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47
47화.
47화
“윤서훈, 나 최한혁이야.”
백지장처럼 질려 버린 서진의 얼굴을 외면하고서, 한혁의 시선은 창가 두터운 커튼에만 고정되어 있다.
-네. 말씀하세요.
“지금 여기로 와. 강남 N호텔.”
-왜 그러십니까
서훈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딱딱해졌다.
“서진이 데려가.”
-……20분쯤 걸립니다.
“도착하면 서진이한테 전화해.”
통화를 마친 한혁이 몸을 일으켜 서진에게 다가왔다. 아직도 블라우스를 잡은 손을 가슴께로 모은 채 그대로 서 있는 서진의 팔을 움켜쥐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면, 윤서진, 너 기대해도 좋아. 가만히 안 둬.”
서진의 뺨에 맑은 눈물이 한 방울씩 굴러 내렸다. 다문 입술 위로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도 못 느끼는 듯 서진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다.
한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한혁은 깊게 골이 패인 미간을 문지르며 서진을 스쳐 지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바닥으로 꺼져 가듯이 스르르 서진의 무릎이 꺾였다. 열이 오르는 머리가 무겁게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한기에 쉴 새 없이 몸이 떨린다. 정적 속에 차마 소리 되어 나오지 못하는 서진의 비명처럼 그녀의 눈물도 멈추었다. 한참 후 서진은 막혔던 숨을 토해 내듯 뱉었다. 웅크렸던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이를 악물고 블라우스 단추를 채웠다. 힘겹게, 그러나 똑바로 걸음을 떼어 방을 나섰다.
생기 한 줌 없이 거죽만 남은 모습으로 서진은 서훈의 차에 올랐다.
“누나…….”
선들선들 내뱉는 핀잔도 차갑게 떨어지는 비난도 아닌 걱정이 흥건한 서훈의 목소리다. 서진은 붙은 것만 같던 입을 열었다.
“괜찮아. 운전이나 해.”
의외로 덤덤한 목소리가 다행이었다. 동생에게 형편없는 꼴을 보일 수는 없잖아.
“서훈이 너, 일하다가 온 거야 ”
“응.”
“미안하다.”
“아니, 괜찮아.”
“회사 다시 들어가야 하니 ”
“상관없어. 안 들어가도 돼.”
“그러면, 서훈아.”
서진은 길게 창밖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잠깐만 어디 적당한 데 세워 줘. 서늘한 바람 좀 쐬고 싶어.”
강변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린 서훈이 담뱃갑을 챙겼다. 아무래도 서진이 싫어할 것 같아 나가려 문을 여는데 서진이 서훈을 잡았다.
“괜찮아. 여기서 피워도 돼.”
맞잡은 서진의 손이 너무 뜨거웠다. 서훈은 급히 문을 닫고 서진의 이마에 손을 댔다.
“작은누나!”
서훈이 목으로 손등을 댄다.
“누나, 집에 당장 가! 열이 너무 많이 나잖아.”
“조금만. 너무 답답해.”
“약은 약부터 사서…….”
“약 먹었어. 이제 열 내릴 거야.”
울음을 억누르느라 꽉 잠긴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서훈은 깊은 한숨을 쉬고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힘들어 ”
“아니, 그냥 조금.”
서진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며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서훈이 서진의 어깨를 제 쪽으로 당겨 감쌌다.
“그냥 울어. 내 어깨라도 빌려 줄게.”
서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서진이 후후 웃었다.
“갑자기 너무 다정한 동생이 되었다. 근데 울지는 않을 거야. 창피하잖아.”
서진은 눈을 감아 열기로 온통 아지랑이가 퍼지는 시야를 닫았다.
“왜 아퍼. 여름 감기야 ”
서훈이 서진이 기댄 오른팔을 들어 서진을 감싸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
“몸이 대신 아파 주나 봐.”
“어이구. 이 바보야.”
서훈은 이마에 올린 손을 서진의 눈 위로 덮어 내렸다.
“울어. 안 볼게.”
서진의 얼굴에서 끼쳐 오는 열기와 닮은 뜨거운 액체가 서훈의 손바닥에 묻어났다. 침묵 속에서, 서진이 기댄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울음소리도 없이 서진이 울고 있다.
“그렇게 힘들면 놓치지 말아 봐. 무슨 상관이야.”
“안 받아 줘. 이제 무슨 짓을 해도 안 받아 줄 거야.”
