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31
31화.
31화
“집에 있었구나.”
“집에서 공부하고 있었지. 아, 지겨워 죽겠어.”
“빨리 고3이 지나가야 할 텐데.”
“근데 오빠 왜 안 들어와. 같이 살자. 응 응 으응 ”
한혁은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오빠 보고 싶어서. 너무 자주 안 오니까.”
“저번에 같이 집에서 밥 먹은 지 이 주 삼 주도 안 되었는데 ”
예린이 토라진 표정으로 눈을 크게 치켜뜨며 말했다.
“한 달 한두 번이 많아 단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
“예린아, 오빠 피곤해. 그만하고. 오빠 할머니도 봬야지.”
연화의 말에 예린은 한혁의 팔짱을 낀 채 정 회장이 있는 서재로 다가가며 계속 칭얼거렸다.
“오빠아, 집에 들어와라. 내 방 세 배는 되는 오빠 방도 있는데. 계속 안 들어오면 내가 거기 쓸 거다.”
“얘, 예린아.”
뒤따르던 연화가 무서운 표정으로 예린을 쏘아보자 예린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엄만, 농담이야, 농담. 오빠 얼른 들어오라구.”
“그래, 곧 들어올게.”
“정말 진짜지 ”
예린이 뛰어오를 듯 한혁의 팔을 잡아당기며 확인했다.
“응. 그럴게.”
연화는 한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서재 문을 노크했다.
“어머님, 한혁이 왔습니다.”
“그래.”
정 회장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한혁 혼자 서재로 들어갔다.
정 회장은 책상에 앉아 안경을 벗으며 한혁을 바라보았다. 한혁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저 왔습니다, 회장님.”
“그래, 저녁은 먹었고 ”
“네.”
“열심히 한다고 들었다.”
“노력하는 중입니다.”
“회사 사정은 대충 다 파악했니 ”
“네.”
“그럼 너도 알겠구나.”
“……네.”
한혁이 떨어지지 않는 대답을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반년은 거기 두고 밑에 돌아가는 사정도 익히게 하고 싶지만 너도 알다시피 어렵구나. 자칫하다가는 뿌리째 흔들려 버릴 수도 있어.”
회장이 책상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너한테 이런 부담은 주지 않을 텐데. 미안하다.”
“아닙니다, 회장님. 쉬시지도 못하고, 제가 죄송합니다. ……건강은, 어떠세요 ”
“뭐, 아직 끄떡없어.”
경애는 손으로 탁, 책상을 치며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한혁은 주치의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던 그녀의 건강 상태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들어온 지 세 달쯤 되었나 ”
“네.”
“무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너야 경력이나 학벌이나 크게 어색하지는 않을 거야. 다음 주 중에 발령이 날 거야.”
“회장님, 한 주만 연기해 주십시오.”
정 회장은 한혁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부탁드립니다.”
한혁은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잠깐의 침묵 후에 정 회장은 할 수 없다는 듯 답을 했다.
“알았어. 발령 나기 전에 집으로도 들어와. 혼사도 생각해 봐야겠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나을 거야.”
경애는 한혁의 출생의 흠이 못내 맘에 걸렸다. 비슷한 기업의 딸을 짝지우면 크게 도움이 될 성싶어 적당한 자리를 고르는 중이었다. 기훈보다 앞서 장가를 보내기가 불편해 급히 서두르지 않았지만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마음을 먹은 터였다.
“집으로는 들어오지만, 여자는 만나는 사람 있습니다.”
한혁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여자라 절로 입이 벌어진다. 경애는 놀라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궁금해, 한번 데려와 봐.”
“아직은요.”
한혁이 싱긋이 웃었다.
“나한테 보여 주지 못할 사람이야 ”
“아니요.”
“그런데 왜 ”
“할머니한테는 꼭 보여 주고 싶은 여자예요. 정경애 회장님께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 말하고는.”
정 회장이 눈썹을 휘어 못마땅하게 한혁을 쳐다보았다.
“조만간 인사드릴게요. 제가 차이지 않으면요.”
“뭐, 뭐야 아니 누가, 누가 널 그런대 이런 고연 것. 당장 데리고 와. 내 혼쭐을 낼 테니. 대체 감히 누가 너를! 내 손주를.”
귀애하는 손주 입에서 여자에게 차인다는 소리가 나오자 경애는 체통이고 뭐고 금세 다 벗어던진 칠순 넘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안절부절못하였다. 한혁이 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할머니, 너무 무서워요. 할머니가 무서워서 나 차일지도 몰라요.”
“자리 잡는 대로 데려와 봐. 원, 기훈 녀석도 그렇고 왜 이리 집안에 혼사가 늦어지는지.”
