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17
17화.
17화
“큰어머니, 죄송합니다. 늘 너무 죄송해요.”
언제 일어섰는지 한혁이 머뭇머뭇 곁으로 다가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차마 연화 손에 쥐여 주지 못해 근처에 밀어 두는 손수건을 연화가 손을 뻗어 잡았다.
“제가 죄송합니다, 큰어머니. 울지 마세요.”
연화는 억지로 냉정을 찾으며 손수건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연화는 알고 있다. 한혁은 일곱 살 세림가에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은 가슴 깊은 곳에 차가운 우물을 만들고 우물은 매일매일 조금씩 더 새까맣게 깊어졌다. 까맣게 비어 버린 아이의 눈동자는 너무 아팠다. 두려웠다. 연화는 옆에 다가선 한혁의 눈을 보지 않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말하였다.
“회사 주에 대해서 상속 포기 각서를 썼어. 예린이도 마찬가지야.”
“네 ”
“아버지가 보유하고 있던 회사 주식 중 내 몫은 다 네 앞으로 넘겼다. 아직 회장님이 보유하신 지분이 큰데도, 상속세 규모가 있다 보니 좀 복잡했어. 지금은 거의 절차가 끝났을 것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
“최석원 부회장의 세림그룹 주식을 말하고 있어.”
한혁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동의하지 않아요. 회장님께 말씀드리겠어요.”
한혁이 당장이라도 계단을 뛰어 내려갈 듯이 성마르게 굴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주먹을 움켜쥐며, 목소리를 떨며 순수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연화는 한혁을 올려다보았다.
“예린이가 부회장님과 큰어머니 자식입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회장님이 큰어머니께 그럴 수는…… 제가 왜…….”
한혁이 주먹으로 찡그린 미간을 거칠게 문질렀다.
“회장님이 서운하게 하신 일 없어. 한 번도 그러지 않으셨잖니.”
“이번 일이 가장 큰 일입니다.”
한혁과 눈을 맞추며 연화는 조용히 웃었다.
한혁을 처음 만나던 날, 긴장감과는 또 다른 불편한 감정으로 내장까지 꼿꼿해지도록 경직되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큰어머니’라 부르며 예쁘게 웃어 주던 천사 같던 아이를 아무래도 미워할 수 없었다. 혼인 전부터 아이는 두 집안 사이에 뜨거운 감자였다. 아이는 석원과 연화의 가정에 편입되지 못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존재가 부정되었다. 그 편이 낫다고,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연화는 석원과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상황은 달라졌다. 세림의 회장, 어머님의 절대적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배다른 아들을 두고 주변에서는 연화를 좀체 가만두지 않았다. 회장의 집에서 데려다 떼어 놓아야 한다는 치졸한 조언부터, 네 아들로 확실하게 만들어야 뒤탈이 없다는 좀 낫거나 똑같거나 한 얄팍한 충고들이 쏟아졌다. 보는 이마다 의무를 행하듯, 친절과 동정과 염려와 따스한 배려의 탈을 쓰고 연화를 저울대 위에 올렸다. 거의 매일같이, 석원의 여동생 시누이는 노골적으로 연화와 한혁을 이간질하였다.
제발, 나를 내버려 둬요.
매번 비명을 지르고 싶어 혀를 깨물었다. 석원과 이룬 가정의 울안에 넣을 수도 배제할 수도 없는 사내아이는 어떤 이의 시선도 마음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소년으로 성장했고 무섭도록 영특했다.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았고 사람을 지나치게 빨리 파악하였다. 아무리 기를 써도 한혁은 애를 쓰는 연화의 노력 너머 자리한 부담과 갈등, 의심의 질곡까지 들여다보았다. 고작 십 대 중반인 그 아이가 연화를 바라보는 눈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서려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워하셔도 좋습니다.
눈이 하는 말을 읽으며 연화는 소스라치게 놀라 허둥거렸다.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보내며 한편으로 이제 좀 편안해지리라 믿었던 마음이 잘못이었다는 것은 열흘도 지나지 않아 알았다. 늘 자신과 남편을 어려워하며 고개를 숙이던 그 아이가, 어린 예린이를 무척이나 좋아해 주던 그 아이가 참으로 그리웠다. 이미 성인이 되어 버린 한혁은 이십 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연화를 끈질기게 옥죄고 괴롭히고 흔들었던 미묘한 감정들을 이해해 줄 수 있을까.
