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29
29화.
29화
정희 씨가 커피를 앞에 내려놓는 동안 그는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처럼 티슈를 하나하나 접어서 사람들에게 건네고 있었다.
“이야, 최한혁 씨, 너무 자상하네.”
“그러게요.”
“근데 두 사람 되게 잘 어울리네. 또 다정 하면 정희 씨잖아.”
“어머, 정말.”
사람들의 말에 정희 씨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고 한혁은 이를 조금 드러내며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서진은 그가 내미는 반듯하게 접어진 티슈를 받으며 도넛에는 손도 대지 않고 커피를 홀짝였다.
“많이 드세요.”
서진은 사람들이 수다 속에 각자 도넛 하나를 다 먹어 갈 때쯤 슬쩍 자리를 옮겼다.
“어, 팀장님은 안 먹어요 ”
영석 씨가 싱글거리며 슈거글레이즈 도넛 하나를 쥐고 서진에게 다가왔다.
“아, 고마워요. 맘이 바빠서요.”
“살살 하세요.”
영석이 서진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영석과 서진에게 흘끗 시선을 주던 한혁은 도넛을 베어 물며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중하는 듯했다.
다들 조금은 미안한 기색으로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사무실에서 서진은 발표 자료 마무리에 한참이었다. 월요일마다 잡힌 미팅이 언제나 금요일 저녁을 반납하게 한다. 언제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는지, 한혁이 자리로 왔다. 서진이 한쪽에 구겨 버린 종이를 집어 휴지통에 넣더니 책상 색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도록 온통 흩어 놓은 프린트들을 툭툭 털어 정리하며 말했다.
“퇴근 안 해 ”
“응, 이거 마치고. 먼저 가.”
한혁의 얼굴 대신 종이를 정리하는 긴 손가락만 쳐다보며 대답하자, 한혁이 서진의 의자를 돌렸다.
“왜 쳐다도 안 봐 ”
“아니, 그냥.”
서진은 가만히 웃었다.
“저녁은 ”
“아까 남겼던 도넛 먹었어.”
“피곤해 주스라도 사다 줄까 ”
“아니.”
“있어 봐. 시원한 걸로 사다 줄게.”
한혁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아. 오늘은 안 바빠 매일 수업 듣는다며. 얼른 가 봐.”
한혁이 퇴근 후 바쁜 스케줄을 설명하길 경영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하였다. 야간 강의라도 듣는 건가, 서진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서진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한혁이 물었다.
“속상한 일 있어 내가 또 속상하게 했나 ”
“아니.”
고개를 돌리는 서진의 뺨을 살며시 잡아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다.
“이야기해 봐. 다 쓰여 있는데 뭘.”
“뭐가.”
“하고 싶은 말 못 참잖아. 얼굴에 말하고 싶어 힘들어 죽겠다, 그렇게 쓰여 있네.”
어쩔 수 없이 늘 속이 들키는구나. 서진은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다정하게 굴어 누구한테든.”
“그래서 화났어 ”
“아니, 화난 건 아니고 속상해.”
“왜 속이 상할까, 예쁜이가.”
따뜻하게 손을 잡아 온다. 녹아 버릴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서진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가 사람들한테 다정하게 굴어 ”
서진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싫어 그럼 너한테만 그렇게 할까……”
“아니야. 그냥, 헛소리 들었다 하고 넘어가. 회사 동료들한테 다정하면 좋지 뭘. 나도 그래서 더 좋아.”
옹졸했던 마음을 털어 내며 서진이 활짝 웃었다.
“나 원래 다정한 사람 아닌 거 알잖아.”
웃음으로 흘리려 했던 말을 한혁은 다시 잡았다.
“사기 치는 거지.”
평상의 음성으로 뜻밖의 말을 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놀란 표정 짓지 마. 사기꾼은 아니야.”
한혁은 풀어 내린 서진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손에 감으며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습관이야. 매일 밤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반성했어. 이렇게 하면 안 됐었어. 상대의 숨겨진 표정을 복기했지. 금세 눈치가 빨라졌어. 마음이 너무 쉽게 보였거든. 어릴 때는 그대로 읽어서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했어. 미움 받기 싫어서……. 그러면 나를 좀 좋아해 주더라.”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을 잡아 주어야 할지 그대로 안아 줘야 할지 알 수 없다. 서툰 위로를 하고 싶지 않아, 주저하면서 팔목에 손을 가져다 댔을 뿐이다.
