 눌러 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록수 어린이의 눈동자에 떨떠름함이 맺혔지만 최한은 보지 못했다.
‘…옷도 새로 사주고, 일단, 뭘 더 먹여야 하는데!’
최한은 김현수의 통장 잔고를 진즉에 확인했다.
환상이라도 사직서까지 쓴 터라 많이 쓰기는 미안해서 일부만 쓸 생각이었다.
또한 그는 아무리 현대 지구를 모른다고 해도 어느 정도 사회적인 상식은 있는 사람이었다.
‘…케일 님을 지금 이대로 두어서는 안 돼.’
최한은 사과파이 한 조각과 오렌지 주스를 김록수 앞에 두며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어린 케일 님은 최한이 아버지의 직장 후배였다고 말하며 함께 가자는 말에 따라왔다.
아무리 밥 준다고, 치킨 시켜준다고 했지만!
‘…이렇게 순수해서야……!’
최한은 자신의 허무맹랑한 말에 따라오는 어린 케일의 순진함과 순수함에 말문이 막혔다.
물론 어린 김록수는 최한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지만, 일단 집에 가기 싫어서 따라온 것이었다. 이를 당연히 최한은 몰랐다.
“록수야.”
“네, 아저씨.”
아저씨라는 호칭에 최한은 잠시 멈칫했지만,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다음부터는 처음 보는 사람 따라가면 절대 안 돼. 밥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절대로, 무조건 안 돼. 알았지?”
김록수는 살짝 기가 찬 눈빛으로 최한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따라갈게요.”
“그래, 착하네.”
어린이 김록수의 표정이 더 떨떠름해졌지만, 최한은 이를 모른 채 조금 전 기이한 목소리가 들려준 것들을 떠올렸다.
‘대상자 김록수의 굴욕을 덮게 만들 실마리의 단서 ‘밥’을 발견.’
‘대상자 김록수의 굴욕을 덮게 만들 실마리의 단서 ‘따뜻한 집’을 발견.’
밥, 따뜻한 집, 깨끗한 옷, 풍족한 저녁밥.
단서를 모아보니, 최한은 대번에 답을 알 수 있었다.
‘어린 케일 님께 필요한 것은 하나야.’
집.
‘새로운 집 혹은 대피처.’
지금 그는 친척의 손에서 괴로운, 굴욕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를 빼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단기적이고 한정적인 형태여서는 안 된다.
최한은 깨작깨작 사과파이를 먹는 어린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한쪽에 놓인 목검을 응시하며 결심했다.
‘내일 보육원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아니면 아동 지원 단체나.’
더불어 김록수의 집으로 가봐야겠다.
술과 도박에 찌들어 있다는 그 인간.
“…면상이라도 봐야지.”
목검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점점 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 *
케일은 일단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부터 처리하기로 하였다.
“나 좀 풀어줘.”
그는 아직 나무 기둥에 묶인 채였다.
“흥.”
검은 용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스르륵. 그리고 케일을 감싸던 밧줄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최한이 이 허무한 광경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내 검은 용은 무시한 채 케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탕!
하지만 그 앞을 가로막는 검은 막이 생겨났다.
“…뭐야?”
검은 용이 만든 검은 막이 최한의 걸음을 막았다. 케일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최한과 검은 용의 시선이 부딪쳤다.
용의 검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넌 저 나쁜 놈에 비하면 너무 강하다.”
뭔 소리야.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최한은 케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쿵!
“커억!”
케일이 바닥에 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용과 최한이 쳐다보자, 케일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뭘 봐?”
물론 살벌한 용의 모습과 묘하게 띠꺼운 최한의 행동에 둘을 쳐다보지는 못한 채 중얼거릴 뿐이었다.
맞기는 싫었으니까.
아픈 것을 떠나, 이제 저 둘에게 맞으면 굉장한 자괴감이 들 것 같았다.
“…정말 사람이군.”
나직이 읊조리는 최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는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 사람이지. 어둠의 숲에-”
케일의 시선이 최한의 행색을 훑었다.
“사는 건가?”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면 해리스 마을에서 온 건가? 헤니투스 영지에서 파견 나온 기사려나?”
최한의 눈동자에 혼란이 스며들었다.
“마을? 영지? 그게 다 무슨 말이지?”
잠시 그는 멈칫하더니 중얼거렸다.
“…대화가 되네? 그러고 보니 내가 말하는 언어가-”
혼란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케일이 냉정히 지켜보려던 차, 그의 시야에 볼살 하나 없는 어린 용의 얼굴이 들어찼다.
“여기 왜 내가 와야 하나?”
최한을 완전히 가려버리는 용의 얼굴에 케일은 멈칫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쿵.
“윽.”
나무 기둥에 등이 부딪쳤다.
“쯧. 어리숙하군.”
라온이 또 진중한 척하는 말투로 케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건 또 색다른 기분인데?’
케일은 라온에게 이런 대접을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곧 구겨졌다.
꼬르르륵.
배에서 천둥이 쳤다. 급격한 허기짐이 케일을 뒤덮었다. 아무래도 그가 아닌 베니온 따까리는 라온에게 뭐 하나 얻어먹지 못한 듯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최한과 라온을 쳐다봤다. 위험한 어둠의 숲. 이 둘이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었다.
“나 배고픈데.”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지가지 하네.”
그러고는 최한을 쳐다보았다.
“…왜?”
“먹을 거 내놔라.”
아주 당당하게 최한에게 음식을 요구하는 라온이었다. 최한이 기가 차서 라온을 쳐다봤으나, 라온은 남서쪽으로 턱짓했다.
“마을이 있던데, 거기서 인간들이 먹는 음식 구해와라. 나는 인간 싫다. 그래서 마을 안 갈 거다.”
“…아니, 인간 싫다면서 인간이 먹을 음식을 구해오라고 시켜?”
최한이 뭐 이런 게 있냐는 듯 라온을 쳐다봤다.
‘오.’
케일은 그가 아는 최한과는 전혀 다른 최한의 모습에 약간의 흐뭇함이 들었다.
‘해리스 마을에서 따뜻함을 느끼기 전의 최한은 조금 덜 순하네.’
이 정도면 세상에 나가서도 어디 가서 뒤통수 맞지 않고 잘 살겠어.
흡족함이 담긴 미소가 입가에 어렸다.
그 미소를 본 최한이 멈칫하다가 이내 케일의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 그- 남서쪽 숲 밖에 마을이 있다고?”
그 목소리는 숨길 수 없이 떨렸다.
그럴 만했다.
아직 최한은 해리스 마을에 가지 못한 때였다.
사실 케일이 보기에는 최한이 이 정도로 라온과 케일을 대하는 것만 해도 그의 인내심이 참 깊고, 성정이 순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케일이라면 대화가 통하는 용을 본 순간,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마을의 존재를 알아챈 순간 당장이라도 케일이나 용의 멱살을 잡고 마을로 달려갈 것이다.
“어. 그런데 정말 여기 사는 거야? 여기 불가사의 지역이라고, 위험해서 사람들이 안 올 텐데.”
최한은 케일의 말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먹을 것을 구해오지.”
그는 마을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빼곡한 나무가 들어차 그늘로 어두운 숲으로 향했다.
케일은 최한이 스스로를 다스릴 시간을 벌기 위한 것임을 알고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흠칫!
그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라온의 눈동자를 보고 움찔했다.
역시 네 살 때보다 세 살 때 더 살벌하다. 이 용은.
“나를 왜 여기로 오게 했나?”
용은 케일에게 의문을 표했다.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고, 강한 것들이 많다.”
어둠의 숲. 어찌저찌 찾아온 이곳은 그간 용이 지나오며 보았던 곳에 비하면 상당히 험난한 지역이었다.
불가사의 지역이라고 불린다는 것이 납득되었다.
무엇보다도 눈앞의 이 인간에게 이곳은.
“너한테 하등 쓸모가 없는 곳이다.”
단 하루도 이 인간 홀로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때, 나쁜 놈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너한테는 필요한 곳이지.”
용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배우고 성장하고 세상을 알아가기에 이곳은 그 시작점으로 잡기 좋은 곳이야.”
불가사의 지역이어도 라온에게는 위험하지 않은 장소였다.
오히려 라온이 성장하는 데에 있어 괴물의 존재가 도움이 될 터.
“여긴 네 집을 만들기에 적절할 거다.”
집.
그 단어를 케일이 내뱉는 순간, 라온의 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이를 모른 채 케일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아까 본 녀석, 걔도 너랑 처지가 비슷해. 이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오랜 시간 홀로 있었지.”
검은 용의 시선이 아주 잠시 북동쪽 숲으로 향했다.
최한은 아직 음식을 구하러 가지 않은 채 숲의 나무들이 만든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이를 용도 알고 있었고 용이 안다는 것을 최한도 알고 있었다.
오로지 케일만 몰랐다.
“둘이 함께하면 외롭지 않을 거다. 그리고 둘 다 강하니까 누구도 너흴 쉽게 못 건드릴 것이고.”
케일은 라온의 굴욕 실마리를 모른다.
단지 라온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함께하면 뭐, 그럭저럭 괜찮을 거야. 심심하지 않고.”
물론 억지로 만들어줄 생각은 없다.
단지 그는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용은 케일의 입가에 부드럽게 맺힌 미소를 가만히 응시했다. 분명 저 나쁜 놈은 스스로 미소를 그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용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너는?”
“나?”
케일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나같이 나쁘고 정신 오락가락하는 놈이랑 같이 다니면 손해야. 안 그래? 뭘 당연한 걸.”
암, 그렇고말고.
라온 옆에 이런 베니온 따까리 같은 놈을 남겨둘 수 없었다. 그리고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최한도 자칫하다간 불법적인 것들부터 배울 수도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베니온 따까리는 저 멀리 치워버려야 한다.
‘이 몸을 저 멀리 치울 때쯤이면 라온도 굴욕 대신 다른 걸로 마음을 채우겠지.’
케일은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쿵!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과 땅의 진동에 케일은 놀라서 시선을 내렸다.
검은 용이 두 앞발로 아주 세게 땅을 내리쳤다.
‘왜, 왜 저래?’
갑자기 화가 난 듯한 용의 모습에 케일은 살짝 쫄았다.
“나쁜 놈, 부려 먹을 거다!”
어린 용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맹렬하게 외쳤다.
휘이이—
순식간에 용을 주변으로 검은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근처에 있던 나무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직.
거대한 나무들이 힘없이 산산이 분해되는 것을 지켜보던 케일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부, 부려 먹어! 얼마든지!”
“…흥.”
쉬이이–.
검은 마나 소용돌이가 서서히 잠잠해져 갔다.
용은 힐끗 북동쪽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쥐새끼마냥 숨어서 지켜보던 인간은 자신이 마나를 일으킨 사이에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바스락. 바스락.
최한은 천천히 검집을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나에 대해 알고 있어? 누구지?”
혼란 사이로 단단한 다짐이 하나 내려앉았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잠시 멈춰선 최한은 뒤돌아 남서쪽을 바라봤다. 숲 너머에 있을 마을, 영지, 그 모든 것들을 그는 상상하며 한마디를 남겼다.
“여길 떠난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며,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데리고.”
누구를 향한, 무엇을 위한 선전포고인지는 최한만이 알고 있었다.
이를 모르는 케일은 사그라든 검은 마나 소용돌이를 보며 옷깃을 움켜쥐었다.
‘…이 쓸모없는 베니온 따까리! 고대의 힘도 하나 없고!’
방패 같은 것도 못 만들고!
건강하기만 아주 건강한 것 빼면, 좋은 점이 없잖아!
케일은 슬그머니 라온을 쳐다봤고, 검은 용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마나를 일으켰다.
“어!”
케일은 다시 나무 기둥에 밧줄로 묶였다.
그리고 그 주변을 단단한 검은 실드가 둘러싸며 보호했다.
“…마을에 갔다 온다.”
진중하게 말한 어린 용은 날개를 파닥이며 해리스 마을 쪽으로 날아가다가 멈칫하고는 케일을 쳐다보았다.
“조용히 있어라. 괴물들 올지도 모른다. 약하고 나쁜 놈아.”
…허.
케일은 기가 찬 얼굴로 날아가는 검은 용을 덩그러니 바라봤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는데?”
라온의 굴욕을 다른 것으로 채우는 일. 예상외로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케일은 몰랐다.
마을로 날아가는 라온이 몇 번이나 멈칫하며 뒤돌아 보이지도 않을 거리의 케일 쪽을 쳐다보고, 마을로 가는 길에 과일을 따며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 있었단 사실을.
“…이상하네.”
홀로 남겨진 케일은 이상하게 뒤통수가 서늘해져 왔다.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느껴졌다.
뭔가, 요상하게 무언가 일이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 * *
“…드디어 마지막 단계에 진입하는 사람이 있군.”
알베르 크로스만은 지친 얼굴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신전 위에 자리한 구.
여섯 조각으로 나뉜 채, 현재 다섯 조각만이 색을 품고 있었다.
모두 보랏빛으로 빛나는 와중에 하나만이 검은색.
‘분노’로 진입했다.
“일단 케일 헤니투스는 아니고.”
누구지?
알베르는 의문을 내뱉지 않은 채 관찰을 이어갔다.
그 시각, 보랏빛 공간을 지나 검은빛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이의 입에서 나직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과거의 굴욕. 나의 것도 아닌 것. 나는 전설의 삶을 지켜볼 자.”
클로페 세카는 고요한 얼굴로 마지막 환상 시험 ‘분노’로 향했다.
#
151장. 가장 화날 때요?
“…이런.”
마지막 시험 ‘분노’. 그 실체를 마주한 순간, 클로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는 마지막 시험이 이런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굴욕이 나았다.
* * *
“먹어라.”
후두둑.
갖가지 과일과 일반 가정식 몇 가지가 케일의 앞에 펼쳐졌다. 케일은 평온한 얼굴로 이를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쿠웅!
최한이 사냥한, 짐승도 괴물도 아닌 무언가를 케일 앞에 내려놓았다.
“구우면 먹을 만해.”
최한의 말을 들으며 케일은 평안한 얼굴을 한 채 생각했다.
‘그래도 라온이 낫구만.’
손질도 제대로 하지 않은 고깃덩이를 케일이 어찌 먹을 수 있겠나. 아무리 베니온 따까리 몸이 건강하다고 해도 저 거대한 것을 손질해 구워 먹으려면 한나절도 부족할 것이다.
‘으음. 하긴, 최한은 이런 것들을 먹어야 했겠군.’
과일이나 풀때기를 제외하고 어둠의 숲에서 최한이 먹을 것은 몇 없었다.
제대로 된 음식은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농사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약했을 최한은 과일도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시간을 꽤 오랫동안 보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름대로 귀한, 본인 기준에서 먹기 힘든 것을 구해온 것일지도.’
그것이 케일이 감당하기에는 거대한 무언가여서 문제였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조금 띠꺼운 최한이라서 그렇지, 여전히 착하구나. 처음 보는 웬 놈한테 먹일 것을 저리 성실히 구해오다니.’
케일은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최한에게 말했다.
“고생했어.”
그때였다.
쿵!
케일은 다시금 땅이 울리자,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라온이 두 앞발로 땅을 쿵 내려치더니 최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저러지?’
고민하던 케일은 곧 답을 찾았다.
“아. 너도 같이 먹자. 나 혼자 다 못 먹어.”
라온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4살 때보다 조금 더 동그란 3살 때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나쁜 인간…! 멍청한……!”
멍청하다고? 누가? 내가?
“나 똑똑한 편인데? 네가 잘 모르는구나? 물론 나쁜 놈이지, 쓰레기야, 쓰레기. 나는.”
라온이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하지 못했다.
“푸흐.”
케일은 갑자기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옆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최한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쟤는 또 왜 저래?’
케일은 의아했지만, 홀로 지내던 최한이 말이 통하는 대상을 만나 무엇이든 즐거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 웃으면 됐지.’
웃고 살기 참 빡빡한 세상. 웃으면 좋지.
케일은 좋은 게 좋은 거지란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툭 내뱉었다.
“혼자 살든, 사람들과 어울려 살든. 어찌 살든 세상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밧줄에서 풀려난 케일의 손이 과일을 집어 들었다.
용은 그 모습에 눈을 반짝이다가 이내 케일의 입을 쳐다봤다.
저 인간이 하는 말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최한은 나무에 기댄 채 이를 지켜보았다.
사실 케일은 라온, 최한 둘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언젠가는 세상과 마주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든. 새로운 환경을 살아가든 말이야.”
케일은 라온에게 최한을 만나게 해서 가족 혹은 친구를 만들 기회를 주고 싶었으며.
나아가 어둠의 숲에 언제든 돌아올 집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고.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면 굴욕을 잊거나 이겨내거나 덮어내겠지.’
환상이라도, 상처 입은 라온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법.
케일은 진지한 얼굴로 라온에게 말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케일이 입을 닫자 잠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둠의 숲은 서서히 하늘이 붉게 물들며 노을이 지고 있었다.
검은 용도, 최한도 케일을 응시했다.
‘이상하다.’
검은 용은 새삼 케일을 보며 위화감을 느꼈다.
아까 전 어둠의 숲까지 끌고 올 때의 이 나쁜 놈은 말 그대로 패닉 상태였다. 더불어 용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극심한 공포를 드러냈다.
또한 본인이 용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무슨 사건을 벌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사람은.
아까 그놈과 눈동자부터 달랐다.
눈동자 색도 크기도 눈의 모양도 외양도 모든 게 같았지만, 분명 달랐다.
눈앞의 이 사람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검은 용이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언가를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어조, 투박한 행동과 달리 그 눈동자 속 무언가는 검은 용의 심장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알 수 없는 온기가 어디선가 용의 내부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사람이 달라.’
용은 직감적으로 진실에 도달했다.
한 몸에 두 사람이 있다?
그것이 가능한지 아닌지, 세상을 모르는 용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용은 자신이 직감한 부분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었다. 검푸른 눈동자가 깊어져 갔고, 그 입이 열렸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
침묵하던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진지했다. 그는 저를 집중하는 어린 용과 나이는 많지만 오래 홀로 살아온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돈.”
“…뭐?”
용이 더듬더듬 되물었고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가득 차서 말했다.
“암, 중요하고말고.”
그는 최한과 라온이 어찌 쳐다보든 말든 아주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만 믿어.”
그러고는 라온에게 말했다.
“마법으로 저 고기 구워주면 안 되냐?”
뒤이어 최한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손질 좀 해줘. 나 할 줄 몰라.”
검은 용도 최한도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케일이 부탁한 것을 군말 없이 해나갔다.
* * *
딱닥, 따닥, 따닥.
나뭇가지가 불에 타오르며 소리를 냈다.
어느새 어둠의 숲은 한밤중이 되었다.
최한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아주 작은 불안감도 없다는 듯이 무방비하게 풀밭에 드러누운 채 자는 사람.
이름은 모른다.
검은 용이 나쁜 놈이라고 불러대서 그냥 나쁜 놈이라고 알고 있는 이상한 사람일 뿐.
저 사람은 어둠의 숲의 밤이 조금도 무섭지 않은 듯했다.
‘이곳이 어둠의 숲이라는 것도 저 사람 때문에 알았지.’
그저 미친 숲이라고 생각했었던 최한이었다.
‘아니지.’
저 사람은 숲이 무섭지 않은 게 아니다.
최한 자신과 저 검은 용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저런 무방비하고 거리낌 없는, 어찌 보면 상당히 나태해 보이는 자세로 자고 있는 것일 터.
“…하.”
최한은 기가 차서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수십여 년. 어쩌면 그 이상을 이곳에서 살았건만. 아니, 살기 위해 발버둥 쳤건만 저런 존재는 처음 본다.
최한도 경지에 오르며 겨우 이 숲에서 숨통이 트이게 되었는데. 참으로 신기한 인간이었다.
스슥.
그때, 최한은 깊이 잠든 남자와 최한 사이로 소리 없이 끼어들어 몸을 웅크리는 존재를 볼 수 있었다.
검은 용은 최한을 노려보며 그 작은 몸으로 가려지지도 않는 남자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피식.
최한은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웃지 마라.”
용이 차마 크게 말하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진중하게 말했다.
참고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내 맘이다.”
최한은 검은 용의 말에 응수하며 불로 시선을 돌렸다.
따닥. 따닥.
언제 이런 때가 있었던가.
혼자서 보내지 않는 밤이.
아니다.
적과 보낸 밤은 많았다.
다만 적이 아닌, 그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이런 밤이 얼마 만이었던가.
검은 용은 살면서 두 번째였고.
최한은 아득한 기억 속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쁘지 않네.’
최한은 몰랐지만, 그는 검은 용과 틱틱대며 대화를 할 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들떴다.
검은 용은 그런 최한을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잠든 나쁜 놈의 체온을 확인하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동굴의 천장에서 보이는 깜깜하고 투박한 어둠과 달리 바깥에서 마주한 밤은 실로 다채롭고 아름다운 어둠이었다.
그 속에 반짝이는 빛들을 보며 검은 용은 눈을 감았다.
잠들지 않았다.
그저 이 시간을 만끽할 뿐.
그러나 이는 잠깐이었다. 검은 용은 눈을 다시 뜨며 최한에게 경고했다.
“숨어서 듣지 마라.”
최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못 데려간다.”
검은 용과 최한. 두 존재는 서로를 탐색하며 나쁘지 않은 밤을 보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이런 곳이……!”
최한은 드물게 감정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 감정은 경악이었다.
아침에 눈을 뜬 자칭 타칭 나쁜 놈은 선두에 최한을, 후미에 검은 용을 세우더니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어둠의 숲 북쪽이었고 웬 지하로 통하는 동굴을 하나 찾아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동굴을 빠져나오자 최한은 놀라운 광경을 마주했다.
“…세상에…….”
거대한 공동. 그 안은 통로와 달리 밝았다.
가장 먼저 대리석으로 지은 거대한 5층짜리 대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그 저택은 꼭 상상으로만 그려보던 서양식 왕궁을 떠올리게 했다.
더불어 나무는 없지만 정원처럼 꾸며진 대리석 조각상, 평평하고 고른 바닥, 자그마한 분수대까지.
이곳은 꼭 동화 속 같았다.
검은 용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케일은 흡족한 얼굴로 이를 지켜보다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다만 조금 이상했다.
‘고대의 힘 목소리가 안 들리네?’
원래라면 어두운 통로를 지날 때부터 무서운 짱돌의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아주 조용했다.
이 장소가 있는 걸로 보아 무서운 짱돌과 그것이 숨겨진 짱돌 저택 자체는 구현된 것 같은데.
‘환상 시험이라 그런가?’
케일은 별다른 생각 없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공동 한쪽에 세워진 동대륙과의 통로를 막은 돌기둥을 힐끗 보았지만 일단 먼저 중요한 것부터 둘에게 알려주기 위해 서둘렀다.
대저택의 3층.
그는 힘껏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쿵.
“자, 돈이다.”
최한은 순간 눈이 부셨다.
온갖 장신구와 보석들이 번쩍이고 있었다.
반짝이 아니다. 번쩍이다. 저 수준이면.
“자, 용.”
검은 용이 케일을 쳐다보았다.
“이건 보석이라는 건데. 이걸 돈이라는 것과 바꿀 수 있지. 돈은 대부분의 것들을 살 수 있는 수단이야. 참고로 돈으로 못 사는 것도 많아. 못 사는 것 중에 중요한 것도 많고. 그건 살다 보면 하나씩 깨달을 거다.”
“…이 돈이란 게 중요한가?”
“음. 편하게 살려면 꽤 중요하지?”
케일은 다시 걸음을 옮겨 다른 방으로 향했다.
용은 묘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왜냐면 검은 용은 산을 무너뜨리기 전 베니온 스텐이 머무는 별장도 뒤집어엎었다. 그때 마법사들이 온갖 힘을 다 쏟아내며 지키려던 것이 있길래 통째로 들고 날랐다.
꽤 단단한 통을 부수니 눈앞의 것처럼 반짝이는 것들이고 꽤 이뻐 보여 일단 챙겨두었다. 검은 용은 케일에게 무던하게 물었다.
“저거 나 주나?”
“그래. 너네들이 나눠가져. 필요할 테니까.”
야무지게 자신의 것을 챙기는 라온을 케일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넋을 놓고 있는 최한보다 확실히 라온이 야무졌다.
물론 라온은 자신도 꽤 많은 보석을 아공간에 숨겨두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나쁜 놈아, 내 건 내가 고를 거다! 같이 봐야 한다!”
“알았어. 가르쳐주지.”
케일은 피식 웃으며 대충 답하고는 다른 방의 문을 열어 제꼈다.
끼이익, 쿵.
“여기는 무기고. 이것도 팔아도 되고 써도 된다.”
“허.”
최한이 기가 찬 얼굴로 케일을 쳐다봤다.
끼이익. 쿵.
“아, 여기에 이건 화폐다. 금화 은화인데 옛날식이라 지금은 쓰이지 않아. 하지만 꽤 쓸모가 많지. 이것도 보석과 비슷하거든.”
“…….”
최한은 아무런 말 없이 케일의 뒤를 따랐다.
끼이익, 쿵!
“여기는 각종 기록지인데, 글을 가르쳐줄 테니 한번 읽어봐. 오랜 역사와 보물이 묻힌 곳,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거다.”
모두 짱돌이 먼저 떠나간 동료들의 물건을 모아둔 것이었다.
최한은 말없이 지켜보다가 검은 용을 힐끗 쳐다보았다. 용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쁜 놈이 보여준 것들을 눈에 담았다.
케일은 그런 둘을 보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널따란 연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들이라면 너희 둘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다.”
그는 연무장에서 시선을 돌리며 환상 속 두 존재를 응시했다.
라온과 최한.
어찌 보면 동료들 중 가장 많이 여러 사건을 함께 겪은 존재들이었다. 아마 온, 홍도 비슷하게 많을 것이고.
케일은 꽤 진심을 담아, 무심하게 전했다.
“쉬엄쉬엄 살아. 빡빡하게 살지 말고.”
환상 속일지라도.
그것이 케일의 속내였다.
그렇기에 그는 두 존재에게 가르쳐줄 작정이었다.
“여튼 나만 따라와.”
검은 용이 물었다.
“어딜 가나?”
케일은 알게 모르게 초롱초롱한 둘의 눈빛을 받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세상.”
그날, 헤니투스 영지에 엄청한 대부호가 등장했다.
“하하하하!”
그리고 케일은 제일 신나버리고야 말았다.
#
케일이 어둠의 숲 풀밭에서 드러누운 채 꿀잠을 잔 다음 날.
딸랑.
헤니투스 영지에서 고급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던 디자이너 겸 사장은 잠시 멈칫했다.
웬 심술궂은 졸부같이 생겼지만 옷차림새가 너덜너덜한 사람이 의상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마찬가지로 너덜너덜하지만 생김새가 참으로 잘생긴, 소년과 청년 사이의 사람도 함께였다.
“어서 오세요!”
의상실 주인은 대번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그러다 흠칫했다.
‘…붉어?’
졸부같이 생긴 놈의 옷자락에 붉은 무언가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검붉었다.
의상실 주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런 색을 내는 것은 피인데.’
그것도 갓 묻은 피여야 가능한 색깔이었다.
참고로 지난밤 어둠의 숲에서 괴물들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늘 아침 그 현장을 지나다가 묻은 피였다.
주인은 힐끗 졸부같이 생긴 놈을 쳐다봤다.
딱 봐도 어디 뒷골목에서 두목 할 놈 같이 생겼다. 조금 어벙하게 생긴 면도 있지만.
‘눈빛이 장난 아니다.’
눈빛이 번뜩이는 것이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피!’
그리고 뒤따라 들어오는 소년은 낡은 검집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검집에는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겹겹이 쌓인 핏자국이 희미하게 존재했다.
한때, 용병으로 일하다가 의상에 뜻이 생겨 헤니투스 영지에 정착한 그는 헤니투스 영지에 뒷골목 세력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촉이 왔다.
‘…예사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그의 앞에 웬 주머니가 나타났다.
촤르륵. 졸부의 손에 벌어진 주머니 안은 금빛으로 눈이 부셨다.
금화다.
“…네?”
그는 저도 모르게 졸부같이 생긴 귀인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예사 사람이 아니다.
…이 인간들은… 황금, 아니, 복덩이일지도 모른다……!
“옷 좀 사려는데.”
졸부같이 생긴 이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의상실 안을 둘러보았다.
“한 수십 벌?”
사장은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이 검사님 입을 거로. 아. 그리고 저도 몇 벌 주세요.”
사장은 귀인에게 온 마음을 담아 답했다.
“원하시는 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수하겠습니다!”
용병 때의 짬밥이 저도 모르게 나오는 의상실 주인이었다.
그는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졸부같이 생긴 귀인이 앉을 자리와 각종 다과와 음료를 내왔다. 그리고 귀인의 턱짓에 소년과 청년 사이의 검사에게 다가갔다.
“그럼 치수 좀 재겠습니다.”
“네? 아.”
검사는 조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네.”
가까이 보니 아주 순하게 생겼다.
의상실 주인은 보면 볼수록 복이 넘치게 생긴 귀인과 순한 검사에게 알 수 없는 호감이 치밀어올랐다.
“사장님 말씀대로 해.”
“…그래.”
검사, 최한은 제집처럼 소파에 앉아서 과자를 오독오독 먹는 케일을 힐끗 보다가 주인을 따라 움직였다.
최한에게 정신이 팔린 주인은 보지 못했지만, 케일 옆 과자가 허공에 떴다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오독오독.
-맛있다.
케일은 라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과자가 담긴 그릇을 라온이 앉은 소파에 올려두었다.
“자, 팔을 벌리시면 됩니다!”
의상실 주인은 활기차게 말했다.
그 시각, 헤니투스 최대이자 최고 보석점과 헤니투스 지부 플린 상단은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진 이들 때문에 아침부터 난리였다.
먼저 보석점. 수도를 중심으로 로운 왕국 전역에 퍼져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보석점이었다.
“점장님, 수도에 연락할까요?”
“그래, 연락해! 이, 이 정도의 보석은…! 이 영롱한 빛과 크기! 게다가 지금 시대의 기술로 세공한 보석이 아냐! 이, 이건 우리가 소화할 수 없어! 수도로 가서 경매에 올리든가 해야 돼!”
“네! 그런데, 플린 상단에서도 연락이 오는데요?”
“그렇겠지! 갑자기 우리 가게 이름으로 거금을 줘버렸으니까! 그, 그분 이름은 기억하지?”
“아, 네!”
점장이 이 정도로 흥분하는 것을 처음 본 직원은 덩달아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서류를 살폈다.
점장의 코멘트가 그 밑에 있었다.
직원은 저도 모르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점장님, 아까 그 검사가 보석 주인이었어요?”
“그래.”
“저는 그 좀, 사납게 생긴 분이 주인인 줄 알았는데. 검사님은 호위 기사고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냐 아냐. 집사래. 어릴 적부터 친구 사이이기는 했지만.”
“아, 그래서 서로 대화를 편하게 했군요. 그럼 저는 수도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직원이 나가고 점장은 홀로 남아 보석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헤니투스 가문 핏줄인가? 거기서 몰래 돈을 유통하려고 하나? 그럴 가문이 아닌데? …하지만 그렇지 않고선 저런 부자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오지?”
“아냐… 보석 주인이라는 검사 생김새가 헤니투스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어. 하긴 그 집안은 생김새가 다들 각각이기는 한데.”
“그래도 꼭, 돈 쓰는 모양새가 헤니투스 가문 사람 같던데.”
“…돈보다 무서운 인간들.”
헤니투스같이 돈 쓰고 일 저지르는 이들이 새로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점장은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 시각, 플린 상단 헤니투스 지부.
“이거 빌로스 님께 연락해야겠죠?”
“찻집에 출근하셨나?”
“하셨을 겁니다.”
“그럼 당장 연락해!”
직원은 부하 직원이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모습에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연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머릿속을 정리하기 바빴다.
“…엄청난 부호가 헤니투스 영지에 터를 잡으려고 한다… 이 말이지? 그것도 모든 것을 하나하나 헤니투스 영지에서 준비하고 구하고?”
그는 어쨌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거, 헤니투스 시장에 큰 바람이 불겠어.”
그의 말대로 바람이 불긴 불었다.
거침없이,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은 바람이.
케일은 최한과 투명화한 라온을 이끌고서 여러 곳을 들렀다.
1년 전이지만 헤니투스 영지 바닥은 어느 정도 뭐가 어디 있는지 잘 아는 케일이었다.
“땅 좀 구하려고 합니다만.”
“땅이요?”
케일이 하는 바를 지켜보던 최한의 동공이 흔들렸다.
땅?
그는 손에 들린 짐들과 케일을 번갈아 보았다.
최한 뒤에는 새로 산 고급 마차도 있었다.
“네. 해리스 마을 쪽 땅. 별장을 좀 지을까 합니다.”
“손님이 지내실 땅입니까?”
“아뇨.”
투명화한 라온과 최한이 멈칫했지만, 케일은 이를 모른 채 최한을 가리켰다.
“여기 검사님. 그리고 아이 한 명. 둘이지만 인원은 더 늘 수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촤르륵.
테이블 위에 올려진 금화가 주머니 밖으로 흘러나왔다.
“빠르게 가능합니까?”
“최, 최대한 빠르게! 영주성이고 뭐고 간에 바로 해결하겠습니다!”
그다음.
“별장 건축이요?”
“네.”
촤르륵.
금화가 주머니 밖으로 다시 한번 넘쳐 나왔다.
“무조건! 최고의! 튼튼한! 저택을 짓겠습니다!”
“믿고 맡기죠.”
그리고 다음.
“식료품 배달 경력만 30년입니다! 사막이든 호수든 어디든 가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럼 걱정 안 하겠습니다.”
또.
“이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기억하기 쉽죠?”
“네, 네! 포, 포장해서-”
“배달.”
“네! 배달하겠습니다!”
케일이 일으킨 바람에 최한도 휩쓸려 멍하니 그 뒤를 따랐다.
-야, 검사. 저, 저 나쁜 놈 조, 조금 이상하다!
묵묵히 따르던 용마저 혼란을 최한에게 표했다.
하지만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 밖으로 나오더니 상쾌한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배고프다.”
매우 배불러 보이는 표정으로.
“밥 먹자.”
수십여 년, 어쩌면 그 이상의 세월 만에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나온 검사와 동굴에서만 지냈던 투명화한 검은 용은 터덜터덜 케일 뒤를 따랐다.
그리고 식당 별실에 마련된 화려한 식탁을 마주했다.
“헤니투스에서 여기가 스테이크가 제일 맛있지. 먹어.”
투명화를 푼 검은 용은 이미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케일은 흐뭇하게 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글자 알려줄게. 전반적인 사회 체계도. 둘 다 배워.”
최한과 라온은 케일 몰래 시선이 부딪쳤다. 최한은 제 시선을 피하는 검은 용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더불어 태연하기만 한 케일을 묘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 * *
케일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조용하면서도 활기찬 해리스 마을.
그곳이 지금 공사 소리로 조금 소란스러웠다.
멋들어진 별장이 마을 외곽에 지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케일이 의뢰한 것으로 최한과 라온이 지낼 별장이었다.
본래 집은 어둠의 숲에 자리한 짱돌 저택이었고.
‘짱돌도 없었지.’
짱돌 저택 5층에는 고대의 힘 무서운 짱돌이 없었다. 환상이어서 그러리라.
케일은 찝찝함을 털어내고, 그가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작은 시골 마을이라, 잠시 마을 밖으로 떠난 이의 집을 촌장을 통해 빌렸다.
그곳에 현재 최한과 케일이 산다고 알려졌지만, 당연히 라온도 사는 중이었다.
톡. 톡. 톡.
케일의 검지가 책상을 두드렸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라온에게로 향했다.
“모르겠다고……?”
“그렇다. 어렵다.”
3살 검은 용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은 다시 한번 물었다.
“글자를 아직 모르겠다고?”
“그렇다. 최소한 1년은 배워야 글자를 알 것 같다.”
짧은 앞발이 스윽 눈앞에 놓인 책을 케일 쪽으로 밀었다.
“나 글자 배우기 어렵다!”
거짓말.
“그리고 숫자 세기도 어렵다! 돈 계산 모른다!”
거짓말.
“나는 세지만 똑똑하지 않다! 많이 배워야 한다!”
거짓말.
케일은 물끄러미 라온을 응시했다.
“용은 위대한데?”
“위대하지 않다. 나쁜 놈아, 나한테 자꾸 뭐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나는 노는 게 좋다.”
이건 인정.
어릴 때는 놀아야지. 올바르게 노는 것도 경험이고 공부다.
“야, 검사! 너는 글자 알겠나?”
“으음.”
최한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케일을 힐끗 쳐다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글자가 어렵군. 아무래도 배우려면 오래 걸리겠어.”
케일은 눈을 감았다.
‘이것들이-’
3일째다.
케일이 베니온 따까리 몸으로 밤낮을 온전히 보낸 게.
이때쯤 되자 케일은 다른 동료들이 먼저 시험을 치르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과 걱정이 들어 조금 더 빨리 이 시험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라온의 굴욕을 잊게 할 실마리의 단서로 ‘칭찬’이 나타난 후 무엇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의식주. 모두 채워줬음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네.’
이미 라온의 상황은 동굴에 감금되었을 때와는 멀어진 상태다.
그런데 왜, 아직 그대로지?
케일은 의문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때. 작은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똑똑똑.
“거기, 있는가?”
낯익은 목소리였다.
아마 마을 자경단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나갈 테니까, 글자 연습해.”
케일은 최한과 라온의 불퉁한 얼굴을 무시한 채, 문을 열었다.
덜컥. 문이 스스럼없이 활짝 열렸고.
쾅!
도로 닫았다.
“와, 씨!”
케일은 저도 모르게 비속어를 흘리며 문고리를 꽉 잡았다.
“놀래라!”
“무슨 일이지?”
최한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가왔다. 하지만 케일의 눈동자는 라온에게로 향했다.
열린 문밖 광경.
“웬 사람들이야? 기사 같던데?”
케일은 화려한 마차 문양을 본 순간, 문을 바로 닫았다.
그의 눈동자가 라온에게 닿았고, 라온은 케일 쪽을, 문을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돌산을 감싼 붉은 뱀.
스텐 후작가의 상징을 건 마차.
그리고 문 앞에 덜덜 떠는 마을 사람과 함께 선 기사는 베니온 스텐의 수족이었다. 왼팔 격으로, 스텐 후작가보다 베니온 스텐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 자였다.
저자가 어떻게 나를 찾아왔을까?
케일은 이내 답을 알았다.
“나댔군.”
헤니투스 영지에서 너무 기분을 냈다.
환상에서 돈지랄 좀 해보자 싶었던 게 실수였다.
케일은 펜을 쥔 라온의 앞발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스텐 후작가의 문양. 라온은 저것을 분명 보았다.
아마 홀로 별장을 뒤엎으러 갔을 때, 저 문양을 보았을 것이다.
“아.”
그는 그제야 한 가지를 깨달았다.
불안했구나.
아직 무서웠구나.
3살의 라온과 4살의 라온은 달랐으며. 케일 헤니투스와 베니온 따까리는 달랐다.
케일은 4살의 라온을 최한, 온, 홍과 함께 구출했다.
바깥세상까지 인도해주었다.
하지만 베니온 따까리는 라온의 몸을 구속한 족쇄들까지는 풀어주었지만, 나머지는 라온이 홀로 해야 했다.
라온이 베니온 따까리를 기절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하등 도움이 안 되었으니까. 약하니까. 안 그래도 케일 본인도 라온에게 자신도 뒤집어 엎어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라온은 산을 무너뜨렸지만, 결국엔 기절한 베니온 따까리를 데리고서 홀로 어둠의 숲까지, 생전 처음 바깥을 이동해야 했다.
4살의 라온이 케일을 따라다니며, 강한 일행들 곁을 맴돌며 세상을 구경한 것과 그 시작이 달랐다.
“내 실수군.”
케일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고, 무엇이 라온에게 불안감을 주었는지 깨달았다.
그러면 답은 간단했다.
벌컥.
케일은 문을 열었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 나 알지?”
기사가 압박하려는 듯 사납게 건넨 말에 케일은 웃으며 말했다.
“비켜.”
“뭐?”
“비키라고.”
3살.
어리다.
그래, 아주 어리지.
케일은 이 사실을 인지했지만 깨닫지는 못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4살 때의 라온도 모르는 것투성이였지만 점차 배우지 않았나. 똑똑하지만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잘할 필요가 없는 일도 있었다.
‘가령, 쓰레기를 확실히 처리하는 법 같은 건.’
라온이 산을 무너뜨려도, 별장을 뒤집어엎어도. 사람이 안 죽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뒤집어엎으라고 했던 케일 말대로 뒤집어엎기만 했을 수도 있었다.
‘내가 헤니투스 영지에서 너무 설치고 다녔어.’
내 잘못이다.
스텐 후작가나 톨스 자작가와 헤니투스 백작가는 사이가 좋지 못해, 케일에 대한 이야기가 거기까지 닿으리라 생각지 못했다.
그는 스텐 가문의 집요함을 놓쳤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는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으니까.’
베니온 스텐 따위는.
다만 그동안 라온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속을 쓰리게 할 뿐이었다.
케일은 분노하지만 차마 공격을 하지 못하는 기사를 지나쳐 마차로 향했다.
막아서려던 이들이 흠칫하며 움직임을 멈췄을 때, 마을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저 멀리서 구경할 때.
끼익. 케일은 마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네놈.”
베니온 스텐. 팔다리에 붕대를 칭칭 싸맨 놈이 케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케일은 그 시선에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살아있었네?”
그리고 덧붙였다.
“아쉽네. 죽은 줄 알았는데 말이야.”
웃는 입과 달리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베니온 스텐을 내려다보았다.
#
베니온 스텐은 그 차가운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며칠 전, 죽을 뻔했다. 살면서 그렇게 치욕스러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버러지라고 생각하는 것들에게 당했다.
눈앞의 놈을, 죽여버리고 싶다.
베니온의 입이 열렸다.
“아주 미쳤군.”
“이제 알았나?”
“…뭐?”
순간 베니온은 멈칫했다.
그의 앞에 서 있던 버러지는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그러고는 정말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흥미로운 얼굴로 베니온을 보며 물었다.
“너, 내가 정상으로 보여?”
씨익.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 베니온 스텐 이놈은 치욕스러울 것이다.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두려울 것이다.
왜냐고?
“용은 안 찾나?”
케일을 보자마자 용을 찾지 않았으니까.
분명 용이 케일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용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후작이 분명 용을 찾아오라고 했을 텐데? 후작은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잖아. 안 그래?”
자식들 간에 경쟁을 붙여 장남의 다리를 불구로 만드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후작은 나서지 않았다.
스텐 가문의 후계자 경쟁은 원래 그러하니까. 또한 본인도 그렇게 후작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우리가 소가주, 소가주 해주지만. 후작에게는 소가주라고 인정도 못 받은 처지에 그 귀한 용까지 놓쳤으니. 너 좀 간당간당하겠다?”
이때쯤부터 베니온은 명백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런 상황에 날 찾으러 다닐 시간이 있냐? 네 동생들이 네 자리를 노릴 텐데. 응?”
그가 기억하는 눈앞의 이 버러지는 멍청했다.
그저 하루 벌어먹고 즐기면서 살면 그만인 놈.
딱 그 수준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놈은 다르다.
베니온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분노를 담아 명령하던 스텐 후작. 그처럼 버러지가 그를 보고 있었다.
베니온은 천천히 입을 뗐다.
“…용은 어딨지?”
“몰라.”
챙!
그때, 마차 문 밖으로 검이 나타나며 케일을 향해 겨누었다.
조금 전 문을 두드렸던 베니온 스텐의 충직한 기사가 꺼내든 검이었다.
“어디서 이런 시건방진! 살고 싶다면 아는 것을 모두 말해라!”
그때였다.
“왜 그래야 하지?”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기사는 소리 없이 제 앞에 드리우는 검날을 볼 수 있었다.
기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언제 온 것인지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있었다.
“그만해.”
케일이 말하자, 최한은 기사를 겨누던 검을 내렸다. 베니온은 떨리는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용인가?”
“인간이야. 왜, 용일까 봐 무서워?”
“허튼소리 하지 마라.”
베니온은 나직이 말하면서도 그의 눈앞에 환영처럼 며칠 전의 장면이 떠올랐다.
동굴이 무너진다.
자신의 몸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사람들은 마치 전쟁통에 온 것 마냥 패닉에 빠졌다.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살아남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모든 것이 무너진 후였다.
용은,
진짜 용은 재앙 그 자체였다.
그 순간, 속삭임이 들려왔다.
“무서워?”
환영은 사라지고 버러지의 시퍼런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 안다는 듯, 담담한 눈동자였다. 차라리 조롱과 멸시가 담겼다면 나았을 것을.
“묻잖아. 대답해. 무섭지?”
악마의 속삭임처럼, 그 목소리는 편안했다.
“답하면 네가 원하는 답을 해줄게.”
베니온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일었다.
“무섭냐고? 용 따위! 무섭지 않아! 버러지인 것을!”
그러나 애석하게 베니온은 목소리의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
케일은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베니온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죽여버려.”
챙! 채앵!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최한의 표정도 굳어지며 검을 뽑아 들었고, 동시에 주변에 있던 베니온의 수하들이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사이로 나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네가 뒷골목에서 한 짓들. 동생들에게 보낼까?”
베니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죽으면 그 문서들이 동생들에게 갈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베니온은 목소리를 높였다.
“너 같은 버러지가 무얼 안다고 그딴 망언을 입에 놀리는 것이냐!”
피식.
케일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쪽 지구, 열한 번째 골목 2번 주점 지하 1층 비밀 문 너머 공간.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아냐고?”
베니온 스텐과 관련된 증거들은, 약점들은 케일의 머릿속에, 기억 속에 사진처럼 선명히 남아있었다. 베니온 스텐을 처리할 당시 그 정도 확인도 안 할 리는 없지 않은가?
“글쎄.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까. 네 약점을 다 알걸?”
베니온은 혼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케일의 말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케일은 그 눈동자 안에 담긴 혼돈과 멸시,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날 죽여 봐. 한번. 동생들이 네 약점이 든 문서를 들고 널 반겨줄 테니까.”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최한은 얼마 전 헤니투스 영지에 갔던 때를 떠올려보았다.
보석상, 의상실, 상단 지부 등등 여러 곳을 다녔고, 그중 한 곳에서 저 특이한 남자가 하는 행동을 보았다.
‘물건 보관요? 음, 보안 등급에 따라 돈이 다른데-’
‘이 정도면 됩니까?’
이 남자는 상단 지부에서 연계해준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우편 혹은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로, 수임료가 상당히 비싸 긴급 연락 혹은 귀중품만을 맡는다고 하였다.
남자는 그 상대에게 양피지를 세 묶음 건넸다.
‘헉! 됩니다! 보관 방식은 어떤 쪽으로 원하시는지?’
‘간단합니다.’
최한은 그 양피지 묶음이 무엇인지 지금 깨달을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귀족 남자의 약점이 적힌 문서구나.
그냥 정신없이 돈을 펑펑 쓰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저 특이한 남자는 비범하고 철저한 면이 있었다.
방심을 할 수가 없는 상대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모르는군.’
이름을 물었지만 대답을 은근슬쩍 피했다.
알 필요 없는 이름이라며, 그냥 나쁜 놈이라고 부르거나 집사라고 부르라 했다.
생각에 잠겨있던 최한은 베니온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 정보들을 녀석들에게 넘기지 않을 건가?”
“잘 생각해봐.”
케일은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말했다.
“내가 그 문서를 네 동생들에게 보내고 나면, 내 쓰임은 다하겠지. 그러면 너도 날 죽이려 들 테고 네 동생들도 날 죽이려 들겠지.”
베니온은 조금 차분해진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쓰임은 다하겠지.’
이건 정확한 표현이었다.
아무리 이 눈앞의 버러지 뒤에 용이 자리해있다고 해도, 결국 이 버러지는 죽을 것이다. 스텐 후작가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그 문서들은 내가 살아있으면서 그저 보관하고 있을 때. 그때야 비로소 나에게 의미가 있는 거 아니겠어?”
베니온은 감정들을 거둔 눈빛으로 케일을 바라보았다.
“주제 파악을 꽤 잘하는군.”
“그렇지. 내가 그런 거 하나는 참 잘하지.”
베니온은 마차 밖 기사에게 눈짓했다.
“치워.”
스릉.
기사는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고, 케일을 향해 달려들던 이들도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베니온은 케일을 향해 턱짓했다.
“내려라.”
케일은 별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밖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로 베니온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은 어디 있는지 정말 모르나?”
“어. 몰라.”
막힘없는 대답에 베니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서 내린 케일을 잠시 동안 지켜보다가 이내 기사에게 명했다.
“돌아간다.”
케일은 닫히는 마차 문을 보며 베니온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탁.
마차 문은 닫혔고, 기사가 한번 케일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가 이내 그들은 해리스 마을을 빠져나갔다.
케일은 그 광경을 가만히 응시했고, 지켜보던 해리스 마을 사람들도 서서히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다만 마을 입구 경비를 보는 자경대원이 케일을 보며 주춤주춤 다가오려 했다.
“나중에 촌장님께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케일은 그 사람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고, 그제야 자경 대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색하게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러면서도 귀족 마차를 불러들인 외지인에 대한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음. 저건 좀 아쉽게 되었군.’
최한이라면 충분히 마을 사람들의 저 경계를 없애버릴 성정을 지녔지만. 케일은 첫 이미지를 좋게 만들지 못한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봤나?”
그때, 최한이 케일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뭘?”
케일이 무심하게 최한을 쳐다봤고, 최한은 마차가 사라진 쪽을 응시한 채 툭 내뱉었다.
“문 닫힐 때.”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귀족 놈 손이 떨리고 있던데.”
베니온은 동생들에게 후계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차분함을 잘 연기해냈지만, 그 두려움을 감추지는 못했다.
케일의 미소를 보던 최한이 나직이 물었다.
“괜찮나?”
“뭐가?”
“분명 저자는 약점들을 모두 지우고 다시 너를 노리러 올 텐데.”
케일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야. 알면서 그래. 너 들었잖아. 내가 헤니투스 영지에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최한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케일은 양피지 세 묶음을 건네며 보관 방법을 묻는 자에게 답했다.
‘2일 정도 보관하고 계시다가 여기 이 세 곳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으음. 그러면 돈이 더 들 텐데, 오오! 충분합니다, 제가 아주 안전하게 전달하지요! 으음. 그런데 이곳은 저도 보내기 힘들 것 같은데. 일단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 이름으로 하면 되죠?’
‘네. 그러면 됩니다.’
케일은 집으로 향하며 말을 이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양피지들은 제 주인을 찾아갈 거다.”
케일은 총 3곳에 보냈다.
“어딘지 물어도 되나?”
“하나는 현재 베니온 스텐의 그나마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동생에게 갈 거다. 그녀라면 그 정보를 쥐고 제대로 사용할 줄 알 거야. 다른 하나는 그의 형에게 보냈다.”
“…형이 있었나?”
“그럼. 쟤 때문에 다리를 다친 형인데, 그 덕에 후계자 자리에서도 멀어졌지.”
테일러 스텐.
그에게도 케일은 양피지를 보냈다.
최한은 무덤덤하게 물었다.
“양피지 세 묶음은 두께가 달랐다. 하나는 얇고 나머지 두 개는 두껍더군.”
“맞아. 동생에게는 얇은 거, 나머지 두 명에게는 더 상세하고 치명적인 정보들로 보냈지.”
“…두 곳은 들었고. 나머지 한 곳은 어디지?”
“알베르 크로스만. 로운 왕국의 왕세자에게 보냈다.”
사실은 왕세자가 아닌, 다크엘프 타샤에게 보냈다. 그녀가 로운 왕국에서 지낼 때 마법으로 모습을 바꿔 사용하는 위조된 신분쯤이야 이미 알고 있는 케일이었다.
최한은 걸음을 멈춘 채 케일을 가만히 응시했다.
케일은 그 시선에 어깨를 으쓱이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최한은 한참 뒤에 그 뒤를 따랐다.
“네가 위험해지지 않나?”
“딱히? 베니온 스텐은 나를 찾아올 겨를이 없을걸?”
왕세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인간이니까.
“그리고 내 이름으로 보내지도 않았어. 익명의 제보자라고 했을 뿐.”
“넌… 이해할 수 없어.”
“내가 좀 그렇지.”
케일은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아. 그리고 베니온 스텐의 형이 찾아오면 말이야. 이 종이를 전해줘.”
케일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최한에게 건넸다. 그를 낫게 할 고대의 힘에 관한 정보이자 테일러와 알베르를 연결시켜줄 고리에 대한 것이 적혀 있었다.
최한이 종이를 받아드는 것을 본 케일은 허공을 향해 말했다.
“다 봤지?”
투명화한 라온은 아까부터 보이지 않고 있었다.
베니온이 떠난 후에도 보이지 않았다.
“걔는 널 두려워해.”
하지만 케일은 라온이 분명 마차 안까지 따라왔으리라 확신했다.
라온은, 이 어린 검은 용은 케일을 분명 걱정했을 테니까.
“너는 이미 그 녀석을 이겼고, 이겨내었고, 압도했어.”
달칵.
최한이 문을 닫았다.
검은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온은 케일을 응시했다.
“그러니 더 걱정하지도 불안해하지도 마.”
검은 용은 눈앞의 인간이 이상했다.
분명 약한데, 그리고 못된 놈인데.
어찌 저렇게 당당하게 웃을 수가 있단 말인가.
“곧 그 녀석은 망할 테니까. 내가 그리 만들었거든.”
그리고 나는 왜 저 웃음에 안도한단 말인가.
라온은 저도 모르게 두 앞발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 순간, 케일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이제 너에게 무서울 것도 없고. 떠나도 돌아올 곳이 생겼고, 글도 가르쳐주고, 여러 가지를 알려주고, 아는 사람도 만들어줬고.”
검은 용은 앞발을 천천히 내려 케일을 바라봤다. 케일은 어느새 미소를 지운 채 담담하게 물었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어?”
검은 용은 한참 동안 대답 없이 케일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인간, 넌 누구냐?”
“음.”
케일은 최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닫힌 문 앞에 기대선 채로 최한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시 라온에게로 시선을 움직이니, 검푸른 눈동자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케일은 그 안에 든 열망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케일.”
깜박. 라온의 동글동글한 눈이 깜박였다.
‘역시 그 이름이 아냐.’
베니온의 나쁜 수하 놈의 이름이 아냐.
검은 용은 스스로가 직감적으로 느꼈던 대로, 눈앞의 인간은 그 나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는 거냐?”
검은 용이 물었고, 눈앞의 인간은 답했다.
“그렇지.”
“있으면 안 되나?”
“그건 조금 힘들겠다.”
“그럼 나를 왜 구해줬나?”
막힘없이 주고받던 대화가 잠시 멈췄다.
검은 용은 답이 없는 인간을 향해 이어 말했다.
“내가 불쌍해서? 심심해서?”
그리고 인간은 답했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어린 용의 몸을 타고 흐르던 긴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케일은 손을 뻗어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겠지만, 너는 위대한 용이니까. 강하고 쎈 용이니까. 충분히 잘 해낼 거다. 저 녀석도 있고.”
어린 용은 두 앞발로 제 얼굴을 다시 가렸다.
“너는… 너는, 나쁜 인간이다.”
푸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용은 앞발을 내렸고 저를 보며 부드럽게 웃는 나쁜 놈을, 아니, 케일을 볼 수 있었다.
“말했잖아. 애초에 나쁜 놈이라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검은 용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잘 가라.”
그리고 저도 모르게 용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냥. 스스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며, 그냥 웃음이 나왔다.
“그래. 잘 있어라.”
“잘 가.”
케일은 최한이 건네는 인사에 씨익 웃어 보였다.
“너도 잘 있어라. 그리고 재미나게 살아. 편하게.”
그때 불쑥 최한과 케일 사이로 검은 용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면 이제 나쁜 인간아, 너 가면 원래 나쁜 놈이 깨어나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환상이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뒷말을 삼키는 케일이었다.
그때였다.
-대상자 라온 미르의 굴욕을 잊게 만들 실마리의 단서 ‘적 제거’ 발견.
-대상자 라온 미르의 굴욕을 잊게 만들 실마리의 단서 ‘위로’ 발견.
-대상자 라온 미르의 굴욕을 잊게 만들 실마리의 단서 ‘애정’ 발견.
-대상자 라온 미르의 굴욕을 잊게 만들…….
시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 끝에.
-대상자 라온 미르의 굴욕을 잊게 할 ‘따뜻한 마음’을 제공하였습니다.
케일은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별이네.”
“…벌써?”
최한이 그리 말한 순간, 케일은 조금은 찡한 마음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동시에 시험 목소리가 말했다.
-굴욕 시험 2/2 완료.
케일의 시야 구석에 조금씩 보랏빛과 검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시험이 곧 완전히 끝난다는 소리였다.
“그래, 가야- 커억!”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가기 전에 정해 달라!”
“커억, 어, 억?”
케일은 제 멱살을 휘잡은 검은 용의 두 앞발과 맹렬한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어린 용은 외쳤다.
“이름! 내 이름, 네가 정해 달라!”
용의 눈동자는 절박했다.
#
그 순간 케일은 딜레마가 찾아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이 녀석은 환상이지만, 라온 미르라고 해도 될까?’
케일이 겪은 3살 용과 4살 용은 비슷하지만 달랐다. 1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뿐만 아니라 구해지는 과정이나 현재 놓인 환경 차이로 두 용 사이에는 다른 점들이 꽤 있었다.
3살 용과 라온 미르는 분명 같은 아이지만.
닮았지만.
그럼에도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도 3살 용은 케일이 앞으로 볼 리 없는 환상이었다.
그래서일까.
“…도담.”
그도 모르게 튀어 나간 단어였다.
도담도담.
아이가 별 탈 없이 잘 놀며 자라는 모습을 가리키는 순우리말.
“도담?”
케일의 멱살을 쥔 라온이 그 힘을 조금 풀고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비로소 케일은 인정했다.
환상으로 만난, 현실에서는 마주하지 못한 라온의 이때.
비록 그는 떠나가면 사라질 환상이라도 케일은 3살의 어린 검은 용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도담 미르. 그걸로 하자.”
너는 앞으로 잘 자랄 거야.
“미르는 용.”
케일의 발끝에서부터 보랏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라온도 최한도, 케일도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케일은 멱살을 쥔 두 앞발을 손으로 감싸며 무심하게 말했다.
“도담은 안 아프고 잘 놀고 무사히 자라라는 뜻이야.”
어린 용의 검푸른 눈동자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흔들림은 사라지고 올곧은 눈동자가 케일을 바라보았다.
“네가 어른이 되면 도담이라는 이름은 바꿔도 돼.”
무사히 자라 어른이 되면, 스스로의 길을 스스로의 이름으로 정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케일은 환상일지라도 3살 용에게 미래를 알려주고 싶었다.
나쁘지 않은 이별을 위해.
검은 용은 케일의 멱살을 잡고 있던 앞발에 힘을 풀고는 멍하니 읊조렸다.
“…도담 미르.”
케일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3살 용이 환하게 웃는 것을 보았다.
“마음에 든다.”
담백한 답에 케일도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이름이네.”
최한의 말에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떠올린 것치고는 괜찮았다.
어느새 케일은 허리까지 보랏빛으로 뒤덮였다.
‘이번엔 반대군.’
그전까지는 케일이 보던 세상이 파란빛, 노란빛으로 물들며 사라져갔건만 이번에는 케일이 빛깔로 뒤덮여갔다.
“잘 가라.”
검은 용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발을 흔들었다. 최한이 피식 웃더니 용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케일에게 다른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정말로 나쁘지 않은 이별이라고. 케일은 그리 생각하였고 어느새 얼굴까지 뒤덮어오는 보랏빛 가루 속에서 시야가 점점 어둡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안녕.”
그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어둠에 조금씩 몸을 맡겼다.
이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줄어드는 시야 사이로 흐릿한 광경만 보일 뿐.
툭.
“읏차.”
쓰러지는 몸을 최한이 얼른 받아들었다. 보랏빛으로 완전히 뒤덮인 몸에서 암갈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갔다.
케일이라는 녀석이 떠나가고 있었다.
최한은 고개를 돌렸다.
“…케일.”
검은 용, 도담 미르의 눈동자가 깜박이며 떠나가는 이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용은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언가 결심을 한 것 같았지만, 케일은 이를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용이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구나를 깨달으며.
‘끝이군.’
완전히 어둠에 몸이 잠겼을 뿐.
* * *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보랏빛으로 가득한 공간에 서 있었다.
“굴욕은 이제 끝이고. 남은 건 분노인가?”
케일은 시야 저 멀리에서부터 공간이 점점 어둡게 변해가는 것을 확인했다.
봉인된 신. 절망 신의 신전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시험은 검은색 ‘분노’였다.
‘이번엔 무엇일까?’
케일이 그 생각을 한 그 순간.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더 갈수록 목소리에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군.’
‘굴욕’ 시험에 들어서기 전후로 시험을 안내하는 듯한 이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한 어조였지만 알게 모르게 그 안에 따뜻함이 담겨갔다.
더불어 안내하는 내용들도 그간의 시험에 비하면 친절한 편이었다.
-이제 마지막 분노만을 앞두고 있군요.
어찌 보면 이 여러 단계의 환상 시험에서 유일하게 시험자와 함께 이것이 환상임을 알고 있는 존재였다.
그 순간이었다.
지지직- 지지직-
“음?”
기이한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케일은 공간의 뒤틀림을 볼 수 있었다.
검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이며 알 수 없는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 사이로 하얀빛이 잠시 깜박이다 사라졌다.
-사실.
하얀빛이 다시 깜박이며 나타났다.
지지직. 지지직.
라디오에서 잘못 잡은 주파수로 인해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귓가를 어지럽히는 소리 사이로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험의 목소리였다.
-사실 저는 오랜 기간 이 시험을 치러오며 이 시험이라는 것이 참으로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
-저는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 신께서 만든 존재였으나, 수많은 이들의 시험 과정을 보며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케일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자아가 있나?”
지지직. 지지직.
귓가를 뒤덮는 난잡한 소리 사이로 단단한 목소리는 힘 있게 답했다.
-어느 순간 자아가 생기더군요. 아마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생명체의 수많은 삶을 보았기 때문이겠죠.
나름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저는 이 잔인한 시험을 끝낼 힘은 없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시험자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지만, 참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도달하실 것 같은 분들부터 조금이라도 돕고자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케일은 묘한 표정으로 일렁이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보라색과 검은색이 뒤섞였고, 어느새 하얀빛은 사라졌다. 점점 더 많은 검은색으로 주변이 뒤덮이며 조금씩 시험은 마지막 단계 ‘분노’를 향해 나아갔다.
시험 목소리는 차분하게 말했다.
-굴욕 시험. 그때부터 조금씩 제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케일은 한 걸음 내디뎠다.
그가 향할 방향은 검은빛. 분노였다.
-마지막까지 부디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딱딱하지만 따뜻함이 머금어져 있는 목소리.
케일은 이 어두운 공간에서 유일하게 그를 응원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향했다.
-아!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에 케일은 걸음을 잠시 멈췄다.
동시에 시험 목소리는 망설이는 듯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참고로 분노는.
그러나 거기까지 말하고 뒤를 잇지 못했다.
-음.
“해줄 말이 있나?”
케일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시선을 느낀 듯 목소리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음. 예를 들어, 음, 어떻게 설명해드려야 시험의 규칙을 어기지 않을지 모르겠네요. 음.
“편하게 말해봐.”
케일은 팔짱을 끼고서 기다렸다.
일단 들어볼 수 있다면 이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간 이 시험 목소리는 친절했다, 꽤.
-예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일단, 시험자께서는 언제 가장 화나시나요?
“내가 가장 화날 때?”
-네.
케일은 잠시 침묵했다.
-순간 떠오르는 게 있으시죠?
시험 목소리가 물었고, 케일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시험 목소리가 답했다.
-그걸 보여드리려구요.
“…뭐?”
어느새 사방은 검은빛으로 뒤덮였다.
케일은 조금씩 시야가 어둡게 물들어갔다.
-부디.
굴욕 시험 때부터 묘하게 친절하던 목소리는 여전히 친절하게 말했다.
-부디, 절망하시길.
목소리조차 시험이었다.
절망의 신이 만든 것들 중 아군은 없었다.
케일은 다시 한번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 * *
그리고 마지막 ‘분노’ 시험을 마주하기 위해 눈을 뜬 순간.
“역시 이럴 줄 알았다니까.”
케일은 피식 흘러나온 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시험이 갑자기 친절해졌다?
시험 목소리가 따뜻해졌다?
그걸 듣고 안심한다?
‘오히려 의심해야지.’
봉인된 신. 그놈은 사람의 절망을 먹고 산다. 틈을 보이면 잡아먹으려 들 터. 그렇다면 틈을 만들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케일은 적을 믿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시험 목소리가 물었을 때.
‘일단, 시험자께서는 언제 가장 화나시나요?’
‘내가 가장 화날 때?’
분노 시험이라면 필히 그 분노와 관련된 상황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시험 내용일 것이다.
케일은 질문이 들리는 즉시 딴생각은 하지 않고 한 생각에 집중했다.
가장 화날 때, 첫 번째.
‘애들이 반찬 투정할 때.’
암, 화나지.
반찬 투정이라고는 안 하는 애들이 반찬 투정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화가 나겠어?
케일은 생각을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른 화나는 경우도 생각했다.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계속 잠이 와. 그런데 아무도 깨워주지 않을 때.’
정말 화가 날 것이다.
계속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잠이 안 올 때까지 자야 하지 않나?
너무 화나지.
또 생각했다.
‘뭘 하면서 뒹굴거려야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을 때.’
암, 화나고말고.
놀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침대 뒹굴거리는 것밖에 생각나지가 않아!
이 얼마나 분통 터지는 상황이야?
케일은 혹시 부족할까 봐 더 생각했다.
‘라면 그만 먹고 싶은데, 라면 먹어야 할 때.’
김록수 때 라면 참 지겹게 먹었다. 이제는 그만 먹고 싶다. 그런데 또 라면을 먹으라고 한다고? 그것도 적당히 익은 열무김치까지 건네면서? 더욱이 라면 다 먹으니까 짜장라면까지 먹으라고 준다고?
어휴. 상상만 해도 화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해내었다.
‘영지 일, 서류 업무 하고 싶은데 그만 쉬라고 할 때! 아주 화나지!’
상상만 해도 아주, 매우, 너무나도 분노가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래. 케일은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마주한 마지막 시험.
“케일 헤니투스!”
그의 손에 들린 서류를 누군가 뺏어갔다.
역시 시험이 질문을 했던 순간 깨달은 케일의 예상대로, 이번 분노 시험도 과거의 기억이 아닌 ‘가상의 상황’이었다.
시험은 친절한 척 도움을 가장해 언제 가장 화나는지 물었고, 케일은 그 화나는 상황을 여러 개 생각해내었다.
그 결과가 케일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벌어졌다.
“너는 이제 일 없을 거다! 앞으로, 영원히!”
“아, 아버, 흐, 지.”
“네 말을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
케일은 아버지 데르트 헤니투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호흡을 골랐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데르트는 분을 참지 못했다. 그는 케일에게서 뺏어든 서류를 던졌다.
촤아아악-
서류들이 흩날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왕세자께서도 너에게 일을 맡길 수가 없다고 하시더구나! 어찌하여 이런 일이! 넌 앞으로 일이라는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흐흐.
아, 진짜 좋다.
분노 시험.
케일은 이 환상 속에서 짜릿함과 행복감을 느꼈다.
아주 좋다, 이번 시험.
“당장 나가거라! 집무실, 영주성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거라!”
“…네, 아버지…….”
