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5
5화.
5화
“잠시만.”
한혁은 서진의 어깨를 잡아 한 발 앞으로 끌어당겼다. 서진이 당황스러운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
매장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입모양으로만 말을 한다. 목덜미로 뻗어 오는 손을 피해 서진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뭐.”
“스카프.”
한혁은 서진의 목에 걸린 스카프의 끝을 쥐고 들어 보였다.
“아.”
“가만있어 봐. 아까부터 거슬렸어. 스카프 떨어지려고 하잖아.”
서두를 것 없다는 느린 목소리였다. 목소리만큼 느리게 그리고 감질나게 목에서 실크 스카프가 움직였다. 목덜미로 소소하게 소름이 돋았다. 내가 하겠다고요, 스카프 끝을 잡고서 무언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남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서진은 흘끗거리는 시선들에 더 이상 주목받을 수 없어 가만히 목을 내맡겼다.
“빨리, 묶어요.”
이를 꽉 다물어서 발음이 입속에서 웅웅 뭉개졌다.
“알았어.”
스카프를 묶는 동안 서진은 그저 곤혹스런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겨울날 목도리를 둘러 주던 장면에 대해 흐릿한 데자부라도 느낄 법한데 이미 여자에게는 깨끗하게 지워진 기억이었다.
두 사람을 비딱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던 여자가 픽 하고 웃었다.
“언니, 저 남자도 본사 직원이에요 ”
숍마스터가 흘끗 한혁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예요. 처음 보는 분이에요.”
“그럼 저 여자는 ”
“본사 마케팅 팀장님이에요. 워낙 중요한 고객님이라 팀장님이 직접 사과도 할 겸 오신다고 했어요.”
“아하 그럼 팀장 남친인가 봐 ”
“글쎄요.”
숍마스터는 애매하게 답을 흘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어떠세요 맘에 드세요 ”
여자는 한 시간 전부터 찾아내라 한바탕 매장을 뒤집어엎었던 한정판 신상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뱀피 가죽으로 장식된 옅은 에메랄드 빛 핸드백, 같은 톤과 질감의 아찔한 높이의 하이힐, 정교하게 만든 가죽 장미가 달린 라이트 핑크 클러치와 같은 라인의 하이힐. 진주 장식으로 마무리된 흐린 청록색 구두와 동일 라인의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 가방. 하나씩 차례로 펼쳐지는 물건들을 보는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한번 신어 보시겠어요 사이즈는 36 반 맞으시죠 ”
곁으로 언제 다가왔는지 서진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녀의 발쪽에 구두를 가져갔다. 목에 얌전히 매어진 스카프를 지켜보던 여자가 재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숍마스터가 꿇어앉아 있는 서진을 보며 정신이 든 듯 제가 하겠다는 제스처를 보였지만 서진은 눈짓으로 바쁜 세일 쪽 섹션을 가리켰다. 두 명의 직원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고객들이 넘친다. 숍마스터가 미안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갔다.
“다른 걸 먼저 신어 보시겠어요 ”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는 그제야 베이지 색 구두를 벗어 굳은살이라곤 하나도 없이 매끈하고 부드럽게 관리된 발을 살짝 앞으로 냈다. 서진이 권하는 구두에 발을 하나씩 천천히 넣는 모습은 중세 시대 귀족의 영양(令孃)이나 공주가 쓰러질 지경이었다. 구부리고 앉은 서진은 메이드쯤 되려나.
공주처럼 사뿐히 자리에서 일어선 여자는 전신 거울로 자신을 비춰 보았다. 이쪽저쪽 방향을 바꾸어 살펴보는 여자의 움직임에 화사한 드레스 자락이 깃털처럼 가볍게 살랑살랑 춤을 추듯이 움직였다.
“셋 다 아름다운 옷에 맞춘 듯 잘 어울리세요. 클로에 오뜨 꾸뒤르군요.”
“좀 기다렸지만 난 갖고 싶은 건 꼭 구하니까.”
그녀는 도도한 미소로 웃으며 저만치 떨어져 서 있는 한혁이 들으라는 듯 최대한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톤을 올리며 말했다.
“내가 점찍은 건 꼭 손에 넣어야 잠이 오거든요.”
여자는 몇 번이나 세 켤레의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 핸드백을 손에 쥐었다 메었다 한참을 부산스럽게 굴었다. 곁에 있는 서진은 절룩거리던 다리가 영 불편한 듯 살짝살짝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나름대로 훌륭한 자세를 잃지 않고 있었다.
‘원래 디스크를 앓았어서.’
