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88
87화.
그 절망을 관람하는 것이 라온이 누릴 권리였다.
“호화롭네.”
케일은 그리 말하며 최한에게 지시했다.
“저 의자에 앉혀놔.”
“네.”
최한은 들쳐 업고 온 베니온을 고급스러운 가죽 의자에 패대기쳤다. 케일은 최한을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에 최한은 케일의 눈빛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아지트 안을 보니 더 화가 나서.”
아지트. 현재 케일 일행은 베니온 스텐이 뒷골목에 몰래 마련해 둔 비밀 아지트에 와 있었다. 화려함과 부유함이 넘치는 장소였다.
이 장소는 이틀 전 미친 신관 케이지가 알려준 곳이었다.
죽음의 신을 모시는 케이지는 파문당했지만 아직 신관이었다. 그녀는 저주에 특화된 이로서, 정신 고문에 일가견이 있었다. 베니온의 수하들에게서 정보를 얻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신의 이름을 달고 있기에, 저주는 그녀 나름 정의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만 사용 가능했고. 이번 일에 그녀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저주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대단하네.’
현재 죽음의 신을 모시는 신관들 중 그녀보다 저주를 잘 사용하는 이는 없다.
괜히 네크로맨서의 재림이라고, 신관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붙었던 것은 아니었다.
‘뭐, 네크로맨서는 따로 있지만.’
대부분의 판타지 세상이 그렇듯 과거 사라졌다고 말해지는 직업은 히든 직업으로 어딘가에는 있게 마련이었다. 주인공의 옆집 할아버지가 알고 보니 전직 소드 마스터이거나 하는 전개 말이다.
그게 재미와 반전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이 세상도 마찬가지고.’
그런 전개가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글이 ‘영웅의 탄생’이었다.
케일은 의자에 구겨진 채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베니온을 가만히 응시했다.
“던진 마음은 이해한다만. 이 상태는 좀 곤란하군, 비크로스.”
“하, 네.”
깊은 한숨과 함께 비크로스는 베니온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베니온을 제대로 앉히고 복장이나 머리칼 등을 깔끔하게 정리해 나갔다.
누가 보아도 몇 날 며칠 동안 편히 먹고 자고 일어나 우아하게 차려입은 귀족의 모습이었다.
베니온의 등에는 포션으로도 처리 못 하는 자잘한 상처들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의 상처는 대부분 치료된 상태였고, 특히 얼굴과 손, 바로 눈에 보이는 곳은 다친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비크로스가 최한을 데리고 아지트 뒷문으로 은밀히 빠져나갔다. 케일은 아까 전부터 아지트 구석에 조용히 쪼그리고 있는 라온에게 다가갔다.
“시작할까?”
“알았다, 인간.”
케일도 라온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너희도 와.”
냐아아옹!
온과 홍이 뛰어와 라온과 케일 옆에 각각 웅크렸다. 케일은 구석에 딱 붙어 웅크린 이들을 확인하고는 라온을 쳐다봤다. 라온의 앞발에서 검은 마나가 피어올랐다.
이제 웃기지도 않는 관람을 할 차례였다.
파아앗.
작은 소리와 함께 케일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져 갔다. 이내 그들의 모습은 아지트 안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으, 으으-”
잠시 뒤, 아지트 안에서 한 사람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니온이었다. 그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허억.”
그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앞을 응시했다.
깜박 깜박. 몇번 눈을 깜박이며, 그는 시야에 담기는 광경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어, 여긴-”
베니온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만졌다. 목소리가 나온다. 아니, 사람의 언어가 나온다.
그는 제 목을 만지며 족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그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살폈고, 피도 상처도 보이지 않는 제 팔과 손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고급스러운 옷 어디에도 피가 보이지 않았다.
아프지 않았다.
“…꿈인가?”
지금 여기가 꿈인지, 아니면 그 지하실이 꿈인지 그는 지금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끔찍하고 지독해서 선명하게 기억이 났지만, 현실처럼 와닿지 않았다. 베니온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쓰으윽. 아지트에 있는 자신의 책상. 그 위를 쓰다듬었다. 분명 이 촉감은 현실이었다.
그래, 현실.
베니온의 얼굴이 일그러져 갔다. 꿈을 꾼 것일까. 새벽에 아지트로 향할 때 납치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아지트에 도착했고 잠시 기나긴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크흐.”
베니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그러진 얼굴과 달리 그의 눈동자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오갔다.
“그래, 꿈이었어.”
그래, 그래야만 한다. 지금도 그 채찍과 날카로운 날붙이들이 제 몸을 가르는 느낌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고문관의 차가운 눈빛과 그 용 새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직도 무섭고 두렵지만.