정 회장의 말에 한혁이 입 한 끝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세한 어른들은 당숙 장가 안 보내신대요 ”
“기훈이가 말을 들어먹지를 않아. 보스턴에 지금 자연스레 만나라고 연결한 여자가 있나 본데 별소리 없는 거 보니 그냥 넘어가는 거 같아. 그리 혼자 나이를 먹다 보니 별 추접한 소리도 들려오는 눈치고, 올해에는 아무 여자하고든 혼사를 하고 한국으로 끌고 오겠다고 맘을 먹은 모양이니, 하긴 하겠지. 기훈이 다음에 너야.”
한혁이 찜찜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훈의 생각만으로도 체증이 걸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한혁이 서재를 나서자 거실에서 기다리던 연화가 일어섰다.
“내일 휴일이잖니, 자고 가지 않을래 회장님이 좋아하실 텐데.”
“아니요.”
연화의 얼굴에 최선을 다해 보이려는 부담감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한혁은 부드럽게 말했다.
“곧 들어올 텐데요. 봐주세요.”
“그래도 저녁도 못 먹고. 다과상 준비했는데.”
한혁은 주방으로 향하려는 연화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혼자 생각할 일이 좀 있어요. 다음에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저녁 먹으러 올래 맛있게 차려 놓을게.”
“죄송합니다. 내일 저녁 약속이 또 있어요. 평생 안 하던 사람 만나기를 하느라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요.”
연화가 한혁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많이 바쁠 텐데.”
“아니에요, 큰어머니.”
한혁을 따라 정원까지 내려온 연화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한혁이 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연화의 말을 기다렸다.
“큰어머니,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아니야. 대문까지 바래다줄게.”
천천히 걸음을 다시 옮기는데, 연화가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전에 어머니라 불러 주었잖니.”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한혁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함을 무릅쓰고 연화가 용기를 내었다.
“내가, 그렇게 불러 달라고 부탁해도 될까 ”
여느 때처럼 표정을 살피며 긴장하는 모습의 연화는 너무나 익숙했다. 한혁은 웃으며 다정하게 답했다.
“네, 그럼요. 그러겠습니다.”
***
정 회장을 만난 다음 날, 저녁 모임을 마치고 한혁은 동양그룹 2세 이경재 이사와 단둘이 조용한 바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회사를 떠맡게 되는 일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힘껏 내달려 도망칠 수 있는 것이라면, 던져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던데. 어쩔 셈이야 ”
“곧 해야죠. 부실한 제가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들까 그게 문제겠죠.”
한혁은 얼음 탄 위스키를 들이켜며 건성으로 말했다. 바의 조명으로 한혁의 얼굴에 음영이 생겼다. 희고 부드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느낌이었다.
“너 대단한 녀석인 거 알아. 그런 소리 마.”
“아시겠지만, 저 형편없어요.”
한혁이 자조하듯 웃자, 경재가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입에 발린 인사말이 아니야. 위로는 더더욱 아니고. 넌 내가 본 어느 집 사람들보다 대단하고 잘났어. 가끔 그 순수하게 보이는 어린애 같은 얼굴 뒤에 뭐가 있을까, 네 속엔 뭐가 앉아 있을까 미치도록 궁금해. 인정할게. 솔직하게 열등감도 느껴.”
“왜 이러십니까. 형같이 흠결 없는 분께서.”
금세 어두운 음영은 증발시킨 듯 환하게 웃는 한혁을 보며 경재는 씁쓸하게 웃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올 시간이 다 됐는데.”
“누구 아까 약속 있다는 분 ”
“응, 여기로 나오라고 했어. 소개시켜 줄게. 괜찮은 녀석이거든. 선우회 서클 후배인데, 까마득한 후배라 학교 다닐 때는 몇 번만 봤었지만 졸업하고 자주 봤는데 꽤 괜찮아. 똘똘해.”
“그래요 ”
한혁은 실타래처럼 엉켜드는 생각들이 버거워 건성으로 답하고 술잔을 들어 올리던 참이었다.
“지금 오네. 시간은 칼같이 지키지.”
‘어, 여기.’ 경재가 손을 들어 자리를 확인시켰다. 한혁과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남자가 한혁을 알아채고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가왔다.
“잘 왔어. 내 후배 윤서훈, 맥킨리 다니는 재원이지. 이쪽은 최한혁, 세림 후계자.”
서훈이 채 한혁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 경재가 그들 식의 소개 인사를 하였다.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당황한 사람은 한혁이었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서훈은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멈춰 섰다.
세림, 후계자
서훈은 한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고 최석원 부회장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최 부회장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공백이 생긴 세림에 그 아들을 둘러싼 추측이 난무했다. 대부분은 부정적인 평가였다. 곧 그가 경영에 관여할 것이라는 관측도 우세했지만 오랫동안 미국에 거주하며 귀국하지 않는 그를 집안에서 거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는 설도 있었고, 정 회장이 극히 싸고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당연히 그의 평범하지 않은 출생 스토리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가 최한혁이다. 서진 누나와 골목길에서 격렬한 키스를 하던 남자.