“서진아.”
“응 ”
“넌 나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어떻게 다 알아. 다른 인생인데. 이제 알아 가면 되잖아.”
서진이 팔을 다독였다.
“나 중학교 때, 유학 가기 전까지 엉망이었어. 술, 담배, 폭주, 싸움, 할 거 다 했어. 성적만 탑. 공부 같은 건 너무 쉬웠으니까.”
“와아, 능력자. 멋지네. 퀄리 시험 망치고 도망친 내 반항과 질이 다른데 ”
서진이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한혁은 고개를 저었다.
“집에서 할머닌 모르셨어. 쫓겨나고 싶어서 시작한 일탈인데, 쫓겨날까 매일 너무 무서웠어. 나는, 지금까지 늘 그 상태야.”
서진은 한혁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검은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서진이 힘주어 말했다.
“약속해.”
“응 ”
“나한테만은 그러지 마. 네가 다정하지 않아도 못되게 굴어도 난 더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너 좋아해.”
서진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가슴으로 끌었다.
“넌 빛이 나는데. 내가 이렇게 불안할 정도로 넌 빛이 나는데……. 누구나 널 사랑할 수밖에 없을 텐데……. 네 속에 얼음은 왜 안 녹을까. 네 빛은 왜 그 얼음은 녹이지 못하는 걸까.”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말하였다.
“트롤의 거울 조각이 심장에 박힌 카이는 눈의 여왕이랑 입맞춤했지만, 너는 나랑 할 거니까. 괜찮아.”
서진이 장난스레 입을 맞췄다.
“첫 번째의 입맞춤은 얼음을 녹이고.”
“두 번째의 입맞춤은 과거를 지우고.”
촉, 촉 아이와 나누는 입맞춤처럼 경쾌한 소리가 난다. 한혁이 떨어지는 서진의 입술을 붙잡았다.
“사무실.”
서진이 한혁을 떼어 냈다.
“방법이 있지.”
한혁이 서진의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허리를 끌어당겨 순식간에 위에 앉힌다. 목을 끌어안으며 서진이 앗, 비명을 삼켰다.
“내가 쭉 봤는데, 팀장님 자리가 잘 안 보여. 앉아 있음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이 자리에선 밖이 보이지만 말이야.”
서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번만 봐줘. 세 번째가 필요해.”
서진이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었다. 호흡이 뺏기고 목소리가 사라진다. 키스의 열기를 고스란히 담고서 한혁이 말하였다.
“세 번째의 키스로, 네가 들어왔어.”
“미치겠어. 넌 말만으로도 나를 미치게 해.”
서진이 속삭이듯 말하였다.
“연습시키는 거야. 실전에서 쓰러지지 말라고.”
서진이 이마를 기대며 웃었다.
몸을 포개어 앉은 채로 한혁이 서진이 늘어놓은 자료를 집어 들었다.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세요, 윤 팀장님.”
“재밌어.”
“워커홀릭은 싫은데.”
“난 키스홀릭이야.”
한혁이 웃음을 터뜨린다. 맞닿은 몸으로 진동이 울린다.
“회사가 좀 걱정이야.”
“응.”
한혁이 종이를 넘기며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서진이 다 정리되지 못한 보고서를 가리키며 설명하였다.
“특히 한국 패션 시장이 흔들리고 있어. 캐주얼 브랜드들의 매출이 정말 형편없어. 지난해 분기보다 이십 퍼센트 이상 떨어지고, 그렇다고 고급 브랜드가 신통한 것도 아니고 말야. 내 분야는 아니지만 거기도 우리 백화점 수수료 36%를 견디지 못하고 퇴출되는 매장이 늘고 있어. 내년이면 수수료가 2% 정도 더 인상될지도 모르는데. 수입 브랜드도 그다지 신통치 않아. 겨우 수준만 유지하는데 청담동 로드숍으로 나간 명품 매장 쪽도 알아보니 유지비 뽑는 수준이라고 죽는 소리야.”
서진은 금세 눈을 반짝이며 진지해졌다. 이것도. 팔을 뻗어 한혁에게 자료를 하나 더 건네었다.