케일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데르트 공작이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케일은 마음이 가벼웠다.
그때, 최한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케일 님.”
“왜?”
“…라온과 온, 홍이 반찬 투정을 합니다.”
“그래?”
“네. 화가 나시겠지만.”
최한은 케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비크로스가 다급하게 찾고 있습니다. 해결해주실 분은 케일 님뿐이라고요.”
“그래, 그래. 내가 해결해야지. 가볼까?”
케일은 발걸음도 가볍게 헤니투스 공작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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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으로 들어선 케일은 평화로운 광경에 절로 훈훈한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싫다!”
탕. 라온이 앞발로 팔걸이를 살짝 두드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맹렬하게 외쳤다.
“나는 야채 싫다!”
“나는 디저트만 먹고 싶은데!”
홍이 뒤따라 외쳤고 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몫의 샐러드 그릇에 담긴 콩을 하나씩 포크로 찍어 다른 곳으로 나르고 있었다.
“도련님.”
시종 론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식당에 들어선 케일을 반겼다.
그에 평균 9세는 잠시 멈칫했지만, 슬그머니 그를 외면했다. 케일은 망설임 없이 걸어서 식탁 가장 상석에 앉아 양옆 식탁에 자리한 평균 9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시험 목소리에게 분노하는 순간 중 하나라고 말했던 것.
‘애들이 반찬 투정할 때.’
케일은 애들의 반찬 투정을 처음 보았다.
라온이 케일을 힐끗거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 왜 그렇게 웃나?”
온은 포크를 슬그머니 내려두고서 떨떠름한 얼굴로 케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케일은 라온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에 사뭇 부드럽게 물었다.
“올해 라온 네가 몇 살이지?”
“나? 인간아, 내 나이도 모르나!”
라온이 포크를 내려두고서 두 앞발을 펼쳤다.
“나 7살이다!”
1년 후군.
케일은 지금 이 환상이 내년을 가정해서 그려내었음을 깨달았다. 사실 헤니투스 공작가일 때부터 이곳이 미래일 것이란 생각은 어렴풋이 했다.
‘환상에서는 내년까지 왕세자 저하가 왕이 못 되는 건가?’
그리고 일에 치여 살고?
케일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업무에서 제외된 자의 기쁨이었다. 이를 알 리 없는 라온은 케일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설마… 7살이면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그러는 거냐! 나는 야채 싫다!”
“그래, 먹지 마.”
“…응?”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홍이 슬그머니 디저트를 옷 주머니에 넣던 것을 멈추고 케일을 쳐다봤다. 온은 영문을 모르겠단 눈초리였다.
하지만 케일은 꽤 진심이었다.
“먹고 싶은 거 먹어. 먹기 싫은 건 나중에 먹든가, 먹고 싶어질 때 먹든가 하고.”
케일은 지금껏 평균 9세. 아니, 여기서는 평균 10세, 아니지. 평균 10살이 반찬 투정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세 명의 애들은 무엇이든 잘 먹었다. 분명 좋은 일인데, 마냥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얘들은 굶주림을 겪어봤었던 애들이니까.
‘이런 것도 좋네.’
반찬 투정하는 평균 10살이라.
케일은 이런 광경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이런 반찬 투정도 어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는가. 케일도 아주 어릴 적 부모님 두 분이 계셨을 때를 제외하고는 반찬 투정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투정을 부리는 것은 사치였으니까.
“…인간, 이상하다.”
라온은 전보다 더 케일의 눈치를 살피며 야채를 포크로 집어 먹기 시작했다. 홍은 디저트를 내려놓고서 일단 밥부터 먹기 시작했다. 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콩을 먹었고.
“먹기 싫은 건 안 먹어도 된다니까?”
케일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평균 10살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도련님, 잘하셨습니다.”
론이 인자한 미소를 띠운 채 케일을 칭찬했다.
케일은 표정이 떫은 감처럼 변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은 그 뒤로 꿈에도 바라마지 않던 일상을 겪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 매운 라면입니다.”
비크로스가 케일 앞 식탁에 라면 그릇을 놓았다.
환상이라서 가능한 말도 안 되는 상황. 케일은 그 환상을 기꺼이 즐겼다.
“이야.”
환상이라도 맛과 향, 모든 것은 현실과 동일했다.
오랜만에 먹는 라면?
“꿀맛이네.”
케일은 라면을 즐겼고 비크로스는 상당히 탐탁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 달째 라면인데 징글징글하군.”
“응? 뭐라고 했나?”
“아닙니다. 하나 더 끓여드릴까요?”
“어. 짜장라면으로.”
“네.”
와. 짜장라면도 된다.
케일은 환호성을 참았다. 비빔라면도 되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 같았다. 케일은 평화로운 라면 섭취를 이어가며 골고루 음식을 먹는 평균 10살을 흐뭇하게 눈에 담았다.
‘음?’
그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창밖에 잠시 닿았다.
‘저게 뭐지?’
살짝 몸이 의자에서 일어설 듯 창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이어가지 못한 채 시선을 돌려야 했다.
“케일 님.”
최한이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찾지 못했습니다.”
“어? 뭘?”
“오늘 무엇을 하면서 놀아야 할지요.”
음?
케일은 멍하니 최한을 쳐다봤고, 그 시선에 최한은 사뭇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나도다! 나도 못 찾았다!”
“이제 할 게 없는데!”
라온과 홍이 뒤이어 아쉽다는 듯 말했고, 온도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케일은 자신이 시험 목소리에게 말했던 화나는 일을 하나 더 떠올렸다.
‘뭘 하면서 뒹굴거려야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을 때.’
흐.
케일의 입꼬리가 씰룩이기 시작했다. 그는 은근슬쩍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별수 없지.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서 뒹굴어야겠군.”
“도련님, 힘내십시오.”
론이 레모네이드를 건넸다.
케일은 오랜만에 마시는 레모네이드의 신맛도 정겹다 생각하며 힘차게 라면을 마저 먹었고.
그 후로, 그의 진정한 백수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 * *
“좋다.”
케일은 오른쪽으로 굴렀다. 침대가 출렁였다.
천장을 보고 대자로 누운 케일은 중얼거렸다.
“너무 좋다.”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
그가 시험 목소리에게 말했던 것 중에는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계속 잠이 와. 그런데 아무도 깨워주지 않을 때.’ 이것도 있었으니까.
“흐.”
기나긴 피로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고작 하루가 지났건만, 데르트 공작뿐만 아니라 바이올란 공작 부인, 바센, 심지어 릴리까지 모두가 건강한 모습으로 케일이 업무의 ‘ㅇ’자도 가까이하지 못하게 했다.
알베르는 바쁘다고 영상통신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냥 놀라고 했다.
최한은 놀거리를 찾아보겠다며 라크와 늑대족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온, 홍, 라온. 평균 10살들은 론의 수업을 들으러 갔다. 아마 오전 수업이 끝나면 케일을 만나러 오지 않을까.
참고로 고룡 에르하벤은 새 레어를 만드느라 바쁜 중이라고 했다. 로잘린도 마탑으로 바쁘고.
‘아무튼 나 빼고는 다 바쁘지.’
흐.
케일은 진심으로 혼자 노니까 더 좋았다.
“…그런데 말이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고 있던 케일은 싱글싱글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 시험은 어떻게 끝내야 하지?”
지금껏 분노할만한 일이라고 주어진 상황들.
업무에서 쫓겨나기.
라면 계속 먹기.
애들 반찬 투정 듣기.
침대에서 뒹굴거리기.
늦잠 자기.
이 모든 상황에 진심으로 화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분노는커녕 꿈꾸는 미래를 겪은 기분이었다.
‘일단, 지금 마지막 분노 상황 늦잠 자기까지 겪었으니까.’
케일은 이제 이 분노 시험이 끝나야 하지 않나 싶었다.
딱 하루.
그 정도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달려 나가야 할 때니까.
“그런데 말이지.”
케일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 좀 이상한데?”
그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조금씩 옅어져 갔다. 케일은 침대에서 내려선 채 슬리퍼를 신고서 테라스가 있는 창가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영지에서 보이는 한 산의 중턱으로 향했다.
중턱부터 시작해 정상까지.
그는 산에 있는 무언가를 눈에 담았다.
알 수 없는 기묘한 불쾌감.
그는 저 멀리 있는 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창문 고리를 잡았다. 테라스로 가서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그때.
“인간아!”
콩콩콩. 쾅!
살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라온이 그를 부르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노크했던 온은 홍과 라온 뒤를 따라 들어왔다.
케일은 평균 10살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툭 던지듯 물었다.
“라온.”
“왜 그러나 인간!”
“저 산에 검은 거 뭐지?”
공작가에서 꽤 잘 보이는 위치에 놓인 산. 거리는 멀었지만 대리석을 채굴하는 산 중 하나였다.
그 산의 중간부터 정상까지. 대리석이 있는 곳에.
“…저 뱀 그림 같은 거 말이야.”
검은 선이 마치 뱀처럼 길게 세로로 그어져 있었다.
케일이 알기로 헤니투스 영지에 저런 것은 없었다.
쿵. 쿵. 쿵.
케일은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본능적인 불쾌감이 피어올랐다.
‘뭐지?’
지금껏 이 시험을 치르면서 이런 적은 없었는데?
케일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답은 라온이 알려주었다.
“인간, 그것도 모르나!”
라온이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정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니, 오히려 신이 나서 즐겁게 말했다.
“저건 하얀 별님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 거다!”
…뭐? 무슨 님?
케일은 저도 모르게 제 귀를 움켜잡았다.
잠이 덜 깼나? 라온이 지금 누구를 ‘님’이라고 부른 거지?
케일은 라온이 부른 님을 다시 읊조리듯 되물었다.
“…하얀…별…님?”
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데! 하얀 별님! 하얀 별님이 깨달음을 주시려고 저 산에 검은 힘을 내리신 건데!”
“하얀 별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안 그러면 헤니투스 영지에서 대리석 사라진다! 인간아, 그러면 큰일 난다!”
신이 난 라온의 말 뒤에 온도 이어서 덤덤하게 말을 덧붙였다.
“위퍼 왕국의 농지가 하얀 별님 말씀을 듣지 않아서 다 그 가치를 잃었는데. 그래서 위퍼 왕국민 1/3이 굶어 죽었어요.”
“맞는데! 툰카도 그래서 이제는 하얀 별님 말씀 잘 들어요! 그리고 우리도 잘 들어야 해요!”
홍이 누나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자신이 아는 바를 신이 나 말했다.
“인간아, 그것도 기억 못 하나? 아니면 우리가 그것도 모를까 봐 모르는 척 묻는 건가?”
라온이 이상하다는 듯 케일을 쳐다보았다.
“하, 하하-.”
그리고 케일은 그냥 웃었다.
‘그래. 이 시험이 쉬울 리가 없지.’
케일은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얼른 나가서 하얀 별 그 새끼 끝장내야지.’
동시에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좀 화난다?’
슬슬 짜증이, 화가 차오르기 시작하는 케일이었다.
“그런데, 인간.”
“왜?”
라온이 기대되고 신난다는 얼굴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언제 기도드리러 가나?”
“응? 기도?”
설마……?
“절망 신님께 기도드리러 가야 하지 않나!”
미친.
케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긴 하얀 별과 봉인된 신이 사이좋게 승리를 거둔 미래 세상이었다.
“…화가 좀… 많이 나는데?”
케일의 미소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 * *
“이, 이럴 순 없어!”
“장군님?”
“…좀 나가 있게.”
“네! 알겠습니다!”
달칵.
기사 한 명이 나가버리고 적막에 사로잡힌 집무실.
“빌어먹을–!”
분노를 참지 못한 남자는 손에 들린 문서를 구겨버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씨익. 씨익.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남자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창에 비친 백발과 녹안. 클로페 세카는 분노로 인해 얼굴이 붉게 물들었으며 눈동자는 번들거렸다.
그는 창문 밖 풍경을 눈에 담았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조금은 북부의 삭막함이 느껴지는 그의 조국 수도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전설이…전설이……!”
그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믿고 싶지 않아 외면하려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은 그가 이겨내야 할 시험이었다.
바닥에 구겨진 채로 놓여있는 서류였던 무언가.
그 헤드라인.
푸르른 숲을 떠오르게 하는 녹안은 어느새 펄펄 끓는 용암처럼, 깊디깊은 밤처럼 어둡게 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영웅을 패배자로 만들어……?”
쾅!
그의 두 주먹이 책상을 내려쳤다.
그는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나는!”
영웅은 때때로 전설로 가기 위해 고난을 겪는다.
그것이 억울한 누명일 수도 있고 상처를 입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한 과정들 끝에 위대한 영웅이 나오는 것이리라.
클로페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 것이 있었다.
“왜 나는 그 수하가 아니야? 왜 나는 감옥이 아니지? 나는 왜 재판을 안 받아?”
차분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억눌린 열기가 언제라도 터질 듯 넘실거렸다.
* * *
“아, 너무 화가 나서 그런가. 갑자기 소름이 돋네.”
케일은 살짝 어깨를 떨어대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현재 마지막 시험에 당도한 이는 케일, 클로페. 두 사람이었다.
#
세상은 케일이 느끼는 감정과 반대로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는 평균 10살을 데리고 헤니투스 영지에 자리한 신전으로 향했다.
케일이 알던 것과 달리 이곳의 헤니투스 영지에서는 오로지 단 하나의 신전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절망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었다.
‘환장하겠군.’
케일은 마차 안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평균 10살의 뒤통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 땅에 자리한 신이 하얀 별이고, 하늘 위의 신이 절망 신이며. 하얀 별은 차후 미래에 하늘 위로 올라가 절망 신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릴 것이라고?”
“맞다, 인간아! 자꾸 같은 소리 그만해라!”
라온이 휙 고개를 돌리며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허.”
케일은 기가 찼다.
어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였다.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군.’
하얀 별은 신이 되고자 한다. 그런 놈이 절망 신과 함께 협력을 한다고?
말도 안 된다.
또, 절망 신은 인간인 하얀 별과 협력하려고 한다?
이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있을 수도 있는 미래기는 해.’
케일은 이제 절망 신과 하얀 별을 비롯한 모든 사건 뒤에 사냥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집단이 무슨 수를 써, 하얀 별과 절망 신이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었을 수도, 그런 미래가 올 수도 있었다.
케일이 패배한다면.
덜컹-.
마차가 멈췄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론이 공손히 말했고, 케일은 마차에서 내려서며 신전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군.”
“오실 때마다 그 말씀을 하시는군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케일은 고개를 돌렸다.
신관복을 입은 이는 낯설지가 않았다.
‘곰족 왕 사예르.’
빛 속성 고대의 힘을 다루는 자로, 하얀 별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놈이었다.
그놈이 신관이 되어 절망 신 신전 앞에서 케일을 맞이했다.
“안내하겠습니다.”
“우리는 놀고 있을게요.”
사예르가 앞장섰고, 온은 홍을 데리고 신전 앞에 자리한 정원으로 향했다.
-나도 따라갔다 온다! 잘 갔다 와라 인간아!
투명화한 라온도 온을 따라가는 듯싶었다.
케일의 시선이 애들이 향하는 정원에 닿았다. 그곳엔 다양한 사람들이 곳곳에 자리한 채 웃고 있었다. 남녀노소. 모두 편안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놀거나 휴식을 취했다.
케일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음.”
그 사람들 속에는 다크엘프, 뱀파이어, 수인 등 다양한 이들이 함께였다.
마치 왕세자가 바라던, 뱀파이어들이, 수인들이 바라던 세상 같았다.
“케일 님?”
사예르가 걸음을 멈춰선 채 창백하지만 온화한 얼굴로 케일을 불렀다.
케일은 평화로운 광경에서 시선을 떼고서 사예르 뒤를 따랐다.
그들은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신전 안도 평화로웠다. 헤니투스 영지산 대리석인지, 하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세워진 기둥과 벽 장식들. 정갈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그 공간은 고요했다.
조용한 평온이 흐르고 있었다.
케일은 사예르 뒤를 따르며 신전 안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다.
행복해 보이는, 기뻐 보이는, 신나 보이는 이들도 있었고 바쁘거나 지치거나 짜증 나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체념하는 얼굴을 하는 이는 없었다.
“영지 업무에서 짤리셨다면서요?”
케일은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돌렸다. 사예르가 케일의 옆에 서며 말을 건넸다. 그 말에는 친근한 농담을 건네는 듯한 살가움이 담겨있었다.
케일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렇죠. 아무래도 제가 일을 못하다 보니, 공작님께서 짜르셨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하. 공작님께서 어떻게 하셨을지 알 것 같군요. 듣기로는 서류가 허공을 날아다녔다고 하던데요?”
“말도 마세요. 서류가 허공을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 저에게로 날아왔죠.”
“어이쿠. 공작님도 참.”
고생했다는 듯 사예르가 케일의 어깨를 토닥였다.
케일은 씁쓸하다는 얼굴로 가볍게 웃어 보였다.
사예르는 살짝 주먹을 들어 보이며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케일 님, 힘내십시오.”
이를 보던 케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그런데 말이야.
케일은 아까부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사예르에게 묻고 싶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일을 네가 어떻게 알아? 응?
신관이 어떻게 공작과 아들 간의 대화 내용을 아느냐 이 말이야.
마치 영주성의 누군가가 데르트 공작과 나를 감시하고 이를 실시간으로 사예르에게 보고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내 착각일까? 응?
케일은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대리석으로 뒤덮인 산에 그어진 검은 선. 뱀과 같은 그것을 보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왜 이럴까.
공포? 긴장감?
그런 게 아닌데.
그렇다고 즐겁고 기대되는 신나는 감정도 아니었다.
“벌써 다 왔군요.”
사예르가 케일을 안내한 곳은 1인 기도실이 양 복도에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복도 끝 쪽 방문을 연 사예르는 케일이 그 안으로 들어서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깊은 깨달음의 시간이 되시길.”
끼이익. 달칵.
두꺼운 철문이 닫혔다.
유일하게 이 기도실들만이 철로 된 문이었다.
“하.”
케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1인 기도실.
그 안에 자리한 것은 허공에 뜬 구슬이었다.
케일은 저것과 똑같은 재질의, 똑같은 모양의 더 큰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이 시험에 들어서기 전, 퍼슬시 허공에 나타난 봉인된 신의 신전 위에 떠오른 거대한 구. 그것과 똑같지만 크기는 훨씬 작았다.
케일 머리 크기만 한 구슬이었다.
그 구슬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절망 신이 케일을 시험에 빠뜨려 절망에 빠져들게 하려던 것처럼.
그때와 같은 붉은빛을 뿜어냈다.
“…단순한 기도가 아니었군.”
케일은 고개를 돌렸다.
벽면에 기도문처럼 적힌 글귀가 있었다.
패배자 혹은 회피자라.
케일은 붉은 구를 잠시 지켜보다가 문으로 향했다.
달칵. 기도실 문은 손쉽게 열렸다.
“이런, 케일 님.”
하지만 문밖 복도에는 사예르가 서 있었다.
“도망치시면 안 됩니다. 기도를 시작하셔서 믿음을 보여주셔야지요.”
케일은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화장실 좀 다녀와서 하면 안 됩니까? 긴장되어서요.”
“그러시군요. 길을 아시겠지만, 안내해드릴까요? 아.”
사예르는 잠시 탄성을 흘리더니 케일에게 화장실 쪽으로 추정되는 위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닙니다. 홀로 다녀오십시오. 다만 아시겠지만. 케일 님이 회피하시면 그다음은 아이들의 몫일 겁니다. 아시죠?”
멈칫. 케일의 눈가가 살짝 들썩였다. 하지만 사예르의 표정은 고요했다.
“하얀 별님의 앞길을 잠시 막았던 그 일. 갚으셔야지요.”
아무래도 이 환상 속 세상은 케일이 하얀 별을 막아섰지만, 실패하였으며 그 막아선 일조차 단순히 ‘잠시’에 지나지 않는 미세한 일이었던 듯싶었다.
즉, 하얀 별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단 뜻이리라.
사예르는 굳은 케일의 표정을 보며 살풋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못하다간 타락한 성자나 악의 네크로맨서 후계자처럼. 제물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명심하셔야죠.”
케일은 직감했다.
이 세상에 태양신 성자 잭과 네크로맨서 메리는 없구나.
죽었구나.
그는 웃었다.
“아무렴. 걱정 마시길.”
“믿겠습니다.”
케일은 사예르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화장실 방향으로 향했다. 그 걸음은 태연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화장실에 도달했을 때.
“…케일 님?”
안 그래도 사예르가 케일 님 거려서 짜증 났던 귓구멍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 그 앞에 최한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까 헤니투스 저택에서 나올 때 보이지 않아 어디 갔나 싶었더니, 이곳에 있었다.
‘울면서 말이지.’
최한의 얼굴에 눈물은 없었다.
다만 세수를 한 얼굴은 살짝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눈동자가 충혈되어 있었다. 케일은 입을 열었다.
기도실 근처 화장실.
보나마나 최한은 기도실에 갔다 왔을 터.
“기도가 힘들던가?”
최한은 시선을 피했다.
“…아닙니다.”
“나는 힘들던데.”
최한의 눈이 커지며 그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대신 몫을 채우겠습니다! 하다 보니 금방 할당량이 채워지더라구요.”
그 순간 케일은 기도실에 대한 것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절망감을 다시 느껴야 할 텐데?”
“…케일 님.”
최한이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케일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정답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되는 건지 이제 감이 잡히는군.’
봉인된 신인 절망 신.
그놈은 생명체의 절망을 통해 힘을 얻는다.
복도를 따라 빽빽하게 늘어선 1인 기도실. 그곳은 하얀 별과 절망 신을 방해했던 자들이 기도라는 명목으로 절망을 절망 신에게 바치는 공간이리라.
붉은 구가 방에 있었으니 그 방식이 환상을 통한 절망일 것이다.
케일은 무심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하긴 제물이 되는 것보다는 나으려나.”
“…케일 님.”
다시 한번 최한이 케일을 불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짙은 슬픔과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제물.
케일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대략 짐작했다.
최한의 반응이나 잭과 메리를 보아 정답이리라.
절망 신이 절망을 원한다면, 하얀 별은 ‘죽은 마나’를 원했다.
죽은 마나.
그것을 얻으려면 결국 생명체가 죽어야 했다.
이를 위해 과거 모고르 제국의 연금술 종탑에서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았지 않았던가.
아마 ‘제물’은 하얀 별을 위해, 죽은 마나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이들을 뜻하리라.
신전 밖 평화로운 영지 분위기를 떠올린 케일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상황 파악이 되나?”
“네?”
최한이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물었지만, 애석하게도 이 질문의 대상은 최한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별 희한한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이구나.
-다 태워버리는 게 어때?
-이 빌어처먹을! 땅을 못 쓰게 만들었다고? 또? 고대 때와 같은 짓거리를 하는구나!
고대의 힘들이 오랜만에 각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환상은 다행히도. 케일이 가진 힘이 온전했다.
그래서 이상했다.
‘내가, 우리가 질 리가 없는데.’
케일은 최한에게 물었다.
“절망 신의 신전은 퍼슬시가 중심인가?”
“…그렇죠. 퍼슬시에 중앙 신전이 있으니까요. 케일 님,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최한은 말을 잇지 못하고 굳어버렸고, 케일은 뒤돌아서며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곰족 왕 사예르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케일 님. 퍼슬시는 왜 물으시죠?”
“별건 아니고.”
케일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중앙 신전에 가서 기도 좀 드리려고 하는데.”
최한의 눈이 커지며 흔들렸고, 사예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요? 전 또 다른 생각을 하시나 했네.”
사예르는 기쁘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 다음 번 헤니투스 영지 제물 운송 담당은 케일 님이 하시면 되겠군요. 안 그래도 이번에 헤니투스 영지 할당 인원이 3배 정도 느는 바람에 누구에게 운송을 맡겨야 든든할지 고민이 많았거든요. 해주실 거죠?”
케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 * *
그날 밤. 케일은 집무실도 아닌 데르트 공작의 개인 서재에서 데르트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왜!”
데르트 공작은 드물게 케일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진 채 펴질 줄을 몰랐다.
“내가 분명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나서! 나서기를! 왕세자 저하께서도 명하신 것을 알지 않느냐!”
케일은 왜 데르트 공작이, 왕세자가 케일이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이미 낮에 알아챘다.
“케일. 제발. 너는 빠져라. 바센도, 바이올란도 차례대로 다 빠질 거다. 이건 오로지 이 아비 손으로 할 일이니. 넌 그냥 편히 쉬거라. 응?”
데르트의 간절한 표정을 보며 케일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 빌어처먹을 시험.
“제물 운송 업무는 제가 합니다.”
“케일!”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문밖의 눈치를 보는 데르트. 케일은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아버지.”
이 빌어처먹을 시험.
내 성질이 다 풀릴 때까지.
엎는다.
“저 쉴 생각 없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아는 이는 오로지 지금 케일뿐이리라.
그는 생각했다.
마지막 시험. ‘분노’.
역시 마지막다워.
이래야, 마지막이지.
봉인된 신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
봉인된 신의 발악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쉴 생각을 잠시 접은 케일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였다.
짱돌이 두근거림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물 될 이들부터 구해? 아니면 중앙 신전부터 부수나? …아니면 그냥 다 부숴?
#
케일은 짱돌의 물음에 의아함을 느꼈다.
제물 될 이들을 구한다.
중앙 신전을 부순다.
그냥 다 부순다.
이게 물어봐야 될 일인가?
셋 다 해야지.
속으로 결론을 내렸던 케일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은 것인지 데르트 공작은 케일의 두 팔을 꽉 잡았다.
“…케일!”
그의 눈동자에는 걱정을 넘어선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너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마세요, 아버지. 주어진 일 잘 할 테니까요.”
케일은 망설임 없이 답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래. 케일, 헤니투스가의 정신을 잃지 말거라. 평온하게, 그렇게 살면 돼.”
글쎄요.
케일이 아는 데르트 공작은 가족과 가문, 영지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의 모습을 이해했으며 그의 생각도 공감했다.
케일은 신전에서 돌아와 데르트에게 불려오기 전, 그가 보았던 것을 떠올리며 데르트 공작의 손바닥을 펼쳐 그 위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
데르트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헤니투스 공작가 지하 연무장. 그곳은 현재 폐쇄 상태라고 하였다.
하얀 별이 하얀 별‘님’이 된 순간, 헤니투스 공작가에는 더 이상 그곳이 필요 없어졌다며 데르트에 의해 문이 잠겼다고.
그게 말이 돼?
헤니투스 가문은 돈이 아무리 많다지만, 무가다.
행정에 집중하려는 바센에게도 기본적인 무술을 가르쳤으며, 바이올란 공작 부인은 문화 사업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스스로의 갑옷을 지닐 만큼 무에 진심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연무장을 폐쇄해?
케일은 이를 믿지 않았고, 멀찍이서 지하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을 지켜보았다.
몇몇 나이 든 고용인들이 그곳을 오갔다.
마치 잡다한 물건을 갖다두러가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몰란 가문의 사람들이더라고.
론과 함께 한때는 동대륙 뒷세계를 평정하였지만 하얀 별에게 패해 도망치다가 겨우 살아남아 론 몰란의 가문 아래에 모여든 은둔자들.
나이가 론보다 많은 그들이 고용인으로 위장해 지하 연무장을 들락날락거렸다.
물론 그것도 두 번 정도 목격한 것이지만.
케일은 확신했다.
‘뭔가 있구나.’
이 환상의 세계에서는 케일을 제외시키고 데르트와 론과 같은 나이 든 헤니투스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구나.
그 대신 철저하게 케일을 시작으로 바센, 최한 등 젊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빼려고 하는구나.
‘그걸 어떻게 두고 봐.’
이래 봬도 내 나이가 서른 후반이고.
최한은 론과 데르트의 증조할아버지 격일 텐데.
물론 최한은 순한 성격이니 뺄 수도 있었다.
“아버지. 저는 그냥 주어진 일만 하고 오려고 합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퍼슬시 가서 콧바람 좀 쐬고 올게요.”
차분한 어조에 데르트는 결국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거라. 대신, 사고 치지 말고 실무자들 말대로만 해.”
“네. 그럴게요.”
미안합니다.
안 그럴 생각입니다.
케일은 속마음을 티 내지 않고서 듬직하게 답했고, 그 모습에 데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만 가서 쉬어.”
“네, 아버지. 아버지도 좀 쉬면서 하세요. 느긋하게.”
피식. 데르트는 케일의 말에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케일은 마주 웃어 보이고는 데르트의 개인 서재를 나왔다.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케일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달칵.
“인간아! 혼나고 왔나?”
“퍼슬시 나도 가고 싶은데!”
“혼났을 때는 과자를 먹으면 좋은데.”
평균 10살은 방에 들어선 케일에게로 곧장 다가왔다.
그때였다.
삐이이—삐이이–
케일은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영상통신구.
그것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두 가지 경우다.
위급 상황이거나.
“앗! 인간아, 잠시만 기다려라!”
아니면 왕세자의 통신이거나.
파아앗.
케일은 침실 전체를 뒤덮는 막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라온은 영상통신구가 붉게 빛나자마자 곧바로 방음 마법을 펼쳤다.
-너.
그리고 연결된 영상통신구. 그 위 화면에 나타난 알베르의 얼굴은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왜 헤니투스 제물 운송 책임자가 너라고 뜨지? 내가 분명 너는 일에서 손 떼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백수가 되라고 했을 텐데?
케일은 그가 알던 늘상 피곤해하는 알베르의 얼굴과 지금 이 얼굴은 너무나도 다른 성질의 것임을 깨달았다.
-너도 이제 내 말이 우습나?
피곤함 그 속에도 목표가 있던 눈동자에 이제 피곤함과 함께 분노가 담겨 있었다.
케일은 입을 열었다.
“그냥.”
느긋한 목소리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놀러 갔다가 오게요. 영지 안에만 있기 갑갑해서.”
-하!
알베르는 실소를 터트림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케일을 잘 아는 만큼 그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냉정히 말하지.
환상 속 왕세자는 눈동자마저 지쳐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우린 하얀 별의 적수가 되지 못해.
케일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물었다.
“왜죠?”
-알면서 왜 그러나?
“우리가 왜 졌죠?”
변함없는 어조에 알베르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완전한 하얀 별을 우리가 어떻게 이기나?
아하.
케일은 작게 탄식을 흘렸다.
‘그렇게 된 거군.’
이 환상 속에서 하얀 별은 완전했다.
‘완전’. 그 속에 담긴 뜻은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왕세자는 한 가지만으로 존재를 완전하다 평하지는 않을 터.
즉, 이 세상의 하얀 별은 모든 고대의 힘을 손에 넣어 균형을 잡았으며, 동서대륙에 탄탄한 동맹국을 형성하여 병력과 권력에서 우위를 점했을 것이다.
더불어 상대가 완전하다는 것은.
“우리는 불완전했고요. 힘, 동맹 모든 면에서.”
-물어 무엇 하나?
여기서 케일은 생각을 한번 정리했다.
‘이 분노 시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 이 시험을 통과하려면 분노를 해결해야 하나? 아니면 분노의 원인을 없애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분노를 흘려보내야 하나?’
무엇이든 현 상황에 대해 더 이상 분노를 느끼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
꽤 친절하던 시험 목소리는 현재 침묵 중이었다.
‘빌어먹을 시험.’
케일은 간단하게 답을 내렸다.
“화가 났으면 풀어야지.”
-뭐?
“아닙니다.”
케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지금 하얀 별은 틈 하나 없는 거대한 성벽이군요.”
-왜 알고 있는 소리를 여러 번 하는 것이지?
띠껍게 나오는 알베르를 보며 케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틈 없는 거대한 성벽이라.’
그러면 쉽네.
-너 지금 쉽다고 생각했지?
왕세자는 용했다. 케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번에 알아챘다.
-성벽에 구멍 하나 뚫으면 금방 부서질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지?
알베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구멍을 몇 개 뚫어도 무너지지 않아.
그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얀 별이 승리하기 전이라면 몰라도, 그놈이 승리했고 동대륙과 서대륙 대부분의 왕국이 그에게 굴복했지. 한두 개의 흠으로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어. 벽의 일부가 무너진다면 몰라도.
그때, 짱돌이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환상이라서 그런가. 저 왕세자는 케일 너를 모르는구나.
짠돌이 불벼락이 동의를 표했다.
-그러니까. 어린 용도 알지 않나? 이 녀석은 구멍 뚫는다고 하면서 아예 성벽을 날려버릴 놈인데. 흠, 차라리 벽 일부를 무너뜨리라고 한다면 그건 그럭저럭해낼 것 같다만. 아니지, 그래도 성벽을 날려버릴걸?
알베르는 케일을 다독이듯이 낮게 속삭였다.
-작은 불씨로는 하얀 별을 움직이게 하지도 못해. 금방 꺼질 테니까.
짱돌이 중얼거렸다.
-잘못 알고 있군. 케일 이 녀석은 불씨 정도가 아니라 조용하던 화산을 들쑤셔 폭발을 일으킬 놈이야! 여기, 왕세자는 순수하구만!
불벼락이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이야! 이 녀석은 나보다 더해! 세계수도 겁내는 내가 이 녀석에 비하면 약과라 이 말이야!
왕세자가 순수하다라. 글쎄요.
케일은 짱돌의 말에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지친 표정의 왕세자 눈동자는 케일을 탐색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그가 불씨나 벽에 구멍을 뚫을 계획이 있냐는 듯.
그러나 이내 그 눈빛을 감췄다. 하지만 케일은 이미 다 봤다.
씨익. 케일이 웃어 보이자 왕세자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허튼짓 하지 말고 조용히 시키는 일만 하고 오도록.
알베르는 그렇게 말했고, 케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명대로.”
영 못 믿겠다는 듯, 알베르는 케일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영상통신을 끊었다.
-마음대로 해봐.
그가 남긴 마지막 말에 케일은 미소를 더 짙게 그리며 론을 불렀다.
“론.”
“네, 도련님.”
“2년간의 기록. 가져와. 아니, 3년간의 기록.”
인자한 척하던 론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져갔다. 그의 눈동자는 케일을 가만히 담았고 이내 고개를 숙이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달칵.
문이 닫혔고, 케일은 아직까지 방음 마법을 펼치고 있는 라온 쪽을 바라보았다. 평균 10살. 하얀 별님, 하얀 별님을 외쳐대던 애들이 눈을 반짝이며 케일을 보고 있었다.
“인간, 뭐 하나?”
“하는 것 같은데!”
온이 조곤조곤 말해왔다.
“기다렸는데.”
그 순간, 케일은 결국 짧은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는 꺼진 영상통신구를 바라보며 조금 전 대화 상대였던 알베르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원래 지키려는 자가 힘들죠.”
* * *
며칠의 시간이 흘러, 오늘은 헤니투스 영지에서 퍼슬시로 제물을 보내는 날이었다.
제물은 오로지 신전에서 정한 명단에 따라 뽑혔으며, 영지 내 곳곳에 퍼진 그 명단 속 인원을 영주는 책임지고 모두 데려와 해당 영지의 신전에 전달해야 했다.
전달된 제물의 상태를 확인한 신전은 이상이 없으면 이를 모아 중앙 신전이 있는 퍼슬시로 이동시켰다.
그 제물 운송 과정은 신전과 해당 영지가 함께하였고, 운송 중 어떠한 문제가 없도록 하는 것이 영지의 책임이자 의무였다.
“조용하군.”
한창 시끌벅적하고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해야 할 광장.
오늘 이곳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케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게 문은 모두 닫혔으며 드문드문 보이는 주택가 쪽에는 커튼마저 쳐진 채 밖을 향해 누구 하나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다.
평화롭던 며칠 전에 비하면 너무나도 다른,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이게 진실이겠지.’
지금 이 모습이 숨겨져 있던 민낯이리라.
“오셨습니까?”
헤니투스 영지 기사단 소속 힐스만 부단장이 다가오는 케일을 향해 인사했다.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며 광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공자님.”
뒤따라오던 부집사 한스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케일을 나직이 불렀지만, 케일은 모른 척했다.
짱돌도 그를 불렀다.
-케일. 굳이 그쪽으로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케일이 향하는 곳. 그곳엔 여러 대의 평범한 짐마차가 있었다.
감옥으로 개조한 짐마차였다.
그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손발이 묶인 채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다. 그 눈빛은 죽어있거나 혹은 들끓고 있었다. 케일은 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어이구, 케일 님. 일찍 오셨네요?”
웃음기가 한가득 담긴 목소리에 케일은 고개를 돌렸다.
곰족 왕 사예르가 신관복을 입은 채 뒤에 신관들을 대동하고서 다가오고 있었다. 사예르도 케일과 함께 움직일 예정이었다.
“제물들 상태가 다 좋죠?”
사예르는 케일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번엔 신전에서 특별히, 열심히 뽑았는데 공작님이 무사히 제물들을 잡아 오셔서 상태들이 다 좋아요~”
-케일, 참아라.
짱돌이 구겨진 케일의 표정을 알아채고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다 구할 것 아닌가?
-지금 제물 마차 쪽에 관심을 표하거나 티를 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예르 놈 앞이니, 지금은 그냥 참고 넘기자. 그게 좋지 않겠나?
그래, 어차피 며칠 안으로 다 구할 사람들이긴 한데.
케일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망나니 불러와야겠네.”
“…네? 뭐라고 하셨죠?”
활짝 웃으며 제물들의 상태에 대해 언급하던 사예르가 말을 멈추고 되물어봤고.
-뭐? 안 된다! 아직은 안 돼! 넣어둬!
짱돌이 당황해서 외칠 때.
케일은 한껏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사예르를 매섭게 응시했다.
“신관님. 이건 아니죠.”
“네?”
다시 되물었던 사예르는 이내 씨익 미소를 그렸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지금 설마 제물들에 대해 뭐라 한 말씀 하시려,”
“아니.”
케일은 사예르의 말을 잘랐다. 그는 짐마차를 가리켰다.
“제물을 이런 데서 옮기면 됩니까?”
그리고 목소리를 단박에 높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짝다리를 짚었다.
“하얀 별님을 위한 제물인데, 이런 좁은 데서 모여간다고? 이딴 식으로 하면 그건 하얀 별님에 대한 무시 아닙니까? 어? 안 그래요?”
“네?”
“아니, 그렇잖아.”
케일은 감옥으로 개조된 짐마차들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제물을 바치는 정성이 있어야지, 정성이! 이건 뭐.”
실망감에 가득 찬 눈동자가 사예르에게로 향했다.
“지금 헤니투스 공작가 무시하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네?”
케일은 한스에게 소리쳤다.
“당장 마차 새로 가져와! 헤니투스 공작가가 바치는 제물인데! 이런 후줄근한 데에 싣고 가라고? 하얀 별님한테 바치는 거면 최고급으로 준비해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네? 네, 네!”
한스가 놀라다가 이내 세게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공작가로 달려갔다.
케일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한번 사예르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제물들 때깔이 이게 뭡니까?”
“…네?”
“옷도 후줄근해, 저기 뒤에 식재료도 보니 하품이야, 거기다가 천막 칠 거라고 들고 온 것들도 어디 주워온 것 같은 걸로 가져와. 어휴. 신관님, 하얀 별님 안 존경합니까?”
띠거운 눈빛의 케일이 사예르를 상당히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신전 대표 신관이 저리 정성이 부족해서야. 쯧.”
그는 시종 론과 부단장 힐스만, 요리사 비크로스에게 명했다.
“당장 내가 말한 것들 다 새로 최상품으로 준비해와!”
세 사람은 곧바로 케일의 명을 수행하러 신속히 몸을 움직였다.
이를 지켜보던 케일은 시선을 돌려 사예르를 쳐다보았다. 사예르는 황당함과 분노, 짜증이 뒤섞인 얼굴로 케일을 보며 뭐라 입을 벌리지 못했다.
케일은 그런 사예르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신전에 돈이 없나 봅니다? 기부 좀 해줘요?”
그리 말하면서 사예르를 위아래로 훑어본 케일은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쯧.”
그 혀 차는 소리에 침묵하던 짱돌이 말했다.
-…그래. 사람이 잘 입고 잘 먹고 잘 자야지.
#
152장. 모였네
초호화 행렬이 헤니투스 영지를 출발하기 시작했다.
여러 대의 고급 마차가 일렬로 광장을 가로질러 성 밖으로 향하는 광경은 꽤 장관이었다. 더불어 부단장 힐스만을 중심으로 한 기사들이 그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더불어 마법사들도 로브를 둘러쓴 채로 말을 타고서 후위와 전방에 배치되었다.
촤르륵.
본래라면 밖을 내다보지 않았을 영지민들 중 일부가 커튼을 걷고서 밖을 내다보았다.
“…빌로스 님.”
“나도 보고 있어.”
플린 상단의 서자. 이 환상 속에서는 여전히 서자로만 남은 채 변방 헤니투스 영지에 머무르고 있던 상인 빌로스 플린.
그는 손에 들린 종잇조각을 태우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몰란가의 전언이 사실이었군. 공자님이 움직이셨어.”
빌로스의 수족이 그를 바라보았다. 빌로스는 그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소문내. 퍼슬시를 지켜보라고.”
“네. 알겠습니다.”
종이를 모두 태운 빌로스는 손을 뻗어 커튼을 쳤다.
촤르륵.
창밖을 내다보던 다른 시선도 커튼을 치며 영상통신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하. 케일 공자가 평소와 다르게 움직입니다.”
-그래. 알았다.
“따라갈까요?”
-…괜찮네. 퍼슬시로 가는 것이 분명하니 그곳에 시선을 두면 되겠지.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데르트 공작이 지하 연무장을 열었다고 합니다.”
-…….
“또한 최한 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헤니투스 공작가 고용인 몇 명도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
“어둠의 숲. 그곳으로 최한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최한은 나를 알아본 것 같더군요.”
영상통신구 속 알베르에게 보고를 하던 이는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었다.
“알베르. 나 따라간다?”
-…이모님.
다크엘프 타샤. 현재 제물이 되었음에도 도망친 수배자 신세인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조카의 일그러진 눈동자를 향해 웃어 보였다.
-조심히. 무사히. 따라가십시오.
“그래.”
영상통신이 끊겼고, 타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한은 일부러 타샤에게 본인의 모습을, 행적을 보였다.
“…메리.”
그녀는 또 다른 조카,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은신처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퍼슬시로 간다.”
휘이잉.
바람 한 점 없던 곳에 바람이 휘날렸다.
곧 소리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다크엘프들이 타샤를 따라 은신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케일은 마차 창밖을 내다보다가 몇몇 움직이는 커튼을 확인하고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똑똑.
하지만 그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밖을 보았고, 창을 열었다.
“케일 님.”
말을 탄 곰족 왕 사예르가 생글생글 웃으며 케일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다른 신관들이 마차를 탄 것과 달리 사예르와 몇몇 신관은 말을 탔다.
‘전투 인력이군.’
딱 봐도 그들의 역할은 전투나 힘과 관련되어 있어 보였다.
“무슨 일이시죠, 신관님?”
“케일 님 덕분에 이렇게 훌륭한 운송 행렬을 겪어,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왔지요.”
케일은 그 웃는 얼굴을 보며 툭 내뱉었다.
“기본입니다만.”
“네?”
“헤니투스 공작가에게 이 정도 행렬은 그냥 평범하다고요.”
“아…….”
사예르의 웃는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공작가는 대단하군요. 다만 신기하네요. 이런 규모의 행렬을, 그것도 마차 여러 대와 식료품을 바로 내어놓다니. 마치 준비한 것처럼, 이렇게 할 계획이었단 것처럼 말이죠.”
뭔가를 캐내려는 듯한 태도에, 케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관님.”
“네.”
네가 무슨 말을 할까 상당히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예르에게 케일은 한심함을 애써 참는다는 듯 말했다.
“평범한 거라고 하지 않았잖습니까?”
“…….”
“헤니투스 공작가에게 이 정도는 그냥, 준비 안 해도 돼요.”
이건 진실이다.
케일은 사예르를 다시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부러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돈 필요하면 말해요. 기부할 테니까. 알았죠?”
“케일 님, 그게 아니라-”
“됐어요. 속마음 다 아니까. 으휴. 그럼 이제 저는 그만 쉽니다?”
“아니-”
탁!
케일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버렸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시선에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그 입꼬리를 비틀었다.
케일이 있던 마차 창문 맞은편 창문.
그곳에 평균 10살이 가만히 한 곳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신기한 광경이나 아름다운 풍경도 아니었다.
기사단과 함께 움직이는 로브의 마법사들. 그중 검은 로브를 입은 이들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 환상 속에서 메리는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메리는 죽었다. 이 환상 속에서.
성자 잭도.
…환상이지만, 사람 제대로 화나게 만들었다.
“쳐죽일 신 새끼.”
순간 평균 10살들이 흠칫하더니 빠른 속도로 케일을 쳐다봤다.
“왜?”
하지만 케일은 무슨 일 있냐는 듯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평균 10살은 가만히 케일을 살폈다. 그 시선에 케일은 다시 말했다.
“여긴 갑자기 준비된 거라 편하게 말해도 돼.”
헤니투스 공작가에서 갑자기 가져온 마차. 그 덕에 이 안에는 어떤 도청 장치도, 마법 장치도 없었다.
“아하.”
평균 10살은 작게 탄성을 흘린 온을 시작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케일처럼 웃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웃어?”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린 케일은 마차 정면을 응시하며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론이 건네준 기록은 모두 저장해두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환상 속 세계가 어떻게 이런 미래를 만들어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끼이이익-
헤니투스 영지의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선두가 빠져나가고 그 바로 뒤에 케일이 탄 마차가 성문 밖으로 향했다.
케일은 헤니투스 영지 성문 밖을 빠져나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빈민가 꼭대기 부근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무엇도 없었다.
원래라면 검은 나무 혹은 하얀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빈민가 꼭대기는 그저 황량할 뿐이었다.
“방패가 없는 케일 헤니투스라.”
이 환상 속 기록을 살펴보면, 케일은 라온, 최한 등 만나야 할 사람을 모두 만났고 땅 속성 고대의 힘인 무서운 짱돌까지 얻었다.
그럼에도 졌다.
미묘하게 패배하거나 지키지 못했다. 그 결과들이 쌓여 다른 미래를 만들었다.
단 하나, 고대의 힘 나무 속성 ‘부서지지 않는 방패’. 그것만 얻지 못했을 뿐인데.
이 세상에는 ‘방패 공자’라는 그 오글거리는 이름도 없었다.
방패.
케일에게는 처음 얻은 힘이자 이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 가진 시작점이나 다름없는 힘이었다.
그거 하나 없다고,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버렸다.
일단 케일이 나무 속성 고대의 힘을 지니지 못해 균형이 무너진 상태였고, 그에 따라 전투에서 항상 완전한 하얀 별에게 밀렸다.
더불어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매번 상당한 출혈을 겪으며 많은 이들을 잃어왔다.
그 순간이었다.
-나 여기 있는데.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 여기 있어.
부서지지 않는 방패의 먹보 신녀가 불만스럽다는 듯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흐.”
케일의 입에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래. 지금 나에게는 모든 힘이 있지.’
현재 환상 속에 있는 그는 실제의 그와 같았다.
왜 봉인된 신이 케일을 있는 그대로 여기에 두었는지 모른다.
이미 모든 것이 틀어진 상황에서는 나 혼자 온전하다고 해서 대세를 바꿀 수 없다는 건가?
‘다 실패한 상태에서 한번 발악을 해보라는 건가?’
그렇다면.
‘그래. 못할 것도 없지.’
그깟 발악 한번 해보면 어떠랴. 한 번이 아니라 수천 번도 더 할 수 있다.
다만 이 현실이 아닌 곳에서 오래 발목 잡혀 있을 이유가 없을 뿐.
‘그리고 이 시험은 늘 느끼지만 나름 친절하고 아주 작게라도 극복할 실마리나 힘을 준다.’
봉인된 신이 사용하는 시험은 단순히 신에게만 유리하지 않았다. 케일이 처음 봉인된 신의 시험을 통해 절망 시험을 겪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모든 시험이 그러하듯.
시험은 시험자에게도 어느 정도 공평하게 치러졌다.
“그러니 모든 기회를 사용해야지.”
그러나 쉽지는 않으리라.
‘도련님. 기록을 왜 다시 보시는 겁니까?’
기록이 담긴 서류를 들고 온 론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자한 척하는 얼굴에 어린 수심을 놓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서류를 본 순간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하얀 별의 힘은, 세력은 상상 이상이다.’
어떻게 이렇게 과거가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우선 모고르 제국은 연금술 종탑과 함께 당연히 하얀 별의 수중에 있었고, 서대륙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더불어 불굴 연합으로 하얀 별과 엮인 북부의 3왕국은 클로페 세카가 하얀 별에게 패배함으로써 그에게 굴복 중이었다. 클로페 세카는 감금 상태라고 하였다.
‘정글은-.’
정글의 왕은 현재 리타나가 아니다.
리타나는 전대 왕으로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대신 하얀 별의 수족인 주술사가 왕으로 자리매김해 있었다.
발렌티노 왕세자의 카로 왕국, 로잘린의 아버지가 다스리는 브렉 왕국, 툰카 대장군이 있는 위퍼 왕국. 마지막으로 로운 왕국까지.
이들도 현재 표면적으로는 하얀 별에게 수그린 상태였다.
서대륙의 중심과 남부, 북부가 하얀 별의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도련님.’
시종 론은 인자함을 얼굴에서 지우고 드물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길 확률이 높지 않습니다. 세력을 모으는 것부터 힘들 겁니다.’
케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필요 없어.”
케일은 세력 판도를 떠올렸다.
서대륙의 정글, 위퍼, 북부… 동대륙의 용병 길드, 몰란 가문…….
“일단 대가리만 잡으면 돼.”
하얀 별.
그놈을 현재의 내가 못 잡는다?
‘그럴 리가 없잖아.’
한 번 잡은 놈인데, 또 못 잡을 리가.
그리고 봉인된 신.
그놈은 앞으로 잡아야 할 놈이니, 이참에 한번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잡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라온.”
“왜 그러나, 인간?”
신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마차 내부를 둘러보던 케일은 라온에게 부탁했다.
“동료들에게 연락해.”
라온, 온, 홍의 표정이 달라졌다. 반짝이는 눈동자의 기대감에 응하듯 케일은 나직이 말했다.
“구경 오라고.”
“알았다, 인간!”
촤르륵.
남은 하나의 창문마저 커튼이 쳐졌고, 케일의 영상통신구가 쉴 새 없이 반짝였다.
* * *
“누나. 갈 거지?”
“가야지.”
로잘린은 낡은 로브 자락을 단단히 여미며 답했다. 라크는 사람 하나 없는 숲임에도 연신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나도 가고 싶어.”
“그래.”
로잘린은 꺼진 영상통신구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도망자 로잘린과 라크.
다음 대 마탑주로 기대받던 로잘린은 연금술 종탑과 같은 신세가 되기 싫다며 도망쳤고, 라크는 제물로 선택되었으나 이를 거부하며 도망쳐 현재 수배 상태였다.
“형.”
라크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자.”
그 순간, 숲의 나무들이 들썩이듯 일렁이며 메스를 시작으로 늑대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에게 버림받은 종족이라 일컬어지는 늑대족. 가장 많은 비율이 제물로 선택되어졌고, 그렇기에 가장 많이 도망친 종족이었다.
늑대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로 왕국에 위치한 사막. 죽음의 땅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 하하. 구경 오라고?”
온몸이 거미줄처럼 검은 선으로 뒤덮였고 그만큼 많은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몸의 주인 소드 마스터 하나. 아니, 성자 잭의 유일한 핏줄인 동생 하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갈 거죠?”
그녀에게 묻는 이는 넓은 품의 신관복을 펄럭이며 먼지를 털어냈다.
“가야죠.”
“오랜만이네요. 퍼슬시는.”
파문된 신관 케이지. 그녀는 영지에 남은 테일러와 떨어진 채 용병으로 활동 중이었다. 원 역사대로 그녀는 저주술을 주로 쓰며 현재 하얀 별 측에서 수배 중이었다.
용병대 대장이 된 케이지는 자신의 대원들에게 눈짓했고, 선두에 선 하나를 중심으로 용병대는 신속하게 사막을 벗어나 한 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뒤.
“도착했군.”
케일의 호화로운 제물 운송 행렬이 퍼슬시로 들어섰다.
수많은 인간들의 바람이 모여 만든, 셀 수 없이 많은 돌탑으로 유명했던 퍼슬시.
그곳에는 더 이상 돌탑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퍼슬시의 중심에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거대한 5층짜리 신전이 태양 아래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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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네.”
마차에서 내려선 케일에게 사예르가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케일 님, 감상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제일 늦었어요.”
사예르는 짜증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지만 케일을 향해 화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헤니투스 영지에서 퍼슬시로 오는 길. 그동안 제물 운송 행렬은 귀빈을 모시는 것과 같은 일정으로 스케줄이 운영되었다.
신관 측에서 서두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마차를 비롯한 모든 것이 헤니투스 공작가의 것이었으니까.
케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답했다.
“어쩔 수 없죠. 하얀 별님께 바칠 제물인데,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해줘야지. 안 그래요?”
“하!”
사예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 뒤돌아서 버렸다. 그 등에 대고 케일이 뭐 저리 까탈스럽냐는 듯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늦은 것도 아니구만. 거참, 까탈스럽네.”
“뭐라고 했습니까?”
사예르가 돌아보았고 케일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기부해드려요?”
“하!”
아주 질렸다는 얼굴로 사예르는 케일에게서 돌아서며 제물들이 있는 마차로 다가가 힐스만 부단장에게 말했다.
“당장 제물들을 ‘하얀 하늘’로 옮기세요!”
부단장은 대답 대신 케일을 쳐다보았다. 사예르가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답 안 하십니까?”
“음. 죄송합니다. 제 상관은 공자님이라, 그리고 전반적인 운송 업무 및 제물의 안전은 공자님 담당이시잖습니까?”
이런 식이었다.
사예르는 여기 오는 내내 이렇게 뭐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원래라면 사예르의 말에 다들 기가 죽어야 했으나 케일 헤니투스 때문인지 기가 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왜냐고?
“부단장! 당연히 제물들을 얼른 옮겨야지!”
케일 헤니투스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안전하게! 상처 하나 없이! 알지?”
“압니다. 귀한 제물이니까요.”
“그렇지. 아, 나도 가야겠어. 내가 운송 총괄자인데, 끝까지 지켜봐야지. 신관님, 그렇지 않습니까?”
케일 헤니투스는 정말 일을 열심히 했다.
사예르나 신관 측의 말에 따로 반박도 하지 않았고, 나름 합당한 논리에 맞춰 일을 진행했다.
케일은 제물들이 있는 고급 마차 행렬로 다가가며 사예르 옆에서 말을 건넸다.
“다른 몇몇 사람들은 그냥 수하들에게 대충 옮기라고 지시하고 그 뒤에 제물들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도 하지 않는다면서요? 어휴. 정성이 부족해, 정성이!”
그놈의 정성.
사예르는 정성이라는 단어에 이제 넌더리가 났다. 그는 이제 깨달았다.
‘이제 이딴 식으로 반항을 하는군.’
사예르 자신을 멕이고 있음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짜증은 났지만 한편으로는 비웃음을 삼켜야 했다.
‘그래. 이제 주군께 덤비지 못하니 이딴 식으로 중간중간 어깃장을 놓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겠지.’
케일 헤니투스는 사예르나 신관들 성질을 건드렸지만, 결국 제물들을 잘 운반해 왔다. 결국 하얀 별에게 굴복했다고 보아야 맞았다.
‘이 소식을 들으면 주군께서도 꽤 즐거워하겠군.’
사예르는 하얀 하늘로 헤니투스 영지 제물들이 옮겨지는 것을 보며 슬쩍 미소를 그렸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케일의 눈동자가 곳곳의 제물들을 보관하는 구원소를 샅샅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얀 하늘이라.’
굳은 얼굴로 제물들을 하얀 하늘로 이동시키는 힐스만 부단장. 그 뒤를 따라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케일은 하얀 하늘로 명명된 건물을 훑어보았다.
절망에 빠진 제물들이 절망을 벗어던지고 하늘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땅에 머무르는 장소.
하얀 하늘.
이 건물은 지상 1층에 지하 3층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신전 바로 옆에 자리했고.’
퍼슬시 중앙에 있는 5층짜리 대리석의 화려한 신전.
그 신전에서 조금 떨어진 검은 건물이 하얀 하늘이었다.
제물들은 이 건물의 지하에 머물며 제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빛 하나 없는 지하, 땅속에서 그저 갇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음. 명단이 다 맞군요.”
하얀 하늘 건물 1층. 서류를 들춰보던 신관은 힐스만 부단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일한 지상층은 마치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한쪽에 자리한 긴 통로로 여러 제물들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케일은 통로 끝을 슬쩍 보았다. 어두워서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로 통하는 유일한 출입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얀 별의 가까운 수족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오호. 케일 공자 왔네?”
긴 통로의 출입구 앞.
사자족 왕 도르프. 그놈이 의자에 앉아서 케일을 향해 나른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광폭화를 하지 않은 상태로 사자족치고는 왜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어둠의 정령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는 케일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제물들 가지고 오느라 수고했다.”
케일 역시 웃으며 답했다.
“그래. 고생했지.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데려왔는데.”
“푸하! 그래, 그래! 지금 이런 모습 참 보기 좋아!”
도르프는 헤니투스 영지의 제물들을 훑어보더니 케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속삭였다.
“용 새끼는 안 데리고 왔나?”
케일의 눈동자가 도르프에게로 향했다. 도르프는 씨익 미소를 그렸다.
“투명화해서 여기 왔으면 좋았을 건데.”
꽈악. 케일의 어깨를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랬으면 불순한 의도로 보고, 네 용 새끼를 제물로 바칠 수 있었을 건데 말이지.”
피식. 케일은 웃음을 흘렸다.
“라온은 지금 마차에 있어.”
평균 10살은 정말로 모두 마차에 있었다.
툭툭. 도르프는 기껍다는 얼굴로 케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손의 힘은 어느새 풀었다.
“잘 생각했어. 괜한 시빗거리를 만들면 너만 손해지. 훌륭해.”
케일은 말하며 생각했다.
“네 말대로 손해를 볼 순 없지.”
이 새끼, 너는 죽었다.
라온을 제물로 바쳐? 네 그 미친 주둥이. 내일은 과연 제대로 쓸 수 있을까?
“그런데 케일 공자.”
도르프는 케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최한 경은 안 보이네?”
“걔는 안 왔어.”
호오. 나직한 감탄을 하며 도르프는 케일을 빤히 바라봤고, 케일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하얀 별님을 섬길 준비가 덜 되었거든. 그래서 현재 기도 중이지.”
기도는 얼어 죽을.
하얀 별을 족칠 준비가 덜 되어서 그거 마무리하러 갔지.
“푸하하하하하!”
도르프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케일 헤니투스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정말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러고는 1층에서 또 다른 신관에게 제물을 인계하고 있는 이를 향해 말했다.
“테일러 후작! 자네도 케일 공자를 좀 보고 배우지 그러나?”
케일의 시선이 1층 한 곳으로 움직였다. 그곳엔 테일러 스텐. 다행히 이곳에서도 후작이 된 그가 신관이 건네는 서류에 사인을 하기 위해 깃펜을 꺼내 들고 있었다.
신관은 생글생글 웃으며 테일러에게 말했다.
“후작님 얼른 서명해주셔야, 후작님도 숙소에 가서 쉬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명 안 해주시면 제물 운송도 완료했다고 볼 수가 없어요.”
깃펜을 쥔 테일러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그가 서명을 하면 스텐 영지의 제물들은 중앙 신전의 소속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신관은 조금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채근했다.
“다 아시면서, 매번 왜 이렇게 꾸물대세요? 그냥 쉽게 쉽게 가요. 네?”
어느 누가 후작에게 이렇게 굴 수 있을까?
하지만 중앙 신전의 신관들과 몇몇 이들은 그럴 수 있었다. 하얀 별의 직속이었으니까.
“후우.”
테일러는 숨을 깊게 내쉬며 깃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공자님. 인계를 끝냈습니다.”
“헤니투스 공자님, 서명 부탁드립니다.”
힐스만 부단장이 케일의 곁으로 다가왔고, 뒤따라온 신관이 깃펜을 건네며 서류를 들이밀었다.
“흐흐흐.”
이 광경이 즐겁다는 듯 도르프는 웃음을 꾹 참으며 케일과 테일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테일러는 저도 모르게 케일에게 시선을 주었다.
케일의 손이 움직였다.
“…서명 감사합니다.”
신관이 놀랄 정도로 케일은 망설임 없이 빠르게 서명을 끝내버렸다.
잠시 1층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두 향했다.
케일과 테일러를 제외하고도 현재 이곳에는 대륙 각지에서 온 제물 운송 책임자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모두 각기 다른 눈빛으로 케일을 바라봤다.
놀라움, 비웃음, 호의, 동질감. 혹은 멸시와 배신감.
“후작님.”
그 순간, 테일러는 케일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깃펜을 쥔 손을 거침없이 움직였다.
서명을 순식간에 남긴 테일러는 곧장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공자.”
그는 케일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의 다른 말 없이 그저 날카로운 눈동자가 케일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크크큭. 테일러 후작. 자네도 케일 공자처럼만 해.”
도르프가 테일러에게 말을 건넸고, 그제야 테일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케일을 스쳐 지나가며 차갑게 말했다.
“좋은 구경이군요.”
푸하하하-!
도르프는 흥겹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정말 좋은 구경을 했어! 어이, 우바르 영애!”
그는 1층 구석 우바르 영지의 대표로 온 아미르 우바르에게 소리쳤다.
“그쪽도 얼른 서명하지? 존경하던 케일 헤니투스도 했는데.”
아미르는 케일을 노려보던 시선을 돌려 서명을 해나갔다.
도르프는 이를 유쾌하게 보던 중 케일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없이 가볍고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럼 나는 이제 쉬어도 되는 건가?”
케일은 신관에게 태연히 물었고, 신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웃음 안에는 비웃음과 약간의 호의가 섞여 있었다.
하얀 별에 저항하던 최후의 인물에 대한 비웃음과 이제는 한편이라는 것에 대한 호의였다.
“그럼요. 특별히 좋은 숙소를 배정해두었으니, 푹 쉬시고 축제를 보고 가시면 될 겁니다.”
축제.
제물들을 하얀 별에게 바치는 과정.
그것을 축제라고 했다.
케일은 입을 열었다.
“축제도 벌써 50회인가?”
“그렇죠. 50회라 특별히 더 성대하게 준비했습니다.”
중앙 신전이 제대로 자리 잡은 지가 1년이 지났다고 했다.
그사이에 이루어진 축제가 49회이며 이제 50회다.
그동안 제물로 죽은 이들이 참으로 많았다.
“구경 다 하고 가야겠군.”
케일은 씨익 웃으며 답하고는 하얀 하늘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가 떠나기 전 아미르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테일러 스텐, 아미르 우바르.
그 외에도 에릭 휠스만, 길버트 체터 등등.
각 영지의 대표로 운송 업무를 맡은 이들이 속속들이 중앙 신전으로 모여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대륙 곳곳에서 모여든다.
그는 평균 10살이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다시 올라타며 중얼거렸다.
“하얀 별이 머리를 꽤 썼어.”
하얀 별은 퍼슬시 중앙신전에서 펼치는 이 축제에 각 영지의 제물 운송 책임자를 오게 해서 축제가 끝날 때까지 모두 보고 가게 했다.
공포를 심어주고 동시에 스스로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리라.
더불어 누가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점검의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유력 인사들을 참 많이 불러들였다.
“덕분에 쉽게 되겠어.”
케일은 이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는 상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를 스쳐 지나간 테일러 스텐. 그가 주머니에 넣어둔 쪽지를 펼쳐 들었다.
케일은 라온에게 부탁했었다.
동료들에게 구경 오라고 전해달라고.
그에 응답한 동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중앙신전과 하얀 하늘 건물에서 조금 더 떨어진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의 건물.
케일을 태운 마차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이 인질이나 다름없는 유력 인물들의 숙소였다.
“라온.”
“왜 그러나, 인간?”
온, 홍과 함께 마차 안에서 바쁘게 보냈던 라온이 케일의 부름에 옆으로 다가왔다. 덩달아 온, 홍도 다가왔고 케일은 눈이 마주친 온에게 창밖을 가리켰다.
“저 돌벽.”
5층짜리의 중앙 신전. 그곳을 빙 둘러싼 벽이 있었다. 담처럼, 혹은 성벽처럼 견고하게 쌓인 벽은 신전을 외부로부터 막아섬과 동시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신전의 위상을 잘 보여주었다.
“저 돌벽에 쓰인 돌멩이들이 전부 퍼슬시 돌탑들이라고 했던가?”
“맞는데. 퍼슬시 사람들에게 시켜서 하얀 별이 만든 건데.”
어느새 하얀 별님이라는 단어는 집어치운 평균 10살이었다.
“맞다! 하얀 별이 퍼슬시 사람들한테 돌탑을 무너뜨리게 하고는, 그 돌들로 자신을 보호할 담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손수 옮겨서 만든, 그래서 더 촘촘한 돌벽.
5층 중앙 신전에 비하면 1층 높이의 돌담이어서 실질적으로 신전을 모두 보호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만들어진 과정이 주는 의미가 꽤 컸다.
하얀 별에 대한 굴복 혹은 존경의 상징.
“흐음.”
“인간, 다 알면서 왜 물었나?”
“그냥.”
케일은 이제는 하나의 담이 되어버린 수없이 많은 돌멩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거 쓸 만하겠는데.”
-맞다. 쓸 만해.
케일과 짱돌. 둘이 동시에 돌탑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숙소에 도착한 케일은 론에게 물었다.
“축제가 이틀 뒤던가?”
“네.”
론이 한 가지 소식을 더 전했다.
“방금 신전에서 온 소식인데, 알베르 왕세자께서도 이번 축제에 축사를 맡아서 하시겠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 결정된 사항이라고 하더군요.”
케일은 테라스 창밖으로 보이는 신전 돌담을 보며 짱돌에게 물었다.
“부술까?”
-좋다.
짱돌은 덧붙였다.
-축제는 망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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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웅- 둥- 두웅-
조금씩 어둠이 사라지며 해가 떠오르는 이른 아침. 퍼슬시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흔한 새의 지저귐 하나 없이. 오로지, 퍼슬시 전체를 뒤덮을 것처럼 크게 두드려지는 북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인간아! 일어나라! 북 친다!”
“오늘인데! 오늘, 그 날인데!”
오늘은 50번째 축제, 제물을 바치는 날이었다.
“커억.”
케일은 숨이 순간 막혀왔다. 그는 밭은 숨을 내뱉으며 간신히 중얼거렸다.
“바, 발 내려.”
이 녀석들이!
평균 10살. 평균 9세 때보다 한층 더 살이 찐 애들 셋이 케일의 배를 꾹꾹 눌러댔다.
“허억, 헉.”
죽는 줄 알았다.
“에이그. 인간은 참 약하다!”
“약해도 괜찮은데.”
“…좀… 이해는 가는데.”
라온, 홍, 온이 차례대로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어댔다. 케일은 라온과 홍은 그렇다 하더라도 온까지 그럴 줄은 몰랐기에, 조금은 배신감을 담아 온을 바라봤다.
온은 앞발을 들어 시계를 가리켰다.
“곧 신전 갈 시간인데.”
두웅- 둥- 둥-
북소리를 들으며 케일은 시계를 응시했다.
정오부터 시작되는 축제.
그 준비는 이른 아침부터 이미 진행 중이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종 론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도련님, 채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론은 엉망으로 머리가 헤집어진, 추레한 몰골의 케일을 쳐다보며 살짝 인자한 척하는 미소 사이로 서늘한 눈빛이 피어올랐다.
“음.”
케일은 레모네이드를 집어 들며 재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괜히 투덜거렸다.
