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her RAW novel - Chapter 53
54화.
54화 Epilogue III
“HBS, Western Avenue Entrance, please.”(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웨스턴 에비뉴 입구로 가주세요.)
택시를 타고 행선지를 말할 때부터 가슴이 툭탁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돌과 회색빛 돌이 번갈아들며 동그랗게 모양을 만들어내는 작은 공터를 가로지르고 손바닥만 한 아이비가 벽면을 덮어 오르기 시작하는 붉은 벽돌의 건물을 하나 지났을 때에 심장 소리는 귀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SPANGLER’
금빛으로 박힌 건물 이름을 보며 소영은 숨을 크게 쉬었다.
“서훈아.”
조그맣게 발음해보며 건물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서훈이 지난 이 년간 공부했던 건물이다. 파라솔이 달린 동그란 야외 테이블 뒤로 그리스 양식을 본뜬 하얀 석주들이 서 있고 시원하게 뚫린 격자무늬 문이 보였다.
하나씩 상상했다.
신문을 펴들고 있는 학생을 보며 서훈이 앉아 있는 모습을, 커피를 앞에 둔 채로 페이퍼물을 넘겨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둘러앉아 팀 베이스 과제를 하는 모습을, 자유로이 떠들면서 MBA 휴게실로 통하는 문을 오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생각했다. 수없이 이곳을 드나들었을 서훈을…….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여러 개의 샹들리에 아래 커다란 소파들과 탁자, 고급스런 카펫이 깔린 휴게실은 무척 화려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북적북적 학생들로 반 이상 차 있는 공간을 들여다보며 소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건물 뒤쪽으로 돌아갔다.
아스팔트가 깔리긴 했지만 양쪽 가장자리로 자리 잡은 잔디와 나무들이 작은 오솔길처럼 느껴지는 길을 밟아 나갔다. 십 년도 전에 서훈과 걸었던 학관 앞 십자길 같은 그곳에서 소영은 심호흡을 했다. 조금은 한적한 곳이었다. 창피하게도 아직도 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면서 벤치에 걸터앉았다. 건물 초록색 문이 비스듬히 보이는 방향으로 놓인 낡은 듯한 벤치는 무척 편안하고 따뜻했다. 화창한 봄 날씨였다. 택시기사가 오는 길에 몇 번이나 좋은 날씨라고 강조할 만했다. 청명한 하늘에서 햇살이 흩뿌려졌다. 벤치 뒤에 서 있는 나무 덕에 머리 위로 나무 그늘이 만들어졌지만 5월 말의 햇살은 꽤 따가웠다. 나뭇잎이 한들거릴 때마다 청바지 위로 드리운 그늘이 하늘하늘 물결처럼 움직였다. 반짝,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살에 반지가 빛을 반사했다. 소영은 약지를 들어 입술 근처로 가져댔다가 떼어냈다.
지난겨울, 서훈이 끼워준 반지…….
이미 습관처럼 되어버린 일이었다. 두 사람은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결국 결혼식을 올렸다. 소영이 YK로 옮겨 일하기 시작한 지 반년 후, 부장 승진을 하면서였다.
‘한 해라도 어릴 때 결혼을 해야 해. 신부는 무조건 어린 신부가 예뻐.’
혜숙이 조금 당겨진 결혼식에 제일 기뻐했다. 혜숙은 서훈을 무척 좋아했다. 민영의 표현에 따르자면, ‘인물과 뇌물’에 눈이 멀었단다. 서훈과 처음 집으로 들어섰을 때, 혜숙은 무척 보기 드물게도 허둥거리고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서훈과 제대로 눈도 잘 맞추지 못하던 혜숙이 평소처럼 화사한 미소를 함박 지은 것은 서훈이 준비한 자그마한 선물을 풀었을 때였다. 중국 전통 시장을 뒤져서 찾아낸 보석함과 작은 다이어리였다. 나비와 꽃이 고운 손수로 한 땀 한 땀 놓여 있는 비단으로 마감이 된 보석함과 다이어리는 소영의 눈에도 무척 고와 보였다. 보석함과 다이어리를 확인한 순간, 혜숙은 정말 뺨을 물들일 정도로 기뻐했다.
“어머, 이런 거 나 처음 받아봐요. 회장님이 중국에 자주 다니셨지만 이런 건 못 찾으셨는데…….”