그렇지만 그건 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흐흐-”
베니온은 두 손으로 제 목을 감쌌다. 안도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때였다.
냐아아옹.
흠칫. 베니온의 어깨가 떨렸다.
그를 투명해진 상태로 구경 중이던 케일은 무심한 얼굴로 홍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홍은 한 번 더, 최대한 소름 돋게 울었다.
냐아아옹.
베니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손끝은 떨려왔다. 그의 머릿속으로 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너를 살려둘 생각이다.’
‘그래서 언제고, 입맛이 없을 때마다 너를 찾아올 거야.’
책상과 팔걸이를 움켜쥔 베니온의 두 손 끝이 창백했다.
“미, 미친-”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덜덜 떨어댔다.
사아아아-
검붉은 안개가, 뱀과 같은 그것이 서서히 그의 발아래에서 기어 올라왔다. 베니온의 얼굴이 울 것 같은 어린아이처럼 일그러졌다.
“이, 이 미친 용 새끼가!”
그는 거칠게 제 발을 털어댔다. 그래도 안개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더 위로 올라왔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베니온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번과 달랐다.
저번과 달리,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베니온은 고개를 들어 아지트를 훑어보았다. 아지트의 출입문이 보였다.
케일은 베니온이 아지트 문을 본 순간 시계를 바라봤다. 조금 더 서두르면 딱 알맞게 그림 같은 광경이 나올 것 같다.
케일은 온의 등을 쓰다듬었다.
사아아아-
안개가 조금 더 빨리 베니온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냐아아- 옹.
동시에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더 강해졌다.
베니온의 두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서 빠르게 일어섰다.
쾅! 커다란 소리를 내며 가죽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하지만 베니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허겁지겁 아지트의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귀족다운 고급스러운 옷과 머리 스타일과 달리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미쳐 버린 이의 얼굴 같았다.
“빠, 빨리-”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베니온은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였다.
철컥.
문 밖에서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부하들인가? 베니온의 머릿속에는 이제 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혼자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분명 그 새벽에 함께 있던 부하 두 명일 것이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잡아당겼다. 그 덕분에 베니온은 본인이 힘을 줄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문 밖을 마주할 수 있었다.
끼이이-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사이로 살짝 보이는 불빛에 빠져 베니온은 제 다리를 감싸던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문이 열렸다.
“드디어 찾았군.”
그리고 베니온이 마주한 이는 테일러 스텐. 제가 불구로 만들었던 형이었다.
“…어-”
베니온이 뒷걸음질 쳤다.
테일러 스텐의 뒤에는 비밀 아지트로 내려오는 통로가 있었고, 그 통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스텐 후작가의 정예와 테일러 측의 사람들이었다.
“이, 이게 무슨.”
테일러는 베니온의 겉모습에 아무런 상처가 없음을 확인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장남 테일러는 베니온의 어깨너머 아지트 안을 바라봤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저 안에 케일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케일에게 투명화 마법 장치를 빌려서 사용해 봤으니까. 그래서 더욱더 그가 저 안에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이것도 꿈인가?”
베니온은 뒷걸음질 칠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테일러는 제 동생을, 증오하는 동생을 보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긴 악몽이라도 꿨나 보군.”
그는 돌아서며 후작가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체포해.”
베니온의 악몽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후계자 위에서 영원히 밀려나는 것은 물론, 각종 불법적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위상이 떨어져 화가 난 스텐 후작가 일원들의 분노를 온전히 받아야 했으니까.
“…이, 이건 용이 한 짓이야. 다 용이-”
테일러는 뒤에서 베니온이 중얼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다가오는 동료 케이지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며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오늘 저녁.”
오늘 저녁, 오랜만에 테일러는 은인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공자님, 아지트 수색은 지금 바로 할까요?”
테일러는 기사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지금은 베니온의 신병을 영주 성으로 조용히 옮기는 게 관건이다. 밖에 영지민들이 많아.”
“몰래 가는 건 힘들지 않을까요?”
아지트 밖에는 영지민들이 몰려 있었다. 그 상황에 기사들과 후작성 사람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오데우스가 케일의 명에 따라 소문을 퍼뜨린 탓이었고, 테일러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고심에 가득한 표정을 연기했다. 이제 그는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다.
“그렇긴 하지만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 돼. 스텐 후작가의 위상을 더 떨어뜨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알겠습니다!”
기사는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후에는 아지트 다른 구역 일당 검거에 집중하도록 해. 대신 여기에는 기사와 병사들을 몇 명 배치시켜서 입구를 지키도록 하지.”
