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840
2부 82화
일순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원래도 고요한 공간이었건만, 마치 공기마저도 그 움직임을 멈춘 것만 같았다.
“……!”
중년 여인의 눈이 커졌다. 삶의 풍파를 가늠하게 하는 그녀의 거친 손이 비단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숨통을 조여들어 왔다.
그 순간이었다.
채앵!
검날과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정적이 깨졌다.
여인은 저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순간.
“흐읍…….”
“허억.”
제 주위에 있던, 내시와 궁녀들의 간신히 내뱉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오로지 정면만을 향했다.
그곳엔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조금 전까지 숨 막히는 공간을 만들었던 자가 입을 열고 있었다.
“금의위인가?”
케일의 시선이 중년의 여인. 태후로 추정되는 이에게서 다른 쪽으로 옮겨졌다.
그곳엔 한 여인이 케일 쪽으로 검날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인의 검날은 케일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케일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자가 앞으로 나서며 그 검날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 더.
검날과 검날이 부딪칠 때.
여인의 검날을 막아섰던 남자 외에도 한 명 더 그녀에게 검집을 겨누는 자가 있었다.
여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검 끝이 그녀의 목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케일의 입이 열렸다.
“두 사람 다 물러서도록.”
그 순간, 케일은 두 사람과 시선이 부딪쳤다.
금의위로 추정되는 여인과 검날을 맞부딪쳤던 최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검을 거두어들였다.
케일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그대로네.’
최한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변함이 없었다.
‘하긴 동화되어야 할 부분이 없겠지.’
오히려 이 세상이 최한에게는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위화감이 없는 곳일 확률이 높았다.
-인간아, 인간아! 인간, 왜 이렇게 불쌍해졌나? 뒷모습이 너무 왜소하다!
등 뒤로 당황한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케일은 일단 아직 검을 거둬들이지 않은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팀장.’
그가 있었다.
수이 칸이 아닌, 팀장이 있었다.
케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 왜 저 인간은 커졌어?’
어린 수이 칸의 모습이 아닌, 케일이 처음으로 이수혁을 만났을 때. 그 시기쯤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의복도 세계를 넘어오며 새로이 구성된 것인지, 이수혁이 자주 입던 옷차림새였다.
중원이가 보낸 메시지 내용이 떠올랐다.
‘외양은 본인의 생각이 반영돼요!’
케일은 짜증이 일었다.
‘…그럼 왜 나는 이십 대 중반의 김록수로 안 해줬지?’
막판에 스무 살 시절의 김록수를 떠올려서 그런가?
빌어먹을.
안 그래도 봉인된 힘이 많아서 짜증이 치밀어오르는데, 이수혁 팀장의 저 꼴을 보니 더 짜증이 일었다.
그래서일까. 케일은 수이 칸이라는 이름보다 이수혁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외양이 되어버린 이를 향해 툭 내뱉었다.
“검.”
그제야 팀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이쪽이 검을 거둘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자신이 검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로, 팀장은 눈앞의 여인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여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검 끝이 살짝 떨렸다.
그때였다.
“검을 거두어라.”
중년 여인의 입이 열렸고, 갑옷을 입고 있던 여인은 검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케일을 향한 경계의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케일은 그런 그녀를 보며 꽤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꽤 강한 거 같은데.’
케일은 지배하는 아우라를 모두 쓰지 않았다. 그가 지배하는 아우라를 모두 쓰면, 고룡 에르하벤조차 그 기세에 압박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군일 확률이 높은 이들에게 그 정도의 힘을 보일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유일하게 움직였어.’
눈앞의 무사는 강하다.
젊은 나이에 비해.
하지만 이곳에 진정으로 강한 이는 따로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었다.
중년 여인의 입이 열렸다.
“…할아범. 그대가 보기엔 어떤가?”
케일은 기둥 옆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유일하게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서 있는 노인.
구부정한 허리를 한 노인은 케일보다 왜소하고 키도 작았다.
‘하지만 무림에는 이런 말이 있지.’
노인과 아이를 조심하라고.
케일은 다년간 읽은 무협 소설 경험으로 확신했다.
‘저 노인네가 여기서 제일 강하겠지.’
보나 마나 황궁의 숨겨진 호위 무사쯤 될 것이다.
노인의 입이 열렸다.
“자리를 먼저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태후 마마.”
