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44
44화.
44화
“엄마한테 이야기 들었는데 정 교수랑 어떤지 걱정하시더라.”
“어쩌긴, 지나간 버스지.”
태연하게 말하는 서진이 못마땅한 듯 서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작은누나, 최 상무랑도 끝냈지 ”
서진이 대답 없이 말끄러미 바라보자 서훈은 굳은 표정으로 몰아붙였다.
“끝낸다고 했잖아. 아니야 ”
“몰라. 그 사람은 끝이라 하고 나는 아니고.”
“아, 진짜. 더 할 수 없이 한심하게 군다.”
서훈은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차를 거칠게 출발했다.
회사 앞에 도착하여 내리려는 서진의 뒤통수에 대고 서훈은 차갑게 말했다.
“누나, 그만둬라. 이번에는 5년보다 더 걸릴지도 몰라.”
“평생이 될 수도 있어. 그래도 후회 안 할 때까지 할 거야.”
서진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차에서 내렸다.
인수전담팀은 말 그대로 비상이었다. 어제 공표한 대로 철저한 보안을 위해 조치가 취해졌다. 내부로든 외부로든 단어 하나 새어 나가지 않게 이메일은 검색은 물론이고 USB도 가져 나가지 못하도록 설치된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흘러나갈 수 있는 정보들이지만 철저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심적인 부담을 가중하려는 의도였다.
테스크포스팀 사무실은 차가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업무를 시작하던 서진이 호출을 받고 상무실에 올라갔다. 한혁이 한 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서진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통화 내용이 시원찮은지 한혁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 표정에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서진은 한혁의 등 뒤로 넓게 나 있는 창 너머 펼쳐지는 도심의 풍경에 눈을 두었다. 한혁이 수화기를 내리고 서진을 사무적인 음성으로 불렀다.
“윤 팀장.”
“네 ”
“상황이 좀 그래. 도와줘야겠어.”
공적인 업무만 언급하는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서운해지는 감정은 어쩔 수 없다. 대답 없이 서 있자, 불만스러운 듯 한혁이 물었다.
“사표는 집어치운 거지 ”
“……네.”
“아이뱅크 다시 알아봤어. 기밀로 추진될 거야. 같이 삭스 쪽 맡아 줘. 공동 투자로 아울렛 추진할 거야. 빠른 시일 내에 그쪽 사장이랑 같이 만나려고. 되도록이면 자세한 이야기는 팀 내부에서도 하지 말고, 삭스는 철저하게 그쪽하고만 진행해.”
“네, 알겠습니다.”
서진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나가려 할 때 한혁이 다시 불렀다.
“윤서진. 잠깐 이리 와 봐.”
의중을 알 수 없어 머뭇머뭇 책상 앞에 다가서는 서진을 보며 한혁은 제 책상 오른쪽 옆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로.”
의자를 돌려 비스듬하게 앉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명치끝부터 빳빳하게 굳어졌다. 한혁의 시선이 서진에게 고정되자 한 발 정도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온몸이 잔뜩 긴장된다. 수없이 가까이했던 사람인데 어젯밤에도 훔쳤던 입술인데 다물고 있는 그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쿡쿡 심장이 제멋대로 박동한다.
“어제.”
갑자기 어딘가에 쿡 찔린 듯 몸이 움찔한다. 어제는 잊어 주세요, 말해야 하나. 달아오르는 서진의 뺨을 바라보며 한혁이 한쪽 입 끝만 올리며 웃었다.
“굉장하더라.”
서진은 고개를 숙였다.
“윤서진 팀장, 능력은 자부해도 돼. 그러고도 사표 수리 안 했으니.”
“죄송합니다.”
“그 능력 잘 발휘해. 기대하고 있을 테니.”
“네, 상무님.”
“그리고…….”
“……네.”
“혼자 술 마시고 다니지 마라.”
서진이 의문스런 눈으로 한혁을 보았다. 한혁이 부드럽게 웃는다.
“행패도 부리지 말고.”
