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923
대략 온의 나이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
케일은 감았던 눈을 떴다.
‘하.’
작은 마을이 보였다.
한 소녀의 품에 힘없이 안긴 채 축 늘어진 작은 뱀을 본 순간. 케일은 이 광경이 환상이며 비늘 속에 남겨진 잔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로지 용이 되는 것만이 존재의 증명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무기라는 것도, 케일은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면 이무기에게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연 속에서 살아가며, 가족도, 친우도, 무엇도 없이 홀로 오랜 세월을 살아가야 하는 이에게 곁에 있는 것은 오로지 자연뿐.”
“그 자연을 보며 쌓은 기운을 여의주에 담아 언젠가 용이 된 자신이 만나게 될 다른 용들을 꿈꾸며 살아갈 터.”
어린 소녀의 어깨에 매달린 채, 대장간을 구경하는 이무기.
이무기는 뱀을 주워 왔냐며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대장장이의 곁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그 불을 집어먹었다.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따뜻함’이었다.”
“그것이 처음에는 불 때문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불을 집어먹고 또 집어먹었다.”
그런 이무기를 신기해하면서도 그 존재를 눈치챈 듯한 대장장이와 그저 신나 하며 즐거워하는 소녀.
그리고 이무기는 그 곁에서 재롱을 피우듯 불을 집어먹고 불을 토해내며 두 사람을 흥겹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내 여의주에 담아야 할 것이 불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자연 중 불만이 나를 용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다.”
이무기는 불을 먹을수록 계속 커져 갔다.
그리고 소녀와 대장장이와도 더 친밀해져 갔고, 매일 밤 소녀와 함께 잠이 들고 깨어나 하루를 함께 보냈다.
때로는 소녀의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무기를 무서워하던 아이들도, 꺼림칙해하던 어른들도 불을 뿜어 꽃을 만들고, 마을에 들어서려는 맹수들을 내쫓는 이무기를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더 많은 불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헤어짐의 순간이 왔다.
이무기는 더 많은 불을 찾아 떠났다.
케일은 권왕이 해준 이야기와 이 환상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내 키만 한데?’
떠나는 이무기의 길이가 케일 키만 했다. 최소한 몇 년은 이 마을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불을 먹고 또 먹었다. 정확히 말하면 화산의 용암을 먹고 또 먹었지.”
“그러면서도 그 마을은 한 번씩 은밀히 내려가 살펴봤다.”
“모두들 잘살고 있었다.”
이무기를 주웠던 소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장장이가 되었고 동시에 그 마을의 촌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무기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왔던 날을, 마을 사람들은 떠나간 이무기를 기리는 축제 날로 삼았다.
축제 때마다 마을 중앙에 피워 올린 거대한 불꽃을, 축제의 마지막 날 밤.
모두가 일부러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무기가 내려와 슬쩍 집어먹고 떠났다.
“나는 이 불이 가장 맛있었다.”
“그렇게 나의 여의주를 채웠다.”
“생각보다도 나는 빠르게 여의주를 채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연을 살피던 이무기는 깨닫게 되었다.
“내가 용이 되려면 더 큰 불을 얻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잠시 마을을 떠나 더 큰 불을 찾으러 가야 했다.”
이무기는 촌장에게 그 사실을 은밀히 남겨놓고는 잠시 마을 근처를 떠났다.
“그 당시 마을 뒷산은 내가 많은 불을 잡아먹어, 당분간 화산이 폭발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아무리 큰 불을 먹어도 여의주가 차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에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얼른 용이 되어 나와 같은 존재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 때문에 나는 더 큰 불을 찾아 멀리 떠났고, 생각보다 더 늦게 마을에 도착했다.”
이무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물론, 나는 여의주를 다 채우지 못한 채로 돌아왔다.”
“용이 되려면 역시 더 오랜 세월을 보내야 함을 깨달았으니까.”
그렇게 돌아온 마을은,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화산 폭발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자연의 순리. 그 바퀴가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이무기는 곧장 촌장을 찾아갔다.
