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13
13화.
13화
기훈은 괴로운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주먹 쥔 손을 떨리는 턱으로 올렸다.
“재미있으셨나요 어린애 같은 장난질을 저와 하시느라.”
“서진아!”
“색다른 재미였나요 ”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
기훈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충격으로 붉게 흔들리던 서진의 시야에 이제야 기훈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왔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한 번도 그가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빼입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단정하게 올려붙인 머리와 호텔 조명에 은은한 빛이 묻어나는 회색 슈트, 빳빳한 와이셔츠 칼라, 핑크빛 타이. 입가로 올린 그의 손 아래로 빛나는 백금 장식의 단아한 커프스단추와 핑크색 고운 수실로 백색의 소매 단 끝에 박힌 K. H. Jung이라는 그의 이니셜……. 낯설었다. 소름이 끼치도록 멋있는 기훈이 온몸에 경련이 일 정도로 낯설고 싫었다.
“무슨 말이라……. 다 저를 일깨워 준 말인데 잘못이었나요 ”
도대체 이런 모습으로 이 자리에 앉은 기훈은 뭐란 말인가. 서진은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뭐가요 ”
해 줄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라는 넉 자뿐이라는 것인지 이를 악물고 쳐다보았지만 기훈은 서진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접근 말라 하셨어요. ‘우연히’라도 만나지 말라고. 그대로 할 거예요. 우연도 안 만들 거예요.”
“서진아…….”
“그 입에 다시는 내 이름 석 자 올리지도 마세요. 본데없는, 보잘것없는 제 집안이지만 할아버지가 귀하게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깊은 한숨을 쉬는 기훈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부탁합니다, 선배님. 저희 부모님께는, 아버지께는…….”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있는 힘을 다해 쥐어짜고 있던 의지는 부모님, 아버지를 입 끝에 올리는 순간 한계에 도달했나 보다. 눈물이 기어이 한 방울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께는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알았어.”
침착하고 군더더기 없는 답이었다. 기훈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제는 정말 기훈은 자신이 손을 잡아 얼굴을 비비던, 가슴에 기대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정기훈, 세한가의 아들로 보였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척력이 까마득한 거리로 두 사람을 각자 어울리는 세계로 밀어 냈다.
“고마워요.”
기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님께 우연히 마주하는 일도 없을 거라 전해 주세요. 필요하다면 제가 없어져서라도.”
기훈의 눈이 순간 평정을 잃고 뜨겁게 흔들렸지만 서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서서 목도리를 둘렀다. 손바닥에 배어난 땀을 코트 자락에 닦고서 바닥에 둔 배낭을 어깨에 둘러멨다. 문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기훈이 따라 일어섰다. 서진과 기훈의 모습이 보이자 인사를 하며 문을 여는 남자들의 모습에 씁쓸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잠시만요.”
기훈이 서진을 따르려는 남자를 향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제가 갑니다.”
급한 걸음으로 다가온 기훈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서진을 돌려 세웠다.
“윤서진.”
“내 이름 그 입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빛을 잃은 마른 눈동자가 기훈을 응시했다. 작은 기계음과 같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뒤돌아보지 않고 들어서는 서진을 기훈이 급히 따랐다.
“제발.”
기훈은 서진의 양팔을 잡았다.
“제발이라…….”
서진은 웃기 시작했지만 힘없는 웃음은 이내 끊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서진아, 미안해.”
기훈의 목소리가 냉정을 잃고 형편없이 갈라졌다.
“이러지 마세요.”
서진은 그의 손을 냉정하게 털어 냈다.
“서진아, 내가 다시 너한테 갈 거야. 찾을 거야.”
서진은 울음도 웃음도 아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않아. 기다려 줘.”
로비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다시 조용히 열렸다. 서진은 기훈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어 나갔다.
구술 예정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학교에 도착한 서진은 얼이 빠진 상태였다. 교수의 질문이 윙윙거리는 소음처럼 울려 도무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집중하려 할수록 뇌 주름 사이에 이물질이라도 낀 것처럼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마주 잡은 손마디가 희어지도록 힘을 주어 울음을 참았다. 서진의 의지와 이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굳어지는 옵스켈트 교수의 얼굴과 차가운 눈길도 서진의 상태를 평소처럼 되돌리지 못했다.
‘없어져서라도 죽어서라도 우연히 만나지 않아 줄게.’
