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11
11화.
11화
서진이 어깨에 기대어 오자 기훈은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볼에 닿아 간질였다.
“빨개졌네. 서진이 취했나 보다.”
기훈은 서진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니야, 취하기는.”
서진이 얼굴에 머물고 있는 그의 손을 감싸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아, 시원해.”
서진은 기훈의 손에 달아오른 뺨을 대어 강아지처럼 비볐다.
“난 오빠 손이 너무 좋아.”
“그래 ”
기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서진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길고 포근하고 그리고 추울 때는 따뜻하고 더울 때는 시원해.”
“하하, 마법 손이구나. 여태 몰랐는걸.”
그가 확인이라도 하듯 제 손을 들어 보였다.
“응, 마법이야. 혹시 마법사 아닌가 몰라. 난 항상 오빠만 보면 정신이 없어.”
“왜 그럴까.”
“몰라, 마법사의 사특한 주술에 걸렸나 봐. 영원히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 주술이었으면 좋겠어.”
서진은 고개를 들어 그의 뺨에 입을 살포시 가져 대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서진은 기훈에게 기대어 천천히 그의 집으로 향했다. 기훈은 미리 준비라도 했었는지 레드와인 한 병을 들어 보였다.
“힘든 시험은 다 지났으니까 축하주 한 잔만 더 할까.”
서진은 붉은 와인을 단숨에 반쯤 비워 냈다.
“너무 취하겠다.”
“나 오늘 잔뜩 취할 건데.”
서진은 기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향수라고 했지 참 좋아.”
“응.”
“오빠를 처음 본 그날에도 이 향기가 났었어. 시원하고 상쾌하지만 잔향이 무겁게 남는.”
서진이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입에서도 작은 한숨이 나왔다. 견디기 어려운 듯 슬쩍 몸을 틀어 버리는 기훈을 서진이 다잡듯이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
“오빠.”
기훈이 자상한 손길로 서진의 등을 토닥였다.
“늦었다. 데려다줄게.”
“싫어. 오늘 여기 있을 거야.”
똑바로 쳐다보자 기훈이 웃으며 검지로 서진의 볼을 쓰다듬었다.
“겨우 몇 살 많으면서 너무 그렇게 애기 취급하지 마. 기분 나빠.”
“내가 언제 ”
“지금도 그러잖아.”
그대로 일어설 것만 같았던 기훈은 서진의 뺨을 감싸더니 입술을 포개었다. 부드럽게 머물던 입술로 속삭였다.
“윤서진, 너 나한테 계속 여자였어. 정말 애기로 봐야 할 그때에도. 모르니 ”
기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호기롭게 이야기는 했지만 상상보다 훨씬 더 부끄럽고 초조했다. 서진은 욕실 안에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거실에 서서 카펫만 보고 있자니 젖은 몸에 한기가 느껴진다. 서진은 어깨를 움츠렸다. 기훈이 싱긋 웃으며 다가와 서진을 가볍게 안았다.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툭툭 털어 내었다.
“방에 가 있어. 감기 걸리겠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서진은 민망함을 애써 감추며 기훈의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방 안의 온기가 발끝 손끝부터 온몸으로 기분 좋게 번졌다.
“아, 따뜻하다.”
서진은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마저 닦았다. 침구는 청결하고 구름처럼 폭신폭신했다. 손바닥으로 이불을 눌러 보다가 결국 노곤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드러누웠다. 침대에서 묻어나는 향이 좋아 코를 비볐다.
“오빠 냄새, 좋다.”
이불에 얼굴을 대고 누웠던 서진은 깜박깜박 포근한 기운에 취했다. 퀄리를 준비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날이 며칠째인지도 모르겠다. 맥주에 와인까지 마시고 더운 물로 샤워를 마친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처졌다.
“잠들면 안 되는데. 기훈 오빠 올 텐데…….”
서진의 눈꺼풀이 결국 툭 떨어졌다.
기훈이 문을 열고 살며시 들어섰을 때, 서진은 수면 욕구에 막 항복을 해 버린 참이었다. 기훈은 조심스레 침대 옆에 앉아 서진을 내려다보았다.
“서진아.”