“참, 쓸데없이 아침부터 오라 가라야.”
케일을 비롯하여 현재 이 숙소에 머무는 사람들.
각 나라와 영지에서 제물 운송 책임자로 오거나 혹은 중앙신전의 초대를 가장한 협박을 받아온 유명 인사들. 모두 강제 축제 관람을 해야 했다.
그들에겐 이른 아침부터 무의미한 일정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리고 이 일정을 모두 같이 수행해야 했다.
“길들이기죠.”
맞다. 론의 말대로 이 일정은 중앙신전과 하얀 별이 펼치는 길들이기였다.
케일의 미간이 그의 성질머리만큼 구겨졌다.
“쯧. 귀찮게.”
* * *
케일은 그 귀찮은 일을 하러 결국 중앙신전으로 왔다.
물론 혼자였다.
론, 라온. 그 어느 누구도 데리고 이곳에 올 수 없었다.
현재 그가 있는 장소는 중앙 신전 3층으로, 신전을 둘러싼 돌벽으로 인해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1, 2층과 달리 밖이 아주 잘 보였다.
퍼슬시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였다.
이곳으로 케일을 비롯한 강제 축제 관람자들을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제단이군.’
중앙 신전을 둘러싼 돌벽 밖.
과거 광장이었던 만큼 넓은 터에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곳에서 제물이 죽는다.
자그마치 이천여 명에 달하는 생명이 저 자리에서 오늘 죽는다.
그것을 보라고, 겁을 주려고 이른 아침부터 불러댔다.
“로운 왕국 헤니투스 영지의 케일 헤니투스 공자님?”
케일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밖을 보던 시선을 돌렸다.
“음. 오셨네요. 인원 확인되셨습니다.”
신관이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케일 뒤에 줄을 선 사람에게로 향했다.
“브렉 왕국 펜 왕자님?”
“왜?”
“왜긴요. 결국 오셨네요. 인원 확인되었습니다.”
케일은 로잘린의 동생이 불퉁하게 답하는 것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대륙 전체에서 불러모아 그 숫자는 수백여 명에 달했다.
“음.”
“크흠.”
케일과 시선을 마주친 이들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곳곳에서 케일을 힐끗거리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저 사람이 여길 왔다고?’
다들 이런 놀람을 보인 뒤, 호기심, 경멸, 실망, 비탄을 뒤이어 드러냈다.
“사예르 님. 인원 확인 끝났습니다.”
“그래?”
제일 앞쪽. 모인 인원들과 마주 보고 서 있던 곰족 왕 사예르는 신관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축제 시작은 정오부터이니, 이곳에서 대기하시다가 시간에 맞춰 함께 이동하시면 됩니다.”
제단이 준비되어 완성되는 전 과정을 지켜보란 말이었다.
“참고로 곳곳에 신관들이 대기 중이오니, 불편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시면 되고.”
즉, 신관들이 곳곳에서 감시하고 있을 테니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란 소리였다.
“의자와 다과는 준비해드릴 겁니다. 꽤 좋은 대접이죠?”
싱긋 웃어 보인 사예르는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아,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하얀 별님께서 몇 분은 축제 시작 전에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차를 한잔 마시고 싶다시더군요.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겠죠?”
중앙 신전 5층. 그곳에 하얀 별이 있다.
축제가 시작되는 정오. 그때 하얀 별은 제단 앞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영광스럽긴, 얼어 죽을.’
케일은 속내와 달리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다만 그 얼굴이 다른 이들에게는 서늘해 보일 뿐.
힐끗 케일을 훔쳐본 사예르가 이내 즐겁게 입을 열었다.
“알베르 크로스만 왕세자 저하.”
케일의 시선이 무리의 앞쪽으로 향했다.
모인 사람들 중 중간 뒤쪽에 위치한 케일과 달리 축사를 맡은 알베르는 제일 앞줄에 있었다.
“하얀 별님과의 다과 시간. 좋으시죠?”
“…좋지.”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사예르가 제 옆을 가리켰고, 알베르는 그 옆으로 가 섰다.
비로소 케일은 이 환상 속에서 실제로 알베르의 얼굴을 마주했다.
알베르 크로스만은 숙소에 머물고 있던 케일을 찾아오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지금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떠한 눈짓도 인사도 안 건넸다.
‘꼴이 말이 아니군.’
무표정한 얼굴로 케일은 알베르의 행색을 살폈다.
영상통신구로 보았던 피곤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실제로 마주하니 상당히 살이 빠져 수척한 상태였다.
“이런, 왕세자 저하.”
사예르가 서글프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절망 기도가 힘드신가 봅니다. 어째 나날이 수척해지시는군요. 으음. 하얀 별님께 한 말씀 드려보는 건 어떨까요? 이제 그만 기도하게 해달라고요. 대신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요. 어떻습니까?”
“…괜찮네. 기도는 해야지.”
“훌륭하십니다. 아주 믿음이 강하세요.”
사예르는 웃었고 알베르는 표정 변화 없이 그저 앞만 바라봤다.
‘저 새끼가.’
케일은 슬슬 성질머리가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자, 다음은 카로 왕국의 발렌티노 왕세자 저하. 그리고 브렉 왕국의 왕자님도 나오시고.”
사예르는 거침없이 하얀 별과 긴밀히 만날 인원을 뽑았다.
“다들 웃으세요, 웃으셔야지. 하얀 별님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는 흔치 않아요.”
사예르는 옆에 불러 세운 이들에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자, 마지막. 케일 헤니투스 공자님.”
순간, 조용하던 공간이 더 고요해졌다.
사예르는 예의 있게 명령했다.
“나오세요.”
몇몇 사람들은 케일을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하얀 별과 직접적으로 부딪쳤던 이들의 중심이 케일 헤니투스가 아니었던가.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그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안 나오십니까.”
케일은 가만히 정면만 응시했다.
타닥. 타닥.
사예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케일의 앞에 멈춰서며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그에게 말했다.
“공자, 앞으로 안 나오나요?”
사예르는 언제 즐겁게 웃고 있었냐는 듯 그 얼굴이 서늘하게 변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곰족 왕은 저를 쳐다보지 않는 이를 나직이 불렀다.
“케일 헤니투스.”
앞만 보던 이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사예르 신관님.”
케일의 담담한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가로질렀다. 크지 않았지만 고요함 속의 모두에게 정확히 들렸다.
“나는 할 만큼 했습니다.”
케일은 사예르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더 하라고?”
이제 케일은 아예 몸을 틀어 사예르 쪽을 향했다.
한 발자국. 그는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사예르의 얼굴 쪽으로 제 눈을 들이밀었다. 사예르는 일그러진 눈을 볼 수 있었다.
“…이만큼 수그렸으면 된 것 아닌가?”
그 눈 안에는 분노와 짜증을 비롯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했다. 사예르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읽힐 만큼.
패배한 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천천히, 숨을 내쉬듯 말했다.
“나한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는 마. 이게 내 한계니까.”
그리고 다시 케일은 한 발자국 물러서서 정면을 응시하며 사예르를 외면했다.
“…하.”
사예르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몇몇 사람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케일 헤니투스. 그가 제물 운송 업무를 치르러 퍼슬시에 왔다.
거기다가 제물을 바치는 축제도 관람한다. 그 모든 과정에 별다른 반발이 없었고 오히려 호의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몇몇 사람들은 케일 헤니투스가 미쳐버렸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깨달았다.
겉으로 태연한 척하고 있어도, 웃고 있어도.
이 패배자는 지금 한계까지 참고 있다는 것을.
“하, 하하-”
사예르는 이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제야 그는 케일 헤니투스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 케일 헤니투스지.’
그간 운송 업무를 해온 게 이상했던 거다.
그는 감히 하얀 별의 명령을 불복하는 케일 헤니투스를 보며 도리어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다.
“뭐, 한계라고 말씀하시니, 이번만큼은 이해해드리죠. 제가 하얀 별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툭. 사예르의 손이 케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다음은 없습니다.”
사예르의 차가운 눈동자가 케일을 노려보았다. 그는 절대로 저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 패배자에게,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경고했다.
“다음번 제물은 누가 될지. 그것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요.”
미련 없이 케일에게서 등을 돌린 사예르는 다과 시간을 가질 이들을 데리고 3층을 벗어나 5층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케일은 어느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른 감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어휴, 살았네.’
케일은 속으로 안도했다.
‘멀리 떨어져 있다면 몰라도, 혹시 하얀 별이랑 가까워지면 내 상태를 들킬 수도 있어.’
이 환상 속 세상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케일은 하얀 별과 자잘하게 꽤 많이 부딪쳤다.
그러니 지금 ‘방패’를 들키지 않으려면 최소한 하얀 별과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나았다.
‘잘못하다 엎어버리기 전에 들키면 곤란하지.’
케일은 잘 빠져나왔다 생각하며 신관이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았다.
사예르가 사라지고 조금은 소란스러워진 주변 소리들 사이로 케일은 몇몇 말들이 들려왔다.
“쯧. 케일 헤니투스도 다 죽었군.”
“살아남으려면 아예 푹 수그리던가. 어정쩡하긴.”
“…망했네.”
케일은 아무 말 없이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두웅- 둥둥- 두웅-
정오가 되었다.
케일은 북소리와 함께 제단 가장 위 의자에 앉는 이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별.
코 위를 가린 하얀 반 가면을 쓴 그놈이 하얀 대리석으로 된 의자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와아아아아—
제단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 퍼슬 시민과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강제 관람 초대를 받은 이들은 그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중심에서 하얀 별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일부러 이런 배치였으며, 환호하는 이들과 강제 관람객을 구분하는 선이 관람객들 주변으로 있었다. 또한 나름의 배려라며, 케일을 비롯한 이들에게는 의자까지 주어졌다.
그렇기에 의자에 앉으면 환호하는 이들과 제단 위의 하얀 별만이 보였다.
아마 제단 위로 제물들이 올라서면 제물들도 보일 터.
케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 중에는 어쩔 수 없이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하얀 별과 절망신의 추종자들도 상당하였다.
케일은 그 환호에서 퍼져나오는 열기를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하얀 별이 보였다.
그 순간.
‘음.’
하얀 별이 케일 쪽을 바라봤다.
착각할 법도 했지만, 분명 하얀 별은 케일을 응시하고 있었다.
케일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하얀 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식.
하얀 별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케일을 명백히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그 때문이었다.
‘아, 쫄았네.’
케일은 안도했다.
‘안 들켰어.’
그는 방패를 들킬까 봐, 그의 현 상태를 들킬까 봐 상당히 조마조마했었다.
다행히도 거리가 멀어 하얀 별은 케일의 상태를 못 알아챈 듯했다.
어찌 아냐고?
하얀 별의 그 눈동자는 분명 케일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별다른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거슬리는 벌레를 보듯. 딱 그 정도의 눈빛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케일에게는 호재였다.
“지금부터 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케일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몸을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케일 공자.”
옆에 있던 로잘린의 동생 펜 왕자가 케일이 걱정되었던 듯 말을 건네 왔지만. 케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더욱더 고개를 숙였다.
이를 하얀 별이 한 번 더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완전히 케일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 와중에도 행사는 진행되었다.
둥. 둥- 둥-
북소리와 함께 퍼슬시 동서남북 각각의 방위에서 각기 다른 전투복 차림의 인원들이 깃발을 든 선두를 따라 신전을 향해 전진했다.
현 동서대륙 최강의 무력임을 과시하는 퍼포먼스였다.
케일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때, 사예르가 멋들어진 목소리로 외쳤다.
“알베르 크로스만 왕세자 저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와아아아아—-
둥, 둥, 두둥-
환호성과 북소리가 뒤섞이며 주변이 들썩였다.
정오.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른 때.
“후우.”
알베르는 천천히 단상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발을 올렸다.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이 참 높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제단 위에 올라서서 모든 이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오로지 하얀 별. 알베르의 등 뒤 제단의 더 높은 곳에 위치한 하얀 별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음.”
알베르의 눈에 고개 숙인 케일이 담겼다. 낙심한 듯 의자에 파묻혀 기대고 있는 그를 본 순간.
알베르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는 축사를 쓴 종이를 펼쳐 들었다. 당연히 그가 아닌 중앙 신전에서 준비한 축사였다.
그는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를 함께할 수 있어-”
그때, 알베르는 보았다.
케일이 얼굴을 가리던 두 손을 내리는 것을.
그 손 아래 드러난 얼굴이 웃고 있다는 것을.
‘결국.’
알베르는 생각했다.
‘결국 일을 벌리는구나.’
왕세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케일이 손을 들었다.
쿠구구구궁-
커다란 진동이 울려 퍼지며 일순간 땅이 흔들렸다.
알베르는 뒤돌아섰다.
진동이 시작되는 곳.
그곳은 중앙신전을 지키고 있는 돌벽이었다.
돌벽이 흔들렸다.
-케일, 다 엎으면 되지?
짱돌이 물었고,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좋다. 마지막 시험이니, 제대로 해보마.
북소리가 끊겼다.
환호성이 멈췄다.
대신에 굉음이 퍼슬시를 뒤흔들었다.
콰아아아—-!
돌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쪼개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갑자기 무슨-!”
곰족 왕 사예르는 그 광경을 보고 놀랐다가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까악. 까악. 까악.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져 왔다.
곰족은 저 울음소리를 만들어내는 인물을 알고 있었다.
“…가샨……!”
호랑이족 주술사 가샨.
그는 까마귀를 다룰 줄 알았다.
동대륙에서 터전을 빼앗긴 채, 제대로 승리해보지 못하고 도망만 치다가 결국 숨어버린 종족.
호랑이족.
그들은 어둠의 숲에서 숨죽인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호족을 이끌고 선두에서 퍼슬시 성벽을 넘어서는 이가 있었다.
최한. 그가 검은 오러를 휘감은 채 성벽을 넘어섰다.
“케일 님.”
최한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바람을 담아 만들었던 돌탑을 부수어 만든 돌벽.
중앙신전을 외부와 분리시키며 이를 보호하는 방벽이 되었던 돌담.
그것은 이제 사라졌다.
대신 수천, 아니, 수만 개의 돌멩이가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마치 태양의 빛을 가리려는 듯.
마치 하늘을 뒤덮으려는 듯.
퍼슬시 하늘을 돌멩이가 뒤덮어 나갔다.
케일은 의자에 편히 기대앉은 채로 웃고 있었다.
#
153장. 이런 거였구나, 재밌네.
사람들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돌…….”
“이게, 무슨-”
하늘을 가득 메우는 돌멩이들. 무너진 담.
그리고 이곳으로 다가오는 최한과 호족. 들려오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모두 깨달은 순간, 환호를 지르던 이들의 입이 저마다 열렸다.
“도, 도망쳐야 돼!”
“제길!”
“으, 으아아아!”
퍼슬 시민들은 마치 악몽을 꾸는 사람들처럼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감히, 감히 신성한 축제를 막는 자가 있다니!”
반대로 자리를 지키며 분노를 토해내는 자들이 있었다.
“저건 악의 기사 최한! 결국 케일 헤니투스가 미친 짓을 했구나!”
“죽여라! 죽여서 하얀 별님의 축제를 지켜내자!”
하얀 별의 추종자. 그들은 하늘을 뒤덮어가는 돌멩이들을 노려보며 관중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에 케일을 포함한 하얀 별에게 초대받은 이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초대받은 이들도 상황을 깨달았다.
“미, 미친!”
“죽으려면 혼자 죽던가!”
몇몇 이들은 고개를 돌려 케일 헤니투스를 쳐다보았다.
“흐.”
의자에 앉아 웃고 있는 케일 헤니투스.
그는 여유롭게 저를 바라보는, 노려보는 이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채앵!
북부에서 온 이가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당장 멈춰라!”
그는 이 기회에 케일을 죽이겠다는 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검날은 다른 이에 의해 막혔다. 검사는 이를 갈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브렉 왕국……!”
로잘린의 동생. 브렉 왕국 철없는 4왕자 펜. 그가 검을 든 채로 검사를 막아섰다. 그는 케일의 옆에 자리했다.
“크윽!”
뒤로 밀려난 검사는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크크큭. 미친 것들!”
케일의 양옆에 로운 동북부의 귀족 아미르와 길버트가 자리했다. 에릭 휠스만의 가문이 저항을 하다 상당 부분의 힘을 잃어 세력이 줄어든 이후, 누구 하나 중심으로 나선 이가 없었던 동북부 귀족들은 하나둘 케일을 중심으로 뭉쳐 들었다.
“공자.”
테일러 스텐은 케일의 곁으로 다가왔다.
검사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그 광경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모고르 제국의 귀족 중 한 명은 미간을 찌푸린 채 외쳤다.
“어리석구나! 하얀 별님에게 반항하면 결국 죽음뿐인 것을!”
그는 사방을 가리켰다.
하얀 별의 추종자들이 가까이 다가와 케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케일에게 검을 겨누는 순간 저들이 함께 달려들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멈춰라! 그렇지 않다면 여기서 제물이 되는 것은 너희들-, 커억!”
귀족은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천천히 그의 고개가 뒤로 움직였다.
“…참모…장?”
위퍼 왕국의 툰카 대장군. 그의 최측근 수하인 헤롤 참모장. 그가 귀족 옆구리에서 단도를 빼내고는 나직이 말했다.
“구경만 하기엔 심심하군요.”
“그러니까 말일세.”
카로 왕국의 발렌티노 왕세자가 슬그머니 웃으며 케일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허! 어느새 이렇게 작당을!”
“미쳤어, 다들 미친 거야!”
“나는 작당하지 않았소!”
케일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기가 차다는 듯 멀어지는 사람들. 그리고 반대로 한 발짝씩 더 가까이 다가오는 추종자들.
“공자.”
케일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예르가 움직이는군요.”
스텐 후작가의 주인 테일러 스텐. 그가 제단 위의 사예르를 가리켰다.
스윽. 사예르가 손을 들어 올린 그 순간.
파아앗-!
환한 빛이 그의 손을 떠나 하늘로 솟구쳤다.
동시에 그는 명했다.
“움직여.”
두웅- 둥- 둥-
다시금 북소리가 퍼슬시를 진동시켰고, 동서남북 퍼슬시 각 방위에서 신전을 향해 다가오던 그 병력들이 새로운 목표물을 잡았다.
동서에서 왔던 이들은 최한과 호족들을 향해.
남에서 출발한 이들은 케일을 향해.
북에서 움직인 이들은 ‘하늘’ 건물. 제물을 향해.
움직였다.
수많은 이들이 갑자기 움직였다.
도망, 진압, 몰살. 각기 다른 목적으로 움직이는 광경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고. 퍼슬시는 혼란으로 뒤덮였다.
그때.
“그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제단 가장 높은 곳.
그곳에 앉아있던 하얀 별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케일을 응시했다.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그의 목소리는 희한하게도 바로 코앞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잘 들렸다.
이 또한 ‘완전한 하얀 별’이라서 가능한 일일까.
하얀 별은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를 알아야 하는 법인데.”
피식. 케일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내뱉었다.
“제일 구질구질하게 구는 새끼가 이런 말을 하니, 참 웃기네.”
현실 하얀 별을 떠올린 케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말이 들리지 않은 하얀 별은 일어서는 케일에게 나직이 달래듯 말했다.
“그만해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여기서 멈추면 모두 살려주마.”
하지만.
“커억.”
“으윽!”
펜 왕자는 풀썩 주저앉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미르 영애가 허리를 푹 숙이며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다.
“허억. 헉.”
테일러 스텐은 가슴께 옷자락을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테일러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제단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붉은 기운을 휘감은 하얀 가면을 쓴 남자.
그가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공포’가 느껴졌다.
아주 본질적인 공포. 죽음.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절로 일어나며 몸이 움츠러들고 떨려왔다.
까악- 까악-
하늘을 노닐던 까마귀가 비명을 지르듯 울음을 토해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털썩. 털썩.
추종자들은 그 공포에 순종하며 무릎을 꿇고 몸을 최대한 숙인 채 지배자를 경배하였다.
“우으으.”
“으아으으.”
그들은 공포에 짓눌려 제대로 말도 내뱉지 못했건만, 그 목소리에는 경외가 담겼다.
테일러처럼 그나마 훈련된 자들만이 이 상황에서 버텼다.
‘…빌어먹을!’
케일 헤니투스가 구경 오라고 했을 때.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는 했었다.
하얀 별의 저 공포를 이겨내기에는 테일러 자신은 너무나도 약했다.
타다닥!
유일하게 들려오는 뜀박질 소리에 테일러는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최한 경.
검은 기사는 저 공포에 버티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 저래서 희망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땅이 풍기는 공포, 내려다보는 하늘.
그 두 가지를 지닌 하얀 별을 이길 수 있지 않겠냐고.
버티다 보면 결국 이겨낼 수 있지 않겠냐고.
그 순간, 테일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투둑. 투둑.
하늘에 떠올라있던 돌멩이가 하나둘 떨어졌다.
케일 헤니투스의 돌멩이가 낙하했다.
“아.”
탄식과 함께 일순간 몸에 힘이 빠지며 그의 허리가 앞으로 숙여졌다.
‘아, 결국 안 되는 건가.’
떨어지는 돌멩이들이 테일러 자신의 처지를, 동료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냥 구경 오지도 말걸 그랬-,’
생각을 이어가던 테일러는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
그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허리를 숙인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누군가의 신발이 보였다.
굳건하게 땅에 디디고 있는, 전혀 힘겹지 않아 보이는 두 발.
“…공자?”
저 두 발의 주인은 케일 헤니투스였다.
‘어째서?’
그런데 어째서 그에게서 하얀 별과 똑같은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지?
테일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숙였던 허리에 힘을 주었다. 왠지 모르게 이제는 똑바로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대로 그는 허리를 완전히 바로 세웠고 그 시선 그대로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케일에게서 멀어졌다.
‘하얀 별과 똑같지 않아.’
다르다.
하얀 별의 공포와 다르다.
‘…압박감이 달라!’
하얀 별이 그저 공포를 다룬다면.
케일 공자는.
그는, 공포를 내리누르고 선 지배자 같았다.
케일의 주위를 붉은 기운이 휘감고 있었다.
하얀 별보다 더 시뻘건 붉은빛이었다.
최한은 달려 나가던 것을 멈추고 케일을 바라보았다.
“케일 님?”
그의 시선에 닿은 케일은 씨익 웃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여유롭게.
“완전한 하얀 별은 어떨까. 싸우기 전에 조금 궁금하기는 했었는데 말이야.”
케일은 저를 내려다보며 눈을 크게 뜬 하얀 별에게 즐겁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별것 아니겠어.”
그의 옷깃에는 배지가 달려있었다. 배지에 포용되어 있던 힘이 케일의 손아귀에 쥐였다.
‘피에 젖은 돌.’
이곳의 하얀 별이 공포를 불러일으켰던 그 힘을 케일도 가지고 있었다.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지금 이곳의 케일은 바깥에서의 케일. 현 상태 그대로의 케일이었다.
케일은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를 따라 주변에 공기가 일렁이며 붉은 기운이 출렁였다.
그를 감싼 기운.
‘지배하는 아우라.’
지배자는 공포에 휘감기지 않았다.
“…너-”
하얀 별은 제단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케일 헤니투스만을 향해 있었다.
“네가 어떻게 이 힘을-?”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놀람과 분노가 담겼다.
케일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야. 계속 이겨 와서 그런가 무게 잡을 줄 안다?”
갈수록 찌질해졌던, 내가 알던 그 하얀 별과는 확실히 다르네?
“재밌네.”
케일은 고개를 돌렸다.
알베르 크로스만. 아직 단상 위에 있던 그가 케일과 눈이 마주친 순간 황급히 몸을 내뺐다.
그리고 동시에.
우르르–
하늘 위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별이 벼락을 쓰려는 것일까. 테일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곧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는 케일의 돌멩이가 떨어진 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하늘 위를 덮은 돌멩이가 모두 떨어지지 않았다.
제단과 그 근처.
오로지 그곳에서만 돌멩이만 낙하했다.
제단과 하얀 별 위는 하늘이 뚫려있었다.
테일러는 케일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내뱉는 말을 들었다.
“시작해.”
그 순간, 하늘에서 적금빛 한 줄기가 하얀 별과 제단을 향해 내리쳐졌다.
그리고 제단.
콰아아아앙!
콰아아아—!
또 하나 더, 제물들이 있는 ‘하얀 하늘’. 그 건물에 폭발이 일어났다.
-인간아, 맡겨라!
라온의 씩씩한 목소리가 케일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냐아아옹.
냐아옹!
하얀 하늘. 그 건물을 자욱한 안개가 휘감기 시작했다.
그 안개 속으로 론, 비크로스. 그리고 사라졌던 헤니투스 가문의 고용인들. 몰란 가문의 최고 경력자들이 뛰어들었다.
그들의 목표는 제물 구출이었다.
휘이잉–
“공자!”
바람 소리에 테일러가 다급히 케일을 불렀다.
케일은 회오리바람을 발목에 매단 채 몸을 띄웠다. 그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공포를 머금은 지배의 기운이 해일처럼 그를 따라 움직였다.
“크윽!”
“어찌하여 하얀 별님의 힘이……!”
당황하는 병력, 경악하는 추종자들. 혼란스러운 상황을 지나쳐 케일은 제단으로 향했다.
적금빛 벼락이 제단을 덮치며 치솟아 오른 폭발 먼지 사이로, 케일은 손을 뻗었다.
“케일 헤니투스.”
그를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먼지 구름을 헤치고 하얀 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케일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시뻘겋게 타오르는 붉은 검이 들려있었다.
반면에 케일의 손에는 물이 반짝이며 만들어낸 창이 쥐어져 있었다.
콰아아앙-!
불과 물이, 하얀 별과 케일이 부딪친 그 순간.
“내려가자.”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겠어.”
숨죽여 지켜보던 이들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
콰아아아아–!
불 검과 물 창이 부딪치며 굉음을 토해냈다.
“크읍!”
“윽!”
하얀 별과 케일. 두 사람 모두 튕기듯 뒤로 밀려났다.
쿵!
케일의 등이 이름 모를 건물과 부딪쳤다. 다행히 바람을 일으켜 그 충격파가 크지는 않았지만 케일은 몸에 전해지는 충격에 미간을 찌푸렸다.
‘…장난 아닌데?’
케일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놀람이 스며들었다.
물, 불, 바람, 땅, 나무.
자연의 5대 속성을 모두 지닌 하얀 별은 그가 알던 하얀 별과 전혀 다른 존재였다.
‘생각보다 더 강하다.’
한번 부딪쳐보니 여실히 느껴졌다.
그가 알던 하얀 별보다 최소 두 배는 저 하얀 별이 더 강하다.
‘…두세 배 정도 더 강한 것 같군.’
이러니 이곳의 불완전한 케일은 하얀 별을 이길 수 없었으리라.
“하, 하하-”
케일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물로 만든 창은 진즉에 불의 검과 부딪치며 사라졌다.
‘손이 저리네.’
한 번 부딪친 것뿐인데, 손바닥이 잘게 떨려왔다.
‘그래, 완전한 하얀 별이라면. 어쩌면 이게 맞는 거지.’
케일은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일단 인간 자체로 보았을 때, 비실비실한 케일 헤니투스에 비해 하얀 별이 월등히 강했다.
그다음, 5대 속성 자연의 힘.
케일과 하얀 별의 것 모두 상당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 어느 누구의 것이 우위라 하기 힘들었다.
그 외의 고대의 힘은 일단 개수는 케일이 많았다. 하얀 별의 땅 힘도 사용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하얀 별에게는 ‘하늘’ 속성의 강한 고대의 힘이 존재했다.
‘쉽지 않은 상대.’
아니, 어려운 상대.
케일은 상대의 강함을 인정하며 건물 벽을 박찼다.
휘이잉- 바람과 함께 그의 몸이 하얀 별에게로 향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이는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놀란 것은 케일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완전해진 거지?”
하얀 별은 케일과 다시 한번 부딪치는 순간, 물음을 던졌다.
동시에 붉은 하나의 큰 돌과 무수한 돌멩이가 뭉쳐진 석창이 부딪쳤다.
콰아아앙–!
이번엔 돌들이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타닥. 탁. 케일과 하얀 별 모두 이제 바닥에 내려섰다. 제단은 이미 붉은 벼락에 타버려 검은 재만이 남았다.
그 위에 내려선 하얀 별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저렸다.
“나무를 얻었군.”
그가 판단을 끝냄과 동시에 한 사람이 더 판단을 내렸다.
“당장!”
알베르 크로스만. 그는 제단 한 편에서 축제 진행을 지켜보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관리의 멱살을 잡았다.
“크억, 저, 저하?”
하얀 별의 수족을 자처하는 관리였다.
허겁지겁 도망가던 그 관리를 붙잡은 알베르는 명령했다.
“당장, 성문을 열어!”
알베르 크로스만의 눈동자에 환희가 감돌았다.
케일 헤니투스가 하얀 별을 상대할 수 있다.
그놈이 고대의 힘 균형을 이뤘다.
“…역시, 역시!”
그 녀석은 허투루 움직이지 않지!
그는 영상통신구를 켰다. 그리고 지시했다.
“출정해라.”
퍼슬시 성에서 떨어진 숲에 대기하고 있을 마법 병단과 기사단. 패배 후 복구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그 수는 적을지언정 실력은 뛰어난 이들이었다.
“저하.”
그 순간, 알베르는 몸을 뒤틀며 몸을 굴렸다.
콰아앙!
그가 있던 자리에 한 줄기의 빛줄기가 꽂혔다. 치이익. 타는 소리와 함께 알베르가 서 있던 곳은 열기로 뒤덮였다.
“크윽. 사예르 신관!”
알베르는 곧바로 땅을 굴렀던 몸을 일으키며 빛 창을 날려 보낸 상대를 노려보았다.
“저하, 이런 깜찍한 짓을 하시면 안 되죠. 출정이라니요.”
사예르의 주위는 환한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죽고 싶습니까?”
동시에 그가 날린 빛 창들이 알베르에게로 쇄도했다.
“제길!”
알베르는 거친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랜만입니다, 알베르 크로스만 님.
태랑의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알베르는 손에 들린 하얀 창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사예르는 뒤로 튕겨져 나가는 알베르를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알베르 크로스만을 체포해라!”
어느덧 혼란이 가라앉은 병력이 움직였다. 검은 기사들이 알베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채앵! 챙!
하지만 그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이 있었다.
“저하를 지켜야 한다!”
테일러 스텐, 그는 스텐 후작가의 기사들을 대동한 채 알베르의 앞에 섰다. 몸을 일으키던 알베르와 테일러의 시선이 부딪쳤다.
말이 필요 없었다.
“나 먼저 가지.”
알베르는 가야 할 곳들이 있었다.
‘케일 헤니투스가 하얀 별을 잡아두는 동안, 인질들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퍼슬 시민들을 안전히 대피시켜야 한다.
마법 실드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은 무리였으니까.
“크억, 저하!”
알베르는 한쪽에 기어가고 있던 관리 멱살을 잡은 채 황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놓칠 순 없죠.”
사예르가 그 뒤를 웃으며 쫓으려 했다.
“…빌어먹을 새끼.”
하지만 그는 얼굴을 구긴 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넌 내가 처리한다.”
우우우—우우–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실제 짐승은 아니었다.
분노로 가득 찬 누군가의 감정이 담긴 오러의 격동이었다.
검은색과 금빛이 뒤섞인 오러. 그 오러의 주인은 후드를 벗었다.
소드 마스터 하나.
제물이 된 성자 잭의 유일한 가족이자 동생.
그녀가 사예르의 앞에 선 채로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울음을 토해내며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케이지!”
“오랜만이야.”
파문된 신관 케이지가 품이 넓은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그녀의 뒤로 용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쯧.”
사예르는 혀를 차며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하나와 케이지, 누구도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 순간, 옛 광장 바깥 부분에서부터 주택가와 상가로 이어지는 건물의 그림자들이 일렁였다.
암.
하얀 별의 세력 중 하나이자, 이제는 대륙 곳곳에 그림자로 스며들어 주요 인물들의 집과 일터를 감시하는 단체였다.
그러나 그 본질에는 암살이 늘 존재했다.
암은 알베르의 뒤를 쫓아갔다.
목표물 암살을 위해.
사예르는 그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 미친 것이!”
“그래, 미쳤다!”
폭발할 것 같은 오러가 휘몰아치며 사예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곰족 왕 사예르와 소드 마스터 하나가 충돌했다.
동시에 검은 기사단이 스텐 기사단, 케이지 용병대와 부딪쳤다.
그 찰나 케이지는 주위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콰아아앙—-!
콰아앙—!
어휴.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휘몰아치는 바람벽과 회오리바람. 그 사이로 불 검과 물 창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부딪치고 있었다.
하얀 별과 케일은 쉴 새 없이 서로를 향해 공격을 날렸다.
“…정말 장난 아니네.”
케이지는 품 넓은 소매 안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얼굴이 굳었다.
“나는 간다.”
“그래, 부탁한다.”
떠나는 그녀를 향해 테일러가 굳은 얼굴로 부탁해왔다.
“걱정 마.”
케이지는 곰족 왕과의 전투 현장을 벗어나 재빠르게 이동했다. 그녀는 최대한 몸을 숙이고 다른 이들을 피해 움직였다.
하얀 하늘.
제물들이 있는 그곳이 그녀의 목적지였다.
그리고 그녀처럼, 그곳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왜 이리 늦지?’
케일이었다.
그는 라온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어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 평균 10살, 몰란 가문, 그리고 제물 운송 업무를 맡았던 헤니투스 병력이 제물들이 있는 ‘하얀 하늘’을 습격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혼란스러워하는 적들을 틈타 제물들을 접선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가볼까?’
한번 그쪽으로 가봐야 하나?
케일은 고민이 들었지만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음!”
케일은 곧바로 허공에 있는 돌멩이들을 불러 모았다. 방패가 만들어졌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돌멩이 방패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 사이로 시뻘건 석창이 하얀 별의 손에 들린 채 케일을 향해 그 촉을 찔러왔다.
케일은 손을 휘둘렀다. 곧바로 물이 뻗어져 나와 창이 되어 그 석창을 후려쳤다.
“크윽!”
하얀 별이 이번에는 뒤로 물러서며 손을 털어댔다.
케일은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꽤 많이 맺혀 있었다.
‘틈이 없다.’
완전한 하얀 별.
이놈은 쉬이 틈을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케일도 틈을 보일 수 없었다.
그 틈이 둘 중 한 명의 목숨줄을 누구에게 쥐어줄 것인지 정할 테니까.
“빌어먹을.”
케일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온 순간, 하얀 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르르—우르르—
이전과는 다르게 하늘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전력을 다할 생각이군.’
하얀 별의 고대의 힘 중 가장 막강한 힘을 지닌 것.
하늘 속성 고대의 힘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케일이 하늘로 올려보낸 돌멩이들은 상당 부분 부서진 상태였다.
하늘을 막을 것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에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붉은 돌과 함께 하얀 별의 하얀 벼락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것을 막는 힘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빌어먹을!”
케이지는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그녀는 그냥 거칠 것 없이 달리고 있었다.
퍼슬시는 난장판이었다.
“도망가야 돼!”
“문 걸어 잠가!”
“엄마, 엄마!”
“이리로 와! 엄마가 엄마 옆에 붙어있으라고 했지? 벼락, 벼락을 피해야 되는데! 어디로 가야 하지?”
집으로 숨어드는 사람. 도망가는 사람. 숨죽이며 주변을 살펴보는 사람.
퍼슬 시민들은 혼란으로 인해 질서가 무너진 지 오래였다.
“오오! 드디어 신의 벼락이!”
“하늘이시여, 이 혼란을 만든 자들을 벌하소서!”
추종하는 자들의 찢어질 것 같은 외침이 케이지의 귓가에 닿았다.
“이 호랑이 새끼들이!”
“곰돌아, 죽고 싶나 보구나?”
호족과 곰족이 광폭화를 한 채 한창 싸우고 있었다.
곰족이 호족보다 그 수가 월등히 많았으나, 뒤가 없이 싸우는 호족의 곁에 동북부와 각국에서 온 소수의 지원 세력들이 함께하고 있어 간신히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언제라도 이 균형이 무너진다면, 승리하는 건 월등한 수의 곰족일 터.
‘하, 미치겠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땀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면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저 비실한 사자 새끼가!”
쿠우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케이지는 건물 벽에 처박히는 비크로스 몰란을 볼 수 있었다. 쩌적, 그의 대검은 금이 가며 바닥으로 부서져 내렸다.
쿵. 비크로스는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커헉!”
그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숨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역시, 케일 헤니투스가 그냥 수그러들 놈이 아니지!”
그리고 그곳의 수문장인 사자족 왕 도르프는 검은 기운을 휘감은 채,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론 할배야! 어떻게 해야 하나?”
라온이 투명화를 푼 채, 론의 곁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론의 눈동자가 도르프와 그의 뒤를 향했다.
“…생각보다 방심을 하지 않고 있었군요.”
제물들이 있는 지하로 향하는 입구. 그곳을 피해 침입을 시도했던 론이었다.
무사히 벽을 무너뜨리고 지하실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건만 적은 그의 예상보다 더 철저했다.
“이제 1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방심할 순 없지.”
과장되게 호탕하게 웃고 있지만 그 눈빛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인 사자족 우두머리 도르프.
그의 손짓에 지하에서부터 올라오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회색빛 긴 소맷자락을 흩날리는 신관복을 입은 사람들. 하얀 별과 절망 신을 위해 일하는 신관들이었다.
“으윽.”
“끄으…….”
그들의 걸음이 빨라질수록 신음 소리가 커져갔다.
그들의 손에는 사슬이 들려 있었다.
그 사슬은 그들 뒤에 선 누군가의 목에 채워진 족쇄와 닿았다.
신관은 양손에 하나씩, 눈을 가린 제물들을 끌고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도르프는 두 팔을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는 론과 평균 10살을 향해 말했다.
“언젠가는 이 제물을 케일 헤니투스가 구하려고 할 것이라 생각했지. 그래서 늘 축제 당일 날에는 이렇게 신관들을 통해 제물 감시를 했고.”
케일 쪽도 감시자는 있을 줄 알았다.
다만 그것이 이렇게 많은 신관일 줄은 몰랐다.
‘지금껏 보지 못했다.’
론은 물론이거니와 그간 이 하얀 하늘 건물로 제물들을 인계하는 자리에 온 어느 누구도 저렇게 많은 신관들을 보지 못했다.
그저 몇 명의 신관과 사자족 감시 인원만 보았을 뿐.
신관과 제물로 붙잡힌 이들이 있는 곳을 도르프의 사자족들이 빙 둘러싸며 주변을 경계했다.
‘난감하군.’
제물들만 구해서 가려던 론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신관들은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제물을 쥔 사슬을 놓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급했다.’
론은 스스로의 실책을 인정했다.
케일이 바로 퍼슬시로 간다는 말에 서둘러 준비하느라 제대로 신전을 살피지 못했다. 적어도 6개월은 두고 보며 동태를 살폈어야 했는데.
‘도련님이 하얀 별을 상대 중인데, 이 상태에서 우리가 못 해낸다면-’
그건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론은 어떻게 처리할지 재빠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온, 홍이 마비독을 쓰게 해? 그러면 이천여 명에 달하는 제물도 이동 불능 상태가 된다.’
‘아니면, 도르프를 일단 공격해서 시선을 분산 시켜?’
‘…저놈을… 죽여?’
론의 서늘한 눈빛이 도르프에게로 향했다.
도르프는 이를 즐거이 바라보며 말했다.
“멍청하군.”
“…뭐?”
“주군께서 아직 축제를 끝내지 않으셨다.”
“…그게 무슨 말이지?”
쿵. 쿵. 론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그때, 하늘의 울음이 들려왔다.
우르르르—우르르—
아까부터 들려온 이 소리.
“론 할배야! 하얀 별 공격이다! 벼락!”
라온이 비명처럼 외쳤을 때, 론의 얼굴이 구겨졌다.
“제길! 제물들을, 신관들에게로 가!”
그의 악에 받친 목소리에 반응해 재빨리 몰란가 사람들이 사자족 뒤의 신관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도르프는 웃었다.
“자, 가자.”
그는 명령했고, 사자족들이 론 측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스쳐 지나갔다.
털썩. 털썩.
그리고 신관들이 모두 무릎을 꿇으며 사슬을 쥔 두 손을 맞잡았다.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 하얀 별님을 위해, 이 세상을 위해 이 한목숨 바치리라!”
신관은 하늘에서 번쩍번쩍 고개를 내미는 하얀 벼락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 으으. 죽, 죽기 싫어!”
“빌어먹을! 난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눈을 가렸지만, 소리를 듣고 분위기를 느낀 제물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거나 악다구니를 써댔다.
그때, 하얀 별은 케일을 공격할 듯 들어 올렸던 불 검을 내리며 케일을 마주했다.
“완전한 너는 강하구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볼가에 낸 상처의 피를 닦아내었다.
“하지만 나보단 조금 못해.”
케일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무너진 벽 사이로 신관과 제물들도 보았다. 벼락이 저들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하얀 별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 그 종이 한 장 차이가 꽤 크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다시금 검을 든 하얀 별은 케일을 향해 달려들며 단언했다.
“나를 막아야 하는 너는 저들을 못 구해.”
그 순간, 하늘이 굉음을 토해내었다.
콰아아아—-!
하얀빛이, 모든 빛과 색을 지워버릴 것 같은 새하얀 벼락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리꽂혔다,
그 방향은 제물과 신관이 있는 장소였다.
“멈추지 마라!”
론이 그 빛을 보며 외쳤다. 그는 여전히 제물들을 향해 달려갔다.
곧이어 뭐라 주변에서 소리가 났지만, 들리지 않았다. 빛은 소리마저 집어삼킨 듯했다.
그러나 그는 두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제 주위도 멈추지 않고 나아감을 느끼고 있었다.
‘론. 뭐가 오든 두려워 마라.’
퍼슬시로 오기 전.
케일은 론에게 말했다.
‘무엇이든 내가 막을 테니까. 너네도 알았지?’
평균 10살에게도, 힐스만 부단장에도 말했다.
‘내가 막는 순간.’
그 말을 하던 케일 주위에 은빛 날개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을 지키는 은빛 방패. 그 방패를 펼쳐 든 케일은 단언했다.
자신이 막는 그 순간.
‘그때가 모든 것이 바뀌는 순간이 될 거다.’
론은 고개를 들었다.
하얀 벼락 앞에 은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믿어. 내 말을. 그리고 기억해. 내가 한 말을.’
믿고 기억했다.
론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케일과 함께 있던 모든 이들이.
은빛 방패가 론과 제물들 위로 드리운 그때.
케일은 하얀 별을 바라보았다.
하얀 별은 조금 전에 말했다.
‘나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 그 종이 한 장 차이가 꽤 크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지금 드러난 정도의 케일은 하얀 별을 압도적으로 이기기 힘들다. 케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얀 별은 말했다.
‘나를 막아야 하는 너는 저들을 못 구해.’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하얀 별은 얼굴을 구기며 케일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등을 보며 케일은 말했다.
“나 혼자 왜 너를 막아? 같이하면 되지.”
등 돌린 하얀 별. 그를 향해 흑룡이 그 아귀를 벌린 채 맹렬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흑룡 뒤에 최한이 하얀 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
검은 흑룡이 하얀 별과 부딪쳤고.
콰아아아앙—!
하얀 벼락을 은빛 방패가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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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이어붙이면 이런 빛깔이 될까.
“허.”
론은 다리에 힘이 풀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콰과과과과—
귀를 찌를 듯한 폭음 사이로, 눈을 아프게 찌르는 빛 사이로.
성스러운 빛깔의 은빛 방패가 찬란한 두 날개를 펼쳐 든 채 사람들을 감싸며 벼락과 온전히 부딪쳤다.
하얀 별의 저 벼락.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저 벼락에 닿은 것들은 모조리 다 세상에서 지워졌다. 검은 재만이 흔적으로 남아 바람결에 사라질 뿐.
하지만 지금은 그 벼락에 맞서는 방패가 있었다.
쩌저적- 쩌적-
그러나 방패에는 계속해서 금이 갔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은빛이 스며들며 방패가 부서지지 않게 만들었다.
“로, 론 할배야!”
라온이 놀란 얼굴로 다가와 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인간 새 힘, 생각보다 굉장하다……!”
라온은 론과 함께 퍼슬시로 오기 전 방패를 보았다. 하지만 그 힘이 이렇게 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이 씰룩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 보는 고대의 힘이지만.
이 힘은 어떤 힘보다도.
“닮았다!”
케일이랑 닮았다!
라온의 눈동자에 생기가 한가득 담긴 채 반짝였다. 그때, 라온은 뒤를 돌아보았다.
털썩.
신관들이 넋을 놓고 방패를 바라보다가 몇몇은 주저앉았다.
“이, 이런……!”
“하얀 별님의 힘을, 신이 될 분의 힘을 마, 막다니!”
그리고 눈을 질끈 감거나 비명을 질러대던 이들은 환한 빛에 잠시 가려졌던 시야 사이로 보이는 은빛 방패를 그저 바라봤다. 차마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틈이었다.
“커억!”
신관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철컥. 철컥. 족쇄를 마법 절단기가 부쉈다. 론을 비롯한 몰란 가문 사람들이 움직인 결과였다.
다들 방패에, 죽지 않았음에 넋이 나간 찰나, 누구보다도 오랜 경력을 지닌 이들이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론은 목소리를 높였다.
“도련님이 만드신 기회를 잊지 마라!”
그 소리에 반응한 것은 평균 10살과 힐스만 부단장이었다.
그들은 분명 케일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막는 순간. 그때가 모든 것이 바뀌는 순간이 될 거다.’
바뀔 수 있다.
그 기회가 지금 왔다.
저 벼락을 이겨낸다면, 우리는 바꿀 수 있다!
쩌저저적-
은빛 방패는 계속된 하얀 벼락의 부딪침에 금이 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힐스만 부단장은 명령했다.
“기사들은 당장 론 가주를 도와라!”
그는 제물 운송 업무 호위단을 모두 관리하고 있었다.
기사단과 함께 로브를 깊게 쓴 일부의 마법사까지.
“그리고 마법사들은 당장 마법진을 설치하고 남는 인원은 실드를 만들어!”
마법사 중 한 명이 깊게 눌러쓴 후드를 뒤로 넘기며 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 들었다.
쿵.
큰소리와 함께 열린 주머니 속에는 최상급 마정석들이 가득했다.
“마법진 설치 실시! 절반은 당장 실드를 펼쳐!”
“실드는 내가 한다!”
라온이 두 날개를 펼치며 방패 가까이로 날아올랐다.
냐아아옹!
“신관들은 우리가 묶을 수 있는데!”
홍과 온이 안개독을 신관들에게로 집중시켰다. 마비독에 당한 이들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
온은 주위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오히려 잘 됐는데.”
사자족을 비롯한 하얀 별과 도르프의 수하들이 벼락을 피해 도망치는 바람에 이곳에는 오로지 신관, 제물, 케일 측 인물들만 남게 되었다.
그 덕에 제물을 보호하고 구하기 더 쉬운 상황이 되었다.
저 방패가 벼락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온의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하지만 될 거다.
라온의 작은 몸에서 거대한 마나의 진동이 일어났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검은 빛을 띠며 순식간에 방패 주위로 실드를 겹겹이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막내랑 케일이 함께라면, 분명 버틴다.
그때, 온의 눈동자에 환희가 어렸다.
방패에 내리꽂히는 하얀 벼락.
그 벼락을 향해 오른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거대한 불길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뱀이 벼락을 잡아 뜯어먹으려는 듯. 그 거대한 불길은 벼락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다.
저 붉은 마나.
콰아앙—!
벼락과 부딪치며 사라졌지만, 벼락의 기세를 조금이라도 줄였다.
화르르르–
그리고 다시금 허공에 생겨난 불길은 또다시 벼락을 향해 부딪쳤다.
끊임없이 전진하는 누군가를 닮아있었다.
“로잘린이 왔다!”
라온이 외쳤고, 온과 홍은 이 방패 바깥에 로잘린, 그리고 라크와 늑대족이 왔음을 깨달았다.
론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자는 늑대들이 잡겠군.”
론은 동료들이 모두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더 이상 구경하지 않는다는 것도.
“…미친 것들.”
사자족 왕 도르프는 은빛 방패를 바라보던 황당한 표정에 분노와 경멸이 서렸다.
어느새 광폭화를 한 도르프 앞에는 라크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의 뒤로 메스를 시작으로 늑대족들이 광폭화를 한 채 언제라도 적의 목덜미를 노릴 수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가죠.”
라크의 명을.
“푸하하하! 웃기지도 않는군. 그래, 마지막 발악 받아들여 주마.”
동시에 사자족도 도르프의 명을 따라 늑대족에게 달려들었다.
“늑대족을 지원해!”
로잘린의 명에 각기 다른 해진 로브를 입고 있던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 탑주님!”
대륙 각지로 도망 다니고 있던, 하얀 별 아래에 들어가지 않고 마탑의 부활을 노리던 마법사들이었다.
“오늘이 기회야!”
그들은 마탑주 로잘린의 말에 강하게 동의하며 각자 마나를 일으켰다.
로잘린은 그 상태를 확인하고는 방패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하얀 별의 하얀 벼락은 처음보다 기세가 수그러들었지만, 계속해서 하늘에서 내리쳤다.
“…방패라.”
케일 공자답네.
그녀는 진심으로 구경 오기 잘 했다 생각하며, 방패와 이어진 가느다란 은빛 실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라온과 자신이 돕고 있지만, 케일의 방패는 갈수록 위태로운 상태가 되어갔다.
‘최한이 하얀 별을 공격하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은빛 선의 끝에 시선이 닿았다.
콰아아아—!
흑룡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고, 하얀 별의 시뻘건 검이 흑룡의 꼬리를 베어냄과 동시에 최한의 검은 오러가 하얀 별을 향해 부메랑처럼 쏘아졌다.
흙먼지가 휘날리고 여러 빛들이 번쩍이는 순간. 로잘린은 그 사이에서 한 사람을 보았다.
“아…….”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쿨럭.”
케일은 한 손으로는 은빛 실선을 뿜어내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
나무 속성 힘도 얻었다면, 케일 공자의 그릇은 완전하지 않던가?
그런데 왜 그는 지금도 피를 흘리는 것이지?
너무 무리해서 그런가?
로잘린은 그 순간 케일과 눈이 마주쳤다.
씨익. 케일은 웃어 보이더니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고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하얀 별을 보고 있었다.
사실, 케일도 로잘린도 알고 있었다.
저 하얀 벼락을 멈추려면, 하얀 별을 공격해야 함을.
지금 최한과 하얀 별이 서로 별다른 피해 없이 부딪칠 수 있는 이유는 하얀 별이 하얀 벼락을 쓰느라 최한을 전력으로 상대하지 못함 때문이라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었고, 로잘린은 입술을 깨물며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파직. 파지직.
그녀 주위의 붉은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하얀 벼락. 그 빛을 노려보며 그녀의 불길이 다시 한번 공격을 감행했다. 뒤는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다.
‘케일 공자를 믿어야 할 때니까.’
그 믿음에 응하듯, 케일은 하얀 별과 최한의 싸움터에 끼어들었다.
“크흐흐.”
케일은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무리하더니 피가 철철 나는구나.
그는 대충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핏물을 그냥 삼켰다.
뚝뚝. 턱을 타고 내린 핏방울이 상의를 적셨다.
머리가 띵했고, 시야가 조금 빙글빙글 돌았다.
“흐.”
그럼에도 케일은 기분이 상쾌했다.
왜냐고?
‘진짠데.’
검붉은 피를 토하니 한결 속이 편안해졌다. 오랜만에 피를 토한 덕에 노폐물이 빠져나간 걸까? 케일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발목에 바람을 일으켰다.
휘이이—
바람과 함께 그는 앞으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저 얼굴. 아주 보기 좋아.’
하얀 별의 일그러진 얼굴.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산뜻해졌다.
“무리하다 죽고 싶은가?”
방패를 힐끗 본 그는 케일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물의 장막이 펼쳐지며 케일의 돌진을 막아섰다. 그러나 하얀 별은 곧 고개를 돌려 불을 일으켜야 했다. 재해의 기운을 담은 검이 최한에게로 향했다.
콰아앙!
짧은 격돌과 함께 최한은 악착같이 하얀 별에게 들러붙었다.
“크윽!”
반짝이는 검은 오러를 휘감은 손이 시뻘건 검을 움켜쥐었다. 용암을 담은 검의 불길이 당장이라도 최한을 집어삼키려 했지만, 최한의 오러는 버텨내었다.
그 시간은 아마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내 편이다.”
하얀 별이 그리 말하며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지금 그는 등 뒤에서 거대한 힘의 움직임을 느꼈다.
분명 케일 헤니투스가 돌멩이들을 끌어모아 창이나 화살을 만들어 그를 공격하려는 것일 터.
그동안 최한은 검을 움켜잡으며 시간을 끌 생각인 것일 테고.
보지 않아도 뻔했다.
“…빌어먹을……!”
최한은 뻔히 다 안다는 듯, 너희 수는 다 보인다고 말하는 하얀 별의 눈빛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간 너무나도 많이 부딪친 상대였고 결국 패배를 겪게 한 상대였으니까.
치지직—
하얀 별의 불이 최한의 검은 오러를, 손을 집어삼킬 듯 그 시뻘건 빛을 더 불길하게 빛냈다.
“그러다 손 탄다. 검 못 들어. 응?”
하얀 별이 달래듯 말했지만, 최한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적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주군. 케일 헤니투스의 몰골을 보면 손에서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는데, 피 때문에 그게 잘 보이지도 않았다.
콰아앙— 콰앙—!
아직도 벼락을 이기기 위해 방패는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케일은 남은 돌멩이들을 끌어모아 거대한 창을 만들었다.
곧 저것이 하얀 별에게 가리라.
최한은 저것이 뻔한 공격일지라도 케일의 최선임을 안다.
그렇기에 포기할 수 없었고, 그가 만들어낸 방패가 벼락과 끊임없이 맞서듯 그도 맞설 수밖에 없었다.
치이이익-
결국 검은 오러가 불에 집어삼켜졌을 때, 최한은 손에 닿는 고통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 순간, 케일이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동시에 거대한 석창이 하얀 별을 향해 날아갔다.
“뻔하긴.”
하얀 별은 비웃으며 최한을 가볍게 떨궜다. 일부러 붙잡혀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는 석창을 향해 불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전신에 붉은 기운이 휘감겼다. 공포를 담은 그 기운은 재해를 담은 검과 섞이며 검에 불길함을 더했다.
쿵. 쿵. 최한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심장이 뛰었다.
하얀 별은 그 검을 들어 올렸다.
빠르게 다가오는 석창을 향해. 그는 검을 내리그었다.
“이래서, 늘 졌던 거야.”
그 순간.
“뭔 헛소리야.”
케일의 목소리와 함께 석창의 모습이 바뀌었다.
아니, 석창이 다시 잘게 부서졌다.
그리고 하얀 별의 사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네가 알던 내가 아니란다.”
피를 흘리는 케일. 그와 닮은, 아니 그의 머리칼 색과 닮은 붉은 기운이 케일을 휘감고 있었다.
고대의 힘 피에 젖은 돌.
그리고 지배하는 아우라.
그 두 가지가 다시 섞였고.
-이 힘은 쓰기 찜찜한데.
무서운 짱돌도 섞여들었다.
케일은 정말로 오랜만에 힘을 한꺼번에 많이 썼다.
쿵. 쿵.
최한은 심장이 뛰었다.
하얀 별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이런.”
돌멩이들이 검붉게 변하며 하얀 별의 사방을 둘러싼 채 쏘아졌다.
그 하나하나에 담긴 기운은 그의 검에 담긴 재해와 공포만큼 강대했다.
용에 굴하지 않는 기세.
원초적인 공포.
그 공포에 맞섰던 수호하는 자의 굳건함.
작은 돌멩이들은 하얀 별의 손에 들린 검보다, 하늘에서 내려치는 하얀 벼락보다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한 기세를 품었다.
그 강렬한 기세에 다른 어떤 기운도 뭉개져 느껴지지 않았다.
하얀 별의 주위가 순간 붉게 변했다.
그의 시야는 붉은 돌덩이들로 가득 찼다.
“이딴 수작을……!”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그 방향은 조금 전 케일의 목소리가 들렸던 곳이었다.
돌멩이들의 기세에 가려져 케일의 기운을 찾기가 힘들었던 탓이었다.
“뭐해?”
그때, 하얀 별은 등 뒤로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황급히 검의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보다 케일이 더 빨랐다.
휘이이이-
희미한 바람을 매단 케일. 정말 오랜만에 많은 고대의 힘을 쓴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는 돌멩이들이 하얀 별을 감싸는 순간, 기세로 주위를 압살하는 순간, 곧바로 바람을 일으켜 움직였다.
그의 손이 움직였다. 그 손에는 돌멩이가 쥐어져 있었다.
피에 젖은 공포가 새겨지지도 않고, 지배하는 아우라도 없는 돌멩이였지만.
무서운 짱돌의 힘은 담겨있는 돌멩이였다.
케일은 그 돌멩이를 쥔 손으로 후려쳤다.
막 검의 방향을 트는 하얀 별 뒤통수를.
콰아앙—!
사람 머리와 돌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최한이 입을 멍하니 벌리고 케일을 쳐다봤고, 케일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얀 별은 머리가 단단한가 보네.”
-…허.
짱돌은 하고픈 말을 그냥 삼켰다.
“커헉!”
하얀 별이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흐.”
그리고 케일은 웃었다.
맑고 산뜻하게.
피를 흘리면서.
#
“크윽.”
머리를 부여잡은 채 허리를 앞으로 숙이는 하얀 별. 그런 그를 케일은 여유로이 바라보며 말했다.
“대단하네. 그 짧은 새에 살짝 피하다니. 거기다가 바람벽도 만들 시도를 다 하고.”
쩌저적-
금이 간 바람벽이 산산조각 나서 부서졌다. 신속하게 만들어지고 있던 바람벽은 완성된 돌멩이를 이기지 못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짱돌 힘의 정수에, 뒤늦게 담았지만 피에 젖은 돌의 정수까지 담은 힘으로… 하얀 별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네가 더 대단하구나.
짱돌의 말을 케일은 가볍게 무시했다.
“크으…….”
하얀 별은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시야가 흔들렸다.
만들어진 것이 아닌 만들어지고 있던 바람벽 때문에 그나마 정통으로 공격을 받진 않았다.
그럼에도 하얀 별은 제 뒤통수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와 축축하게 젖어가는 등을 느꼈다.
‘급소는 피했는데!’
분명 피한 것 같은데!
분명 스치듯이 맞았는데!
저 무식한 힘은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특히 시야가 흔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불어 맞는 순간, 케일 헤니투스의 기척을 못 느끼게 만들었던 그 공포가, 죽음을 담은 공포가 돌멩이에 스며들었다.
그 본질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는 하얀 별을 뒤덮어 그가 금방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지배까지 묻은 그 공포는 하얀 별의 몸도 억눌렀다.
하얀 별은 정신, 몸. 모두 바로 뜻대로 움직일 수 없어, 고대의 힘을 일으키는 것도 시간이 걸렸다.
‘피해야-’
그러나 한 가지는 명백했다.
‘도망가야 한다.’
피해야 한다.
얼른 저놈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단 30초만이라도.
그러면 이 어지러움이 사라지고 자신이 우위를 다시 점할 수 있을 테니까.
“커헉!”
하지만 적 역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케일은 하얀 별의 멱살을 잡고서 그에게 속삭였다.
“어딜 가려고.”
하얀 별의 흔들리는 시야 속, 케일 헤니투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미친…새끼…….”
엉망이다.
자신보다 케일 헤니투스 얼굴이 더 엉망이다. 케일 헤니투스는 다시금 입에서 검붉은 피를 울컥울컥 흘리고 있었다.
하얀 별의 뒤통수를 가격했던 그 돌멩이의 힘. 거대한 두 땅 속성 고대의 힘이 어우러진 만큼 결단코 케일 헤니투스에게도 부담이 되었으리라.
그 여파가 케일 헤니투스의 그릇에 영향을 주었을 터.
“크윽, 힘도 없는 놈이-”
힘겹게 말을 내뱉는 하얀 별의 말대로 멱살을 쥔 케일 헤니투스의 손은 힘이 거의 없었다. 지금의 하얀 별이라도 이를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최한이 문제다.’
분명 최한이 틈을 노리고 있을 테니까.
하얀 별은 생각했다.
‘차라리 케일 헤니투스를 인질로 잡아서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이 맞을 거 같군.’
그는 떠오른 생각에 곧바로 결심했다.
‘그래, 그렇게 하-’
하지만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흐.”
케일 헤니투스는 멱살을 쥐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하얀 별이 어지러워하는 찰나.
그의 말대로 케일은 힘이 별로 없었다. 속이 메스꺼웠고 살짝 어지러웠다.
하지만.
“야.”
케일은 피를 흘리며 웃었다.
“짱돌 아직 안 부서졌다.”
멱살을 잡지 않은 손. 자그마한 돌멩이를 쥔 손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커억!”
그 손은 하얀 별의 머리를 다시 내리치고 뒤이어 사방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래, 케일! 정신 차리기 전에 한번 머리를 후려치고! 그, 그래! 그렇게 계속 때, 때리면… 되겠지?
케일은 짱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최한은 멍하니 비틀거리는 하얀 별의 곳곳을 끊임없이 후려치는 짱돌을 멍하니 바라봤다.
투두둑.
하늘을 가득 채웠던 붉게 변한 돌멩이들은 땅으로 떨어졌다.
바위 힘.
그 모든 것들이 오로지 저 돌멩이 하나에 집중되었다.
그 순간, 성문이 열렸다.
끼이이이—, 쿵!
열린 성문을 통해 왕실 기사단과 마법병단, 병사들이 정렬에 맞춰 신속하게 진입했다.
성문 위 성벽에 서 있던 알베르 크로스만은 이를 확인하고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힘겹게 하얀 별에 맞서고 있을 케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리고 손으로 잠시 눈가를 비볐다.
“…응?”
그곳엔 공중에 피를 토해대며 하얀 별을 연신 패는 케일 헤니투스가 있었다.
“…돌?”
그것도 조약돌보다 조금 더 큰, 작은 돌을 쥔 케일 헤니투스. 처맞는 하얀 별.
“…저, 저- 미친놈…….”
아주 기가 막히게 연신 돌멩이로 하얀 별 여기저기를 때려댔다. 저런 신속함이 케일 헤니투스에게 있었나 싶어 유심히 쳐다보니 회오리바람까지 일으켜서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허.”
저 미친놈.
기가 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알베르 크로스만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줄어든다!’
제물들이 있는 건물을 공격하던 하얀 벼락. 끊임없이 맹렬한 기세를 피우던 그 벼락이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하얀 별이 공격당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해 힘이 줄어든 탓이리라.
“……!”
이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챈 이는 로잘린이었다.
1분. 딱 그사이 갑자기 벼락이 줄어들었다.
‘케일 공자와 최한이 해냈구나!’
두 사람이 무언가를 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붉은 마나로 약해지고 줄어든 하얀 벼락을 공격하며 잠시 틈을 내어 케일 쪽을 바라보았다.
“…어?”
그리고 당황했다.
“…고, 공자?”
케일이 피를 흩날리며 하얀 별에게 근접 공격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마구잡이로 패는 것 같아 보였다.
아주 찰나지만, 로잘린은 라온, 온, 홍이 방패 안에 있어 밖을 못 보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어!”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다급함이 서렸다.
케일은 하얀 별의 복부를 돌멩이를 쥔 손으로 가격하며 말했다.
“내가! 너 때문에! 왜!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하냐? 응?”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나는 백수가! 꿈! 이라고!”
조용히 사는 게 꿈인 사람인데!
“그리고 부하들 관리 좀 잘해! 어? 뭐, 라온을 제물로 써?”
다시 한번 돌을 쥔 주먹이 하얀 별의 복부로 향했고, 케일은 짜증에 가득 차서 말했다.
“네 따까리는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망언을 내뱉는 주둥이를 달고 다니는 거지?”
그때였다.
“크윽.”
하얀 별의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그 손이 향하는 방향은 복부로 다가오는 케일 헤니투스의 손이었다.
쉴 새 없이 맞은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하얀 별은 목표를 잃지 않았다.
그의 손은 케일의 손목을 잡을 듯 상당히 가까워졌다.
1초. 아니 그보다 더 짧은 시간만 있으면 하얀 별은 이 상황을 역전할 수 있었다.
콰아아아아—!
“커헉!”
하지만 하얀 별의 몸은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는 제 옆구리를 파고드는 흑룡의 아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콰아앙!
“커어억!”
하얀 별의 몸이 신전 반대 방향에 있는 건물 벽에 부딪혔다.
“크흐흐.”
하얀 별은 그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케일 헤니투스를, 정확히 말하면 지배와 공포를 담은 저 짱돌로부터 멀어졌으니까.
최한도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얀 별의 손이 케일에게로 향한 순간, 하얀 별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하얀 별은 자유로워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하얀 별을 외면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케일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케일 님.”
“방향이 적절하네.”
뜬금없는 소리였다.
“네?”
반문하는 최한에게 케일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피로 범벅이 된 입안을 본 최한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잠시 당황했다.
“잘했어. 방향도 적절하게 날려줬네.”
“네?”
다시 되묻는 최한. 그는 하얀 별이 파묻힌 건물 벽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우르르—
그리고 조용해져 가던 하늘에서 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시금 하얀 별과 싸워야 하는 건가. 최한의 주위가 긴장감으로 뒤덮여갈 때, 케일이 속삭였다.
“최한.”
“네.”
“당장 신전을 공격해.”
케일은 최한 쪽을. 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명했다.
“신전 부수자.”
“…예?”
“거덜 내자고. 저놈들 아지트를.”
흐.
케일은 웃었고, 하얀 별의 얼굴이 구겨졌다.
최한은 그제야 하늘에서 울려 퍼지던 울음소리가 하얀 벼락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케일이 진심으로 끝까지 싸울 작정임을.
그의 마음가짐이, 모든 것이 이제 바뀐다고 한 말이 결코 쉬이 내뱉은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부터 하지.”
어깨에서 손을 뗀 케일의 담담한 말과 함께 최한은 케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등 뒤로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위에서부터 내려치는 적금빛 벼락.
그 벼락은 대리석으로 세워진 신전 5층을 직격했다.
콰아아아앙—-!
모든 이들이 황금빛과 붉은빛에 뒤섞인 벼락에 공격을 받아 흔들리는 신전을 보았다.
신기하게도 벼락은 신전 5층만을 태웠다.
적금빛은 5층을 녹여내리며 잡아 먹어갔다.
5층. 저곳은 하얀 별이 지내는 곳이었다.
“새로운 시작이군요.”
파문된 신관 케이지는 흔들리는 신전을 보며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 새로운 국면을 향한 첫걸음이자, 승리를 위한 시작이라고.
막연한 믿음이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최한은 떨어지는 케일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저도 모르게 검을 들어 올렸다.
신전을 지키는 돌담마저 케일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우우우—우우—-
흑룡이 신전을 향해 그 몸을 비틀며 나아갔다. 목적지는 4층이었다. 저곳은 하얀 별 다음가는 수뇌부들이 지내는 곳이었다.
“으아악–!”
“피해, 도망쳐!”
1, 2층에 대기하고 있던 신관들이 헐레벌떡 신전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4층에서는 각종 보호 마법이 펼쳐졌다.
최한은 흑룡을 따라 신전으로 향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을 강한 존재는 없었다.
그때, 그의 등 뒤로 강력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하, 하하-”
최한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양옆을 지나쳐가는 검은 창과 붉은 뱀.
“나도 한다!”
“재밌는 걸 최한 혼자 하게 둘 순 없죠?”
