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50
50화.
50화
한혁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기훈은 아직 남아 있는 숙제를 해결해야 했다. 기훈으로 인해 더 힘들어진 두 사람을 그대로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기훈은 세림 회장실로 향했다. 고모님, 다음은 부모님. 부모님은 오히려 쉬운 일이었다. 여전히 탐탁해하는 눈치가 아닌지라 감정이 달라졌다 말하면 오히려 환영을 하실테다. 그분들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과거에 박제된 감정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이 흐르는 대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될 일이었다. 십수 년 전, 한혁을 미국으로 보내 달라는 청을 넣을 때처럼 기훈은 다시 회장실을 노크했다.
더없이 반갑게 맞는 정 회장을 보면서 기훈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소소한 이야기가 오가고 정 회장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기훈에게 입을 열었다.
“윤서진 팀장이 일을 상당히 잘해. 이번 고비도 윤 팀장이 애써서 잘 넘어갈 거 같아.”
“네. 원래 성실한 사람입니다.”
“집안이 흡족하지 않다 그래도 잘했어. 영특하고 바르고 탐나는 사람이야.”
기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모님.”
“응 ”
“윤 팀장, 저랑은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봐 왔던 후배라 가까이 생각했던 건 맞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흘러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정 회장이 조금 놀라는 눈치로 기훈을 지켜보았다.
“윤 팀장이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기도 하고요.”
“그래 허, 널 두고. 윤 팀장. 생각보다 더 대단한 아가씨로구나.”
기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 회장은 기훈이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난초 잎을 하나씩 조심스레 닦아 내며 가라앉히려 했던 마음이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고모님, 한혁이랑 두 사람 허락해 주세요. 탐나는 사람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상상도 못했던 사실에 정 회장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할머니께는 꼭 보여 드리고 싶은 여자예요. 정경애 회장님께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인사드릴게요. 제가 차이지 않으면요.’
언젠가 서재에 들어와 상무이사 발령을 한 주만 연기해 달라며 여자 이야기를 꺼내던 한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숨길 수 없이 환하게 밝아지던 얼굴이 떠오르자 정 회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난초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야무진 서진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그려지자 정 회장은 그 모습을 몰아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다시 난 잎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
이 주일도 지나지 않아 세림은 삭스와 양측 모두 만족할 만한 조건으로 MOU를 체결했다. 부평 인수 건도 급물살을 탔고 세림이 한혁의 체제로 굳혀지는 계기가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언론의 호들갑과 내부의 끝없는 자축과 한혁에게 쏟아지는 충성에도 그의 마음은 묵직하기만 했다. 기훈이 다녀간 날, 정 회장은 밤늦게 퇴근하는 한혁을 서재로 불러들였다. 딱딱한 목소리로 서진을 묻는 정 회장에게 한혁은 기대하는 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정 회장의 노기 서린 눈을 보며 한혁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 회장의 거부는 강경했다.
며칠 후 한혁은 혼자 석연의 집에 찾아갔다.
“웬일이야 ”
싸늘한 표정의 석연은 따뜻한 차 한 잔도 없이 한혁과 마주 앉았다. 일부러 강 전무가 없는 시간을 택했다. 강 전무는 비자금 책임을 물어 미국 지사로 발령을 냈다. 내주부터 세림 본사로 출근하지 못한다. 한혁은 찬바람이 이는 석연의 얼굴을 보고도 편안하게 웃었다.
“재영이 일 잘합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더니 회사에서도 제 몫을 다하고 있어요.”
“하, 그래서 ”
“승진 준비 중입니다.”
석연의 눈이 커졌다. 부평 건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제 한혁의 세상이 되나 싶었다. 강 전무의 비리를 모조리 손에 움켜쥐고 검찰과 미국 지사 중 선택하라 협박했다. 재영이마저 꼬투리를 잡아 내보내겠거니 했는데 뜻밖의 말이다.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일어서는 한혁을 붙잡았다.
“왜 그러니 ”
한혁은 그저 고개를 조금 끄덕이며 웃었다.
“제가 없더라도 세림을 단단하게 끌어갈 사람이 재영이 아닌가요. 예린이는 아직 어리니.”
“무슨 소리야 ”
석연의 놀란 눈을 보며 한혁은 더 이상 대답 없이 여느 때처럼 깍듯한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서진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정 회장의 단호한 결정은 시일이 지나도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회장은 퇴근 후 집으로 서진을 따로 불러 설득할 생각이었다. 서재에서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서진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놀랄 만큼 침착한 태도였다. 정 회장은 며칠 전 한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다 버려도 하나, 가지고 싶은 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이, 아니 할머니가 내치신다면 그것도 달게 받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한혁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자 정 회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가뜩이나 출생 문제로 흠이 잡히는 손주를 자신이 세림에서 손을 뗀 후에도, 아니 세상에 없는 뒤에도 든든히 지켜 줄 바람막이가 필요했다. 서진의 집안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경우였다.
‘이 아이 무엇을 보고 그러는 건가.’
일전에 회장실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으로 찬찬히 서진을 뜯어보았다. 영리하고 일 잘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던 터였고 여자로 봐도 맑고 단아한 인상이었다. 사실, 기훈의 짝이라 생각했을 때는 집안을 떠나 맘에 차는 사람이었다. 그날 회장실에서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게 웅크린 모습이 아니라 차분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모습도 더 곱다.
“윤서진 팀장.”
“네, 회장님.”
조금은 긴장하여 갈라진 목소리다.
“삭스 일, 윤 팀장이 많이 애쓴 걸로 알아요. 수고했어요.”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서진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팠다던데 몸은 괜찮아 ”
“네. 괜찮습니다.”
“일이 많이 고되었던 모양이야.”
“아닙니다, 회장님.”