구술고사 내내 서진은 앉아 있기도 힘든 몸으로 겨우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침대에 엎드리자 옵스켈트 교수의 냉랭한 표정이 떠올랐다. 분명한 거부였다. 모든 게 엉망이다.
‘이제 윤서진 인생은 끝이야.’
얼마나 울었을까. 축축한 베갯잇이 참을 수 없이 불쾌해서 무거운 머리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먼지 앉은 블라인드 사이로 뿌연 새벽빛이 비춰 들었다. 서진은 벌떡 일어서서 미친 듯이 약장을 뒤지고는 타이레놀 한 움큼을 털어 넣었다. 누군가가 가슴속을 벌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헉헉 숨을 몰아쉬다가 아뜩하게 정신을 잃은 것이 언제인지 몰랐다.
서진을 발견한 사람은 서진의 클래스 메이트였다. 구술고사 문제로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서진과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경제과 오피스에서 연락을 받은 그녀가 서진의 집을 찾았을 때 서진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했다.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싣고 간 오후까지 서진은 의식을 찾지 못했었다. 그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서진의 바람은 끊어질 듯한 위장의 통증을 느끼는 순간 실패로 끝났음을 알았다. 또한 그녀의 퀄리도 실패였다.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요했던 구술에서 컷을 넘기지 못하면서 서진은 퀄리에 아직 통과하지 못한 학생으로 분류되었다. 의료 기록을 떼어 건강상의 이유를 말하면 다시 볼 수 있으리라 위로하는 클래스메이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서진의 마른 눈은 초점 없이 흰 병실 내부를 떠돌았다.
서진은 이후 다시 구술고사를 보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서진은 그대로 짐을 챙겨 무작정 보스턴을 떠났다. 기억에서 보스턴도 하버드도 정기훈도 모두 깡그리 남김없이, 깨끗하게 지워 버리기로 작정했다. 기억의 상자에 차곡차곡 채우고 뚜껑을 단단히 덮어 던져 버렸다. 보스턴 길바닥에 던져진 상자 위로 흰 눈이 쌓이고 쌓였을 것이다. 쌓인 눈은 단단히 얼어붙고 새로이 얼어붙어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세상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서진이 떠나던 날, 보스턴의 겨울날은 지독하게도 추웠다.
서진이 아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학교를 그만둔 이후, 구술고사를 치르기 위해 준비했던 페이퍼 리뷰와 리서치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던 기훈이 학교에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서진은 서울대에 일 년 동안 교환 학생으로 와서 친해졌던 교포 친구 연락처를 들고 무작정 뉴욕으로 갔다. 그녀의 자료들로 구술고사를 대신하여 퀄리에 통과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교수의 이메일을 받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이후로도 학교에 등록하지 않은 서진에게 결국 하버드에서는 절차에 따라 경제학 석사 학위를 인정했다.
***
멀어지는 서훈의 차를 보다가 서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건물 회전문을 통과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설 때까지 줄곧 멍한 상태였다. 문이 열리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가 급하게 들어서는 누군가와 부딪혀 앞으로 기울여졌던 몸을 바로 잡아야 했다. 입으로는 사과와 괜찮다는 인사를 나누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과거를 헤매었다.
‘내가 다시 너한테 갈 거야, 너를 찾을 거야……. 기다려 줘.’
기훈의 목소리는 또렷이 떠올리려 할수록 메아리처럼 흐려져 비현실적이었다. 과거가 아니라 과거에 꿨던 꿈처럼.
‘언제, 어떻게…… 무슨 수로 내 앞에 나타날 건데.’
서진은 사무실 앞에 서서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소리 나지 않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밝고 명랑하게 인사하였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9시부터 다음 세일 시즌 기획안 미팅이에요.”
서진은 종이컵에 커피를 따르면서, 아침 인사를 건네는 팀원들에게 웃어 보였다. 커피를 들고 막 자리에 앉으려 할 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최한혁]화면에 떠오르는 이름을 보자 가슴에 살랑 바람이 인다.
“여보세요 ”
-잘 들어갔어
엉뚱하긴, 지난밤에 제대로 인사도 안 받고 헤어지고는 밤이 다 지나서 아침에 잘 들어갔냐는 인사라니.
“아침이에요.”
-그래서
“어디를 잘 들어가요 아침에 집에서 나와 회사를 잘 들어간 거냐면 회사 잘 들어왔어요.”