“원인은 뭔지 생각해 봤어 ”
“캐주얼 브랜드가 휘청거리는 건 인터넷으로 쉽고 값싼, 그렇지만 유행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아이템을 접하는 경로가 점점 늘어나서 그런 건데, 디자이너 브랜드, 명품도 다르지 않아. 그거 알아 우리나라에 일 년에 삼만 오천이 넘는 패션 디자인 관련 전공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어. 기존의 의류 업계에선 절대로 흡수 불가능하지. 파튼스나 리스디 출신들도 쉬쉬하면서 명품 스타일 의류를 동대문이나 인터넷 숍을 통해 생산해 내고 있다고. 이대로는 경쟁이 안 될 거야. 우리나라 경제도 말이야.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거든. 뭐 경제학 석사 주제에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거품이 일지 않는 한 몇 년 전과 같은 너도나도 하나씩 하는 명품 붐은 없을 거 같아.”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어 ”
“혼자 생각만 하고 있지.”
서진은 쓰다 만 보고서를 톡톡 치며 웃었다.
“일개 작은 팀 팀장이 뭘 하겠냐마는, 세일 시스템을 좀 바꿔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 미국처럼 라스트 콜까지 세컨, 서드 세일로 가격 인하 하는 것도 방법이고 해외 쪽으로 돌리는 것도 방법인데. 명품은 미국 쪽 유통이랑 조인트로 아울렛을 외곽에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어차피 노세일 브랜드 몇 개 말고는 다들 알거든. 외국 아울렛에서 얼마에 팔리는지. 이태리 가서 한국 사람들이 버스 기사에게 어버어버 말하면 다 듣지도 않고 프라다 공장 처분 장소를 알려 준대잖아.”
한혁이 서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윤 팀장님, 예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역시 똑똑하기도 하네.”
서진이 뺨에 입을 맞추고 일어섰다.
“나 무거워서 너 다리 저릴걸 조심해서 일어서서 가. 응 나는 보고서 마저 다 쓰고 가야 해.”
서진은 책상에 기대어 앉아 프린트된 자료를 넘기며 펜으로 쭉쭉 밑줄을 그었다.
“서진아.”
“응 ”
“오늘은 먼저 갈게. 내일 우리 놀러 가자.”
“어디 ”
“멀리. 내가 가 보고 싶은 데가 있거든. 전화할게. 받아. 늦게 할 수도 있어.”
“늦어도 괜찮아.”
자료를 쥐고 있는 서진의 손을 덮어 감싸 보고는 한혁이 일어섰다.
***
새벽이라 불러도 좋을 토요일 이른 아침이다. 서진은 가족들이 모두 깨기도 전에 살금살금 움직였다. 부쩍 더워진 날씨다. 게다가 기차 여행이라니……. 서진은 옷장 문을 열고 한참을 뒤적거렸다. 스타일리시하면서도 편안한 옷이 없을까 고민하며 한참을 둘러봐도 빼곡하게 걸려 있는 옷들 대부분이 모두 정장이었다. 결국 청바지에 스트링 셔츠를 입고 핀턱 주름과 쉬폰으로 장식된 아사 면 블라우스를 덧입었다. 가슴 선이 파이고 환히 비치는 디자인이 망설여지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뽀얗게 드러나는 목덜미를 머리를 풀어 적당히 가려 보이고 나뭇잎사귀를 모티브로 한 네크라인 길이 목걸이를 했다. 서진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삐거덕삐거덕 여지없이 울리는 소리는 더 조심스럽다. 잠 깨우면 안 되는데. 조심할수록 더 크게 울리는 계단 소리, 마루판 소리.
‘아, 제발 마루라도 바꾸자니까.’
서진이 현관에서 플랫슈즈를 꺼내 신으려 신발장을 조용히 열었을 때 삐걱하는 마루판 소리가 들렸다.
“아, 엄마.”
“아니, 넌 왜 이 시간부터.”
소양이 눈을 비비며 서진에게 다가왔다.
“어디 가 ”
서진의 차림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소양을 보며 서진이 얼버무렸다.
“아, 오늘 좀 행사가 있어요.”
“무슨 행사 ”
서진은 우물쭈물 운동화를 꺼내어 신었다.
“회사 사람들이랑 등산.”
“그래 근데 가방은 그게 뭐야 배낭 같은 거 챙겨야지.”
“아, 괜찮아요. 회사에서 나눠 준 거 사무실에 있거든요.”
소양이 서진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물었다.
“뭐 좀 먹고 갈래 ”
“아뇨. 가서 먹을게요. 얼른 들어가 주무세요.”
서둘러 손을 저어 인사하고는 서진이 현관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