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22
22화.
22화
“마케팅 부서는 좋은 거야 전략팀 이런 데로 갔어야 하지 않아 ”
“아니에요. 그나마 경력이 마케팅 쪽에 가깝고……. 마케팅이 좋아요.”
“마케팅이 왜 좋아 ”
“돈이 있는 곳이라서요. Think marketing, because that’s where the money is. 마케팅을 생각하라. 그곳에 돈이 있다.”*
정 회장이 가벼운 톤으로 건성건성 말하는 한혁을 찬찬히 보았다.
“그래, 열심히 해 봐. 네가 있는 팀이 해외 브랜드 취급하는 마케팅 팀이지 ”
“네.”
“팀장이 너보다 어린 여자일 텐데.”
“아세요 ”
“신경 써서 데려온 팀장이라 기억하지. 뉴욕 백화점에서 일하던 사람이야. 백화점 전반적인 마케팅도 팀장이 많이 해내고 있어. 똘똘하다더구나.”
한혁은 서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똘똘하긴 하지.’
서진은 한혁이 입사한 날 복도에서 마주친 이후, 한혁을 완벽하게 밀어내려 하였다. 팀원에게 보이는 평범하고 다정한 인사나 업무가 관련된 이야기 외엔 사적인 시간은 전혀 가지지 못했다. 제대로 쳐다보려 하지도 않은 지 열흘이 넘었나. 기대어 위로를 받던 서진의 어깨와 목덜미가 떠오른다. 내내 그리웠지만 오늘 같은 날은 더욱.
“열심히 할게요.”
한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자리에 오래 둘 생각 없다. 마음이 급해. 잘 들어갔어. 마케팅팀은 바닥에서부터 백화점 전체 큰 그림도 잡아내는 부서야. 매출 실적 분석에서부터 향후 전략의 밑그림까지.”
“회장님, 그렇게 중요한지는 몰랐는데요. 역시 더 배워야겠네요.”
한혁은 정 회장에게 인사를 꾸벅 하고는 물러갔다.
“저 녀석은.”
경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세림 같은 기업에는 마케팅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수많은 곳에서 팔리고 있는 똑같은 제품들을 가지고 세림에서 고객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것. 그것을 이루어 내는 것이 마케팅이었으니 말이다. 경애의 나이가 벌써 일흔일곱이다. 회사를 혼자 끌어가기에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석원이 그렇게도 칭찬을 했다. 어머니가 못마땅해하는 MS사에서 한혁의 부서가 핵심 인재만 모이는 곳이라고. 세림에 차세대 혁명을 가져올 IT와 유통의 결합을 한혁이 해내리라 기대했었다. 한혁은 결코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
창밖으로 비치는 거리가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사무실에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둘러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흘끔흘끔 서진을 보며 인터넷 서핑이나 SNS에 열중하고 있을 사람들을 향해 서진이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 이것만 검토하고 금방 갈 거거든요. 일 끝나신 분들 다들 빨리 가세요.”
“네!”
제일 크게 대답하는 사람은 아마 영석 씨리라. 타다닥 서류들을 챙기는 소리와 동시다발로 울리는 윈도우 꺼지는 소리가 들린다.
“팀장님도 얼른 퇴근하세요.”
“팀장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에브리바디, 즐거운 금요일, 불금입니다.”
서진이 일어서서, 사람들과 경쾌한 인사를 나누었다.
서진은 엑셀 시트를 열어 시차적으로 펼쳐 내는 막대 모양 그래프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디시전 테이블을 만들어 수익 트렌드 차트를 보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다. 서진이 납작하게 엉겨 붙어 버린 그래프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툴바에 들어가 몇 가지 실행 버튼을 눌러 가며 수식을 검토해 보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뭐가 문제지. 안 되잖아.”
로 데이터(raw data, 원본 데이터)를 뒤져 계산기까지 두드려 대며 이리저리 맞춰 보고 씨름한 지 거의 한 시간이 다 되어 가자 위벽에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제 눈까지 흐릿해 오는 것이 아무래도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서진은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려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 있는 백화점 푸드코트나 식당가는 싫고, 귀찮지만 한 블록 떨어진 골목까지 내려가서 샌드위치라도 사 올 생각이었다. 사무실 문을 나서던 차에 들어오는 한혁의 모습을 보고 서진이 비켜섰다.
“지금 퇴근해 ”
“아니요.”
서진은 더 이상 대꾸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가방을 챙겨 나온 한혁이 옆에 섰다.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묻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게 되자 서진은 한혁의 등을 보며 서는 모양이 되어 버렸다. 바짝 붙어 서게 되자 그의 등만 서진의 시야 전체를 차지하였다. 이 사람이 이렇게 컸었나. 고개를 꽤 뒤로 젖혀야 그의 뒷머리가 들어왔다. 등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핏줄을 타고 약한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다. 혹여 호흡이 그의 등에 닿을까 손으로 가린 입에서 갇힌 숨이 더운 습기를 만들어 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서진은 빠른 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월요일에 봬요.”