하얀 벼락이 멎고, 은빛 방패 밖으로 나온 라온은 마나를 듬뿍 담은 검은 창을 날렸다.
로잘린은 하얀 벼락을 공격하려던 붉은 마나의 방향을 틀어 그 뱀의 목적지를 신전으로 정했다.
콰아아아—
콰아앙!
콰과과과과—
적금빛 벼락 뒤에 연달아 신전 4층을 향해 공격이 이어졌다.
최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눈동자는 날카로웠다. 1, 2층에 있던 신관들이 대충 다 빠져나온 것 같으면 곧바로 신전 전체에 공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오늘 3층은 강제 초대된 사람들 대기실로 사용되어 다른 인원이 없었다. 4층은 이 상황에서도 숨어있던 하얀 별 수족 놈들, 고위직 몇 명만 있을 뿐이고.’
그의 시선이 잠시 뒤로 향했다.
하얀 별이 다시금 날아오르고 있었다. 저놈이 뭔가를 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최한의 시야 한편에 비틀거리며 땅에 선 케일을 부축하는 알베르가 들어왔다. 그제야 최한은 안심하고 제 곁으로 다가오는 로잘린에게 씨익 미소를 그려보였다.
“케일 헤니투스……!”
“인간아!”
한편 알베르는 케일을 부축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몰골이 될 때까지……!”
그가 여지껏 본 몰골 중 가장 최악인 상태의 케일 헤니투스는 간신히 선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로 라온이 다가왔다. 온, 홍은 일이 남아 오지 못한 채 저 멀리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인간아! 이게, 이게!”
라온이 아공간에서 주섬주섬 사과파이를 꺼내려하였다.
“…저하.”
“왜?”
그때, 들려온 희미한 목소리에 알베르는 케일에게로 신경을 집중했다. 쓸데없이 말하지 말고 체력부터 회복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감히……!”
분노에 가득 찬 하얀 별의 주위로 여러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고.
“신전은 안 된다!”
곰족 왕 사예르가 소드 마스터 하나를 내팽개치고 신전을 향해 일단 방어 없이 달려갔다. 그리고 사자족 왕 도르프는 언제라도 늑대족과 라크를 이길 듯한 상태였다.
“저하…….”
그렇기에 케일이 할 말을 기다렸다. 동시에 그의 손이 신호를 보냈다.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빠르게 혼란을 진압해나갔다.
“저하.”
“그래, 어서 말해.”
“인간아, 말하지 말고 쉬어라!”
알베르와 라온의 말이 동시에 쏟아진 그 순간, 케일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얀 별은 도망갈 겁니다.”
“…어?”
알베르가 무슨 뜻인가 싶어 되물은 순간, 라온은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검은 용의 검푸른 눈동자가 동북쪽 하늘로 향했다.
“…할배다!”
라온이 반갑게 외쳤다.
“금 용 할배다!”
새로운 레어를 만드느라 바쁘다고 알려진 고룡. 알베르의 시선이 케일에게서 하늘로 향했다.
그가 알기론 그 바쁜 고룡을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케일뿐이었다.
“……?”
알베르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하늘을 보던 라온이 멍하니 덧붙였다.
“…하, 할배 뒤에 다른 용들이 있다! 나 처음 본다! 새로운 용들이다!”
이 세계에서 라온과 에르하벤을 제외하고 동료가 된 용은 없었다. 은빛 방패 공자를 찾아온 도도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케일은 밀라, 라쉴, 도도리. 세 용이 어디서 살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데려올 존재도 누가 가장 적합한지 알았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알베르는 고개를 돌렸다.
“흐, 흐흐흐.”
케일 헤니투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무서운 놈.”
중얼거린 알베르도 웃었고, 라온도 웃었다.
#
하지만 웃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저 멀리 동북쪽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날아오는 골드 드래곤.
그 뒤로 베이지색의 성룡과 회색의 성룡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또한, 베이지색 용 위에 앉아있는 분홍빛 사람도 용으로 보였다.
아니, 한 명은 인간이든 용이든 상관없었다.
“…성룡이… 셋…….”
누군가가 내뱉은 말에 적과 아군 할 것 없이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그때였다.
“크크큭, 크하하하하!”
소드 마스터 하나. 그녀는 사예르를 공격하던 검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케일 헤니투스, 이 미친놈! 살면서 이런 진귀한 구경은 처음이구나!”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래, 그래! 그놈이 준비를 했다고 할 정도면, 겨우 이딴 규모일 리가 없지!”
동시에 그녀는 주변에 있던 이들을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신전으로 달려가던 곰족 왕 사예르의 등에 대고 말했다.
“오늘 네가 제물이 되겠구나!”
그녀는 사예르의 빛 화살을 피하지 않고 싸우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움직여 곰족 왕에게로 달려가며 외쳤다.
그녀의 눈동자에 머문 광기에는 울분과 환희와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승리의 첫 제물은 네놈으로 해주마!”
“저 미친 것이!”
곰족 왕 사예르가 질린다는 듯 소드 마스터 하나를 노려보았다.
성자 잭이 제물이 되었다고 쌍둥이 앞에서 말했던 사람이 사예르였다. 그러나 사예르는 그딴 일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건 곤란하구나.”
하지만 하나와 곰족 왕 사예르. 그 둘은 자신들을 덮는 그림자를 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딴 게 제물이라니, 내 과수원 텃밭에도 쓰지 못할 것을.”
“하… 잠 깨우길래 왔더니, 하… 내 성질 다 죽었네.”
“돌이, 바위가 많아! 갑자기 두근두근해!”
신전과 광장이었던 곳을 모두 덮어버리는 거대한 용들의 그림자.
그 용들의 중심에서 아무 말 없이 있던 이가 그대로 땅으로 낙하했다.
그의 몸은 어느새 용에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하얀 별의 정면에 내려선 에르하벤.
“하, 하하–! 떼로 몰려왔네. 하하!”
하얀 별은 기가 찬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에르하벤은 그의 상태를 파악해나갔다.
‘지금까지 마주한 하얀 별 중 가장 약한 상태다.’
뒤통수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몸 곳곳에 입은 상처. 하얀 별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 힐끗, 고룡은 알베르의 부축을 받고 서 있는 케일 헤니투스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뗐다.
“박복한 놈이 만들어준 기회구나.”
“그래. 너희에게 기회라면 기회겠구나.”
하얀 별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비로소 케일 헤니투스를 인정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케일 헤니투스가 많은 것을 준비했다고.
저들에게 승리라는 기회가 발생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
다 끝났다고 생각한 지 1년이 흘렀건만. 그사이에 이런 준비를 해둘 줄이야.
하얀 별은 후회했다.
“그냥 죽여버릴 것을.”
케일 헤니투스를 그냥 죽였어야 했다.
“그러게. 왜 살려두었나, 우리를.”
빙그레 미소를 짓는 에르하벤. 그를 마주한 하얀 별은 제 주위에 내려서는 두 존재를 볼 수 있었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용들이었다.
분홍색 머리칼을 지닌 존재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베이지색 용과 회색 반삭발 용만이 인간으로 변해서 하얀 별을 응시했다.
고룡 에르하벤 급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강한 성룡이었다.
“으음. 꽤 피곤한 상태 같은데, 빨리 끝내죠.”
베이지색 드래곤 밀라가 하얀 별을 가리키며 온화하게 말을 꺼냈다.
“빌어먹을.”
하얀 별은 거친 말을 내뱉으며 서서히 기운을 일으켜 올렸다. 그의 주위에 갖가지 자연의 힘이 모여들었다. 어느 고대의 힘이라도 당장 사용할 수 있도록 그는 준비를 해 나갔다.
그러나 한 용은 그런 분위기 따위 신경 쓰지도 않았다.
“흥.”
가볍게 콧방귀를 뀐 회색 반삭발 용. 라쉴은 곧바로 하얀 별을 향해 달려들었다. 용임에도 근접 전투에 능한 그.
그를 막는 이는 없었다.
“주군!”
하지만 뒤따라 잡으려는 이는 있었다.
“크읏!”
라크가 사자족 왕 도르프를 놓치고 미간을 찌푸렸을 때, 도르프는 어둠의 정령들을 이끌고 어둠을 온몸에 두른 채 반삭발 용 라쉴을 향해 달려들었다.
“뭐야.”
하지만 무심한 얼굴로 라쉴은 고개를 돌리며 저에게 다가오는 사자족 도르프를 향해 툭 내뱉었다.
“이 시꺼먼 거 단 사자 새끼는, 나를 막으려는 건가?”
그 순간, 도르프는 드래곤 라쉴을 감싼 독특한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라쉴이라는 용이 지닌 특성 ‘불굴’로, 불리한 환경에서 더 큰 힘을 발하는 특성이었다.
어둠의 정령을 이용한 어둠으로 저에게 유리한 전황을 만드는 도르프. 그는 제 코앞으로 빠르게 다가온 라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반삭발 용은 짜증이 한가득 담긴 눈동자로, 하지만 어떠한 표정도 없는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인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나를 막으려는 건가?”
그리고는 그대로 주먹을 들어 올렸고.
퍼억!
“커헉!”
도르프를 패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도르프를 라쉴이 신나게 팼던 것처럼, 그 상황이 다시금 이 환상 속에서 펼쳐졌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입! 주둥이를 쳐버려! 주둥이로 쓸데없는 말 나불대지 못하게!”
멈칫한 라쉴의 눈동자가 웬 피 칠갑을 한 붉은 머리칼 남자에게 향했다. 그는 함박웃음을 띤 채로 저에게 말하고 있었다.
활짝 벌어진 입안은 피투성이였다. 그런데 웃고 있다.
‘뭐야, 저 미친 인간은?’
무서운 게 없는 라쉴이었으나, 미친 인간은 좀 껄끄러웠다. 그때, 에르하벤이 나직이 읊조렸다.
“쟤가 사령관이다.”
“…우, 우릴 찾은 인간이 저런 미친 노-”
라쉴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그냥 고개를 돌려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주먹은 신기할 정도로 정확히 도르프의 입을 쳤다.
“…에잇… 침 묻었잖아!”
그리고 주먹을 내려다보던 라쉴의 눈이 뒤집히며 그 성질머리대로 도르프를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붇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죠.”
온화한 목소리로 말한 베이지색 용 밀라가 하얀 별에게로 산책하듯 다가갔다.
우우웅—. 황금빛 가루를 휘감은 에르하벤은 이미 하얀 별의 코앞에서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다행이구나. 네 마지막은 내 몫이라.”
“늙은 용 하나 잡을 힘은 있다.”
에르하벤과 하얀 별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에르하벤은 혼자가 아니었다. 하얀 별은 틈새를 노리는 베이지색 마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힘을 너무 뺐다……!’
케일 헤니투스 때문에, 제물들 때문에 쓸데없이 고대의 힘을 너무 많이 썼다. 그에 비하면 용들의 컨디션은 좋았다. 특히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알려진 고룡의 상태가 제일 좋았다.
콰아아앙—콰아앙–!
하얀 별이 용들과의 싸움을 시작하며 또다시 굉음을 만들어냈을 때.
“…하… 하하…….”
곰족 왕 사예르는 하늘을 쳐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손에 들린 영상통신구가 반짝이며 여러 가지 메시지들을 전해왔다.
-여기는 카로 왕국 수도입니다! 현재 신전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몰든 왕국입니다! 살아남은 왕녀 조피스가 반군을 이끌고 나타나 신전부터 부수고 있습니다! 지원 요청 드립니다!
-용병 길드가, 레인저 부대원들이 마법 폭탄을 신전 곳곳에 설치해 현재 신전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런 마법 폭탄을…! 지원을, 지원, 크아아악! 사, 살려-
-사예르 님, 위퍼 왕국인데! 여기, 여기! 투, 툰카 대장군이 다시 병력을 일으켰습니다!
-사라진 리타나가, 정글 왕이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정글 사람들이 다 그녀의 군사들에게 문을 열어줘서, 어서 막아야 합니다!
같은 소식이 알베르 크로스만의 영상통신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케일은 홀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저하가 준비한 겁니까?”
왕세자 알베르는 무심히 답했다.
“당연하지. 구경하란다고 누가 구경만 해?”
다들 기다렸다.
하얀 별을, 그의 수족들을, 중심을 붙잡아두거나 맞설 수 있을 때만을. 신전의 감시 아래 서로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없음에도, 각자의 목적으로, 각자의 이유로, 그들은 준비를 해왔다.
신전을 몰아내기 위해.
왕위를 되찾기 위해.
우리의 땅을 다시 찾아 지키기 위해.
각자의 목적으로 움직였고, 그 방향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
“때 되면 같이 휩쓸어야지.”
그러나 같은 소식에 넋을 잃은 이가 있었다.
“하, 하하하-”
사예르는 여전히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 하나는 그 모습에 검을 늘어트린 채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사예르는 그녀에게 눈길 하나조차 주지 않았다.
“고작, 고작 이 한순간으로-”
고작 이 한순간으로, 이렇게 많은 것이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신전에서 도망쳐 나오는 신관들과 그곳을 위에서부터 부숴가는 최한과 로잘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동안 하얀 별이, 우리가 얼마나 강했던가?
얼마나 오래 준비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죽이고 부수며 그들을 지배했던가.
그런데 들려오는 이 소식들은 무엇이지?
우우웅-
그때, 영상통신구가 또다시 빛을 발하며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 아. 여기는 헤니투스 영지입니다. 사예르 신관님이지요?
우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바이올란 공작 부인입니다.
-헤니투스 영지 신전은 파괴되었으며, 현재 데르트 공작이 퍼슬시로 군사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지금부터 동북부 신전들은 모두 파괴될 테니 그렇게 아세요.
-속 뒤집히라고 연락하는 겁니다.
상대는 우아하게 끝을 고했다.
-내 손으로 죽이고 싶으나, 그 전에 죽을 것 같군요.
-그럼 이만.
사예르는 손에 들린 영상통신구를 땅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
콰지직!
영상통신구에 금이 가며 구슬은 빛을 잃어갔다.
“후우…….”
순간 차오른 거친 숨을 고르며 이를 지켜보던 사예르는 고개를 들었다. 소드 마스터 하나를 시작으로 하여 그에게로 다가오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수많은 적들이 그를 옥죄어왔다.
그는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사냥감 신세군.”
어느새 그는 사냥꾼에서 사냥감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상황을 만든 시작점을 바라보았다.
케일 헤니투스.
그가 홀로 꼿꼿이 서서 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더 이상 케일 헤니투스는 사예르에게 눈길을 두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케일 헤니투스, 왜 그래?”
알베르의 물음에 케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는 전장을 둘러보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마지막 시험도 끝나가는구나. 마지막 시험치고는, 자네에게 나쁘지 않은 난이도였지?
귓가로 봉인된 신이자 절망의 신인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목소리는 사뭇 친절하면서도 사무적이었다.
첫 번째 환상 시험을 치르다가 시험을 망가뜨리고 사라져버린 놈이, 다시금 케일에게 말을 걸었다.
-케일 헤니투스. 나와 거래를 하겠나?
케일은 눈을 떴다.
-신전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의 시선이 부서지는 신전으로 향했다. 하얀 대리석 건물은 이제 점점 흉물스럽게 변해갔다.
-사냥꾼. 그들에 관한 이야기. 진실이 담긴 이야기들이지. 들어두면 자네에게 득이 될 이야기야.
케일은 천천히 신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험이 모두 끝나기 전에, 자네와 나 둘이서만 대화를 했으면 하네.
-내 말을 모두 듣고 거래를 수락해도 좋아.
케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들어는 보도록 하지.”
-그걸로 충분해.
케일은 조금 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거래는 얼어 죽을.’
이 빌어먹을 신 새끼와 그딴 것 할 생각은 전혀 없는 케일이었다.
‘신전 지하에서 기다린다고?’
그 정보만이 중요할 뿐.
케일은 그저 손에 쥔 짱돌에 힘을 줄 뿐이었다.
-케, 케일? 설마 신을 팰 것인가?
짱돌이 당황해서 말했지만, 케일은 손안에 들어찬 짱돌을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한껏 올릴 뿐이었다.
* * *
클로페 세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무너뜨린 감옥 벽을 넘어섰다. 그리고 진중한 어조로 경건하게 말했다.
“케일 님, 구하러 왔습니다.”
환상 속 케일이 띠꺼운 얼굴로 툭 내뱉었다.
“…그래, 어서 와. 클로페 경.”
“클로페는 역시 맛이 갔다!”
라온의 추임새가 들린 순간, 클로페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역자 클로페 세카를 잡아라!”
“적들이 도망친다! 조력자는 클로페 세카!”
“저놈들을 잡아! 도망가게 둬선 안 돼!”
곧 흐뭇한 미소가 클로페의 입가에 번졌다. 그는 뿌듯함을 담아 껄끄러워하는 얼굴의 케일에게 다시 말했다.
“어서 나가시죠.”
그때, 그는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분노를 모두 해소하였습니다.
클로페 주위를 검은빛이 뒤덮기 시작했다.
“참으로, 빌어먹을 시험이구나. 가장 말도 안 되는 환상이었어.”
담담하게 읊조린 클로페는 완전히 어둡게 변한 세상 속에서 붉은빛을 보았다.
“……!”
그 붉은빛은 시뻘건 눈동자로 변했다.
그것이 눈동자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클로페의 시야는 전부 붉은빛으로 휩싸였다.
“크윽.”
그는 눈을 찌르는 빛에 잠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가 사방이 조용해지자,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제야 클로페는 하얀 대리석으로 가득한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내가 첫 번째군.”
클로페는 제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자동 마법 영상저장구, 신호탄 등등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있었다.
#
154장. 다 보고 있다
“미치겠다!”
라온이 날개를 파닥였다.
“돌겠다!”
라온은 정말로 빙글빙글 신전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뚝 멈춰 서서 신전 위에 뜬 거대한 구를 응시했다. 여섯 조각으로 나뉜 구는 툰카가 나오자 한 조각이 빛을 잃고 오로지 다섯 조각만이 각자 다른 빛을 뿜어냈다.
그 빛깔은 모두 환상 시험의 단계와 비슷했다.
그리고 현재, 모든 조각이 마지막 검은색 ‘분노’ 시험으로 물들어 있었다.
라온은 통통한 두 앞발로 제 볼을 움켜쥐었다.
“할배야! 인간, 혹시 맛이 간 것 아니냐!”
“어휴.”
에르하벤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온은 심각했다. 통통한 앞발이 검은빛을 뿜어내는 다섯 조각 중 한 개로 향했다.
“저거 봐라!”
라온의 검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인간이 고대의 힘을 엄청, 진짜 엄청 쏟아붓고 있다! 이상하다!”
케일이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조각은 분노 단계에 접어든 후, 한동안 케일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라온은 조금 전부터 엄청난 힘의 파동을 느꼈다.
“이건 하얀 별 잡았을 때보다 더하다!”
케일이 고대의 힘 피에 젖은 돌을 처음 이 세상에서 사용했을 때. 그때 그에게서 느껴졌던 그 압박감, 압도감을 넘어선 강렬한 기운이 지금 쉴 새 없이 저 조각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리 환상이라도, 인간의 몸은 인간의 몸이지 않은가! 인간, 쓰러지면 나는, 나는!”
라온은 결국 외쳤다.
“신전 폭발시킬 거다!”
“어휴.”
에르하벤은 골이 아파와 손으로 머리를 꾹꾹 눌렀다.
‘도대체 그 박복한 녀석은 저 안에서 뭔 짓을 하는 거야?’
분노 시험이라더니, 다 때려 부수고 있는 건가?
“…설마 그렇겠어?”
아니다.
‘그럴 것 같군.’
케일 헤니투스는 다른 감정 표현에는 조금 빡빡한 면이 있어도 때려 부수는 쪽으로는 그 성질머리를 야무지게도 드러내는 편이다.
고룡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했다. 신전 문 앞에 걸터앉은 채 조각을 응시하는 알베르 크로스만의 모습이 담겼다.
“골치 아프군.”
며칠이 흘렀던가.
신전은 24시간, 하루를 쉬이 넘기더니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 문을 결코 열지 않았다.
‘…지치겠지.’
고룡은 지친 알베르를 보며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박복하고 지독한 것들.”
그 목소리에는 안쓰러움과 함께 질린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쯧.”
이를 전혀 듣지 못한 알베르 크로스만은 기사단장의 보고를 들으며 씨익 웃고 있었다.
“할배야! 왕세자가 또 웃는다! 하얀 별 잔당 또 처리했나 보다!”
“그래… 기회를 놓칠 놈이 아니지.”
알베르 크로스만은 며칠째 계속된 상황에 가만히 머물러있지 않았다.
“저하. 동대륙에서도 몰든 왕국 조피스 왕으로부터 소식이 왔습니다.”
“보고서는?”
“여기 있습니다.”
동서대륙 곳곳의 동맹으로부터 현 대륙의 상황들이 속속들이 알베르의 손아귀로 쥐어졌다.
알베르가 동맹에게 요청한 것은 별것 아니었다.
어려운 요청이 아니었다.
‘케일 헤니투스가 하얀 별을 잡았으니까.’
하얀 별 쪽의 강자들은 모두 잡았다.
그런 상황에서 잔당 처리야 그들의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저하.”
그때, 기사단장이 은밀히 알베르의 가까이로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전하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알베르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제드 크로스만. 로운의 현 국왕.
“…발걸음이 무거우신 분께서 용케도 오시려는구나.”
알베르에게 왕정과 더불어 크로스만가에 대한 비밀까지 넘겨버리고는 뒷방 늙은이 행세를 하는 국왕. 그가 어찌하여 잠자코 있다가 며칠 전부터 퍼슬시에 오겠다고 난리를 부리는 걸까.
알베르는 유유자적 느긋하게 굴지만, 여전히 서늘한 국왕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국왕의 꿍꿍이가 짐작 가지 않는 알베르였다. 그러나 아직 왕위를 이어받은 것도 아닌 상황인지라 퍼슬시를 보러 온다는 국왕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그냥 왕 될 걸.’
눈앞의 기사단장이 들으면 기겁을 할 말을 무심히 속으로 내뱉은 알베르는 조잘거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위로 올렸다.
고룡과 어린 용이 이곳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할배야, 나 자러 가기 싫다!”
“밥 먹고 자야 된다.”
“싫다! 요새 자꾸 꿈꿔서 자기 싫다!”
“악몽도 아니라며?”
라온은 알베르의 옆에 놓인 과자 통에서 쿠키를 꺼내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아니다!”
“그럼 무슨 꿈인데?”
고룡 에르하벤의 물음에 라온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다! 그냥 시끄럽다!”
하지만 라온은 거기서 말을 끝내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우물거렸다. 그 모습에 에르하벤과 알베르, 기사단장의 시선이 향했고, 라온은 한 글자를 결국 내뱉었다.
“…도-”
“도?”
에르하벤이 의아하게 바라볼 때, 라온은 밝은 얼굴로 외쳤다.
“도-, 맞다, 도담!”
“그게 뭐야?”
“나도 모른다! 그냥 도담만 들린다!”
알베르가 온화한 얼굴로 라온에게 새 쿠키를 내밀었다.
“라온 님께서 많이 피곤하신가 봅니다. 그냥 고단해서 꾼 꿈 같군요.”
“음.”
라온은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좀 아닌 거-, 커헉!”
라온은 입에 있던 쿠키를 뱉어버렸다.
그리고 신전 주위를 거닐던 온과 홍이 냅다 라온에게로 달려왔다. 홍이 놀라서 외쳤다.
“보이는데!”
라온은 신전 위에 뜬 커다란 구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마, 맛, 맛이 간 놈이다!”
여섯 개의 조각 중. 하나의 조각에서 검은빛이 걷어지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 녹안.
북부의 수호기사 클로페 세카.
그가 고고한 얼굴로 여유로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의외군. 저 녀석이 처음으로 시험을 통과한 건가?”
에르하벤이 놀랐을 때.
“…역시.”
알베르가 묘하게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들은 당연히 클로페가 ‘포기’를 외치며 신전 밖으로 나오거나 혹은 다른 동료를 돕거나 혹은 신전을 해체할 방법을 찾으리라 생각했다.
“음?”
“응?”
그러나 클로페 세카는 품에서 그가 투자하여 개발한 자동 영상저장구를 꺼내 들더니 이를 닦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뭐 하는 거지?”
에르하벤이 의아해할 때, 라온이 맑게 외쳤다.
“맛 간 놈 생각은 알려고 하면 피곤하다! 인간이 그랬다! 이해할 필요 없댔다!”
“맞는데!”
“맞는데.”
뒤따라 홍과 온이 외친 말을 어른들은 가만히 듣다가 이내 다시 클로페 세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만이 그곳에 시선을 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변화에 신전 아래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몇몇 사람들이 신전을 향해, 알베르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르하벤 이 모든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은 우리가 보는 줄 모르는 것 같은데.”
클로페 세카는 얌전한 미소를 띤 채 굉장히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 * *
케일의 시선이 퍼슬시 중앙에 위치한 신전으로 향했다.
성스러웠던 그것은 더 이상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아,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하나!”
“케일 헤니투스!”
알베르, 라온이 각각 케일을 막아섰다. 물론 둘 다 케일의 표정을 보고는 말을 바꿨다.
“같이 가지.”
“같이 간다, 인간아!”
“뭐, 그러죠.”
짱돌을 손에 꽉 쥔 채 담담하게 답하는 케일은, 입가에 흐르는 핏물만큼 상당히 살벌해 보였다. 여유로운 모습이 더욱더 뭔가 사고를 칠 것만 같은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케일은 알베르에게 웃어 보였다.
“그럼 부축 좀.”
어휴.
알베르는 한숨을 내쉬며 케일에게 등을 내밀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등을 내밀어본 적 없는 알베르였지만 저 꼴을 보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면 되냐?”
“…뭐 하세요?”
알베르는 고개를 돌렸고, 라온의 공중 마법으로 허공에 붕 뜬 채 통통한 앞발 부축을 받고 있는 케일을 볼 수 있었다.
똑바로 일어선 알베르는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지?”
“신전 지하요.”
“가자, 인간아!”
라온은 마법으로 케일을 이동시켰다.
케일은 신전 지하로 향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난장판이네.’
곳곳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폭발이 일어난다.
한낮의 밝은 광경 대신 곳곳에서 피어오른 먼지와 폭발 잔해로 시야가 뿌옜다. 거기다가 신전이 부서지며 피어오른 불길로 살벌한 광경을 만들어내었다.
그곳을 케일은 산책하듯이 마법으로 둥둥 뜬 채 지나갔다.
누구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물론 싸우지 않고 헤매다 케일과 눈을 마주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적도 아군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들로 대부분 전력에서 열외된 추종자들이었다.
추종자들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케일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처음 그를 향해 날을 세웠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드러냈다.
신이나 다름없는 하얀 별을 추락시켰으니까.
“어딜!”
그때, 라온의 목소리와 함께 케일은 검은 실드가 공중에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었고, 부서지는 검은 실드 너머 하얀 별이 재해를 담은 불의 검을 이쪽을 향해 휘둘렀다.
쾅!
짧은 폭발음과 함께 그 앞은 금빛 가루가 막아섰다.
에르하벤이 뒤에서, 오른쪽에서 드래곤 밀라가. 각기의 방향에서 하얀 별의 숨통을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그 순간, 하얀 별과 케일의 시선이 마주쳤다.
피식.
케일은 짧은 웃음을 남기고 하얀 별을 외면했다. 그러나 알베르와 눈이 마주쳤고.
“끝났습니다, 저놈은.”
그가 내뱉는 말에 알베르는 묘한 표정으로 케일을 바라보다가, 하얀 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감히, 감히-!”
하얀 별이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겨우 한 번, 만신창이 꼴로 겨우 한 번 이겨놓고-!”
그 외침은 상당히 커서 알베르에게도 들렸고, 그제야 알베르는 웃음을 흘렸다.
“인정했네.”
분명 하얀 별은 케일이 이겼다고 인정했다.
만신창이로 이겼든, 겨우 한 번 이겼든.
이긴 건 이긴 것이고, 이것은 이제 무너질 하얀 별의 시작이 될 터.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그 말을 남기고 알베르는 고룡에게 인사를 하고는 하얀 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심장이 뛰었다. 하얀 별은 더 이상 이겨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더불어 왜 케일 헤니투스가 신전 지하로 향하는지 알아챘다.
‘남은 건 신뿐이지.’
남은 적은 절망의 신뿐이다.
그렇기에 알베르는 놀라웠다.
‘미친놈.’
분명 알베르는 짱돌을 쥔 케일의 손을 보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 짱돌은 안 놓더라.
무슨 생각인지 빤히 보였다.
‘신이랑 한판 한다는 것이겠지.’
물론 그 생각에 대해 의문도 많았다.
신을 만날 수가 있나?
신전 지하에 뭐가 있는 건가?
신을 짱돌로 패는 것이 가능한가?
하지만 그런 의문은 접어두었다.
‘생각이 있겠지.’
케일은 나름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 알베르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케일, 케일! 설마 아니지?
정말 아쉽게도.
케일은 현재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크아아악!”
“으으, 도, 도망가야 해!”
“불이야, 불!”
“신전이, 신전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다니… 아…….”
케일은 신전의 입구를 지나는 순간, 라온의 공중 마법을 멈춰 세우고 발로 땅을 딛고 섰다.
‘확실히 피를 토할수록 상쾌해진단 말이지.’
케일은 잠깐의 휴식과 피 토하기로 한결 나아진 신체를 느끼며 도망치고 부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지하로 향했다.
“라온.”
“왜 그러나, 인간?”
“최한 좀 보고 와.”
콰아앙—!
쾅! 콰앙!
위층에서는 현재도 갖가지 폭음이 들리며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부수기 혹은 일방적인 제압에 가까울 터. 로잘린과 최한. 마법과 검. 그 두 사람이라면 능히 그런 상황을 만들 것이다.
“알았다, 인간! 대신에… 허튼짓하면 나… 다 부순다…….”
나직이 읊조리는 라온의 검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케일은 하얀 별보다 살벌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알았어.”
그가 즉답하자, 그제야 라온은 날개를 파닥이며 신전 상층부로 향했다.
“그럼 나 갔다 온다! 왕세자야, 우리 인간 잘 부탁한다!”
이제 케일과 알베르만이 남았다. 여전히 사방은 시끄러웠지만, 어쨌든 그들로서는 신경 쓸 사람이 서로밖에 없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알베르였다.
“뭐 할 거지?”
확신을 담은 목소리에 케일은 답했다.
“저 죽지 않을 거고. 간단하게 짧은 대화만 나눌 겁니다.”
“…그래서?”
“지하 입구 앞에서 누구 못 들어오게 막아주십시오.”
“…싫다면?”
“제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누구밖에 더 있습니까?”
하아.
알베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긴. 최한에게 하겠어, 라온 님께 하겠어. 누구에게 하겠나?”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인 나밖에 없지.”
알베르는 케일을 지나쳐 신전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섰다. 계단은 신전 1층 가장 북쪽 막다른 벽 가운데에 자리해 있었다.
퍽!
“크윽!”
알베르는 쓰러진 하얀 별 수족의 배를 가볍게 차고는 그의 밑에 깔려있던 멀쩡해 보이는 장창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이를 휙휙 돌리며 케일을 응시했다.
“가.”
탁.
장창이 바닥을 살짝 찍었고, 알베르는 계단 앞에 서서 계단과 등지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저하.”
케일은 짧은 인사를 건네고는 알베르를 지나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밑에는 적이 없으려나?”
흘러가듯 건넨 물음에 케일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없을 겁니다. 저를 공격할 존재는요.”
봉인된 신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부른 것이니까.
케일은 더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알베르는 납득한 듯 잠시 말이 없다가 한마디를 더 던졌다.
“다치진 말고. 5분 내로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간다. 왕세자를 기다리게 하다니, 너도 대단해.”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케일은 지하로 향했다.
타닥. 타닥.
지하로 내려갈수록 세상은 조용해져 갔다.
더불어 어두워지며 양 벽에 붙은 마법 횃불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기군.”
그렇기에 케일은 언제 봉인된 신과 이야기를 나눌지 알 수 있었다.
타닥. 타닥.
계단을 내려올수록 점점 횃불은 사라져갔고, 곧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나타났다.
저곳이 이야기를 나눌 장소이리라.
어둠 앞에서 케일은 발을 멈췄다.
-어서 오게.
그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봉인된 신.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 보았던 그 눈동자였다.
“할 이야기가 무엇이지?”
-바로 본론인가?
당연한 물음이었다.
케일로서는 봉인된 신과 할 이야기가 없었다.
다만 도대체 무슨 거래를 하자는 것인지 궁금했을 뿐.
-케일, 케일! 손에 힘 빼라! 그러다 네 손바닥 까져! 짱돌은 안 다친단 말이다!
짱돌의 호들갑을 흘려들으며 케일은 가만히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는 평소와 달리 차분했다.
-그래. 바로 본론을 말하도록 하지.
봉인된 신은 태연히 말했다.
-나를 밖으로 빼내어 주게.
…뭐라고?
-네 포용으로 나를 봉인해 신전 밖으로 빼내어 준다면, 나는 사냥꾼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붉은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신 나는 너에게 사냥꾼에 대한 정보를 주고, 너와 네 주위가 안전하도록 지켜주마. 내 신의 격을 걸고 맹세할 수 있네. 죽음의 신을 불러다가 맹세를 해도 좋아.
봉인된 절망신은 초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진심이고, 내 말은 모두 사실이야.
짱돌이 외쳤다.
-오, 케일! 손에 힘 풀어! 손바닥 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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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은 손에 힘을 풀었다. 짱돌이 안도를 담아 외쳤다.
-잘했다, 케일! 잘 참았다!
일단 대화는 하겠다는 듯 케일이 고개를 까딱이자, 붉은 눈동자는 천천히 케일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사냥꾼이 왜 나에게 피해를 끼칠 것이라 생각하지?”
-네가 가진 몸은 템스가 핏줄이니까.
케일의 친모 주르 템스. 그녀의 가문인 템스가는 사냥꾼에 의해 멸문되다시피 했다.
그 사냥꾼들은 가문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본래 일곱 가문이었으나, 현재는 다섯 가문뿐이라는 사냥꾼 가문. 사라진 두 가문은 붉은 피, 하얀 피로 불렸다.
“템스 가문은 일곱 가문 중 하나였나?”
-큭.
붉은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고작 은둔해서 연구나 하던 혈족이, 그 맹한 것들은 사냥감일 뿐이야.
케일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좀… 듣기 기분 나쁜데?’
좀이 아니라, 많이 기분 나쁜데?
-아.
봉인된 신은 잠시 탄식을 흘리며 케일의 눈치를 살폈다.
-넌 템스가가 아니라서 편하게 말했다만,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짱돌이 그 순간 말했다.
-…상당히 저자세구나.
이전과 달리 봉인된 신은 즉각적인 사과와 함께 케일의 기분을 신경 썼다.
케일은 한결 무덤덤한 얼굴로 품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 들었다.
황금패.
하얀 별이 포용되어있는 물건이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겪은 모든 일의 배후는 사냥꾼이 맞지?”
-흐음.
붉은 눈동자는 케일을 살피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얀 별은.
사냥꾼이 배후냐고 물었건만, 봉인된 절망의 신은 하얀 별에 대해 언급했다.
-하얀 별, 그놈은 소중한 것을 무조건 잃는 저주를 받았다.
천년 동안 기억을 지닌 채, 자아를 지닌 채 환생을 거듭해온 존재.
-그 녀석에게는 기나긴 시간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스스로에게만 해당되는 일. 소중한 것을 둘 수 없는, 그런 놈에게 어찌하여 그렇게 나름 충성스러운 수하들이 있을 수가 있을까?
곰족 왕, 사자족 왕을 비롯한 하얀 별의 충직한 수하들.
-또한 그 수하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힘을 지녔지.
-사자족 왕이 어둠 정령을 먹어서 다루고, 곰족 왕이 빛 속성 고대의 힘을 다루고.
-그런 힘을 얻는 게 쉬울까?
붉은 눈동자는 조금 더 케일 가까이 다가왔다. 눈동자는 어둠으로 들어서는 경계선 바로 앞에 멈춰 선 케일에게 속삭였다.
-그 수하들이 힘을 우연히 얻었을까?
-하얀 별이 얻은 고대의 힘들도 과연 그가 스스로 알아낸 것일까?
크큭.
붉은 눈동자는 웃었다.
-본인들은 스스로의 능력이거나 행운인 줄 알겠지.
-모두 우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글쎄.
신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상에 우연은 많지만, 그 녀석들에게 우연은 없는 것 같군.
케일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두운 천장에는 어떠한 빛도 없었다. 그는 손에 쥔 황금패에 힘을 주었다.
“하얀 별도 장기말이다?”
붉은 눈동자는 다시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런 셈이지.
신은 읊조렸다.
-이 신전이 열리면 하얀 별은 나를 잡아먹고 본인이 신이 될 줄 알았겠지.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반대가 되었을 거다.
-내가 놈을 잡아먹었을 테니까.
신은 조금 즐겁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 그놈만큼 절망을 집어먹고 산 영혼은 없거든. 안 그렇겠나?
케일은 황금패를 내려다봤다.
-기약 없는 삶의 반복 동안, 그놈은 소중한 것들을 무수히 잃었을 것이다. 인간인 이상, 실수로라도 무언가를 아끼거나 소중히 여기거나 정을 줄 수밖에 없거든. 그리고 그 녀석의 저주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죽어야 했지.
-아마 죽음의 신도 지금 그런 저주를 왜 만들었나 후회 중일걸?
한 걸음.
붉은 눈동자와 케일 사이의 거리였다. 신의 눈동자는 황금패를 응시했다.
-아쉬워. 그 영혼을 잡아먹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텐데.
“하얀 별은 결국 사냥꾼이 너를 위해 준비한 제물이군.”
무심한 얼굴의 케일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
-…….
잠시 말없이 붉은 눈동자는 케일에게서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봤다.
-나에게 줄 제물이었지만, 나를 위해서 한 행동은 아닐 것 같군.
“너와 사냥꾼은 사이가 틀어졌나?”
눈동자에 웃음이 서렸다.
-내가 그걸 왜 다 너에게 말해주지?
“아쉽네.”
케일은 황금패를 품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 답해 주길래, 물어봤지.”
-이 이상은 너와 내가 거래를 성사하면 말해주지. 그때는 말할 수밖에 없겠지. 자네와 나는 일종의 협력 관계일 테니까.
케일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어렸다. 붉은 눈동자는 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케일은 진심으로 깊은 고민 중이긴 했다.
‘거래하는 척 속일까?’
아니면.
‘그냥 팰까?’
귀찮은데.
계속된 환상 시험에 지친 케일이었다.
다른 상황이지만 어쨌든 반복되는 느낌을 주는 시험에 심신이 조금은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래, 그냥 팰까?’
신이 주는 사냥꾼에 대한 정보?
‘저하한테는 미안하지만, 제드 국왕 쪼면 뭐가 나오긴 나오겠지. 아니면 케이지 씨한테 부탁해서 죽음의 신 데려오라고 하지, 뭐.’
제드 국왕도, 파문된 신관 케이지도. 물어볼 사람은 많았다. 무엇보다도 템스가 사람이 현재 퍼슬시에 있었다.
‘정 안 되면 죽음의 신보고 최정건 좀 보내달라고 하면 되지 않나?’
최정건이면 아마 다 말해줄걸?
케일의 시선이 붉은 눈동자로 향했다.
‘근데 굳이.’
정말, 굳이.
‘저 시뻘건 눈동자 새끼를 달고 다니면서 신경 써야 할 필요가 있나?’
케일은 고민했다. 짱돌을 쥔 손에 힘을 준 채.
그리고 결정했다.
‘믿을 놈을 믿어야지.’
분명 이놈은 지금 이렇게 굴어도 어디선가 뒤통수를 치려고 할 것이다.
케일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붉은 눈동자가 조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네 편의는 얼마든지 봐줄 수 있다.
“이 거래는 비밀인가?”
케일이 던진 질문에 붉은 눈동자는 기쁜 기색으로 답했다.
-원하면. 어느 누구도 너와 내 사이의 계약을 모를 거다.
“거래는 어떻게 하면 되지?”
-시험이 끝나면 신전 끝으로 가라. 그곳에 가면 벽에 조각상이 하나 있다. 그것을 포용하면 돼.
케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저 시험을 끝낸 동료들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걱정 마라. 아무도 너보다 빨리 시험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래?
-정말이다. 나는 오늘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내 신격을 걸려면 걸어도 돼.
“믿는다?”
사뭇 케일이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붉은 눈동자는 호선을 그렸다. 저 풀어진 분위기가 긍정적인 뜻임을 알아챘으니까.
-그래, 믿어도 된다.
“그래. 믿어야지.”
케일은 반걸음 가까이 붉은 눈동자에게로 다가갔다.
“너 말고 내 감을.”
-…뭐?
붉은 눈동자와 반걸음 떨어진 그 사이.
케일은 쥐고 있던 짱돌을 드디어 놓아주었다.
휘이이–
짱돌이 회오리바람을 함께 머금게 해주며.
케일은 붉은 눈동자 코앞까지 빠르게 당도한 짱돌을 보며 무심히 내뱉었다.
“폭파.”
콰아아아아—!
곧바로 짱돌이 폭발했다.
바람과 함께, 짱돌, 피에 젖은 돌, 지배하는 아우라를 담고 있던 작은 돌멩이가 산산조각이 나며 붉은 눈동자를 덮쳤다.
-끄으, 끄아아아아—!
지하가 흔들렸다.
케일은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매만지며 담담하게 말했다.
“분노가 사라지는데?”
진짜로, 분노가 사라져 갔다.
후련함이 그의 마음을 채워나갔다.
-크아아아—! 저, 저 인간 놈이-!
절망의 신이 분노를 토했지만. 아쉽게도 케일은 별달리 신경 쓸 재량이 없었다.
“어이쿠, 시험이 끝나려나 보네?”
사방이 어둡게 변해갔다.
봉인된 신.
절망의 신이 만드는 시험은 일정한 규칙을 통해 진행되었다.
봉인된 신이 스스로의 힘을 사용하면 간섭이 가능했지만, 기본적인 시험의 규칙과 틀은 바꾸지 못했다.
아마 이번 케일을 만난 것도 봉인된 신이 가진 꽤 많은 힘을 쓴 터일 것이다.
쿠구구궁—
신전 지하 전체가 흔들렸다. 이대로 가다간 부서질 것 같았다.
케일은 자신을 제외하고 어둡게 변해가는 세상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야! 이거 무슨-”
알베르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끄아아악—!
-지지직, 지직… 분노를 모두 해…지지직, 해소하였… 지지칙.
신의 비명 사이로, 시험이 끝을 고했다.
“안녕히 계세요.”
케일은 가볍게 알베르를 향해 인사를 건네고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금이 가는 눈동자는 마치 실핏줄이 터진 것 같았다.
-거래를, 나와의 거래를… 감히……!
케일은 가지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니를 믿냐? 차라리 클로페를 믿지.”
시험은 끝을 고한 대로, 부서지는 붉은 눈동자도 검은 기운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크크.”
케일은 입가를 쓸어내렸다.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환상이 맞았다.
몸 상태가 상당히 좋았다.
-케, 케일…헤, 헤니투스—!
붉은 눈동자를 보며 케일의 가지런한 미소는 점점 스산한 빛을 띠었다.
봉인된 신. 기다려. 부수러 갈 테니까.
솔직히, 너 환상 밖에서는 힘도 못 쓰잖아. 그래서 시험 안에서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구는 거 아냐.
“기대해.”
케일은 읊조렸다.
“현실은 가혹하다는 걸 알려줄 테니까.”
사냥꾼 정보?
그 정보는 얻을 데가 많고. 거기다가 ‘아, 이러다 나는 산산조각이 나겠다. 박살이 나겠다.’ 싶으면 절로 정보를 술술 내뱉을 거다.
그러고도 남을 놈, 아니, 신이다. 정보야 그때 얻으면 되지.
완전히 어둡게 변한 공간.
그 사이로 케일은 저를 덮치는 붉은빛을 보았다.
“음.”
눈을 찌를 듯한 빛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곧바로 눈을 다시 떴을 때.
“…정말 끝났군.”
케일은 하얀 대리석으로 가득한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네.”
꽤 넓은 홀은 하얀 대리석으로 공간을 만들고 있을 뿐, 사람의 온기 하나 없었다. 흔적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케일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형 홀에는 입구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정말 내가 제일 먼저 나온 건가?”
아직 케일을 제외하고 이 시험을 통과한 자가 없다는 봉인된 신의 말. 신이 신의 격을 걸려면 걸어도 된다고 했으니, 진실일 수도 있겠지만.
-케일, 몸은 괜찮나?
짱돌의 물음에 케일은 하던 생각을 잠시 한편으로 접어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방향은 이곳의 유일한 입구였다.
문은 없었다.
그저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기다란 대리석 복도가 쭈욱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저 끝에 봉인된 신이 말한 신전의 끝. 그가 봉인된 공간이 나올 터.
케일은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대리석으로 된 벽을 매만졌다.
툭툭.
그 질감을 느끼던 그는 곧 짱돌 힘을 일으켰다.
-너, 설마!
짱돌이 당황하면서도 이해한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을 때.
쩌저적-
대리석 일부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 장소는 복도와 홀로 이어지는 입구였다.
“신전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알았다. 조절해보지.
쩌저적- 쿵!
대리석 일부가 부서지며 홀과 복도를 잇는 입구를 막아버렸다.
짱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동료들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함인가?
케일은 막힌 입구를 보며 뒤돌아 복도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굳이 안 좋은 광경을 보여줄 필요가 없지. 내가 감당할 일이야.”
-…….
짱돌은 한숨을 삼켰지만,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저벅저벅.
아름답고 화려한, 세월이 느껴지지 않는 하얀 대리석 복도를 걸어가는 케일의 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는 품에서 나무로 된 작은 검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 * *
“지금, 지금 인간 뭐 하는 거냐? 할배야! 인간 하는 말 들었나? 안 좋은 광경이 뭐냐!”
“어휴. 저, 저 박복한 놈이!”
“…돌겠네.”
알베르는 두 용의 대화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곳에 시선을 두었다.
“…여기도 저기도 돌겠네.”
신전 끝에 도달한 클로페 세카가 곳곳에 자동 영상저장구를 설치하고 있었다. 얌전하게 웃으면서.
알베르 크로스만은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검은색을 띠던 조각이 클로페 세카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한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조각도 검은색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난 이는 케일 헤니투스였다.
그 행색을 살펴보니, 신전에 들어가기 전과 별 차이 없이 멀쩡했다.
‘라온 님이 케일이 고대의 힘을 마구잡이로 사용한다고, 그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지만.’
다행히 그것은 시험 속에서 펼쳐진 환상이었던 듯. 케일의 상태는 멀쩡했다. 얼굴 안색도 괜찮았고, 특히 표정에서 별다른 힘듦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날뛰면서 다 부수고 다녔나 보네.’
피식.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웃음의 정체는 안도감이었다.
그때만 해도 알베르는 곧 클로페 세카와 케일 헤니투스가 만날 것이고, 케일 헤니투스에 의해 뭐든지 결판이 나겠다 싶었다.
‘일단 급한 일 아니면 숫자로 밀어붙이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니, 다른 이들을 기다리겠지. 드러누워서 한가하게 놀면서 말이지.’
케일이라면 이제 와서 ‘포기’를 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상천외한 작전을 짜서 모두 해결을 하고 나올 생각이리라.
그러나 알베르는 곧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케일 헤니투스가 홀과 복도를 잇는 입구를 무너뜨리며 공간을 분리시켜 버렸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무너지는 입구를 보며 담담한 케일 헤니투스의 표정을 보는 그때.
알베르는 머리가 아파왔다.
‘저 자식이 또 무슨 짓을 하려는구나.’
여러 번의 경험이 불러오는 확신이었다.
알베르는 고룡 에르하벤과 시선이 마주쳤다. 불안해하는 라온과 놀라서 다가오는 온, 홍 때문에 에르하벤은 크게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알베르와 같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결국 에르하벤은 한숨처럼 내뱉었다.
“저 박복한 놈이 또……!”
또.
그 한 글자에 담긴 것은 참으로 많았다.
알베르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내뱉으려다 다가오는 측근을 보며 더 깊은 한숨을 내뱉어야 했다.
“저하. 곧 전하께서 오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지금 이 상황에 저하께서 자리를 비울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제드 국왕이 이곳에 온다.
알베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클로페 세카의 모습이 신전 위에 뜬 구의 조각을 통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간 각자의 공간에 머물고 있던 각국의 수뇌부들이 신전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지금 현재 케일 헤니투스를 비추는 조각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베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부술까.”
에르하벤이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 뭘 부수냐는 의문은 표하지 않았다. 보나 마나 신전이었으니까.
다만 에르하벤은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자신이나 라온이나 온, 홍이 아닌 알베르라 놀라울 뿐이었다.
“자네…….”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아직 환상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데, 함부로 신전을 공격할 순 없죠.”
다만 최한, 메리, 로잘린도 곧 시험을 끝마치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알베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복도를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는 케일 헤니투스의 망설임 없는 모습.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게 불안함이 일었다.
‘도대체 저 자식 지금 무슨 생각 중이지?’
그때, 알베르는 제 다리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을 느끼고는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냐아아옹.
은빛 고양이 온이 알베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베르는 고개를 들어 홍과 라온이 꼭 붙은 채 케일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다시 숙였다.
“왜 그러지?”
“저번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는지 궁금한데.”
온이 했던 말?
알베르는 온이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이 무엇이 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프다고…….”
그러나 온이 덧붙이듯 중얼거린 말에 알베르는 어떤 한 장면이 번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케일이 하얀 별과 싸우고 난 후 혼잣말을 중얼거린 것을 온과 홍이 들은 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 내용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며, 온은 라온, 에르하벤, 그리고 알베르에게 말했었다.
‘‘별로 안 아프겠지?’라고 황금패를 만지면서 중얼거렸는데!’
‘맞아요. 보통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상한데.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홍과 온이 나란히 건넸던 말.
알베르는 온과 시선을 마주하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금 저 녀석이 아플 일이 뭐가… 있지?”
퍼뜩 그의 시선이 케일 헤니투스가 나타난 조각으로 향했다. 그러다 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케일 헤니투스의 손에 들린 단검.
알베르는 저 단검에 대해 케일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아까 케일 헤니투스, 네 말대로라면, 세계수가 준 단검으로 하얀 별의 무한한 환생의 맥을 끊을 수 있단 소리지?’
‘네. 이렇게 해야 하얀 별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 겁니다.’
그 대답을 하던 케일 헤니투스는 움찔거리며 묘하게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알베르는 온이 했던 말까지 함께 머릿속을 채우며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설마 저 단검으로 뭘 하려고 하나?’
그는 전과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케일 헤니투스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 * *
케일은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곧 끝이군.’
그저 금방 끝내고 나가서 쉴 생각뿐. 꽤 긴 복도를 걸어가는 케일의 시선에 복도 끝이 담겼다.
홀에서 복도를 잇는 입구에 문이 하나도 없던 것과 달리 복도 끝에는 하얀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케일은 봉인된 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험이 끝나면 신전 끝으로 가라. 그곳에 가면 벽에 조각상이 하나 있다. 그것을 포용하면 돼.’
그는 그 말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했다.
‘저 문을 열면 신전 끝일 테고, 벽에 있는 조각상에 신이 봉인되어 있을 것이니.’
간단하다.
“부수면 되겠네.”
-…….
짱돌이 뭐라 우물거렸지만, 케일은 제대로 들리지 않아 가볍게 무시하였다.
‘일단 신보다 그 녀석을 먼저 처리해야겠군.’
하얀 별이 먼저다.
혹시 신전을 잘못 건드렸다가, 아직 동료들이 시험도 끝내지 못했는데 신전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다른 동료들 시험이 끝나기 전에, 하얀 별을 처리하고 신전은 같이 처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케일은 복도의 끝에 자리한 문으로 향하며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지금 그가 이렇게 행동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던 정보들.
처음은 케일이 이 몸의 친모인 주르 템스의 일기장을 얻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억을 잃지 않은 채 끊임없이 생을 반복하는 존재. ‘환생자’.
템스가에서 알아낸 그 환생자를 완전히 죽이는 방법.
‘환생자의 기억. 즉, 가장 기본이 되는 커다란 나이테. 그것을 없애면 된다.’
템스가에서 내려져오는 힘인 ‘생명체의 나이테를 보는 능력.’
나무 속성 고대의 힘 ‘생의 나이테’.
나이테는 생명체의 영혼에 새겨진 시간의 기록이라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수많은 생을 반복하는 환생자는 본래 가진 하나의 커다란 나이테 안에 반복된 수많은 삶의 나이테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 근간이 되는 가장 커다란 나이테를 없애야만 진정으로 환생자를 막아서는 것이 된다.
“일단 전제 조건을 달성했지.”
즉, 일단 ‘나이테’를 볼 줄 알아야 환생자를 공격할 수 있었다.
케일은 주르 템스가 지녔던 고대의 힘 ‘생의 나이테’를 그녀의 일기장 속에 포용함으로써 이 힘을 다시금 꺼내 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환생자를 공격할까?
무슨 방법으로?
그것 역시도 주르 템스가 알려주었다.
‘환생자의 수많은 나이테는 그 세월만큼 강대한 영혼의 힘을 지녔다.’
마법도, 검도, 고대의 힘도 안 된다.
‘천년을 산 용과 천년 동안 삶을 반복한 환생자를 비교해보면, 환생자의 나이테가 더 강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환생자의 나이테를 없애려면 더 기나긴 세월이 담긴 나이테를 지닌 자의 힘을 통해 공격하여야 파괴가 가능하다.’
답은 죽지 않는 존재인 불멸자, 세계수였다.
케일은 그 뒤 세계수를 만나러 갔고, 그를 통해 하얀 별이 지닌 나이테를 공격할 수단을 얻게 된다.
‘결국 내 힘이 담긴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이군.’
세계수는 말했다.
‘만약 그 방법이 통한다면. 진짜배기를 줘야겠군.’
세계수는 땅 속 깊은 곳에 묻혀있던 몸의 일부를 밖으로 드러냈다.
‘나의 생에 있어 가장 오래된 것을 주어야 할 터. 그것이야말로 불멸의 근본이자 내 존재의 일부.’
‘가장 오래 존재한 뿌리의 끝이다.’
지금 케일의 손에 들린 흰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날카로운 나무뿌리 단검.
“…수단도 얻었고.”
하얀 별을 공격할 무기를 세계수를 통해 얻었다.
남은 것은 공격 방법뿐.
그에 대해서도 세계수는 말했다.
‘네 심장의 피를 묻히면, 저 뿌리 검의 힘이 발동할 것이다.’
사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심장이 철렁할 소리였다.
‘내 몸. 이 나무의 일부는 떨어져 나간 후부터, 가사 상태에 빠진다. 이 가사 상태를 깨우려면 ‘치유’ 혹은 ‘재생’의 힘이 담긴 존재의 피가 필요하지.’
‘그 힘은 신의 힘이 아니어야 하며, 생명체 스스로가 가진 힘이어야 한다. 또한 그 힘의 가장 중심이 되는 시작점에서 얻은 피여야 하지. 그렇게 이 뿌리를 일깨운 피의 주인만이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재생 능력을 지닌 고대의 힘 ‘심장의 활력’을 가진 케일. 그의 힘은 ‘심장’에서 시작된다.
고로 심장을 찔러 얻은 피가 묻어야만 이 단검은 가사 상태에서 빠져나온다.
“…참나.”
케일은 실소를 흘렸다.
‘결국 하얀 별의 나이테를 보고, 심장의 피를 묻힌 단검으로 그 나이테를 부수면 된다는 거 아냐?’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세계수가 덧붙인 말을 떠올렸다.
‘괜찮네. 죽지는 않아. 피는 조금 많이 나서 보기 흉하겠지만, 오히려 자네에게 보약이 될 걸세. 그건 내가 장담하지.’
세계수가 거짓을 말할 리도, 그럴 이유도 없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케일은 복도 끝에 도달해 하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문고리는 따로 없었다. 그저 밀면 되었다.
케일은 문을 밀기 전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지나왔던 길. 반대편 복도는 아직 무너진 채였다.
다른 동료들은 저기를 넘어오려면 시간이 그래도 어느 정도 걸릴 터.
‘그동안 하얀 별을 정리한다.’
간단한 계획이다.
케일은 손에 힘을 주었다.
끼이이익-
문이 가볍게 밀리며 손쉽게 활짝 열렸다.
케일은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안 그래도 봉인된 신에게 마지막 시험에서 한방 먹이고 나온 상태라, 더 긴장의 끈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문 너머 공간을 확인하고 바로 움직인다!’
탕!
완전히 열린 문이 젖혀진 채로 벽과 부딪쳤다.
신은 말했다.
‘시험이 끝나면 신전 끝으로 가라. 그곳에 가면 벽에 조각상이 하나 있다. 그것을 포용하면 돼.’
케일은 정면에 제단을 하나 보았다.
그리고 가로막힌 벽을 보았다.
드디어 신전 끝에 도달했다.
벽에는 수많은 손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 손들 위로 한 존재가 서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하얀 옷자락을 늘어트린 한 인간.
자애로운 눈빛으로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듯 새겨진 그 모습.
조각으로도 그 모습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저거다.
저게 그 조각상이다.
정말 찰나였다.
케일이 문을 열고 저 조각상을 보고, 저 모습을 눈에 담은 것은.
“빌어 먹-”
눈동자는 붉은 보석이었다.
그것을 케일이 인지한 바로 그때.
“빌어먹을, 신 새끼!”
그 붉은빛이 케일을 향해 쏟아졌다.
저 사이한 붉은빛.
케일은 분명 본 적이 있었다. 봉인된 신이 사용하던 낫에 맺힌 힘이 저 붉은 기운이었다.
절망을 담은 힘.
‘역시 믿는 게 아니었어!’
케일은 환상 밖에서 절망의 신이 어떠한 힘도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신전 안은 봉인된 신의 영역이었다.
만약 케일이 그와의 거래를 수락하고 아무 생각 없이 이 문을 열었다면, 그는 봉인된 신에게 당해 그의 제물이 되었을 터.
‘나뿐만 아니라 하얀 별도 같이 제물이 되었겠지.’
이를 확신할 수 있었다.
하얀 별은 원래 봉인된 신에게 줄 제물이었다고 했으니까.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이 신 새끼가.
“그래, 좋아.”
케일은 황금패를 꺼내 들어 붉은빛을 향해 던져버렸다.
“한 번에 처리하면 편하지.”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온 한 줄기의 사이한 붉은빛은 그대로 황금패와 부딪치며 굉음을 토해내었다.
콰아아아앙—!
황금패는 허무하게 금이 가며 산산조각이 났다.
부서진 매개체.
곧 저 안에서 봉인되어 있던 존재가 나올 것이다.
케일은 뿌리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휘이잉.
바람과 함께 그의 몸이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날듯이 뛰어들었다.
파아앗!
동시에 은빛 방패와 두 날개가 케일을 감쌌다.
케일은 허공을 향해 일기장을 던졌다.
고대의 힘 생의 나이테가 담긴 일기장.
-이제 내 차례구나. 조심해!
주르 템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외친 순간.
촤르르르—!
붉은 일기장이 펼쳐지며, 순식간에 케일 주위를 감싸는 붉은 잎사귀가 나타났다.
그가 과거 이 힘을 만났을 때처럼, 그의 머리칼을 닮은 붉은 잎들이 소용돌이치듯 그를 감쌌다.
케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의 눈가에 붉은 연기가 서리며, 그 눈동자가 순간 새빨갛게 변했다.
‘봉인된 신이 또 다른 짓을 하기 전에, 하얀 별부터 순식간에 해치운다.’
아주 잠깐의 시간만.
찰나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씨익.
케일의 미소가 한껏 짙어진 순간, 그는 하얀 가면을 쓴 지긋지긋한 적과 시선이 마주쳤다.
“푹 쉬었어?”
오랜만에 적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인연도 끝이었다.
그래서 케일은 보지 못했다.
문을 열면 보이는 정면과 달리 사각지대인 곳.
그곳에서 쪼그려 앉아 다섯 번째 자동 영상저장구를 설치 중이던 클로페 세카는 조용하다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복도 반대편. 부서진 대리석 잔해로 막혀있던 입구가 들썩였다. 마치 누군가가 막대기나 검으로 탐색하듯 들쑤시는 것처럼.
클로페 세카는 손이 떨려왔다.
자동 영상저장구를 쥐고 있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지금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지?’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누구보다도 빨리 움직여 자동 영상저장구를 신전 마지막 공간에 설치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위대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곳은 신전의 끝방. 무엇이든 케일 헤니투스가 영웅으로서 마지막 정점을 찍으리라, 클로페는 확신했다.
‘탕!’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그리고 클로페가 움직이는 동안 조용하기만 했던 벽에 새겨진 조각에서 붉은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클로페가 환상 시험 마지막 ‘분노’에서 벗어날 때 보았던 붉은 눈동자를 떠오르게 만드는 불길함이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었다.
‘콰아아아앙—!’
뒤이어 굉음과 함께 붉은빛이 무언가와 부딪치며 폭발했다.
그리고 그 폭발을 향해 뛰어드는 이를 볼 수 있었다.
‘케일 헤니투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챈 순간, 클로페의 눈동자에 환희가 어렸다. 동시에 의문이 서렸다.
‘푹 쉬었어?’
폭발을 향해 케일은 그렇게 사뭇 다정히 말을 건넸다.
‘누구? 누가 쉬어?’
클로페는 케일이 그렇게 말할 만한 대상을 짧은 시간 동안 떠올렸다. 일단 자신에게 케일이 그렇게 말을 건넬 리가 없었으니까.
“…이런!”
콰직.
클로페의 손에 들린 자동 영상저장구에 금이 갔다.
하지만 클로페 눈에 그런 것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의 눈이 커졌고,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놈이다.’
폭발 사이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붉은 머리칼.
‘하얀 별!’
그놈이 이곳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클로페는 격렬하게 심장이 뛰었다.
케일 헤니투스와 하얀 별. 그 둘의 기나긴 싸움이 드디어 끝나는구나.
“…아.”
그것을 보는 이는 내가 유일하구나.
클로페는 격렬한 감정에 심장이 아파오는 듯했다. 그렇게 심장이 날뛰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조각상으로 향했다.
붉은빛. 분명 첫 번째 시험에서 도망쳤던 신의 짓이리라.
‘감히……!’
조금 전의 열기와 다른 서늘한 눈빛이 조각상을 노려보았다.
그때.
휘이이이–
회오리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클로페는 시선을 돌렸다.
새빨갛게 색이 변한 케일의 눈과 마주쳤다.
살짝 눈을 크게 뜬 케일은 이내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은빛 방패를 거둬들이고 하얀 별에게 회오리바람을 날려 보냈다.
클로페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영웅은 이 싸움에 클로페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아마도 위험하기 때문이리라.
클로페는 금이 간 영상저장구를 대충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두 손을 맞잡았다.
촤르르–
펼쳐지는 붉은 책.
그리고 케일을 감싼 붉은 잎사귀.
피처럼 붉은, 케일의 머리칼.
참으로 아름다웠다.
‘…저것은 무엇이지?’
다만 클로페는 흰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작은 단검을 의문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기 더 큰 의문을 지닌 이가 있었다.
‘뭐야?’
케일이었다.
‘클로페 세카가 여기 왜 있어?’
무언가 부서지고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혹시 몰라 잠시 시선을 하얀 별에게서 뗀 케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웃고 있는, 정말로 무서운 표정의 클로페 세카를 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신 새끼!’
케일이 최초로 시험을 통과했다고 하더니. 신의 격까지 걸고서 진실을 말한다던 신은 순 거짓말쟁이였다.
‘안 믿길 잘했어.’
그는 얼른 무서운 표정의 클로페 세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놈이 아니었으니까.
“케일 헤니투스……!”
하얀 별이 막 황금패에서 벗어나, 몸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잘됐어.’
케일은 한 가지는 현재 상황에서 마음에 들었다.
하얀 별은 온전한 상황에서 포용이 풀린 것이 아니었다.
절망 신의 붉은빛 공격을 받아 강제로 포용이 풀렸다.
황금패가 부서지면서 봉인이 풀렸으니, 황금패 안에 있던 하얀 별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터.
‘이러면 쉽지.’
온전한 몸 상태의 케일.
완전한 하얀 별과 환상 속에서 싸워본 그에게 있어 정신 못 차리는 하얀 별 따위 이제 별것 아니었다.
가라앉는 폭발 먼지 사이로 멀쩡한 몸을 드러낸 하얀 별.
그러나 케일에게는 보였다.
새빨갛게 변한, 선명한 붉은 그의 눈동자에 하얀 별의 실체가 드러났다.
-잘 봐.
주르 템스의 목소리와 함께, 일기장의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다.
붉은 잎사귀.
케일은 그 흩날리는 잎들 사이로 하얀 별의 몸 위에 그려지는 ‘나이테’를 볼 수 있었다.
마치 거미줄처럼.
혹은 말라비틀어져 갈라지는 땅처럼.
“나를 감히!”
하얀 별의 손에 순식간에 재해의 검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하지만 케일은 보지 않았다.
오로지, 하얀 별 몸 위로 그려지는 ‘선’만을 응시했다.
‘보인다.’
선은 무수히 많은 원을 만들었다.
크고 작고, 얇고 두껍고. 거칠고 부드럽고.
‘아.’
케일은 탄성을 삼켰다.
시간이다.
저 모든 선은 시간이구나.
하얀 별의 몸 위로 무수히 많은 시간이 그려졌다.
그것은 그가 무수히 많은 몸을 거쳐 환생해온 시간만큼 다양한 형태였다.
그러나 그 수많은 원은 결국 하나의 커다란 원 안에 갇혔다.
‘저거구나.’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원을, 나이테를 품은 거대한 나이테.
그것은 상당히 컸지만 여기저기 찢겨져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얀 별.
그의 최초의 삶이었던 케일 베로우.
마지막 드래곤 슬레이어에서 하얀 별이 되기로 마음먹은 그 삶이 새겨진 나이테는 천년의 세월 동안 상처 입고, 찢겨지고, 부서져 갔다.
‘저주는 저주군.’
하얀 별에게 주어진 끊임없는 환생의 저주.
그것은 정말로 저주가 맞았다.
나이테가 보이는 케일에게는 느껴졌다.
하얀 별의 저 커다란 나이테는 몇 번의 삶만 더 반복하면 결국 끊어지고 부서져서 완전히 망가져 제 기능을 잃겠구나.
그리 되면 하얀 별은 더 이상 하얀 별로 스스로를 유지시키지 못한 채 환생을 반복할 터.
소중한 것을 잃게 한다는 저주.
죽음의 신이 만든 그 저주는 결국 마지막 남은 소중한 것.
‘자신’마저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무섭군.’
저주의 실체를 알아챈 케일은 그제야 오늘 처음으로 하얀 별의 눈을 바라봤다.
화르르르–!
재해를 담은 불의 검이 케일에게로 향했다.
케일은 그 검을 보았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 하얀 별에게 다가가며 단검을 쥐지 않은 손을 뻗었다.
휘이이이—
회오리바람이 빠른 속도로 케일의 손을 벗어나 쏘아져 나갔다.
쾅!
검과 바람이 부딪쳤다.
“크으!”
덩달아 검을 쥔 하얀 별의 팔이 그 반동으로 뒤로 젖혀졌다.
‘뭐지?’
하얀 별은 갑작스러운 봉인 해제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누며 케일을 공격했다.
그로서는 최대한 빨리 케일을 죽이든, 아니면 도망가든. 혹은 봉인된 신을 가지든. 그 세 가지 선택지만이 남았으니까.
공격은 튕겨져 나갔다.
당연히 이 정도 공격은 케일 헤니투스가 받아칠 줄 알았다.
