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975
“네. 유리지만 커졌죠.”
고개를 끄덕이는 케일에게 고룡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라온은 그릇이 없어졌다.”
“…네?”
케일은 듣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그릇이… 없다고요?”
그럴 수가 있나?
의문이 서린 눈동자를 마주한 고룡은 그 당시를 떠올렸다.
“1차 성장기. 용은 환상 속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 성룡이 된 자신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성장기를 보내는 방식과 결과가 달라지지.”
라온은 성룡이 된 자신을 보았으리라.
“그리고 1차 성장기 때는 마나를 쓰지 못한다.”
그런데.
“라온은 썼지. 그리고 라온의 몸이 변화했다.”
용의 1차 성장기는 용이 2, 3차 성장기 때 급격한 성장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다. 그래서 외양적 변화는 거의 없어도 그 내부의 변화는 엄청났다.
“라온은 그릇이 없어졌다.”
고룡과 케일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릇의 경계가 사라졌다.”
고룡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상이 라온의 그릇이 된 거야.”
그에 대해 에르하벤은 판단했다.
“나는 그 의미를 라온의 그릇이 그만큼 거대하고, 드래곤 로드로서 자질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무한히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그렇기에 에르하벤은 라온이 무엇이든 배우면 된다고 말하며 열심히 배울 때면, 이런 성향 때문에 그릇의 틀이 사라졌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라온의 특성과 결부 지어 생각해보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더구나.”
라온의 특성 현재.
“세상이 그릇이 된 라온에게는 ‘현재’가 단순히 시간적 의미가 아니었어. 라온에게 이 공간, 시간.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그릇인 거야.”
에르하벤은 올해 7살이 된, 여전히 작은 검은 용을 눈에 담았다.
저 작은 아이는-
“제약이 없어. 라온에게는 제약이 없는 거야. 제약이 된 세상조차 자신의 그릇이 될 수 있으니까.”
문득 케일은 막시리언이 라온을 보고 운명을 바꾼 존재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라온은-”
에르하벤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꽤 기뻐하는 모양새였다.
“라온은, 저 꼬맹이는 정말로 위대했던 거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저 ‘존재’하는 거야. 어디서든 오롯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나아가 특성을 일깨우고 성장한다면-”
고룡은 성룡이 된 라온을 떠올렸다.
제대로 모든 것을 일깨운다면.
자신의 과한 추측일 수도 있지만.
라온은-
“어떤 족쇄든 부수고, 어떤 공간이든, 시간이든 제 뜻대로 다룰 수 있겠지.”
이 말의 의미를 고룡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족쇄든. 그것이 설사 운명일지라도.
라온은 그것을 부술 수 있으리라.
아니, 그 속에서도 오롯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즉,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변수가 될 수 있다.”
케일은 하얀 눈 속에서 뒹구는 검은 용을 바라봤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보았던 검은 용이 떠올랐다.
별을 보며 반짝이던 검푸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죽었어야 하지만 살아남아 운명을 바꾼 존재.
“라온은 현재 살아 있는 것. 그 자체가 그 아이의 힘이지.”
에르하벤은 웃었다.
“살아 있는 것만큼 위대한 것은 없지. 저 아이는 제 말대로 위대한 용이야.”
작가의 말
1부 255-257화를 보시면 조금 더 재밌게 이번 화를 즐길 수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하!
살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 위대한 용이라.
케일이 에르하벤의 말을 음미하던 사이, 라온이 두 앞발에 눈을 묻힌 채 다가왔다.
“나는 위대하다!”
홍이랑 논다고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 같더니, 고룡과 케일의 대화를 다 들은 듯했다.
때문에 케일은 무심하고 가벼운 투로, 흘러가듯 답했다.
“그래, 그래. 너도 위대하고 다 위대하다.”
괜히 이 7살짜리에게 부담을 지워주기는 싫었으니까.
케일은 화제를 전환했다.
“에르하벤 님. 그러면 이제 라온이 마법을 써도 되는 겁니까?”
아까는 코피를 흘렸는데, 이제는 그 몸에 무리가 안 가는 겁니까?
라는 의미를 담은 케일의 눈빛을 이해한 것인지 에르하벤이 입을 열었다.
“라온의 그릇은 라온이 존재하는 현재. 이 세상이라고 했지.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나?”
에르하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 라온이 코피를 흘린 것은 이 세상을 아직 잘 몰라서야. 이 세상의 제약이나 흘러가는 바를 몰랐기에 무리해서 로운에서처럼 마법을 쓰다가 코피를 흘린 것이지.”