용이 아니어서일까.
이무기가 인간화한 모습은 반인반룡이었다. 용의 비늘로 뒤덮이고, 꼬리와 뿔이 달린 모습이었다. 온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촌장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그때.
화산이 폭발했다.
“그때, 내 친구는 말했다.”
이무기에게 촌장은 친구였다.
비록 이제 촌장의 나이가 예순이었고, 이무기는 고작 10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너라도 떠나라고.”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뒤의 상황은 권왕이 해준 이야기와 비슷했다.
이무기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마을로 내려오는 용암을 몸으로 막았다.
더불어 화산재를 자신의 불로 흔적도 없이 태워버렸다.
‘와.’
케일은 이무기가 뿜어내는 불을 보며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무기는 아주 작은 뿔을 지녔으며, 용에 비교하자면 그 비늘의 빛깔도 거무죽죽하고 칙칙했다.
그럼에도 입에서 뿜어내는 불로 전신을 휘감은 이무기는 정말로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케일이 지금껏 본 어떤 용보다도 그 외양만큼은 가장 눈부셨다.
그리고 이무기는 화산을 막으며 죽어갔다.
“내가 용이었다면 마을도 지키고 나도 살았겠지만. 나는 그럴 능력까지는 되지 못했다.”
죽어가는 이무기의 곁에는 촌장이 함께였다.
촌장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케일의 귓가에 들려왔다.
“영(永)아. 함께하자.”
오래 살라고, 영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촌장은 이무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친우의 마음을 이무기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촌장을 내쳤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이무기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내 몸은 죽어가는데, 여의주는 어느 때보다도 그 힘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이 화산을, 용암을 막으며 불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무기가 밀어내도 다가온 촌장의 손이 불로 뒤덮인 이무기의 비늘에 닿은 순간.
촌장의 손이 타면서도 이무기의 등을 쓰다듬어 준 순간.
“나는 내가 처음으로 느낀 따뜻함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여의주에 채운 불이, 아니, 따뜻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무기는 촌장을 저 멀리 밀어냈다.
“나는 사람의 온기를 내 여의주에 담았다.”
환상이라 그런지, 이무기의 어릴 적 모습이 한 번 더 케일의 눈앞에 나타났다.
“내 불은 그래서 따뜻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은 죽어갔다. 하지만 여의주는 어느 때보다도 가득 차올랐다.”
“내 친우와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준 애정,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준 애정.”
소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내가 왜 용이 되고 싶은지 그 순간에 깨달았다.”
“인간은 너무 빨리 죽는다.”
예순이 넘은 촌장은 이무기의 재촉에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얼른 대피소로 옮겼다.
이무기는 그 대피소를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용암을 온몸으로 막았다.
“내 친우가 떠나고 나면 나는 혼자 남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은 내 친우도 가족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빨리 용이 되어 이 마을을, 이 땅을 떠나 나와 같은 존재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이 땅을, 이 사람들 곁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뿌리는 여기였으니까.”
이무기가 마지막으로 불을 뿜어냈다.
마을을 덮치려는 모든 것들을 향해.
“여의주. 나의 뿌리는 이 마을에서 얻은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깜박깜박.
환상이 점점 더 흐려지며 깜박거렸다.
마치 이무기의 죽음을 알리듯.
“나의 몸은 죽어갔다.”
“이무기는 자연에서 온 존재.”
“결국 나는 자연으로 돌아갈 터.”
“하지만 나는 다른 이무기들과 조금 달랐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며 자연에서 느낀 것들로 여의주를 채우는 다른 이무기들과 달리, 나는 인간 세상을 배워버리고 그 안의 따뜻함을 담아버렸다.”
화산의 폭발이 끝났고, 용암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무기는 새까맣게 타버렸다.
“나는 여의주를 다 채워도 용이 될 수 없다.”
“내 안에 담긴 것은 자연이 아니었으니까.”
황급히 튀어나온 촌장이 이무기의 다 타버린 몸에 손을 댄 순간, 그 몸이 재가 되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일 터.