그러나, 하얀 별은 새빨갛게 변한 케일의 눈을 마주한 순간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케일 헤니투스.
그러나 하얀 별은 케일 헤니투스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케일 헤니투스는 하얀 별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뭐지?’
하얀 별은 그 의문을 가질 틈이 없었다.
케일은 손을 다시 움직였다.
휘이—
휘이이—휘이이—
연달아 바람이 빠른 속도로 하얀 별에게 쏘아졌다.
“이놈-!”
겨우 몸을 바로 세운 하얀 별이 빠르게 물의 장막을 펼쳤지만, 그보다 회오리바람이, 그리고 케일이 더 빨랐다.
팡!
팡! 팡!
회오리바람은 하얀 별의 몸 곳곳을 강타했다.
그곳은 검을 쥐지 않은 손과 두 발이었다.
하얀 별의 몸이 그 반동으로 활짝 펼쳐졌다.
하지만 하얀 별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화르르-
어느 때보다 거대한 불의 검에서 쏟아져나온 시뻘건 부메랑이 단 한 걸음 앞의 케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휘이이-
동서남북. 네 방면에서 생겨난 바람벽이 점점 폭을 줄이며 케일을 가두려 했다.
촤르르-
물의 장막이 하얀 별을 감싸는 막을 만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단 한마디와 함께 케일은 작은 웃음을 흘렸다.
“케일 님!”
클로페 세카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케일은 자신을 향한 사이한 기운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보나마나 이 기운은 봉인된 신의 기운이었으니까.
조각상의 눈동자에 다시 한번 붉은빛이 맴돌았다.
그 빛은 언제라도 케일에게로 향할 듯했다.
-케일,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나?
짱돌이 물어왔다.
케일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대신 짱돌이 그의 답을 대신 해주었다.
-방패로 저 붉은빛을 막으면 그사이에 하얀 별은 물의 장막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겠지. 그리고 너는 재해의 검과 바람벽을 막느라 시간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케일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네가 고대의 힘을 왜 적게 썼는지.
-네가 왜 지금 이렇게 태평하고 느긋한지.
-하얀 별과의 사이를 한 걸음 남겨두고 왜 잠시 멈춰 선 것인지. 그 이유가 있었구나.
짱돌은 조금 서글프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저 붉은빛을 피하고, 하얀 별의 공격과 방어를 모두 피할 만큼.
모든 것을 피하고 하얀 별에게 닿을.
-빠른 속도구나.
케일은 그 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케일. 드래곤, 밀라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베이지색 드래곤. 도도리의 엄마 밀라는 ‘이어붙이기’라는 특성으로 케일의 그릇을 이어붙여 주며 말을 남겼다.
‘제 힘은. 이어붙이기는 이어붙여진 흔적조차 없게 말끔히 붙여진다는 면에서 꽤 좋죠. 다만. 한 대상에게 같은 힘을 두 번 사용할 수 없어요.’
‘선생님의 그릇은 크기는 크지만, 유리처럼 상당히 연약하더군요. 그러니 조심하세요.’
-드래곤이 말했지.
‘다음은 없습니다.’
-다음은 없다고.
안다.
케일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찰나.
5초 동안 시간을 뛰어넘는 김록수의 능력.
케일은 그 힘을 모두 쓸 생각이 없었다.
‘0.5초다.’
계산상 단 0.5초다.
아니, 찰나 상태라면 그것보다 시간이 적게 걸린다.
하얀 별과 케일의 거리는 단 한 걸음이니까.
그 정도면.
-하지만 한 걸음 정도라면, 그릇이 다치지는 않겠구나.
그래.
그걸 아니까, 이러는 거야.
-다만 이 모든 것은 네가 ‘찰나’를 쓸 때, 고대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가정이다.
알아.
-혹시 모르니 ‘생의 나이테’도 사용하지 마라.
그것도 안다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미리 하얀 별의 나이테를 ‘기록’해둔 거라니까.
케일은 단검을 들어 올렸다.
그는 몰랐지만,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했다.
‘저 상황에서 단검으로 하얀 별을 찌를 수 있나? 설마, 저 녀석 그 힘을!’
신전 밖에서 지켜보던 알베르 크로스만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라온, 온, 홍의 앞을 가로막았다.
찰나. 그 힘을 쓰면 케일의 몸이 어찌 되는지 아니까.
그리고 신전 밖, 지켜보던 수많은 이들은 케일이 저것으로 무엇을 하겠구나 싶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무엇을 하시려고!’
신전 안 같은 공간에 있던 클로페는 눈을 크게 뜨면서도 조각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저 볼품없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신비로운 단검으로 케일이 무엇을 할지 기대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도대체 저것으로 나를 공격해서 뭐 하려고-’
하얀 별은 뒤로 젖혀졌던 몸을 바로 잡으려 움직이며 그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끝까지 이어갈 수 없었다.
‘어?’
멈췄다.
순간 시간이 멈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느낄 정도였다.
푸욱!
케일이 스스로의 가슴을 단검으로 찔렀을 때는.
촤아아악-
심장까지 깊이 박혔던 단검은 곧바로 케일의 손에 뽑혔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뒤섞였던 단검은 케일의 피를 머금은 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케일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느 때보다도 빨리 흘렀다.
짧은 찰나에 무수히 많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1초도 되지 않은 아주 짧은 시간.
케일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툭.
일기장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케일을 감싸던 잎사귀도, 소용돌이 바람도 모두 사라져갔다.
콰직.
단검을 쥔 케일의 손 살갗이 찢어졌다.
단 한 걸음 내딛는 다리에 피부가 홀로 베어졌다.
단검에 뚫린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케일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오로지 흐릿해져 가는 나이테뿐이었다.
그는 단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케일의 심장에 박혔던 단검. 그의 피가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둥. 둥. 둥.
케일은 단검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심장처럼, 단검은 박동했다.
그리고 그 박동은 케일의 심장박동과 일치했다.
가사 상태였던 단검은 깨어나 케일의 심장과 함께 뛰었다.
그리고 재생과 치유를 담은 심장. 그 심장 주인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케일의 팔이 움직였다.
가장 큰 나이테의 가장 해지고 약한 지점. 하얀 별의 오른쪽 쇄골을 지나가는 그 지점.
그곳을 향해 케일은 피를 묻힌 단검을 꽂아버렸다.
‘뭐야?’
찰나. 마주하고 있던 하얀 별에게는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그는 갑자기 눈앞에 당도한 케일 헤니투스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며 무슨 일인가 의문이 들었을 때.
“…허억…….”
그의 세상이 뒤흔들렸다.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작은 신음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는 아래를 쳐다봤다.
쇄골에 박힌 붉은 단검.
본래라면 별것 아닌, 부상이라고 치지도 않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콰지지지직—-
하얀 별은 자신의 무언가가 찢겨져 나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깨달을 수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세상이 흔들렸으니까.
그는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단검을 쥔 손 위에 올려졌다.
붉은 단검을 쥔 케일의 손도 피를 흘리며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얀 별은 케일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붉은색이 아닌 평소의 눈동자로 돌아온 케일이, 피를 쏟아내고 있는 케일이 담담한 얼굴로 그저 하얀 별에게 고했다.
“끝이구나.”
그 한마디가 다였다.
케일이 단검을 뽑아 들자, 하얀 별의 쇄골에서 한 줄기의 핏물이 흘러내렸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하얀 별의 몸이 풀썩 무너져 내렸다.
끼이이이— 끼이이—-
날카로운 소리에 하얀 별은 귀가 먹먹해져 왔다.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점점 세상에서 그가 분리되는 것 같았다.
“…안 돼……!”
하얀 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죽는다……!’
그러나 이 죽음은 그간 그가 느꼈던 수많은 죽음과 달랐다.
그의 몸에 머물던 죽음의 신 기운이 사라져 갔다.
끝없는 환생을 반복해도 하얀 별의 몸에 머물던 저주의 힘. 환생의 원동력이 되었던 죽음의 신 기운이, 신의 힘이 연기처럼 흩어져 갔다.
‘말도 안 돼.’
하얀 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제 나는 환생을 못 한다고?’
‘내가 그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데 죽는다고?’
이렇게.
이렇게, 끝이 난다고?
하얀 별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분명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비로소 완전한 죽음을 마주한 하얀 별은, 손을 뻗었다.
무너져 내리는 몸에서 뻗어져 나온 팔은 떨리고 있었다.
간신히 뻗은 힘없는 손이 케일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 손은 팔을 붙잡을 아귀힘이 없었다.
손은 미끄러져 내렸고, 하얀 별은 어떻게든 힘을 주었다.
“끄윽, 끅-”
지직-
버둥거리기 위해 세운 손톱이 케일의 팔에 얕은 상처를 냈다.
그것이 한계였다.
케일은 무너져 내린 하얀 별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하얀 별은, 케일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1초도 되지 않는 찰나가 끝난, 케일은 단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얼굴의 피를 대충 닦아내었다.
‘대단하네.’
멀쩡하다.
아니, 몸이 순식간에 멀쩡해지고 있다.
-케일, 그릇은 괜찮구나… 그리고 너-
짱돌이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 겨우 말을 내뱉었다.
-…건강해지고 있구나.
어느새 심장의 상처가 아물어갔다.
단검을 쑤셨다가 빼는 순간 흘러버린 피 때문에 아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케일은 어느 때보다도 강한 생명력이 몸 안에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스스스—
케일은 고개를 숙였다.
케일의 피를 머금어 붉게 변한 단검.
그의 손에 들린 그 뿌리 단검이 끝에서부터 가루가 되어갔다.
스스스–
그 붉은 가루는 검을 떠나 케일에게로 다가왔다.
‘음!’
그리고 케일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세계수 말이 진실이었군.’
케일은 단검을 건네주며 세계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괜찮네. 죽지는 않아. 피는 조금 많이 나서 보기 흉하겠지만, 오히려 자네에게 보약이 될 걸세. 그건 내가 장담하지.’
심장을 찌를 때도 하나도 안 아팠다.
그래서 단번에 푹 찌를 수 있었다.
그리고 찰나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0.5초 정도. 1초도 안 되는 시간이고 고대의 힘도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라 케일은 큰 위험은 없으리라 판단했다.
저번처럼 쓰러지는, 그릇이 부서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몸 곳곳에 무리가 갈 것이란 생각은 했었다.
‘…정말 이상한데.’
찰나를 썼음에도 몸에 별로 무리가 가지 않았다.
물론 찰나를 사용하며 한 걸음 내디딜 때, 몸에 상처가 날 때는 아팠다.
케일은 그의 몸 상태가 아주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스스로 체감하고 있었다.
그때,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패에 스며든 심장의 활력이 실로 오랜만에 말했다.
-…새로운 재생의 힘이 탄생할 것 같다.
케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불멸자의 흔적이 담기고 있구나.
아.
케일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세계수는 그의 뿌리, 죽고 살아나고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존재인 뿌리. 그중에서 근원이 되는 것을 내어주었다.
‘그 근원이 내 심장에 새겨졌구나.’
보약이다.
이건 정말 엄청난 보약이다.
어느새 단검은 가루가 되어 모두 사라지고, 텅 빈 손을 내려다본 케일은 고개를 돌렸다.
“…하아… 하아…….”
밭은 숨을 가늘게 이어가는 하얀 별.
케일은 손을 뻗었다.
촤르르르륵-
붉은 일기장이 떠올랐다.
동시에 붉은 잎사귀가 흩날리며 케일의 눈동자가 붉게 변해갔다.
-케일, 그릇은 부서지지 않았다만. 그래도 무리하지 마라!
-괜찮아. 형님, 얘 나보다 장수할 것 같소.
짱돌이 만류하고, 심장의 활력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짱돌이 한 번 더 만류하려고 했지만 케일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확인은 해야 했으니까.
붉게 변한 눈동자가 하얀 별을 온전히 담았다.
점점 감기는 하얀 별의 눈.
그의 몸 위로 드리우는 선들.
수많은 생을 담은 생의 나이테가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케일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얀 별의 가장 바깥에 자리한 큰 원이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단검을 찔렀던 곳부터, 나이테가 무너져 내렸다.
“…반…드…시…….”
하얀 별은 끝까지 다음을 기약했다.
케일은 묵묵히 그 광경을 눈에 모두 담았다.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혹시 몰라 하얀 별에게서 시선을 못 뗄 뿐이었다.
다만.
‘이 신 놈, 조용하네?’
그는 기다릴 뿐이었다.
‘아마 봉인된 신도 나랑 똑같은 순간을 기다리고 있겠지.’
주변이 조용했다.
클로페 세카야, 무슨 짓을 하길래 조용한지 모르겠으나 봉인된 신이 어떠한 공격도 없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하얀 별이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면.
그때 그가 가진 고대의 힘이 흘러나오리라.
보통 알려진 바로, 고대의 힘은 주인이 죽으면 그 힘이 그 장소에 스며들거나 혹은 어떠한 특정 물건에 스며든다.
‘신전에 스며들면 곤란하다.’
신전은 봉인된 신의 영역.
분명 케일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냥 일반적인 고대의 힘도 아닌 하얀 별의 힘이었으니까.
특히 하늘 속성 고대의 힘은 신전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된다.
‘그러니 내가 가져가야지.’
아무리 적이라지만, 죽어가는, 어쩌면 영혼까지 손상되었을지도 모를 놈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참 그랬지만, 케일로서는 홀로 감당하기로 한 이상 최대한 변수를 없애야 했다.
그리고 케일에게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포용.
그 힘으로 하얀 별의 고대의 힘들을 모조리 담아둘 작정이었다.
‘어디다 담지?’
케일은 포용을 담아둘 물건을 찾기 위해 안주머니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심장이 왼쪽이라 다행이군.’
오른쪽에 있었다면 안주머니까지 단검으로 찔러버릴 뻔했다.
케일은 여전히 하얀 별을 주시한 채 안주머니에 손을 넣으려고 했다.
‘음?’
그때, 그의 시야로 웬 구슬이 하나 굴러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클로페 세카가 두 손에 무슨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영상저장구.’
케일은 부서진 구의 정체가 자동 영상저장구임을 깨닫고 다른 의미로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큰일 날 뻔했다.’
잘못했다간 클로페의 손에 모든 장면이 찍힐 뻔했다.
다행히 지금 구는 부서진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클로페의 입만 닫게 하면 되겠어.’
그러면 다른 이들도 이 안에서 벌어진 일을 자세히 모르리라.
케일이 피 칠갑을 했어도 그저 상상만 할 것이다.
‘심장을 찔렀다는 상상은 못하겠지.’
문득 케일은 아직 시험을 치르고 있을 동료들을 떠올렸다.
‘아직도 안 나온 건가?’
생각보다 늦었다.
케일은 지금쯤이면 그가 막아두었던 입구 돌무더기를 부수는 소리가 들릴 줄 알았다.
“하.”
어?
“…하, 흐-”
…뭐지? 이 웃는 듯 우는 소린?
케일은 언제 숨이 멎을지 알 수 없는 하얀 별 때문에 차마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 귀를 기울였다.
이 끊어질 듯 힘없는 목소리는 분명 클로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최한?”
아무 대답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케일은 일단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침착해야 한다.
일단 저놈이 무엇을 봤는지 알아야 한다.
“언제 왔지? 나는 못 느꼈는데.”
그때, 클로페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심장을 찌르시는 순간이라, 못 들으셨나 봅니다.”
깊이 감명 받은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클로페의 얼굴을 케일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저 맛이 간 놈의 얼굴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확실히, 그 순간이라면 단검에 집중한 상태라 케일이 기척을 못 느꼈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케일은 등 뒤로 힘없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최한이, 이놈이 이렇게 힘없이 걸었던 순간이 있던가?’
그때, 케일은 최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지금 내가 뭘 본 겁니까?”
타박하는 듯한 어투였지만, 그 목소리가 떨리다 못해 힘이 하나도 없었다.
케일은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최한은 대답도 없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등을 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순간 그는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지금도 머릿속이 멍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도 환상 속인가, 그런 생각만 떠올랐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옷깃을 메리가 잡아당겼다. 아니, 붙잡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메리는 순간 말을 잊어버린 듯 그저 덜덜 떠는 손으로 최한의 옷자락을 간신히 잡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메리 씨, 무슨 일이죠?”
뒤에서 로잘린이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최한은 여전히 하얀 별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저 등을 바라보며 걸음을 내디딜 뿐이었다.
살아있다.
괜찮다.
분명, 저 사람은 지금 쓰러지지 않았다.
그래, 죽지 않았다.
안 죽는다.
저 사람이 죽을 리가 없다.
반드시 안 죽는다.
최한은 기도처럼 그 말을 되새겼다.
그러지 않으면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리고 주저앉은 사람이 있었다.
신전 밖.
“…내가 지금… 무엇을…….”
정글의 왕 리타나. 그녀는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충격에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어떻게… 어떻게… 저런…….”
무슨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봉인된 신의 신전 위에 뜬 구를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 케일이 스스로 심장에 단검을 찔렀다.
그리고 그 단검으로 하얀 별을 쓰러트렸다.
이 짧은 두 문장에 그녀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봉인된 신이 사람들에게 가장 끔찍한 환상을 보여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하얀 별이 쓰러지는 순간, 이것은 현실임을 알 수 있었다.
찰나.
정말 아주 짧은 시간, 케일이 한 일은 리타나가 살아온 삶 동안 보아온 어떠한 일보다도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슬픈 일이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케일은 아직도 굳건히 서 있었다.
온몸이 피로 뒤덮인 채, 심장이 찔렸음에도.
그는 살아있었다.
“…사람인가…….”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그 끝에 도달한 것은 경외였다.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비명조차, 탄성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너무, 정말 너무 놀라서.
그리고 마음이 아려서.
마지막으로 알 수 없는 벅참에 마음이 버거워서.
하지만 그녀는 이런 감정이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주변이 조용했다.
어느 누구 하나 쉬이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따금씩 조용히 중얼거릴 뿐, 환호도 비명도 없었다.
아마 지금 리타나 그녀가 있는 곳이 각국의 대표 혹은 수뇌부들이 자리한 곳이라 더 그런 것일 터.
클로페 세카의 모습이 구에 나타나자마자 신전으로 향했던 리타나를 비롯한 수뇌부들. 그들은 신전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목도한 광경에 아무 말이 없었다.
“뭔가! 무슨 일인가!”
그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왕세자가 가려서 못 봤다!”
냐아아옹!
냐아옹.
라온과 온, 홍은 시끄럽다가 갑자기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알베르 크로스만이 앞을 막아버려 시야가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아이들은 고개를 들어 황급히 케일의 모습을 찾았다.
“할배야!”
라온은 고룡 에르하벤의 옷자락을 잡았다.
“하, 할배야. 우리 인간 왜 저렇나? 왜, 왜 저렇게-”
왜 저렇게 피를 묻히고 있나?
라온은 차마 ‘피’라는 단어를 제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른 다른 말을 내뱉었다.
“할배야! 도대체 무슨 일이냐! 인간 지금은 괜찮아 보이는데!”
“누나.”
고양이 모습의 홍이 몸을 웅크린 채 온을 붙잡았다.
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케일의 상태를 눈에 담았다.
피로 온몸이, 특히 가슴 쪽이 엉망이었지만 몸에 떨림이 없었고, 안색도 괜찮았다. 비틀거리지도 않았고, 똑바로 서 있으며 눈빛도 또렷했다.
그래, 지금은 일단 괜찮아 보였다.
맞아.
괜찮을 거야. 괜찮은 거야.
이미 몇 번이나 봤기에 케일의 상태를 꽤 잘 파악하는 온은 확신을 얻고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가만히 서 있는 알베르 크로스만이 있었다.
온은 그의 눈동자를 본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서 있는 알베르 크로스만의 얼굴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온의 앞발이 걱정스레 알베르의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그녀는 여전히 구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여는 알베르 크로스만을 볼 수 있었다.
“…미친 새끼…….”
그 목소리는 형편없었다.
위엄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볼품없는 목소리였다.
온은 자신과 홍을 안아 드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다.”
고룡 에르하벤이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한마디를 남겼다.
그 순간, 온은 보았다.
케일의 옆에 서는 최한과 메리를.
“어?”
라온이 눈을 크게 떴다.
“하얀 별이-”
라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 * *
신전 안.
하얀 별의 몸이 서서히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 케일은 곧바로 몸을 다시 움직였다.
스스스—
사라져 가는 하얀 별에게서 여러 개의 빛이 떠올랐다.
‘고대의 힘이다.’
그의 눈동자는 하얀 별. 그리고 그 너머 조각상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살벌하게 변한 최한, 그리고 더 살벌하게 변한 메리의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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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히 서 있던 케일의 몸이 하얀 별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고대의 힘이다.”
그는 제 뒤에 선 동료들에게 짧게 말했다.
“내가 가진다.”
그 순간,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벽에 새겨진 조각. 아름다운 인간 모습의 봉인된 신. 그 조각의 눈동자가 다시 붉게 물들어 갔다.
‘그래, 너도 움직이는구나.’
케일이 고대의 힘을 가지겠다 말하는 순간, 신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둘 다 같은 목표를 노리고 있었다.
“일단.”
그때, 케일을 스쳐 지나가는 최한이 나직이 읊조렸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왠지 케일은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일단 무시하고 사라져가는 하얀 별에게로 향했다.
“…저와도 이야기하셔야 합니다.”
“케일 공자, 큰일 났네요. 나랑도 이야기 해야겠는데.”
뒤를 이어 들리는 메리와 로잘린의 서늘한 목소리에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지만, 케일은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럴 틈이 없었다.
하체부터 가루가 되어 사라져가는 하얀 별.
야속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그의 몸은 가루가 되어 흩어져갔다.
“…아…안…ㄷ…….”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하얀 별에게서는 체념의 빛이 결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케일은 그 얼굴을 보고 있을 틈이 없었다.
‘미친놈. 많이도 먹었구나.’
사라져가는 하얀 별의 몸에서 하나둘 떠오르는 동그란 빛들.
빨간색, 초록색, 흰색, 검은색 등등.
다섯을 손쉽게 넘어가는 빛의 숫자에 케일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그런데 하얀 별이 이렇게 많은 고대의 힘을 지녔던가?’
왠지 모를 의문이 들었을 때.
그 의문에 그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을 때.
콰아아아앙—!
굉음이 들려왔다.
조각상의 눈에서 쏟아져 나온 붉은빛과 검은 오러가 부딪쳤다.
검은 오러는 산산조각이 났고, 붉은빛 역시도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역시.’
케일은 다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 저 붉은빛을 마주했을 때, 저 기이한 빛을 향해 황금패를 던졌을 때. 케일은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약해졌어.’
“환상보다 약하군요.”
덤덤하게 평가를 내리는 최한은 케일을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역시, 한계가 있군요. 봉인된 신은.”
곧바로 로잘린이 이어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하지! 아마 지금 저 힘도 그간 다른 이들의 절망을 잡아먹고 모아둔 힘일 거야. 갈수록 공격력이 약해지는 걸 보면.”
로잘린이 웃으며 말했다.
“저 신도 얼마 안 남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까지.”
봉인된 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봉인된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케일도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봉인된 신이 환상도 아닌 현실에서 공격을 자유자재로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게 되었다면 진즉에 봉인된 신은 스스로 봉인을 풀고 그 절망을 세상에 떨쳤으리라.
아마도 지금 봉인된 신이 저렇게 공격을 하고 발악을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사냥꾼 덕분일 터.
여러 세계 곳곳에 신전이 나타나도록 만든 놈들이 사냥꾼이라는 게 밝혀진 이상.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케일은 동료들에게 봉인된 신을 맡기고, 이제 얼굴을 남겨두고 모두 가루가 되어버린 하얀 별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떠오른 빛덩이들은 움직이지 않고 마치 묶여있는 것처럼 하얀 별 주변을 맴돌았다.
아직 하얀 별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콰아아앙—!
콰앙, 쾅! 콰아앙!
그 와중에도 공격은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다 신전 부서지는 거 아냐?”
로잘린이 웃으며 외쳤고, 최한은 덤덤하게 답했다.
“다 부수고 싶군.”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직 모두 나오지 않았어.”
“아냐. 내가 마지막이었어. 툰카 대장군은 진즉에 시험을 포기한 것 같아. 내가 나오고 나서 홀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더라고.”
로잘린이 여유로운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로 가는 길. 그게 나타나더라.”
“…모두 나왔다면, 이제 신경 쓸 게 없네.”
이 살벌한 인간들.
케일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대충 배지들을 챙겨서 꺼내 들며 외쳤다.
“최한, 조각은 부수면 안 돼!”
봉인된 신이 봉인된 장소인 저 벽의 조각. 그 벽을, 조각을 부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현재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혹시 조각이 부서지고 봉인이 풀릴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이미 사냥꾼 놈들이 조각을 부수고 절망 신을 불러들였겠지.’
그리고 절망 신도 케일에게 포용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을 부숴달라고 청했을 터.
‘하긴 조각이 부서진다고 봉인이 풀린다면. 신들이 한 봉인치고 허술하지.’
그리 간단하게 해결될 봉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게 있기 때문에, 케일은 조각이 새겨진 벽은 일단 건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으…아…….”
하얀 별은 이제 얼굴마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검은색 빛이 떠올랐다.
‘마지막이군.’
케일은 이것이 마지막 하얀 별이 가진 힘임을 직감했다.
이제 저 힘들은 하얀 별이 완전히 소멸하는 순간, 특정한 장소 혹은 물건을 향해 움직일 터.
케일은 몸을 숙이며 떠오른 갖가지 색을 지닌 빛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라도 포용을 할 준비를 끝내고.
“잘 가라.”
케일의 한마디와 함께 하얀 별은 케일을 바라봤다.
유일하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하얀 반가면에 가려졌던 얼굴이었다.
그 얼굴마저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정말로, 야속할 만큼 빠르게.
눈으로 하는 인사조차 남길 수 없게.
하얀 별은 그렇게 사라졌다.
툭.
하얀 반가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황금 거북이 배지를 손에 쥔 케일이 빛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빛들이 격렬하게 진동하며 화살처럼 쏘아져 나갈 듯했다. 케일은 그 빛들을 향해 포용을 사용하려 했다.
쿠웅!
“윽.”
하지만 그 순간, 케일은 비틀거리며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제길!”
신전이 흔들린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신전 바닥이 요동쳤다.
콰직, 콱!
콰아아–!
바닥이 부서지고 있었다.
‘이 신 놈이!’
분명 봉인된 신의 짓이리라.
“빌어먹을!”
조금 전 진동 때문에 케일의 손에 있던 배지들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그의 손을 벗어났다.
케일은 일단 주변에 손에 잡히는 아무것이라도 움켜쥐었다.
우우웅우—
도망갈 듯한 고대의 힘들. 그 빛덩이를 향해 붉은빛이 쏟아졌으니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불길한 시뻘건 빛이 쉴 새 없이 조각에서 쏟아져 나왔고, 그 앞을 최한과 로잘린이 막아섰지만, 혹여 하나라도 고대의 힘에 닿는다면 곤란했다.
‘하필……!’
케일은 제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클로페 세카의 영상저장구.
아까 본 그 금이 간 영상저장구였다.
“크윽.”
여전히 진동하는 신전 바닥. 케일은 몸을 일으켜 세워 다시 포용을 하려 했다.
콰아앙–!
“케일 님!”
하지만 막지 못한 붉은빛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다행히 고대의 힘을 노리진 못했지만 케일 근처였기에 케일은 그 여파와 바닥의 진동에 다시 몸이 기울어졌다.
-저, 저리 다리 힘이 없어서야!
짱돌이 안타깝게 외친 순간.
콰직.
넘어진 케일 손을 떠난 자동 영상저장구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케일.
“빌어먹을…….”
-건강해진다고 해서… 잃었던 운동신경이 돌아오는 건 아니구나. 근력을 키워야겠어.
어느 때보다도 케일의 몸은 생명력이 넘쳤건만, 그것이 그의 몸에 잃었던 근력과 운동 신경을 찾아주지는 못했다.
그때, 최한의 거친, 상당히 화가 난 음성이 들려왔다.
“저럴 줄 알았어! 멀쩡한 척 다하더니, 저리 다리 힘이 없어서 픽픽 쓰러지는 꼴로!”
케일은 낯선 최한을 외면하며 제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여기서 고대의 힘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케일뿐이었다.
물론 다른 동료들이 고대의 힘을 지녀도 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고, 이를 아는 동료들은 쉬이 끼어들지를 못했다.
그 문제점은 간단했다.
‘어느 것이 하늘 속성인지 아무도 몰라.’
다섯을 훌쩍 넘은 빛덩이들. 저 중에 죽은 마나를 필요로 하는 하늘 속성 고대의 힘이 무엇인지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공자님!”
콰아아앙—!
다시 한번 붉은빛 공격이 쏟아지고, 케일은 몸을 숙인 채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때.
“공자님!”
다시 한번 메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케일은 돌아볼 틈이 없었다.
“저 빛들에서 죽은 마나 기운이 느껴져요!”
하지만 곧 들려온 말에 케일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네크로맨서 메리.
그녀는 케일과 달리 죽은 마나 기운을 느낄 줄 알았다. 그 말은 메리라면 하늘 속성 고대의 힘을 알 수 있다는 소리였다.
‘잘됐-’
잘되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두 개예요! 두 개에서 죽은 마나 기운이 느껴져요!”
뭐?
…두 개라고?
“검은색, 그리고 파란색!”
메리가 외친 순간, 갑자기 신전이 더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최한마저 잠시 주춤거릴 정도로.
더불어 케일은 왜 저 신 놈이 하얀 별의 힘을 노리는지 깨달았다.
메리가 외쳤다.
“검은색은, 검은색이 더 불길해요!”
케일의 입이 열렸다.
“…마족이구나.”
하얀 별. 그놈은 마족과 계약을 했다.
잠시 묻어뒀던 기억이 떠오른 케일은 검은색 빛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깨달았다.
다른, 언제라도 쏘아져 나갈 것 같은 빛덩이들과 다르게 저 검은빛은 그저 가만히 둥둥 떠 있었다.
‘…그래.’
계약자가 사라지면, 남은 계약서는 기다려야지.
또 다른 계약자를.
그리고 마족과 연계된 저 힘을 봉인된 신은 어떠한 연유로 원하는 것이리라.
어쩌면 마족과 닿을지도 모를 것이란 계산일지도 몰랐다.
마족은 봉인된 신, 절망 신을 모시는 종족이니까.
케일은 검은 빛덩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손에 잡히는 것을 덥석 집어 들었다.
“…잡아도 이런 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하얀 별의 흔적.
하얀 반가면이 케일의 손아귀에 잡혔다.
‘마계의 물건이었던가?’
하얀 반가면도 일반적인 물건이 아니었다.
“공자! 고대의 힘이-!”
그러나 케일은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우우우—우웅—-
고대의 힘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고대의 힘들.
케일은 곧바로 몸을 반 정도 일으켜 그 고대의 힘들 사이로 엎어지듯 뛰쳐 들었다.
그리고 포용을 시작했다.
우우—우웅—우우—
기이한 소리와 함께 격렬하게 진동하던 빛덩이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크윽!”
케일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멈춘 빛덩이. 그 힘들을 케일은 지금 끌어당기고 있었다.
‘빌어먹을!’
지금껏 조금은 수월하던 포용 과정과는 달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고대의 힘도 아니고 하얀 별이 지녔던 막강한 고대의 힘이다. 더불어 개수도 여럿이었다.
거기다가 마족의 계약이 담긴 힘도 남아있다.
-이런, 케일!
그때, 짱돌의 목소리와 함께 로잘린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막아야 돼!”
조각의 눈에서 붉은빛이 미칠 듯이 쏟아져 나왔다.
신전의 진동 강도가 이제 로잘린과 메리가 주저앉아 힘을 써야 할 만큼 엄청났다.
그러나 곧 로잘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공자!”
여러 색의 빛들이 케일에게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느렸다.
그러나 곧 빠른 속도로 케일을 향해 그 빛들이 쏟아졌다.
마치 무지개가 케일을 휘감은 것처럼 보였다.
로잘린은 잠시 싸우던 것도 잊고 그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때, 그녀는 케일의 일그러진 얼굴과 변수를 발견했다.
“…이런!”
초록색 빛덩이.
그것이 하얀 반가면을 거부하며 케일로 향하던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초록빛은 천장으로 솟구쳤다.
“안 돼!”
로잘린은 최한의 키보다, 자신의 실드보다, 메리의 검은 거미줄보다 높이 치솟아 올라버리는 초록빛에 당황했다.
‘이러면 봉인된 신이-!’
찰나에 솟구쳐오른 초록빛.
그 빛을 향해, 그 허공을 향해 붉은빛이 선처럼 쏘아져 나갔다.
봉인된 신은 궤도를 이탈한 유일한 고대의 힘을 향해 마수를 뻗쳤다.
그때, 케일의 목소리가 신전 안을 꿰뚫었다.
“야!”
케일은 다급함에 저도 모르게 그렇게 불러버렸다.
하지만 상대방은 용케도 스스로를 부른 것임을 알아챘다.
케일과 클로페 세카.
케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클로페 세카는 케일의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이를 본 케일은 곧바로 외쳤다.
“던져!”
클로페는 제 앞에 놓인 것을 재빠르게 주웠다.
붉은 일기장이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클로페는 그 일기장을 초록빛을 향해 던졌다.
초록빛.
케일은 저 힘이 하얀 반가면을 거부하고 이탈할 때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무다.
저 초록은 나무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한 번 느낀 적 있던 기운을 꼭 빼다 박은, 쌍둥이와 같은 기운이었다.
케일이 지닌 ‘생의 나이테.’
주르 템스가 남겨둔 반쪽짜리 힘이자, 나무 속성 고대의 힘.
그리고 남은 반쪽은 하얀 별이 가졌었다.
촤르르르—-
붉은 일기장이 펼쳐졌다.
-잘했어.
주르 템스가 케일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이건 내 거야.
천장을 향해 솟구치던 초록빛이 방향을 바꿨다.
불길한 붉은빛은 그 방향을 따라잡지 못했다.
초록빛은 붉은 일기장으로 향했다.
파아앗-
초록빛이 일기장을 덮친 순간, 케일의 귓가에 주르 템스의 배부르다는 듯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완전해졌어.
-케일.
-템스가의 가주가 되지 않을래?
케일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하얀 반가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를 휘감던 빛은 모두 하얀 반가면에 포용되었다.
케일은 정면을 응시했다.
“이제 너만 남았네.”
벽에 새겨진 아름다운 인간, 아니, 조각을 보며 케일은 환히 웃었다.
#
155장. 업보다
신전을 뒤흔들던 진동이 갑자기 멈췄다.
벽에 새겨진 조각에서는 더 이상 붉은빛이 쏘아져 나오지 않았다.
최한은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검이 바닥을 향해 늘어뜨려졌다.
툭. 툭.
케일이 붉은 일기장을 주워들고 있었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찰나. 최한의 눈동자가 빠르게 케일의 상태를 살폈다.
‘…상처가-’
분명 단검이 케일의 가슴을 찌르고 깊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상의 왼쪽에 큰 구멍이 생겼지만, 그 사이로 비치는 몸은 피로 뒤덮여 있지만 멀쩡했다.
‘…문신.’
케일은 고대의 힘을 얻으면 그것이 몸에 새겨진다고 하였다. 심장이 위치한 가슴께에 문양이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흉측한 상처가 문신과 뒤섞여 끔찍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 꼴로 지금 웃고 있었다.
절망의 신이 봉인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조각을 보며.
투둑.
동그란 무언가가 굴러와 최한의 발치에 닿았다. 고개를 숙여보니, 웬 구슬이 있었다.
‘…자동 영상저장구?’
아까 부서진 영상저장구도 그렇고, 이 자동 영상저장구가 여기에 왜 있지?
최한은 의문을 드러내다 이내 누군가를 떠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케일과 봉인된 신. 그리고 죽어서 사라진 하얀 별.
이들 사이에 잠시 들어찬 정적 속에서 클로페 세카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신전이 크게 진동하고, 전투로 인해 여기저기가 부서졌다.
클로페는 그 속에서 분주히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최한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동 영상저장구를 설치해둔 건가?’
저 정신 나간 놈.
최한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클로페 세카의 눈동자가 햇살을 머금은 푸르른 잎사귀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그 녹안이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생각했다.
‘저걸, 애들은 못 보게 해야겠군.’
라온이나 온, 홍이 저것을 본다면 큰일이 나는 걸 떠나 애들이 얼마나 괴로워지겠는가.
더불어 다른 생각도 했다.
‘에르하벤 님과 왕세자 저하께는 보여줘야겠어.’
최한은 충격적인 장면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케일의 심장을 찌른 것이 단검이라는 것을 알고는 케일이 그간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얀 별을 죽일 도구가 저 세계수의 단검이라는 것은 말했지만, 그 방법이 저런 것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저 방법 덕에 하얀 별을 생각보다 손쉽게 세상에서 지워내기는 했으나.
‘…그것과 이건 다르다.’
최한은 이제 케일 헤니투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특히, 어딘가 찝찝하고 숨긴다 싶으면 케일 모르게라도 알아봐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했다.
순간, 그는 메리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메리의 눈빛도 장난이 아니었다.
저 순한 애가 저런 눈빛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일 터.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터벅터벅.
정적을 깨며, 케일의 구둣발 소리가 신전 안에 울려 퍼졌다.
그는 어느새 하얀 반 가면과 일기장을 품에 갈무리한 채, 조각이 새겨진 벽으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벽 앞에 세워진 제단으로 걸어갔다.
“이건가?”
걸음을 멈춘 케일은 제단 위에 놓인 열쇠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본래 이 신전을 벗어나는 방법임과 동시에 이 신전을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
이는 또 다른 세계의 안로만이 알려준 것이었다. 환상 시험을 모두 끝낸 이가 신전 끝으로 가 저 하얀 열쇠를 집어 들고, 다시 되돌아가 신전의 문을 열고 입구이자 출구인 곳으로 나오면 된다.
‘그럴 순 없지.’
케일은 그 방법을 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제 속내를 드러냈다.
“어떻게 하면.”
그는 벽에 조각된 아름다운 이의 눈동자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너를 죽일 수가 있지?”
씨익.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간 그 순간.
“케일 님!”
최한이 다급히 그를 불렀고, 로잘린은 메리의 팔을 잡으며 외쳤다.
“앉아!”
쿠구구구—-
신전에 굉음이 울려 퍼지며 다시금 신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강도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신전의 대리석 바닥은 마치 파도라도 치는 것처럼 들썩였다.
마치 분노한 신의 마음이 여실히 대변되는 것처럼.
“윽!”
케일의 몸이 기울어졌다.
‘바닥이 이렇게 들썩이면 어떻게 중심을 잡으라고!’
이전 수준의 진동만 대비하던 케일이었다.
‘이 신은 신전 진동시키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나!’
어쩌면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지도 몰랐다.
‘봉인된 상태이고, 또 그간 여러 세상을 돌며 모은 절망의 힘을 이번에 다량 썼으니까.’
그만큼 하얀 별과 케일을 통해 뭔가를 해볼 수작이었을 터.
‘그게 헛짓거리가 되었으니 화날 만하지.’
케일의 두 팔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빌어먹을!’
케일의 균형을 잃은 몸이 뒤로 기울어져 갔다.
최한이 놀라서 그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최한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음.”
“괜찮으십니까?”
케일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받쳐주는 클로페 세카를 볼 수 있었다. 클로페는 어깨로 케일의 등을 받치고 있었다.
케일은 클로페가 짓는 웃음이 너무 환한 웃음이라 순간 클로페를 밀쳐버릴 뻔했다. 왜냐면 부서진 자동 영상저장구를 보았으니까.
‘그래도 그건 부서졌- 음?’
케일의 눈에 클로페의 품에 안긴 자동 영상저장구 두 개가 보였다.
‘…이 자식이?’
케일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을 때, 클로페는 고고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기록했습니다.”
저 입을 쳐버리고 싶은 케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윽!”
신전 바닥이 더 강하게 들썩이며 이제 불규칙하게 치솟아 올랐다.
타닥!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최한이 바닥을 박차며 신전 벽을 향해 쏘아지듯이 뛰어들었다.
‘이런.’
그 순간, 케일의 눈동자에 기이한 광경이 담겼다.
‘…손들이-’
벽에 새겨진 봉인된 신으로 추정되는 조각.
그 조각 아래, 조각을 떠받치듯이 새겨져 있는 수많은 손들이 꿈틀거렸다.
콰직, 콰지직-
그리고 벽을 벗어나 케일과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벽을 벗어난 손을 따라 생겨난 팔목은 한없이 길어졌다.
‘아, 좀 징그러운데.’
수많은 손이 뻗어져 나오는 광경은 좀 무서웠다. 케일이 저도 모르게 움찔할 때.
“아. 다시금 전설의 한 장면이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클로페의 목소리가 들렸고, 케일은 그냥 클로페를 밀쳐버리며 스스로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외쳤다.
“최한!”
콰아아앙—!
동시에 검은 오러가 손들을 향해 내리그어졌다.
몇 개의 손이 부서졌지만 남은 수많은 손들이 여전히 달려들었다.
케일을 향해.
모든 이들은 저 손의 타깃이 케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막습니다.”
내비게이션을 닮은 목소리와 함께 케일은 제 앞을 가로막는 두 로브를 볼 수 있었다.
메리의 손에서 검은 선이 쏟아져 나와 손들을 움켜쥐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잘린은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두 손 가득 붉은 마나를 머금었고, 그 손을 들어 올렸다.
“최한, 로잘린 씨!”
그때, 케일이 외쳤다.
“왼쪽!”
메리는 고개를 돌려 케일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케일의 얼굴은 느긋했다. 절로 긴장감이 사라지려는 메리에게 케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명쾌했다.
“왼쪽에 구멍 뚫으세요!”
케일은 원래 포용을 저 봉인된 신에게 사용하여 그를 재 봉인시켜 옴짝달싹도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마지막에 가서 바뀌게 되었다.
봉인된 신이 케일의 포용을 원했으니까.
거래 조건으로 케일에게 포용되어 신전 밖으로 탈출하는 것을 내건 봉인된 신. 이를 보며 케일은 포용이 완전한 답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 스스로 못한다면.’
내가 답을 알지 못한다면.
‘같이 생각해야지.’
그 정도 융통성은 있는 케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봉인된 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왜냐고?
‘도망도 못 가니까.’
이 신전이 없어지려면 하얀 열쇠로 입구 문을 열어야 한다.
반대로 말하면.
‘이 열쇠로 입구 문을 열지 않는 이상 이 신전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소리지.’
그 말은 즉.
‘일단 탈출해서 봉인된 신을 처리할 방법을 찾는다.’
물론 ‘포기’를 외치는 것도 있었지만. 그러면 다시 시험을 치러야 한다.
그건 안 될 소리였다.
‘에르하벤 님이나 아니면 케이지 씨를 통해서 죽음의 신한테 물어보면 분명 답이 나올 거다.’
특히, 죽음의 신을 협박하든가 갈구든가 해서 방법을 토해내라고 하면, 봉인된 신에게 악감정이 많은 신이니 뭐든 알려주려고 할 터.
그게 아니더라도.
‘하얀 별을 처리한 이상.’
그, 조금, 남들에게 못 보일 광경을 해결한 이상 이제는 굳이 소수로 고생할 필요 없다.
모두 같이 해결하면 된다.
바깥에 강한 동료들이 많았으니까.
그때, 로잘린이 외쳤다.
“공자! 신전에 공격이 안 통한다고, 흠집이 안 난다고 하지 않았어요?”
처음 안로만에게 이 신전에 대해 듣기로, 통신을 제외한 어떠한 힘을 환상에서 사용하여도 이 신전에 흠 하나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은 즉, 이 신전 자체에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아냐, 로잘린!”
로잘린의 시선이 최한에게로 향했다.
“지금은 부서지고 있어!”
“아.”
로잘린은 자신이 정신이 없어, 미처 깨닫지 못했음을 알아챘다.
지금껏 붉은빛을 시작으로 최한, 로잘린, 메리의 공격에 신전 벽과 내부 곳곳이 자잘하게 부서졌다.
물론 그들이 펼친 공격에 비하면 아주 작은 흠집이었지만, 그럼에도 신전은 부서졌다.
그 사실을 깨달은 로잘린의 귓가로 케일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인된 신은 힘을 많이 잃었어요.”
봉인된 상태에서 모은 모든 힘을 케일과 관련하여 너무 많이 써버렸다.
신전은 봉인된 신을 가둔 감옥이지만 동시에 그의 영역이다.
“그러니 이 신전도 약해졌다는 소리죠.”
“좋네요.”
그 말과 함께 로잘린의 붉은 마나가 한곳으로 이동했다.
“최한!”
그녀의 외침에 이미 달려들고 있던 최한이 검은 오러를 한껏 일으켰다.
우우웅–
작은 진동음과 함께 검은 흑룡이 반짝이는 검은 오러 속에서 피어오르며 그 아귀를 벌렸다.
불길과 같은 붉은 마나. 그 뒤를 아귀를 벌린 채 달려드는 흑룡.
“메리. 손들은 네가 막아줘.”
“알겠습니다.”
수많은 검은 선이 메리의 손에서 뻗어져 나와 달려드는 손들에게로 얽혀들었다.
꽉.
메리가 주먹을 움켜쥐자, 그 선들이 팽팽해지며 손들의 진로를 막았다. 메리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아.”
클로페가 탄성을 흘렸다.
메리는 등 뒤로 불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니, 벼락을 머금은 불의 기운을 느꼈다.
파지직. 파직.
케일이 다시 고대의 힘을 사용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메리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케일은 상쾌하게 손안에 피어오른 불벼락을 내려다보았다.
‘이야. 몸 상태가 최고네.’
언제 이랬더라?
잘 떠오르지 않는 때를 생각하며, 케일은 불벼락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최한과 로잘린. 흑룡과 붉은 마나가 왼쪽 벽과 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에 케일은 눈가를 찡그렸다.
하지만 그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로잘린과 최한은 다음 공격을 대비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벽에 구멍이 안 뚫린다.’
그러니 케일은 자신의 힘도 보탤 작정이었다.
불 다음은 짱돌과 물, 쓸 힘은 차고도 넘쳤다.
쩌저적-
벽에 미세한 금이 생겼다.
역시 한 번은 부족했다.
“다음!”
로잘린이 외친 순간, 최한은 오러를 일으켰다. 케일도 그에 힘을 보태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쩌저적-
“어?”
로잘린이 멈칫했다.
쩌저저적-
벽에 금이 계속 생긴다.
공격을 따로 더 하지도 않았는데. 벽에 자꾸 금이 간다.
케일은 이 광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무 폭주해서 신전이 스스로 부서지는 건가?”
봉인된 주제에 신이 너무 힘을 써버리는 바람에, 그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신전이 부서지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려는 찰나.
쾅! 쾅! 쾅!
소리가 들려왔다.
케일의 안색이 대번에 달라졌다. 최한이 외쳤다.
“케일 님, 밖입니다!”
“…그러게.”
쩌저적—
빠르게 금이 가던 벽은 순식간에 그 간극이 너무나도 커졌다.
콰아앙!
그 결과로 벽이 무너졌다.
케일은 그 무너진 벽을 뚫고 들어온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 안녕하세요-”
벽을 뚫고 들어온 것.
“오, 오랜만입니다. 에르하벤 님?”
그것은 드래곤의 머리였다.
폴리모프를 푼, 정말 진짜 드래곤의 머리 그 자체였다.
골드 드래곤은 그 눈동자를 굴려 케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별것 아니군. 머리 몇 번 박으니 부서지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케일은 순간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켰다.
에르하벤의 머리는 그냥 용머리가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헬멧처럼 몇 겹의 마나가 둘러져있었다.
라온, 에르하벤, 밀라, 라쉴, 도도리. 여러 용의 마나 빛깔이 다 섞인, 정말 무적의 마나 헬멧이었다.
‘…저 정도면… 신전이 아니라 웬만한 건 다 부수지 않을까?’
케일이 생각했을 때.
스스스-
에르하벤은 뒤로 물러섰다.
그 덕에 정말 출구로 손색없는 구멍이 크게 나타났다.
“인간아!”
케일은 저 멀리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저, 저게-”
케일의 목소리가 떨렸고,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에르하벤이 스윽 뒤를 돌아 다가오는 라온와 온, 홍 쪽을 보더니 나지막이 신전 안의 케일에게 말했다.
“…너.”
케일은 신전보다 더 높이 뜬 커다란 구 속의 자신과 일행들, 신전 안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모습을 안쓰러이 보던 에르하벤은 떨리는 목소리로 마저 말을 이었다.
“케일, 너 심장 괜찮으냐?”
“네?”
“애들은 못 봤다.”
“그러면… 다른 분들은?”
고룡은 폴리모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담담하게, 하지만 애달프게 답했다.
“봤지. 다.”
케일은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것 같았다.
“케일 님!”
최한이 얼른 다가가 케일을 부축했다. 그러다가 놀라서 외쳤다.
“케일 님! 지, 지금 옷이-”
케일은 손을 뻗어 상의를 더듬거렸다. 옷이 뜨겁다.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책이 하나 잡혔다.
죽음의 신의 신물이 열기를 토해내며 잘게 진동하고 있었다.
예전에 죽음의 신이 케일에게 최한이 최정수의 기억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처럼.
책은, 신물은 케일에게 어서 책을 펼치라고 제 뜻을 보여주었다.
역시, 죽음의 신은 케일에게 저 봉인된 신을 없앨 방법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틈을 노렸으리라.
케일이 신전 밖과 연결될 순간을.
그리고 지금 용의 박치기를 통해 바깥과 연결되었다.
“빌어먹을…….”
케일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신 새끼. 반드시, 반드시 가만 안 둔다.”
한이 서린 목소리에 메리를 포함하여 손들을 부수고 막아서던 동료들이 멈칫하며 케일을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은 다가오는 평균 9세와 다른 동료들의 표정을 보며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책을 펼쳐 들었다.
#
케일이 신물, 책을 들여다보려는 순간이었다.
“인간아!”
냐아옹!
냐아아옹!
그는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들려온 평균 9세의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때, 케일은 기묘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끼이이—끼이이끼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미친…….”
이어 에르하벤이 미간을 찌푸린 채 외쳤다.
“어쩐지! 구가 움직이길래, 이상하다 싶더니!”
그러고 보니 케일은 신전 바로 위에 떠 있는 구를 자신이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르하벤 님.”
케일의 부름에 고룡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조금 전부터 구가 조금씩 기울어지더니 아래로 움직이더구나.”
케일은 그제야 에르하벤을 제외한 모든 용들이 폴리모프가 아닌 본체 형태로 신전과 구 주변에 포진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심상치 않아.”
에르하벤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끼이이—끼이이-끼이이—-
기이한 소리가 들리는 곳은 구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각조각 나뉘어 신전 내부를 비추던 구는 변하기 시작했다.
여섯 등분으로 나뉘었던 조각이 사라지며 중앙에서부터 붉은빛 혹은 액체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 질척해 보이는 붉은빛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점점 구 안에서 몸집을 키워갔다.
마치 용암처럼, 들끓으며.
쾅! 쾅!
기이한 소리가 바뀌었다.
쾅, 콰앙! 쾅!
붉은 액체는 몸집을 키울수록, 구의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구를 부수고 밖으로 탈출하려는 듯.
그 모습은 화산의 분출구를 떠올리게 했다.
케일의 시선이 신전 밖 아래로 향했다.
퍼슬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끝까지-”
그의 눈가가 일그러졌고 ‘죽음을 죽이는 방법’ 신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잠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방심하고 있었다.
“인간아.”
나지막한 부름.
다가온 라온의 맹렬한 눈빛에 케일은 잠시 멈칫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온과 홍을 보다가 더 당황했다.
그 둘도 눈빛이 살벌했다.
“인간아! 팔 치워라!”
“어?”
얼빠진 대답을 하던 케일은 다가온 라온이 그의 팔을 탁 치더니 상의를 풀어 헤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이이-!”
“이럴 줄 알았는데!”
냐아아옹!
라온, 온, 홍이 순서대로 눈을 치켜뜨며 케일을 노려보았다.
애들은 아문 상처만을 보았다.
‘그나마 다행이지.’
에르하벤은 평균 9세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참혹했을 광경을 애들이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혀를 찼다.
‘박복한 놈이 아니라 미련한 놈이었어.’
그는 슬쩍 뒤로 발을 뺐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폭발한답니다.”
뭐?
고룡은 고개를 돌려 케일을 쳐다봤다.
어느새 애들을 물리친 케일은 죽음의 신 신물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타닥.
신전에 한 사람이 발을 들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알베르였다. 다만 그의 얼굴을 본 라온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저하-”
다가오려던 최한도 잠시 움찔하고는 멈춰 섰다.
알베르의 표정은 상당히 살벌하다 못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것은 ‘이성’이었으나, 눈동자에 담긴 불길이 그 얼굴을 살벌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잠시만요.”
케일은 알베르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신물에 집중했다.
검은 책.
죽음을 죽이는 방법.
그 성물을 통해 죽음의 신은 뜻을 보내고 있었다.
콰아앙! 콰아앙!
그 와중에도 메리와 로잘린, 최한 등은 케일을 향해 뻗어져 오는 손들을 부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도, 다가오는 신전 밖 동료들의 소리도 케일은 들리지 않았다.
죽음의 신은 담백하게 알려주었다.
끼이이—쾅, 쾅!
구 안의 기묘한 소리들이 뒤엉키며 케일의 귀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이런, 빌어처먹을.
케일의 입이 열렸다.
“에르하벤 님! 저하!”
그는 책에 시선을 둔 채 곧바로 이어 소리쳤다.
“저 구가 폭발하면 퍼슬시가 위험해집니다!”
알베르는 입을 꾹 다문 채, 구를 응시했다.
구 안을 가득 채우며 점점 더 강하게 들끓는 끈적이는 붉은빛.
마치 죽음만 한 절망은 없다는 듯.
상당히 불길하게 느껴졌다.
물론 죽음이 절망이 아닐 때도 있었으나, 살길을 찾아, 대륙을 구하러 모여든 퍼슬시 안의 사람들에게는 이 죽음이 다시없을 절망이 될 터.
알베르는 영상통신구를 꺼내 들고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퍼슬시 안의 모든 마법사들은 대형 실드 진을 발동시킨다.”
순간 케일의 시선이 알베르에게로 향했다.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발동시킨다고?’
그 시선을 받은 알베르가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오늘이 언젠 줄 아나?”
“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 것 같나?”
아.
뒤에서 마법 실드를 준비하던 로잘린이 탄식을 흘렸다. 그녀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입김을 보며 초겨울을 벗어나 완연한 겨울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어느새 흘러가 있었다.
“그간 준비할 만한 건 다 준비했어. 모든 ‘만약에’를 대비하기 위해.”
알베르는 케일에게서 등을 돌리며 한마디를 남겼다.
“…공작, 하아. 네 아버지 쓰러지셨다.”
신전에 갇힌 채 생사를 알 수가 없는 아들. 그 아들의 모습을 겨우 보게 되었을 때, 아들은 제 심장을 향해 단검을 깊이 찔렀다.
그것을 본 아버지가, 어느 누가 제정신일 수가 있을까.
그나마 퍼슬 시청 지하에서 헤니투스 영지 마법사들을 다독이던 바이올란 공작부인이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해 다행이었다.
물론 데르트 공작은 곧 정신을 차렸고, 멀쩡한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멀쩡하게 살아난 케일을 보며 누군가 경외하고 감탄할 때, 반대인 이들도 있는 법이었다. 당연히.
다시 시선을 돌린 알베르는 신물을 들여다볼 생각도 못 한 채 멍하니 서 있는 케일을 보며 혀를 찼다.
“미친놈.”
저럴 거면서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것인지.
물론 그 수밖에 없으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니 알베르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무능함. 그것으로 사람을 잃는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그였으니까.
알베르는 내뱉듯이 덧붙여 말했다.
“이제 저 구는 우리가 막는다. 너만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게 아냐.”
흔들리는 케일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알베르의 얼굴이 순간 확 지쳐 보였다.
“…고생했다.”
하지만 이내 그 얼굴은 다시 무심한, 냉정한 얼굴로 바뀌었다.
“다만 다시는 그러지 말도록.”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신전 밖으로 향했다.
“사령관. 명령이다.”
툭. 케일은 제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에르하벤이 씨익 웃어 보였다.
쿠구구구—-
그 순간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작부인 바이올란. 그녀는 공작 곁이 아닌 퍼슬 시청에 집결해있는 마법사들 곁에 머물렀다. 그녀는 힐스만 부단장을 시작으로 기사들이 들고 들어오는 포대 자루를 보며 명령했다.
“부단장. 내려둬요.”
“네!”
쿵.
내려진 포대자루에서 상급, 최상급 마정석이 쏟아져 나왔다. 바이올란 공작부인은 마법사들을 보며 명령했다.
“다 사용해!”
대규모 마법진.
그것은 에르하벤을 비롯한 드래곤들도 일부분 참여해 만든 것으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퍼슬시 전체를 감싸 안을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이것을 사용하는 순간은 두 가지 경우였다.
하나는 퍼슬시를 보호하기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정말, 정말 좋지 않은 상황이 되어 퍼슬시가 무너져 내린다면 그 여파를 밖으로 미치지 않게 방벽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행히 이번에 전자로서 사용할 수 있었다.
쿠구구구구—-
끊임없이 쏟아지는, 서대륙 전역의 마정석을 싸그리 긁어온 듯한, 무지막지한 양의 마정석이 서대륙 곳곳에서 모인 마법사들의 손에 쥐인 채 마법진을 발동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고룡 에르하벤은 퍼슬시 전체에 진동하는 마나의 규모에 미소를 그렸다.
엄청난 마나의 밀집이 한 도시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밀라.”
“알아요.”
베이지색 드래곤 밀라로부터 마나가 피어올랐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도도리, 라쉴, 에르하벤.
“나도 한다!”
그리고 라온까지. 드래곤들의 갖가지 빛깔의 마나가 구 주위를 감싸는 또 다른 막을 만들어내었다.
베이지색을 시작으로 층층이 쌓이는 막은 붉은 액체가 구를 부순다고 하더라도, 막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듯 견고해 보였다.
“우리와 더불어 마법사들, 그리고 정령들도 도울 테니. 충분히 가능할 거다.”
에르하벤은 케일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것 같군요.”
마주 차분하게 답한 케일은 신물로 빠르게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부족할지도 모른다.’
저 힘으로는 부족할지 모른다.
케일은 신전의 환상 시험 첫 번째 때, 봉인된 신이 낫에 두르고 휘두르던 붉은 힘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신전 밖으로 나와 마주한 신의 힘은, 조각에서 쏘아진 붉은 힘은 별것 아니었다.
그 정도라면 저 구는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케일이 느끼는 저 구 속의 붉은 힘은 상당히 강해 보였다.
죽음의 신 말대로, 마지막 수를 준비하는 봉인된 신의 힘은, 섣불리 안심해서는 안 된다.
“나한테 할 말이 있지 않나?”
죽음의 신은 글로서 뜻을 전했다.
안다.
케일도 그것을 알아서 저 봉인된 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케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봉인된 신은 케일에게 거래 조건으로 자신을 포용시키길 원했다.
그러나 죽음의 신과 봉인된 신에게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케일의 시선이 신물, 검은 책을 훑었다.
이전과는 다른 시선이었다.
그래서 죽음의 신이 여의주를 통해서야 겨우 케일에게 닿았고, 그 이후로는 닿을 수 없었듯이.
더불어 조각에 봉인된 절망의 신이 그나마 자유로웠듯이.
신전 안에서 절망의 신은 그래도 자신만의 영역이 주는 이점이 존재했다.
“아.”
케일이 깨달았고, 죽음의 신은 말했다.
이미 케일은 펼쳐 든 책을 들고서 뛰고 있었다.
이제 1분밖에, 아니 1분도 남지 않았다.
콰앙, 쾅! 쾅!
구 안을 채우던 끈적한 붉은빛은 마침내 구에 유의미한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쩌저적—-
갈라지는 구, 그 밖으로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동시에 하늘을 지켜보던 이들은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에 바삐 움직여야 했다.
“당장, 지정한 구역으로 가라!”
“어서 건물 안으로 가!”
시계를 보고 있던 바이올란 공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파아아앗-
그 순간, 퍼슬시 전체를 감싸는 반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리타나는 툰카에게 말했다.
“대장군!”
“알았소!”
툰카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신전과 땅을 연결하던 계단의 중간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신전과 끊긴 계단은 땅을 향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 근방에 있던 헤니투스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하다는 신호를 주었다.
쿠웅!
완전히 무너져버린 계단을 내려다보던 리타나는 얼른 몸을 돌려 신전을 향해 부서지기 시작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어서 가죠!”
리타나와 툰카 뒤로 계단이 부서져 내렸다.
힐끗 뒤를 돌라본 리타나의 입에 미소가 어렸다.
파아아-
계단이 부서지고 없어진 허공. 그 틈을 반투명한 막, 대규모 실드 마법이 지나가며 감쌌다.
신전과 땅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됐어!’
리타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신전과 구는 지상의 퍼슬시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리타나는 신전 쪽을 바라보며 계단을 올라섰다.
“대장군, 우리 이제 신전 쪽으로-”
그녀의 입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
쩌저적–
갈라진 틈으로 흘러나오는 끈적한 붉은빛.
아주 미세한 양이었다.
‘드래곤의 마나가-!’
그런데 그 붉은빛은 삽시간에 베이지색 마나 막을 부수고 있었다.
쩌저저적-
드래곤이 만든 막인데,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그 막이 무너져 내렸다.
“이런!”
드래곤 밀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드래곤들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그 사이로 로잘린이 공중에 떠오르며 외쳤다.
“봉인되었다 해도 신의 힘입니다!”
에르하벤의 주위에 황금빛 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불길함의 정도가 다르구나.”
구를 뚫고 나온 붉은빛. 끈적이는, 액체를 닮은 저 빛은 세상에 드러난 순간 그 불길함과 기이함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그것을 에르하벤은 누구보다도 빨리 깨달았다.
“이런!”
에르하벤도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콰과과과과—-!
조금씩 구를 비집고 나오던 붉은빛이 소용돌이를 치며 거세게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마치 태양이 폭발하는 듯, 구는 갈라지고 부서지며 붉은빛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크윽!”
마나를 피워 올리며 제 막을 더 강화시키려던 드래곤 밀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르하벤은 곧바로 그녀를 보조하기 위해 나섰다.
그 순간이었다.
“인간아!”
라온의 외침에 고개를 돌린 고룡은 펼쳐진 책을 들고서 아직 부서지지 않은 수많은 조각손들 안으로 뛰어드는 케일을 볼 수 있었다.
케일은 책에 쓰이는 글귀를 보지도 않은 채, 저를 붙잡는 조각손들을 보며 외쳤다.
“메리, 마나 거둬!”
죽은 마나가 만든 선이 삽시간에 사라져갔다.
케일은 조각손들에게 붙들렸다. 그 억센 손길에 온몸이 아파왔다. 하지만 케일은 벽에 새겨진 조각, 봉인된 신을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네 바람대로 해주마.”
케일을 잡고 있던 조각손들이 일순간에 그를 놓아버렸다.
덥썩.
하지만 케일은 한 손으로 그 조각손을 붙잡았다.
동시에 다른 손에 들린 검은 책이 빠르게 그 책장을 넘기며 기이한 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정한 암흑.
어둠을 표현한 색이었다.
케일은 저를 감싸는 어둠을 보며 중얼거렸다.
“신물은 포용도 다르네.”
휘이잉-
바람을 매단 케일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두 번째로 제단을 밟고 솟구쳐 올랐다.
케일은 벽에 새겨진 조각과 시선을 마주했다.
“끝내자.”
어둠을 휘감은 검은 책이 조각의 얼굴을 뒤덮은 순간.
쩌저저정—!
신전 위에 자리한 구가 완전히 박살나며 붉은빛이 아귀처럼 쏟아져 나왔다. 질척한 붉은빛이 드래곤의 마나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
허억.
고룡 에르하벤은 순간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고개가 재빠르게 케일 쪽으로, 신전 벽의 조각 쪽으로 향했다.
‘이건 무슨-’
삽시간에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케일 손에 쥐어진 어둠을 휘감은 책이 조각의 얼굴을 덮는 순간, 조각으로부터 어떠한 기운이 느껴졌다.
끔찍하고도 기이한 기운이었다.
바닥이 없는 늪에 끌려들어 가는 것 같은 무력감과 심장이 울렁이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다른 용들도 케일과 조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 그들을 돌아보게 할 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끔찍한 기운은 도도리 같은 어린 용이 잠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고를 반복하게 만들었다.
“으윽.”
네크로맨서 메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최한은 메리를 부축하면서도 섣불리 케일 쪽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인간아!”
다만 라온이 황급히 케일을 향해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라온의 앞을 붉은 마나가 지나갔다. 그 붉은 마나를 보는 순간, 에르하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붉은 마나는 끈적한 붉은빛이 흘러나오는 구를 감싸는 또 다른 막을 만들었다.
고룡의 눈동자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마나를 유지한 채 마법을 펼치고 있는 로잘린이 담겼다.
“…똑똑한 녀석.”
메리와 최한까지 영향을 받은 이 기운에 로잘린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어쩌면 여기 있는 이들 중에 클로페 다음으로 약한 로잘린이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끝없는 무력감과 깊이 가라앉는 감정.
아마도 이 두 가지에 그녀가 덜 영향을 받은 것은 현재 상황을 이성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마법에 있어 최고의 재능 중 하나였다.
“라온.”
“…할배야.”
“방해하지는 말고 지켜만 봐.”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일 곁으로 향했다.
에르하벤은 이를 보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들이 로잘린의 마나 막을 보다가 에르하벤과 시선을 마주쳤다.
“질 순 없지!”
회색 반삭발 드래곤 라쉴을 시작으로 드래곤들이 다시금 질척한 붉은빛을 막기 위해 마나를 모았다.
이렇게 용들이 힘을 모으기도 힘들 터.
“으음.”
그러나 곧 에르하벤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라온 힘도 보탰어야 했나.’
쩌저적—
신전 위에 있던 구는 이제 더 이상 그 형상을 유지하지 못한 채 깨졌다.
“이어붙이기가 안 돼요.”
이어붙이는 특성을 지닌 드래곤 밀라가 화를 참으며 말했다.
치이이이—-
밖으로 흘러나온 붉은빛은 드래곤의 마나를 집어삼키며 하늘 아래를 뒤덮으려 했다.
반대로 드래곤들은 어떻게든 그 붉은빛을 묶어두려고 했다. 버티려고 했다.
붉은빛에 담긴 기이함과 불길함은 저절로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었으니까.
‘케일이 일을 끝낼 때까지 버틴다.’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음!”
그 순간이었다. 알베르는 등 뒤로, 정확히 말하면 케일이 있을 곳에서부터 또 다른 기운을 느꼈다.
그전까지 느꼈던 기운은 무력감과 끝없이 추락하는 감정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단번에 기운의 정체가 어떠한 설명도, 어떠한 이해도 필요 없이 떠올랐다.
‘죽음’
감정도 신체적 변화도 없이, 그저 그 단어만이 떠올랐다.
에르하벤은 붉은빛을 막기 위해 집중하느라 차마 뒤돌아보지 못했지만, 절로 등에 식은땀이 났다.
‘케일-’
도대체 네 녀석은 무슨 짓을, 무슨 힘을 사용하는 것이냐?
케일에 대한 놀라움과 녀석에 대한 걱정이 치솟아 올랐다.
“윽!”
그때, 첫 번째 방어막을 이뤘던 베이지색 드래곤 밀라가 두 손을 움켜쥐었다. 라쉴이 외쳤다.
“미친! 날뛰기 시작했어!”
알베르가 죽음을 느낀 순간, 붉은빛이 더 날뛰기 시작했다.
마지막 발악처럼.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죽이려는 듯.
