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35
35화.
35화
[윤서훈]액정에 떠오르는 이름을 보며 저도 모르게 짧은 한숨이 나온다. 핸드폰을 가방 속으로 던져 버렸다.
“집이야 ”
“응, 동생.”
“어떡하지 너 걱정 듣겠다.”
“할 수 없지 뭐.”
서훈이 포기하지 않고 전화를 걸어 대는지 핸드폰 진동은 계속되었다.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서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스콘을 베어 물었다. 어제 회식이 있어 늦으니 먼저 주무시라는 메시지 이후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외박이라…….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커피를 거의 다 마셨을 때, 핸드폰 벨 소리가 거실 쪽에서 들렸다. 한혁의 것이다.
“잠시만.”
한혁이 거실 탁자 위에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
상대는 답을 하지 않는다.
“최한혁입니다. 말씀하세요.”
-최한혁 상무님, 저 윤서훈입니다.
한혁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서진을 흘끗 바라보았다.
“선배라고 부르지 않았었나 물론 다르게도 불렀지만.”
-……네, 선배님.
“무슨 일이지 ”
한혁의 답이 불만스러운 듯 서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혹시…….
“누나 ”
-네. 혹시 지금 같이 있습니까
“그런데.”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서훈이 물었다. 예의 바른 말투지만 화를 참는 내색이다.
-죄송하지만, 서진 누나와 통화 잠시 할 수 있을까요
“기다려.”
한혁은 아무 설명 없이 핸드폰을 서진에게 건넸다.
“받아.”
“누구 ”
서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서훈의 목소리에 기절할 듯 놀라 한혁을 쳐다보았지만 설명이 없다. 서훈도 마찬가지다.
“너, 어떻게 ”
-나 지금 회사 나와 있어.
“네가 왜…….”
서훈이 말을 끊었다.
-지금 잠시 회사 들러서 옷 받아서 가라.
서훈은 용건만 말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어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서진의 반응에 서훈이 한숨을 탁 내뱉었다. 짜증을 감추지 않는다.
-엄마한테는 늦게 들어왔다가 아침 일찍 운동 나갔다 했어. 바보처럼 어제 회사 갔던 차림 그대로 들어가지 말고 옷 받아 갈아입고 들어가.
“…….”
-20분 내로 와.
“알았어.”
서훈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도대체 이 녀석은 어디까지 뭘 알고 있는 건지, 왜 한혁의 번호를 가지고 있는지 서진이 한혁을 쳐다보았다.
“왜 서훈이가 네 번호를 가지고 있지 ”
“며칠 전에 우연히 선배 만나는 자리에서 합석했어.”
“널 알아 ”
“응.”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밤, 서훈의 깊은 고민은 서진이 원인이었다.
“가 봐야 하니 ”
한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피스 앞에서 만난 서훈은 찬바람이 일도록 무시무시한 표정이다.
“받아.”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옷이 든 봉투를 쥐여 주고 돌아섰다.
“서훈아.”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서훈이 서진을 쳐다보았다.
“너무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비슷한 소리를 하는구나. 두 사람.”
“……그랬어 ”
“그 사람한테 그렇게 확신이 있어 ”
확신……이라니. 서진은 서훈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아니면 성인 남녀 간의 합의에 의한 즐거움일 뿐이야 누나가 그토록 경멸하는.”
“야! 윤서훈!”
참지 못하고 서진이 들고 있던 봉투를 휘둘렀다. 봉투는 서훈의 가슴을 때리고 아래로 툭 떨어졌다.
“너까지 거들지 않아도 충분해.”
서진의 눈에 울음이 가득했다. 그만해야 하는데 멈출 수가 없다. 서훈은 소리를 높였다.
“이야기해 다 이야기하더냐고!”
“그래, 그리고 더 이상은 없어. 나 바보 아니랬지.”
“그러면 왜…….”
서훈은 차마 말을 뱉지 못하고 고개를 비스듬히 떨어뜨렸다. 떨어진 봉투를 들어 서진에게 다시 주고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작은누나. 나 들어갈게.”