굉장히 효과적인 뇌물이었다고 민영은 그랬다. 서훈이 집에 다녀간 후 민영이 소영의 방에 들어와 한 시간이 넘게 묻고 또 물었다. 짤막짤막하게 만나고 사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민영은 눈물까지 글썽여가며 듣더니 마지막에 덧붙였다.
“언니, 근데 엄마가 말야, 세상에 그러더라. ‘남자 나이 많음 뭐 좋아. 나중에 세대차이나. 어른 노릇이나 하려 하고. 아버지랑 내가 여덟이나 차이 나잖니. 그거, 별로야. 나이 들수록 그래.’ 이거 너무하지 않아 거의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야. 진짜 귀염받고 편하게 살았으면서 말야.”
물론 소영의 결혼이 조금 당겨진 것이 혜숙의 주장 때문은 아니었다. 쓸데없는 언론의 관심을 덜 받으려는 계산이었지만 그래도 정현태 회장이 우려하던 말들은 이미 한차례 지나갔다. 선우회 이야기도 나왔고 과거 서훈의 사진도 인터넷에서 떠돌았다. 극성스런 언론은 하버드까지도 찾아갔다. 하지만 정소영 부장은 제법, 정 회장도 흡족할 정도로 언론대처든 회사에서 사람들을 다루는 일이든 업무든 잘해냈다. 단지 공적인 부분을 완벽하게 수행할수록 기대고 싶은 누군가가 사무쳤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양가에 인사를 드리는 며칠 이후에 다시 보스턴으로 가야 했던 신랑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등을 두드려주고 따뜻하게 품어주고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그리고 웃게 만드는 사람, 서훈이…….
“잘 있어. 일 잘하고, 밥 잘 먹고……. 잘 자고. 예쁜 내 신부.”
서훈은 가는 날 꼭 끌어안아주며 말했다.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예쁜 내 신랑.”
흉내 내어 말하면서 소영은 웃었다. 서훈이 유학을 간 이후 충분히 그리웠던 일 년 반이었는데 그날 인사를 나눌 때만큼 가슴이 쓰렸던 적이 없었다.
일에 지쳐 들어온 밤에는 자그마한 탁상 달력을 앞에 놓고 한 장씩 넘겨보았다. 6월까지. 6월 초면 졸업식, 한양 간 이 도령 기다리듯 졸업식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가 어떤 날은 저도 모르게 서러워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서훈이 말대로 울보가 다 되었다. 지난날, 어떻게 그렇게도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았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레 눈물도 떨어지고 그만큼 더 소리 내어 웃기도 잘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무척이나 서럽고 외로운 밤이었다. 숨이 찰 정도로 닥치는 일을 처리해내는 것도 지치고 사람들 눈치를 살피는 것도, 스무 살씩 연배가 높은 노련한 이사들을 상대로 기가 죽지 않는 것도, 정 회장의 기대에 모자라지 않도록 애쓰는 것도 갑자기 모두 힘겨운 날이었다. 오전부터 몇 번이나 비행기를 타고 훌쩍 보스턴으로 떠나는 상상을 했다. 서훈이 따뜻하게 안아주는 상상도. ‘괜찮아’ 말해주는 것도, 등을 두드려주는 것도.
집에 늦게 돌아와 맥없이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으응.’ ‘응.’ 소영은 기분을 감추느라 몇 번 건성으로 답하고 말았다.
[어디 아퍼요 ]“아니.”
[목소리가 그래서. 일이 힘들어 ]“아니.”
[회사에서 누가 힘들게 해 ]“아니, 누가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축 처져 있어.]“그냥, 졸려서.”
[미안해요. 피곤하구나. 그럼 어서 자요. 잘 자.]“그래, 너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억지로 웃어보다가 통화를 마치자마자 그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데 민영이 툭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몰랐다. 민영은 마지막엔 조금 화를 내며 말했다.
“그렇게 보고 싶어 그러면 가. 갔다 오면 되지, 무슨 눈치를 그렇게 봐 회사 사람들이 언니 감시단이니 아버지가 뭐라 그래 무슨 상관이니. 신혼부부가 얼굴 보러 가겠다는데.”
그렇다고 보고 싶을 때마다 보스턴으로 날아갈 순 없었지만 결국 이렇게 졸업식 며칠 앞서서 오기는 하였다.
조금 긴 휴가를 내고 파이널 시험 마지막 날에 맞춰 간다고 연락하려 하는데 민영이 극구 말렸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프라이즈!’ 다른 하나는 가끔 불시에 방문을 해야 하는데 한 번도 안 했으니 이번에 하란다. 민영은 살짝 신경이 쓰이는 말도 했다.