“…케일, 빨리 해라.”
고룡은 중얼거리며 구에 가장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손을 펼쳤다.
촤아아아—
오로라처럼, 황금빛 가루가 구 주위에 펼쳐졌다.
에르하벤의 손이 한 번 더 허공을 휘저었고, 그 황금빛은 붉은 액체와 드래곤들의 마나 막을 감쌌다.
그가 생각하는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우우—우우우—
퍼슬시 하늘 위에는 인간들이 만든 실드막이 있었지만, 저것은 최후의, 정말 끝에 있는 방어선이었다.
그때였다.
끼이이이–
소름 돋는 소리가 신전에서 흘러나왔다.
분명 케일이리라. 에르하벤은 부디 케일이 버티기를, 해내기를 바라며 붉은빛을 막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케일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네 기 싸움 하냐?”
포용을 펼쳤다.
바로 봉인된 신이 포용되지 않았다.
절망의 신은 정말 최후의 무언가를 토해내듯, 알 수 없는 기운을 내뿜으며 케일을 밀어내려 했다.
‘아니, 잡아 삼키려고 하는군.’
무력감과 낙하하는 감정이 케일에게 스며들려고 했다.
케일은 이 두 가지에 빠져들면, 결국 봉인된 신을 포용해도 그에게 휘둘릴 것이라는 걸 대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원래 봉인된 신이 나에게 포용을 거래로 내세우며 꾸몄던 수작이군.’
대번에 봉인된 신의 본래 계획을 이해하였다.
하지만 절망 신의 계획은 성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또 다른 신의 물건이 이곳에 있었으니까.
스스스—
죽음의 신 신물을 감싼 어둠과 조각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운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죽음은 봉인된 신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신물인 책과 케일을 감싼 어둠은 그를 보호하는 동시에 봉인된 신의 기운을 잡아먹고 있었다.
‘빌어먹을! 좀 빨리 하지!’
케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책을 쥔 그의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다르다.
하얀 별, 가짜 세계수 등 여태껏 어떠한 존재를 포용할 때도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과하다 못해 흘러넘칠 것 같은 기분이군.’
조금씩 숨이 차올라 벅찼다.
온몸에 식은땀이 맺혔고, 책을 쥔 손의 떨림이 갈수록 심해졌다.
짧게 끝나던 이전의 포용과 달랐다.
콰앙!
점점 두 신의 기운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작았던 충돌음은 점점 커져갔다.
콰앙! 쾅! 콰아앙!
케일은 귀가 멍멍해지며 덩달아 머리가 아파왔다. 머릿속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인간아!”
그때,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일은 여전히 싸우는 두 신의 기운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상황은?”
차마 케일을 감싼 어둠에 다가가지 못하고 조금 떨어져 있던 라온. 검은 용은 케일의 목소리에 얼굴을 구겼다.
그때, 같이 다가왔던 온이 입을 열었다.
“구가 다 깨져서 형체를 잃었는데! 그리고 저 액체 같은 붉은빛은 드래곤 님들도 막기 힘들어 보이는데! 저 붉은빛이 마나를 집어삼켜요!”
케일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 봉인된 신을 포용해도 과연 저 붉은빛이 사라질까?’
만약 그대로라면?
구가 금이 갔더라도 그대로라면 몰라도, 형체를 잃을 정도라면 이제 저 붉은빛을 가둬둘 신의 장치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케일은 늘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온, 어둠의 숲으로 가.”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가라앉히며 말했다.
“거기서-”
그때였다.
쿠우웅—-!
케일은 내부가 크게 울렸다.
“으윽.”
순간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저항이 심하구나. 조금만 더 힘을 써야겠다. 괜찮겠나?
케일은 그의 내부를 울리며 전해진 목소리의 주인이 죽음의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물을 통해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그는 여러 생각을 치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써라, 써! 버틸 테니까.’
버티는 건 꽤 자신 있는 케일이었다.
죽음의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케일은 저를 감싼 어둠이 더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다른 의미로 손이 떨렸다.
죽음.
그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케일은 평균 9세를 빨리 멀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이들도.
그렇기에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가져와!”
간신히 그 단어만을 내뱉은 후, 신물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막대한 죽음의 기운에 신물을 놔버릴 것 같았다.
‘그간 신이 맞나 싶었더니, 신은 맞나 보네.’
결코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를 느끼는 케일이었다.
그때, 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온! 나랑 어둠의 숲으로 가자! 홍도!”
케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덜덜 떠는 중이라 그 모양새가 형편없었지만,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온이 제대로 말을 알아들었다.
라온을 데리고 간다고 했으니까.
‘그래, 가져와.’
케일이 가지고 오라고 한 것.
그것은 어둠의 숲에 있는 그들의 집.
라온의 소유물.
검은 성이었다.
그곳에 검은 성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전 드래곤 로드 쉐리트.
라온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의 특성은 ‘보호’.
케일처럼 방패 형태의 힘을 사용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단순히 마나막이나 실드로 저 붉은빛을 막는 것보다 ‘보호’라는 존재 의미가 담긴 힘이 더 강력하리라.
‘알아서 성을 가져오겠지.’
라온의 스케일과 온의 판단, 쉐리트의 경험이라면 충분히 성과 쉐리트를 잘 데려오리라.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이 빌어먹을 신 새끼를 내가 포용하는 거지!
케일은 깊이 숨을 한 번 들이쉬며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콰아앙! 콰아앙!
기운 간의 충돌이 격렬해져 갔다.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신속하게 이 일을 처리하고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까?
그때, 울리는 머릿속으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듯 외치는 목소리는 저 멀리서 들리는 듯 아득했다.
그러나 분명히 제대로 들렸다.
-대, 대리석도 돌이다!
무서운 짱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신전은 봉인된 신의 영역이다. 한쪽 벽면이 부서졌다고 한들. 아직 이 안에서 봉인된 신은 제집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을 터.
더불어 죽음의 신은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기운을 쓰기가 마땅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전이 봉인된 신의 영역이듯이.
이 대리석으로 된 건물은 ‘돌’, 케일의 영역이다.
봉인된 신의 조각이 부서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 저 기운을 내뿜는 신이 조각된 벽은 함부로 부수거나 흔들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전을 짱돌의 관할 아래, 나의 아래에 두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신의 기운이 머무는 신전을 케일의 고대의 힘이 이길 수 있을까?
-케일.
짱돌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케일의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탓이리라.
-이전에는 신전에 신의 지배가 강력해서 어차피 짱돌 힘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리석에 머물던 신의 기운 대부분이 조각 앞에 모여들었다.
아.
케일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파악했다.
절망 신은 마지막 발악을 하느라, 신전 안의 모든 기운을 지금 죽음의 신과의 충돌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 틈새를 노려라.
짱돌은 말했고, 케일은 기꺼이 그러할 생각이었다.
다만, 케일은 포용을 쓰면서 고대의 힘을 추가로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해야 할 때였다.
“괜찮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짱돌이 답했다.
-공격이나 방어도 아니고, 그저 돌을, 바위를 너의 아래에 두는 것은 별 다른 힘도 들지 않아.
-다만 곁들여 쓰면 좋겠구나.
-지배하는 아우라. 그것을 나와 함께 써라.
그 순간, 케일은 몸 안에서 고대의 힘을 일으켜 세웠다.
“케일 님!”
신전 한구석에 무릎을 꿇고 있던 클로페 세카는 흠칫 몸을 떨었다.
엄청난 기운들이 부딪치는 와중에 어떤 존재감이 느껴졌다.
드래곤 피어의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그 기세.
지배하는 아우라는 신의 기운들 사이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그 기운은 고대에 신이 되려고 했던 자에게 마지막까지 대적하던 자의 힘에 발을 맞췄다.
바위의 힘이 케일의 발아래에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쿠우웅—
신전 전체에 알 수 없는 울림이 퍼져나갔다.
최한과 메리는 케일이 또 다른 일을 벌였음을 깨닫고 주변 상황을 파악하려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
특히 온, 홍, 라온이 텔레포트 한 이후, 가장 케일의 곁에 서 있던 최한은 제 몸의 변화를 알아챘다.
막대한 신들의 기운.
그 충돌 사이로 미세하지만, 조금씩 신전 전체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는 누군가의 등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심하지만 따뜻하고, 어떻게든 버티게,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함이 담겨 있었다.
“…케일 님.”
케일의 기운이 조금씩 신전 안에 퍼지고 있었다.
너무나도 미약하지만, 적어도 신전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미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힘.
그래서 마음이, 몸이 편안해지는 기운.
그러나 최한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크윽!”
신전에 조금씩 무심하지만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정작 이를 펼친 이는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최한은 어둠 속에 감싸인 케일을 볼 수 없었지만, 검을 쥔 손에 힘을 풀 수가 없었다.
주륵.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최한은 스스로의 모자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주륵.
케일의 입가에도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웃고 있었다.
‘되네.’
이게 되네.
조금씩이지만 짱돌과 아우라, 두 개의 고대의 힘이 신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처음이 힘들어서 그렇지, 케일은 점점 더 미약하던 기운이 댐의 둑이 터지듯 빠른 속도로 신전을 장악해 가는 것을 느꼈다.
신전이 다른 의미로 진동했다.
쾅! 콰앙!
충돌음이 줄어들어갔다.
절망 신의 기운이 당황한 듯 요동쳤다.
‘이대로라면!’
케일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조금만 더 하면 포용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케일!
그때, 짱돌이 당황해서 외쳤다.
‘음?’
케일은 좋은 상황에 짱돌이 왜 저러나 싶었을 때.
-너, 너-
짱돌이 더듬거렸다.
-…세계수는 얘한테 도대체 뭘 준거야?
응?
-아니, 이 정도로 신전을, 장악하는 게 가능하나?
짱돌은 황당하다는 듯 탄식하듯 말했다.
-너, 기세만큼은 용도 넘어섰구나.
응?
…용을 넘어섰다고?
그럼… 뭐지?
케일은 다른 의미로 한기가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쿠우웅-
그의 내부가 크게 울리며 케일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구부렸다.
“커억!”
-잘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죽음의 신 목소리와 함께 케일은 그를 감싼 어둠이 조각을 뒤덮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끄아아아아아———-”
조각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
외치는 이는 보이지 않았건만 터져 나오는 비명에 모두가 귀를 막았다.
쩌저적—
조각이 새겨져 있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신전 안의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납작 엎드려 바닥에 붙였다.
죽음.
절대적이라고 생각될 만한 기운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신전 바닥의 따뜻함에 기대지 않으면 기절할 만큼, 숨이 막힐 만큼 거대한 기운이었다.
그 기운이 공간 안을 가득 채운 그 순간.
“어억!”
소름 끼치는 비명이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신물을 쥐고 있느라 귀를 막지 못했던 케일은 계속된 엄청난 소리에 머리가 울려 비틀거렸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제대로 선 케일은 작게 탄식을 흘렸다.
“아.”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제 손에 들린 책으로 스며드는 절망의 신을.
그는 벽에 새겨진 조각이, 아름다운 모습의 존재가 그 석상 그대로 검은 책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애롭고 아름답던 조각의 얼굴은 어느새 악귀의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케일은 입가의 피를 무시한 채 웃었다.
벽에 있던 조각은 사라졌다.
대신 펼쳐졌던 검은 책 페이지에 조각의 모습이 새겨졌다.
케일은 두 손을 움직였다.
탁!
검은 책을 덮었다.
그는 신물에 자신의 포용이 스며들었음을, 봉인된 신은 죽음의 신 영역 안에 가둬졌음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케일 님!”
케일의 몸이 비틀거렸다.
최한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지만, 케일은 최한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끈적한 붉은빛.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라지려고 하는 중이었다.
우르르—
그저 비처럼, 땅으로 떨어질 것처럼 굴던 붉은빛은 들끓고 있었다.
마치, 곧 폭발할 시한폭탄처럼.
저것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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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 님, 저게 문제입니까?”
케일은 나지막한 목소리에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최한이 굳은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부축을 벗어나 스스로 일어선 케일은 최한, 메리를 보며 담담하게 답했다.
“이제 저것만 남았지.”
저것만 남았다.
그 말에 메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기나긴 싸움의 끝이 보이는 듯했으니까.
“으악!”
누군가의 짧은 비명과 함께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던 메리는 이미 그녀를 지나쳐 뛰어가는 케일을 보았다.
그때였다.
콰아앙!
들끓던 붉은빛, 아니 이제는 액체 가까운 것이 순간 일부 아주 강하게 튀어 올랐다.
콰직-!
그리고 로잘린, 드래곤 마나들이 겹겹이 쌓인 두터운 막에 아주 미세한 틈을 만들어버렸다.
“이런!”
에르하벤의 얼굴이 구겨졌다.
‘너무 강한 힘이다!’
일부 강하게 튀어 오른 것뿐인데, 저 붉은 액체는 여러 개의 드래곤 마나막에 금이 가게 했다.
용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케일이 포용을 펼치는 동안 붉은빛이 퍼슬시로 떨어지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끈적한 붉은빛을 막을 때 사용하던, 그 정도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다들 정신 차려!”
에르하벤의 외침과 동시에 로잘린, 드래곤들은 더 큰 힘으로 마나 막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그 틈을 막았다.
뚜욱, 뚝.
그러나 이미 틈을 비집고 나온 붉은 액체는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양은 미세했다.
두 손을 다 채우지도 못할 정도의 양이었다.
“저걸-”
에르하벤은 그 액체를 막으려 또 다른 마나를 일으키려 했다.
“아니에요, 에르하벤 님.”
그 순간,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잘린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인간들이 펼친 실드막을 향해 떨어지는 액체를 보고 있었다.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액체들은 그 양이 미세했다.
그렇기 때문에.
“봐야 해요.”
저 액체의 파괴력을 봐야 한다.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저 시한폭탄이 폭발했을 때의 파괴력을 짐작하고 막을 수 있다.
그녀는 저 아래 액체가 떨어지는 곳을 향해 이동하는 알베르 크로스만을 보았다.
퍼슬시 광장과 거리로 나왔던 모든 사람들은 이제 건물 안으로 들어선 것인지 혹은 대피한 것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는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를 대비해 이미 준비를 해둔 사람들의 신속함이었다.
“모두 멈춰라!”
알베르 크로스만의 외침에 함께 달려오던 이들이 걸음을 멈췄다.
‘저거군.’
알베르는 고개를 들어 대규모 마법진으로 펼친 실드에 떨어지는 붉은 액체를 바라보았다.
아주 미세한 양이다.
저것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절망 신. 그것이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간 힘은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을까.
붉은 물방울이 실드막에 닿았다.
인간들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간절함이 담긴 실드막.
알베르는 무기 태랑을 손에 쥐고도 저 실드막을 부술 자신이 없었다. 에르하벤도 그랬다.
저 실드를 깨는 것은 불가능하진 않지만 힘들 것 같다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치이이익—
그러나 허무하게 그 실드가 녹아내렸다.
붉은 물방울이 닿자마자.
툭, 투욱.
몇 안 되는 물방울이 실드를 두드릴 때마다 실드는 허무하게 녹아내려 갔다.
실드에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을 지난 붉은 액체가 땅에 떨어졌다.
“저하, 뒤로 물러서셔야 합니다!”
한 방울이다.
단 한 방울이 실드를 지나 온전히 땅에 떨어졌을 뿐이다.
치지지지직—!
액체가 닿은 땅이 검게 변하고 있었다.
고작 한 방울에 알베르와 수하들이 딛고 있던 땅 주변이 모두 검게 변하며 풀 한 포기조차 남지 않고 죽어갔다.
서서히.
“저, 저하- 이런, 이런 힘은-”
죽은 마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생명과는 반대가 되는 힘이 느껴졌다.
급히 피했던 수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봤습니까?”
하지만 알베르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의 손에 들린 영상통신구에서 마찬가지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느 정도일지 감이 잡히는군요.
바이올란 공작부인이었다. 현재 데르트 공작을 대신해 움직이는 그녀는 영상통신구에 보이는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옆의 마법사에게 말했다.
“어떤가?”
“해봐야죠.”
붉은 액체의 위력을 작게나마 느꼈다.
“아마 폭발하면 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닐 겁니다.”
그러면 실드는 계속 녹아내리거나 혹은 부서질 터.
그러나 해봐야 한다.
“계속 실드에 마나를 공급해, 녹아내리면 바로 복구가 가능하도록 최대한 속도를 높여보겠습니다.”
파직, 파직.
최상급 마정석이 하나 부서졌고, 순식간에 녹아내렸던 실드 부분이 복구되었다. 더불어 곁에 있던 마법사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대형 마법진 주위에는 백여 명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일하거나 혹은 대기 중이었다. 더불어 다크엘프들이 정령을 데리고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게 준비 중이었다.
-들으셨죠?
바이올란의 물음에 알베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들었다.
콰아앙-! 쾅, 콰앙, 콰아앙–!
붉은 액체가 점점 더 강하게 들끓기 시작하며 드래곤과 로잘린의 막을 끊임없이 부수고 녹여 내렸다.
그럴 때마다 황급히 드래곤의 마나가 공급되며 이를 막아섰지만.
폭발이 일어난다면.
가늠이 되지 않는다.
쾅, 콰앙–!
점점 들끓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곧 폭발할 것 같습니다, 저하. 일단 대피하심이-”
수하의 말대로 아마 몇 분 안에, 어쩌면 지금이라도 당장 저 붉은 액체는 폭발할 수도 있었다.
알베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하께서도 대피하지 않고 계시지 않나. 내가 먼저 피할 순 없다.”
그리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알베르의 시선이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신전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어야 할 자리. 그곳은 지금 무너진 계단의 잔해만 존재했다.
그곳에 국왕 제드 크로스만이 측근 두 명만 데리고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신전을 향해 있었다.
알베르는 도통 국왕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국왕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그리고 보았다.
콰아앙— 쾅! 콰앙!
용들과 로잘린이 고군분투하는, 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저 붉은 액체를 가둬두려고 하는 와중에.
“…저, 저-.”
알베르의 눈동자에 부서진 신전 벽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놈의 모습이 담겼다.
지금 이 상황에 저렇게 고개만 빼꼼 내밀만한 녀석은 단 한 명뿐이었다.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덕지덕지 붙이고 붉은 머리칼은 산발이 된 케일 헤니투스.
그가 붉은 액체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 녀석 혹시 지금 막으려고-”
“오! 케일 사령관께서 나서주신다면, 무언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알베르는 제 중얼거림과 동시에 들린 더 큰 수하의 목소리에 표정이 굳어졌다.
갑자기 밝아지고 떨림이 사라진 수하의 목소리에, 알베르는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을 느꼈다.
‘…케일 헤니투스의 몰골은 보이지 않는 건가?’
그는 주변의 측근들을 살펴보았다.
케일에게 기대하는 사람 반, 케일을 걱정하는 사람 반이었다.
‘좋지 않아…….’
알베르는 이번 일이 끝나면 케일 헤니투스를 강제로라도 요양시키든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케일도 그저 인간이라는 것을.
사람들도 알아야 했다.
‘물론 헤니투스 공작가에서 이미 손을 쓰겠지.’
아마도 케일 헤니투스는 한동안 공작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저놈 뭐 하는 거야?”
알베르는 갑자기 케일이 하는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최한은 케일에게 다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전과는 다른 어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케일의 발밑에 검은 책이 밟혀 있었다.
성물, 검은 책이었다.
“괜찮지.”
케일은 덤덤하게 답하며 밟고 있던 책을 대충 탈탈 털어 옆구리에 끼웠다. 그의 미간은 찌푸려진 채였다.
‘빌어먹을.’
성질머리 상 이렇게라도 짜증을 표시해야 좀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신에게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덜덜덜. 그의 손에 들린 신물이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가 책을 덮은 이후부터 쭉 이랬다.
‘아마도 신물에 포용된 봉인된 신과 관련된 문제겠지.’
어느새 케일의 얼굴은 담담해져 있었다.
‘뭐, 언제는 신이 그닥 도움이 됐던 것도 아니고.’
딱히 신에게 거는 기대가 없는 케일이었다. 다만, 그의 눈동자에 식은땀을 흘리는 드래곤 도도리와 로잘린, 그리고 너무 많은 마나를 사용 중인 다른 드래곤들이 담겨서. 그래서, 짜증이 날 뿐이었다.
“케일 님.”
최한은 그저 가만히 모든 광경을 응시하는 케일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검을 들고 싸우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새삼 최한은 자신에게 방어 혹은 막는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갈 때.
“어떻게 됐지?”
퍼슬시를 감싼 실드에 약간의 틈을 내어, 알베르가 비행 마법으로 신전까지 올라왔다. 빛 마법도 함께 써서 죽은 마나 기운을 가린 알베르는 망토 자락을 따라 번쩍거리고 있었다.
“번쩍이시네요.”
“…신은?”
케일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며 제 할 말을 하는 알베르에게 케일은 신물을 들어 올려 보였다.
“여기 있습니다.”
“찢을 건가? 아니면 태울 건가?”
오.
케일은 작게 감탄했다. 신물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왕세자라니. 역시 믿을만한 사람이다.
알베르는 감탄하는 케일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다 한쪽으로 고갯짓했다.
“저건?”
터질 것 같은 붉은 액체.
“우리끼리 막아야죠.”
“하긴. 늘 그랬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과 달리, 지금 퍼슬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대피소에 숨은 채 조마조마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
국왕 제드가 알베르와 케일이 있을 신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주변은 초조함과 두려움, 비장함으로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소리 없는 난장판이, 질서정연한 혼란의 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알베르는 차분한 목소리로 케일에게 말했다.
“하지만 넌 이제 무리해서는 안 돼.”
“저 건강한데요?”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을 하는 케일을 보며 알베르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젓는 최한의 모습에 간신히 감정을 삼켰다.
환자를 보고 화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저하. 막아야죠. 퍼슬시를 폐허가 되게 둘 순 없지 않습니까?”
이 녀석의 힘이라도 필요한 상황이라.
아니, 어쩌면 가장 절실할지도 모를 상황이라.
알베르는 케일을 만류하기 위해 말을 더 꺼내거나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콰아아아앙—–!
그때, 알베르는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에르하벤이 외쳤다.
“곧 터질 것 같구나!”
알베르는 케일이 신전 밖 하늘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을 보았다.
휘이이잉—
바람의 소리가 케일의 발목에 맴돌았다.
“좀 다들 도와주시죠?”
케일이 그리 말한 순간, 메리와 알베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내 알베르는 시선을 돌려 케일을 바라봤다.
“어차피 힘이 다 뒤섞이면 뭐가 뭔지도 모를걸요? 전 드래곤 로드 유령 힘인지, 고대의 힘인지, 마법인지, 죽은 마나인지, 네크로맨서 힘인지. 혹은 오러인지. 안 그래?”
케일이 메리에게 물었고, 메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에서 검은 선을 수십 가닥 뻗어내며 이를 그물처럼 묶기 시작했다.
그 힘은 붉은 액체로, 곧 터질 폭탄으로 향했다.
콰아앙—-! 콰아아앙—–
붉은 액체가 요동친다.
알베르는 메리의 수많은 검은 선에 제 죽은 마나를 실었다. 여기 신전 안의 그를 보는 사람은 클로페 세카를 빼면 동료들뿐이었으니까.
‘할 수 있을까?’
알베르는 죽은 마나가 붉은 액체를 막으려 드래곤 마나막 바깥에 둘러지는 순간 깨달았다.
이거, 정말 엄청난 힘이구나.
걱정이 치밀어 올랐다.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등을 적시는 식은땀이 그의 긴장감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해볼 만할 거다.’
어느 역사를 보아도 드래곤부터 시작해 다크엘프, 인간까지. 이렇게 한데 모여 무언가를 지키려고, 막으려고 해 본적은 없었다.
알베르의 기억 속에서는 그렇다.
알베르는 이렇게 모두를 한데 모은 이를 바라보았다.
케일이 허공에서 두 팔을 늘어트린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분명 방패를 쓰기 위함일 터.
아마 저 녀석이 폭발을 마주할 최후의 방어선이 될 것이다.
그때.
쩌저저저적—-
무언가 찢기는 소리와 함께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액체에서 그 소리가 났다.
알베르는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는 마음을 다졌다.
‘해내야 한다.’
그리고.
‘막아야 한-’
알베르가 움찔했다.
갑자기 또 다른 소름이 돋았다.
식은땀이 서늘한 바람에 식어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터지려는 붉은 액체를 겨우 담아놓은 막. 겹겹이 쌓인 동그란 막 위로, 한참 더 위로 마나가 일렁였다.
하늘 가장 높은 곳에서 막대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일렁임 사이로 해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아, 나 왔다!”
케일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왔군.”
라온의 두 앞발이 허공을 향해 뻗어졌다.
우우우웅—-
아주 거대하고 넓은 판이, 마나로 이루어진 판이 생겨났다.
마치 건물을 세우기 전에 그 토대를 다지는 것처럼, 단단한 마나 판이 땅처럼 허공에 생겨난 순간.
“그랬구나!”
돌연 로잘린이 감탄을 흘리며 곧바로 자신의 마나를 구에서 거둬 라온을 도왔다.
검은 마나 판 사이로 붉은색이 스며들었을 때.
스스스–
한 줄기 바람과 함께 검은 성이 하늘 위에 나타났다.
하나의 흠집도 없이 완벽하게 검은 성. 그것은 봉인된 신의 신전과는 다른 의미로 눈에 띄었다.
“인간아! 엄마랑 왔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검은 성이 마나 판 위에 내려선 그때.
“터져요!”
베이지색 드래곤 밀라. 붉은 액체와 가장 맞닿아있는 마나 막을 두른 그녀가 외쳤다.
“늦을 뻔했구나.”
동시에 검은 성 위로 하얀 머리칼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그녀 주위로는 셀 수 없이 많은 방패가 나타나 있었다. ‘보호’라는 특성을 지닌 전 드래곤 로드 쉐리트. 그녀의 손짓을 따라 방패가 움직였다.
목표는 붉은 액체.
콰아아아아아—-
그 순간, 붉은 액체가 거대한 산맥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굉음을 토해내며 터졌다.
그때, 대피소 안에서 밖을 보던 사람들은, 실드막을 보기 위해 밖을 내다보던 마법사들은, 창공에 뜬 채로 함께 붉은 액체 폭발을 막으려던 이들은.
터져 나오는 피처럼, 시뻘건 것이 하늘을 뒤덮으려는 것을 보았고.
쏴아아아아—
또한 한 줄기 바람과 함께 거대한 물결을 머금은 두 날개와 그 중심의 은빛 방패를 보았다.
-…케일, 이건 좀 무리 같구나.
케일의 손에는 하얀 별의 흰 반가면이 들려 있었다.
나무 속성 고대의 힘 부서지지 않는 방패.
하얀 별이 지녔고 이제는 흰 반가면에 케일이 포용시킨 물 속성 고대의 힘 물의 장막. 그리고 바람 속성 고대의 힘 바람벽.
모두 방어 혹은 막는 것에 쓰이는 힘.
“최선을 다해야지.”
-…세계수가 기력을 회복시켜놓으면 뭐하니. 이렇게 막 쓰는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케일은 짱돌의 안타까워하는 말에 웃었다.
그리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방패가 더 단단해졌다.
부서지지 않는 방패.
그것은 본디 케일의 심장을 감쌌고, 케일의 심장에서 힘을 받았다. 뛰는 심장이 방패의 힘이었다. 심장과 방패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심장의 활력을 얻고, 심장의 활력을 방패가 품으며 그 힘을 계속해서 강화할 수 있었다.
케일은 한 번 자의로 심장을 찔렀고, 그 덕에 그의 심장에는 불멸자 세계수의 근원이 일부 스며들었다.
그 덕에 케일은 온몸에, 심장의 활력을 스스로 느낄 정도였다.
이는 방패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 강해진 방패를 믿고 케일은 터져 나오는 붉은빛을 향해 모든 힘을 쏟았다.
퍼슬시 위로 드리워진 방패.
그 방패의 두 날개가 붉은빛을 감싸 안았다.
마치 자신이 모든 힘을 마주하겠다는 듯.
그러나 이번에는 케일 혼자가 아니었다.
동료의 힘들이 그 안에 함께 담겨 있었다.
“해볼 만해.”
자신이 무너지더라도, 혹은 누군가가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때까지 버텨줄 다른 힘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케일은 해볼 만하다고.
당연히, 두려움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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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아아아아—-
하지만 그 붉은 폭발을 가장 먼저 마주한 이는 두려움이 생겨나 버리고 말았다.
‘곧 부서진다.’
아까부터 가장 붉은빛과 최선두에서 맞닿아있던 드래곤 밀라.
이미 여러 겹의 힘으로 둘러싸여 그녀는 자신의 마나막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허무할 정도로 자신의 마나막은 손쉽게 부서지고 있었다.
“커억!”
“엄마!”
밀라의 몸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푹 숙여졌다.
두 손이 떨려왔다.
마나막이 부서지며 갑작스러운 반동이 그 마나막과 연결된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떻게든 버텼다.
‘내가 버텨야 다음이 수월하다.’
용에게 이런 부담을 줄 정도라니. 가공할 폭발력이었다.
저 폭발력을 설명할 단어가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절망, 절망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힘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도도리를 바라봤다.
자신의 아이. 그 아이도 마나막을 펼치고 있었다.
“커헉.”
밀라의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안 돼.’
자신도 이렇게 힘든데, 도도리는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아직 어린 용이니까.
하지만 밀라는 속을 뒤흔드는 충격에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때, 그녀 다음으로 폭발을 마주한 드래곤 라쉴이 외쳤다.
“야! 꼬맹이 넌 빠지고 엄마한테 가!”
라쉴과 밀라의 시선이 부딪쳤다.
폭발이 일어나는 찰나의 순간, 그 짧은 시간 바로 이루어진 판단. 두 용은 같은 판단을 했다.
“어, 어-”
“…도도리…….”
“엄마!”
도도리는 결국 밀라의 부름에 라쉴의 말대로 마나를 거두고 엄마에게 달려갔다.
쩌저저적-
동시에 밀라의 마나막이 완전히 부서졌다.
“제기랄!”
라쉴은 거친 말을 한 번 내뱉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빌어먹을. 그냥 계속 처 잘걸! 왜 여길 와서!’
반삭발 드래곤 라쉴은 짜증이 있는 대로 났다.
주륵. 속에서 올라온 핏줄기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그 피를 모른 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이기적이더라도, 인간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보았다.
자신보다 약한 것들이 저리 아등바등거리는데 어떻게 위대한 용으로서 볼품없이 군단 말인가!
절대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빌어먹을–!”
쩌저저적—!
하지만 곧 그의 마나막도 부서졌다.
밀라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이었다. 최선두에서 맞서야 했던 밀라보다는 힘을 조금 더 비축해둔 덕이었다.
라쉴의 두 손이 덜덜 떨려왔다.
“크큭.”
그러나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줄어들었어!’
폭발력이 줄어들었다.
신의 힘이 조금 줄어들었다.
“잘했다.”
에르하벤의 목소리가 두 용에게 들려왔다.
도도리와 라온이 빠졌기에 마지막 드래곤 마나막은 고룡 에르하벤의 것뿐이었다.
“남은 건 우리군요.”
에르하벤은 하늘에 떠 있는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존재. 전 드래곤 로드 쉐리트를 바라봤다.
로드 쉐리트는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씨익 미소를 그려 보였다.
에르하벤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최고의 방어는 공격일 때가 있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해봐.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막아줄 테니.”
에르하벤은 마나막을 풀었다. 촘촘하게 엮여있던 금빛 막이 삽시간에 아주 작은 가루들로 변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알베르와 메리, 케일을 바라봤다.
뭘 하든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에르하벤은 두 손을 움직였다.
“그럼.”
금빛 가루가 붉은 폭발을 향해 덤벼들었다.
폭발력을 줄이는 방법.
단순히 막아서는 것도, 버티는 것도 있었지만.
‘아군에게 닿기 전에 먼저 폭발시키는 것도 있지.’
금빛 가루 하나가 폭발했다.
콰앙-
그것이 시작이었다.
콰아앙, 콰앙, 쾅! 콰앙! 콰아앙—
연쇄 다발적으로 금빛 가루가 붉은 폭발을 향해 충돌하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크윽.”
쉽지 않다.
금빛 가루의 폭발쯤이야 우습다는 듯, 붉은 폭발은 이를 집어삼켰다.
정말, 절망적일 것이라 느껴지는 힘이었다.
하지만 에르하벤은 안다.
‘절망’과 ‘절망적일 것이라 느껴지는 것’은 아주 다르다는 점을.
콰앙, 콰아아, 콰아앙!
멀리 있던 이들은 케일의 은빛 방패.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뒤죽박죽 섞인 여러 빛깔과 끊임없는 폭발로 인해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다들 알 수 있었다.
“…메리!”
최한은 비틀거리는 메리를 부축했다.
“무슨 일이-!”
그의 물음에 답하는 이는 없었다. 알베르와 메리, 둘 모두 땀을 뻘뻘 흘리며 서로의 힘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거였구나.’
알베르는 메리의 검은 선들에 자신의 죽은 마나 힘을 쏟아부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에르하벤의 힘과 붉은 폭발이 부딪치는 중이다.
사실 부딪친다고 하기에는 에르하벤의 힘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폭발력은 줄어들고 있었다.
문제는 이 폭발을 현재 맞이하고 있는 이가 메리와 알베르라는 점이었다.
드래곤들이 만든 마나막 바깥은 이 둘의 죽은 마나 힘이 자리하고 있었다.
촘촘한 검은 선들 사이로 스며든 알베르의 죽은 마나.
두텁다 생각하던 벽들도 조금씩 깨지고 있었다.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할 터.
그러나 그들이 버텨내는 이유가 있었다.
‘달라.’
죽음으로 절망을 일으키려는 힘이라 그런지 몰라도. 죽은 마나는 어느 정도 저 폭발을 버텨냈다. 용들의 마나막도 삽시간에 부서지는데, 우리의 것은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물론 에르하벤이 먼저 달려들어 충돌해서일 수도 있었지만.
‘이런 거였어.’
알베르는 끊임없이 자신의 죽은 마나를 쏟아부었다.
‘이런 힘들과 마주했던 거야.’
동료들이, 케일 헤니투스가 마주한 힘의 크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해볼 만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해보라고 말할, 그래서는 안 되는 힘이었어.’
그래서 조금이라도 알베르 자신이 버티고 버텨 남들이 덜 힘들게 해야 한다.
“크윽.”
“저하!”
최한이 메리를 앉히고는 황급히 알베르를 부축했다.
아직까지 힘을 놓지 않는 두 사람의 입가에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최한은 드래곤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았다.
그 용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의 힘.
‘어쩌면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인데!’
당연히 알베르와 메리는 더 큰 충격을 받을 터.
그때, 최한은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도면 됐다고 한다!”
날아온 라온은 로잘린과 함께 신전에 내려서며 말했다.
“엄마가 알아서 한다고 한다!”
로잘린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알베르는 모른 척했다. 그러나 메리가 나직이 말했다.
“무리해서는, 다쳐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모두 다요.”
메리의 시선이 케일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알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놓았다. 메리도 마찬가지였다.
콰아아아—-!
그때, 비로소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은 알아챘다.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고룡은 아직 모든 걸 쏟아붓지 않았다는 것을.
에르하벤이 가장 먼저 전 로드 쉐리트를 바라본 이유가 있었다.
반투명한 은빛 방패와 두 날개.
그 안을 뒤죽박죽 채우던 빛깔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이제 얼마 안 남은 몇 가지 색들이 조금씩 제 빛을 발하며 눈에 띄기 시작했다.
붉은 폭발. 거기에 맞서는 결코 작지 않은 금빛들.
콰아아앙—- 콰앙—-!
엄청난 폭발이 연달아 들려왔다.
콰앙! 콰아아앙—!
그 폭발이 일으키는 진동만으로도 공기가 흔들렸다. 바람이 일어날 정도였다.
“허.”
하얗게 질린 얼굴의 케일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이게 고룡의 힘인가?’
에르하벤은 쉴 새 없이 붉은 폭발을 향해 덤벼들었다.
케일은 점점 더 붉은 폭발의 폭발력이 줄어드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방해물들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려던 붉은 힘이 느려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에르하벤의 폭발과 더불어 그 폭발들의 충격을 모두 막아서는 존재 때문이었다.
콰직!
부서졌다.
콰직, 콰직!
부서지고 또 부서졌다.
콰아직!
셀 수 없이 많은 하얀 방패들이 부서지고 또 부서졌다.
그리고 충돌의 여파를 막았다.
그 덕에 케일은 어떠한 충돌과 폭발의 잔해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로드 쉐리트의 하얀 방패는 많이 남았다.
에르하벤의 금빛 먼지 역시 많이 남았다.
콰아아앙—-!
폭발음이 계속 들려왔지만, 대피소에 있던 이들은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
퍼슬시를 덮은 거대 실드 밖으로 여전히 은빛 날개와 방패가 온전히 자리해 있었다.
모두 멀쩡했다.
“그, 폭발 소리가 좀 줄어든 것 같지 않아?”
기사 한 명의 말에, 듣고 있던 이들은 긍정을 표했다.
“확실히… 폭발력이 줄어들었는데?”
옆에 있던 대피소 통신 담당 마법사가 툭 내뱉었다.
“잘 막아주고 있나 봐요.”
그제야 거대한 실드 너머 피를 흘리거나 겨우 몸을 가누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하, 진짜.”
기사 한 명은 마음에 든 무언가를 제대로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을 흘려댔다.
“자, 일단 창문 닫아요. 혹시 모르니까.”
“네.”
마법사의 말에 창문을 조금 더 열었던 기사는 다시 창문을 닫으려 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굉음만 들리지 않았다면.
마법사는 기사를 밀치고 고개를 들어 실드 너머를 바라봤다.
“저, 저건!”
갑자기 붉은 폭발이 마치 오로라처럼 일렁이더니 크게 몸집을 부풀렸다.
로드 쉐리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목적성을 지닌 힘이라. 신의 힘은 다르군.”
그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래도 퍼슬시를 노리는 건 포기했나 보네.”
그리고 그대로.
콰아아아앙—-
붉은 폭발은 터져버렸다.
마치 저를 막아서던 존재들을 모두 삼켜버릴 것처럼.
콰직, 콰직, 콱!
빠른 속도로 하얀 방패들이 부서지며 사라져갔다.
케일은 붉은 폭발이 밀려오는 속도와 방패가 부서지는 속도를 가늠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음. 삼 분의 일 정도 남았어.’
그렇다면.
‘이건 내 몫이군.’
그는 심호흡을 했다.
하얀 별의 흰 반가면에 포용시켰던 고대의 힘들이 케일의 뜻에 따라 두텁게 더 큰 방어막을 만들어갔다.
은빛 방패가 더 반짝였다.
“응?”
그러나 케일은 멈칫했다.
“아직 여력이 남아있다고!”
“나도 할 거야!”
“넌 하지 마!”
갑자기 드래곤 라쉴이 화를 쏟아내며 은빛 방패 안에 실드를 하나 더 만들어버렸다.
도도리도 글썽글썽한 얼굴로 실드를 펼쳤다. 그러다가 막혔다.
‘이 용들이 안 지치나?’
드래곤 라쉴은 심지어 무슨 약병 같은 것을 입에 물고 있었다.
케일이 이를 황당하고 걱정되어 쳐다볼 때.
콰아아아아—-!
걷잡을 수 없는 폭발은 이미 벌어졌다.
케일은 두 용을 향해 외쳤다.
“그만-!”
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라쉴, 도도리가 다시 막아서서 힘을 줄이고. 그들이 피를 토했다.
“크윽.”“큭. 어, 엄마.”
“도, 도도리!”
쿵.
케일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두 용이 뿌듯하다는 듯 웃고 있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도 한다!”
그때, 라온이 케일 곁으로 다가와 그다음을 차지했으며.
“나도 해야죠.”
검은 성에서 최상급 마정석을 한 보따리 들고 온 로잘린이 그 뒤를 이었다.
더불어 죽은 마나 액체를 마시던 알베르도 끼어들었다. 그 두 사람은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이 사람들이 왜 무리를-!’
케일의 얼굴에 어느 때보다도 다급함이 서렸을 때, 라온이 해맑게, 하지만 씩씩하게 말했다.
“인간아, 걱정 마라! 이제 너는 쉬어라! 무리할 것 없다! 내가 하면 된다! 나는 조금 힘들어서 그렇지 기절은 안 한다! 다들 같은 마음일 거다!”
아.
케일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짱돌도 탄식했다.
-허이구.
그리고 중얼거렸다.
-업보구나. 업보.
케일은 모든 보이는 것을 눈에 담았다.
에르하벤도, 쉐리트도 다시 재정비를 하고선 남은 힘을 쏟아부었다. 모두 케일보다 앞장섰으며 그 속도도 빨랐다. 이미 거대한 방패와 고대의 힘을 펼쳐둔 케일로서는 그걸 다시 움직이거나 거두는 것은 쉽지 않았고, 모두를 저지할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하.”
케일은 탄식과 함께 일단 한 손을 뻗어 라온을 붙잡아 세웠다.
“왜 그러나 인간?”
“넌 그만해.”
라온을 등 뒤로 돌렸다.
콰아아아—콰아앙—! 콰아아–
그리고 결국 또다시 수차례의 굉음 끝에.
콰아아–
아주 미세한 폭발만이 남아 케일의 방어막과 방패를 두드렸다.
동료들이 피를 흘리거나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쿵. 쿵. 쿵.
케일은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간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 안 된다!”
라온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에르하벤, 로잘린, 밀라, 라쉴, 도도리. 비행 마법으로 공중에 떠 있던 이들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를 펼칠 마나조차 안 남은 것이다. 그 대단하다는 용들과 차기 마탑주로 추대받는 마법사가.
특히 에르하벤의 추락이 가장 빨랐다.
“라온! 비행 마법!”
케일의 외침에 라온이 반사적으로 그들에게 비행 마법을 펼쳐 추락을 막았을 때.
“엄마!”
“…난 좀 쉬어야겠구나.”
로드 쉐리트는 지지직거리며 그 모습이 흐려지더니 검은 성 안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괜찮아, 쉬면 돼.”
다정한 미소와 함께 라온에게 웃어 보인 쉐리트가 사라지자, 라온은 케일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 앞발이 떨리고 있었다.
검은 성 밖으로 온과 홍이 얼굴을 내밀며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애들은 모두 케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일을 벌이고 기절하거나 쓰러지기만 했던 케일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알베르와 메리는 이미 쓰러져 눈을 감고 있었다. 기절한 것인지 잠이 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몰골이 장난이 아니었다.
꼭 케일은 자신의 꼴을 보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몰라서 하는 소린 아닌 걸로 생각하마.
짱돌의 말에 케일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퍼슬시를 뒤덮은 실드. 그 아래에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들 대다수의 눈동자에 불길한 붉은빛은 사라지고 찬란한 은빛 방패와 두 날개만이 담겼다.
그리고 오롯이 서 있는 케일을 다음으로 볼 수 있었다.
케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재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현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이는 자신과 최한, 클로페 세카뿐이었다.
-아, 그런데 케일.
짱돌이 말을 걸어왔다.
-신전은 어떻게 할 거냐?
응?
-저거 이제 우리,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 건데. 들고 내려가?
케일은 멀쩡하고 상당히 성스러워 보이고 튼튼한 자신의 은빛 방패와, 부서졌지만 그것마저 고풍스럽고 신비로워 보이는 신전. 더불어 다른 의미로 신비롭고 우아한 검은 성.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듯 자신을 바라보는 최한과 클로페, 평균 9세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판단은 빨랐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내뱉었다.
그는 어느새 담담한 얼굴로 차분하게 저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지시했다.
“당장. 치료부터 한다.”
그가 눈을 질끈 감은 이유.
이는 동료들의 상세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건만.
케일 자신은 쓰러지지도 않았건만.
그는 하나도 후련하지 않았다.
조용하던 바람의 소리가 걸걸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하는 거 다 보고 배운 거다, 이 녀석아.
케일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퍼슬시를 뒤덮던 실드가 사라지며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살았다–!
으아아아—-
울음도 섞여든, 환희와 안도, 격정에 찬 수많은 감정이 담긴 환호성이었다.
156장. 영웅의 탄생?
퍼슬 시청 건물 입구를 지키던 기사는 그 눈동자가 반짝였다.
찬란한 방패가 조금씩 옅어지며 하늘에서 사라져 갔다. 대신 그 자리에는 푸르른 하늘이 그 청명한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와아아아—!”
“살았다!”
환호성을 내뱉는 병사들. 그 소리에 현실감이 느껴졌다.
드디어 기나긴 싸움이 모두 끝났다.
그 뒤에 마주한 것이 이다지도 맑은 하늘이라니!
기사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의 어느 날이건만. 오늘따라 유달리 하늘에 뜬 태양이 따스했고 바람도 춥기보다는 상쾌하게 느껴졌다.
“끝이군요.”
그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선임 기사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드디어… 드디어-”
뒷말을 잇지 못하던 선임 기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서 있는 이를 눈에 담았다.
케일 헤니투스. 그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역시 방패는 부서지지 않아.”
“그렇죠.”
기사는 선임의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역시 사령관님이시라면 마지막까지 버티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봉인되어 있지만, 신의 힘이 담긴 공격이 곧 퍼슬시를 뒤덮을 것이라 하였다.
‘소름이 돋았지.’
귀가 터질 것 같은 굉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충돌로 인한 바람이 불었다.
퍼슬시를 덮은 거대 실드와 케일의 반투명한 은빛 방패로 인해 그 안에서 뒤죽박죽 섞여드는 힘들을 세밀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엄청난 충돌은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럼에도 방패는 버텼지.’
결국 최후에 남은 건, 버틴 건 방패였다.
로운의 사령관이다.
기사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역시 제 생각대로 방패는 끄떡도 없군요!”
그때, 기사는 선임 기사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보았다.
순간 뒷목이 서늘해졌다.
“그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선두의 두 사람을 마주하고선 얼어붙어 버렸다.
“방패가 끄떡이 없다라…….”
현재 로운 왕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귀족 가문.
헤니투스 공작가.
그곳의 주인인 데르트 헤니투스가 차남 바센 헤니투스의 부축을 받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바센은 공작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황급히 퍼슬시로 이동해 왔다.
데르트 공작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기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얼마 전 케일 헤니투스 사령관이 단검으로 제 가슴을 찔렀을 때 그 광경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던 데르트 공작에 관한 정보를 떠올렸다.
“그래.”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저 피 칠갑을 한 모습이, 저 엉망인 모습이 멀쩡하게, 아주 끄떡도 없는 모습으로 보이는가?”
돈 많고, 가족과 영지를 유달리 아끼며, 성격 좋다 알려진 데르트 공작. 그는 백작일 적에 평범한 귀족이라는 평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헤니투스 영지가 불굴 연합을 이겨내고 케일 헤니투스와 최한 등 걸출한 인재들의 고향임이 알려지자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데르트 공작은 온화한 사람이란 평이 많았다.
‘…누, 눈빛이-’
기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웃는 입꼬리와 다르게 그 눈빛은 아주 살벌했다.
아니, 차가웠다.
지쳐 보이고,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몸 상태와 달리 그 눈동자는 차갑게 들끓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기사는 저도 모르게 사과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무얼.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 사과까지 할 일인가.”
데르트 공작은 기사의 곁을 지나치며 툭툭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만, 내가 케일의 아버지라는 것을 기억해주면 좋겠군. 어느 부모가 자식의 저 꼴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있겠나.”
온화한 목소리에 기사는 굳었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툭툭. 기사의 어깨를 두드려준 데르트는 그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꽤 걸음을 옮긴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센.”
“네, 아버지.”
바센의 표정도 데르트를 꼭 닮아 있었다.
“아들아.”
“네, 아버지.”
“…살아남으니 다친 사람들은 눈에 안 들어오는 이들이 있나 보구나.”
부단장 힐스만을 비롯하여 데르트와 바센 주위에 있던 헤니투스 가문 사람들은 그 얼굴에 어떠한 표정도 그리지 않고 있었다.
“바센.”
“네.”
“우리 가문은 어떤 곳이지?”
바센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역사에 기록될 필요는 없다. 대신 행복과 평온을 위해 살아라.”
“그래. 그게 헤니투스 가문이다.”
데르트는 퍼슬시 곳곳으로 나와 환호하는 사람들, 여러 곳에 소식을 전달하러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서로 얼싸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 자신의 아들 케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 가문에서 처음으로 역사에 이름이 기록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면 그 뒤의 것이라도 지켜야지.”
역사에 기록될 필요는 없다. 행복과 평온을 위해 살아라.
데르트 공작은 전자가 어렵다면 후자라도 이루어야겠다 생각했다.
“부단장.”
“네, 공작님.”
힐스만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전하께서는 대피소에 가셨다고?”
“네. 국왕 전하께서 대피하지 않으려고 하셔서 마지막에 겨우 설득해 모셔갔다고 들었습니다.”
“국왕 전하께 내가 얼굴 좀 뵙자고 한다고 말씀 전해다오.”
힐스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데르트 공작은 참 좋은 사람이고 어찌 보면 참 헐렁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원리 원칙을 꽤 중요시 여기는 이였다.
그런 사람이 지금 살벌한 기운을 폴폴 풍기고 있었다.
‘역시 케일 공자님의 성격은 데르트 공작님께 물려받았군.’
케일이 친모도 아닌 바이올란을 더 닮았나 생각이 들었었지만. 역시 공작을 닮은 게 맞다.
“바센.”
“네.”
“짐 싸라.”
음?
힐스만과 주변 기사들이 멈칫하며 데르트를 쳐다봤다.
“대륙 정세니 뭐니, 그런 쓸데없는 뒤처리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나는 네 형 얼굴 좀 보고 와야겠구나.”
바센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네.”
그러고는 바로 바이올란 공작 부인에게 소식을 전하러 움직였다.
이를 지켜보던 데르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들의 얼굴을 보러.
그의 눈동자에 한쪽 벽이 부서진 신전으로 들어서는 케일이 담겼다.
이를 전혀 모르고 있는 케일은 갑자기 서늘해진 감각에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왜 이리 갑자기 소름이 돋지?”
이제 일어날 만한 뭔 일도 없는데?
“인간아, 우리 집으로 다 올려 보내나?”
신전 안에 들어서던 케일은 라온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위급 상황은 아니라고?”
“맞다!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마나 과다 사용으로 인한 탈진 상태 같다! 전부 다 마나 파동 자체는 안정적이다!”
그때,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큰일은 없단다.”
베이지색 드래곤 밀라가 도도리를 품에 안은 채 겨우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녀 역시도 라온의 비행 마법 도움으로 겨우 추락하지 않고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그나마 그녀는 제정신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다른 이들은 기절하거나 잠든 중이었고.
케일은 밀라의 품에 안긴 도도리와 밀라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분명 그도 드래곤을 살폈다. 특별한 외상은 보이지 않았고 호흡도 일정했다.
그렇지만.
“큰일입니다.”
그에게는 큰일이었다.
케일의 굳어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드래곤 밀라는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외면하며 케일은 무심히 말했다.
“라온. 드래곤 분들과 로잘린 씨는 곧바로 검은 성으로 올려보내.”
퍼슬 시청으로 그들을 데려가면 제대로 된 치료를 하기도 전에 번거로운 상황이나 쓸데없는 시선을 겪을 확률이 높았다.
‘저하께서 계시다면 다르겠지만, 저하가 안 계신 상황에서 내가 모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없다.’
케일은 여전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알베르를 힐끗 보고는 라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알았다! 금방 다녀온다!”
라온은 황급히 용들과 로잘린을 검은 성으로 데려갔다. 케일은 알베르와 메리에게로 다가갔다.
눈을 감고서 잠자듯 누워있는 두 사람.
이들은 검은 성보다 다크엘프 타샤에게 데려가야 한다.
특히 알베르는 들키지 않게끔 조심히 옮겨야 했다.
“최한. 각자 한 명씩 업-”
“으음.”
그때, 누군가 힘겹게 눈을 뜨고 있었다.
“…저하?”
케일은 황급히 알베르 곁에 쭈그려 앉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한 명씩 업자는 말에 기가 차다는 듯 쳐다보던 최한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하아.”
알베르는 깊이 숨을 내쉬며 마침내 눈을 떴다.
그는 눈가를 찡그린 채로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얼굴 치워라.”
“혀가 멀쩡하시군요.”
케일은 피식 웃으며 알베르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최한은 슬그머니 위로 씰룩이는 케일의 입꼬리를 보았다.
“최한. 나 좀 일으켜주게.”
알베르는 최한의 부축을 받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케일은 메리의 상태를 살피며 툭 던지듯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죽겠네.”
케일의 한쪽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고 그는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그러게 왜 무리를 하신 겁니까?”
-다 업보다.
짱돌이 다시 한번 중얼거린 말에 케일의 미간이 찌푸려질 때.
“너 좀 쓰러지자.”
알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메리는 내가 아까 잠든 걸로 확인했어. 쓰러질 듯하길래, 자라고, 쉬라고 한 거야.”
“아니, 그것보다 저보고 쓰러지라니요? 저 멀쩡한데요?”
케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멀쩡했다.
“저하나 쉬십시오. 제가 뒤처리를 할 테니까요.”
씨익.
그 순간, 알베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환한 미소였다.
케일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클로페 세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경도 안 쓰던 놈이라 없어진 것도 몰랐다.
-케일.
짱돌이 속삭였다.
-신전 입구 문 열렸다. 클로페 세카가 열었다.
이제 봉인된 신의 영역이 아니다 보니, 환상도 무엇도 없는 신전은 수월하게 입구가 열렸다.
케일은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친우, 거기 있나!”
대장군 툰카. 그 무식한 놈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저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공자!”
“공자님!”
뒤이어 정글 왕 리타나를 비롯하여 성자 잭, 신관 케이지, 소드 마스터 하나 등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전 계단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신전 입구 밖 근처에서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그때, 알베르가 화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쓰러지자. 동생.”
“…저 멀쩡한데요?”
“시간이 없는데.”
알베르는 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최한.”
그때, 케일은 최한이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선 것을 깨달았다. 예사로 생각해서 잠시 방심한 순간이었다.
최한이 발을 들었다.
툭.
케일은 무릎 뒤를 미는 힘에 풀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기가 막힌 타이밍에 케일은 풀썩 무너지는 자신을 본 툰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케, 케일 헤니투스으으—-!”
툰카는 힘없이 풀썩 쓰러지는 케일을 보며 순간 숨이 막혀왔다.
멀리 서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케일 헤니투스.
그 모습을 모든 전투가 끝난 후에야 마주하였고, 그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참혹했다.
원래도 사람 꼴이 아니었는데, 원래 산발에 피 칠갑이라는 것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창백한 것은 물론, 시뻘겋고 검붉은 피가 뒤섞여 가슴 위 흉측한 흉터가 더 눈에 띄었다.
옷은 다 해졌으며, 붉은 머리칼은 피와 먼지로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런 놈이 툰카 자신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반가워서이리라.
그런데 그 반가워하던 그대로 쓰러지고 있었다.
쓰러지는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연한 표정으로.
너무나도 픽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이, 이 멍청한 노오옴–!!”
툰카는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조금 전 하늘에서는 그렇게 꼿꼿이 서 있더니, 결국 보는 이들이 없을 때 저렇게 쓰러진다.
‘그래, 용도 쓰러지는데 저놈이 어찌 버티겠어!’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우스운 일이었다.
“고, 공자!”
정글의 지배자 리타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듯 케일을 불렀다.
그러나 이미 앞으로 고꾸라진 그는 스스로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최한의 손길로 바닥과 부딪치지 않을 수 있었다.
“오, 신이시여!”
성자 잭은 가장 뒤에서 달려오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소드 마스터 하나는 이미 앞으로 쏘아져 나가 메리의 상태를 확인하며 최한에게 외쳤다.
“야! 빨리 옮겨야 돼!”
최한은 말없이 케일을 등에 업었다. 그 속도는 상당히 신속했다.
“어, 어떤가요?”
어느새 다가온 리타나는 제 물음에 최한이 대답 없이 입술을 꽉 깨물고서 케일을 업어 드는 모습에 절로 손끝이 떨려왔다.
예의 바르고 착한 최한이었다. 그런 이가 대답 하나 못할 정도로 다급하다.
이는 케일이 그만큼 위중하다는 뜻일 터.
“저에게, 어서-”
신관 잭이 숨을 몰아쉬며 최한에게 다가갔다.
그때, 알베르가 나직이 말했다.
“그릇이 위험한 상태라, 일단 여기서 함부로 치료하면 곤란합니다.”
“네? 그래도 제가 한번-”
가장 뒤에서 오던 신관 케이지가 최한 곁으로 갔다가 곧바로 잭의 어깨에 손을 올려두었다.
“왕세자 저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 그래요?”
잭은 순간 파문된 신관 케이지가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가죠!”
신관 케이지가 다급하게 말했다.
“신전 바깥에 마법사 몇 분이 계시니 아래로 내려가는 건 힘든 일이 아닐 겁니다!”
리타나, 툰카, 잭 등과 함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그들을 지키기 위해, 혹은 이동시키기 위해 신전 밖에 있던 마법사들. 그들은 모두 알베르의 수족이었다.
“그래. 가자고!”
툰카가 최한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조차 못 드는 케일을 보며 비장하게 외쳤다. 그러고는 알베르에게 다가갔다.
“내가 부축하면 되겠소?”
“아닙니다.”
그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모든 봉인된 신의 수작이 사라져 버린 신전을 되돌아가 입구 문을 열어버린 클로페 세카였다.
“제가 부축하면 됩니다.”
클로페는 망설임 없이 알베르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어서 가요! 시급해요!”
케이지가 다시 외쳤고, 툰카는 앞장서라는 케이지의 손짓에 헐레벌떡 앞장섰다. 당연히 리타나도 함께였다.
그 뒤를 케일을 업은 최한이 따랐고 케일은 눈을 감은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 수작이지?’
케일은 알베르의 속내를 생각 중이었다. 동시에 연기를 못해서 입을 꾹 다문 최한의 속내도.
이를 모른 채 알베르는 클로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클로페가 나직이 속삭였다.
“전설을 위하여.”
미친놈.
알베르는 속의 말을 숨긴 채 다른 말을 내뱉었다.
“저도 좀 업히죠.”
이미 메리는 하나에게 업혀 밖으로 나갔다.
클로페는 그 정도쯤은 가능한 팔다리라고 하며 알베르를 업었다.
“저하께서는 이번 참에 다 솎아내시려나 봅니다.”
흘러가듯 내뱉는 클로페의 말에 알베르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위기는 지났다.
하지만 또 다른 위기가 안 오려면 이번 참에 걸러내야 했다.
이번 일의 영웅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위독할 때 그 자리를 탐내는 놈들이나 뒷 수작을 부리는 놈들이 있는지 없는지.
지금은 협력 관계인 동맹국들도 한 번은 살펴봐야 했다.
‘무엇보다도 국왕의 속내를 알아야 한다.’
제드 크로스만의 속내를 파악해야 했다.
‘더불어 적당히 조율해야 돼.’
알베르는 수하 중 한 명이 케일에 대해 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케일이라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 곧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을 보며 하던 말들.
‘… 내 동생에게 그런 짐을 줄 순 없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이들이었다. 이 동료들은.
“역시 수호기사는 다르시군요.”
“후후.”
물론 클로페 세카는 빼고.
* * *
신전에서 비행 마법을 통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퍼슬시 광장에 내려서고 있었다.
어느새 각 세력의 수뇌부들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광장은 인산인해였다.
통제를 해야 할 로운의 국왕은 멀찍이서 지켜볼 뿐이었다.
쿵.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광장 중심에 내려섰을 때.
“대장군님!”
위퍼 왕국의 전사가 무리의 선두에 선 툰카에게로 다가갔다. 그 얼굴에는 환희와 기쁨이 가득했다. 주변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다가가 영웅들의 귀환을 반기려는 때.
구경하던 이들이 환호를 내뱉으려는 때.
“대장군님, 드디어 모든 것이 다 끝났-!”
“닥쳐!”
툰카의 외침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툰카는 다가오는 수하를 밀치며 마차처럼 앞으로 돌진했다.
“주, 주군?”
툰카는 분노에 가득 차 있는 게 너무나도 잘 보였다. 그는 저를 얼빵하게 부르는 수하를 보며 외쳤다.
“지금 위중한 환자 있는 거 안 보여? 엉?”
“네?”
“쪼개냐? 엉? 웃음이 나오냐?”
웃으려던 수하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곧바로 툰카의 상태가 눈 돌아가기 일보 직전임을 깨닫고 곧바로 태세를 바꿨다. 그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툰카 뒤를 향했다.
‘음.’
심각한 상태의 사람들이 몇 보였다.
누가 보아도 영웅보다는 환자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는 툰카보다 앞장서며 외쳤다.
“비켜라! 길을 막지 마라!”
그때, 파문된 신관 케이지가 신관복을 펄럭이며 간절히 외쳤다.
“어서 길을 열어주세요! 성자님과 함께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해요!”
그 간절한 목소리 사이로 툰카, 그리고 리타나가 앞에서 인파를 헤치며 길을 만들었다.
“내 친우 목숨이 위급하다고!”
툰카는 정말로 다급하고 화가 나고 울분에 가득 차서 외쳤다.
“막기만 해 봐! 죽고 싶으면 막아!”
클로페 등에 업힌 채 기절한 척하던 왕세자 알베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엄청나군.”
“후후.”
클로페가 나직이 웃었다.
그리고 툰카 뒤에서 달리는 최한의 등에 업힌 케일은 감고 있던 눈을 더 질끈 감았다.
“아, 아들아!”
아버지. 데르트 헤니투스의 목소리가 인파 너머로 들려왔다.
이거 뭔가 큰일 난 것 같다.
케일은 직감했다.
#
“케일-!”
다시 한번 데르트 공작의 목소리가 케일의 귓가에 선명히 닿은 순간.
이 광장을 지나는 동안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 속에서 데르트의 외침이 유독 잘 들린 순간.
‘큰일 났네.’
케일은 진심으로 큰일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데르트 헤니투스는 케일 헤니투스에게 있어 아주 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람들은 인파를 헤치고 케일에게로 다가가는 데르트 공작을 위해 길을 터주었다.
데르트 공작은 귀족으로서, 공작으로서의 품위는 모두 버린 채 허겁지겁 케일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최한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데르트 공작의 표정이 너무나도 최한의 마음을 콕콕 아프게 쑤셔왔다.
“…이대로는 안 돼.”
최한이 중얼거린 말에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이대로 아버지를 만나면 안 된다고!’
현재 케일은 스스로가 겉모습과 달리 상당히 멀쩡한 상태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아까 방패와 포용을 사용하였을 때, 조금 무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쓰지도 못한 바람에, 그리고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전신을 타고 흐르는 활력 덕분에 몸은 순식간에 좋아지고 있었다.
‘가자고, 최한!’
최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툰카마저 잠시 멈춘 채, 그 흉포한 얼굴에 안타까움을 담은 채 데르트 공작을 바라보았다.
“크윽.”
툰카는 슬픔을 억누르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케일!”
결국 데르트 공작은 케일에게 닿았다. 떨리는 손이 허공을 지나 최한의 등에 업힌 케일의 몸에 닿았다.
케일은 그 떨림을 느낀 순간, 부서질까 싶어 정말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그 겁에 질린 손길을 느낀 순간.
‘…이건 아니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케일은 슬쩍 고개를 들어 데르트에게 자신이 멀쩡함을 보여주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케일의 몸이 조금 움찔했을 때.
와락!
데르트 공작이 최한의 등에 업힌 케일의 몸을 부둥켜안아 버렸다.
사람들은 그 광경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다친 자식을 끌어안는 부모의 모습에 누구도 환호를 내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정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떡해… 상태가 정말 심각한가 봐.”
로브를 쓴 누군가가 내뱉은 말에 사람들은 저마다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왕국에 보고해. 케일 헤니투스를 비롯해서 왕세자 등의 상태가 위급해 보인다고. 성자도 전전긍긍할 정도라고.”
“알겠습니다.”
곳곳에서 각국으로 보고가 되기 시작했다.
이는 타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로운 왕국 각 영지의 소식통들도 빠르게 각자의 영지로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이루어지는 행동이었고 대부분 광장 중심에 있던 이들은 케일을 얼싸안은 채 꼼짝도 않는 데르트를 보며 걱정의 말을 내뱉거나 염려를 표했다.
“음.”
그리고 최한은 케일을 업은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등 뒤로 데르트 공작이 케일에게 속삭이는 말이 가까이 있던 최한에게는 잘 들렸다.
“깨어있구나.”
데르트는 나직이 그렇게 말했다. 최한은 등에 업힌 케일이 움찔거리는 것이 다 느껴졌다. 꽤 오래 케일을 알아온 바. 케일은 지금 최한이 보기에 쫄았다.
“…아,”
“쉿.”
말을 하려던 케일을 막아 세운 데르트는 케일이 생전 처음 듣는 살벌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래. 이대로 계속 아프자꾸나.”
네?
케일은 되묻고 싶었지만, 말하지 말라는 아버지 말에 일단 아무 말 않고 조용히 있는 아들이었다.
왠지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로운이고 신전이고 뭐고 간에. 이번 일은 아버지랑 어머니만 믿으면 된다. 그러니 가만히 있거라.”
케일은 답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이제 쉴 생각이었는데요?’
당장 케일이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사냥꾼, 그 집단이 찜찜하기는 했으나-
‘내가 뭐 할 일 있겠어?’
플린 상단에서 도망쳐 행방불명이 된 서자 빌로스 플린이 조금 걸리기는 했으나-
‘…당장 뭔 일 있겠어?’
일단 지금은 쉬어도 되고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
“케일.”
데르트 공작은 얼싸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한마디를 던졌다.
“무조건 가만히 있어라.”
이상하다.
케일은 처음으로 데르트의 목소리에서 살벌함과 오한을 느꼈다.
분명 가까이서 본 케일이 꽤 멀쩡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은데.
“만약 가만히 안 있고 뭘 한다면.”
데르트는 말을 이었다.
“영주 자리에 앉혀버릴 거다.”
뭐?
뭐라고?
케일은 심장이 덜커덩 내려앉았다.
그는 당장 눈을 떠서 데르트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으니까.
데르트는 케일의 산발이 된 머리칼 사이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고는 잠시 웃음을 삼켰다.
‘역시 이 말이 통하는군.’
케일 생각보다는 훨씬 눈치가 빠른 데르트였다.
“최한 경!”
데르트 공작은 케일에게서 물러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서, 어서 가주게! 내가 길을 멈춰 세워 미안하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오, 케일!”
파문된 신관 케이지가 잽싸게 다가가 데르트 공작을 부축했다.
“공자님은, 케일 공자님은 꼭 저희가 살려낼 겁니다! 최한 경, 서둘러 주세요! 툰카 님!”
“빌어먹을! 다 비켜!”
툰카가 두 손을 가리고 힘없이 신관에게 기댄 공작을 보고는 울분을 토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다시금 그들은 퍼슬시청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케, 케이지 씨?”
물론 성자 잭은 얼떨떨한 얼굴로 케이지에게 다가가려다가 소드 마스터 하나에 의해 저지당했고, 알베르를 업은 클로페의 뒤를 따라야 했다.
“…성자님의 표정 봤어?”
“넋이 나가셨던데.”
“엄청난 치유력을 지니신 분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 이거 진짜, 엄청 큰일이 일어나는 거 아냐?”
“엄청 큰일?”
“그래, 엄청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어. 아니 심장을 검으로 찔렀는데, 멀쩡하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초인적인 인내심이나 의지로 버텼다고 해도 결국 저렇게-”
달려가는 케일 일행을 지켜보던 병사는 본인이 내뱉은 말에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엄청 큰일.
그건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상상이 담겨 있었다.
“야… 그런,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안 돼. 그런 일은, 절대로.”
