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37
37화.
37화
인수 작업을 위한 전담팀을 시작한 지도 열흘이 지났다. 전담팀으로 배정된 서진은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한혁을 끈질기게 거부하고 있고, 한혁은 그녀를 잡은 끈을 놓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였다. 이런 식의 감정의 줄타기는 해 본 적이 없다. 서진은 피로감에 지쳐 갔다. 더군다나, 전담팀은 회사 내에서 미묘한 정쟁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기밀로 시작된 전담팀이 사전 검토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사회에서 인수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강 전무를 위시한 세력은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고, 최 상무의 과시용 성과를 위한 보여 주기식 치기 어린 속단이라 대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가 오가든 한혁의 표정은 늘 일정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양 오히려 흥미롭다는 그의 표정은 비난하려는 자들을 맥 빠지게 했으며 최한혁에 대한 각기 다른 판단을 내리도록 하였다. 어떤 상황에도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 태도에 정 회장의 대담함을 엿보며 숨죽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게 차근차근 일을 처리해 나가는 그의 냉정함에 신뢰를 보내기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애 같은 그의 외모와 흠집 있는 출신, 간간이 보이는 시니컬한 태도는 색안경을 낀 자들에게는 노쇠한 정 회장을 등에 업고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는 애송이로 치부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자들에게 최한혁은 그저 회사의 사활을 걸고 견제해야 할 골칫덩이였다.
한혁이 결재 서류를 검토하다 정수리 부분을 주먹으로 꾹꾹 눌렀다. 진 이사는 걱정과 애정을 담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
“네 ”
“많이 피로해 보이는지라.”
한혁은 입가를 끌어 올리며 싱긋 웃었다.
“젊은 놈이 이 정도 일도 못하겠습니까.”
“계속 야근에 신경 쓰이는 일들……”
진 이사의 말은 옥신각신하는 소리와 함께 벌컥 열어젖혀진 문으로 인해,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문으로 들어온 사람에 의해 중단되었다. 짙은 향수 냄새를 휘감고 여자가 들어섰다. 최선을 다해 말리려던 비서가 한혁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한혁이, 오랜만이다.”
진 이사가 노기를 감추지 않고 비서를 쏘아보았다. 당황한 어린 비서는 안쓰러울 만큼 목까지 붉어진다. 성가시다. 한혁은 그만 나가 보라는 손짓을 보였다.
“진회성 씨 오랜만이군요.”
“네.”
진 이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리를 권할 새도 없이 소파에 깊이 기대어 앉은 여자는 한쪽 다리를 꼰 채로 핸드백을 열어 손가락에 끼운 담배에 달칵 불을 붙였다. 뿌옇게 뿜어 올리는 연기를 보며 한혁은 여자의 앞자리로 걸어왔다.
“앉아.”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한 한혁을 여자는 짙은 아이라인이 둘러진 눈으로 할끗 올려다보았다. 인조 속눈썹이 붙은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올해로 나이가 예순이었던가. 지나치게 탱탱한 몸과 고운 얼굴이었다. 삼십 대라 해도 믿을 법한 탄력 있는 몸매와 짙은 화장으로 굳이 가려야 될 주름도 없는 얼굴이다. 진 이사는 사무실 한편에 있던 작은 난초 화분 받침대를 테이블에 내렸다. 붉은색 립스틱이 묻어나는 담배 가치에서 재가 떨어질 듯 길게 붙어 있다.
“센스는 여전하네요, 진회성 씨.”
웃음에 색기를 감추지 않는다. 누구라도 유혹할 준비가 되어 있는 늙은 여인이 역겹고 부끄럽다. 화분 받침대에 톡톡 재를 털어 대는 손가락 끝에 오렌지색 매니큐어가 요란스럽다. 재가 두 차례 떨어졌을 때, 한혁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
“아들 얼굴 보러.”
“그럼 얼굴 보셨으니 이만 가시죠.”
한혁이 무표정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자 은실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싸가지 없는 자식.”
한혁은 지갑을 열어 한 장도 남김없이 집어 꺼냈다. 천만 원, 백만 원짜리 빳빳한 수표들이 그녀 앞에 놓여졌다. 은실은 푸르스름한 종이에 박힌 숫자를 바라보더니 수표를 움켜쥐고 일어섰다.
“내가, 내가 너한테 돈 받으러 왔니 ”
신경질적으로 수표를 돌려놓으려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혁은 양손으로 감싸듯 그 손을 쥐었다.
“가져가세요. 그리고 이제 사무실로는 오지 마세요.”
분노도 짜증도 없는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은실은 파르르 떨었다. 자리로 가서 앉은 한혁의 눈짓을 받고 진 이사가 은실 옆으로 다가섰다.
“사모님, 나가세요.”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번쩍번쩍한 자리에 앉으니 사람도 안 보여 내가, 내가 너 낳았어. 죽을 고비 넘겨 가며. 너, 나 아니면, 하! 세림 상무 세상에 빛도 구경 못할 인간이었다고. 내가, 잘나가던 여배우가 애를 배고, 영화 찍다가 펑크를 내고 부른 배를 안고 숨어 다녔어.”