다정하게 서진의 어깨를 손으로 한번 감싸 주고 돌아섰다. 사무실 유리 문 안으로 멀어지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서진은 손에 쥐어진 봉투를 벌려 보았다. 청바지와 면 티셔츠……. 가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심한 자식이었다. 단 두 개의 옷가지만 들어 있는 종이봉투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집 근처 놀이터가 오른편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 서진은 한혁을 한번 쳐다보았다. 가늘게 다문 입술, 조금 찌푸린 미간. 목덜미와 어깨. 그리고 기어에 올려진 손, 아름답게 솟아오른 팔 근육. 늘 가슴이 설렜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지. 서진은 충동적으로 손을 그의 팔 위에 겹쳐 올렸다. ‘응 ’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쳐다본다. 울음이 터지지 않는 건 정말 칭찬해 줄 일이다. 아니, 심장이 터져 버리지 않은 것도. 눈물샘에도 심장에게도 기특하다 장하다 칭찬하며 이제 입에게도 칭찬을 할 차례다.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내릴게.”
차가 멈추어 섰다.
“아, 한혁 씨, 내가 이야기했었나 다음 주에 나 출장 가. 뉴욕으로.”
“언제라 그랬지 ”
“원래는 목요일이었는데 화요일로 당겨졌어.”
“응.”
“다녀오면 상무님 되어 있겠다.”
칭찬을 받은 서진의 입술은 맑은 웃음소리까지 기특하게 만들어 냈다.
“아마도.”
“나, 갈게.”
한혁은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내미는 손을 잡고 그가 등으로 감싸 오는 팔에 묻히듯 몸을 기대며 내려섰다.
“참, 꼬박꼬박 잊지도 않네.”
“집 앞까지 가야 하는데.”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서진은 활짝 웃어 보이고 빠르게 걸어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참을 앞만 보고 걷다가 눈앞에 높다란 세림 회장의 집 담벼락이 보이자 서진은 그제야 멈춰 섰다. 목이 아프도록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집 앞까지도 못 데려다주는 사람. 저 담벼락만큼이나 높은 울 속에 있는 사람……. 그 담 안으로 차마 들어갈 용기도 못 내는 비겁한 윤서진.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미안해…….
내 사랑, 내 애인.
***
보스턴 캠브리지 학교 근처의 타이 식당은 가격 대비 맛이나 분위기가 괜찮아 손님이 늘 많았다. 다행히 저녁을 먹기에 좀 늦은 시간인지라 식당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기훈과 지희는 느긋한 식사를 하였다.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 지희는 힘들게 입을 떼었다.
“조금 있으면 저 귀국해요.”
“그렇지. 교육학 석사는 1년 과정이니까. 정말 금방이다. 학교 재단 쪽으로 갈 거니 ”
“네, 우선은 좀 더 일을 배우려구요.”
기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지희, 곱고 착한 여자였다. 천상 여자라 할 수 있는 나긋나긋한 성품에 마음도 행동만큼이나 바른 사람이었다. 두 집안의 암묵적 합의하에 자연스레 만나라고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면 더 편안했을 사람이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보낸 지희에게마저 미동도 않는 기훈을 보며 부모님도 이제 서른다섯 먹은 아들에 대해 손을 들고 말았다.
“지희야, 아마 나도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귀국할 거 같아.”
“네 ”
“아니, 귀국하기로 결정했어.”
영문을 모르겠다던 표정을 짓다가 이내 지희의 얼굴에 옅은 기대감이 깃든다. 기훈은 불편한 마음을 누르고 말을 이었다.
“내가 찾아야 할 여자가 있어.”
지희는 입을 다물고 기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뒷머리를 쾅 부딪친 듯 눈앞이 어질거렸다. 이미 수없이 인정시키려 했던 사실이다. 그는 자신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마음 한 귀퉁이도 들어갈 자리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기훈의 입에서 나온 ‘찾아야 할 여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잔인했다.
“그렇군요.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랬어 항간에 도는 말을 믿지 않고 ”
“무슨 ”
이내 생각나는 말이 있어 지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나 신체 건강하고 바이도 아니고 스트레이트야. 그거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 여자 찾으려고. 이제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나한테 손드셨단다.”
기훈은 언제나처럼 조용하게 웃어 보였다.
“그분, 지금 한국에 있나요 ”
“응, 한국에. 나 때문에 제 길도 못 걷고 고생만 했어. 나는 지난 수 년 동안 손 놓고 보기만 하고. 형편없는 놈이야.”
애잔하게 젖어 드는 기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지희는 마음 한구석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잡았다. 그 희망을 확인하려 성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분도 아세요 이제 찾으러 간다는 거.”
기훈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니, 전혀. 부모님 허락받기 전에는 연락, 안 하고 싶었어.”