서진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안정되지 않은 발걸음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뒷모습을 보며 한혁은 천천히 서진을 따라 걸었다. 정문을 나서자 서진의 걸음이 거짓말처럼 느려졌다. 바닥을 보며 걷고 있는지 그녀의 머리가 조금 아래로 기울여져 있다.
서진이 멈춘 곳은 길거리 포장마차 앞이었다. 커다란 철판에 한 손으로도 다 안 잡히는 두꺼운 정사각형 마가린을 쓱쓱 문지르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서진이 말했다.
“샌드위치 하나 주세요. 케첩이랑 설탕 다 해서 반 갈라서요.”
“오늘은 저녁에 왔네.”
서진이 자주 들르는지 아주머니가 웃으며 알은척을 했다.
“네. 이거 먹고 일 좀 더 하다 가려고요.”
식빵 두 개를 마가린 바른 철판에 올리고 얇게 채 친 당근과 양배추를 섞어 식빵 크기로 네모나게 구운 달걀을 나란히 올리는 손이 재게 움직였다. 서진은 옆에 있는 어묵 칸에 걸려 있는 국자를 집어 들었다.
“국물 좀 먹어도 돼요 ”
“뭘 물어봐, 많이 먹어.”
서진은 생긋 웃으며 국자로 조심스레 어묵 국물을 퍼 올렸다.
“손님은 뭐 드릴까요 ”
아주머니의 소리에 그제야 옆에 선 한혁을 발견한 모양이다. 서진은 뜨거운 국물을 종이컵에 따르다 말고 한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도 샌드위치 주세요. 같이요. 설탕 케첩 다 하고 반 갈라서.”
한혁은 서진이 어정쩡하게 잡고 있는 국자를 옆에서 받쳐 들어 아슬아슬 넘어지려는 종이컵을 제자리로 돌렸다.
“다 쏟아지겠다.”
국자를 도로 어묵 칸에 넣어 두고 한혁은 초록색 플라스틱 통에서 냅킨 두어 장을 뽑아냈다. 종이컵 아래로 흘러내린 어묵 국물을 꼼꼼하게 닦아 내고는 쥐기 편하도록 냅킨 한 장을 컵에 둘렀다.
“자, 마셔.”
“집에 안 갔어요 ”
“안 갔으니까 여기 있는 거 아냐.”
서진은 한혁의 손에서 종이컵을 받아 들고는 입에 가져갔다.
“아가씨 아는 사람인가 보네. 아유, 참. 총각이 곱게도 생겼어. 그래, 남자 친구야 ”
“아앗!”
서진이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비명 소리를 냈다. 입으로 삼키려던 뜨거운 국물이 그만 손으로 쏟아지고 말았다. 발갛게 화끈거리는 손을 연신 털어 댔다.
“잠시만, 좀 봐.”
한혁이 서진의 손을 잡아 냅킨으로 닦으며 친절한 손놀림과는 다른 무뚝뚝한 말을 던졌다.
“조심 좀 해라.”
“됐어. 놔.”
서진이 손을 빼려 했지만 한혁은 잡은 손을 놓치지 않고 전등 아래로 끌었다. 불빛 아래서 손가락 하나씩을 들어 보며 자세히 살피더니 이제 되었다는 듯 손을 놓았다.
“많이 덴 거 같지는 않네.”
“신경 꺼.”
“둘이 싸웠나 봐 왜 그래 예쁜 총각이 속을 썩이나 ”
“아니에요, 무슨. 얼른 주세요.”
서진은 은박 호일로 샌드위치를 싸는 아주머니를 채근하며 제 몫을 받자마자 서둘러 왔던 길을 돌아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서진이 두고 간 어묵 국물이 담긴 컵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들이켜자 아주머니가 포장된 샌드위치를 한혁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이것도 할게요.”
한혁은 우유 두 팩을 집어넣었다. 거스름돈을 마다하고 샌드위치와 우유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검은 비닐봉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양복바지를 스쳤다. 그러는 동안 푸른 잉크를 떨어뜨린 듯한 하늘이 점점 짙어졌다. 투명함이 사라진 자리에 멀리서 별이 하나 빛났다. 서울에서 처음 보는 별이라 한혁은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응시하였다. 서울의 봄밤에 별이라……. 언제 봄도 밤도 이렇게 익었는지 몰랐다.