한 번도 자식처럼 진정으로 품에 안아 주지도 못하면서도 맘 편히 단 한 번도 미워하지도 못했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한혁은 언제나처럼 조용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줄 것만 같았다. 마음속 까만 우물을 비추는 텅 빈 눈으로 어디 먼 곳쯤에 시선을 던지고서…….
차가운 목소리로 화를 내면서 연화나 예린이를 더 걱정하고 있는 이 아이를, 어떻게 내가 미워할 수 있을까. 미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을까. 연화는 알른알른 헤어지고 닳아 버린 마음을 내려놓았다.
“예린이는 이미 제 앞으로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두 내가 결정한 일이다.”
“큰어머니!”
“난 최석원 아내였고 네 엄마인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자 장자한테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야.”
연화는 어느새 위엄 서린 모습으로 한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지 마세요. 저는 아니에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한혁은 연화의 시선을 다시 외면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떨어뜨렸다.
“한혁아, 아버지는 널 사랑하셨어.”
“이제 와 무슨 소용입니까.”
“예린이가 딸이어서 더 좋다고 하셨다면, 더 이상 아들을 원치 않았다면 믿어 줄래 ”
“큰어머니 ”
믿을 수 없는 말이라는 표정이다. 처음 듣는 얘기일 테지. 석원도 연화도 입 밖으로 올린 적이 없는 말이니.
“그랬어. 내가 부실해서 예린이도 겨우 얻은 것도 사실이지만, 늦게라도 다른 방법으로도 아이를 하나 더 가지고 싶었는데…… 그분이 그렇게 내켜 하지 않더라. 몇 차례 시도가 실패하고 내가 이미 나는 아들도 딸도 하나씩 있으니 힘들어서 더 이상 아기를 못 갖겠다고 하자, 그 사람이…… 좋아했어.”
연화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세상을 떠나 버린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서운함도 깊이 가라앉았다.
“너한테 사랑은 맘껏 다 주지 못했지만 다른 것만은 주고 싶었던 거야, 그분은.”
연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 일어선 한혁은 입을 다문 채 허망한 눈으로 연화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연화가 손을 내밀어 한혁의 팔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네가 미국으로 가고 나서 많이 후회했어. 그렇게 떠나기 전에, 이렇게 크기 전에 더 많이 볼 것을. 더 많이 품어 줄 것을. 이제 너무 멋지게 성인이 되어…… 안아 줄 수도 없구나.”
연화가 저보다 한참이나 키가 큰 한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좀 쉬다가 가. 나는 이만 내려갈게.”
연화가 뒤돌아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조금씩 떨렸다. 모든 힘을 죄다 끌어모으고 쥐어짜 내어 기어이 말하였다. 뚫린 가슴은 허망하기도 저리기도, 가벼워 날아갈 듯도 하였다.
“어머니.”
한혁의 부름에 연화는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기 전에, 한혁이 연화를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았다.
“한혁아 ”
“죄송해요. 너무 죄송합니다.”
“너는, 단 한 번도 내게 죄송한 행동을 한 적이 없어.”
연화는 둘러진 팔을 다독였다.
“처음 본 그날부터 너는.”
“……좋아했어요. 아버지보다 더.”
한혁의 고백에 연화의 눈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한테 가 봐. 너를 많이 기다리실 거야.”
***
졸음이 쏟아지는 식후 시간이다. 연둣빛 패널로 마감된 큐비클 안에서 서진이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영석을 올려다보았다.
“분기 매출 실적 보고 아직 완성 안 되었나요 ”
“지금 하고 있는 중인데…….”
“언제까지 되나요 ”
상냥함을 가장한 분노와 압박이 마디마디 박혀 있다.
“저, 내일까지. 지금 하는 일이 있어서.”
영석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서진은 입을 꽉 다물고 쳐다보다가 이내 생긋 미소를 만들었다.
“내일 아침 출근하면서 컴퓨터 켜면 도착해 있는 거죠 ”
서진의 웃는 낯을 보자 영석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그럼요.”
“나 내일 7시 30분에 출근해요.”
“네 ”
“9시 30분에 이사님 미팅 있는데 자료 들고 들어가야 하거든요 나 아침잠 되게 많아요. 억지로 일어나서 이른 출근을 하고서 책상을 봤는데 깨끗하고, 컴퓨터를 켰는데 아무 자료가 없으면…… 생각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리네요. 슬퍼서.”
서진이 가슴에 손을 얹고 화를 참는 시늉을 하였다.