케일은 고룡이 말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고룡의 눈동자 속에는 눈과 시린 바람으로 가득한 세상이 온전히 담기고 있었다.
“이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이 현재 속에서 온전히 살아갈수록 라온은 마법에 대한 부담이 사라질 거다.”
즉, 라온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수록, 온전히 존재할수록 라온은 이 세상을 그릇 삼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다.
“케일. 너는 라온에게 세상을 알려주고 들려주고 보여주고 느끼게 해줘라.”
톡.
에르하벤이 다가온 라온의 볼을 손가락으로 튕기듯 찔렀다.
“하지 마라, 금 용 할배야!”
피식 웃은 고룡은 케일을 응시했다.
라온에게 이 세상을 알려줘라.
“그게 요 꼬맹이가 안전해지는 법이야.”
라온이 배를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꼭 어디 당당하게 선포할 때는 늘 이런 자세다.
“인간아! 어쨌든 금 용 할배 말을 줄이자면 이거다!”
아주 당당하게 요구했다.
“앞으로도 나 데리고 다녀라! 그게 나를 위한 거다!”
이 말을 하는 게 목적이었던 듯 히히 웃으며 날개를 파닥였다.
케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까지 마법을 쓸 수 있지?”
그 순간 케일은 기묘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훗.”
라온이 이렇게 분명 웃었다. 케일은 뭔가 기가 막혔다. 지금 저 7살짜리가 ‘훗’ 하고 웃었단 말인가?
문득 케일은 소설 ‘영웅의 탄생’에 묘사되었던 오만하고 건방지고 이기적인 용이 웃는 모양새가 떠올랐다.
‘…역시 이 녀석도 살벌한 용이다.’
라온이 컸을 때가 걱정되려는 순간.
“용 혼혈이랑 검은 성, 투명화하거나 숨길 수 있다!”
곧 신성 제국에서 보낸 토벌대가 이곳으로 온다.
케일은 라온의 말을 듣자마자 박수를 쳤다.
“역시 위대한 용이다.”
“맞다! 나는 위대하다!”
가장 필요한 마법을 라온은 펼칠 수 있었다.
케일이 계속 박수를 쳤고, 라온은 그 장단에 맞추듯 연신 날개를 파닥였다.
그때, 다른 이들이 이 광경에 끼어들었다.
“케일!”
최정수였다.
촌장을 따라 마을에 갔던 이들이 돌아왔다.
케일은 멈칫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이상한데! 막내처럼 다가오는데!”
홍의 말대로, 최정수가 위풍당당한 라온처럼 심하게 뿌듯한 얼굴로 당당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걸음마저 좀 가볍다.
‘저놈이 왜 저래?’
괜히 외면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케일은 외면했다. 하지만 곧 최정수가 내뱉은 말에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어쩌면 마법이랑 오러를 편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몰라!”
놀라서 최정수를 본 순간, 최정수가 최한을 가리켰다.
드래곤 밀라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한 경의 가설이 꽤 흥미롭더군요.”
모두의 시선을 받은 최한이 어색하게 웃자, 케일은 곧장 물었다.
“무슨 가설이지?”
“음.”
최한은 아직 가설의 이름을 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간략하게 요점만 일단 먼저 내뱉었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아우라로 지배한다.’는 가설입니다.”
케일의 표정이 해괴해지고.
-응? 나 불렀어?
지배하는 아우라가 반응했다.
“…일단 말해봐.”
케일은 순한 최한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고, 최한의 말을 모두 다 들은 케일과 다른 이들은 그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오.”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를 본 최한이 말을 마무리 지었다.
“따라서 아우라, 즉 ‘영역’을 장악할 수 있으면 세상의 기운을 억누르는 족쇄를 풀 수 있다고 봅니다.”
고룡이 툭 내뱉었다.
“…이거 가능하겠는데?”
그리고 케일은 천천히 품에서 붉은 왕관을 꺼내 들었다.
하얀 눈 속에서 보석과 몸체 모두 붉은 왕관이 요사스러운, 아니,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
케일이 나타난 땅을 다스리는 하르 왕국.
과거 제국 때에 비하면 그 영토가 삼분지 일로 줄어들었고, 그 영토 또한 비옥함과는 거리가 먼 척박한 땅 위주라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은 상상할 수가 없는 곳.