서진의 얼굴이 더 붉어진다.
“넘어지지 말고.”
무언가 말하려 입술만 달싹이다가 서진은 시선을 낮추었다.
“나가 봐.”
서진이 머리를 숙여 인사하였다. 고개를 들고서 한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응 묻는 듯한 눈을 보면서 고개를 젓고는 돌아섰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내내 전개되었다. 서진과 한혁도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릴 여유조차 없이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미 강 전무와 재영 그리고 한혁의 대결 구도로 들어선 세림의 상황은 겉으로 보이는 잔잔한 수면과 다르게 확연한 균열이 일어났다. 한혁의 여과 없는 경고로 꽁지에 불 붙은 개 모양 펄쩍거리는 강 전무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가면을 덮어쓰고는 더욱더 거세게 한혁의 숨통을 끊어 놓는 목적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달렸다. 정 회장은 불편하고 복잡한 속내를 감추며 한혁에게 잘해 보라는 말만 건네고 까맣게 타들어 가도록 속을 끓이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떨어지는 회장은 사위를 내칠 명분도 기운도 없는 듯했다.
한혁을 비롯한 팀 전체와 한혁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부평과의 접촉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삭스백화점 건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삭스에 대한 일은 회사 내에서 윤서진 팀장에게 일임되어 구체적인 사안은 기밀로 진행되었다. SJ 서준우 사장의 능력과 사람됨을 믿어 보기로 결정한 한혁이 서진과 만남을 주선했고, 두 사람은 삭스에 대한 정보 분석과 최선의 전략을 짜내는 데 골몰했다. 보안을 위해 주로 작업은 SJ에서 이루어졌다. 서진은 SJ 사무실로 출근하다시피 하였다. 한혁과는 전체 회의 때나 잠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냉정한 판단과 효율적 대화 방식을 고수하는 한혁은 예상치 못한 변수나 계획에 크고 작은 차질이 생겨도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민한 두뇌 회전으로 순발력 있게 방향을 틀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 팀원들의 분위기는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오직 서진만이 알아챌 수 있었다. 한혁은 바늘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아슬아슬하였다. 한혁이 얼마나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지, 감당하기 벅찬 부담감을 가까스로 버텨 내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럴수록 서진은 필사적으로 삭스 건에 매달렸다. 이번 합작 건의 성패가 한혁의 성패와 직결되어 있다.
뉴욕으로 출장을 떠나기 하루 전이다. 서진은 늦은 시각에 세림 사무실로 다시 들어왔다. 모두 퇴근한 이후에도 서진 홀로 사무실에 남았다. 마지막으로 자료를 점검하고 협상에서 예상되는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꼼꼼히 검토해야 했다. 혹시라도 놓치는 것이 없도록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아무렇게나 높이 쌓아 둔 페이퍼들과 랩톱컴퓨터와 데스크톱 두 개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서진은 잠시 엎드렸다. 어지럼증 때문이다. 내내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다. 식사도 부실하게 때우기 일쑤이고, 약국에서 산 철분약은 위장 장애 때문에 하루걸러 먹을까 말까 한 수준이니 몸이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없다. 서진은 어지러운 눈을 붙이고 깜박 잠이 들었다. 꿈에서도 숫자와 그래프를 보고 있다.
레이놀즈 이사 앞에서 브리핑을 하다가 중요한 자료에 실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서진은 몸을 떨며 잠에서 깨었다. 시야는 아직 캄캄하다. 몽롱한 의식 속에 꿈임을 겨우 확인하고 아직도 옥죄인 듯한 가슴을 문질렀다. 어지러운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 손길이 느껴진다.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어루만진다. 옆에 다가선 사람의 와이셔츠만 보인다.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스듬히 올려다보니 그리운 얼굴이다. 매일 보아도 그립고,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사람. 서진은 언제 왔는지 왜 지켜보고 있었는지 묻지 않는다.
“안색이 안 좋아. 집에 가서 쉬지 않고.”