“아. 제가 꼭 오늘 밤까지…….”
“있는 거 받아서 정리하는데 좀 빨리 해 주세요. 그래야 다음 시즌 예측 자료도 나오고 마케팅 전략도 나오고. 완전 영석 씨가 일방통행 길에 주차된 차처럼 진행 막고 있는 거 알죠 ”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듣기 싫은 퉁박을 주자, 영석은 할 말이 없어진 듯 미안한 표정이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부디 제발 오늘까지요, 속으로 외쳤다. 영석은 곱게 자란 막내아들답게 사람은 한없이 좋은데 일하는 게 도무지 두서가 없이 굼뜬 사람이었다. 막 끓어오르는 성질을 누르려 한숨을 쉬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최한혁]남자의 이름을 보자마자 반응하는 심장을 무시하며 그대로 책상에 두었다. 여전히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못 이기는 척 손을 뻗는 순간 소리가 멈추었다. 용건 있으면 다시 하겠지, 서진은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한 번쯤 더 전화가 걸려 오지 않을까 흘끔거렸지만 핸드폰 액정은 컴컴한 채로 더 이상 아무 빛도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해외 트렌드 자료 정리를 마치고 보고서를 완성할 때까지 몇 번이나 핸드폰을 뒤집어 보고 훑어보고 문자나 메신저까지 모조리 뒤져도 한혁으로부터 연락은 전혀 없었다. 모니터 화면 아래 시각을 확인해 보니 오후 4시가 조금 지났다. 병원 예약이 잡혀 있어 일어나야 한다. 지난번 회사 정기 검진 결과 저혈압과 빈혈 수치가 지적되었다. 회사에서 재검을 권하였다. 좋아지겠지 내버려 두기엔 어지럼증이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결국 내과에서 피검사를 다시 하고 빈혈약을 처방받겠다고 예약을 하였다. 영석의 자료만 준비되었으면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맘 편히 나갈 텐데……. 자리에서 일어나 흘끗 넘어다보니 영석은 뭔가 분주히 하는 눈치다. 영석이 맡은 부분을 제외하고 정리한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오늘 밤까지 넘긴다 했으니, 내일 아침에 한두 시간 일찍 출근해서 마무리하면 충분하다. 서진은 사무실을 나서며 영석에게 한 번 더 격려와 부담을 안겨 데드라인을 확인시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차에 오르면서도 서진은 여러 차례 핸드폰을 확인하였다. 여전히 한혁으로부터는 점심시간 직후에 걸려 온 부재중 전화 1통 외엔 없다.
‘아, 몰라. 내가 언제 밀당을 해 봤다고.’
서진은 항복하고 말았다. 지난 며칠 동안 한혁의 얼굴과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슬슬 힘들어하던 중이었다. 결전을 앞둔 용사의 마음으로 핸드폰 키패드를 눌렀다. 연결음이 다섯 번이 넘어가면 끊을 거야. 아냐, 러키세븐, 일곱 번까지만 기다릴까 횟수를 정하기 전 네 번 만에 한혁이 전화를 받았다.
-네.
“한혁 씨 난데, 나…….”
-응. 알아, 윤서진.
‘알아, 윤서진.’
화면에 떴으니 알았다는 말인데 그 답에 맘이 설렌다. 미쳤나 보다, 정말. 이 남자 목소리가 원래 이랬던가. 감기라도 걸린 걸까. 밤새 앓은 사람처럼 목소리가 잠겨 있다.
“전화했었어 ”
-세 시간 전쯤
“미안해, 일이 바빴어.”
한혁은 더 이상 대꾸가 없었다. 전화했었는데 무어라도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잠시 답을 기다리던 서진이 속으로 툴툴거리며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밀고 당기는 기술에는 역시나 재주가 없다.
“왜 전화했어 ”
-은혜 갚는다며.
“그러지 뭐. 언제 볼까 ”
-지금.
“응 ”
-회사 앞이야.
“뭐어 사람이 왜 이렇게 황당해 퇴근 시간 아직이야. 나는 백수 아니고 재벌 아니고, 매일매일 건전한 노동으로 밥벌이해야 하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나 오늘…….”
-오케이. 기다릴게.
서진은 병원 예약이 잡혀 있다는 말을 삼켰다.
“무슨 일이야 저녁 먹자는 말 아니야 ”
-저녁도 먹으면 좋지. 지금은…….
“응 ”
-보고 싶어.
“뭐 ”
-윤서진이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