비록 용이 아닌 이무기일지라도.
그 몸은 자연이 되어갔다.
“그렇기에 나는 여의주를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단 하나만이 남았다.
작은 돌덩이였다.
시꺼멓고 울퉁불퉁해서 참으로 흉한 모양새다.
누가 봐도 여의주라고 보기에는, 그냥 돌 같았다.
“일반적으로 담아야 할 것을 담지 않았으니, 내 여의주의 모양새는 참으로 볼썽사나웠지.”
“내 친우는 이를 아름답게 만들어주기 위해 비늘로 만들었다.”
“그 흉하고 못난 비늘이 뭐가 좋다고, 이쁘다고 했거든.”
환상이 사라져갔다.
“너에게서 온기가 느껴진다.”
오래전 죽은 이무기가 말했다.
“네가 가진 불은 따뜻하다.”
“무언가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태울 의지가 느껴진다.”
케일은 환상이 사라지자 제 주위를 감싼 붉은 안개를 볼 수 있었다.
안개가 사그라들어 갔다.
“내 친우가 그랬다.”
“아무리 볼품없는 철이라도 불로 달궈서 그 모습을 바꾸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고.”
“그러니 불을 만나기 전 내 모습이 지금은 형편없어 보일지라도, 용이 될 너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울 것이라고.”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불이 되고 싶었다.”
“그래, 나는 그런 불이 되고 싶다.”
케일은 고개를 숙였다.
비늘은 어느새 사라지고, 작은 불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자리해 있었다.
양초 위의 촛불처럼, 참으로 작은 불이었지만.
따뜻했다.
그리고 이 불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
“불이니까.”
그리고 더 이상 이무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케일은 이무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케일. 가능할 거 같다.
-케일, 그거다!
파괴하는 불 짠돌이와 지배하는 아우라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케일은 하얀 왕관을 내려다봤다.
잠잠했다.
그는 왕관을 천천히 손바닥 위의 불 쪽으로 가져갔다.
덜덜덜.
왕관이 겁을 먹은 듯 떨어댔다.
케일이 슬쩍 왕관을 불꽃에서 떨어뜨렸다.
그러자 잠잠해졌다.
가까이 가져가니 다시 덜덜 진동했다.
아까 전 난리를 피우던 검은 소용돌이 흡입구도 사라져 있었다.
하얀 보석만이 보였다.
케일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어차피, 중원에서는 파괴하는 불의 봉인을 더 풀 필요는 없어.”
아니, 다른 불 속성의 영약들을 가져와서, 필요하면 추후에 봉인을 풀면 된다.
그러니 이다음 세상, 아피토유를 생각해서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여의주를 다 채웠지만,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
사냥꾼이 된 용과 재가 되어 사라진 이무기가 남긴 불.
‘궁금하네.’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케일은 막시리언이 남긴 왕관까지 꺼냈다.
두 왕관이 덜덜 떨어댔다.
용을 죽이거나 용의 피를 원하는 존재들.
하지만 케일에게 용은 동료다.
화륵.
작은 불이 제 존재감을 드러낸 순간.
케일은 불을 쥔 손으로 두 왕관을 움켜쥐었다.
* * *
“인간아!”
라온은 붉은 안개가 사라지자 얼른 실드 밖으로 튀어나와 케일에게로 다가갔다.
뭔가 이상해서 지하로 내려왔던 최정수도 최한과 함께 얼른 그 뒤를 따라가다가, 멈칫했다.
특히 최정수가 덜컹거리듯 멈추더니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음… 잘 어울린다?”
아주 휘황찬란한 붉은 왕관을 머리에 쓰고 있던 케일이 잠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최정수를 쳐다봤다.
최정수는 그 모습에 살짝 안도했다.
왜냐면 왕관을 쓴 케일의 모습에서 순간 기묘한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그때, 갑자기 케일이 활짝 웃어 보였다.
“하하하, 하하하-!”