“언니, 형부가 은근히 서양 여자애들도 좋아하는 타입이다. 왜 보통 백인 여자애들 동양 남자, 특히 한국남자 쳐다도 안 보는데 이상하게 그런 타입은 좋아하더라.”
“뭐 어떤 타입인데.”
“으흠, 일단 근육이 볼륨감 있게 예쁘고 튼튼하고, 그리고 섹시한데 동시에 귀여운 얼굴. 형부가 은근 웃으면 귀여운 거 알지 피부도 깨끗하고 말야, 게다가 얼굴 살짝 그을린 거 보니까 딱이야, 딱. 나 교환 학생 할 때 클래스 예쁜 백인 여자애들이 껌벅껌벅 넘어가는 한국 남자애가 있었는데 꼭 그런 타입이었어. 그렇다고 별일이야 없겠지만, 인기는 많을 거야. 장담해.”
기억을 더듬어보니 미국에서 여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아시아계 남자들은 굳이 말하자면 서훈과 가까운 타입이기는 했다.
후우…….
그래서 언제부터 민영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나 모르겠다 싶지만 오늘의 의상도 민영이 골라준 대로다. 버건디 붉은색 상의를 흰색 슬리브리스와 레이어드했다. 얇은 실켓 면이라 팔 부분은 피트되고 네크라인부터 허리 라인까지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이 깊이 구부리면 가슴선이 보일 것 같이 불안한 의상이었지만 민영이 꼭 주장했다.
“그럼, 부장님 냄새나는 옷 그대로 입고 만날래 첫눈에 보고 심장이 와르르르 뛰어야 해. 그런 성적 긴장감이 중요해. 꼭 기억하라구!”
그래서 힙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꼭 맞는 크롭트 청바지도 입었다. 붉은빛 보석이 박힌 뮬 위에 붉은색 페디큐어가 된 하얀 발도 민영의 작품이다. 목선이 드러나도록 한 번 비틀어 묶어 올린 머리형도 열심히 배웠다. 앞머리는 자연스레 흐르고 뒷머리는 동그란 매듭 형태처럼 보이되 반드시 몇 가닥이 예쁘게 흘러야 한단다.
어렵기도 해라.
소영은 고개를 저었지만 민영은 몇 번이고 거울 앞에서 반복해서 묶었다 풀어주었다.
잘된 건가
목덜미를 드러내며 위로 묶어진 머리 매듭을 만져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응.”
[아직 잠들지 않았죠 ]조금 웅웅 울리는 소리, 복도인 듯했다.
“으응. 시험 잘 봤어 ”
[그냥, 지금 막 마치고 나오는 중. 삼십 분쯤 빨리 냈다.]“엉망으로 쓴 거 아니었어 ”
[아냐, 금융이면 한 시간은 빨리 나오는데 기업, 창업이었어. 좀 쓰는 거였거든.]“자신만만 ”
[최우수는 장담 못해도 우수는 될걸 졸업식에 오면 보여줄게. 정말로 유치하게도, 다이닝홀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랗게 현판을 만들어서 세워둬. 이름을 줄줄 박아서 말야.]“정말 그렇게 공불 잘했단 말야 꼭 봐야겠어. 기대돼.”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중인지 잘게 숨을 쉬며 답했다.
[내가 머리가 좀 좋잖아. 후훗, 졸업식 이틀 전에 오니까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다. 이야, 그동안 나는 파이널 페이퍼 하나만 마무리해서 내면…….]말이 멈추었다.
“응 ”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어보는데 건물 초록 문이 열리고 문고리를 잡은 채로 서훈이 서 있었다.
“소영……아.”
소영은 핸드폰을 덮으며 일어섰다. 서훈은 눈이 부신 듯, 한 번 깜박이더니 뛰어왔다. 몇 발 소영이 다가가기 전에 서훈은 가슴에 소영을 그대로 품었다. 뛰어오르는 심장이 쿡쿡 박힐 듯이 선명했다. 그리운 온도, 그리운 숨결, 그리운 냄새……. 소영은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된 거야. 언제 왔어 ”
“보스턴에는 두 시간 전 도착, 여기 온 건 조금 전.”
서훈은 소영의 손을 잡더니 제 심장 위로 두었다.
“제대로 뛰나 봐줘요.”