그곳의 중심인 수도 가장 중심지이자 은밀한 밀실에서 백발의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재상.”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그의 두 손에는 한껏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감은 눈을 뜬 그의 눈동자는 잔뜩 피로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외양은 청년이라고 말하기에도 젊었다.
17살의 어린 왕. 대니스.
“신성 제1기사단이 곧 에르게 산맥에 도착한다지?”
“네. 전하.”
17살의 백발 왕처럼, 팔순을 넘은 재상의 머리칼도 백발이었다.
“…신성 제국은 이번에야말로 늑대족을 모두 없앨 작정인가 보군.”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허.”
왕 대니스는 깊은 탄식을 흘렸다.
그는 자조 어린 미소를 띤 채 재상에게 말했다.
작은 양초 불을 제외하면 어떠한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밀실.
“내가 신성 제국에게 에르게 산맥에 더 이상 수인이 살지 않으니, 신성 기사단을 돌려보내라고 하면 그들이 들어줄까?”
“…….”
재상은 답하지 않았지만, 왕은 답을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쾅!
팔걸이를 내리치는 그의 손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 분노는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늑대족을 돕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그들이 죽게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12살 대니스가 왕이 된 후. 하르 왕국은 공식적으로 늘 말해왔다.
에르게 산맥에서 수인족을 발견한 적이 없다고.
그럼에도 신성 제국은 이따금씩 행사를 진행하듯 토벌대를 파견했고, 그때마다 일부의 늑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에 대해 신성 제국은 하르 왕국이 거짓을 말하는 것 아니냐고 질책을 해왔고. 하르 왕국은 말했다.
‘우리가 약해서, 그 험한 에르게 산맥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늑대족 수인을 발견할 실력도 되지 못했다.’
어찌 보면 왕국의 위신을 상하게 하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이는 진실이었기에 신성 제국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찬란한 제국은 이제 대륙에서 가장 약한 왕국이 되었다.
“…재상, 늑대족을 도울 방법이 있겠나?”
사실 하르 왕국은 늑대족의 존재를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대니스가 왕위에 오른 후로, 북부의 땅은 늘 주시하고 있던 그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변방의 북부 작은 마을의 촌장이 토벌대가 언제 도착할지에 대한 정보를 얻겠는가?
촌장을 비롯한 그 마을 출신 정보원들은 스스로 정보를 알아낸 것이라고 하겠지만, 이는 뒤에서 알게 모르게 대니스가 도움을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 또한 고작 그 정도란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야. 아니야. 재상의 탓이 아니야.”
대니스는 괴로움을 참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재상이 힘써준 덕에, 토벌대의 이동을 늦추지 않았는가? 그 악독한 놈들 붙잡아두느라 고생 많이 한 것 아네.”
“그것이 어찌 제 힘이겠습니까. 전하께서 힘을 써주신 덕이지요.”
신성 제국에서부터 출발한 토벌대는 하르 왕국을 가로질러 북부로 향했다.
티 나지 않게 그들의 걸음을 늦추고, 동시에 촌장이나 늑대족이 눈치채지 못하게 정보를 북부로 전달하느라 꽤나 고생한 그들이었다.
왕은 이렇게라도 수인족들이 에르게 산맥 깊숙이 숨기를 혹은 도망가기를 바랐다.
“…몰래 사람을 보냈겠지?”
“네. 수호 부단장과 단원을 몇 명 보냈습니다.”
“제1기사단 놈들이 참으로 악독하다고 들었네. 오만방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들었어.”
어린 왕 대니스는 수도에 들러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갔던 토벌대 대표를 떠올렸다.
예의 바르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던 자.
용 혼혈이라고, 인간인 자신을 깔보던 그 눈빛.
자신의 앞에서는 예의를 차렸으나, 그들의 악명은 대륙을 진동했다.
그자들이 에르게 산맥을 초토화시키는 것을 넘어 마을까지 망가트릴까 봐 대니스는 걱정이었다.
북부에서 무슨 문제가 터질지 몰랐다.
“최악은 막아야 하네.”
“네.”
피곤한 왕의 눈동자에 재상의 눈빛이 담겼다.
백발의 노인은 그 안에 담긴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후우.”
왕 대니스는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잠긴 벽이 보였다.
“…이렇게 또 하나, 왕국의 힘을 잃게 되는군.”
에르게 산맥에 있는 늑대족.
그들은 왕국의 미래를 위해 지켜줘야 할 존재들이라 생각한 대니스였다.
꽈악.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제발 다시-
하르 왕국이 일어서는 모습을, 대니스는 살아 있는 동안 이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왕국이 가진 것이 없었다.