“그렇군.”
중년의 여인, 태후는 노인의 대답에 살짝 눈썹을 들썩였지만. 이내 케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가?”
케일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태후는 볼품없어 보이던 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순간, 품격이 보이는 듯했다.
귀족으로서의 경험이 발휘되는 케일 헤니투스였다.
“그렇습니다, 태후 마마.”
말을 높이는 케일이었다.
하지만 태후는 짧게 혀를 찼다.
말은 높였으나, 고개는 아주 살짝만 숙였다가 금방 드는 케일의 모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을 원한 것은 아니었던 태후는 몸을 돌렸다.
“일단 거처에 짐을 먼저 풀도록. 그 후에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지.”
태후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케일이 조금 전의 노인네와 함께 주목하고 있던 또 다른 이가 앞으로 나섰다.
아까의 노인에 비하면 더 젊었지만, 그래도 예순은 되어 보이는 자였다.
‘내시군.’
아니지, 동창인가?
황실에서 일하는 내시 중 동창이라는 존재가 무협 소설에서는 꽤 나왔다. 그들은 내시였지만, 상당한 무술 실력을 지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게.”
그때였다.
“마마,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노인네가 끼어들었다.
“으음.”
태후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태후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뒤돌아 케일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분께서는 내게 말씀하셨다.”
그분. 분명 이 세계인 중원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분이 나를 구하셨듯, 내 아들을, 내 아들이 다스릴 세상을 구할 이가 온다고.”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시와 궁녀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그저 고개만 숙였다.
“…….”
태후는 가만히 케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깊이 허리까지 숙이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의 머리칼에 매달린 장식품들이 바닥을 내려다볼 정도. 딱 그 정도만 고개와 허리를 숙였다.
“!”
하지만 그 광경을 본 무사 여인과 동창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그 모습을 안 보려 했다.
태후는 아주 천천히 숙였던 고개와 허리를 들고는 다시 꼿꼿한 모습으로 케일을 바라보았다.
케일이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을 때.
“나는 황제 폐하를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다.”
황제 폐하.
자신의 아들을 그리 부른 태후는, 다시 뒤돌아서며 걸음을 옮겼다.
“사자여. 그대가 원하는 모든 목숨을 거둬가도 좋으니, 필요한 것을 모두 말해주게.”
그 말을 들은 케일의 입꼬리가 다시금 올라갔다.
태후는 그가 어떤 사자인지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녀를 따라, 한 무리가 움직였다.
그리고 동창으로 추정되는 자가 케일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사자님과 동료분들을 뵙습니다. 저는 위 상선이라고 합니다.”
상선.
내시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직급으로, 대비의 측근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거처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케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천천히 뒤돌아섰다.
일행의 모습을 한번 제대로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음.’
제일 먼저 라온이 눈에 들어왔다.
투명화도 안 한 라온은-
‘그대로네.’
최한처럼 그대로였다.
케일은 라온이 전형적인 판타지 세상에 나오는 서양 용의 모습이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 넘어오면 동양 용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을까 했다.
‘그대로야.’
정말, 평소와 같은 통통한 몸에, 통통한 발을 지니고 작은 날개를 파닥이는 검은 어린 용. 그 자체였다.
-인간아! 왜 이렇게 많이 변했나? 그래도 눈 보니까, 우리 인간이다! 표정 보니까, 더 우리 인간이다!
“으음. 넌 왜 그대로야?”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케일의 머릿속으로 뜻을 전해왔다.
-나는 나다! 무엇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위대한 라온 미르다! 내년에 7살 되는 라온 미르다!
…자아가 아주 엄청나게 확립되어 있나 보네.
케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강 짐작은 간단 말이지.’
라온이 가진 특성 ‘현재’.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그 특성이 영향을 미쳐서 라온은 세계를 넘나들어도 모습이 그대로인 것은 아닐까?
“도련님.”
케일의 시선이 론과 비크로스에게로 향했다.
“비슷하네.”
론과 비크로스는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여기 중원에서 색목인이라 느끼지 않을,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외양으로 변했다.
그래도 비슷하다.
‘비슷하게 살벌하네.’
인자하게 웃는 론의 모습은 여기서도 무서웠다.
비크로스의 무표정한 얼굴도.
‘든든하네.’