“왜.”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서진의 흐느낌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혁은 지성을 비롯한 사람들이 있는 성가신 클럽 룸 대신 혼자 1층 바로 들어서서 구석 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다. 잠시 후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황당해하는 표정을 뒤로하고 바를 나섰다. 급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9층에서 내렸다. 서진의 질린 얼굴, 울음 담긴 목소리, 눈, 눈……. 무겁도록 차오르던 눈물이 맑은 눈을 가리고, 결국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 눈을 차갑게 내치고 그녀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왔다. 문은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지만 한혁은 그곳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 천천히 어둑한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진이 서 있었던 곳, 한혁은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보기 싫어…… 정기훈한테 가 버려.’
보낼 수 있을까. 서진을, 정말 보낼 수…… 있을까.
한혁은 무릎을 구부리고 고개를 파묻었다.
***
시선이 회의실을 빠르게 훑는다. 자리는 오늘도 비어 있다.
“윤서진 팀장 안 나왔나요 ”
한혁이 자료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출장 후 이삼일 정도 쉬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이후로 연락이 없었습니다. 핸드폰도 꺼져 있고. 그래서 오늘 아침 집으로 전화를 해 봤는데……. 회의 마치고 다시 연락해 보겠습니다.”
“네.”
한혁이 더 이상 언급 없이 자료를 펼쳤다.
월요일부터 테스크포스팀 전체는 축제 분위기였다. 회사의 기류가 단번에 뒤집어졌다. 손만 빨며 양쪽을 저울질하던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제일 먼저 상무실로 뛰어왔다. 부평 인수 건 역시 탄력을 받아 속도를 높였다. 모든 일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오로지, 금의환향을 하여 중심에 있어야 할 윤서진 팀장만이 없었다. 나흘째, 윤서진의 부재를 보고받는다. 강 부장이 서진을 변명하듯이 조심스레 한마디 덧붙였다.
“요즘 여름 감기가 유행이라는데 지독하게 걸렸나 봅니다. 근래에 윤 팀장이 좀 무리하다 싶게 일했거든요.”
“회의 시작하죠.”
한혁이 못 들은 듯 사람들을 둘러보자 서둘러 자료를 넘기는 소리만 가득했다.
비어 있는 서진의 자리에 옆구리라도 걷어차인 듯 통증이 느껴진다. 들끓었던 배신감이 가라앉자 남은 것은 더 깊이 패여 버린 그녀의 자리였다. 모진 말로 잘라 내고 끊어 낼 수는 있지만 가슴속의 그녀는 아무리 기를 쓰고 파내고 도려내어도 피 흘리는 상처를 먹으며 더욱 커져만 갔다.
클럽으로 걸어 들어오던 파리한 얼굴이 어른거렸다. 진심을 담은 눈을 보면서도 그 눈을 믿지 않겠다 했다. 서진의 마음을 차가운 호텔 방 안에 내동댕이치고 짓밟았다. 같이 떨어져 뭉크러졌던 그의 심장에서 시작된 피멍울이 뭉클뭉클 혈관을 타고 흘러 숨을 막았다.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한혁은 자료를 책상에 던졌다. 손을 들어 저릿저릿 신경이 곤두선 이마를 문질렀다.
‘넌, 넌 왜 그렇게 나를, 내 맘을 몰라!’
‘내가, 미안해. 미안해, 한혁 씨. 이렇게 엉망으로…… 그렇지만 오해야. 정말이야. 그것만 믿어 줘. 제발…….’
서진의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단추를 끌러 내며 떨리던 손이,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짓이겨진 심장을 덮친다.
윤서진, 이대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건가.
서진의 핸드폰에서는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반복된다. 한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그마한 석상이 지키고 서 있는 서진의 집 앞에 한혁의 차가 도착했다. 늘 신경이 쓰이던 보안용 카메라도, 이 시간쯤이면 건너편 자신의 집 앞에서 골목길 쪽을 지켜보는 오 집사나 보안 요원의 시선 같은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서진을 봐야 했다. 산소가 없는 물 속에 버려진 물고기처럼, 숨을 쉴 수가 없다. 차에서 내린 그는 망설임 없이 서진의 집 벨을 눌렀다. 심장이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어 흔들리는 기분이다. 등줄기까지 뻣뻣하게 굳는다. 집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번 더 벨을 눌렀지만 내부에서는 전혀 기척이 없었다. 집 전화로 통화를 시도해 보지만 역시 소용없다. 우두커니 서 있던 한혁은 고개를 들어 불 꺼진 2층 방을 한참 바라보았다. 묵직한 가슴의 통증이 손끝까지 내려왔다.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오 집사의 기척도 못 느낀 채 모든 감각이 죽어 버린 듯 한혁은 그대로 멈춰 서 움직이지 못했다.