“스탠드 흰 불빛 때문에 그래요.”
“말랐다.”
한혁이 척추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으며 말했다.
“나, 원래 날씬해요.”
“그랬던가.”
한혁은 이제 매일 밤 몸을 되새겨 본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 모두 잊은 듯한 얼굴로, 책상에 기대어 앉아 서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부담 너무 갖지 마.”
“능력 보이라면서. 능력 좋은 직원 그뿐이라는데 그것마저 아니면 자존심 상해 기절할 거야.”
한혁이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몇 번이고 반복하여 서진을 어루만졌다.
“부담스러워. 내가 망칠까 봐 너무 무서워.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어. 소화도 안 되고, 엉망이야.”
“그럴 거 없어. 맘 편히 먹어. 확률이 낮은 베팅이잖아. 괜찮아. 아니면 또 아닌 대로 부딪혀 보면 돼.”
서진이 한혁의 손에 뺨을 기대었다.
“잘할게. 꼭 잘되도록 할게.”
“무리하지 마. 기대 별로 하지 않아. 어차피 승률 낮은 게임이야.”
“아니, 내가 꼭 잘되도록 할 거야.”
서진이 손을 잡고 일어서 한혁과 눈을 맞추었다.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니, 걱정 말고 기다려.”
“그럴게.”
한혁이 순순하게 답한다.
“나 꼭 기다려, 응 멋지게 잘하고 올 테니.”
“과거 시험 가는 이 도령 같네.”
“금의환향할게.”
서진이 여전히 비스듬히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한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니, 용기를 줘.”
한혁이 팔을 벌렸다. 동료 간에 건넬 수 있는 다정한 격려, 가벼운 포옹을 하며 서진의 등을 두드렸다.
“금의환향하면.”
서진이 한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말하였다.
“선물 줘야 해.”
“그럼. 특별 성과금도 줘야지.”
“돌아오는 날, 일요일이 내 생일이야.”
한혁은 답이 없다.
“생일 선물 줘.”
서진을 떼어 내며 한혁이 머리칼만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서진은 모르는 척 다시 말한다.
“금의환향하면 생일 선물 줘.”
“월요일에 출근하면 줄게. 팀원들 모여서 케이크도 하고.”
“싫어, 생일 선물을 미루는 게 어딨어 일요일에 꼭 줘야 해.”
“일요일 저녁에 약속 있어.”
“잠깐 나 보고 가면 되겠네. 선물 안 주면 나 출장 안 간다 ”
억지를 부리면서도 목으로는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온다. 이런 감정으로 한혁과 아무 사이도 아닌 척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서진은 반환점을 목표로 달리는 부상당한 단거리 선수처럼 삭스 계약 성사만을 보고 달렸다. 그 이후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가 없다.
“선물은 준비할게. 주는 시간은 모르겠지만. 출장 잘 다녀와.”