최정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인간아! 왜 그렇게 웃나? 어디 또 돈 던지러 가나?”
라온의 당황한 목소리 사이로 최한이 차분하게 물었다.
“원하는 걸 얻으셨습니까?”
그에 케일은 간단하게 답했다.
“어.”
23장. 해일
케일은 손을 뻗어 머리 위에 쓰고 있던 왕관을 내렸다.
문득 라온과 눈이 마주쳤다.
“후욱, 후욱!”
라온이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뭐 하냐?”
“아니다! 순간 인간이 금 용 할배 몸통만큼 커 보였는데, 착각이었던 것 같다!”
그 말에 최한과 최정수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특히 최한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무엇을 얻었냐고 케일에게 물었던 그는 당연히 케일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답할 것이라 예상했다.
‘땀범벅이군.’
왕관을 쓴 케일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찰나에 최한은 몸이 굳어버렸다.
‘정수는 아직 잘 모르는 것 같고.’
최한은 케일 가까이 다가간 라온, 자신과 다르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춘 최정수가 잠시 동안 지었던 표정을 봤었다.
‘무서워했지?’
분명, 최정수는 케일에게 겁을 집어먹었다.
속된 말로 쫄았던 게 틀림없었다.
본인은 이를 인정하려고 들지 않을 태세였지만.
“케일 님.”
최한은 처음으로 케일이 가진 힘이 궁금해졌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왜?”
이번에 얻으신 힘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타다닥. 타다닥!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넋이 나간 권왕을 지나쳐 계단 아래로 내려선 위 상선이 케일을 바라봤다.
“김 공자님!”
사천성주 저택을 일시에 제압하던 그 냉철한 기색이 사라지고, 긴박함이 그 얼굴에 가득했다.
“혈교가 강시를 풀었습니다!”
위 상선을 보던 최한의 시선이 케일에게로 향했다. 케일은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다시 고개를 숙인 케일의 시선이 최한과 부딪쳤다.
“뭔 말 하려고 했어?”
“아닙니다. 나중에 묻겠습니다.”
“그래.”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왕관을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지배하는 아우라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에 봤던 죽음의 신한테 아우라로는 안 지지 않을까?
잔뜩 들뜬 목소리를 케일은 무시했다.
위 상선에게 다가갔다.
“강시가 어디에 나타났습니까?”
“중원 전역,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는 보고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케일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 옆에 위 상선이 따라붙었다.
“계속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에 위 상선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케일이 권왕을 지나쳤다. 위 상선도, 케일도 권왕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허. 허허-”
권왕은 저를 지나쳐 가는 케일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계단을 오르는 케일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올려다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권왕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전이라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냐고 했겠지만, 지금의 권왕은 차마 그 생각이 틀렸다고 할 용기도 담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킬 뿐.
이를 전혀 모른 채 지상으로 올라온 케일은 사천성주 서재에 펼쳐진 지도와 여러 개의 서신을 들여다봤다.
그의 표정이 드물게 심각해져 갔다.
“…황궁에도 나타났군요?”
“네. 수도, 황궁에 강시가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지금 몇몇 지역에서 강시들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으음.
케일이 침음을 흘렸다. 그에 위 상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이 힘드시겠지.’
생강시를 정화하며, 온갖 고생을 다 하던 김 공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강시들이 출몰하니, 그 속내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위 상선은 차마 케일의 눈을 더 볼 수가 없어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케일은 진지하게 생각 중이었다.
‘혈교 이 새끼들이 미쳤나?’
강시 등장?
그럴 수 있다.
언젠가 혈교로 쳐들어가면 강시와 싸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혈교에서 먼저 중원 곳곳에 강시를 풀어낼 줄은 몰랐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먼저 선수 친 건가?’
하긴, 이쯤 되면 정사마에 심어둔 생강시들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을 테니. 그에 따른 다음 단계를 밟을 수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궁에 강시를 들여보내?’
미쳤군.
지금 황제를 건드려서 끝장을 보려고 그러나?
그때, 케일은 이수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