동료 병사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입을 막은 병사를 나무라듯 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창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듯 연신 창대를 움켜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는 그 둘의 대화를 들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로운 왕국민들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져 갔다.
그들은 케일 일행이 퍼슬 시청 정문을 넘어 별관에 들어갈 때까지 그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더 이상 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퍼슬 시청 별관은 케일 일행이 들어간 후부터 삼엄한 경비와 더불어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하였다.
심지어 대장군 툰카와 정글의 왕 리타나도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그곳을 나와야 했다. 그나마 성자 잭이 치료를 위해 동생 하나와 함께 그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
* * *
그렇게 비밀에 휩싸인 별관에 입성한 그 순간, 케일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져 갔다.
“…굳이 이렇게까지-”
그의 손에 잠옷이 들려있었다.
“적당하군요.”
욕조 물 온도 체크를 끝낸 최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 문밖으로 향했다.
“호위는 제가 서겠습니다.”
“아니-”
케일은 말끝을 흐리며 밖으로 나가는 최한 대신 다른 곳을 보았다.
“도련님.”
시종 론 몰란.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케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눈빛이-’
눈빛이 아주 살벌했다.
케일은 론의 저런 눈빛은 처음 보았다. 꼭 자신이 론의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살벌한 노인네…….’
잘못 건드렸다가는 케일이 레몬처럼 쥐어짜질 것 같았다.
신전의 환상 시험이 끝난 뒤, 케일은 신전 벽이 부서지며 꽤 많은 동료들을 보았지만, 론과 비크로스, 라크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퍼슬 시청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론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론의 안내를 받아 케일은 별관의 최상층 방 중에 하나로 이동했고, 그곳은 숙소였는지 혹은 개조를 했는지 상당히 침실로서 상태가 좋았다.
“도련님.”
“…어.”
케일은 인자한 눈빛을 외면했다.
“일단 꼬질꼬질하고 더러운 모습. 그리고 피는 닦아내세요.”
“그, 론.”
인자하게 웃고 있는 론에게 케일은 입을 열었다.
“라온에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검은 성. 그곳에 가서 용들과 로잘린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일단 이 안에 들어왔으니 내 상태를 속이는 건 어려울 일 없을 거야. 그러니 라온을 불러 투명화해서 잠시 검은 성에 갔다 오면 다른 이들은 모를 거다.”
케일은 이제는 대강 왕세자가 무슨 상황을 노리는지 알아챘다.
‘아마도 이번 전투의 주역들이 잠시 빠진 상황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고 대처하기 위함이겠지.’
아니면 또 다른 권력을 노리는 이들을 휩쓸 생각이거나.
‘혹은 제드 국왕 때문일지도.’
케일은 이곳에 제드 크로스만 국왕이 왔다는 것도 들었다.
‘그러니 내가 위중한 상태라는 걸로 주변에 알려지기만 하면 되겠지.’
잘된 일이다.
케일도 ‘위급한 상태’인 척하면서 마무리해야 할 일들을 조용히 하면 되니, 어찌 보면 참 잘된 일이었다. 그의 표정이 절로 밝아졌다.
“후후.”
음?
케일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후후.”
론이 웃고 있었다. 아주 살벌하게.
케일은 몰랐지만, 론의 눈동자는 케일의 찢겨진 상의 사이로 보이는 흉측한 흉터에 닿아있었다. 방패와 심장이 그려져 있던 문신은 이제 흉측한 흉터로 뒤덮여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케일은 그저 가만히 웃기만 하는 론의 모습에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고개를 숙여 흉측한 흉터를 본 케일은 무심하게 흉터 위를 툭툭 두드렸다.
“훈장이지.”
“…….”
론은 침묵했다.
케일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의 론을 보며 저도 모르게 욕조로 다가갔다.
“하!”
론은 짧은 웃음과 함께 욕실 문으로 다가가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천천히 닫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부디 피로가 풀리는 시간이 되시길.”
탁.
닫힌 욕실 문을 멍하니 보던 케일은 일단 씻었다.
짱돌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너 몸이 좀 좋아졌다?
다 씻은 케일은 고개를 돌려 욕실 한쪽에 놓인 전신 거울을 바라보았다.
론이 급히 준비한 듯한 전신 거울이었다. 아마도 헤니투스 공작가의 케일 침실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리라.
살벌한 노인네지만 자상한 시종이었다.
“오.”
가슴의 흉터는 흉측했지만.
이제 보니 케일의 몸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져 있었다.
뭐라 해야 할까. 자세가 더 올곧아지고 피부에 혈색이 돌았다.
“확실히 세계수가 보약을 줬나 보군.”
사실 아직도 몸에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 운동을 한다면 그 효율이 엄청날 것 같았다. 물론 근력 운동이니, 검술이니, 무술이니 배울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케일이었다.
그는 목욕으로 산뜻해진 기분까지 더해져 상당히 기분 좋게 욕실 밖으로 나갔다.
“음.”
그리고 론을 바로 맞이해야 했다.
“누우십시오.”
케일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덮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론은 주전자 속 레몬 꿀차를 찻잔에 따르고 있었다.
케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한은 문밖에 있었고, 알베르와 메리는 각각 케일의 침실 양옆을 차지하였다. 클로페와 케이지 등도 그쪽으로 갔다.
아늑한 침실.
그와 론뿐이었다.
‘…이건 아닌데.’
왠지 숨 막힐 듯한 분위기였다.
론은 따뜻한 레몬 꿀차가 담긴 찻잔을 협탁 위에 올려두며 입을 열었다.
“곧 공작 부인께서 바센 도련님과 함께 오실 겁니다.”
아.
케일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론, 저하랑 메리는-”
“현재 타샤 씨가 두 명 다 살펴보는 중으로, 큰 이상은 없다고 합니다. 탈진 상태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아.
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국왕 전하께서 면담을 원하십니다.”
뭐?
“나?”
“네. 도련님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는군요.”
케일은 국왕이 무엇 때문에 그를 보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봉인된 신의 환상 시험을 치르며 국왕 제드도 사냥꾼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인가?’
케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냥꾼을 떠올리니 자연적으로 케일의 외가인 템스가와 연관된 빨간 머리의 남자가 떠올랐다. 아버지 데르트 공작과 얘기를 나누겠다고 했던 사람.
‘…만나봐야 할 사람이 많군.’
상인 빌로스도 찾아서 이야기를 해봐야 하고.
케일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전하께서 부르신다면 가야지.”
“후.”
그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론이 단검을 꺼내 쿠키를 반으로 가르며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국왕 따위. 목숨보다 귀하겠습니까.”
…이 무서운 노인네.
케일은 론의 단검이 빛나는 것을 외면하려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덜컹–!
문이 큰소리를 내며 열렸다.
“케일 님!”
최한이 놀라서 문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옆에는 로잘린이 함께였다. 몸은 괜찮냐고, 어떻게 금방 정신을 차렸냐고 케일은 묻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공자.”
창백한 안색의 로잘린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밀라 님이 찾으세요.”
베이지색 드래곤 밀라. 그녀가 케일을 찾는다.
그리고 창백한 안색의 로잘린이 직접 이곳에 왔다.
“론. 로브 좀 하나 가져와.”
케일은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를 향해 로잘린이 이어 말했다.
“에르하벤 님이 위험하십니다.”
추락하던 에르하벤의 모습이 케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케일은 론이 건네주는 로브를 잠옷 위에 대충 둘렀다.
“최한, 론. 두 사람은 여기 있도록.”
현재 케일은 위중한 상태다. 그 연극을 이어나가려면 최한이 호위를 서야 하고, 론이 이곳에 남아있어야 했다.
“네, 도련님.”
론은 순순히 답했지만 그 표정이 좋지 못했다. 고룡에 대한 걱정 때문으로 보였다.
“…알겠습니다.”
최한은 반박자 늦게 답했지만, 케일은 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공자. 어서!”
“바로 가죠.”
우우웅—
그사이 로잘린이 텔레포트 진을 그리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투명화 마법이나 비행 마법 대신 바로 텔레포트 마법을 택한 듯싶었다.
케일은 로잘린의 부름에 곧바로 그녀가 막 완성한 텔레포트 진 위에 올라섰다.
로잘린은 즉시 마법을 발동시켰다.
파앗–
두 사람은 곧 환한 빛과 함께 사라졌고, 케일이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 잔상처럼 남았다.
“에르하벤 님은 괜찮으실 거다.”
그 단호한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채웠다.
론은 케일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무심히 입을 열었다.
“넌 무엇이 불만이지?”
천천히 움직인 시선이 최한과 닿았다. 최한은 론을 쳐다보지 않은 채 덩그러니 남은 텔레포트 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쯧.”
론이 짧게 혀를 찬 순간이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곧바로 최한이 움직였다.
저리 신속한 행동으로 보아 론이 질문을 던졌을 때도 딴생각 중인 것이 아니라 그저 답하기 싫어 무시한 것일 터.
‘예전 버릇이 나오는군.’
최한의 시건방졌던 예전의 모습이 떠오르는 론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곧 온화한 미소가 어렸다.
달칵.
최한이 살짝 문을 열자 보인 이는 국왕 제드 크로스만의 전속 시종장이었다.
“크흠.”
시종장은 슬쩍 열린 문틈 새로 그 안을 들여다보려 고개를 움직였다.
“안녕하십니까, 시종장님.”
하지만 론이 교묘한 움직임으로 그 시선을 막으며 침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달칵.
단호하게 닫힌 문 너머를 아쉽다는 듯 바라보던 시종장은 순식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런 기색을 지우고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한 말씀, 기억하고 있나?”
국왕 제드가 케일을 찾는다. 그런데 왜 아무 소식이 없나? 자네, 케일 공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는 했나?
시종장은 그런 속내를 드러내며 물었고, 그 순간 론은 복도를 둘러보았다.
이 퍼슬 시청 별관에는 알베르가 선별한 사람들만이 오갈 수 있었다. 물론 당연히 그 사람들도 알베르와 케일, 메리가 위중한 상태인 줄 안다.
아군부터 속이는 알베르였다.
그리고 여기 시종장 같은 예외도 별관을 돌아다녔다.
론은 시종장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현재 공자님께서… 국왕 전하의 뜻을 이행하실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닌지라.”
시종장의 표정이 굳어지며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느 정도인가?”
현재 이 별관에 머무는 환자들에 대한 정보는 극비였다. 소수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케일의 상태를 알지 못했다.
론은 한 걸음 시종장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물론 복도에서 보초를 서는 기사들 귀에 들어갈 정도의 목소리였다.
“현재 공자님께서는 밖으로 나오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당연한 소리다. 이미 케일은 밖인데, 밖으로 나올 수 없지.
“또한 대화가 어렵습니다.”
맞다. 케일은 이곳에 없어 론으로서는 영상통신구가 아니면 대화가 어렵다.
“허어… 그런가.”
시종장은 탄식을 겨우 삼키며 론의 얼굴을 살폈다. 론의 얼굴에는 거짓이 없었다.
‘흐음. 이런 일로 거짓을 말할 이는 아니지.’
시종장은 론에게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지만, 그간 퍼슬시에서 론이 펼쳤던 활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나 단순한 시종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일단 알겠네. 전하께는 자네가 말한 대로 전하도록 하지.”
“죄송합니다.”
“아닐세.”
시종장은 떠나려던 걸음을 멈추고서 잠시 뒤돌아서서 론에게 말했다.
정보, 권력, 정치에 온 신경을 쏟아야 하는 시종장이었으나, 그도 감정이 있고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케일 사령관께서 얼른 쾌차하셨으면 좋겠군. 그리고 꼭 그러할 것이라 믿고 있겠네.”
“감사합니다.”
전보다 정중한 자세로 인사를 건네는 론에게 시종장은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론은 시종이 멀어진 것을 보고는 다시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최한은 론 대신 문밖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호위하기 위함이리라. 그때, 최한은 론이 침실 창문을 열고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시종장에 대해 알아봐.”
창밖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최한은 창가 위 천장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했다. 소드 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알아챌 움직임이었다.
피식. 최한은 웃음을 흘리며 문을 닫았다.
“여전하군.”
여전히 고약한 론이었다.
물론 최한이 보기에 자신도 여전했다. 그는 복도를 거닐며 이곳을 힐끔거리는 시선들을 마주하였다.
누구라도 이곳은 넘지 못한다.
그는 작게 기도했다.
“…부디.”
부디 에르하벤 님이 어서 나으시길.
최한은 케일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마음을 다졌다.
“…더…….”
더 강해져야 한다.
그 속삭임을 어디에도 내뱉지 못한 채.
* * *
“인간아!”
냐아아옹!
냐아옹!
라온, 홍, 온이 케일에게 안겨들었다.
“헉!”
“오!”
“…멀쩡한데?”
그리고 놀랐다.
몸이 안 좋을 때는 셋이 동시에 안겨들면 휘청하던 케일이 그래도 한 발자국만 뒤로 밀려나며 멀쩡하게 버티고 있었다.
최상의 컨디션이란 소리였다.
“비켜 봐.”
케일은 무심하게 애들을 밀어내고는 침대로 다가갔다. 케일이 온에게 눈짓했고, 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들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이곳은 검은 성에 위치한 침실 중 하나였다.
“…왔…나?”
침대에 누운 에르하벤이 힘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그리 위중하지는 않군요.”
덤덤하게 케일이 건네는 말에 에르하벤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조차도 힘이 없어 보였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그때, 침대 옆에 앉아있던 드래곤 밀라가 입을 열었다.
“죽어가는 것이지요.”
“…노…환이지…….”
에르하벤이 정정했고, 로잘린이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노환이 아니라, 무리하셔서 그렇죠!”
침대에 누워있는 에르하벤의 안색은 파리했다. 이를 제외하면 어디 베이거나 부러진 큰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아름답게 빛나던 금발이 빛을 잃은 채 칙칙하게, 퍼석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머리칼 끝에서부터, 찬란한 금색은 서서히 그 빛을 사그라뜨리고 있었다.
‘…안 돼.’
로잘린은 입술을 깨문 채 케일과 밀라를 바라봤다.
“밀라 님! 케일 공자가 왔으니, 어서 저 유물을-!”
로잘린의 손끝이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작은 항아리에 닿아있었다. 술병 크기의 항아리. 수많은 금이 갔던 그것은 어느새 금이 사라진 멀끔한 모습으로 그 매끄러운 태를 빛냈다.
“어떻게 할까요, 공자?”
밀라는 유물의 주인인 케일을 바라보았다.
“이어붙이기로 금은 모두 지웠어요.”
밀라가 지닌 특성 ‘이어붙이기.’
“다만 한도가 있는 생명력을 담은 물건이라, 이어붙였다고 해도 정해진 양보다 더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동대륙 바람섬에서 케일이 얻어온 유물인 항아리.
저 항아리는 바람섬에서 제물로 죽어야 했던 수많은 이들의 생명력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이 모두 다 하면 깨져버린다.
“저는 생명력을 채울 순 없어요. 다만 기존에 있던 생명력의 효과를 극대화시켰을 뿐.”
1이라는 효과를 낼 생명력이 1.5~2까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양은 변화시키지 못해도 질을 강화시켰다.
“공자.”
밀라가 한 번 더 나직이 케일을 불렀다.
에르하벤을 내려다보던 케일은 입을 열었다.
“안 마실 겁니까?”
그의 담담한 물음에 에르하벤은 눈을 감았다.
케일은 밀라 옆의 빈 의자에 앉았다.
“이 항아리 사용법은 간단하죠. 항아리를 쥐었을 때 차오르는 물을 마시면 됩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물은 사용자가 원하는 생명력만큼이죠.”
에르하벤이 처음 이 유물을 사용했을 때, 그가 항아리를 쥐자 물이 한 모금 정도 차올랐다.
“1년. 에르하벤 님이 원하신 시간이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셨죠.”
하얀 별. 그놈을 잡을 때까지의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래서 이 항아리를 손에 쥐어도 더 이상 물이 차오르지 않을 거라고 하셨죠.”
“…그래.”
에르하벤은 눈을 감은 채 답했다.
그 당시 에르하벤은 케일에게 더 이상 항아리의 힘을 원하지 않는 이유를 말했었다. 케일은 그 내용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얀 별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부하들과의 전투.
‘분명 전투에서 다치는 이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유물을 보존해 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어.’
‘내가 이 유물을 모두 다 쓰면 보너스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너희는 본래 주어진 인생도 다 살지 않았잖아.’
에르하벤은 혹시 다칠지도 모를 동료를 위해 항아리 사용을 거부했다.
“눈 뜨세요.”
케일의 단호한 목소리에도 에르하벤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말에 눈을 떴다.
“로잘린 씨, 항아리 들어보세요.”
그리고 케일은 말했다.
“에르하벤 님, 보세요.”
고룡은 눈을 떴다.
창백한 안색의 로잘린은 그를 향해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항아리에서는 어떠한 물 한 방울도 차오르지 않았다.
“밀라 님.”
“내 차롄가요.”
여전히 지쳐 보이는 얼굴의 밀라는 항아리를 가볍게 건네받았다.
물은 조금도 차오르지 않았다.
케일은 손을 뻗었다.
“에르하벤 님, 더 보셔야겠습니까?”
그의 손에 들린 항아리에서도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동료 중 어느 누가 이 항아리를 들어도 물이 안 차오를 겁니다.”
어느 누구도 생명력을 원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 의문은 고룡에게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로잘린과 밀라, 그리고 문밖에 대기하고 있을 아이들과 다른 용들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답이었으니까.
“에르하벤 님, 제가 했던 말이 있었죠.”
고룡이 항아리가 필요치 않다고 했을 때.
케일은 항아리를 보관하며 말했다.
‘아마 제가 다시 에르하벤 님께 유물을 드리는 날이 올 겁니다.’
케일은 항아리를 에르하벤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때, 아마 항아리는 가득 찰 겁니다.’
케일은 확신했다.
하얀 별을 잡은 뒤. 모든 싸움이 끝난 후. 모두 살아남은 것을 알게 된다면.
생명체라면, 소중한 것이 곁에 있고 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이라면.
누구라도.
“제 말이 맞죠?”
더 살고 싶으리라.
“…염치없구나.”
항아리에는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뭐가 염치없습니까. 더 살고 싶으시잖습니까? 그러면 살면 되는 겁니다.”
-케일, 너도 장수할 것 같아.
머릿속에 들리는 먹보 신녀의 말은 무시하는 케일이었다.
케일은 온갖 감정이 밀려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듯한 에르하벤에게 씨익 웃으며 무심하게 툭 말을 건넸다.
“고생해서 일했으면, 그만큼 보너스를 받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에르하벤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 유물을 모두 다 쓰면 보너스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에르하벤 님, 드세요.”
항아리에서 시선을 떼어 케일을 바라봤던 에르하벤은 멈칫했다.
“안 드시면 제가 억지로 입 벌려서 부어버릴 겁니다.”
에르하벤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저놈, 저 눈빛.
“저는 한다면 합니다.”
진심이다.
매우.
눈빛이 살짝 클로페 세카를 떠올리게 했다.
에르하벤은 처음으로 케일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유려한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곧 1부 완결이 머지않아 이렇게 후기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11월 29일.
2018년부터 3년이 넘게 이어져온 이 글이 776화로, 1부 완결이 납니다. 🙂
그 뒤, 잠시 쉼표를 찍을 것 같습니다.
1부 완결 때 여러 말씀과 함께 다시 인사를 드릴 예정이오니,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 1부 마지막까지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유려한 올림.
그때,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멀쩡하다! 할배 빼고 다 멀쩡하다!”
“좋은데!”
유독 홍과 라온의 흥겨운 목소리가 침실 문을 넘어 안까지 울려 퍼졌다.
달칵.
문이 열렸고, 하얀 머리칼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전 드래곤 로드 쉐리트였다. 그녀는 홀로 침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안에 있던 이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보였다.
“내가 제일 멀쩡한 것 같은데?”
그녀의 말대로 쉐리트는 전투 전후의 변화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에 마주 웃는 이는 없었다.
로드 쉐리트. 그녀는 실체가 없는 존재였기에, 일종의 허상이기에 늘 같은 모습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에르하벤.”
그런 그녀가 항아리를 쥐고 있는 에르하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서 라온을 좀 돌봐줘. 다른 아이들도.”
케일은 확신했다.
‘이건 못 피한다.’
쉐리트의 말이 이어질수록 케일은 에르하벤의 눈동자에 맺히는 미련을 보았다.
“온, 홍뿐만 아니라. 메스나 다른 늑대족 아이들도 참 어려. 그리고 라크도 아직 어리지. 많이 부족해. 그러니 자네가 좀 보살펴 줘.”
쉐리트가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탁이야.”
에르하벤은 결국 누웠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그의 금빛 머리칼은 이제 회색을 머금은 칙칙한 빛깔로 변했다. 케일은 항아리를 쥔 에르하벤의 손끝에서부터 조금씩 금이 가는 것을 보았다.
용은 때가 되어 죽으면 그 몸체가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에르하벤에게도 때가 온 것일까.
“…말년에 할 일이 늘었군.”
에르하벤은 그 말을 하며 슬며시 미소를 그려 보였다. 멋쩍음이 담긴 미소였지만 그 눈동자는 결정을 내린 듯 단호했다.
그는 손에 들린 항아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짧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음.’
케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잘린도 덩달아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에르하벤을 스승으로 여기다 보니 더 긴장이 되는 듯했다. 밀라와 쉐리트는 그나마 여유가 보였다.
“물이 가득하군.”
그 말과 함께 에르하벤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항아리를 입가로 가져다 댔다.
‘어?!’
그 모습에 케일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이미 에르하벤은 술병 모양 항아리에 담긴 액체를 벌컥벌컥 거침없이 마시고 있었다.
“어…….”
“왜 그러지?”
케일을 지켜보던 쉐리트가 그에게 물음을 건넸고, 케일은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에르하벤 님이 까먹으신 것 같네요.”
“응? 뭘?”
“아니, 그게-”
케일은 물을 마시는 데 집중하는 에르하벤을 보며 잠시 말을 망설였다.
용병왕 버드 일리스. 그가 바람섬 항아리 유물 사용법에 대해 설명한 것이 있었다.
‘그 유물을 스스로에게 사용하고자 마음먹은 당사자가 유물을 쥔 순간, 그 존재에게 필요한 만큼의 물이 차오릅니다.’
‘그 액체를 마시면 ‘생명력’과 관련된 부분은 원하는 만큼 해결이 될 겁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아플 수도 있습니다. 저도 사용했을 때, 조금 속이 울렁거려서 힘들었거든요.’
버드는 항아리를 사용할 때 경우에 따라 아플 수도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항아리의 생명력을 얼마나 쓰냐에 따라 다를 것이라 추측되었다.
지금 에르하벤은 단순한 부상을 치료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생을 더 연장하려 하고 있다.
아마, 아니, 분명히 항아리는 오늘 다 깨질 것이다. 그만큼 많은 생명력을 쓸 테니까.
따라서 항아리 사용으로 만약 에르하벤이 아프게 된다면, 그건 조금 아픈 수준이 아닐 터.
이를 케일은 자신 말고 에르하벤도 충분히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곧바로 이렇게 벌컥벌컥 마시는 걸로 봐서.
‘…아무리 봐도 지금 까먹은 것 같은데.’
이거 괜찮나?
케일의 동공이 살짝 흔들릴 때.
“그래, 더, 더! 계속 마셔!”
쉐리트가 옆에서 응원의 말을 보탰고, 밀라와 로잘린은 따스한 눈빛으로 응원했다. 에르하벤은 배도 안 부른지 쉬지 않고 마셨다.
‘불안한데?’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케일의 뒤통수가 점점 서늘해졌고, 항아리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왔다.
쩌저적-
그때였다.
“어? 금이-!”
항아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밀라의 입에서 기쁨이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색이 돌아오고 있어!”
칙칙해진 머리칼 주변에 조금씩 윤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회색의 어두움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오, 안 아프고 가는 건가?’
케일의 표정이 밝아지려는 찰나.
쩌저저적-
항아리의 금이 크게 한 번 더 간 순간.
“크억!”
에르하벤의 어깨가 들썩였다.
“에르하벤 님!”
“이런!”
로잘린과 밀라가 놀라서 에르하벤을 부축하려고 할 때, 그들은 저보다 빠른 이를 볼 수 있었다.
“멈추면 안 됩니다.”
차분한 어조와 재빠른 손놀림.
케일이 에르하벤의 턱과 항아리를 각각 한 손에 움켜쥐었다.
“신음이 나올 때는 입을 닫고 마시는 걸 멈추세요. 그리고 코로 숨 쉬십시오. 잠시 멈추더라도 끝까지, 배불러도 마시세요. 아프다고 멈추면 안 됩니다.”
항아리를 쥔 에르하벤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버드 말 기억하시죠?”
케일의 목소리에 에르하벤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제야 버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고, 동시에 온몸이 저려왔다. 마치 쥐라도 난 것처럼 사지가 떨려왔으며 순식간에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이제 와 멈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에르하벤은 계속해서 차오르는 물을 마시고 또 마셨다.
‘내가 이렇게 살고 싶었구나.’
그는 새삼 자신이 얼마나 살고 싶었는지 깨달았다.
쩌적, 쩌저적-
항아리는 쉴 틈 없이 금이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에르하벤은 그 항아리에 담긴 생명력을 마시고 또 마셨다.
희한하게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마치 몸에 스며든 수분이 모조리 그의 몸에 퍼져 온몸에 활기를 채우는 듯했다.
“라온이 다 크는 것까지 보셔야죠.”
담담한 케일의 목소리에 에르하벤은 멈추지 않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공자.’
로잘린은 새삼스럽다는 듯 케일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잘게 떨리는 에르하벤이 걱정되었지만, 그와 달리 너무나도 차분하면서 냉정한 케일의 모습에서 절로 안도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깨진다.”
밀라가 말한 순간.
쩌저저저—!
항아리에 세로로 긴 금이 가며 그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케일은 항아리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챙!
항아리 반쪽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허억!”
동시에 에르하벤은 뒤로 쓰러지듯 넘어갔다. 밀라가 얼른 에르하벤을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커헉!”
“에르하벤 님!”
케일이 놀라서 에르하벤을 붙잡았다.
고룡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를 흘릴 정도라고? 버드는 속이 울렁거릴 정도라고 했는데?’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에르하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케일은 동료들 중에서 이렇게 피를 흘리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담담하던 얼굴에 걱정이 서리려던 순간.
-…이거.
허스키한 목소리가 케일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바람의 소리였다.
그녀는 바람섬 항아리에 대해 잘 아는 이였다.
-…저 밀라라는 드래곤이 제대로 항아리를 이어붙였나 보구나.
스스스—
황금빛 가루가 휘날리며 바람이 일었다.
케일은 실시간으로 에르하벤의 바뀌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 용 회춘하겠는데.
고룡의 피부가 아주 반질반질하다 못해 광이 흘렀다.
금빛 머리칼은 비단 위에 별 가루를 뿌린 것마냥 반짝이며 윤기가 흘러넘쳤다.
“…허.”
케일은 탄식을 흘리며 밀라를 쳐다봤다. 그나마 여기서 가장 치료에 관해 잘 아는 이였으니까.
밀라는 싱긋 웃어 보였다.
“회춘하셨네요.”
에르하벤이 피를 토하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떴다.
케일은 고룡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오래 살 것 같은데.”
고룡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장수하고 싶었나 봐…….”
그리고 슬쩍 케일의 눈을 피했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평균 9세가 들어섰다.
“할배야!”
냐아아옹!
냐아옹!
애들이 에르하벤 곁의 피를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할배야!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막내 말이 맞는데! 오래 살아야 하는데!”
“건강하셔야 하는데.”
걱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라온, 홍, 온을 보던 에르하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케일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평균 9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너희 갑자기 왜 들어왔지?”
갑자기 침실로 노크도 없이 들어올 애들이 아니었다. 특히 온이라면 상황을 지켜보다가 들어올 터.
온이 에르하벤에게서 떨어져 케일에게 다가왔다. 더불어 라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인간아! 다크엘프 타샤한테서 연락이 왔다! 지금 국왕이 인간 네 방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뭐?
왕이 내 방으로 갔다고?
왜?
그렇게 할 짓이 없나? 뭐가 급하다고?
“론 할배랑 최한은 연락이 안 된다!”
“…그걸 타샤 씨가 연락을 줬다고?”
“그렇다.”
케일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잘린도 동시에 같이 일어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로잘린 씨.”
“곧바로 텔레포트를 펼칠게요.”
다크엘프 타샤가 라온에게 소식을 전했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더 뜻했다.
국왕 제드 크로스만. 그를 상대하러 알베르 크로스만이 움직였다는 것을.
* * *
최한은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서 론도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현재 공자님께서 정신을 차리기 힘드신 상황이라, 뵙는 것이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론이 고개를 숙인 이는 국왕 제드 크로스만이었다. 그의 뒤에는 이 상황이 난감하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종장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얼굴의 검사가 있었다.
물론 시종장과 검사 뒤에도 여러 호위와 시종들이 줄줄이 늘어선 채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전하.”
시종장이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일 다시 오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사령관을 걱정하시는 마음은 너무나도 잘 알지만, 제가 말씀드렸듯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는 이를 보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종장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슬쩍 보던 론은 현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시종장은 분명 내가 말한 바 그대로 전달했다.’
시종장은 케일이 위중한 상태라고 국왕에게 보고했을 터.
‘그럼에도 국왕이 친히 이곳으로 왔다는 소리지.’
그리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이는 현재 없다.
타국 사람들은 타국 사람이기에 로운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지만, 제드 국왕은 명색이 로운의 왕이다.
그가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간 크게 막아설 이도 없었고.
‘물론 시종장은 국왕을 막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사경을 헤매는 사령관을 막무가내로 찾아와 그 안으로 들어서려는 왕의 모습.
결코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국왕은 평소에 이런 행동을 하지 않지.’
론은 입을 닫은 채 그저 자신을 내려다보는 국왕 제드를 향해 더 허리를 숙여 보였다.
국왕은 무슨 꿍꿍이가 있다.
다만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뿐.
그렇다면 론은 케일이 오기 전까지, 아니 케일이 온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국왕을 돌려보내야 했다.
끼익.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론은 직감했다.
‘왔군.’
국왕을 막아설 이가 이제야 나타났다.
“아바마마.”
휠체어를 탄 파리한 안색의 왕세자가 문을 열고서 복도로 나왔다. 두터운 담요까지 두른 채 나타난 왕세자의 안색은 소문대로 상당히 좋지 못했다.
왕세자의 뒤에는 그의 수족이 함께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따뜻한 차 한잔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좋아하시는 차지요.”
국왕 제드는 사실 차를 즐기지 않았다.
이를 몇 명만 알고 있었다. 알베르는 그 몇 명에 들어갔다.
국왕은 가만히 알베르를 응시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래. 내가 차를 좋아하지.”
국왕은 무심한 어조로 알베르에게로 향했다.
“내가 무심했구나. 아들을 먼저 보러 와야 했는데.”
그러고는 알베르 뒤의 기사에게 눈짓했다.
“내가 끌지.”
국왕은 알베르의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선 천천히 휠체어를 밀었다.
“내가 해도 되겠지?”
“감사합니다, 전하.”
아바마마가 아니라 전하라고 부르는 알베르.
그를 향해 제드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휠체어를 끌었다.
이를 다른 이들이 황급히 따르려고 할 때, 제드는 손을 들어 보이고는 알베르와 함께 먼저 그의 침실로 들어섰다.
그는 정면에 보이는 침실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건조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뒷방 늙은이가 설쳐대서 신경이 쓰이느냐?”
알베르 역시도 정면을 보며 무심히 답했다.
“신경 쓸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무서운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데.”
알베르는 고개를 들었고, 국왕은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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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시선은 잠깐의 정적 뒤에 끊어졌다.
“전하!”
시종장이 문가에 서서 차마 들어서지 못한 채 조급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들어서지 말라는 왕의 손짓에 알베르의 침실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왕을 보좌해야 하는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국왕 제드는 문밖에 선 이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둘만 들어오도록.”
누구를 지칭하는지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곧바로 국왕 바로 뒤에서 보좌하던 시종장과 검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한 사람이 침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라온에게 연락을 주고 돌아온 다크엘프 타샤였다.
“저하.”
그녀는 알베르를 바라보았다.
국왕을 앞에 두고 하는 행동으로 올바르지 못할 수도 있었으나, 이 침실 안에 아군 없이 알베르 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래. 그대도 있었지.”
그 순간, 국왕의 목소리에 타샤는 시선을 돌렸다.
국왕의 무심한 얼굴에 살풋 미소가 맺혔다.
“그대도 들어오면 좋겠군.”
왜 저럴까.
타샤는 국왕이 의심스러웠지만, 알베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일단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달칵.
그 순간, 침실 문이 닫혔고.
“음!”
타샤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우우웅—
시종장의 몸에서 푸른 마나가 펼쳐졌다.
그 마나는 곧바로 침실 전체에 방음 마법을 둘렀다.
‘이 정도 수준이면 최상급 마법사……!’
타샤가 보기엔 로잘린에 비해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적어도 알베르보다는 뛰어났다. 더욱이 시종장은 지금껏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다.
이런 실력을 지녔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 검사도-’
타샤는 국왕 제드의 뒤가 아닌 창가로 가서 밖을 살펴보는 검사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관찰했다.
라온에게 연락을 하고 이곳으로 오던 중 최한를 지나치던 타샤는 최한이 슬쩍 건넨 말을 들었다.
‘강합니다, 저 검사.’
시간이 없어 더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최한이 강하다고 말할 정도의 검사라면 소드 마스터는 되어야 했다.
‘그 정도로는 안 보이는데.’
삭막한 분위기와 달리 저 검사에게선 별다른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로운에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고? 그것도 국왕의 최측근으로?’
타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정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방심하면 안 되겠어.’
국왕 제드 크로스만. 알베르 왕세자에게 실권을 모두 넘겨주었지만 만만히 볼 자가 아니었다.
어쨌든 아직까지 그가 ‘왕’이지 않던가?
더불어 알베르를 방치했던 저자를 믿을 수 없었다.
다크엘프 타샤의 몸이 알베르 쪽으로 향했고, 언제든 그를 지킬 수 있는 태세를 꾸렸다. 동시에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국왕에게로 향한 순간.
“알베르 크로스만.”
국왕은 알베르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그만 이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 어떻겠냐.”
타샤의 눈이 커졌다.
국왕은 지금 어서 알베르에게 왕이 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베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파리한 안색의 조카는 제드 국왕이 아닌 창밖을 보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모양새가 참으로 아파보였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라는 자는 왕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타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알베르가 누구도 바라보지 않고서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이제 골치 아픈 일들도 없을 것인데, 더 머물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 시선이 천천히 국왕에게로 향했다.
창백한 안색과 다른 날카로운 눈동자였다.
‘왜.’
알베르는 궁금했다.
‘왜 갑자기 퍼슬시로 왔지?’
모든 실정에 대해 관심을 크게 두지 않던 국왕이 왜 갑자기 퍼슬시로 왔을까?
왜 전장을 둘러보고 케일을 찾으며 자신의 건재함을 드러낼까?
꼭, 아직 실권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가.
국왕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알베르는 제드 국왕 앞에서 방심할 수 없었다.
“내가.”
제드 국왕이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궁을 나가마.”
뭐라고?
알베르의 눈이 커졌다.
보통 현재 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다음 대 왕이 등극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베르는 이 모든 전쟁이 끝난 후 그 공로로 왕의 자리에 올라서고자 했다.
평화로울 때, 로운이라는 이름이 서대륙에서 빛을 발할 때 왕이 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명분이나 정당성을 따졌을 때도 그 방향이 제일 좋았다.
‘이상하군.’
알베르는 제드를 샅샅이 관찰했다.
보통 국왕이 물러나 상왕이 되면 왕성 내 별궁으로 가거나 혹은 왕국 소유 타지역의 별궁으로 가서 생활한다.
하지만 제드는 지금 그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궁을 나간다.
그 의미는 별궁조차 궁으로 여긴 것처럼 느껴졌다.
“…별궁으로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궁 자체를 떠난다고 하였다.”
즉, 별궁도 궁으로 본다는 소리였다.
제드 크로스만은 아예 궁이라는 존재 자체로부터 나가겠다고, 멀어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제드는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상왕이 궁에 머물러봤자, 좋지 못하지.”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알베르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상왕을 왕궁 내 별궁 혹은 타지역 별궁에 모시는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아버지를 모시는, 전대 왕에 대한 예후로서의 마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 구도를 포함한 지극히 정치적인 입장도 담겨 있었다.
제드가 말하고 있는, 궁을 나간 상왕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버젓이 살아있는 전대 왕이 새로이 등극한 현 왕의 세력을 벗어나 마음대로 돌아다닌다는 뜻이었다.
“어찌.”
알베르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세자로서 말했다.
“어찌 궁을 나가시려는 겁니까? 자식으로서 아바마마를 제가 모셔야-,”
“감시하려고?”
알베르의 말은 제드에 의해 끊겼다.
“감시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알베르가 말했으나, 국왕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 무심하게 답했다.
“감시지. 상왕이 다시 왕이 되려는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누르는 것. 그것이 감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알베르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한 적은 없었는데.’
국왕 제드가 알베르에게 감시니, 딴생각이니 이런 어휘를 적나라하게 사용하며 속내를 드러낸 적은 없었다.
왕세자의 눈빛에 묘한 기색이 서렸을 때.
“너도 알 거다.”
제드 국왕은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내 주위를 호위하는 녀석들. 그 녀석들만 데리고 나가마.”
제드 주위를 그림자처럼 지키는 자들.
왕세자가 된 알베르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제드는 알베르의 시선이 시종장과 검사에게로 향하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 둘도 나를 호위하는 자이지.”
시종장은 여전히 조금 가볍고 속물적인 모습으로 알베르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고, 검사는 그저 창밖만 감시했다.
알베르는 가만히 세 사람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디 계신지는 제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식.
제드는 웃음을 흘리더니, 무심하게 답했다.
“로운 안에는 머무를 것이다. 반년에 한 번씩 연락주마. 어차피 국경은 네 수중에 있는데 어찌 내가 도망칠까. 동남부 빼고는 네 손아귀이지 않느냐.”
로운의 동북부 데르트 공작가.
서북부의 스텐 후작가.
서남부의 기예르 공작가.
로운의 수도를 중심으로 한 중앙과 로운의 동남부를 제외하고는 다른 세 곳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알베르였다.
“마법으로 타국으로 도망쳐도 타국에서 나를 잡아다 너에게 바치겠지.”
덧붙인 제드의 말에 알베르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만큼 평범하고 그럭저럭 왕국을 이끌어온 제드와 로운을 서대륙 중심 세력으로 만든 알베르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했다.
알베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반년은 깁니다. 삼 개월에 한 번씩은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그 말을 내뱉는 알베르를 가만히 응시하던 제드는 표정을 굳혔다.
알베르의 저 눈동자에는 단순히 권력을 생각하는 차기 왕으로서의 감정만 담겨 있는 게 아니었다. 아들로서의 감정도 담겨 있었다.
“…너는-”
제드는 무심코 뱉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삼켰다.
알베르는 그의 눈빛을 보았지만, 살짝 시선을 틀었다.
잠시의 침묵 뒤, 부자는 다시 국왕과 왕세자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제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참고로. 대관식은 봄에 하도록.”
알베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루빨리 오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봄이 오려면 한참 남았다.
물론 퍼슬시에서 일어난 전투와 그 후에 벌어질 일들을 뒤처리하고 나면 얼추 봄이 되기는 할 터.
툭툭.
제드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어서 그렇다.”
제드 국왕이 할 일이 있다고?
재위 기간 동안 특별히 왕국 전체적인 제도나 업을 이루지 않았던 국왕이었다.
‘뭐지?’
알베르는 물으려 했다.
마지막으로 할 일. 그게 무엇이냐고.
그 순간이었다.
“쥐새끼.”
제드의 입이 열린 순간, 알베르는 방음 마법을 펼친 시종장의 마나가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분노, 흥분과 같은 격렬한 감정에 반응하듯 마나가 난폭하게 날을 세웠다.
그리고 창밖을 보던 검사가 시선을 돌려 제드 국왕을 바라보았다.
국왕은 무던한 목소리로 말했다.
“쥐새끼 하나 잡으려고 한다만.”
알베르는 무던함 속에 감춰진 날카로운 칼날을 보았다.
그의 입이 열렸다.
왠지 지금 그 쥐새끼가 무엇을 가리키냐고 물어야만 할 것 같았다.
똑똑똑-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왕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세자와 국왕이 대화를 나눈다. 이를 깨트릴만한 사안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나 보군.”
제드는 시종장에게 눈짓했고 곧바로 방음 마법이 사라지며 시종장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사령관께서 깨어났는가?”
“네.”
시종장이 건넨 물음에 론 몰란이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답했다.
“그리로 가지.”
국왕은 알베르에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린 채 침실을 나갔다.
알베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타샤만이 남은 침실에서 지시했다.
“조사해 봐.”
탁탁.
천장에서 작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몇 명의 인기척이 일었다.
알베르는 천장을 보며 타샤에게 물었다.
“아바마마께서 모른 척한 거겠지요?”
“그렇지. 시종장과 검사는 이미 알아채고 있었을걸.”
제드는 침실 천장에 자리한 다크엘프 은신을 모른 척해주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아.”
알베르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제드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케일을 떠올렸다.
아버지와 케일.
그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눌까.
* * *
“안색이 많이 좋지 않군. 내가 괜히 자네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 싶어.”
“아닙니다. 전하.”
안으로 들어서는 국왕을 보자마자 케일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국왕은 손을 내저었다.
“일어서지 말게. 편히 앉아. 내 그 정도 눈치는 있네.”
그러고는 케일 침대 바로 옆의 의자에 곧바로 앉았다.
그 모습은 꽤 친근해 보였다. 마치 몇 번 본 사람처럼 케일을 대했다.
“그래, 몸은 어떻나?”
“…살 만은 합니다.”
케일은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최대한 가련하게 답했다.
“그래?”
제드는 안쓰럽다는 듯 케일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케일 헤니투스 사령관. 그대 꿈은 무엇인가?”
갑자기 이 인간은 왜 이럴까.
케일은 에르하벤을 놔두고 오자마자 맞이한 국왕이 건넨 말에 기가 찼으나, 일단 최대한 가냘픈 척하며 답했다.
“저야, 그저.”
막힘없이 답했다.
간절하다는 듯.
“조용한 곳에 집을 하나 두고, 그곳에서 쉬면서 이따금씩 소일거리로 작은 텃밭을 가꾸는 것이 꿈입니다. 그저 조용히, 정말 조용히-”
케일은 점점 강하게 변해가는 자신의 어조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제드는 별생각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데르트 공작에게서 들었네. 곧 자네는 영지로 내려가 별장에서 요양을 할 예정이라고.”
케일은 데르트 공작이 언급되자 속으로 움찔했으나 드러내지 않았다. 일단 공작이 가주 안 시키고 놀게 해준다는 소리였으니, 만족스러웠다.
제드 국왕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데르트 공작이 내가 벌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더군. 참, 예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공작은 제 사람과 관련된 일에서는 무서워진단 말이야.”
응?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사령관. 내 꿈은 무엇인지 아나?”
케일은 자신의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 국왕을 보며 문득 환상 속 어린 시절 알베르와 제드 국왕이 떠올랐다.
“그래. 데르트 공작의 말이 맞아.”
제드는 케일의 대답은 원치 않는 듯 홀로 말을 이었다.
“내 일은 내가 처리해야지.”
그는 케일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침대에 앉은 케일은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국왕의 미소를 보며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오르세나 공작가. 그래.”
케일은 로운 왕국 수도에서 가장 세가 큰 귀족 가문 이름을 듣는 순간, 일련의 사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케일의 친모 주르 템스.
그녀의 가문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가 가짜 힐스만 부단장 모습을 하고서 케일에게 잡혔다.
그자는 케일의 아버지 데르트 공작을 만나겠다고 하며 케일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했었다.
‘플린 상단에서 자금이 흘러나왔어. 그 정보는 확실해.’
사냥꾼을 후원한다고 추정되는 플린 상단.
‘그 서자 놈, 고꾸라졌잖아.’
유력한 상단주 후보였던 빌로스 플린은 현재 죽을 위기에 놓인 채 도망쳐 행방불명 상태다.
‘오르세나 공녀의 후원을 받는 플린가 둘째가 곧 상단주가 돼. 지금 이 퍼슬시의 일이 처리되면 바로 상단주 자리에 오를 거야. 그리되면 빌로스 플린은 처단당하겠지’
케일은 그 정보를 듣고 가짜 힐스만에게 물었다.
‘플린 상단의 차기 상단주가 오르세나 공작가의 지원을 받았고, 사냥꾼을 후원하는 자금이 플린 상단에서 나왔다는 겁니까?’
‘그래. 그림이 그려지나?’
가짜 힐스만에 의해 떠오른 ‘오르세나 공작가 – 플린 상단 – 사냥꾼 집단’ 간의 관계성.
케일은 어느새 가련한 척을 집어치우고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오르세나 공작가가 무엇입니까?”
제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그게 궁금하겠지.”
활짝 웃는 제드의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오르세나 공작가는, 내가 키운 사냥개다.”
사냥개라고?
케일의 눈동자에 입꼬리가 올라간 제드 크로스만의 얼굴이 담겼다.
오르세나 공작가.
로운 왕국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로운 귀족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귀족 파벌 수장 격 가문이었다.
사실 케일은 그런 가문이 사냥꾼에게 후원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지만, 지금 제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실이 더 놀라웠다.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게 왕국을 이끌어온 제드 크로스만.
‘그런 인간이 공작가를 사냥개 취급한다고? 사냥개로 키웠다고?’
케일은 봉인된 신의 환상 시험 속에서 제드 크로스만이 평범한 왕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케일의 생각 이상으로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자였다.
하지만 놀란 속내와 달리 케일의 표정은 담담했고, 제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자네가 대강 오르세나 공작가나 사냥꾼에 대해서 들었다는 건 나도 데르트 공작에게 들었네.”
잠시 제드는 말을 멈추더니 이었다.
“그리고 외가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지?”
템스 가문. 어느 순간 갑자기 몰락하듯 사라져버린 가문이었다.
“케일 사령관. 자네의 그 관심은 이해하네. 자신의 핏줄에 대한 그리움과 의문은 당연한 법이지.”
케일은 살짝 멈칫했다.
‘썩… 그렇게 알고 싶지 않습니다만.’
사냥꾼과 관련하여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서 더 알고 싶지 않은 케일이었다.
‘더 알았다가는-’
하얀 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일에 휘말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으니까.
물론, 주르 템스와 연관된 과거들을 아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특히 단생자와 관련하여 사냥꾼들이 최한을 노릴지도 모르기에 어느 정도 그쪽에 대한 경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천천히 알아가며 경계를 하는 것과 본격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현저히 다른 일이었기에, 케일은 일단 당장 후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픈 마음은 없었다.
“케일 헤니투스.”
그때, 제드 국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케일을 불렀다. 어느새 제드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는 무표정 그 자체로 케일을 응시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일세.”
국왕은 무심한 어조로 경고했다.
“자네가 호기심을 가져도 되는 범위는 지금 그 정도가 적정선이야. 그 이상은 관심을 두어서도, 발을 들여서도 안 돼.”
케일은 잠시 생각했다.
‘…지금 나보고 사냥꾼 일에 관심 끄라는 거지?’
맞지?
케일의 눈동자에 살짝 힘이 감돌았다. 이는 생기였다.
제드는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툭 내뱉었다.
“…혈기를 억누를 줄도 알아야 하네. 케일 사령관, 항상 앞으로 나서는 게 좋은 게 아닐 때도 많아.”
네? 갑자기 무슨 소리시죠?
나설 의지도, 억누를 혈기도 없는 케일은 의아함을 담아 국왕을 바라보았다.
제드 국왕은 자신이 한 말에 의문을 담은, 수긍을 하지 않는 눈빛에 얕게 탄식을 흘렸다.
“…주르를 닮았군.”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케일은 들어버리고야 말았다.
‘뭐야? 왜 국왕이 주르 템스를 저렇게 친구 칭하듯 부드럽게 부르는 거지?’
케일은 제드의 중얼거림을 철저히 무시했다.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뒷목에 맴돌았다.
“흐음.”
제드는 어느새 차분한 표정으로 덤덤히 자신을 응시하는 케일을 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의문을 조금은 풀어주어야겠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으니까.”
… 굳이 안 풀어주셔도 되는데요?
궁금한 건 아버지한테 풀어보면 될걸요?
케일은 상황을 보니 아버지 데르트 공작이 이미 국왕과 한 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은 케일의 생각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냥꾼을 쫓고 있네.”
그 말을 내뱉는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르세나 공작가는 내 일을 돕고 있지. 카린 오르세나 공녀는 내 명으로 사냥꾼과 연결될 방법을 찾았던 것이고. 이 정도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일세.”
케일은 잠시 눈을 감았다.
왕을 앞에 두고 할 일은 아니었으나, 물밀 듯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봉인된 시험에서 만났던 15살의 알베르 크로스만.
왕세자의 어린 시절 때 제드 국왕은 지금보다 훨씬 젊었다.
그는 사냥꾼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고대의 하얀 별.
그는 사냥꾼과 모종의 관계를 맺어 엄청난 힘을 얻었고 신이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사냥꾼의 흔적은 역사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핏줄을 이어받은 크로스만 가문.
제드 크로스만은 고대의 하얀 별을 이용하고 버린 사냥꾼을 증오하지 않았다. 둘 다 나쁘다고 말할 뿐.
그래서 케일은 왜 사냥꾼을 증오하냐고, 환상 속의 제드에게 물었다.
사냥꾼에게.
‘목숨 협박이라도 받았습니까?’
아니면.
‘가까운 누군가가 사냥꾼에게 죽은 겁니까?’
그때, 국왕 제드는 기절한 알베르 크로스만의 얼굴을 힐끗 보았을 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베르의 어머니는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크엘프 혼혈이라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마법에도 상당한 일가견이 있었다.
케일은 짧게 침음을 흘렸다.
‘생각해보니 물어볼 것이 많군.’
환상 속 제드 국왕은 붉은 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사냥꾼은 현재 총 다섯 가문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라 하였다.
그러나 과거에는 일곱 가문이었고, 그중 사라진 두 가문은 붉은 피 가문과 하얀 피 가문이었다.
“케일 사령관.”
케일은 눈을 뜨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음.”
그리고 다른 의미로 침음을 흘렸다.
“나는 내 사냥감을 남과 공유할 생각이 없네.”
제드의 눈빛에는 단호함과 집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언뜻 광기로 보이기도 했다.
무표정 속에 감정을 숨길 만큼 제드는 나이가 들었으나, 그 연륜만큼 목표가 확실해 보였다.
“모든 것이 끝나면 알려주도록 하지.”
이거 안 되겠구나.
케일은 지금 제드를 건드려서는 득 볼 것이 없겠다 생각했다.
“전하.”
그렇다면 하나는 물어야 했다.
“이곳에 오신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지금껏 왕궁의 뒷방 늙은이 행세를 하며 뒤에서 사냥꾼을 쫓고 있지 않았나?
그런 자가 퍼슬시에 왔다?
분명 이유가 있다.
씨익.
제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본 순간, 케일은 처음으로 제드가 좀 사람다워 보였다.
“…글쎄. 궁이 갑갑했던 것 같군.”
지친 것인지, 혹은 안도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기 힘든 미소였다.
“그래도 덕분에 데르트 공작과 대화도 빨리 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지. 자네와도 대화를 나누고.”
어느새 제드는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여름. 다음 해 여름이 되기 전까지 모든 것은 끝날 터이니 그때,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를 해주도록 하지.”
케일의 표정이 살짝 떨떠름해졌다.
“…전하께서 제게 직접이요?”
“그래. 그때는 아마 나는 전하도 아닐 터이니.”
케일은 여름이 되기 전에 알베르가 공식적인 왕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싫어도 대화를 좀 해주어야겠어.”
제드는 조금 편안한 미소를 그렸다.
“내 이야기를 할 만한 상대가 별로 없거든. 내 또래는 다 나를 싫어해서 말이야.”
그 말을 하는 제드의 얼굴은 참 해맑았다.
“…좋습니다.”
케일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알아서 처리한다고 하고. 행동으로 봐선 준비한 것도 많아 보이니 일단 지켜보자.’
다만.
“그래도 혹시 제 주위에 문제가 될 일이 생긴다면, 저는 나설 겁니다.”
혹시 단생자인 최한에게 사냥꾼의 위협이 온다면.
혹시 템스가와 연관되어 있는 헤니투스 공작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니면 제드 국왕 때문에 로운 왕실이나 알베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케일은 나설 생각이다.
그의 각오에 반응한 것인지, 몸 안에 있던 지배하는 아우라가 저절로 풍겨져 나왔다. 이전의 지배하는 아우라와 달리, 세계수의 근원을 심장에 꽂은 후로 그 아우라는 더 무겁고, 강해졌다.
케일은 아우라를 굳이 거두지 않고, 국왕에게 말했다.
내가 나서게 된다면.
“그건 누구도 막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똑바로 하십시오.
케일 나름의 경고였다.
왕을 향한 불충이든 혹은 시건방진 모습이든. 케일에게는 제 주위 사람들의 안위보다 중요치 않았다.
제드는 빤히 케일을 응시하다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한참을 웃던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서며 툭 내뱉었다.
“참, 닮았어.”
케일이 일어서려고 하자 제드는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문으로 향했다.
달칵.
문이 열렸고.
“데르트도 같은 말을 하더군.”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그는 케일의 침실을 벗어났다.
케일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데르트’라고?’
방금 왕은 데르트 공작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데르트’라고 했다.
‘아버지랑 왕이랑 친한 형 동생 사이인가?’
설마… 아니겠지?
케일은 이 부분은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도련님.”
달칵. 침실 문을 닫으며 시종 론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어? 아. 어.”
괜찮지.
일단 제드 크로스만 국왕이 알아서 한다는 소리 아닌가?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생긴다면 아버지나 왕세자 저하한테 물어보면 될 거고.’
정 거슬리고 신경 쓰이면 제드 국왕에게 쳐들어가서 물어보면 된다.
케일은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살짝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최한은 그 모습을 보며 두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혹시 제 주위에 문제가 될 일이 생긴다면, 저는 나설 겁니다.’
케일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더…….’
최한은 다짐했다.
‘…더 강해져야 한다.’
아니.
‘…지킬 수 있어야 돼.’
최한은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세상은 평화로워졌을지도 모르겠으나, 자신은 이제부터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쯧.’
시종 론은 최한의 상태를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케일이 먼저였다.
“도련님.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나?”
케일은 문득 사과파이가 떠올랐다.
‘그게 또 별미지.’
힘이 없을 때, 입안에 욱여들어오는 사과파이의 달달함은 꽤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맛이 있었다.
“음, 사-”
하지만 그의 입은 사과파이를 뱉을 수 없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차남 바센이었다.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다급함이 살짝 서려 있었다. 케일이 눈짓했고, 최한이 곧바로 문을 열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걱정이 한가득 담긴 눈동자로 케일을 살피던 바센은 케일이 조금은 혈색 좋은 얼굴로 시니컬하게 웃어 보이자 살짝 미소를 그렸다.
“어, 괜찮아.”
이어진 대답에 그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 그-”
하지만 곧 케일에게로 다가오며 입을 떼는 바센의 얼굴은 상당히 난처하게 변해갔다.
“왜, 무슨 일이지?”
케일은 바센의 이런 모습이 처음이었다.
난처함과 당황스러움, 동시에 배신감이 감도는 얼굴이었다.
“그게.”
“그래.”
“저-, 공작가에 일이 생겼는데.”
“무슨 일?”
케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현재 공작가에는 동생 릴리가 남아 있었다. 충직한 가신들이 헤니투스 영지에 많이 머물러 있지만, 그래도 홀로 있을 릴리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이건 형님에게 말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아버지가?”
“네. 아버지는 지금 황급히 공작가로 가셨습니다.”
케일에게 쉬라고 협박하며 말하던 아버지가 케일에게 말을 전하라고 하였다.
이건 위급한 일이,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을 뜻한다.
케일은 이를 깨달은 순간,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
“그래, 말해 봐.”
바센은 케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가짜 힐스만 행세를 했던 자는 공작가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가짜 힐스만.
케일의 친모 주르 템스의 친족으로 추정되는 자. 그는 데르트 공작과의 대화 후 공작가로 간 듯싶었다.
‘그래서 안 보였군.’
아버지와의 대화 후 이동했으니 별일은 없을 터.
“그런데?”
“그자가 갑자기 저택에 와 있던 부집사 한스를 공격했고.”
응?
부집사 한스? 걔를 왜 공격해?
잡다한 일을 참으로 잘 수행하는, 괜찮은 녀석 아니던가.
그 녀석이 갑자기 왜 튀어나와?
“…한스가 다쳤나?”
바센은 갑자기 케일 주위를 감싼 무거운 기운에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한스는 멀쩡합니다! 단순히 제압하는 정도였던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뭔가 케일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사건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 예감이 훅 든 순간.
“그… 가짜 힐스만 분이 사라지셨는데. 그랬는데.”
“탈출했다고?”
“네. 그런데-”
가짜 힐스만의 탈출은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분이 부집사 한스가 청소 중이던 형님 방을 다 털어서…….”
뭐?
뭐라고?
뭘 털어?
“응?”
케일이 어벙한 얼굴로 되물었을 때, 바센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가짜 힐스만이 공작가 형님 방에 있는 물건을 다 털고 사라졌습니다! 비싼 건 다 챙겨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쪽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깜박깜박.
케일의 눈꺼풀이 천천히 껌벅거렸다.
하지만 그 찰나 뒤.
“…이 빌어먹을!”
케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싼 물건은 모두 케일의 아공간 주머니에 있었다.
하지만.
“…내 노후 자금을……!”
항상 털어봤지, 털리는 건 처음인 케일이었다.
‘당장.’
당장 헤니투스 영지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케일은 확고히 생각했다.
바센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형님, 그 서대륙 연합에서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 영웅 훈장을 준다고 하는데-”
“필요 없어.”
돈도 아니고 훈장 따위.
케일은 벗어놓은 상의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붉은 일기장을 찾아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주르 템스. 그녀에게 가짜 힐스만에 대해 물어보면 뭘 얻을지도 몰랐다. 분명 가까운 친척 그 이상으로 보였으니까. 아니면 황금 팽이채로 바람 정령에게 탐색을 부탁해도 좋았고.
툭.
하지만 케일의 손에 먼저 닿은 것은 다른 물건이었다.
“아.”
검은 책.
죽음의 신의 신물.
그것이 케일의 손에 살짝 닿았다.
‘이건 일단 나중에-’
케일은 봉인된 신까지 포용되어 찜찜해진 물건을 지금은 무시하기로 했다.
-이제야 목소리가 닿는구나.
하지만 검은 책에 손이 닿는 순간, 케일은 죽음의 신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허억!”
그는 다른 손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형님!”
“도련님!”
“케일 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의 신이 쑥스럽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그 목소리에는 살짝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여의주. 부서졌잖아. 그거 대신할 것 좀 주고 싶은데. 받을래? 저쪽하고 대화하고 싶을 거 아냐. 그렇지?
한층 친근해진 어조로 죽음의 신은 제의했다.
-그리고 죽음의 신 성자도 하고. 어때?
케일은 신물을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내 가볍게 방구석으로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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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바센은 갑자기 책을 집어 던지는 케일의 모습에 놀라버렸다. 하지만 론과 최한이 태연하게 검은 책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니 얼떨떨한 얼굴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케일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서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일기장이고 팽이채고 뭐고 간에, 일단 내 방 꼬라지부터 봐야겠어.”
오랜만에 케일은 짜증이 나다 못해 기가 막혔다.
가짜 힐스만. 그 사람 분명 케일의 친모 가족일 건데.
‘내 방을 털어?’
케일의 눈동자에 활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론-”
공작가로 가자.
그 말을 론에게 하려고 했던 케일은 흠칫 움찔했다.
론이 인자하게 웃으며 다과용 나이프를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호오. 우리 도련님 방을 털었다 이 말이지요. 도련님,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겠지요?”
“…어? 어, 어.”
순간 케일은 쫄았다.
론은 인자하게 웃으며 다과용 나이프로 가짜 힐스만의 목을 따버릴 것 같았다.
“케일 님, 제가 먼저 가볼까요?”
“어?”
케일은 반대편의 최한을 쳐다봤다가 오랜만에 심장이 덜컹 쪼그라들었다.
‘…이 순한 놈이 얼마나 화가 나면…….’
최한의 얼굴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달캉. 달캉.
검 손잡이를 만지며 검집 사이로 검날을 자꾸 드러내서 그렇지.
최한은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보금자리를… 우리 집을…….”
왠지 등급 외 괴물이 퍼슬시를 부술 때보다 더 화가 나 보였다.
케일은 론과 최한의 모습에 저절로 화가 가라앉았다. 침착해진 그의 안색을 본 바센이 다가와 차분히 말했다.
“형님. 아버지도 바로 오라고 전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데르트 공작은 단지 케일도 알아야 할 것 같다며 전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일단 가짜 힐스만이 남겨둔 쪽지는 잘 보관 중이니 며칠 있다가 와서 확인하여도 될 것이라 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바센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현재 논의 중인 영웅 훈장도 받으셔야죠.”
그는 형 케일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침을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잘하면 동서대륙 통합 훈장이 최초로 나올지도 모릅니다.”
현재 아직 떠나지 않고 퍼슬시에 남은 각국의 대표 혹은 책임자들은 이번 전투에 대한 논의를 진행 중이었다.
“이는 대륙 역사상 처음으로, 지금껏 누구도 받지 못한 훈장이 될 겁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런 훈장을 받을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한 국가에서 주는 훈장이 아닌 동서대륙 통합 훈장.
이는 두 대륙이 인정한 공로라는 뜻으로, 세상의 위기를 구한 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명예 상징이라 할 만했다.
“물론 훈장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바센은 론과 최한을 바라봤다.
“다른 분들께서도 대륙 훈장을 받으실 겁니다. 다만 형님은.”
케일과 다시 시선을 마주한 바센은 담담하게 말했다.
“다만 형님은 그중에서도 최고 등급인 ‘영웅’ 훈장을 받으실 것 같습니다.”
최한은 잠시 형제의 시선이 서로 대치하는 것을 보며 바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케일 님의 동생.’
그리고 데르트 공작을 가장 많이 닮은 인물. 이목구비는 데르트를 조금도 닮지 않았건만, 어째 하는 행동은 데르트 공작을 떠올리게 하는 바센이었다.
‘또 묘하게 케일 님과 결이 비슷하지.’
형제는 서로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역사에 기록될 필요 없다.”
그 순간, 동생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형은 웃는 동생을 보며 퉁명스럽게 툭 던지듯 말했다.
“너도 알면서 왜 그래?”
케일의 말에 바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럼 영지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처리해놓겠습니다.”
* * *
퍼슬 시청.
활력을 되찾은 그곳은 현재 서대륙에서 가장 바쁜 곳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그 퍼슬 시청 건물의 대형 회의실.
수많은 인물이 앉을 수 있는 기다란 원형 탁자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직까지 퍼슬시에 남은 각국의 대표 혹은 책임자들로, 그들의 표정은 꽤 밝았다.
“그러면 그 부분은 처음 논의대로 진행하기로 하죠.”
“좋습니다. 모두가 흡족할 만할 겁니다.”
제각기 말을 얹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다만 한 사람. 정글의 왕 리타나만이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둘러볼 뿐이었다.
‘…카로, 위퍼, 브렉, 아스코산, 모고르…….’
서대륙의 왕국들.
‘…동대륙에서도 왔고.’
동대륙에서도 대표로 몇 곳의 대표가 이곳에 왔다.
“…애매하군.”
“네?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스코산 왕국 대표가 건넨 말에 그녀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닐세.”
리타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툰카 대장군도 없고, 알베르 왕세자도 없다… 진짜 대표는 몇 없군.’
카로 왕국도, 브렉 왕국도 실무 대표자가 이 자리에 왔을 뿐, 진짜배기 대표자가 오지 않았다.
‘…진짜배기들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 온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안 온 것인지 모르겠군.’
리타나의 표정이 굳어갔다.
그때, 북부의 삼국 중 한 곳인 아스코산 왕국 대표 외무재상이 말했다.
“그러면 훈장 등급은 이렇게 나누도록 하죠!”
“좋습니다!”
발렌티노 왕세자 대신 이곳에 온 카로 왕국 재상이 흔쾌히 답한 순간이었다.
끼이익.
어떠한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리타나의 눈동자가 문으로 향했다.
현재 회의실 밖은 경계가 삼엄했다. 그곳을 어떠한 소란도 없이 통과했다는 소리는, 이곳에 자리한 이들에 비견되는 자란 소리였다.
“…클로페 경.”
리타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호 기사.”
파에른, 노르란드, 아스코산. 북부 3국 중 노르란드의 왕세녀가 침음을 흘렸다.
클로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비어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통칭 ‘하얀 전쟁’이라 불리는 퍼슬시 전투에 참여했던 영웅 중 한 명이자 북부 3국 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파에른의 대표자.
클로페 세카.
그가 고고한 미소를 띤 채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크흠. 클로페 경 몸은 괜찮으십니까?”
북부 3국 중 하나인 아스코산의 외무대신이 클로페에게 말을 건넸다.
“제가 말이죠.”
클로페가 여전히 미소를 띠운 채 말을 이었다.
“이번 전투에 대한 보상으로 훈장을 받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 들으셨군요!”
아스코산 외무대신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번 전투에서 고생하신 클로페 경을 비롯한 영웅분들을 위해 준비하고 있지요.”
카로 왕국 재상이 말을 보탰다.
“동서대륙이 한마음 한뜻으로 준비한 최초의 훈장으로 역사에 다시 없을 명예가 될 겁니다.”
그 순간이었다.
“하, 하하-”
클로페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클로페 경?”
너무나도 시원하고 상쾌해 보이는 웃음에 말을 건넸던 이들의 표정에 의문이 서렸다.
“흐음.”
리타나와 몇몇 이들만이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볼 뿐.
클로페는 웃음을 거두었다.
“아, 재밌군요.”
하지만 미소는 여전했다.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네?”
“…무슨 의미죠?”
아스코산과 카로 대표의 얼굴이 굳어져 갈 때, 클로페는 무심히 말했다.
“역사에 다시 없을 명예를 판단하는 것은 고작 훈장 따위가 아닙니다.”
클로페는 안다.
전설. 신화.
그런 것은 훈장이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훈장은 그저 곁다리일 뿐.
그의 손이 창을 가리켰다.
“역사는 이미 이루어졌고, 또한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을 겁니다.”
이 자리가 아닌 세상을 통해서.
클로페는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클로페 경.”
북부 노르란드 왕국의 다음 대 후계자가 입을 열었다.
“클로페 경께서는 훈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아스코산 외무대신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설마요.”
클로페는 노르란드 후계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네?”
아스코산 외무대신이 놀라서 바라볼 때, 노르란드 왕세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페 경,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카로 왕국 재상의 물음에 클로페는 그를 응시했다.
‘발렌티노 왕세자는 없군. 생각보다, 카로 왕국은 그릇이 작아. 발렌티노 왕세자도.’
클로페는 가라앉은 눈동자로 무심히 입을 열었다.
“고작 훈장 따위로, 이번 일을 퉁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고작 훈장이요?”
“네.”
클로페는 훈장 소식을 듣자마자 이곳에 왔다.
그는 세상에 다시 없을, 위대한 전설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함께 겪었다.
그런 위대한 일을 했건만.
“재상님.”
클로페는 거슬렸다. 아니, 심기가 뒤틀렸다.
고생을 한 자들은 빼놓고, 그냥 가만히 이득만 본 것들이. 넋 놓고 쳐다만 본 것들이.
영광으로 알라면서 훈장을 수여한다고?
