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45
45화.
45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다정하지 않은 말투였지만 서진은 지금 며칠을 사투를 벌이듯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생일이었다……. 서진은 대꾸 없이 전화를 끊고 어릿어릿한 눈을 들어 공항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오른손에 달려 있는 하드 케이스 여행 가방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좌우로 흔들리며 느리게 움직였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준비한 생일상을 받았다. 찹쌀과 팥을 넉넉하게 넣은 찰밥에 마른 홍합을 넣고 끓인 구수한 미역국도, 윤기가 흐르는 도미도, 엄마가 더운 날 부쳐 내느라 고생했을 것이 분명한 대구전과 쇠고기 육전에도 서진의 젓가락은 기껍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걱정하는 소양과 윤 교수를 향해 미안한 마음에 몇 숟갈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고 국을 떠먹던 서진이 결국 수저를 내렸다. 목이 화끈화끈 무섭게 부어오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심한 몸살이라도 난 것만 같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워 천장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정신없이 몰아치던 일을 한 고비 넘기자 잡히지 않는 한혁의 마음이 무거운 고통이 되어 서진을 짓눌렀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뜬 서진은 멍하니 앉아 손에 쥔 핸드폰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긴 여름 해가 넘어가고 서진의 방에도 어둑어둑 밤의 기운이 스며들 때까지 까맣게 불이 꺼진 핸드폰 액정은 깜박이지도 않았다. 서진의 가슴에도 불이 하나씩 꺼진다. 서진은 핸드폰을 책상에 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오늘 만날 수는 없을 텐데도 하염없이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제 꼴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천천히 골목을 돌아내려 놀이터 벤치에 걸터앉았다. 술에 취해 한혁에게 사표를 던지던 그곳에서 서진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힘든 기분이 되어 버렸다. 여름 바람에도 느껴지는 한기 때문에 내장까지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밤이 깊어가자 놀이 기구에 머무르던 아이들도 모두 들어가고 한참을 홀로 가로등 불빛 아래 앉아 있었다. 고통스런 마음과 강행군에 지친 몸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밤이 완연히 깊어 간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지 싶어 고개를 드는데 곁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진아.”
흰 백합꽃 한 다발을 들고 곁에 선 사람은 기훈이었다. 그가 내미는 꽃을 의지 없는 사람처럼 받아 무릎에 올렸다.
“생일 축하해.”
서진이 힘없이 웃었다.
“집에 찾아갔었는데 너 나갔다고. 핸드폰도 두고 갔다더라. 지나는 길에 발견하고 긴가민가해서 와 봤어.”
“고마워요. 생일 축하해 줘서.”
서진은 기훈을 향해 억지로 웃음을 만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핑글 주위가 빠르게 돌았다. 눈앞이 아찔해 옆으로 기울어지는 서진을 기훈이 부축했다.
“열 있어 ”
기훈은 서진의 이마에 다정하게 손을 가져다 댔다. 언젠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 남자의 손을 그렇게나 좋아했었다. 강아지처럼 얼굴을 비벼 댔던 기억이 떠오른다. 기훈은 언제나 너그럽고 세심하게 서진을 살폈다. 안색만 봐도 너무 쉽게 상태를 알아채어 숨길 여지가 없었다. 서진은 잔뜩 부은 목으로 억지로 마른침을 삼켰다. 과거의 서진이 좋아했던 남자의 손을 잡아 떼어 냈다.
“출장 가서 좀 힘들었나 봐요. 조금 몸살 기운이 있어요. 괜찮아요.”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서진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듯 몸에도 마음에도 끝없이 바람이 일었다. 한혁을 생각하며 뉴욕의 밤을 이를 악물고 자료와 씨름했다. 까다롭고 철저한 레이놀즈를 설득하기 위해 목이 쉬도록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한혁은 그녀의 생일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듯 무심하게 전화를 끊었고 곁에 서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다.
“왜.”
기훈이 걱정스러운 듯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속상해서.”