“잘 뛰어. 좀 빠르긴 하지만.”
소영이 배시시 웃자 서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요.”
예쁘게 그을린 얼굴과 더 단단해진 것 같은 팔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안 되지. 예쁜 내 신랑.”
서훈은 얼굴을 감싸 쥐어보더니 한 번 더 깊이 끌어안았다가 떼어냈다.
손을 잡고 학교 뒤편 찰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시원한 강바람이 좋아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엄마 오리를 졸졸 따라가는 새끼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영은 까르르 웃었다.
“어머, 저것 좀 봐, 정말 예쁘다. 꼭 닮은 모양으로 엄마 따라다니는 것 좀 봐. 아기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다 너무 예뻐.”
“그 동화 알죠 Duckling 이야기, 초록색 표지.”
“응, 보스턴이 배경이지. 우리 거기도 가보자. 그 사거리 말야. 경찰관이 차들을 세우고 오리들 길 건너게 해준 곳.”
“그래요. 그런데 밥부터 먹어야지. 배고프지 않아요 ”
“조금.”
“바로 여기 간단하게 한국 음식 먹을 수 있는 곳이 있고 시내로 가면 차이나타운에 랍스터 요리를 잘하는 곳이 있어요. 아니면 찰스 호텔에 있는 해산물 레스토랑도 괜찮은데.”
“해산물 레스토랑으로 가자. 차이나타운까지는 못 가겠어. 나 배고파.”
서훈은 손을 굳게 잡으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
학교 옆에 붙어 있는 찰스 호텔의 해산물 레스토랑은 가벼운 식사를 즐기기에 부담 없는 캐주얼한 분위기였다. 웨이터의 경쾌한 인사를 받으며 소영은 메뉴판을 열심히 읽었다.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목덜미로 뻗어오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흘러내려온 머릿결을 걷어주더니 어깨와 쇄골을 따라 머뭇거리는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예쁘지 ”
“응 ”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식히며 물었다.
“못 본 동안 더 예뻐졌네.”
조금 더 노골적인 손길과 눈길이었다.
심장이 와르르르 뛰는, 성적 긴장감이라는 계책을 성공시킨 걸까.
하지만 지금은 소영의 심장이 더 와르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저기, 나……. 랍스터 파스타로.”
계속 목덜미에서 귓불로 오르내리는 손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붙잡혔다.
“배 많이 고파요 ”
“으응.”
반갑게 인사했던 웨이터를 위해 지폐 한 장을 올리고는 서훈은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조금 있다가 더 맛있는 거 먹어.”
소영이 예약한 시내의 특급호텔 스위트룸이 얌전하게 비어 있었지만 말할 틈도 없었다. 찰스 호텔 몇 층인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들어갔다.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벌써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열심히 만들었던 동그랗게 매듭진 머리가 풀리고 간질이는 머릿결 사이로 더 간질거리고 달콤한 촉감이 빠르게 내달렸다. 훌륭한 전략이 되어주었던 붉은색 상의가 벗겨지고 흰색 탑 위로 뜨거운 입술이 눌러왔다. 얇은 속옷까지 순식간에 젖어들자 소영은 잦은 숨을 쉬며 그를 밀어냈다. 어깨를 들썩이는 서훈을 달래듯 쓰다듬으며 검은색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착하게도 움직여주는 덕분에 쉽게 벗겨냈다. 지치도록 차오르던 그리움을, 타오르는 목마름을 해갈시킬 만큼 충분히 느끼고 싶었다.
불안한 자세로 상체를 일으키고 서훈의 입술도 손도 피하며 입을 맘껏 맞추는데 신음 소리를 뱉어내며 서훈이 중얼거렸다.
“나, 죽일 셈이에요 ”
“응.”
바지 지퍼를 내리며 소영은 뻔뻔스럽게 답했다.
“그래 봐요, 그럼.”
“그럴게.”
소영은 느긋해진 목소리가 얄미워서 혀끝도 손톱도 세워버렸다.
서훈이 조금 있다가 먹자던 점심은 저녁 식사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별맛이 없는 룸서비스였다.
초저녁부터 달콤한 잠에 취했다. 한밤이 지나 새벽이 시작되려나 보다.
“잘 먹고 잘 잤죠 더 재우고 싶은데, 미안해.”
서훈이 가슴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까지 소영이 짐을 풀었던 시내의 스위트룸의 투숙객은 트렁크뿐이었다.
***
“대식아!”