특히, 함께 싸운 자들이라면 몰라도 제일 뒤에서 숨어있던 것들이 등급을 나누며 평가를 한다고?
영웅에게.
전설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
물론 그가 아는 영웅은 이런 자잘한 것들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진정한 영웅이었다.
클로페는 카로 왕국 재상을 훑어보았다. 그 눈동자는 뱀의 것처럼, 서늘하게 차가웠다. 고고한 모습 사이로, 진득한 한기가 서렸다.
“재상님, 멀쩡하시네요?”
그 눈동자는 아스코산 외무대신에게로 향했다.
“이쪽도 멀쩡하시고. 하얀 전투 동안 구경만 하셨나 봅니다?”
고고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차분한 어조로 던지는 말은 날카로웠고 한껏 뒤틀려 있었다.
“머, 멀쩡하냐니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쾅!
카로 왕국 재상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클로페는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노르란드 왕세녀, 브렉 왕국 재상, 모고르의 대표자-
한명 한명. 어떠한 감정도 없는 눈동자가 그들을 관찰했다. 멀쩡한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지막 그 눈동자가 먼지로 뒤덮인 리타나와 피폐한 몰골의 위퍼 왕국 총 참모에게 닿은 순간.
“자.”
톡톡.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논의는 다시 하죠.”
끼이익.
클로페가 들어서며 절반만 열렸던 문이 활짝 열렸다.
“맞습니다. 다시 해야지요.”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 대부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왕세자! 괜찮습니까?”
리타나가 황급히 뛰쳐나갔다.
“네. 괜찮습니다.”
창백한 안색의 알베르 크로스만. 그가 휠체어를 탄 채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다크엘프 타샤가 함께하며 휠체어를 밀어주었다.
“…그렇군요.”
리타나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음에도 괜찮다고 말하는 알베르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달칵.
타샤가 문을 닫았고, 그 순간.
“이상하군요.”
알베르는 특유의 화사한 미소를 지은 채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로운 왕국에서 회의를 하는데, 로운 왕국 대표가 없군요. 참, 이상하군요.”
크흠. 큼.
슬쩍 알베르의 눈길을 피하는 이들이 몇 명 있었다.
‘그렇지. 이래야 맞지.’
동서대륙을 절망에 빠뜨릴지도 몰랐던 위기가 끝나니, 이제는 각국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자들이 나온다.
동맹이니 협력이니 하며 전후 모두 돕겠다고 했던 이들이 하나둘 발을 뺀다. 그들 대부분이 큰 타격을 입지도 않아 여력이 충분하건만.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똑바로 알베르를 응시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요.”
가만히 있던 위퍼 왕국 참모 헤롤 코디앙이 입을 열었다.
“왕세자 저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알베르는 창백한 얼굴 위로 드리운 미소를 더 짙게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이야 바로잡으면 되지요.”
타샤는 알베르의 휠체어를 탁자 가장 상석으로 이동시켰다.
알베르는 탁자 위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케일 헤니투스 사령관은 훈장을 거부했습니다.”
“네?”
“거부했다고요?”
놀라고 의아해하는 이들 사이로, 몇몇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클로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케일이 훈장을 거부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가 아는 케일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전설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클로페는 전설이, 영웅이 반드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게 할 작정이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해야지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퍼슬시를 복구해야 합니다.”
알베르는 창밖을 가리켰다.
창밖에는 군데군데 무너지다 못해 흔적을 알 수 없게 망가진 퍼슬시의 전경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또한 그간 로운 왕국은 전시 상태로 모든 일들이 멈췄습니다. 참으로 많은 타격을 얻었지요. 그 모든 피해들을 로운 왕국 홀로 어찌해야 할지…….”
알베르는 창밖도 보지 않고 외면하는 몇몇 국가 대표들을 눈에 담았다.
“크흠, 큼.”
아스코산 외무대신은 헛기침을 하며 슬픈 표정을 그렸다.
“왕세자 저하께서 참 앞으로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도의적 차원에서 도울 순 있습니다.”
동대륙 왕국 대표 중 한 명이 아스코산 외무대신의 말에 덧붙였다. 하지만 슬픔을 담은 말과 달리 그들의 눈동자에는 이채가 감돌았다.
너무나도 강해진 로운 왕국.
그곳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로운 왕국에서 벌어진 일이지 우리 일은 아니잖아?’
‘기사단 파견 정도 했으면 되었지. 더 무엇을 할 필요는 없지. 하루빨리 발을 빼는 편이 낫다. 그리고 로운 왕국 재정이 휘청이면, 마법사들을 빼돌릴 수 있겠어.’
여러 생각이 맴도는 눈동자는 이채를 머금고 반짝였다.
그 외에도 입을 다문 채 생각이 많아 보이는 노르란드와 브렉.
주변 눈치를 살피는 카로 왕국.
알베르는 그들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때, 정글의 리타나가 탐탁지 않다는 듯 팔걸이를 꽉 쥐었다가 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정글은-”
똑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문에 대기하고 있던 타샤가 문을 열었다.
“저하, 이곳에 계시다는, 음.”
로운 왕국 왕실 기사단장이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서다 멈칫했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알베르가 온화하게 물었고, 기사단장은 잠시 답을 망설였다. 알베르는 괜찮다는 듯 손짓했고 다른 이들도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누군가는 기사단장의 방문으로 인한 화제 전환을 반기는 듯했고, 누군가는 무거워질 뻔했던 분위기가 누그러들 기회가 와서 다행이라 여기는 듯했다.
각자 여러 이유로 기사단장을 바라보았고, 기사단장은 망설였지만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알베르가 알아보라 지시했던 일이었고, 당장 그 답을 알려달라고 했던 말이었기에.
기사단장은 알베르가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굳이 하라고 한 이유가 있겠다 생각하고 말했다.
“모든 병력을 파악하였고, 그에 따른 문서입니다. 병부를 통해 전달받은 것입니다.”
기사단장은 손에 들린 문서를 타샤에게 건네며 알베르 왕세자에게 물었다.
“문서를 보시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주시면, 바로 그에 따라 시행 사항을 전달하겠습니다.”
알베르는 타샤에게서 받아든 서류를 펼치지도 않고 손에 쥔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 로운 왕국의 모든 병력과 군사력은 각 지역의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인력을 제외하고는 퍼슬시에 집중된 상태였다.
더불어 영웅들도 이곳에 있었다.
그 영웅과 병력은 봉인되었다 해도 신을 막아선 자들이다.
이를 이 자리에 앉은 대표들이 깨달았을 때.
씨익.
알베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기사단장에게 명했다.
“일단, 아직 모두 퍼슬시에 대기시키도록.”
순간 회의실에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클로페 세카, 헤롤 코디앙은 웃었고 리타나와 브렉 왕국 대표는 이마를 짚으며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대부분 이들의 얼굴은 굳어져 갔다.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알베르의 서늘한 미소가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전쟁은.”
알베르는 온화한 어조로 물었다.
“전쟁은 끝난 것이 맞겠지요?”
* * *
그 시각, 서늘한 분위기를 하나도 모른 채 짐을 싸던 케일은 라온을 다시 만났다.
“인간아! 공작가로 가면 되나? 갑자기 왜 가나?”
전후 사정은 모르는 라온에게 케일은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대신 부탁했다.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일단 텔레포트 좀.”
“알았다, 인간아! 그 정도는 식은 수프 먹기다!”
라온은 날개를 파닥이며 마법을 펼치려 했다.
“응?”
그러다 멈칫하며 통통한 앞발로 방 한구석을 가리켰다.
“인간아! 저거는 안 챙기나?”
“아.”
케일은 내팽개쳐진 검은 책을, 죽음의 신 신물을 보고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가져가기는 해야지.”
“내가 주워다 준다!”
라온은 검은 책을 주워들었다.
“인간아, 여기-, 어!”
촤르르륵.
검은 책이 갑자기 펼쳐지며 페이지가 절로 움직였다.
“어, 어-!”
라온이 놀라는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던 케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왜 저래?’
신물이 왜 저러나 싶어 그는 손을 뻗었다.
“줘봐.”
혹시 모르니 라온에게서 신물을 떨어뜨려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인간아!”
그때, 라온이 검은 책을 쥔 두 앞발의 힘을 풀었다.
“응?”
케일은 검은 책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빠른 속도로 허공을 비행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를 향해서.
촤르르륵-
활짝 펼쳐진 채 날아오는 검은 책.
“케일 님!”
최한이 놀라서 다가오던 그 순간.
철썩!
케일은 활짝 펼쳐진 검은 책에 정통으로 얼굴이 부딪쳤다.
검은 책 양 페이지가 케일의 얼굴을 감싸 쥐었고, 아프지는 않았지만 뺨을 맞는 기분에 케일의 얼굴이 일그러진 그때.
-참, 대화하기 힘들구나. 얘기 좀 하자. 응?
죽음의 신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렸다.
“케일 님!”
“이, 인간아!”
“도련님.”
론이 뒤로 쓰러지는 케일을 부축했고, 케일은 서서히 눈이 감겼다.
‘…이거 기…기절…….’
책에 뺨 맞고 기절하는 케일이었다.
157장. 이제 쉰다?
“음.”
뺨에 서늘한 기운이 닿았다.
차갑기보다는 시원하다는 느낌을 주는 서늘함에 케일은 살짝 뒤척였다.
‘…뒤척여?’
그 순간, 케일은 제대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지니고 있던 마지막 기억.
분명 죽음의 신 신물인 검은 책에 양 뺨을 맞았다.
‘그리고 기절을 했지?’
기절을 했는데, 엎드려 있다?
“빌어먹을.”
꿈속이구만.
케일은 아직 자신은 기절 중이며 이곳은 꿈 혹은 무의식의 세계임을 깨달았다.
“정신이 드나 봐.”
탁.
케일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옆에 무언가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
케일은 짧은 탄식을 흘리며 눈을 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자신이 책상 유리에 뺨을 대고 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평범한 사무실 전경이었다. 케일이 김록수일 적 드라마에서 보았던 사무실의 풍경과 상당히 흡사했다.
회사에 있을 법한 캐비닛과 각종 사무기기. 다만 책상은 케일이 앉아있는 곳과 맞은편에 있는 상사의 자리로 보이는 조금 더 큰 책상 두 개뿐이었다.
‘밖은 안 보이는군.’
모든 창은 검은 커튼이 드리워져 밖이 보이지 않았다.
케일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머그컵 가득 담긴 액체에서 달달한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저건 코코아였다.
케일은 다시 시선을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열리며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 죽음의 신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말이 짧다?”
곧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 입장에서 나에게 좋게 말해줄 이유가 없지.”
케일은 물끄러미 제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이를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의외네.”
그의 눈동자가 죽음의 신 모습을 찬찬히 담았다.
“본인 모습 맞나?”
“뭐?”
죽음의 신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진심으로 의외라는 듯 바라보는 케일에게 사뭇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일할 때의 모습이기는 하지. 특별히 성스럽거나 그런 모습일 줄 알았나?”
“…아니.”
케일은 정말 놀란 듯 의외라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네?”
죽음의 신은 말문이 막힌 듯 케일을 쳐다봤다. 하지만 케일은 그런 눈빛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죽음의 신을 대놓고 관찰했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 지구를 떠올리게 만드는 니트에 면바지 차림으로, 키는 190cm를 넘어 보였다. 상당히 건장한 체격에 구릿빛 피부와 백발, 흑안을 지닌 외양은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혈색이 좋군.”
혈색이 좋았다.
죽음의 신은 그 안색이 아주 밝다 못해 어디서 보약이라도 달여 한 바구니 혼자서 다 처먹은 것 같아 보였다.
“…신수가 훤하네?”
묘하게 케일의 표정이 일그러져갈 때, 그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지다 못해 점점 살벌해져 죽음의 신에게로 향했을 때.
“그, 그런가? 하하-”
죽음의 신은 웃었다. 그 웃음에는 그간 케일이 들었던 찌질한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이를 무심히 지켜보던 케일은 툭 내뱉었다.
“진짜 목소리 맞나?”
그의 눈동자가 죽음의 신 목으로 향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목 부근에서 검은빛이 잘게 감돌았다.
“아, 그렇지.”
죽음의 신은 사무실에 있는 두 개의 책상 중 비어있는 책상으로 다가가 그 위에 올려져 있는 어떤 기계 장치에 손을 썼다.
달칵.
기계가 꺼지는 소리가 났고, 죽음의 신은 의자로 손을 뻗었다.
드르륵.
죽음의 신은 다른 책상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케일 근처에 앉았다.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 잠시 불렀어.”
“…이게 진짜 목소리군.”
조금은 높은 톤이었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무겁다는 느낌보다는 서늘하다는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이 공간과 비슷했다.
그때, 죽음의 신이 케일의 눈치를 보며 슬쩍 말했다.
“그, 어때? 성자 해볼 생각 없어?”
케일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있겠냐?”
“그, 그래.”
존댓말은 당연히 집어치운, 상당히 불경하게 건넨 말에 죽음의 신은 케일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은 제 할 말을 건넸다.
“그런데 지금껏 이런 곳으로 안 부르다가. 왜 오늘은 부른 것이지? 지금껏 본인 할 말만 하고 말았던 것 같은데.”
차분해서 살벌하게 느껴지는 말투에 죽음의 신은 어색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사실 이렇게 케일 헤니투스 너를 불러들이려면 힘을 많이 써야 하거든.”
그는 살짝 두 팔을 벌렸다.
“또 여기 내 업무 공간에, 신이 자신의 본모습을 누군가에게 드러낸다는 것은 내 힘을 떠나 몇 명의 동의가 필요하거든.”
“동의?”
케일은 신이 하는 일에 동의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다른 신을 말하는 건가?”
“역시 우리 케일은 똑똑해.”
“친근하게 말하지 말도록.”
“크흠. 큼.”
죽음의 신은 차분하지만 짜증이 서린 케일의 눈빛에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신을 포함해서 몇 명의 동의가 필요하지. 깐깐한 녀석들인데, 이번에는 다들 동의를 해줬어.”
신의 차분한 눈동자가 케일에게로 향했다.
“네가 세운 공이 있으니까.”
“봉인된 신?”
“그래. 네 덕에 봉인된 신을 제대로 봉인시킬 수 있었으니까.”
신의 눈동자는 티끌의 빛 하나 없는 완벽한 검은색이었다. 죽음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검은색을 들여다보던 케일이 담담하게 물었다.
“이제 봉인된 신은 세상에 못 나오는 건가?”
“그래. 덕분에.”
그제야 케일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툭툭. 그의 손이 의자 등받이를 두드렸다.
“대화라. 나도 한 번쯤은 대화가 해보고 싶기는 했지.”
케일의 또렷한 눈동자가 죽음의 신을 담았다.
“사냥꾼. 도대체 그것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이지? 그것들이 나, 아니, 내 주위와 연관이 있나?”
케일은 이왕 신을 만난 김에 묻고 싶었다.
“내 주위는… 다시 싸워야 하나?”
죽음의 신 눈동자에 또렷한 눈빛을 품고 있지만 조금은 지친 얼굴이 담겼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죽음의 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그건 앞으로 네-”
그때였다.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천장의 조명이 꺼져버렸다.
‘뭐야?’
케일의 미간이 일그러졌을 때, 사무실의 조명이 다시 켜졌다.
“아, 이거 난감하네.”
죽음의 신이 언제 활색이 돌았냐는 듯 파리해진 안색으로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순식간에 달라진 안색에 케일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이내 신은 무언가 결정을 내린 듯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케일 헤니투스. 나는 너를 돕고 싶다. 이건 진심이야. 너한테 내가 갚아야 할 것도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너 말고도 많아.”
하아.
짧은 한숨을 내쉬는 신의 모습에서는 짙은 피로감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내 그 눈동자에는 피로감 대신 더 격렬한 감정이 일어났다.
‘…음.’
케일의 눈에는 그것이 집착 혹은 광기로 보였다. 신은 케일의 기색을 알아챈 듯 기세를 낮추며 말했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사냥꾼을 싫어한다.”
콰직, 콰직.
기이한 소리와 함께 천장 조명이 점멸을 반복했다.
“으음.”
죽음의 신은 말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는 다시 케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를 이 일에 끌어들여서 네가 나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툭툭.
케일은 다시 팔걸이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솔직하네.”
피식.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의 신은 김록수를 이곳의 케일 헤니투스 몸에 빙의시켰다. 결과적으로 김록수는 케일로서 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신은 최한, 최정건도 이 세상으로 차원 이동시켰다.
‘좋은 놈은 아냐.’
하지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숨기면 숨겼지.
그 신이 점점 더 파리해지는 안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히 말해줄 수 있다.”
깜박깜박. 조명의 점멸이 점점 더 빨라졌다. 콰직. 콰직. 무언가를 집어삼키는 듯한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앞으로 너를 끌어들이려는 생각이 없다. 나는 너에게 무엇도 할 생각이 없어.”
비로소 케일은 죽음의 신이 무엇을 전해주려고 하는지 알아들었다.
“그쪽 말고 다른 무언가가 나나 내 주위에 엮여들거나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소리군.”
죽음의 신은 케일에게 경고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음.”
더 말을 이어가려던 그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주륵. 신의 입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케일은 이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신도 사는 게 참 빡빡하네. 뭐 이리 안 되는 게 많아? 세계수도 다 못 말해주던데. 신도 비슷하네?”
짜증이 가득 담긴 투덜거림이었다. 그는 신에게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대충 그 정도만 해.”
“음.”
죽음의 신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무실에 울려 퍼지던 소리와 점멸하던 전등의 모습이 모두 사라졌다.
평화로움이 가득한 사무실에서 케일은 입꼬리를 올렸다.
“나한테 줄 거 있지 않나?”
“아, 그래.”
죽음의 신은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입꼬리를 올리는 케일의 모습에 무언가 찜찜했지만, 일단 케일이 꺼낸 화제에 답을 했다.
“여의주를 대신할 만한 물건이 곧 너에게 배달될 거다.”
“그래?”
파문된 신관 케이지를 통해서 배달이 되는 건가?
케일은 어떻게 자신에게 물건이 전달될까 예사로 생각하며 대충 책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볼펜은 오랜만이군.”
“이곳은 김록수 세계와 오히려 비슷하지. 내가 이쪽을 선호하거든.”
“그래?”
달칵 달칵.
볼펜을 깔짝이던 케일은 대충 펼쳐진 노트에 볼펜을 휘갈기더니 지나가듯이 툭 내뱉듯 물었다.
“다들 잘 지내?”
죽음의 신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참 퉁명스러운 어조로 건넨 물음에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케일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온기가 맴돌았다.
“최정건도 잘 지내고.”
“그 인간 말고.”
“최정수도 잘 지낸다.”
케일은 말없이 볼펜으로 낙서하듯이 찍찍 그어댔다. 그는 죽음의 신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한 명.
아직 한 명이 더 남았으니까.
“자, 고생한 너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보상이다.”
뭐?
케일의 시선이 죽음의 신에게로 향했다.
“…지금 이 만남과 여의주를 대신할 물건이 보상 아니었나?”
“여의주를 대신할 물건은 여의주가 부서졌으니 주어야 할 당연한 보상이고. 이 만남은.”
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를 만나는 게 너에게 무슨 보상이겠나? 제대로 된 정보도 얻지 못했는데.”
짝.
그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지금부터 전하는 말은 동의를 얻은 것이니 마음 놓고 들어도 돼. 어쩌면 너에게 보상이자 거, 억, 크흠!”
신은 다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버벅이다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헛기침을 해댔다.
‘혼자 뭐 하는 거야?’
케일은 겉모습만 신 같지 그 외에는 멀쩡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죽음의 신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도 죽음의 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빡빡하군.”
그러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이수혁은 네 세계로 환생했다.”
뭐?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뭘 그리 얼빠진 얼굴이야?”
신은 케일의 표정을 보며 얕은 웃음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이수혁은 시련자, 그러니까 단생자가 아니잖아. 그러니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단생자와 불멸자를 제외한 영혼은 죽으면 이전 생의 기억을 잃고 새로운 몸에 태어나 새로운 생의 기억을 쌓아간다.
그러나 기억을 잃지 않고 생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존재는 환생자라고 하여 하얀 별 같은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케일은 지금은 그런 정보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사는 세상에… 팀장이 태어난다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온갖 생각들이 케일의 머릿속에 엉켜 들었다.
이수혁은 부모님을 제외하고 가족으로 생각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다고?
“그리고 이수혁은 이번 봉인된 신 일에 있어 공로를 쌓았다.”
“…공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케일이 되물었고, 신은 평이하게 답했다.
“그래. 이수혁은 그간 내 일을 도왔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어렸다.
“이수혁은 너에게 포용을 주지 않았나. 그는 자신의 힘을 너에게 주었다. 그리고 너는 그 힘으로 봉인된 신을 봉인할 수 있었지. 그것이 이수혁의 가장 큰 공로다.”
케일의 입이 살짝 열렸지만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언젠가 그는 기절했을 때 꿈속에서 이수혁을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죽음의 신이 죽을 운명도 아닌데 죽었다고. 그래서 불쌍했는지 각자 한 가지 기회를 주었어.’
죽음의 신은 이수혁에게 케일에게 힘을 줄 기회를 주었고, 케일은 이수혁에게 포용을 받았다.
“…그 보상이 내가 있는 세계에 환생하는 거고?”
“아니. 원래 그는 이번에 거기서 태어날 운명이었어. 보상은 다른 것이다.”
신은 케일의 무심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꽉 쥔 주먹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는 공로에 대한 대가로 기억을 가지고 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케일은 탄성을 흘렸다. 그와 죽음의 신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씨익.
죽음의 신이 미소를 그렸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장난기 혹은 짓궂음이 담긴 미소였다.
“이수혁을 찾아라. 보고 싶잖아?”
하지만 그 눈동자는 진지했다.
그 순간 케일은 알아챘다.
“하!”
그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죽음의 신은 조금 전에 말했다.
‘이수혁은 그간 내 일을 도왔으니까’
기억을 가진 이수혁 팀장은 죽음의 신 일을 도왔다. 이는 한 가지 뜻이 숨겨져 있었다.
‘사냥꾼을 포함한 죽음의 신이 한 일에 대한 정보를 이수혁 팀장도 가지고 있다는 소리군.’
묘한 표정을 짓는 케일에게 죽음의 신은 가볍게 말했다.
“노트는, 지워라.”
케일은 펼쳐진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사무실이 이상해지고 죽음의 신이 액체를 토할 때, 케일은 어떠한 영향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바탕으로 케일은 볼펜으로 낙서하듯이 죽음의 신에게 물어볼 질문들을 남겼다.
지금 못 듣더라도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들을 수 있길 바라며.
“…빠르네.”
하지만 한 발 앞선 자들이 있었다. 케일은 볼펜으로 노트에 새겨진 글자를 지우며 망설이다 물었다.
“…팀장은 원한 건가?”
“당연하지. 이수혁이 먼저 그렇게 하겠다고, 보상으로 이를 말했다.”
신은 말없이 노트에 줄만 그어대는 케일을 보며 은근히 물었다.
“자, 내 보상이 마음에 드나?”
케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응?”
“공로는 나와 팀장만 있는 게 아니잖아?”
그 순간 죽음의 신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그만할까?”
“음?”
“시간이 다 되었네!”
“뭐?”
케일이 황당하다는 듯 죽음의 신을 쳐다보았고, 신은 일어선 채로 케일을 내려다보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박수를 쳤다.
짝!
그 소리와 함께 케일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이…런-”
그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세상이 다시 어둠에 잠기며 그는 정신을 잃어갔다.
케일은 황당했다. 움직이지 않는 입을 움직이려 애썼다.
‘아니, 적어도 팀장이 언제, 어디로 환생했는지는 들어야 할 거 아냐?’
아니, 그건 들어야지!
동서대륙에 환생했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찾냐고!
케일이 점점 분노에 휘감기며 정신을 잃어갈 때 그의 귓가로 한마디가 들려왔다.
“책.”
아.
케일은 탄성과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죽음의 신 신물은 검은 책이었다.
* * *
그 시각.
똑똑똑.
알베르 크로스만은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전쟁이 끝났냐고 묻던 알베르. 그로 인해 얼어붙었던 회의실은 알베르를 중심으로 다시금 여러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회의를 멈춘 노크.
달칵.
문이 열렸고, 문 앞에 있던 다크엘프 타샤는 문밖에서 건넨 소식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알베르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공식적인 자리라, 왕세자로서 알베르는 타샤에게 물었고, 타샤는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죽음의 신 신전에서 신관님이 오셨습니다.”
“신관?”
알베르가 의아해할 때, 문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이내 열린 문 안으로 한 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엄청난 흥분과 격렬한 감동으로 휩싸여 있었다.
“저하를! 어서 저하를 뵈어야 하네! 케일 헤니투스 사령관께서는 어디 계신가!”
알베르의 시선이 타샤에게로 향했다. 타샤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로운 수도의 죽음의 신 신전에 새로운 신물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알베르의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져갈 때.
“또한 신탁이 함께 내려왔는데.”
타샤는 신속하고 낮게 속삭였다.
“신물의 주인은, 만질 수 있는 자는 심장이 찔려도 살아난 자라고.”
돌겠네.
알베르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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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까요?”
타샤의 물음에 알베르는 얼굴을 쓸어내리던 두 손으로 팔걸이를 붙잡았다.
그때, 눈치를 살피고 있던 카로 왕국 재상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굉장히 급한 일인 것 같습니다만.”
건수를 잡아챈 듯한 눈빛이었다.
“혹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닙니까? 다른 이도 아닌 케일 헤니투스 사령관을 찾는다니, 걱정이 갑자기 드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하, 저희도 동맹으로서 무슨 일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듣고 싶군요.”
아스코산 외무대신과 동대륙 왕국 대표 한 명이 각기 한 발을 걸쳤다.
알베르는 타샤와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할까?’
이모의 눈빛이 건네는 물음에 알베르는 천천히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숨기는 건.’
동서대륙 각국의 대표 혹은 실무진이 자리한 이곳.
‘불가능하겠군.’
죽음의 신 교단에 신물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각 왕국들의 정보력을 떠나 죽음의 신 교단에서 입을 다물지 않을 것이다.
‘건수를 놓치지 않을 테니까.’
지금껏 공식적으로 죽음의 신 교단에 신물이 내려온 기록은 없다.
현재 죽음의 신 교단은 신물은커녕 성자, 성녀도 없었다.
죽음.
그 절대적인 것을 관장하는 신이건만, 죽음의 신 교단은 동서대륙 모두에서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신전은 대륙의 꽤 여러 곳에 있었지만, 그 성세는 그저 그런 편이었다.
그런 곳에서 신이 신물을 내렸다.
‘기를 쓰고 이를 알리겠지.’
특히 모고르 제국을 중심으로 서대륙에서 득세를 하던 태양신 교단이 힘을 잃고 다시 재기를 노리는 상태다. 아무리 성자 잭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재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현재 여러 교단 수뇌부들은 태양신 교단의 자리를 차지하려 혈안일 터.
‘…어쩔 수 없겠군.’
죽음의 신 신물.
그리고 신탁 내용.
마지막으로 케일 헤니투스.
이 세 가지는 결국 소문이 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들어오라고 하게.”
그는 타샤에게 지시하며 회의실 안에 자리한 이들에게 말했다.
“저도 정확하게 모르니, 함께 들으면 되겠군요. 다들 알기는 아셔야 할 정보 같습니다.”
정글 리타나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알기는 알아야 할 것 같은 정보라고?’
그녀가 아는 알베르는 이렇게 불확실한 어투는 사용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또 다른 위험한 일이 벌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알베르의 얼굴에는 다급함보다는-
‘…짜증?’
미묘한 짜증이 서려 있었다.
이것도 리타나가 알베르를 꽤 자주 보았기에 겨우 알아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벌컥!
“저하!”
그때, 타샤가 문을 열자마자 신관 한 명이 헐레벌떡 들어섰다.
“음?”
클로페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급하게 들어서는 신관 뒤로 몇몇의 평신관이 따르고 있었다.
‘…주교?’
유독 품이 넓은 옷자락을 흩날리며 들어선 신관은 주교를 상징하는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현재 퍼슬시에 신관들도 치료사로서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고위 신관은 있었지만 그중에 주교급은 없었다.
딱 봐도 텔레포트를 통해 급하게 퍼슬시로 온 것으로 보였다.
‘이상하군. 텔레포트를 해올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어느 누구도 저 신관 무리를 막지 않았다고? 무슨 소식이길래?’
의아한 것은 클로페뿐만이 아니었다.
아스코산 외무대신은 예상 밖 인물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신관께서 갑자기 왜-”
“저하!”
하지만 주교로 보이는 신관은 아스코산 대표를 깡그리 무시했다. 대신 알베르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죽음의 신을 모시고 있는 이입니다.”
“주교인가?”
“그렇습니다. 로운 왕국 수도에서 주교로 지내고 있습니다.”
로운 왕국 수도 휘스시에서 주교로 있다는 말은 로운 왕국 죽음의 신 교단을 총괄하는 위치라고 보면 되었다.
“저하. 들으셨습니까?”
숙였던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든 주교의 눈빛이 번뜩였다.
“…음.”
알베르는 대답 대신 침음을 삼켰다.
‘…눈빛이 맛이 갔는데.’
주교의 눈빛에는 광기와 탐욕이 어려 있었다.
‘하긴 교황이 있는 신전도 아니고 주교가 있는 신전에 신물이 내려왔으니 눈이 뒤집힐 만하지.’
잘만 하면 본인이 다음 대 교황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저하! 제가 이리 온 것은 반드시 전해야 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관은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이 흐트러지는 것도 모른 채 절절히 외쳤다.
“죽음의 신께서 로운 왕국 수도 죽음의 신 신전으로 신물을 내리셨습니다!”
잠시 회의실에 정적이 내렸다.
“그게 무슨 소리요?”
“신물이라고? 죽음의 신 교단에 신물이라니! 그런-”
하지만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조용히 있던 브렉이나 위퍼 왕국까지 한두 마디씩 말을 내뱉으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신관의 입가에 잠시 미소가 머물렀다.
찰나였지만 알베르는 이를 분명히 보았다. 신관은 그 날카로운 시선은 꿈에도 모른 채 어느새 비장한 얼굴로 절절하게 외쳤다.
“그리고 함께 신탁도 내리셨습니다! 저는 죽음의 신을 모시는 종으로서, 이 신탁을 지키지 않으면 아니 되었사옵니다!”
“당신이, 아니, 주교께서 신탁을 받으신 겁니까?”
누군가 놀라서 주교를 바라보았다.
“…크흠, 제가 들은 것은 아니고, 신물과 함께 내려진 양피지에 적혀 있었습니다.”
주교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알베르는 손을 들어 주교에게 명했다.
“자세히 말해보게.”
“알겠습니다.”
주교는 꼿꼿이 선 채로 눈을 감았다. 아련한, 벅차오르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아련한 표정이었다.
“일주일 중 오늘. 단체 기도일이 있는 날입니다. 조금 전 우리는 모두 다 함께 모여 죽음의 신께,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아스코산 대표가 끼어들자, 주교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흔들림 없이 답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 동서대륙의 안녕을 빌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요?”
“크흠! 그래서!”
주교는 다시금 끼어든 아스코산 대표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갑자기 신전에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신전 중앙에 있던 제단에 화사한 빛이 내려앉더니!”
“그러더니?”
“크흠.”
아스코산 대표를 무시하며 주교는 말을 이었다.
“그곳에 신물과 함께 신탁이 적힌 양피지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무슨 신물입니까?”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카로 왕국 재상이 물음을 던졌을 때, 주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의미인가?”
알베르가 묻자, 주교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신물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제단 위의 신물을 만지려고 하면 전류가 일더군요. 함부로 만졌다가는 위험한 상황에 놓일 것 같았습니다.”
허어.
브렉 왕국 대표가 탄식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신물을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무슨 용도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두어야만 하는 건가?”
탄식과 혼잣말이 뒤섞인 물음이 흘러나왔을 때, 주교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탁에 신물의 주인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숭고했으며 깨끗했다.
신관들이 알베르를 바라봤다.
주교는 말했다.
“신물의 주인은 오로지 심장이 찔려도 되살아난 자. 대륙을 구한 그자만이 이 물건의 주인이 되리라.”
아.
누군가 탄식을 흘렸다.
심장이 찔려도 되살아난 자.
대륙을 구한 자.
단 한 명이다.
그 사람은.
정글의 리타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새삼 케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피부에 와닿았다.
그때, 클로페 세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신께서도 알아주고, 그에 따라 신물을 내렸건만 어찌하여 함께하겠다고 한 자들이 이리-”
탄식이 섞인 말에 리타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며 클로페를 바라봤다. 그리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주먹을 꽉 쥔 채. 그 주먹을 덜덜 떨며 클로페 세카는 테이블을 둘러싼 이들을 섬뜩한 눈길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주교를 중심으로 신관들이 동시에 알베르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저하. 케일 헤니투스 사령관님을 뵈어야만 합니다.”
회의실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알베르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 시선들을 모른 체하며 입을 열었다.
“현재 케일 사령관은 누구를 만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네.”
주교는 알고 있었다는 듯 비장한 표정이었다.
이미 그는 케일이 있던 별관에 먼저 가려다가 그곳을 지키고 있는 왕궁 기사단에 의해 발길을 돌려 알베르를 찾아온 상태였다.
“저하. 아주 잠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하, 죽음의 신께서 아니, 근 몇백여 년 간 어떠한 신께서도 신물을 내린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교는 간절하게 청했다.
“그만큼 귀한 신물입니다. 그 신물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케일 헤니투스 사령관 님뿐이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뒤이어 신관들이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알베르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케일 사령관. 그의 의견에 따라야 할 일이지.”
내 소관이 아니다. 내가 케일 사령관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러니 나에게 청하지 마라.
알베르는 그렇게 선을 긋고는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군.”
“말씀하십시오.”
“신물은 케일 사령관이 죽음의 신 신전으로 가면 바로 받을 수 있는 건가?”
혹시 교단에서 신물을 케일에게 주지 않고 엉뚱한 짓을 벌일까 싶어, 혹은 신물을 빌미로 어떤 거래를 할까 싶어 알베르는 넌지시 물었다.
물론 케일이 교단에 끌려 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교단과 케일이 한 판 붙는 상황이 나올까 싶어 미리 대비하자고 물은 것이다.
주교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내어드려야지요. 신께서 내리신 물건이 유일한 주인에게 가는 일 아니옵니까. 저희에게는 그저 어떤 신물인지, 그것만 알 수 있으면 됩니다.”
알베르는 그제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흠. 케일이 번거로운 일은 없겠군.’
알베르가 그리 생각할 때.
“로운, 나아가 대륙의 모든 이들이 그 광경을 보며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음?”
갑자기 들려온 주교의 열띤 음성에 알베르는 그를 바라봤다. 주교는 무엇을 상상하는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신물이 주인을 찾아가는, 그 영광스러운 장면, 모든 이들이 보며 기뻐하고 축하해야지요.”
주교는 상상했다.
자신이 있는 신전에서 그 영광이 펼쳐지고 자신은 덩달아 교황 자리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몇 달간, 아니지요. 요 몇 년 간 서대륙인들은 여러 전쟁으로 힘들었습니다. 늘 불안에 시달렸지요. 동대륙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주교는 회의실에 자리한 모든 수뇌부들을 향해 강력하게 말했다.
“그런 이들에게 그 광경은 평화의 시작을 알리는 시발점이 될 겁니다.”
그는 권력을 향한 강인한 열정을 숭고한 뜻을 위한 비장함으로 드러내며 열렬히 표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제가, 교단이 사활을 걸고 사령관님을 최고의 귀빈으로 모시며 이제 평화가 왔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안 되는데.
살짝 당황한 알베르는 고개를 돌렸다. 타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어떡하면 좋냐는 표정으로 알베르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신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절대 안 된다고.
그녀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는 알베르도 동감이었다. 저런 식으로 나오면 케일 헤니투스는 분명 몰래 신전에 잠입하여 신물과 신탁을 털어버릴 것이다.
“일단 그 부분은 케일 사령관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그의 뜻에-”
그때였다.
쿠웅-!
커다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알베르의 시선이 곧장 창밖으로 향했다.
회의실에 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신전이-!”
허공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봉인된 신의 신전.
여기저기 부서졌지만 여전히 그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신전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으음.”
죽음의 신과 만났다가 도로 정신을 잃은 케일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케일 님!”
“인간아!”
론, 최한, 라온이 깨어난 케일을 향해 기쁨을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을 때, 케일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라, 라온! 너-”
“응?”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해맑게 말했다.
“인간아! 인간 뺨 때려서 기절시킨 이 책 신물 아니냐? 내가 죽음의 신 가만 안 둔다!”
허공에 둥둥 뜬 불덩이를 향해 라온은 검은 책을 집어던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케일은 단호하고 신속하게 말했다.
“안 돼. 그거 귀한 거야.”
“응? 신물이 비싸나?”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켜보던 론과 최한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보기 드문 케일의 온화한 미소였다.
“어. 나한테는 아주 비싼 거야.”
“몰랐다, 인간아! 나는 그냥 죽음의 신 겁주려고 했다!”
“그건 잘했어.”
케일은 놀란 라온에게 칭찬을 건네고는 검은 책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펼쳤다.
죽음의 신은 이 책을 보라고, 이곳에 적혀 있을 것이라고 분명 힌트를 케일에게 주었다.
사락. 사락.
책장을 넘기던 손이 한 곳에서 멈췄다.
“찾았다.”
하얀 별이 세웠던 왕국으로, 한 때 등급 외 괴물 소환식으로 엉망이 된 텅 빈 도시였다.
하지만 봉인된 신 신전에 케일 일행이 갇힌 동안 엔더블 왕국은 뱀파이어 공작을 중심으로 하여 조금씩 복구되었고 아직까지는 대륙에서 배척받는 종족들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살아가는 중이었다.
이제는 왕국이라는 호칭도 없는, 그저 엔더블이라고만 칭해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곳.
싱크홀 아래의 땅.
검은 페이지에 한글로 적힌 엔더블. 그곳에 이수혁이 환생했다.
-케일, 케일!
그 순간이었다.
짱돌이 다급하게 케일을 불렀다.
쿠웅-
-봉인된 신 신전, 아니, 이제 네 신전 말이다!
짱돌의 목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케일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공에 뜬 신전이 흔들리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그의 몸속에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신전의 소리 없는 비명이, 아픔이 그에게 느껴졌다.
-저거 얼른 네가 땅에 내려야 할 것 같은데?
음.
케일은 질끈 눈을 감았다.
엔더블에 가려고 했건만 할 일이 참 많았다.
“하아.”
케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아! 저거 어떻게 해야 하나?”
라온이 하늘에 뜬 채로 흔들리고 있는 신전을 가리키며 케일을 쳐다봤다.
론과 최한도 말을 얹지는 않았지만, 눈빛으로 케일의 뜻을 묻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은 창밖, 너무나도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걸 부술 수도 없고.”
-부수다니! 저게 얼만데!
짱돌이 다급하게 외친 말에 파괴하는 불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물욕 없이 주워 모으기만 하던 놈이 어쩌다 저렇게 물욕이 늘었지…….
-요즘 너보다 더 심해 보여.
-아, 그건 조금 자존심 상하는데.
바람의 소리가 맞장구쳤고 파괴하는 불 짠돌이가 짜증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과 짱돌은 저 대화에 눈곱만큼도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밖에 나가봐야 할 것 같다.”
“인간아, 안 된다! 네 몸 상태로 또 힘을 쓰면 안 된다! 혈색이 좋아 보이지만 믿을 수 없으니 쉬어라!”
“케일 님.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라온과 최한이 다급하게 말을 건네 왔고 케일은 조금은 불퉁한 얼굴로 답했다.
“저거 내 건데. 말 안 했던가?”
최한이 멈칫했고, 안 그래도 동글동글하던 라온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케일은 저 멀리 허공에 뜬 신전의 상태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짱돌도 마찬가지였다.
-잔존하던 신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이제 저 신전을 허공에 지탱할 힘은 너의 능력뿐이다. 다만 그러려면 네가 바위의 힘을 끊임없이 제공해야 하지.
“굳이 그럴 이유는 없지.”
딱히 쓸 데도 없는 신전이었다.
‘부수더라도 허공보다는 땅에서 부수는 편이 나을 것 같군.’
신전을 조각내어 그 자재를 다른 곳에 사용하여도 충분할 것이다.
‘그 문제는 왕세자 저하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고.’
귀찮은 뒤처리에 신경 쓰고픈 마음이 조금도 없는 케일이었다.
“최한.”
“…네.”
최한은 무언가를 다짐한 듯한 표정으로, 침실 문고리를 잡았다.
“뭐해?”
“네?”
“창문 좀 열어.”
“…창문이요?”
문이 아니라?
“어. 창문.”
케일은 대충 외투를 껴입고는 라온에게 부탁했다.
“나 저기 좀 데려다주라.”
케일의 손이 가리킨 곳은 퍼슬 시청 건물 지붕이었다.
* * *
“일단 다들 피해!”
“뒤로 물러난다!”
퍼슬시 광장에서 복구 작업에 임하던 이들은 황급히 광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웅—우우웅—
하늘 위 신전이 진동하는 소리가 아래에까지 들려왔다.
“대장님! 상부에서 따로 연락 온 것이 없습니까?”
“하. 잠시만 있어 봐. 일단 인력은 다 뒤로 물렸나?”
“네! 마법사 쪽에도 연락해주었습니다!”
광장 쪽 복구 작업 책임자는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동이 심해진다.’
신전의 진동이 더 심해져서 이제는 육안으로도 꽤 많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 시청 쪽으로 전령을 보내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신전이 떨어지거나 폭발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퍼슬시 하늘에는 하얀 신전과 더불어 검은 성이 자리해 있었다.
두 건축물 모두 그 모습과 위용이 엄청나다 보니 그중 하나가 폭발하는 가정만 하여도, 책임자는 뒷골이 서늘해져 왔다.
“무슨 일이야?”
“신전에 무슨 일이- 또 뭔 일 생기는 거 아냐?”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벌컥.
벌컥.
곳곳의 창문이 열리며 바깥 상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특히 시청을 비롯한 행정 업무와 관련된 건물에서는 혼란이 커져갔다.
“이런… 겨우 복구 속도가 좀 붙나 싶었더니.”
“큰일이군. 또 뭔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
“그러게 말이야. 퍼슬시 복구가 여기서 더 늦어버리면, 퍼슬시 사람들은 어디 갈 곳이 없어. 타 영지에서 맡아주는 것도 한곈데!”
아직 퍼슬시 시민들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행정을 비롯한 실무직 관리들은 돌아온 상태였다.
그들은 엉망이 된 퍼슬시를 보며 망연자실했지만, 그래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걱정 말게. 왕세자 저하께서 복구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제공한다고 하셨네. 세금 감면을 비롯한 다른 부가적인 지원도 있을 거야.’
‘…정말입니까? 정말 가능한 겁니까?’
왕세자 측근이 전해온 말을 실무 관리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번 하얀 전투로 로운 왕국은 엄청난 국력을 퍼슬시로 집중시켰고 그에 따른 소모가 컸으니까.
‘그래. 걱정 말게. 왕세자 저하께서 모두 받아오실 테니까.’
‘받아온다고요? 그게 무슨-’
‘크흠, 큼!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네. 아무튼 걱정 말고, 어서 퍼슬 시민들이 돌아올 수 있게 힘을 내주게.’
그런 대화를 한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봉인된 신의 신전이 흔들린다.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 대장님!”
그때, 퍼슬시 광장 복구 책임자는 직원의 목소리에 시선을 움직였다.
“음?”
퍼슬 시청 지붕 위.
“저, 저기 사령관님 아닙니까?”
책임자는 직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채, 눈을 비볐다.
시린 찬바람이 부는 겨울. 맑은 하늘과 달리 매서운 바람에 옷깃을 여며야 하는 이 날씨에 외투는 걸쳤지만 가벼운 옷차림의 남자가 시청 지붕 위에 꼿꼿이 서 있었다.
케일 헤니투스였다.
그 옆엔 최한 경도 함께였다.
케일 사령관은 천천히 허공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쿠웅!
신전이 진동을 멈췄다.
-시작한다.
무서운 짱돌의 목소리를 들으며 케일은 천천히 뻗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어, 어?”
“신전이-!”
신전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러나십시오!”
확성 마법이 걸린 목소리가 광장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집사복과 비슷한 옷차림의 나이 든 남성이 기사단장을 대동한 채 말하고 있었다.
“곧 신전이 내려설 예정이니, 물러나십시오. 서둘러서 물러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그 남자는 론이었다.
그는 기사단장과 함께 광장 복구 책임자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별일 없이, 신전이 광장에 내려설 것이니 사람들 대피에 신경 써주십시오.”
“아, 네, 네!”
책임자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에게 손짓했고, 사람들은 한결 천천히 광장에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를 확인한 책임자는 힐끗 하늘을 바라봤다.
부서졌지만 여전히 성스러워 보이는 신전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이건.”
그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건 사령관께서 지금 조종하시는 겁니까?”
론은 부드러운 미소를 은은하게 입가에 매단 채 신전을 바라봤다.
‘…기절하고 깨어서 바로 힘을 쓰다니.’
미소와 달리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아갈 때, 책임자가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드시지는 않을까요?”
“…네?”
론이 그를 바라보았을 때, 책임자는 걱정스럽게 저 멀리 케일을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 몸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매번 죄송하고 고맙고 참 그렇네요. 그, 사령관님의 시종이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감사하다고, 꼭 건강 회복하시길 기도하고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책임자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여긴 제 고향이거든요.”
그의 눈동자는 케일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무너진 건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이곳에 돌아올 수 있어서 얼마나 안도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하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론의 눈동자에 또렷한 빛이 머물며 그의 입가에 은은하던 미소가 짙어졌다.
책임자는 잠시 흠칫 어깨를 떨었다.
시종의 온화하던 미소가 갑자기 삐딱해 보였다. 론의 진짜 미소를 모르는 책임자는 자신이 순간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깜박였다.
“그러셨군요.”
론은 움찔하는 책임자의 모습에 진짜 미소 대신 인자한 척 미소를 지었다.
‘아, 착각이네.’
책임자는 어느새 온화한 모습으로 입을 여는 론을 볼 수 있었다.
“꼭 도련님께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론은 간단히 인사하고는 광장 중심에 내려서는 신전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위로 슬그머니 씰룩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우리 강아지 도련님은 쉬는 걸 까먹었나 보군.’
그렇다면 가르쳐주어야지.
론의 눈동자에 한기가 맴돌았을 때.
“오, 오오!”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쿠웅—!
사람들이 모두 피하고, 모든 것이 부서져 황폐해진 광장.
그곳에 신전이 내려섰다.
일부 부서졌지만 여전히 성스러운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는 신전은 더 이상 흔들리지도, 진동하지도 않은 채 그 위엄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 저기!”
그때, 한 사람이 하늘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 그리고 시청 지붕 위.
두 곳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나뉘었다.
-인간아! 준비되었다!
케일은 신전과 함께 움직였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른 손과 함께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짝!
경쾌한 소리는 신호였다.
우우웅—-
검은 성을 검은빛이 감싸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은 성을 지탱하던 판때기에 마나로 된 텔레포트 진이 그려지며 빛을 뿜어내었다.
케일은 인사를 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인간아! 갔다 온다! 안녕! 좀 이따가 보자!
파아앗!
검은 성은 라온의 텔레포트 마법진에 반응하며 순식간에 하늘에서 자취를 감췄다.
“와…….”
“정말이지…….”
하늘에 자리한 두 건축물이 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본 모든 이들이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케일도 감탄을 했다.
“이야.”
그는 퍼슬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급한 건 처리한 건가?”
그때, 그의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성은 어둠의 숲으로 돌려보낸 건가?”
케일은 지붕 위로 올라서는 로브를 쓴 자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하.”
휠체어를 타고 있어야 할 알베르. 그는 로브 차림으로 케일에게 다가갔다.
“론에게 소식을 듣지 못했으면 곤란할 뻔했어.”
론이 기사단장을 대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알베르를 찾아가 신전과 검은 성 이동에 대해 미리 언질을 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알베르는 잠시 회의실을 빠져나와 이렇게 모습을 가리고 케일을 찾아올 수 있었다.
알베르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다들 몸은 괜찮은 건가?”
“네.”
다행히 드래곤들은 멀쩡했다. 에르하벤은 회춘까지 하지 않았던가.
“모두 이동한 건가?”
“아뇨. 몇은 저와 함께 움직일 것이라 이곳에 남았습니다.”
온과 홍, 로잘린은 검은 성에서 나와 현재 케일의 침실로 가고 있으리라. 라온도 검은 성을 옮겨두고 다른 드래곤들에게 인사한 후 케일에게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알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귓속말로 얼핏 몇 가지만 들은 것이라 정확하게는 잘 모르는데. 론에게 듣기로는, 그, 음.”
로브 속 알베르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였다.
“그, 크흠.”
“그냥 편하게 말하세요.”
“크흠. 큼. 그 공작가에 네 방이 털렸다고?”
“하아.”
케일은 한숨을 내쉬었고 최한은 검 손잡이를 만져댔다.
알베르는 웃음을 참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그럼 너도 이제 어둠의 숲으로 바로 가는 건가?”
당연히 가겠지.
누군지 몰라도 케일의 방을 턴 녀석은 인생 살기 힘들어질 것이다.
알베르는 케일이 곧바로 어둠의 숲이나 헤니투스 공작가로 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뇨.”
“그래, 가야- 응?”
“저 엔더블 갈 겁니다.”
“……?”
어디?
엔더블?
거긴 지금 난장판인데?
퍼슬시보다 더 힘들고 심각한 상태인 엔더블.
뱀파이어 공작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알베르의 얼굴이 굳어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어 버리고야 말았다.
“그냥 쉬지, 뭔 짓을 하려고-”
케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저하. 저 쉴 겁니다.”
“네가? 언제?”
다시 한번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버리고야 만 왕세자였다.
“그건-”
순간 잠시 말문이 막혀버린 케일이었다.
최한이 그런 케일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검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휴.”
알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은 신물을 어떻게 받게 될지도 모를 텐데.’
죽음의 신 교단에서 사활을 걸고 신물 증정식을 거하게 할 것 같은데.
거기다가 어찌 되었든 연회 및 축제, 훈장 수여식도 하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또 거기다가 데르트 공작이 케일을 요양 명목으로 영지에 머무르게 할 생각 같던데.
‘이걸 다 모르고, 엔더블에 간다고?’
알베르는 도통 어디서부터 케일에게 현실을 말해주어야 하나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케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수혁의 환생을 확인하고 난 후, 사냥꾼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나서.
“어쨌든-”
어쨌든 쉬고 싶었다.
케일은 그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냐아아옹-!
다급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 순간, 케일은 지붕 위로 올라서는 붉은 어린 고양이를 볼 수 있었다.
홍이었다.
“음.”
불길하다.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케일의 발밑에서부터 차올랐다.
다다닥.
빠르게 다가온 홍이 케일의 다리를 앞발로 붙잡으며 말했다.
“그, 빌로스가 왔는데!”
“…뭐?”
누가 왔다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서 왔는데! 엄청난 거지꼴로 왔는데!”
홍은 다급했다.
“도, 독에 중독된 것 같은데! 심각한데! 진짜, 엄청 심각한데!”
플린 상단의 서자.
유력한 차기 상단주에서 몰락하여 현재 도망자 신세인 자.
빌로스 플린.
케일과 연이 닿은 자였다.
“가자.”
케일은 일단 황급히 침실로 향했다.
빠르게 이동한 덕에 그들은 금세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벌컥!
침실 문이 열렸고, 그는 안으로 들어서며 제 침대에 누운 이를 볼 수 있었다.
“…공자님.”
무언가에 중독되었는지 몸이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빌로스. 찢기고 더러워진 옷과 더불어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빌로스의 눈동자가 케일에게로 향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케일에게로 뻗었다. 그러나 케일을 붙잡지 못한 채 허공에서 멈췄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환각을 보는 듯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돼지 저금통을 닮은 얼굴의 빌로스.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던, 깔끔하고 당당하던 상인은 이 자리에 없었다. 살이 홀쭉 빠지고 볼품없는 모습의 도망자만이 있을 뿐.
케일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찻집에 찾아가서 만났던 빌로스의 첫 모습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공…자님…….”
빌로스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고 언제라도 꺼질 듯 연약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타오르고 있었다.
케일은 빌로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상단을… 플린 가문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제발……!”
케일은 빌로스의 눈을 보며 허공에 맴도는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리고 물었다.
“사냥꾼인가?”
빌로스의 눈동자가 커진 순간, 케일의 얼굴이 서늘하게 가라앉으며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어쩔 수 없네.”
쉬는 건 잠시 미뤄야겠다.
-1부 ‘영웅의 탄생’ 완.
-2부 ‘사냥의 법칙’으로 이어집니다-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드디어… 드디어… 200화, 300화, 4, 5, 6, 700화를 넘어 800화 전에…! 드디어…! 완, 아니, 1부 영웅의 탄생 완결을 낸 유려한이 인사 올립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 하…하아…..
마냥 시원할 줄 알았는데, 이 시원 섭섭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2부가 남아있음에 슬그머니 입꼬리가 씰룩이며 위로 올라갑니다.
2018년부터 시작한 글이어서 그런지, 이 글과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나이도 앞자리가 바뀌고, 몸무게도… 크윽. 아무튼, 참 추억도 수많은 감정도 함께 쌓아온 고마운 글입니다.
여러 가지 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남기고 싶지만, 아예 완결도 아닌, 1부 완결이고 2부에서 뵐 것이라 그때를 위해 짧게 남깁니다. 하하하!
무엇보다도 와 함께하면서 또 함께했던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후기를 쓰는 순간,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독자님들이 제 머릿속에 아른거린다고 하면 믿으실까요?
그런데, 정말 독자님들이 남겨주신 감상이나 응원의 말씀들이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올라 조금 벅차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1.
2부 ‘사냥의 법칙’은 2022년 7월 1일 시작됩니다.
케일, 여러 동료들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2.
다음 달 12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매달 말일 외전이 연재됩니다.
총 7가지의 외전이며, 한 외전 당 3-5편 정도의 분량으로.
12월 31일 연재될 외전은
입니다.
외전은 그간 메인 에피소드에 집중하느라 설정은 있지만 쓰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주로 다루고자 합니다.
그간 궁금하셨던 부분들도 외전 에피소드를 통해 해소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
단행본은… 올해가… 목표였는데…
내년 초가 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1부 완결이 늦어져서, 1부 완결에 초점을 두고 연재에 신경 쓰다 보니 일정이 밀리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소복이 눈 내리는 겨울을 지나, 화사한 꽃 피는 봄을 보낸 후
싱그러운 초록으로 뒤덮일 여름에 뵙겠습니다.
물론 외전으로 중간중간 안부 인사 남기겠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유려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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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신입사원 김록수 1
이곳은 통칭 ‘회사’라고 불렸다.
물론 정확한 이름은 ‘재난 방지 및 문명 수호’라는 거창한 명칭이 존재했으나, 회사 내외부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재난은 끊이지 않았으며, 문명을 수호한다고 하기에는 그렇게까지 거시적인 목표를 지니고 일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길드, 정부와는 다른 제3의 단체로서 그들은 둘 사이를 중재하는 것은 물론 몬스터 침입 해결, 길드 감찰, 정부 단체 감사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도맡아 해왔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 올해의 신입사원들이 모두 모이는 오리엔테이션이 열린다.
* * *
“흐음. 쟤들이 이번에 우리 필드 쪽 애들인가?”
“네. 이사님.”
이사라고 불린 남자는 부하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두 부류로 나뉘어 앉아있는 신입사원들을 바라봤다.
꽤 큰 홀은 가운데 선이 존재했고 이를 중심으로 의자가 양편에 놓여있었다.
통칭 오른쪽은 몸, 왼쪽은 머리.
이렇게 불렸다.
‘몸’은 주로 실질적인 전투 및 몸을 쓰는 일을 주로 하는 부서들 신입사원이 모여 있었다.
“…저쪽이 1팀인가?”
“네.”
“쓰읍.”
이사는 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살짝 비웃음이 나올 듯 말 듯 한 모습이었다.
“서류 줘봐.”
“여기 있습니다.”
비서는 어떤 서류인지 설명을 듣지 않고도 두 장의 문서를 이사에게 건넸다.
피식. 이사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수혁 팀장 쪽 애들은 이번에는 영 이상한데?”
톡톡. 이사는 1팀에 배정된 두 신입사원의 이름을 눈에 담았다.
두 사람의 인사기록부와 면접 내용을 살핀 이사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이고, 이 팀장 고생하겠어.”
말과 달리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비서는 슬그머니 이사를 쳐다봤다가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웃긴 새끼. 지가 좋은 신입들은 다 지 따까리 놈들 밑에 있는 팀으로 돌리라고 했으면서. 이제 와 모르는 척이야. 욕심 많은 새끼.’
자신이 모시는 상관이었지만, 이사는 참으로 멍청했다.
‘그 이수혁을 견제한다고 견제가 되겠어?’
팀장 이수혁.
스스로 현장에 나가겠다며 팀장에 머물고 있지만, 이 회사 안팎의 모두가 안다.
이 회사의 상징은 이수혁이라는 것을.
‘…그래도 이번에는 팀장님이 힘드시겠는데.’
신입사원 인사기록부를 본 비서도 이수혁 팀에 가장 떨어지는 신입사원이 갔다는 점에는 일단 동의했다.
‘한 명은 무술과 검술이고, 다른 한 명은 후방 쪽이긴 한데.’
각 팀에는 2~4명 정도의 신입이 배정된다.
이는 임시 배정으로, 나중에 팀의 색깔이나 업무 해결 스타일에 따라 팀 이동을 시키거나 혹은 신청 가능했다.
‘일단 이 팀장님은 신입이 최소 4명은 배정되었어야 했는데.’
그들의 업무량으로 보면, 아직 어리숙한 신입의 손이라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소 배정 단위인 2명에, 그 2명도 영 아니었다.
‘검술 쪽은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당장 쓸 만한 특출난 능력이 있는 건 아냐.’
여기서 말하는 특출난 능력은 적 혹은 괴물에게 쓰일 강력한 공격기를 의미했다.
‘최정수 사원에게는, 그런 게 없다.’
그 탓에 그는 10등급 능력자로 판정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신체 능력이 우수하여 충분히 더 성장할 만한 잠재력과 미래가 보였다.
‘하… 다른 한 명은-’
문제는 다른 한 명 ‘김록수’였다.
‘팀을 잘못 선택한 것 같은데.’
‘몸’ 쪽에서 말하는 후방은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서포트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김록수 신입사원의 능력은 기록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쪽은 길드 감찰이나 정부 감사 쪽으로 가면 아주 인정받고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머리’ 쪽에서 원하는, 아주 간절히 바라는 인재상에 가까운 김록수는 ‘몸’ 쪽에서는 애매했다.
그래서 회사에서 몇 번이나 ‘머리’ 쪽 관련 부서를 권유했으나 김록수는 아주 단호하게 ‘몸’ 쪽 부서를 원했다.
“후후.”
생각에 잠겨있던 비서는 이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이 팀장 쪽 애송이들이 훈련을 잘 버텨낼지 모르겠어.”
“…신고식 말입니까?”
회사에는 대대로 오리엔테이션 날 펼쳐지는 신고식이 있었다.
“그래. 꼴등 하면 어쩌려나. 이 팀장 체면이 말이 아니겠어?”
멍청한 놈. 이 팀장님이 그런 등수에 연연하겠냐? 그러면 벌써 여기 회장직 달고 네놈 짤랐지?
비서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다들 안 다치고 무사히 신고식을 마치면 좋겠군요.”
“그건 그렇지.”
이사도 그 부분만큼은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이수혁 팀 쪽 신입 두 명을 보며 혀를 찼다.
“쯧. 하나는 촌스럽고, 하나는 정신이 빠져 보이는군.”
비서도 그 부분만큼은 동의했다.
그의 눈동자가 촌스럽게 큰 양복을 입은 이에게로 향했다.
최정수,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옷 소맷자락을 매만졌다.
“크흠.”
중고 매장에서 산 양복은 영 태가 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다른 동기들의 눈빛이 저와 자신의 옆에 있는 이에게로 향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좋은 눈빛은 아니었다.
‘그 이수혁’의 팀에 들어온 신입을 경계하는 혹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으니까.
드륵. 살짝 의자를 옆으로 옮긴 최정수는 입을 열었다.
“크흠, 큼.”
창백하고 마른 체격의, 하지만 왜소해 보이기보다는 한 자루의 칼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남자.
최정수의 시선이 상대의 이름표로 향했다.
‘이름이 김록수.’
1팀에 배정된 동기, 김록수.
그를 향해 최정수는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꼭 골든레트리버를 떠올리게 하는 밝은 미소였다.
안 그래도 큰 키와 넓은 어깨에 맞추느라 너무 품이 큰 중고 양복 때문인지 그 모습은 상당히 무해해 보였다.
‘음.’
최정수는 김록수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칼 같군.’
김록수의 표정은 멍했던 조금 전과 달리 어느새 날카롭게 최정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최정수는 침을 삼키며 일단 나오는 대로 뱉었다.
“오! 네가 내 유일한 동기야? 난 최정수다! 반가워!”
“…김록수.”
그리고 한참 뒤에 김록수는 말을 이었다.
“반갑다.”
뒤이어 덧붙였다.
“초면에 반말하는 스타일인가?”
“하하, 하하하.”
최정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넸다.
“그, 우리 같은 팀 동기죠? 1팀은 우리 두 사람뿐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유일한 동기? 하하하.”
하지만 그 목소리는 삑사리가 났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록수는 살짝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그 모습에 최정수는 탄식을 삼켰다.
‘아, 친해지기 힘들겠는데.’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허리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다르군요.”
그때, 김록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는 무심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 뭐가 다르다는-”
“옷 말입니다.”
김록수의 암갈색 눈동자가 최정수를 온전히 기록했다.
“면접 때 입었던 정장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만.”
약간 촌스러워 보이는 정장 차림인 지금과 달리, 김록수의 기억 속 최정수는 다른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꽤 좋아 보이는 정장에, 짧고 단정하게 자른 머리칼, 면접을 위해서인지 포마드로 뒤로 넘긴 모습은 순하고 활발한 인상을 조금 어른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짙은 암갈색의 머리칼도 그때보다 자라고,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상태라 그런지 한층 어려 보였다. 더불어 옷도 촌스럽고 품이 커 체격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 그게.”
최정수는 김록수가 면접 때의 자신을 기억하는 게 놀라웠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면접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건물이 하나 무너지더라고요. 거기 가서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옷이 엉망이 되어버렸더라구요. 아, 돈 아까워 죽겠어요.”
대격변 이후, 도시가 다시금 만들어졌지만 그럼에도 일부 건물은 여러 이유로 이따금씩 무너져내렸다.
김록수는 묘한 눈동자로 최정수를 지켜보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습니다.”
툭 던진 말에 최정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건 비꼬는 건 아닌 것 같고. 칭찬인가?’
칭찬이라기엔 김록수가 너무 무덤덤하게 말했다.
최정수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머리칼과 상당히 비슷한 색을 지닌 김록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록수 씨.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우리 같은 팀이면 이제 친하게-”
“흥. 같은 팀은, 무슨.”
그때 뒤에서 한껏 조롱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정수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한 남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이름표도 없네?’
회사에서 이름표를 달라고 했지만, 상대는 이름표를 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히 거만한 자세로 단창의 끝을 매만졌다.
“뭘 봐?”
“아니, 그게-”
최정수는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뭐라 한마디를 하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흥.”
그 모습에 상대방은 코웃음을 흘렸다.
“내가 한마디 조언을 해주지.”
남자는 최정수와 김록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팀은 임시 팀이야. 그리고 곧 신고식이 치러지지. 그 결과에 따라서 새로이 팀이 배정될 확률이 높아.”
그러고는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실력이 없으면 후진 팀으로 갈 거고. 실력이 있으면 좋은 팀으로 가겠지?”
김록수는 슬쩍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최정수의 눈동자가 점차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무딘 놈은 아니군.’
김록수가 그리 생각한 순간, 단창을 쥔 남자가 이어 말했다.
“이 회사의 간판은 1팀이지. 궁금하네, 신고식의 결과로 팀이 어떻게 바뀔지.”
최정수는 저도 모르게 옷 소맷자락을 매만지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저 남자가 하는 말은 누가 들어도 1팀에 배정된 최정수의 실력을 깔보는 것이었다.
“지금 그게-”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고.
최정수는 한마디를 하려 했다.
그때.
“박경호 씨.”
김록수가 뒤돌아보았다.
“이름표 안 답니까?”
단창을 쥔 자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김록수의 무심한 눈동자가 박경호를 담았다.
“면접 때는 장창을 쥐고 있더니, 오늘은 단창을 들고 왔군요.”
“…날 알아?”
일부러 이름표를 붙이지 않고 있던 2팀 신입사원을 보던 김록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압니다만.”
“날 봤어?”
“면접장에서, 호명 받고 면접장 들어가는 건 봤습니다만.”
김록수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문제 있습니까?”
문제라고 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박경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저 감정 없어 보이는 눈동자.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관심이 전혀 없어 보이는 눈빛.
‘…우연히 내 이름을 외운 건가?’
면접장에는 모든 부서가 같은 날 면접이라 그 대기 인원만 해도 가뿐히 수백여 명에 달했다.
회사 특성상 능력이 없어도 인력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방 지원이면 나랑 같은 면접 조도 아니었을 텐데.’
박경호는 이상하게 찝찝해져 와 조금 더 따지려 입을 열었다.
상대는 나를 알고 나는 상대를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다들 정숙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때, 사회자로 보이는 직원이 나타나며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다.
“오, 이수혁이다!”
“저기 땅의 치유자분도 계셔!”
“이사님 아닌가?”
신입사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각 부서의 팀장급과 이사, 그리고 사장이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마련한 강당으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분이 이수혁 님-”
신입사원 중 검을 쥔 이들은 존경과 열망을 담아 이수혁을 바라보았다.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며 느릿하게 강당 안으로 들어서는 이수혁은 무료해 보였다. 아니, 피곤해 보였다.
무엇이든 베어내는 자.
그리고 초기 대격변 때부터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많은 생명을 구했던 자.
당연히 정부에서 큰 자리를 차지할 줄 알았던 이수혁은 회사의 팀장으로서 아직도 일선에서 일하고 있었다.
물론 젊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 모습에 끌린 이들이 참으로 많았다.
“이 팀장, 저쪽이 그대 팀 신입 같은데요?”
“그렇군요.”
이수혁의 시선이 1팀 신입사원 둘에게로 향했다.
피식.
“음? 이 팀장, 갑자기 왜 웃어요?”
“아뇨. 별것 아닙니다.”
열망 혹은 존경, 부러움을 담아 저를 바라보는 신입사원들 속에서 어찌 보면 무심하다 생각이 될 정도로 그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두 신입사원.
“진짜였군.”
면접관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이수혁은 최정수, 김록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초기 대격변 때 자신이 구했던 녀석, 김록수.
그리고 서면에서 등급 외 괴물을 마주했을 때 잠깐 엮였던 최정수.
그 두 사람이 이렇게 성장해서 신입사원으로 이곳에 들어올 줄이야.
씨익.
이수혁은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쭈?”
하지만 두 사람 다 동시에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하, 하하-”
재밌네.
극과 극의 두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이자 이수혁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이 팀장님. 괜찮겠어요?”
“뭐가 말입니까?”
“아뇨… 박 이사가 수작을 부렸잖아요.”
다른 팀장이 속삭이는 말에 이수혁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지켜보면 알겠죠.”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진 순간, 사회자가 외쳤고 신입사원들의 눈이 커졌다.
“자, 본격적인 오리엔테이션에 앞서 짧은 테스트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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