-또 높임말이네.
아차, 그러네.
“잘 모르는 사람인데 얼굴도 안 보이니까 반말은 어색하죠.”
-억울하네. 어제 몇 시간을 고생하고 몇 시간을 밥과 술을 같이했는데 다 잊었나 봐
“설마. 너처럼 잘생긴 남자를 ”
핸드폰 너머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왜 전화했어 ”
-회사 잘 들어갔나, 전화번호는 안 지웠나 확인하려고.
“참, 할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거 어제도 알았지만. 어이없어.”
-그래, 백수라 할 일이 없어.
“아무튼, 어제는 고마웠어요.”
-굉장히 드물게 베푼 친절이긴 했지. 인생에 두 번 정도
“아오, 그러세요 영광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나요.”
-오케이, 바쁜 팀장은 이만 일하세요.
서진은 뚝 하고 끊어진 핸드폰을 정말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욱, 뭐야. 아침부터.”
“팀장님…… 혹시 또 무슨, 일이 ”
자리에 온 영석 씨가 주뼛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영석은 팀 내 분위기 담당자이자 사고와 실수도 가장 많이 하는,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천덕꾸러기 매력이 있는 팀원이다.
“아니요, 오늘은 어제와 비슷한 사태로 화내는 거 아니에요.”
무안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책상에 탁 하고 소리가 나도록 뒤집어 놓았다.
“미팅 시작해요.”
서진이 상큼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회의실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중에 핸드폰 메시지 알림창이 떴다. 한혁으로부터 메시지다.
[은혜 잊지 마.] [응 ]서진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자를 입력했다.
[어제 일 말하는 거야 물론 오케이. 은혜를 갚아야지. 나 지금 회의 들어가서 통화는 못해.]영석이 서진을 흘끗 보더니 싱글거리며 물었다.
“팀장님, 누구예요 ”
“네 ”
“썸남 ”
“아뇨 ”
“그런데 왜 문자 보내면서 막 이렇게 웃으시나요 ”
영석이 엄지로 제 입 양끝을 올려 가며 미소 짓는 표정을 만들었다.
“제가요 ”
“네에.”
서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썸은 아니고, 무지무지 잘생긴 남자라서 얼굴만 떠올려도 기분이 좋아져서 그래요. 제가 볼은 발개지지 않았나요 ”
서진이 제 뺨을 툭툭 두드렸다.
“우아. 대박.”
영석이 입에 댔던 엄지손가락 두 개를 서진 앞으로 내밀어 번쩍 들었다.
***
세림유통 회장실에 호출을 받고 올라온 진 이사는 소파에 앉아 일없이 찻잔만 들었다 놓았다. 정경애 회장이 코끝으로 내려오는 안경을 고쳐 잡으며 진 이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혁이는 요즘 뭐 합니까 ”
“한남동 오피스텔에 주로 있고 호텔 피트니스에 다니는 것 외에는…….”
자신 없는 목소리에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 이사는 마치 제가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얼마 동안 불편한 침묵이 지났다.
“오피스텔은 어때요 ”
“네, 회장님 댁과도 가깝고 새로 지은 거라 깨끗하고…… 좋습니다.”
뭔가 기뻐할 만한 말을 찾느라 애썼지만 결국 회장의 얼굴이 더욱 찡그려졌다. 말소리는 가늘게 꼬리를 내렸다.
“왜 집에 안 들어온다는 거야 회사는 어쩔 거래, 계속 놀겠대 진 이사는 뭐 해. 데려왔음 책임지고 회사도 들어오게 해야지. 뭐 호텔 피트니스 어 걔 헬스장서 운동하라고 미국에서 데려왔어 ”
일흔 중반의 할머니에서 나온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카랑카랑한 불호령이었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회장이 찻잔을 놓으며 훅, 숨을 뱉었다.
“내가 걔 성격 모르는 바도 아니고, 답답해서 그러는 거야. 알지 ”
“그래도 제가 회장님께 늘 면목 없습니다.”
“오늘 저녁, 집으로 들어오라 해요. 저녁이나 먹자고. 예린 엄마가 음식 준비 많이 했다고 꼭 전해. 그럼 분명히 올 거야.”
회장은 조금 누그러진 투로 말하더니 서류를 넘겼다. 이만 가 봐도 좋다는 뜻인지라 진 이사는 휴우, 한숨을 속으로만 뿜으며 회장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