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21
21화.
21화
“네, 전무님. 윤서진 팀장이랑 방금 인사했습니다.”
한혁이 천연덕스럽게 답하였다.
“그래요.”
강 전무가 고모부는커녕 한혁과는 전혀 아무 개인적 친분이 없는 것처럼 가장하며 말을 이었다.
“윤서진 팀장, 벌써 한 달 전부터 비어 있는 팀원 자리 하나 보충해 달라는 걸 계속 못 들어줬는데 오늘 팀장 원풀이하는 날이야. 최한혁 씨, 오늘부터 이 팀에서 일할 사람이니까 잘 도와줘요. 미리 언질을 줬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모르는 것도 많이 가르쳐 주고.”
“네.”
서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강 전무에게 혹시나 들킬까 봐 당황한 마음을 감추기에만 급급했다.
“그럼 열심히 하게.”
강 전무가 한혁의 팔을 한 번 툭 치고는 사무실을 나간 후에도 서진은 그대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도무지 도깨비같이 앞에 나타난 한혁이 설명되지 않았다.
“팀장님, 다른 분들 소개 좀 시켜 주시죠.”
한혁이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한혁에게 정지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야 서진의 눈에 들어왔다. 한혁은 여전히 여유 만만한 표정이었다. 놀랍고 흥분되었던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서진은 사람들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시켰다.
“여기 오늘부터 새로 같이 일하실 최한혁 씨예요. 문정훈 씨 후임이 되겠네요. 보셨다시피 저도 오늘 처음 들은 내용이라, 자세한 건 본인한테 들으세요.”
한혁은 더없이 매력적으로 웃더니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기심을 짧은 말로 응수했다.
“최한혁입니다. 유통 계통은 처음이라 부족한 점이 많을 겁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서진은 또 자리에서 반쯤 일어서 큐비클 밖을 흘끔 내다보았다. 반시간 전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한혁의 뒷모습이 보였다. 서진이 던져 준 두터운 자료를 착실하게 읽고 있는데 그 모습에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단 한 번도 서진의 자리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눈치였다.
“죄송하지만, 이정희 씨라고 했나요 ”
한혁이 옆에 앉아 있는 여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네, 무슨 일이세요 ”
“혹시 커피 자판기 같은 게 있나요 ”
한혁의 낮고 작은 목소리가 쫑긋 길어져 버린 서진의 귀에는 충분히 포착될 만큼 크고 선명했다.
“커피요 사무실에 원두커피 포트 있어요. 한 잔 가져다 드려요 ”
천상 여자인 정희 씨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목소리가 무지하게 싫다.
“아니요, 제가 가져다 먹을게요.”
“그럼 따라오세요. 저기.”
‘하,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곳을 왜 굳이 같이 가 준대 그냥 저리로 쭉 가시다가 옆으로 틀면 복사기 보이죠 그 옆에 있거든요. 이러면 끝 아냐 ’
아무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혼잣말이라지만, 팀원들을 상대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서진은 제 모양을 참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파닥파닥 소리도 세차게 찬물에 손을 씻었다. 앞으로 한혁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스럽던 마음을 다잡았다.
“팀원이야, 공과 사를 분명히. 뭐 ‘사’랄 것도 없어. 그런 나쁜 시키는 그냥 ‘사’로는 칼같이 끊는 거야. 잘생기면 다야 목소리가 섹시하면 다야 눈이 슬프고 공허하면 다야 농담 따위 재수 없어. 제멋대로 완전 못돼 먹은 놈, 내가 너랑 다시 개인적으로 상종하면 윤서진이 아니다.”
목덜미에서 거치적거리는 머리가 마치 흔들리는 마음 같아 성가셨다. 꽁꽁 묶으며 화장실을 걸어 나왔다. 마음이 제대로 안 묶이듯 머리도 제대로 묶이지 않았나 보다. 목덜미에 여전히 머리칼이 남아 있다. 애먼 데 성질을 피우며 복도 중간에 서서 머리를 다시 풀어 묶었다. 이번에는 좀 제대로 된 거 같아 손을 내리는 순간 툭 머리가 다시 흘러내렸다.
“어맛, 뭐야. 고무줄 끊어진 거야 ”
서진이 참았던 짜증을 내뱉으며 돌아서 바닥을 보니 동강난 고무줄 대신 남자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검지에 달랑 걸려 있는 머리끈을 낚아채려 했지만, 남자의 손은 여유롭게 서진의 사정거리를 벗어났다. 동그란 머리끈은 이제 검지에서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서진이 정말 약이 올라 쳐다보자 한혁의 얼굴에 미소가 잡혔다.
“내놔.”
“머리 묶지 마.”