“네.”
테일러는 케일이 조금 더 편히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두고는 아지트 입구에서 등을 돌렸다. 그는 이제 후작성에 가서 베니온과 후작의 팔다리를 하나, 하나씩 잘라내야 했다.
몇 명의 기사들이 텅 비어 보이는 비밀 아지트를 지켰다. 다른 이들은 이외에도 남겨진 아지트에 있을 베니온의 수하들을 잡으러 떠나갔다.
“경비 똑바로 서게.”
“어차피 사람도 하나 없다만. 요 며칠 새 쉬지도 못했는데, 설렁설렁하자고.”
“안 되네.”
“빡빡하긴. 들어오는 것만 막으면 되지 않겠나?”
두 기사들은 병사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그런 그들의 뒤를 바람이 순간 훑고 지나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하 아지트에는 어울리지 않는 바람이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 케일은 아지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준비해 둔 마차에 올라탔다. 뒤따라온 라온이 자신을 제외한 일행의 투명화를 풀었다.
“출발할까요?”
“그래.”
오데우스는 케일의 허락에 천천히 마차 문을 닫고는 마부석으로 갔다. 잠시 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며 저택으로 향했다. 케일은 마차 좌석에 몸을 기댔다. 푹신한 가죽의 감촉에 몸이 편해져 왔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제야 투명화를 풀고서 제 무릎에 얼굴을 올리고 있는 라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라온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럭저럭 괜찮다. 나는 위대한 용이다!”
“그래. 그들에게 지옥은 이제 시작이니까.”
“맞다!”
케일은 일행에게 말했다.
“오늘은 다 같이 맛있는 것 좀 먹고 푹 쉬자고.”
하지만 케일은 그 말과 달리 일행과 떨어져 저녁 식사를 즐겨야 했다.
“시간이 나셨나 봅니다?”
“케일 공자를 만나는 자린데, 제가 와야지요.”
장남 테일러와 미친 신관 케이지. 두 사람이 술병과 술잔을 들고서 케일을 찾아왔다. 늦은 시간에 온 그들 때문에 케일은 늦게서야 저녁 겸 술을 함께 즐기게 되었다.
“오늘 아니면, 앞으로는 더 바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겠죠.”
케일은 테일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지를 바라봤다. 그녀는 씩 웃으며 술병을 들어 보였다. 케일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가득 따라진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케일 공자가 말해준 인원 대부분이 베니온 쪽의 사람들이고, 연관이 있더군요.”
“그랬습니까.”
테일러는 케일을 마냥 편안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베니온의 아지트와 관련 인원들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그중 아버지의 사람들도 몇 있더군요.”
“…그건 몰랐습니다만.”
케일이 진심으로 놀란 얼굴로 테일러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건 당연히 연기였다.
베니온 스텐은 후작의 명에 따라 검은 용을 사육했다. 때문에 용이 있던 동굴을 지키는 이들 중 당연히 후작의 사람도 있을 터였고. 그 인원 중 몇이 베니온의 더러운 일을 해온 것도 일정 부분 연결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번 일로 최소 노역형, 최대 사형을 받을 것이다. 스텐 후작가는 영지법이 가장 가혹한 곳이었으니까. 후작은 이 일에서 최대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의 입을 아예 세상에서 없애고 싶을 것이다.
“…그 말씀 믿습니다.”
테일러는 다짐하듯 케일에게 그리 답했다. 그런 둘 사이로 술병이 나타났다.
“일단 이 술병은 다 비우죠?”
“그래. 마시자.”
“좋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술병을 비웠다.술병이 비워지면 케이지와 테일러는 다시 일을 하러 자리를 떠야 했다.
“내일 떠나십니까?”
“네.”
“서부 길을 따라 수도에 가신다고 들었는데, 수도가 최종 목적지이십니까?”
테일러는 자신의 물음에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이는 케일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에 테일러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다짐을 전했다.
“이번 일도, 저번 일도 다음에 반드시 갚겠습니다.”
“기대하죠.”
“네. 기대하십시오.”
또렷한 눈빛으로 기대하라 말하는 테일러를 보며 케일은 새로운 서북부의 권력 관계를 떠올렸다. 테일러에, 오데우스. 다가오는 미래. 굴리고 굴릴 인재들이 꽤 많았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케일은 침실에서 떠날 채비를 모두 끝내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는 거울 속에 비치는 라온에게 물었다.
“이제 왕세자 마법 알겠지?”
“안다, 인간. 나는 위대하다.”
거울에 비친 케일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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