“저, 상무님.”
초점 잃은 눈으로 한혁이 고개를 들었다. 오 집사는 어떻게 오셨냐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한혁이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오 집사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오 집사는 떠오르는 의문을 누르고, 한혁이 급히 차에 올라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데스크에 쌓여 있는 서류를 덮었다. 연락 두절은 고작 나흘이다. 고작 나흘로, 한혁은 한계를 넘어섰다. 윤서진을 24시간 떠올린다. 회의 중에도 흐름을 놓치고, 회장과 독대에서도 한혁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넋을 놓은 사람처럼, 종종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오로지 윤서진만으로 채운 깊고 좁은 우물 속에 몸이 잠겨 버린 기분이었다. 매 시간, 더 깊이 몸이 가라앉았다. 영원히 보지 않겠다는 결심은 턱도 없는 자만이었다. 한혁은 앞에 놓인 명함 한 장을 두고 결심한 듯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핸드폰으로 수차례 전화했으나 수신하지 않았다. 데스크 유선 전화기를 들어, 다시 전화하였다.
-네, 윤서훈입니다.
“최한혁인데.”
-…….
응답이 없는 수화기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가슴이 바싹 조여든다.
“듣고 있어 ”
-지금 미팅 중입니다.
“알았어. 나중에 통화하지.”
-전화 안 받을 겁니다. 하지 마십시오.
서훈은 미련 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저절로 인상이 구겨진다. 프로젝트 팀장 경호가 툭 어깨를 쳤다.
“여자 ”
“아니에요.”
서훈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긴, 매정하게 끊던데 ”
“남자예요. 되게 재수 없는 인간이라서.”
경호가 목을 뒤로 길게 젖히며 스트레칭을 하였다.
“설마 TED 부장만큼 재수 없으려고.”
서훈이 싱긋 웃었다. TED라는 코드명으로 불리는 동양 프로젝트가 두 달째다. 15주짜리 전사 프로젝트는 컨설턴트들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중이다. 더군다나 서훈의 소속은 누가 봐도 ‘pain in your ass’라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을 모듈이다. 클라이언트사 직원과 끝없이 기 싸움과 신경전을 해야 하는 모듈. 일은 쳐 내도 쳐 내도 더럽게 많다. 무한 반복 뤼피트가 주 종목인 클라이언트사 부장에게 한 번씩 붙잡히면 한두 시간은 훌쩍 시간을 내버려야 한다. 야근에 야근이 고스란히 적재된다. 부장을 피해 저녁을 먹은 후, 서훈 모듈은 맥킨리 사무실로 랩톱과 자료를 싸 들고 들어왔다. 소회의실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각자의 일을 하거나 되는대로 의견을 나누거나 하는 중이었다.
격무에 수면은 늘 부족하고, 서진 누나는 완전히 몸과 마음이 엉망이 되어 며칠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과거에 묻은 여인은 젠장할, 같은 회사로 입사하였다. 맥킨리 최고의 긍정남이라는 서훈의 신경이 미칠 듯이 곤두선다. 서훈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리고,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맥킨리 오피스로 전화벨이 계속 울린다. 경호가 전화를 끌어 받았다.
“네, 네.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
경호가 슬쩍 한쪽 눈을 찡그린다. 머릿속으로 정보를 확인하며 서훈을 쳐다보았다. 서훈에게 급히 전화를 받으라는 손시늉을 하였다.
“잠시만요.”
경호가 윤서후운, 길게 빼어 부른다. 마지못해 다가가자, 받어, 입모양으로 말한다. 수신구를 막고서, ‘빨리 받아. 재수 없는 여자 아냐. 세림 최한혁이라는데 그 최한혁 맞아 ’ 재촉하였다. 서훈이 표정을 감추며 수화기를 들었다.
“윤서훈입니다.”
-잠시만 이야기하자.
“지금 일이 많아서 제가 내일 전화드리겠습니다.”
-움직이기 힘들면 회사로 내가 찾아갈까.
“선배님.”
-윤서훈, 잠깐이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