세상에서 엄마 아빠 다음이 이모란다. 대식이가 제법 빠르게 뛰어 민영의 품에 안겼다.
“이모오! 미녕 이모오!”
“와, 대식이 그 사이 또 컸네!”
소파로 걸어가는 동안 대식이는 민영의 머리핀이 신기한지 손을 뻗어 만지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 ”
“대식이랑 놀았지. 일 없는 주말이라도 엄마 실컷 보라고.”
민영은 대식에게, ‘그랬어 엄마랑 노니까 좋아 어어, 니네 엄마가 좀 훌륭해. YK 맡으신대자나’ 중간중간 얼러가며 장난스레 종알거렸다.
“그런데 형부는 ”
“아버지랑 골프 갔어. 홍 사장님도 같이. 좀 있으면 들어올 거야.”
“오호, 이제 윤 이사님 홍 사장님이랑 같이할 정도로 실력 향상 ”
“글쎄, 아직 배우는 쪽이 맞겠지. 언제 강 서방이랑 같이 가야지 아버지 말씀이 그래도 초보치곤 썩 잘한다 하셨으니까 웬만큼 맞출 거야.”
“으흠, 아버지 말은 살짝 신뢰도 떨어진다. 형부라 하면 무조건 너무 좋아하시잖아.”
민영은 무릎 위로 앉힌 대식의 뺨에 입을 가볍게 맞추며 웃었다.
“하긴, 강 서방도 되게 좋아해. 형부는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뭔가가 확실히 있나 봐.”
소영이 피식 웃는데 민영이 갑자기 생각난 듯 가방을 열었다.
“자아, 대식이 좋아하는 토마스다.”
읏차, 민영은 대식을 내려놓고는 버튼을 누르면 지잉 혼자 달려 나가는 토마스 기차를 보여주었다. 기차는 장애물에 부딪히면 방향을 바꾸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대식이 정신없이 토마스를 쫓아가는 모습을 한참 보더니 민영은 소영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울 대식이, 넘 귀엽다. 정말 이렇게 잘생긴 아기 첨 봐. 형부랑 언닐 꼭 반반 아주 잘 섞었어. 그래, 밥 굶고 하면 이렇게 되는 거지 나도 이제 슬슬 애기 가지려고 하거든, 꼭 굶고 할 거야.”
짓궂게 속삭이는 말에 어깨를 때려줬지만 민영은 헤헤거릴 뿐이었다.
하긴, 대식이라는 이름이 결정된 순간 결코 잊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서훈의 졸업식에 참석하겠다고 도착한 민영이 그녀의 조언에 대한 성과를 꼬치꼬치 캐묻자 훌륭했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찰스 호텔 그 해산물 레스토랑이 문제였다. 레스토랑 테이블에서 메뉴판을 들여다보더니, 서훈은 별생각 없이 흘리듯 말했다.
“전에 도착한 날, 뭐였지, 랍스터 파스타였나. 주문하려는데 못 먹고 가서 좀 그랬죠 여기 그거 맛있어. 오늘 먹어.”
그 말을 민영이 놓치지 않았다. 대충 얼버무렸는데 거짓말 못하는 소영이 눈치 빠른 민영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 달쯤 후부터 소영은 입덧을 시작했고 민영은 놀리기 시작했다.
“있지, 걔는 대식이야. 먹을 식, 대신할 대”
장난처럼 부른 태명이 정이 들었고 건강한 아들로 태어난 아기에게 비록 한자는 정 회장이 고른 대로라 대신할 대에 먹을 식이 아니지만 윤대식이라는 이름이 정해졌다. 촌스러, 라고 걱정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사연을 모르는 정 회장의 표현을 따르자면 크게 될 이름이란다. 하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선택을 받았던 소영이도 그리 세련된 이름은 아니었다.
“엄마! 이거, 이거!”
대식이 손에 드디어 요리조리 달려 나가던 조그만 토마스 기차가 들어왔다. 칭찬을 바라는 반짝이는 눈, 발개진 뺨을 보며 소영은 까르르 웃었다.
“우리 대식이, 토마스 잡았구나. 이리 엄마한테 와.”
대식은 머리를 조금 앞으로 기울인 채로 뒤뚱뒤뚱 부지런히 달려왔다.
“우리 아기.”
소영은 팔을 벌려 대식을 끌어안았다.
달콤한 아기 냄새,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이다. 나무향을 닮은 누군가의 체향 다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