은실의 눈이 희번덕거린다. 어릴 때면 저 눈이 무서워 몸을 웅크렸다. 무조건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엄마,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세림, 세림! 징그러운 인간들. 이가 갈려. 그 수모를 받으면서,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그 모욕을 받으며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를 버러지 취급도 안 했어. 오래 살다 보니 우습다 천년만년 살 것 같던 그 인간이 갑자기 죽어 없어지고 이제 이 버러지 배 속에서 낳은 아이가 세림을 차지하네 야! 여기가!”
은실이 한혁의 눈앞으로 걸어가 제 배를 두드렸다.
“네가 기어 나온 곳이야. 너도 버러지 속에서 태어났어. 그런데 그 주제에 세림가 사람이라고 날 이따위로 취급해 ”
사무실 전체가 울리도록 악을 쓰는 은실의 목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진 이사와 달리 한혁은 굳게 입술을 다문 채 아무 표정이 없다. 참다못한 진 이사가 억지로 은실을 이끌어 문을 열었다. 끝까지 진 이사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높이던 은실도, 힘을 다해 그녀를 끌어내던 진 이사도 열린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을 보고 일순간 얼어붙었다. 비웃음과 경멸을 가득 담고서 석연의 시선이 은실의 몸을 한 번 훑었다. 벌레라도 본 듯이 끔찍하다는 표정이다. 석연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장은실은 다시 소리를 높였지만 진 이사와 남자 비서가 은실을 붙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고모님.”
한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사무실까지 불러들여 외고 패고 만나는 거냐 ”
한혁은 시선을 잠깐 낮춘 것 외에는 낯빛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재수 없는 자식. 석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석연은 재영이의 자리도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한 정 회장에 대한 서운함과 억울함을 삭일 길이 없어, 가라앉지 않은 기분으로 한혁에게 들렀다. 잘난 상무 자리를 차고앉은 모습을 제 눈으로 보고 비웃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아닌 척, 끝까지 관심 없는 척 가면을 덮어쓰고 있던 놈이 결국 늙은 할머니를 구워삶아 평이사 자리도 아닌 상무 자리에 바로 앉은 것이다. 분이 찬 걸음으로 상무실에 들어서서 머뭇거리는 비서들을 제치고 방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대단한 목소리가 두꺼운 문밖까지 튀어나왔다. 안절부절못하는 비서들의 얼굴을 보며 석연은 오물을 뒤집어쓴 듯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최한혁, 결코 세림의 상무 자리에 앉아야 될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고 아직도 패악을 쓰는 장은실과 그녀의 천한 자식, 그리고 은실을 끌고 나가려는 진 이사의 모습이 보였다. 값싼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비서들의 흘끗거리는 시선이 석연의 머리 뒤로 찌릿하게 느껴졌다. 저런 자식이 무슨 세림 상무야. 석연의 노골적인 모욕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혁이 자리를 권했다.
“고모님, 앉으세요. 차 드릴까요 ”
담담한 표정의 한혁을 석연이 매섭게 바라보았다.
“필요 없어. 회장실에서 마시고 오는 길이야.”
한혁의 무참한 기분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석연은 진창에 미끄러져 온통 흙탕물을 범벅한 기분이었다. 그런 망신스런 꼴이라니, 조금도 너그러워질 수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회장님 만났다가 너 상무 자리 앉은 모습이나 볼까 했어. 결국 별 볼썽사나운 꼬락서니만 봤지만 말야.”
한혁은 스며 나오는 숨을 참으려 속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나오니 ”
휙 돌아서려는 석연을 향해 한혁의 나지막한 소리가 울렸다.
“회장님 건강 안 좋으십니다.”
“내가 엄마 건강도 모르겠어 ”
석연이 눈매를 치켜 올리며 한혁을 쏘아보았다.
“재영이 일이든 뭐든 하실 말씀 있으면 저한테 하십시오.”
“뭐 재영이를 내가 너한테 부탁해 진짜 웃겨. 네가 뭔데 한혁이 너 본성이 나오는구나 언제나 겸손한 척 뒤로 물러서 있는 척! 주제 파악하는 척 굴더니.”
석연이 도전적으로 다가와 상무 명패를 손끝으로 탁탁 두드렸다.
“네가 이제 상무 자리 꿰어 차니 눈에 뵈는 게 없어 어디서 이래라 저래라야!”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거 아닙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한혁이 고개를 숙였다.
“마음 푸십시오, 고모님. 죄송합니다. 재영이는 제가…… 더 잘하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표정도, 어조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제가 회의가 있습니다.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열고 서 있는 한혁의 얼굴은 핏기가 식어 창백하였다. 석연은 끓어오르는 제 분노에도 벅차, 난도질당한 그의 마음이나, 감정을 누르느라 파랗게 질려 버린 얼굴 따위는 자세히 볼 여유가 없었다. 어쩌면 석연은 최한혁이라는 꼬마 아이는 언제나 파리한 안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살펴 가십시오.”