컴퓨터에서 나는 작은 소음이 들릴 만큼 조용한 사무실이다. 발소리가 들린다. 한혁은 업무 중에는 놀랄 만큼 신중하고 동시에 기민하다. 오로지 업무에만 집중하며 그러는 동안에는 완벽하게 환경에 묻힌다. 휴식 시간조차 사람들의 흐름에 맞춰 미리 분석이나 한 듯이 정확하게 움직였다. 평균치의 말수, 단어, 호흡, 웃음, 극도로 작은 움직임.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잡아끌 수밖에 없는 외모로 살아오며 터득한 방식이리라. 어떻게 걸어 다니는지 발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서진은 한혁의 소리를 알아챈다. 애써 무시하며 컴퓨터 화면에만 집중하였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며, 책상 옆으로 다가서는 한혁을 한 번 흘끗 쳐다보고 도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이 많아 ”
서진은 여전히 엉겨 붙은 트렌드 차트를 보며 피로한 듯 목을 뒤로 젖혔다.
“어, 그러니 약 올리지 말고 어서 가.”
한혁은 대답 대신 서진 손에 들려 있는 샌드위치를 툭 채어 갔다.
“뭐야. 나 진심 피곤해. 어서 가.”
서진은 뺏긴 샌드위치를 포기한 듯 남아 있는 반쪽 아래를 호일로 대충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채 입에 도착하기 전에 샌드위치는 다시 한혁의 손에 낚여 있었다.
“왜 그래, 도대체.”
서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혁은 서진의 샌드위치 조각들을 호일 포장에 싸더니 들고 있던 비닐봉지에 던져 넣었다.
“이리 와.”
손목을 잡고 한혁은 서진을 자리에서 끌어내었다.
“왜.”
“그러고 먹으면 체하잖아.”
“어이없어, 정말.”
서진은 기막히다는 웃음을 날렸다.
“이러고 먹는 거 방해하는 너만 아니면 괜찮거든.”
“방해 안 할 테니 그 자리에서 나와.”
한혁은 더 이상 강요 없이 사무실 옆에 붙은 조그만 회의실로 들어갔다.
뺏긴 샌드위치라도 도로 찾겠다는 핑계거리를 만들며 서진은 한혁을 따라 들어섰다.
“앉아.”
의자를 빼어 내고 서진의 어깨를 끌어 자리에 앉히더니 한혁은 비닐봉지를 열어 샌드위치를 꺼냈다. 호일을 삼 센티쯤 넓이로 접어 잘라 내더니 꼼꼼하게 샌드위치 아랫부분을 감아 서진에게 내밀었다.
“같이 천천히 먹어.”
한혁은 우유팩 하나를 꺼내 입구를 잘 벌려 서진 앞에 두었다. 그제야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제 몫으로 사 온 샌드위치를 열어 마찬가지로 호일을 감싸고 있었다.
“너 왜 그래 ”
서진은 샌드위치를 손에 든 채 입에 대지도 않고 말했다.
“뭘.”
서진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관두자. 내가 5년 전만 해도 아마 이 샌드위치랑 우유,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나갔을 거야.”
“그런데 ”
“지금은 일단 배가 고프니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서진은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삼키고 한혁이 입구를 잘 벌려 놓은 우유를 마셨다. 나머지 반쪽 샌드위치와 우유가 다 없어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호일을 동그랗게 구겨 쥐고 빈 우유 곽을 들고 일어섰다.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한혁을 향해 말했다.
“우유 잘 먹었어. 이제 일하러 갈게.”
한혁은 문으로 향하는 서진을 가로막았다.
“왜.”
서진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짜증이 묻어났다.
“윤서진, 왜 그렇게 화를 내 ”
“내가 ”
“응. 나한테 줄곧 화내고 있잖아.”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렇겠지.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이제 비켜 줄래 ”
몸을 틀어 지나치려는 서진을 한혁이 다시 잡아 세웠다. 똑바로 마주 보며 말하였다.
“화내지 마.”
“최한혁, 너야말로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 괜히 따라와서 손을 데었나 아닌가 살피지도 말고, 빵을 먹다 체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마. 이렇게 붙잡지도 말아.”
“그래서 화를 내 ”
“아니, 모든 게 다 화가 나. 하루 종일 내내. 내가 화를 낸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나거든. 화내는 모습 들키고 싶지 않은데 말야.”
서진은 지친 내색을 감추지 않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자신을 납득시킬 만한, 화를 낼 이유가 없거든. 그러니 이유 같은 거 묻지 마. 나도 몰라.”
서진은 한혁을 뿌리치고 문을 열었다.
“그렇게 어려운 요구였나 ”
서진이 문고리를 쥔 채 한혁을 돌아보았다.
“거기까지만 받아 달라는 말.”
서진의 맘에 들어갔다가 나온 듯 명확하게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서진은 문을 닫고 다시 돌아섰다.
* by prof. Daniel Turner, Kellogg Phd. Univ. of Washington, Business Sch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