얼굴로, 기세로 무림에서 밀릴 일은 없을 것 같다. 케일은 나른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팀장 수이 칸을 외면하고는 마지막 두 명을 바라봤다.
‘더스트 신관도 비슷하군.’
론과 비슷하게 변했다.
더스트 옆, 툰카를 바라보는 케일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크흠. 큼.”
툰카가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케일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제 나 말해도 되나?”
“아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케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잘 데려왔다.’
툰카를 데려오길 아주 잘했다.
사자의 갈기처럼 뻗은 머리칼. 산과 같은 체격.
‘얼굴이 더 험악해졌어!’
아주 전형적인 산적 혹은 악인, 혹은 낭인처럼 툰카의 외양은 더 살벌해졌다.
물론 전반적으로 그대로였지만, 뭔가 묘하게 더 야성적으로 보였다.
‘좋아.’
케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이 일행들 데리고 다니면, 적어도 시비 거는 인간들은 확 줄어들 것 같다.
케일은 혈교 7호가 담긴 포대까지 확인하고는 위 상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지요.”
“…네.”
존댓말을 하는 케일의 모습에 잠시 멈칫했던 위 상선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조용하면서도 가지런한 걸음을 따라 발을 내딛던 케일은 입을 열었다.
“용은 모습을 숨겨야겠지요?”
타닥.
처음으로 위 상선의 움직임에서 소리가 났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사자’라고 불리게 된 손님은 웃고 있었다. 언뜻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그 안에는 불친절함이 가득했다.
위 상선은 그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월화궁 내에서는 괜찮지만, 그 밖에서는 숨기시는 편이 좋으실 듯하옵니다.”
호오.
손님은 짧은 감탄을 흘렸다.
“태후께서는 입이 무거운 이들만 곁에 두시는가 보군.”
위 상선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거처를 향해 소리 없는 걸음을 옮겼다.
케일은 라온을 보았음에도 보지 않은 것처럼 구는 월화궁 사람들을 보며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툭 내뱉었다.
“뭘 그렇게 봅니까?”
“허허.”
할아범이라고 불리는 노인이 웃음을 흘렸다.
“이보게.”
그는 웃으며 물었다.
“자네는 얼마나 강하지?”
그 말에 케일은 코웃음을 쳤다.
이 노인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는 기도 안 차는 질문을 하는 노인의 말을 무시하려다가,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아군이고 강해 보이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좋겠지?’
분명 이 노인은 황궁에서 제일 쎄거나, 두 번째로 쎌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효자 황제가 태후의 곁을 지키라고 보낸 것일 터.
‘그래.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받자.’
생각보다 고대의 힘이 꽤 많이 봉인되었으니까.
하나라도 더 도움을 받는 편이 나았다.
케일은 솔직하게 답했다.
“저는-”
위 상선과 할아범의 귀가 케일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케일은 이를 모른 채 담담하게 답했다.
“약해요.”
저는, 약해요.
“좀 많이 약하죠.”
지금은.
그러니 도와주십쇼.
뒷말은 일단 삼켰다.
* * *
그 시각, 태후는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금의위에게 물었다.
“할아범이 뭐라고 했느냐?”
“할아버지께서는-”
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할아범이라 불리는 이는 그녀의 증조할아버지였다.
현재 무림에서는 종적을 감춘 지 오래되었지만, 그럼에도 늘 한 손에 꼽히는 강자.
그런 이에게서 모든 것을 전수 받고 있는 그녀의 재능은 증조할아버지를 뛰어넘을 것이라는 평이 자자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증조할아버지까지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아득했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이 만든 경지는 멀고 멀었다.
“그래. 할아범이 무엇이라고 했지?”
태후의 보챔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녀가 할아버지와의 대련을 겪지 않았다면, 감히 검날을 뻗어볼 생각조차 못 했을 강대한 기운을 가진 남자.
사자라 불리게 된. 그 왜소한 남자에 대해 할아버지는 전음으로 말했다.
“그자는 모든 것을 보이지 않았다.”
그 강대한 기운조차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
그 정도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도 놀랍건만, 그 이상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싸운다면, 희박하게 동률.”
무림의 현 강자는 5선과 5마로 나뉘었다.
그들 이전 세대는 3왕 9패가 존재했다.
3왕 중 한 명.
권왕 목현.
목현의 증손녀 목희.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기는 것은 힘들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태후는 그 말에 탁자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