“그분이 혹시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순식간에 굳어진 기훈의 얼굴을 보며 지희는 황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아니,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맞아. 같은 마음이 아닐 거야. 그래도 난 찾으려고.”
계산서에 사인을 하며 내지르는 기훈의 단호한 말에 지희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 해도 마음이 쿡쿡 아려 와 견디기 힘들었다. 음식점을 먼저 나가는 뒷모습만 망연히 좇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선배님,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응 ”
여느 때처럼 잔잔한 표정을 짓는 기훈을 보며 지희는 인생 최대의 용기를 쥐어짜 냈다.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단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사람,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을 위해 자존심도 체면도 다 구겨 던져 버렸다.
“만약, 만약에 그분이 거절하면 전혀 돌이킬 수 없으면 그때는…… 저 한 번만 봐 주신다고 약속해 주세요.”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바보처럼 맺히는 눈물을 보았던 것인지 기훈은 선선히 답을 주었다.
“그럴게. 약속할게.”
“저, 하나만 더요.”
“떠나기 전에 이번 주말쯤 뉴욕에 가려고 해요.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
기훈은 보기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건 좀 더 쉬운 거네. 그러자. 금요일 강의가 없으니까 그때 같이 내 차로 가자.”
지희가 얼굴을 물들이며 환하게 웃었다. 한 번쯤, 한 번만이라도 보스턴을 떠나기 전에 그와 같이 여행이라는 걸 해 보고 싶었다. 여전히 그녀를 봐주지 않는 그였지만.
서진은 삭스백화점의 새로운 지역 기반 마케팅 기법인 NRM(Neigh bor Relationship Marketing)의 실현 가능성과 아트 마케팅을 머릿속으로 검토하며 천천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는 뉴미니멀리즘의 디자이너 브랜드의 상품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잠깐 휘청할 정도로 현기증이 일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출장을 떠나기 직전 마케팅 관련 일 외에 그녀에게 주어진 다른 일은 삭스백화점과의 제휴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입장은 밝히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는 접촉이라 레이놀즈 이사를 만나 꽤 오랜 시간을 조심스레 탐색했다. 다행히 그와는 일전에 삭스 백화점이 서부 지역의 지역 기반 백화점 하나를 인수하는 프로젝트 팀에서 몇 달을 같이 고생한 경험이 있는지라 조금은 편안했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언제라도 다시 컴백하라는 그의 말을 서진은 조용히 웃으며 거절했다.
‘난 또 그렇게 행로를 바꾸지는 않아. 힘들어도 불편해도 할 수 있어.’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을 되뇌며 서진은 눈을 떴다. 사람은 언젠가 저지른 자신의 실수나 과오를 어떤 날에든 어떤 방식이든 갚아 나가야 하는 법인 것 같았다. 상과 벌의 개념이라기보다 실수에 대한 만회의 기회. 서진은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전히 불편한 과거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다른 결정을 내리는 자신을 버텨 가는 것. 그것이 서진이 내린 결론이었다. 출장을 온 지난 며칠 동안에도 눈을 떠서 눈을 감을 때까지 단 일 초도 한혁의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떠나 있는다고 보지 않는다고 간단히 지울 수 없는 것은 자명했다. 차라리 피하지 않고 서서히 가슴의 통증을 줄여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서진의 걸음은 루이비통 매장에서 멈추었다. 발렌시아가에서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니콜라스 제스키에르는 몇 해 전부터 루이비통 브랜드를 끌고 있다. 라프 시몬스 같은 럭셔리 하우스의 톱 레벨 크리에이터가 거대 브랜드를 떠난 시점에서 그는 여전히 독립의 시기가 초유의 관심이 되는 가장 주목받는 톱 크리에이터이다. 혁신과 탐험을 멈추지 않는다는 그의 모토처럼 이번 컬렉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남미의 토속적인 컬러와 스포티한 감각에 더해진 특유의 초현실주의가 작품성은 물론 웨어러블한 의상 디자인을 완성시켰다. 서진은 잠시 매장 안에서 신상품 샘플을 프리오더하는 고객들을 대응하는 매장 매니저의 노련한 서비스를 지켜보았다. 마케팅 기법과 제휴, 새로운 패션 트렌드로 얽혀서 지쳐 가는 머리와 버겁게 많은 감정으로 머리도 가슴도 지나치게 무겁다. 조금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돌아서 천천히 매장을 나서는 길이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반질거리는 바닥만 보면서 걸음을 옮기던 서진은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남자를 무심결에 올려다보았다.
“서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