“왜.”
“싫어서.”
“이런 도깨비 같은 놈이.”
“나쁜 새끼가 아니고 ”
서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야, 도깨비든 나쁜 시키든, 내가 너 싫다고 안 해야 할 이유가 뭐야.”
무안을 깨 보려 서진은 주먹을 바짝 쥐고 한혁을 노려보았다.
“얼굴이 더 차가워 보여. 난 차가워 보이는 여자 싫어.”
“이 사람이, 당신이 싫은 이유를 물은 게 아니야. 네가 싫다고 내가 안 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라니까. 한국말 몰라 ”
“네가 그래야 하는 이유 흠…….”
한혁이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네가 나 좋아한다며.”
“아, 진짜! 그 말 취소다. 완전 취소야. 좋긴, 너 징그러. 싫어, 미워.”
뭐에 취한 듯 했던 말을 벌건 대낮에 회사 건물 안에서 듣게 되다니, 아무리 얼굴을 두껍게 부풀려 봐도 참으로 민망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한혁의 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 눈빛에 찔린 듯이 가슴 언저리가 따끔하다. 엄마라 부르고 싶었다는 큰어머니, 이야기를 제대로 한 적 없다는 돌아가신 아버지. 돌겠네, 서진은 속으로 긴 한숨을 삼켰다.
“머리끈 줘.”
한혁이 툭 떨어뜨리듯 머리끈을 손바닥 위로 건넸다.
“안 묶을 거야.”
서진은 한혁의 매끈한 검은 구두만 바라보며 말했다.
“왜.”
“네가 나 좋아하잖아.”
서진이 돌아서서 먼저 걸어갔다. 그녀의 머리칼이 어깨를 스치며 찰랑찰랑 흔들렸다.
***
사치스럽고 형식적인 면을 싫어하는 정 회장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집무실에는 한편에 줄지어 자리 잡은 동양란 외에 그다지 눈에 띄는 고급스런 장식품은 없다. 동양란의 잎에 앉은 미세한 먼지를 정성스레 닦아 내는 정경애 회장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힘주어 쥐면 꺾일 듯하면서도 단단히 그 자태를 유지하는 동양란을 회장은 무척 아꼈다. 정갈한 사무실 중앙에 자리잡은 소파에 석연과 재영이 나란히 앉아 회장을 지켜보고 있다.
“엄마, 사무실에서 키우기엔 너무 까다로운 식물이에요. 별 예쁘지도 않은 걸 그리 시간과 정성을 쏟다니.”
석연의 볼멘소리에 회장은 석연을 힐끗 안경 너머로 보고는 다시 천천히 가재 수건으로 난초 잎을 쓸어내렸다.
“그래, 재영이가 근무한 지 이 주쯤 되었나 어떠니 ”
은은한 윤이 나는 난초 잎을 꼼꼼히 살핀 후, 회장은 안경을 벗어 책상에 놓았다. 그제야 재영에게 제대로 된 시선을 주었다.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재영의 답이 못마땅한지 석연이 허리를 쿡 찔렀다.
“엄마, 아무리 그래도 기획실 평사원은, 아니죠. 아무래도 재영이한테는 좀 그렇잖아요. 얘는 알 만한 사람은 우리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 아는데. 기획실 잡무가 오죽 많아요. 그저 문서 정리나 하느라 한밤에 들어온다구요.”
회장이 천천한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싫은 거냐 ”
“기획실이라도 전체 전략이나…….”
“네게 묻지 않았어.”
석연의 말을 가차 없이 자르며 회장이 다시 물었다.
“재영이, 대답해. 싫은 거냐 ”
재영이 긴장감에 몸을 움츠렸다.
“아닙니다, 회장님. 바닥부터 배워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준비라…….”
회장의 반응에 조바심이 난 석연이 덧붙였다.
“평사원은 잡무 위주예요. 크게 쓰려면 처음부터 제대로 배울 수 있게 해 주셔야 해요, 엄마.”
“크게 쓴다던 ”
정 회장의 가차 없는 반문에 석연과 재영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두고 봐야 할 것 아니야. 재목인지 아닌지.”
석연이 굳은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며 정 회장을 달래기 시작했다. 케이크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그럼요. 엄마, 역시 훌륭하세요. 충분히 보시고 자질을 검증하셔야죠. 그런데 제 이야기는, 재영이가 있는 자리가 능력을 검증할 만한 업무가 없다는 점이 문제예요. 시간만 죽이는 자리에 아이를 두면, 괜스레 말만 생겨요. 그러니 능력을 잘 검증할 수 있는 자리로······.”
길고 부산스런 설명을 회장이 손을 들어 끊었다.