“그 사람이 너 속상하게 하니 ”
입을 벌리자 눈물샘도 같이 벌어지는 듯 또르륵 또르륵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기훈이 작은 한숨을 쉬더니 서진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가만가만 가벼운 손길로 위로하려던 그가 서진의 몸을 감싸 안자 다른 감정으로 들떠 올랐다. 눈물 젖은 서진의 입술이 열 기운으로 더욱 붉어져 있었다. 기훈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에 닿기 전, 문득 정신이 드는 듯 서진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기훈은 서진을 안은 팔에 힘을 더하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서진은 완강하다. 이마가 맞닿아도 고개를 고집스레 비틀고 가슴을 밀어내었다. 기훈은 차마 꾹 다문 입술에 닿지 못한다.
흰 장미를 손질하는 플로리스트의 손길이 바쁘다. 여름밤이 되어 활짝 피어오른 분꽃 송이에 오직 흰 장미만 넣어 달라 부탁했다. 싱싱한 초록빛의 널따란 엽란 잎을 군데군데 둘러 만드는 동그란 부케가 조금씩 모양을 잡아 간다.
“흰 장미는 순결한 사랑의 의지를 표현한다던데요.”
“네.”
조금 무안한 듯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플로리스트는 미소 지었다.
“여자 친구가 무척 좋아하겠어요.”
“글쎄요.”
“원래는 검정 리본으로 마무리를 하는데 흰 레이스로 할게요. 아, 분꽃 향이 참 좋아요.”
남자는 급히 꽃다발을 받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숍을 나섰다. 꽤 늦은 시간, 남자는 여자 친구 생일날 주기로 약속했다며 직접 구해 온 분꽃을 내밀었다. 최상급의 흰 장미를 섞어 만든 정성스런 부케를 선물로 받을,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행복감을 떠올리며 플로리스트는 숍 문 앞에 close 카드를 걸고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단발머리 고등학생이었다.
‘저는 둘째 딸, 윤서진이에요. 예쁜 딸이 아니에요.’
탄산수처럼 톡 쏘아붙이던 영리한 눈빛의 여자아이. 기훈에게 서진은 그날부터 사랑스런 여동생이었고 오랜 기간을 가까이 지내면서 단 한 사람, 사랑하는 여자였다.
다른 남자 때문에 해쓱해진 얼굴로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서진은 너무도 낯설었다. 기훈이 깊이 간직하고 있던 열여덟의 소녀도, 벼락같은 말을 전하는 어머니 앞에서도 뼛속까지 자신감으로 가득하여 당당하던 모습도 아니었다. 기훈을 밀어내는 손이 닿은 가슴에 새파란 멍울이 잡힌다. 기훈은 천천히 서진을 풀었다. 서진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시선을 외면하며 마치 남아 있는 기훈의 체온이라도 털어 내려는 듯 팔을 문질렀다.
“미안하다.”
“……미안해요. 이제 오빠를 원망할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나 봐요.”
처진 고개를 들지 않고 서진이 말했다.
“원망으로 거부하는 거 아니에요. 오빠와 나, 지난 감정의 기억들로 힘든 적도 있었지만 이제 그 기억조차 담을 기운이 없어요. 다른 사람 때문에 너무 아프고 힘들어요.”
서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창백한 안색으로 힘겹게 말하였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는 서진의 뒷모습을 보며 차마 옆에 서지 못해 그녀의 뒤를 몇 발자국 떨어져 뒤따랐다. 가슴에 서걱서걱 모래바람이 분다.
무심하게 놀이터를 빠져나가려던 서진의 걸음이 뚝 멈추더니 바닥에서 뭔가를 주워 올리려는 듯 구부리는 뒷모습이 들어왔다. 잠시 꼼짝도 않던 그녀가 갑자기 앞뒤 가리지 않고 도로를 뛰어 나갔다.
“서진아!”
기훈이 서진의 팔을 황급히 잡았다. 그에게 팔이 잡힌지도 모르는 듯 여름밤이 내린 골목길 구석구석을 어지러이 살피던 서진이 가느다란 소리를 질렀다. 울음에 묻혀 분간하기 힘든 소리는 그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서진의 손에 꼭 쥐어진 모양이 흐트러진 꽃다발만이 정확하게 보였다.
“하…… 어……떡해 나…….”
서진은 그의 손을 세차게 뿌리치고 골목길을 뛰어 올라갔다.
돌아서는 기훈의 눈에 덩그러니 벤치 아래에 떨어진 흰 백합 다발이 들어왔다.