한혁은 서진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테스크포스팀 사무실에서 집무실로 가는 동안 한혁은 제 양손을 펼쳐 보았다. 서진의 머리칼이 닿았던 손바닥이 아직도 간지러워 입술을 대어 본다. 피로감이 짙은 얼굴과 달리 손끝으로만 만질 수 있었던 피부는 여전히 보드랍고 매끄럽다. 웅크린 마른 어깨와 등줄기가 애틋하다. 서진에게 지나치게 큰 짐을 지웠다고 자책하지만, 서진이 기를 쓰고 해내는 모습에 한혁은 매일 전투력을 재충전시켰다. 책상에 앉아 제일 아래 서랍을 열었다. 반지 케이스를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다가 열어 본다. 전체적으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볼록한 부피감이 있는 백금 반지는 양쪽으로 섬세한 세공의 골드 마감을 한 것 외에는 다른 장식은 없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반지를 오랜 시간을 들여 골랐다. 심플하고 간결한 이미지가 서진을 닮은 것 같아 가느다란 흰 손에 무척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유보해야 한다. 서진이 다치지 않고 집안의 인정을 받고 회장님의 허락을 구하려면, 한혁이 세림에서 자리를 굳건히 잡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서진이 주도하는 삭스 건은 그러기에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용감하고 씩씩한 서진이 출장에서 금의환향하기를 춘향이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
한국에서부터 미리 구체적인 사안까지 많은 부분을 논의했었지만 레이놀즈 이사와의 협상은 녹록하지 않았다. 한성에서 제시하는 월등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세림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한 협상이 힘겹게 진행되었다. 다행히 다른 인수 건을 위해 뉴욕에 들른 서준우 사장 역시 계약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삭스에 할애했지만 실무적인 구체적 사안까지 커버해야 하는 서진이 쏟아야 하는 시간은 훨씬 길었다. 세림과 삭스의 내부 사정을 환하게 알고 있기도 했고, 레이놀즈 이사의 까다로운 성품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서진은 그에 맞춰 준비를 철저히 할 수 있었다. 몇 날 며칠을 새우면서 분석한 수많은 가능성과 질문에 대한 대답은 완벽에 가까웠고 열세를 뒤집을 만큼 놀라운 설득력이 있었다. SJ 서준우 사장은 세 번째 공식적인 협상 자리를 나서면서 지친 내색이 역력한 서진에게 조용히 말했다.
‘최 상무, 기대보다 훨씬 더 훌륭한 직원을 두고 있네요. 잘될 거 같은데요.’
백 마디의 격려보다 효과적인 응원이었다. 꼭 맞는 검정색 슈트 속의 몸이 한계 상황을 알리며 허물어 져갈 때, 서진은 ‘최 상무’라는 말 한마디에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마지막으로 한 번의 사적인 저녁 식사 후에 드디어 레이놀즈 이사는 확신을 가져도 될 만한 긍정적인 답을 안겨 주었다.
세림과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 양해 각서)에 도장을 찍기 전 남은 것은 한국의 법률적인 사안 검토와 약간의 금전적인 조정 정도였다. 늦어도 이 주, 빠른 시일 내에 확답을 하기로 한 삭스의 공식적인 입장은 예상보다 더 큰 성과였다. 환한 미소를 보이는 레이놀즈 이사와 악수를 하며 서진은 이제 전속력을 다해 달리던 레이스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리고, 다리가 휘청거릴 것만 같았다.
길고 힘든 출장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정수리가 선득선득했다. 목 끝까지 담요를 끌어 올리며 서진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경련이 일도록 힘든 미팅이었고 미팅을 마친 후에는 이메일과 팩스로 도착하는 자료들을 받아서 꼬박 밤을 새워 가며 준비를 해야 했었다. 한 치의 실수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속에 극도로 지쳐 갔다. 꺼져 가는 촛불처럼 흔들리면서도, 선명하게 떠올린 것은 한혁의 얼굴이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게임. 이번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세림에서 한혁의 입지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릴 것이 자명했다. 서진은, 한혁이 입을 마음의 상처에 더 겁이 났다.
늦은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한 서진은 핸드폰 전원을 켜고 11을 힘주어 눌렀다. 화면에 당연하게 떠오르는 그의 이름에도 언제나 새털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 가슴이 간질거렸다.
-네.
“저 도착했어요.”
커다란 여행 가방을 잔뜩 실은 카트가 옆을 스치다가 방향을 잘못 틀어 서진의 종아리를 들이받고 말았다. 풀썩 다리가 꺾이며 비틀거렸다.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빠르게 말하고 지나쳤다. 휴가철 여행객으로 들어찬 공항의 소음은 사방으로 부딪히고 동심원들을 그려 대며 온통 불규칙한 소리의 물결을 만들었다. 서진은 귀를 바짝 대었다.
-윤 팀장, 서 사장님한테 얘기 들었어. 수고했어.
“네.”
-그래, 그럼 들어가서 좀 쉬어.
“저…….”
서진은 아랫입술을 한 번 잘근 깨물었다.
-지금 밖이라 길게 통화하기가 그래. 다음에 통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