깍듯한 인사를 하는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너, 그 자리 언제까지 지키나 두고 봐.’
문이 닫히자 은실을 수행했던 박 이사가 다가섰다.
“정말 기가 막혀. 우리 집안에 이런 창피가.”
석연은 굽실거리는 박 이사에게 함부로 내뱉으며 복도로 나갔다.
한혁은 차마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황망한 표정의 비서들을 지나 작은 회의실로 몸을 밀어 넣었다. 불도 켜지 않고 어둑어둑한 회의실 중앙에 아무렇게나 몸을 넣고 다리를 굽혀 앉았다. 불에 달군 쇳덩이를 올린 듯 묵직한 머리가 후끈거려 왔다. 이마에 손을 받치고 무거운 머리를 힘겹게 지탱했다. 비릿하고 뜨거운 핏물이 목으로 솟아올라 자꾸만 마른침을 삼켜 냈다.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지나면. 백까지 숫자를 세면.’
한혁은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그랬듯 눈을 감고 천천히 숫자를 세어 갔다.
하나, 둘, 셋…….
붉게, 검게 번져 가는 시야에 조금씩 아파트 화단이 펼쳐졌다. 어둑어둑해지는 여름 저녁을 환하게 비추던 분꽃 더미.
하나, 둘, 셋, 넷…….
그는 핑크색 분꽃 송이를 세기 시작했다. 분꽃 향기. 아련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따뜻한 감촉이 손에 닿았다가 꿈처럼 사라졌다.
‘어디 아파요 ’
그녀의 목소리. 꿈은 아니었다.
회의 전 보고할 사항을 들고 한혁의 집무실을 들어서려던 서진은 복도에 끌려 나가면서도 연방 소리를 질러 대는 여자와 마주쳤다. 한혁의 생모이다. 짙은 화장, 선글라스를 쓴 얼굴로도 장은실이라는 배우를 알아볼 수 있었다. 차마 들어가지 못해 망설이다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망연히 멈추어 섰다. 성난 걸음으로 다가온 석연이 서진을 밀치다시피 하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섰다. 옆에 붙어 선 박 이사에게 석연이 소리를 높였다.
‘그런 천한 것들이 세림에서 활개를 쳐 상무 웃기고 있어.’
회사 직원이 분명해 보이는 자신의 앞에서 들으란 듯이 흘리는 석연의 말에 서진의 등줄기가 시려 왔다. 급히 돌아서 한혁의 방으로 향하던 서진은 복도 벽에 기대어 자조하였다. 윤서진, 네가 뭘 하겠다고. 네가 뭐라고…….
서진은 상무실에 가려던 발길을 돌려 착잡한 기분으로 회의실 문을 열었다. 컴컴한 공간에 이마를 괴고 있는 한혁의 모습에 숨이 멈추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은 듯 한혁은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서 어깻숨만 쉬었다. 그의 어깨를, 시리도록 아픈 그의 등을 보면서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그의 손에 마음이 시리다.
아파 많이 아파……
“어디 아파요 ”
한혁이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를 감싸는 포근한 향기, 그녀의 포근한 눈빛을 향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팔을 뻗어 서진의 허리를 끌었다.
“미안, 조금만.”
서진이 긴장으로 굳어 한혁을 밀어내던 손을 멈추었다.
미안…….
견디고 참느라 갈라진 목소리는 너무 낮아 들리지 않는다. 잠시 움직임이 없던 서진은, 조용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다정하게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얇은 옷 위로 그의 차가운 얼굴에서 전이되는 싸늘한 기운이 배에서 심장으로 타고 흘렀다. 손을 내려 반쯤 묻혀 있는 얼굴을 감쌌다. 온기를 나누듯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조금씩 따듯해지는 숨결이 서진의 배와 팔로 퍼진다.
“상무님, 사람들 곧 들어와요.”
가느다란 손가락이 귓바퀴를 지나며 떨어졌다. 싫어……. 허리가 휘어지도록 감아 들었다. 안고 싶어, 매일매일 심장이 녹을 것 같다.
“한혁 씨, 이러지 마.”
수도 없이 들었던 말. 그녀가 무거운 한숨을 누르고 대신 입술 사이로 그 말을 밀어낼 때마다 한혁은 머리끝까지 저려 오는 감각을 참으며 그녀를 놓았다. 그러지 않으면, 이렇게라도 옆에 있는 서진이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와 닿았던 자리마다 번졌던 온기가, 알싸한 설움이 되어 서진의 몸을 잠식했다. 서진은 괜찮다고, 견딜 수 있다고 설득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떼어 불을 켰다. 환한 불빛 아래 드러날 한혁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멀리 떨어진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보고서와 노트를 펼쳤다. 그녀의 모습을 따라 줄곧 움직이던 한혁의 시선도 벽 쪽 어디쯤에 멈추었는지 델 것 같던 감각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