최악이네, 나쁜 놈.
위장에서 쓴 물이 솟구쳐 올랐다. 입가에 비웃음이 떠돌았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서훈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깍듯한 인사에 한혁이 눈썹을 찡그렸다.
“윤서훈 씨, 맥킨리 다닌다고 했나요 ”
“아, 네.”
명함 지갑을 꺼내 자신의 명함을 두 손으로 한혁에게 내밀었다. 서훈의 명함을 받아 든 한혁이 지갑을 열었다. 아무 직책도 표시되지 않고 최한혁 이름만 덩그러니 있는 네모난 종이를 받아 들고 서훈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바보, 윤서진.’
경재가 서훈의 표정을 살피더니 짐짓 웃으며 말했다.
“아직 제대로 된 명함은 없지 최 상무.”
서훈과 한혁의 얼굴이 동시에 긴장으로 굳어진 것을 보며 경재는 그의 식대로의 해석을 더했다.
“아, 미안. 서훈아, 아직은 비밀인가 봐. 내주쯤 세상에 알려지겠지. 좀 놀랄 거야. 이 친구 얼굴을 보고 놀라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전에 그 능력에도 놀랄 테지. 그때까지는 우리 이 시시한 기밀을 지켜 주는 척하자구.”
서훈이 양쪽 입가를 말아 올리며 웃음 지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최한혁 상무님.”
서훈의 불쾌한 눈동자가 한혁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아, 서훈이 너한테 선배야. 경성고 3회쯤 위가 되나 비록 이 친구 유학 가느라 졸업은 안 했지만 말이야.”
“네, 그러세요 ”
경재가 따라 주는 술잔을 받은 서훈이 벌컥벌컥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러면 후배가 따르는 술 한 잔 받으십시오, 선배님.”
억지로 만들어 내는 미소로도 눈에 담긴 원망과 분노를 감출 수 없다. 한혁이 서훈의 눈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닮았네, 남매가. 눈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그러지.”
한혁은 잔을 비웠다.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 어둡게 빛나는 눈동자, 위스키 잔에 머무는 입술, 와이셔츠 아래로 조금씩 움직이는 근육들. 제기랄. 그 팔로 그 입술로 서진을 품고 있던 모습이 자연스레 재생된다. 그날조차 서진의 눈에 흘리지 못하는 눈물이 가득했다.
나쁜 새끼. 멱살이라도 잡을 지경이다.
어색한 침묵이 핸드폰 벨 소리로 잠시 흩뜨려졌다. 경재가 양해를 구하며 핸드폰을 들고 시야에서 사라지자 애써 포장하던 활기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어이없어서.”
서훈은 한혁을 외면한 채로 스트레이트 잔을 비웠다. 속이 타는 것만 같아 온더락스 잔에 얼음을 채웠다.
“윤서훈.”
얼음을 집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서훈이 도전적으로 한혁을 쳐다보았다.
“왜, 무슨 할 말 있습니까 저한테 ”
“시간을 줘.”
“도통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
집게에 아슬아슬 잡혀 있던 얼음이 ‘탁’ 소리를 내며 서훈의 크리스털 잔으로 굴러떨어졌다.
“서진이한테, 내가 말하게 해 줘.”
서훈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나왔다.
“경력에 어울리지 않는 평사원, 세림에는 도무지 왜 들어왔는지 모름. 나이는 자기보다 한 살 많은지 두 살 많은지 확인해야 함.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픔. 제 누나는 선배님에 대해 여전히 그 상태인가요 ”
한혁이 손을 들어 미간을 가렸다.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아래로 그의 꽉 다물어진 입술만 빛을 받고 있었다.
“……비슷한 것 같군.”
“듣던 대로 굉장하시네요.”
서훈이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플레이 방식인가요 아니면 늘 이런 식인가요. 뭐 하자는 건지. 다 떠나서, 서진 누나 당신 회사 직원이잖아. 뭐 이런, 양아치 같은.”
서훈이 술잔을 비우고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올렸다.
“최한혁 선배님, 장난은 다른 여자랑 하세요. 어차피 당신한테는 다 똑같겠지만, 서진 누나는…….”
서훈은 서진 누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삼켰다. 어차피 이미, 소용없는 말이다. 서훈이 테이블에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놓고 일어섰다.
“앉아, 윤서훈. 내 잔이 아직 안 비었어.”
“내가 왜 당신이랑 나란히 앉아 술을 마셔. 직원 희롱하는 삼류 양아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