숨이 차게 올라왔던 길을 몇 번이고 되짚고 동네 아래까지 골목길을 돌고 또 돌아도 한혁의 차도 모습도 아무것도 없었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간 서진은 책상 위에 두고 간 핸드폰을 들었다. 기훈에게서 온 전화 한 통, 그리고 최한혁 이름의 부재중 전화 세 통. 메시지 창을 열었다.
[생일 축하해. 이제야 겨우 시간이 났다.] [예쁜이, 자는 거야. 지금 집 근처로 갈게.]핸드폰 액정 빛이 사라질 때까지 서진은 초점 없는 눈으로 그의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다정하게 굴 때도 제대로 된 메시지 한 번 준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한글 메시지가 영 불편해서.’
한번은 투정하는 서진에게 웃으며 말했다.
‘입력하다 보면 하루해가 넘어가. 꼭 필요하면 영어로 할까.’
‘싫어, 영어 메시지는 사절이다. 감정이 안 살아.’
서진은 그대로 핸드폰을 쥔 채 책상에 엎드렸다. 구둣발에 밟혀 부서진 꽃다발이지만, 아직도 피어 있는 분꽃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옅은 향기가 서진을 은은하게 감싼다. 한참을 그대로 있던 서진이 고개를 들어 분꽃을 한 송이 한 송이 손 끝으로 만져 보았다. 목이 꺾어져 아래로 고개를 떨어뜨린 흰 장미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장미 송이는 다시 툭 고개를 떨어뜨린다.
11, 단 두 번의 버튼을 누르는 일에 심장이 짓눌리는 무게가 느껴진다. 응답이 없는 전화를 들고 커튼 사이 창 너머 희끄무레한 상현달을 바라보았다. 서진은 다시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대답이 없는 전화를 두 번쯤 더 한 뒤 포기하려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어디세요 ”
-여기 그냥…… 좋은 데.
‘그럼요, 좋은 데죠.’ 자지러지는 여자 목소리가 묻혀 들어오고 뒤이어 남녀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나 만나 줘. 할 얘기 있어.”
-다음 날에 하자.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어두컴컴한 방 안이 마치 진공 상태처럼 먹먹해져 오자 서진은 눈을 감았다.
한혁, 그리고 기훈.
‘가방, 올 때까지 맡아 줘요. 무거워서.’
칙칙한 사회대 정문이 환해지도록 웃어 주던 기훈, 심장을 긁듯이 어둡고 가라앉은 한혁의 웃음소리. 보스턴 차디찬 바람에 얼어 버린 얼굴을 늘 따뜻하게 감싸 주던 기훈. 그녀의 어깨에 아이처럼 기대어 서 있던 한혁. 깊이를 알 수 없이 두렵게 빛나던 눈동자. 경제학 책을 펴고 깔끔하게 그래프를 그려 내던 기훈의 손.
뜨겁고 서늘하고 난폭하고 다정하던 애인.
‘내가 밀고 들어가면, 넌 무너질 테니까.’
‘내 이름을 불러.’
‘제발…… 도망가지 마.’
‘너는, 가지고 싶은 사람이야.’
짓밟혀진 꽃다발. 짓밟혔을 그의 마음.
머리가 타오를 듯 뜨거운데도 기억의 회로는 망가지지 않고 끊임없이 팽글팽글 돌아갔다.
서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다시 핸드폰을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저, 한혁 씨 핸드폰 아닌가요 ”
-네, 최한혁 핸드폰인데요. 말씀하시죠. 계속 전화하셨던 분이죠
낯선 목소리의 남자는 굳이 예의를 차리지도, 한혁에게 전화를 거는 여자에 대한 얄팍한 호기심도 숨기지 않았다.
“네. 바꿔 주시겠어요 ”
-지금 자리 비웠는데. 여기로 오시죠. 와서부터 계속 엄청 마셔 대고 있어요.
“……어디죠 거기가.”
한성유통 신지성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여자에게 장소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치기는 아까웠다. 어쩌면 눈엣가시 같은 최한혁의 약점을 잡을 수도 있는 흥밋거리였으니까.
핸드폰을 덮고 서진은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째깍, 째깍, 째깍…… 초침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귓속을 가득 메웠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혁을 만나야 했다. 그도 기훈도, 아니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한혁을 만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