“한혁이도 평사원으로 들어갔다. 마케팅 부서에 한 자리로. 재영이가 한혁이보다 나은 자리를 가야 하니 ”
석연의 입가가 감춤 없이 일그러졌다.
“한혁이, 걔가 왜 재영이 비교 대상이죠 ”
“비교도 안 되지. 한혁이는 재영이보다 나이도 경력도 학벌도 나아.”
석연의 눈에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질투와 서운함이 살처럼 쏟아졌다. 비죽거리는 입술로 포장 없는 독설이 나왔다.
“그깟 MBA, 재영이 오늘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거, 그거 말이에요 유통에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마이크로소프트사 경력 ”
“그만해라.”
“비교도 안 돼요. 그런 천한 여자 피를 가진 사생아 따위.”
“그만해.”
최대의 인내심을 꺼내는 회장의 담담하고 차가운 표정이 석연의 분노를 더욱 깊이 자극했다. 어린 시절부터 회장은 언제나 저 얼굴로 저 표정으로 석연을 거부했다.
“나도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엄마가 예린이더러 이 회사 통째로 준다고 해도 아무 말 안 해요. 그 누구도 말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장은실 자식이라니 참을 수가 없다고요. 그 여자가 아직도 우리 주변을 맴돌아요. 심심하면 나도는 증권가 찌라시도 지겹고, 그 여자 남성 편력이나 돈 사고나 들을 때마다 속이 울렁거려요.”
“그만해. 그 여자 이야기는.”
“왜 그만해요 그 여자의 아들이 지금 세림에 있는데!”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석연의 손이 파드득 신경질적으로 떨렸다.
“할아버지 때부터, 아니 더 윗대 증조부, 고조부부터 온 일가가 기를 쓰고 지켜 왔던 우리 가문의 전통, 사회의 모범이 되겠다는 자부심, 품위, 부끄럼이 없는 오블리스 노블리제! 세한도 세림도 바른 재벌가의 상징이었어요. 한 번도 추저분한 스캔들에 휘말린 적 없어요. 세림을 먹칠하는 더러운 오점. 그게 최한혁이에요. 아무리 부정하고 덮어도 가려지지 않는 게 있다구요.”
회장이 손바닥으로 세차게 소파 팔걸이를 내리쳤다.
“당장…… 나가!”
석연도 재영도 정 회장도, 회장실 문이 반쯤 열리다가 멈춘 채로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다시 닫혔다.
“저…….”
진 이사가 입을 벙긋거리자 한혁이 싱긋 웃었다.
“진 이사님, 아무 말씀 마세요.”
진 이사가 불편한 마음으로 살폈지만 정작 수모를 받은 당사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멀쩡하였다. 어떤 감정도 티끌조차 드러나지 않는 듯했다.
“제 얼굴도 그렇게 빤히 보지 마시구요. 뭐 별다를 것도 없으니.”
“아, 네.”
한혁이 진 이사를 향해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왜, 항상 저보다 더 곤혹스런 표정이시죠 ”
“…….”
“저를 좋아하세요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데…… ”
“네 ”
제 일이 아닌 듯 한혁은 시니컬하게 말하였다.
“잠시 휴지기 같으니, 이제 들어가 볼까요 ”
한혁은 진 이사에게 잘 만들어진 웃음을 보이며 회장실 문을 선명하게 노크했다.
“네.”
열린 문 너머 세 사람의 시선이 한혁에게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
한혁이 석연을 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인사가 빠르구나.”
“죄송합니다. 진즉 찾아뵀어야 하는데. 재영이도 잘 지냈어 ”
“네, 형님.”
재영이 일어서서 인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더니 석연도 발딱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게요, 엄마.”
찬바람을 일으키며 옆을 스쳐 지나는 석연을 보며 한혁이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앉아라.”
정 회장이 일어서서 한혁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일은 어떠니 좋아 ”
“원래 일에 취미가 없는 놈이라.”
혹여 문밖에서 대화를 들은 것은 아닌지 회장이 조심스레 표정을 살폈다. 한혁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름 노력은 하고 있어요. 기대하시란 말은 못하겠지만.”
“왜 굳이 평사원이야. 나이를 보나 경력을 보나 팀장이나 부장으로 간다 해도 될 것을. 네가 세림 아들인 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인데.”
“제가 유통을 뭘 알아서요. 소프트웨어나 개발하고 기획이나 했는데요.”
“아, 그래. 왜 굳이 그런 IT 회사를 고집해 세한전자로 보낼 수도 없는데.”
정 회장이 불만스런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요.”
“네가 세림과 관계없는 것만 골라 한 거 모를 줄 알아 ”
한혁이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