고통으로 잦은숨을 쉬며 말하던 서진이, 6년의 시간을 건너 생생히 떠올랐다. 아직도 허리가 많이 불편한 건가. 우아한 자세로 비위를 끝까지 잘 맞춰 주는 인내심이 칭찬 받을 만하다. 한혁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정 회장님, 사람 하나는 잘 뽑는군. 하버드 경제학 박사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 들렀을 때에도 한혁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세림백화점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기왕 들어온 거, 세림백화점 현장 분위기나 파악할까 싶었다. 서진이 물건을 배달한 매장은 3층 중앙에 자리 잡은 백화점 핵심 매장이다. 세림이 수입하는 고가의 디자이너 브랜드로 구성된 멀티숍은 위치나 구조 덕분에 천천히 플로어 전체를 눈에 담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직원들의 고객 응대 방식이나 디스플레이, 고객들의 관심, 음악, 조명, 백화점 전체적인 분위기나 이미지에 대한 정보가 고객과 같은 눈높이로 빠르게 정리된다.
한혁이 뻣뻣하게 저려 오는 다리 때문에 자세를 두 번째 바꿀 때쯤 지겹게도 거울을 보던 여자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그럼 핑크로 해야겠어요.”
“네, 아무래도 같은 톤이 안전하기는 하지만 지루하죠.”
서진의 얼굴에 드디어 해방된다는 웃음이 떠올랐다. 그 기분을 박살 내는 고급스런 목소리가 다시 울리기 전까지.
“그런데 이거 말이죠. 바꿔야겠는데요. 핑크 톤으로.”
거울을 보면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여자가 목에 걸린 거대한 에메랄드 목걸이를 가리켰다. 그녀의 귀에 치렁하게 늘어진 귀걸이 역시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번쩍였다.
“런칭쇼에 가려면 시간이 얼마 없는데.”
공주님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진을 보았다.
‘어쩌라고. 내가 어쩌라고! 너의 그 에메랄드를!’
서진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꾸역꾸역 삼키며 허리를 주물렀다. 그 모습을 본 걸까. 큭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못마땅한 마음에 한혁을 힐끗 보던 서진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거울 앞에 선 여자의 짜증 섞인 한숨도 웅성거리는 고객들의 소리도, 제 심장 소리까지, 모든 것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불현듯 얼굴이 달아올랐다.
“옆에 주얼리 매장으로 가야겠어요. 같이 골라 줘요.”
“네, 그러시죠.”
서진은 정신이 퍼뜩 들어 대답했다. 입에는 경련이 일었지만 목소리는 제가 들어도 그럴싸할 만큼 친절했다. 제니스 회원을 위한 퍼스널 쇼퍼가 있지만 기왕 이렇게 된 일, 제가 마무리하자 싶다. 공주는 아량을 베풀 듯 가져온 제품 모두를 구매하였다. 서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이 모양으로 서 있는 한혁에게 다가가서 명함을 다시 꺼냈다.
“미안해요, 정말. 상품권이라도 챙기고 싶은데, 연락 주세요.”
“별로. 천천히 일 보라고 했잖아.”
남자가 위로라도 하듯이 팔을 한 번 툭 쳤다. 남자는 오히려 곤란한 상황이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박스 꼭 챙겨요.”
어이없어하는 서진에게 들리는 공주 목소리다. 여섯 개의 박스가 튼튼한 네 개의 봉투에 담겨지자, 쇼핑백을 제 손으로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공주 덕에 그 봉투는 서진의 차지가 되었다. 서진이 받아 든 봉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공주는 계산서를 검지와 중지로 잘 집어넣더니 새끼손가락만 살짝 펴 주시는 우아한 손동작으로 핸드백을 잠그고 앞장서서 상큼한 걸음걸이로 매장을 나갔다.
물품 운반을 도와준 남자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불편할 만큼 끈질긴 시선이다.
“오늘 미안해요. 담에 연락 한번 주세요. 제가 저녁 살게요.”
서진은 급히 인사하고 앞서 나간 여자를 따랐다. 몇 발짝 못 걸었다 싶을 때 손에 들린 쇼핑백의 무게가 순간 없어졌다. 응 하고 돌아보니 손끝을 아프게 누르던 쇼핑백의 줄이 남자에게로 옮겨 가 있었다.
“가지.”
“이봐요. 그거 주세요. 이제 가 보세요.”
매장 안이라도 상관없었다. 서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차피 오늘 시간은 날라 갔으니 밥은 오늘 사. 다른 날은 바쁘거든.”
기왕 세림백화점에 들어온 거, 다른 매장들도 점검하기에 좋은 기회이니 한혁으로선 나쁠 게 없었다. 더군다나 까다로운 고객에 대한 응대라면 미스터리 쇼퍼 테스트를 직접 공으로 하는 셈이다.
“주세요. 그럴 수는 없어요.”
성큼성큼 걸어 매장을 나서는 남자를 붙잡았다.
“자아.”
한혁이 팔을 불쑥 내밀었다.
“물건 들고 튈까 봐 불안하면 또 잡든가.”