가만히 불러 보았지만 서진은 이미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작은 새처럼 잠들어 있었다. 세상모르고 잠이 든 서진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물기도 채 마르지 않아 이마에 붙어 있는 머리칼을 조심스레 정리했다. 기훈은 한참 동안 행여 서진이 단꿈을 깰까, 숨소리도 죽여 가며 서진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세한그룹의 차남으로 기훈은 이 순간까지 한 번도 자신의 위치에 부족하거나 넘침 없이 처신했다. 기억도 없는 어릴 때부터 환경에 길들여졌고, 거기에 타고난 성실함과 신중함이 더해졌다. 어른들의 눈에 흡족한 행동과 마음가짐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세한 일가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어느 순간부터 기훈은 스스로 쌓아 온 기대 수준에 맞춰 운신의 반경이나, 감정의 반경까지 스스로 통제하고 제한하였다. 대학 시절 여름날 우연히 마주쳤던 서진은 그에게 작은 일탈이었고 설명하지 못할 신선한 바람이었다.
세한그룹의 규칙에 따라 아들딸들은 학업을 마치고 회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업무를 익힐 때까지 신분을 비밀에 부쳤다. 부모에 대한 학적부 기록조차 관리할 만큼 그룹의 노력은 철저하였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도 있지만 사업보다도 자식 농사만은 제대로 지어야 한다는 창업주, 할아버지의 믿음 때문이었다. 세한의 규칙에는 어떤 예외도 허용되지 않았다. 당연히 재계 자녀들과 사적인 모임조차 불가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세한의 자식들이 재계에 데뷔할 때면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세한그룹 2세 OOO, 베일을 벗는다는 식의 타이틀을 뽑곤 했다. 그때마다 그들의 학벌과 평소의 모습들이 화제에 올랐는데 세한이 창업주의 뜻대로 자식 농사를 더 잘 지었다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기훈의 형도 기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기훈의 경우 터울이 지는 형 때문에 가까운 지인 사이에는 재계에 얼굴을 내밀기 전 먼저 세한의 3세임이 밝혀졌다는 점이 달랐다. 하지만 기훈은 서진에게만은 그 말이 들어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였다.
기훈은 자신이 없었다. 서진과 세한은 그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처럼 남아 있다.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일로 휘둘리게 하고 싶지도, 자신이 휘둘리고 싶지도 않다. 자신이 더 확실히 자리를 잡고 서진이 공부를 마칠 때쯤 기훈은 어려운 숙제를 풀 해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서진을 지켜보던 기훈의 얼굴에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서진아, 네가 다 알게 되는 날, 그날이 내가 너를 잡을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날이어야 해. 제발, 그날까지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줘.’
기훈은 깊이 잠든 서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오랜만에 단잠을 길게 잤다. 서진이 눈을 뜬 건 아침이 환하게 밝은 뒤였다. 서진은 습관적으로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기지개를 켜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제 입었던 기훈의 티셔츠 차림 그대로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절망적이다.
“아, 뭐야 설마 계속 지금까지 잠만 잔 거야 ”
머리를 양손 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밖으로 나가자 거실 소파에 누워 여태 잠들어 있는 기훈이 보였다.
“너무해, 깨우지 않고 이렇게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
평화로운 표정으로 잠이 든 그의 얼굴에 살며시 손가락 하나를 가져다 댔다. 반듯한 이마와 짙고 고르게 일자로 뻗은 눈썹에 조심스레 머물던 손길이 그의 입술 위로 살며시 앉았다. 손가락으로 톡톡 입술을 두드렸다.
“잠자는 소파 위의 왕자.”
서진이 눈을 뜨는 기훈을 보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일어났어 ”
기훈의 입가에 잡히는 미소를 보며 서진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오빠. 왜 안 깨웠어 ”
“너무 예쁘게 잘 자던데. 퀄리 준비하느라 고생한 게 한 번에 풀어졌나 봐.”
기훈이 몸을 반쯤 일으켜 서진의 불퉁한 뺨을 톡톡 건드렸다.
“보지 마. 창피해 죽겠어.”
서진은 그의 손을 털어 내며 고개를 돌렸다.
“커피 줄까 ”
기훈이 습관처럼 오디오 버튼을 눌렀다. 피아노 선율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쇼팽 ”
“응, 즉흥환상곡.”
“난 폴로네이즈 영웅 듣고 싶어.”
“찾아 줄게. 아마 다음이나 다다음 곡일 거야.”