‘무력하다.’
이 무력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매번 이렇게 손 놓고 봐야 하는 것일까.
어둠에 잠긴 채 왕 대니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늙은 재상은 어린 왕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 영민하신 분이,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재상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이 영민하고 어린 왕이 뜻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뜻하는 바를 이루기에는 하르 왕국은 가진 것이 없었고.
‘갈가리 찢겨졌지.’
왕국 안에는 배신자가 많다.
왕 대니스 혹은 하르 왕국에 충성을 하지 않는 자가 수뇌부에도 존재했다.
심지어 그들이 누군지도 아직 재상은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렇게 왕과 재상쯤이나 되는 자들이 이 좁고 어두운 밀실에 숨어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재상.”
어린 왕이 감았던 눈을 떴다. 피로함 속에서도 그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기다렸다.
숨죽이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작은, 한 톨의 빛이라도. 희망이라도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북부를 계속 주시하게.”
그리고 그는 희망을 잡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었다.
“수인족을 난폭하게 만드는 독에 대한 소문. 그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지?”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또, 푸른 늑대. 단서는 찾았나?”
대니스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
“재상. 드래곤을 죽일 수 있다는 소문. 그거 누가 말한 건지 찾았나?”
그리고 재상은 답했다.
“꼬리를 잡았습니다.”
백발의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하르 왕국의 미래를 조금 더 밝히기 위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신성 제국의 중심.
그곳에는 황궁 대신에 거대한 신전이 존재했다.
‘드래곤’을 모시는 수많은 신전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 대신전.
대신전의 가장 중심지.
또옥. 똑.
공중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모여 작은 호수가 만들어진 기도실.
그곳에 있던 한 여인이 감았던 눈을 떴다.
교황, 카실리아.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곁에 있던 주교가 다가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북부.”
그녀의 눈이 기도실 바닥에 그려진 대륙 전도로 향했다.
“북부에서 규칙이 어그러졌군요.”
신기하게도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륙 북부, 에르게 산맥 근처가 폭풍에 휘말린 듯 일그러졌다.
이는 드래곤께서 만드신 세상의 법칙이 어그러지는 변수가 발생했음을 뜻했다.
그리고 이 상황은 두 가지를 뜻했다.
주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떤 드래곤께서 유희를 나가신 것일까요?”
세상의 법칙을 어그러뜨릴 수 있는 자는 새로운 세상의 규칙을 만든 드래곤들뿐이다.
그렇기에 이따금 드래곤들께서는 유희 삼아 세상에 나와 규칙을 어그러뜨리며 즐기시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로드께서 말씀이 따로 없으십니까?”
“네.”
교황은 따로 언질을 듣지 못했기에, 명령했다.
“북부로 간 토벌대에게 연락하세요.”
드래곤의 유희라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 진짜 세상의 법칙이 어그러지는 변수가 발생했다면.
교황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에르게 산맥 쪽에서 규칙이 어그러졌으니, 그 이유를 찾고 바로잡으라고요.”
“알겠습니다.”
교황과 주교는 그 일이 실패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번 토벌대는 자그마치 드래곤의 피를 절반 이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세상의 규칙은 지켜져야 합니다.”
교황은 온화하게 말했다.
“모두를 위해.”
주교는 그 말에 답했다.
“모두를 위해.”
또옥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호숫가의 표면이 흔들리고 있었다.
***
며칠 후.
토벌대의 책임자, 제뉴의 눈동자에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보이지 않을 아주 먼 거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눈으로 뒤덮인 낙후된 마을이 보였다.
그 너머 에르게 산맥의 험준한 풍경이 눈발 속에서도 선명하게 자리해 있었다.
“대장, 다 죽이면 되는 거지?”
그는 수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심한 어조였다.
그 시각, 숨죽이고 있던 마을 촌장은 토벌대가 곧 도착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곳엔 최한이 천으로 검을 닦고 있었다.
촌장은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는 토벌대가 보이지 않는 창밖을 힐끗거리던 그는 다시 최한을 바라봤다.
고요한 호수처럼. 그의 곁은 조용했다. 창밖에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조차 그에게는 닿지 않는 듯했다.
“최한 경.”
촌장은 결국 입을 열었다.
“조만간 토벌대가 올 겁니다.”
그도 알고 최한도 아는 내용이었다.
“괜찮겠죠?”
그는 떨리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또 물었다.
“우리는 괜찮겠지요?”
그 순간, 최한은 검을 닦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