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장난은 그만두시죠. 호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다 사라지기 전에. 경고하는 눈빛이다. 그렇지, 이 여자는 쉽사리 설득되지 않는 고집이 있었지. 한혁은 아하, 하는 표정으로 서진을 쳐다보았다.
“허리 아픈 거 같던데. 아냐 ”
“별거 아니에요. 주세요.”
“당신, 지금 다리도 약간씩 절고 있는 거 알아 ”
“그래도 이건 내 일이에요. 고객께 예의도 아니고.”
서진이 멈춰 선 여자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예의라는 단어 오랜만에 너무 많이 듣는걸 ”
한혁이 서진에게 봉투 두 개를 건넸다.
“그럼 공평하게 두 개씩 듭시다. 나는 오늘 백화점 아르바이트 하는 셈 칠 테니. 마치고 반드시 사례해.”
서진에게 귓속말을 하며 한혁이 앞서 지나갔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간간이 이마에 솟은 땀을 누르는 서진과 무거운 쇼핑백을 들고 뒤에 서 있는 무척 잘생겼지만 내내 찬바람이 쌩쌩 이는 남자, 무지하게 공들여 고치고 다듬은 얼굴에 화려한 차림의 공주, 세 명의 어울리지 않는 동행은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간간이 남자에게서 쇼핑백을 뺏어 들려는 서진과 꿈쩍도 않는 남자의 소리 없는 실랑이 역시 어울리지 않는 동행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주얼리 매장 서너 군데를 돌고 나서야 까다로운 공주님은 매장 직원들의 찬사와 서진의 비교적 객관적인 의견을 수렴해 가며, 런칭쇼에 맞추려면 아슬아슬한 시간에 V 주얼리 브랜드의 화려한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로 결정을 내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예의 바른 말이 놀라워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그녀의 눈길은 서진을 비켜서 뒤로 꽂히고 있었다.
“매장 직원도 아닌데 너무 신세져서 미안해요. 오늘은 런칭쇼에 가 봐야 해서 그렇고 조만간 제가 근사한 저녁이라도 대접할게요.”
콧소리 간드러지게, 부푼 입술이 최대한 섹시하게 보이도록 움직이며 공주는 서진은 마치 투명인간인 듯 스윽 지나쳤다. 남자의 청바지 앞주머니에 비죽하게 나온 핸드폰으로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주머니에 손이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양손 가득 들고 있는 쇼핑백 때문인지 남자는 우두커니 서서 아무런 표정 변화조차 없이 여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서진은 푹 하고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혀를 깨물었다. 공주는 열심히 핸드폰에 제 번호를 입력하기에 바빠 서진의 표정 따위야 볼 틈이 없었다. 번호 입력을 꼼꼼히 마친 여자가 큐빅 장식이 화려한 인조 손톱이 붙은 손가락을 그의 포켓 깊숙이 찔러 넣으며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남자는 여자의 노골적인 눈길에 서진이 무안하리만큼 무반응이었다.
“박진아. 11번에 저장되었어요.”
공주에 어울리지 않는 끈적끈적한 눈길로 남자를 샅샅이 훑은 진아가 관능적으로 목을 뒤로 젖혔다. 헤어숍에서 족히 한 시간 반은 공들였을 세팅된 머리가 출렁 흔들렸다.
후문 앞으로 대기된 차량에 돌덩이 같은 쇼핑백 네 개를 집어넣어 주고서, 남자에게 던지는 달짝지근한 진아 공주님의 미소를 감내하는 일을 마지막으로 길고 길었던 공주님과 쇼핑하기는 끝이 났다. 뻐근해 오는 목덜미를 만지고 서 있는 서진의 귓전으로 착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사 준다며.”
“알았다. 이제 사 줄게. 위로 갈까. 뭐 먹을래 식당가 문 닫을 때까지 한 시간 넘게 남았으니. 아, 아까 준 햄버거 상품권으로는 친구들이랑 같이 먹어.”
별 눈에 띄는 먼지도 없는 스커트를 툭툭 털어 댔다. 이제는 서진의 말도 반 토막이었다.
“싫어. 밖으로 나가.”
“왜 백화점 음식점도 괜찮거든. 비싸기도 한데 말야.”
“좀 지겹네. 너무 오래 있었어.”
이 아픈 다리와 허리를 끌고 어디로 가자는 거야. 난 못 가, 못 움직여. 말로는 못하고 꼼짝 않고 노려보았다. 허리가 뻐근하여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은 기분이다. 남자는 서진의 어깨를 감싸며 부축하듯 방향을 바꾸었다.
“가까운 데로 갈게.”
“알았어. 근데 이것 좀 놓을래 불편하거든.”
“허리랑 다리 아픈데 또 걷게 해서.”
남자는 놀랍도록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순간 당황스럽게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호감과는 별개로 눈에 띄는 그의 얼굴 때문이겠지. 서진은 한결 편해진 걸음걸이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