“아냐. 나 세수하고 나올게. 차 마시면서 같이 들어.”
“그래. 커피 내릴까 ”
“아니, 블랙티로.”
“알았어.”
서진은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이없이 잠들어 버린 바보 같은 모습이 상상되어 열이 오른 얼굴을 찬물에 여러 차례 씻었다.
톡, 톡…….
기훈이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 돌아서던 참이었다. 누군가가 방문하기는 너무 이른 휴일 아침이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의아해하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
“문 열어.”
뜻밖의 목소리에 기훈은 숨을 멈추었다. 곤란한 상황이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손을 들어 초조하게 콧날을 쓸어내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노크 소리는 서너 차례 계속되었다.
“기훈아, 문 열어.”
기훈이 주저하며 문을 열었다.
“잘 지냈니, 아들 ”
이 여사는 팔을 벌려 아들을 가볍게 포옹했다. 단정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빈틈없이 완벽하고 단정한 화장을 마친 모습이다. 다정한 스킨십이 전하는 온도와 반대로 이 여사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다.
거침없이 현관 안으로 들어선 이 여사는 보스턴의 겨울바람에도 끄떡없도록 목 끝부터 발목까지 덮어 내린 은회색 모피 코트를 벗어 들었다. 한쪽 팔에 모피 코트를 걸자, 여태 문 밖에 서 있던 남자 둘이 급히 다가섰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와 비교적 젊은 남자가 기훈에게 깍듯한 인사를 하고는 이 여사의 코트를 받으러 다가섰다.
“연락도 없이 어떻게…….”
이 여사는 젊은 남자에게 코트를 건네주며 기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미를 보고 반갑다고 하는 인사야 ”
더없이 조용하고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동안 편안하셨습니까 ”
“그래, 너도 학교생활 잘하고 잘 지낸다 들었다.”
기훈의 인사에 이 여사는 한결 다정한 목소리로 답을 하였다. 평소에도 자그맣고 톤이 낮은 음성이지만 이 여사는 동행한 남자들에게도 사적인 대화를 들려주기 싫다는 듯 기훈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거처도 옮겨야지. 좁은 곳에 있기 힘들지 않아 ”
“충분합니다.”
“그래 혼자 살기에 아님 둘이 살기에도 ”
“어머니 ”
이 여사는 천천한 걸음으로 움직이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자그마한 원 베드룸 기숙사는 닫혀 있는 단 하나의 공간인 화장실을 제외하고 한눈에 들어왔다. 외투도 벗지 못한 두 남자는 손을 모으고 벽에 최대한 가까이 서 있었다. 기훈이나 이 여사의 신경전에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스런 태도였다.
치이익.
쇼팽의 피아노 곡만 가득한 공간에 전기 포트의 물 끓는 소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기훈이 포트 쪽으로 향하는 동시에 벌컥 화장실 문이 열렸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서진이 젖은 앞머리를 털며 나왔다.
“오빠, 차 다 됐어 ”
낯선 세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서진에게로 쏟아졌다. 눈이 마주치자 현관 근처에 서 있던 남자 두 명은 서둘러 시선을 피한 데 반해 우아한 중년 부인은 서진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손에 들린 수건과 젖은 앞머리, 기훈의 셔츠 아래로 입은 청바지까지 서두르지 않고 훑어갔다. 그러고선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침착한 걸음을 떼어 식탁 의자에 우아하게 앉았다.
“나도 차 한 잔 다오.”
작지만 위엄이 서린 목소리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모범 답안 같았다. 서진이 제자리에서 어리둥절하게 서 있자 기훈이 다가왔다.
“서진아, 나중에 이야기할게. 가 있어.”
“누구 ”
서진이 긴장된 목소리를 쥐어짜며 기훈에게 물었지만 기훈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매우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제발 가 달라는, 애원에 가까운 표정. 서진은 현관 쪽에 서 있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잘못이나 한 듯 호기심 어린 시선을 급히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남자를 보고 서진은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이 옷을 갖춰 입고 나왔을 때 현관 옆의 두 사람은 목석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식탁에 앉아 있는 기훈과 부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라는 손짓을 하는 기훈을 보며 천천히 돌아서 현관으로 향하였다. 서진의 뒤통수로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서진 양도 차 한 잔 하고 가지 그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