“아니면 다른 이유로 앓았나 ”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서진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내 최 상무 이야기는 들었고 이제 윤 팀장 이야기를 듣고 싶어. 어떻게 할 생각이지 ”
차가운 목소리에 심장이 조여든다. 서진은 절로 움찔거리는 손에 힘을 더해 무릎에 가지런히 두었다.
“곁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정 회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윤 팀장 영리하고 일 잘하는 사람인 건 알아. 하지만 오늘은 회장이 아니라 최 상무 할머니로 말하니 섭섭하게 듣지 말아. 나는 내 손자를 지켜 줄 든든한 바람막이가 필요해. 내가 몇 년을 더 버티겠어.”
서진의 시선이 티 테이블로 떨어졌다.
“세한 정 상무도 자식처럼 아끼는 조카야. 내가 어떻게 흡족한 마음이 들겠어. 안 그래 ”
“마음,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
서진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을 들어 정 회장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제가 물러나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이라 믿었습니다. 세한 정 상무도 그랬고 그 사람도 저한테 턱없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 생각했습니다. 단지 그 사람에게는 제 자신보다 그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저 때문에 소중한 사람과 힘들게 얻은 자리를 잃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 회장의 눈이 서진에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았다. 떨리는 숨을 뱉어 내고서, 서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회장님, 그 사람이 더 힘든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받고 견뎌야 할 것이 있다면 기꺼이 달게 받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처분만 기다리는 듯 서진은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정 회장이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기어이 물러서지 않겠다고.”
“죄송합니다…….”
서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끝내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아랫입술을 속으로 꾹 깨물었다.
한혁은 부평 측과 늦은 저녁 식사를 같이하고, 이야기가 잘 풀려 예정보다 빨리 집에 들어서는 길이었다. 한혁을 맞는 연화의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 있으세요 ”
예린이 뛰어나가 한혁의 팔을 붙잡았다. 연화가 말릴 새도 없이 예린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빠, 서진 언니 왔는데, 지금 할머니 서재에…….”
한혁은 찬물을 덮어쓴 듯, 입가에 만들던 미소를 순식간에 지우고 급히 서재로 향했다.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섰다.
“회장님.”
“왔니 ”
정 회장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서진은 목소리를 듣고도 한혁을 쳐다보지 못한다.
“서진아.”
부르는 소리에 겨우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았다. 기어이 참고 있던 눈물이 차올랐다. 서진이 입 끝을 억지로 올렸다. 떨어지려는 눈물을 꾹 삼켜 냈다.
“나가.”
한혁은 서진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최 상무, 지금 나랑 윤 팀장이 할 이야기가 있어. 두고 나가게.”
낮지만 짜랑짜랑 울리는 정 회장의 목소리에 서진이 어깨를 저도 모르게 움츠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차분하게 말하였다.
“말씀 들으세요. 곧 나갈게요.”
서진이 그의 손을 풀고, 다시 단정하게 앉았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한혁이 무릎을 꿇었다. 회장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뭐 하는 짓이야, 최 상무!”
“할머니, 저만 꾸짖어 주세요. 이 사람 보내세요.”
무릎을 꿇은 한혁이 꿈쩍도 않는다. 서진이 경련이 일듯 떨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의 옆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건방진. 최 상무, 일어서! 네가 기어이 날 꺾겠다는 거야 ”
높아지는 정 회장의 음성에 열린 문 밖에 서 있던 연화가 달려 들어왔다.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 고정하시고, 한혁이 제발.”
바르르 떨리는 입술에서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발 한혁이 이제 그만 아프게……. 용서하세요. 저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이 아이, 내 아이 그만 상처받았으면. 그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어머님이 아니어도, 안 계셔도.”
연화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제가 한혁이 몸이 부서지도록 지킬 겁니다. 부족하더라도 제 친정도 우리 한혁이 울이 될 거예요.”
연화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니 제발…….”
연화의 흐느낌에 말이 묻혀 들어갔다. 연화를 보는 정 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혁이 고개를 깊이 숙인다. 굳게 주먹을 쥐고서, 참고 있는 그를 향해 정 회장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최 상무, 일어서. 남의 집 딸 바닥에 계속 꿇어앉히고 싶니 ”
한혁이 고개를 들어 정 회장을 보았다.
“회장님 ”
연화가 다가가 서진의 팔을 감싸며 일으켰다. 서진의 눈에서 아직까지 차마 흘리지 못했던 눈물 한 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한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 다 나가 봐. 나는 어미랑 이야기를 해야겠어.”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정 회장이 아직도 젖은 얼굴로 훌쩍이는 연화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네 자식 짝으로 저 애가 맘에 든단 말이야 ”
연화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렀다.
“좀 앉아라.”
회장이 낮게 혀를 차며 티슈 통을 밀었다.
“저 애가 네 맘에 들어 ”
정 회장이 좀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잠깐이나마 혹여 제 속에서 나온 자식이 아니라 그리 소홀하게 짝을 지우려냐는 생각을 했다. 그 마음이 미안해 연화를 찬찬히 살폈다.
“……저는 한혁이한테 해 준 게 없어요. 제가 부족하고 못나 그 아이를, 그 착하고 예쁘던 아이를. 제 사랑을 바라는 눈을 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품어 준 적도 없어요……. 죄송해요, 어머님.”
연화가 고개를 조아리듯 숙였다. 누구에게 말 한 번 제대로 못했던 오랜 세월 단단하게 응어리진 감정을 토해 내자 연화의 눈에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애가 그렇게 소중하다는데, 그 애 아니면 안 되겠다는데 어떻게 제가…….”
봇물 터지듯 터진 감정에 흐느끼는 연화의 손을 정 회장이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그녀의 눈에서도 뜨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었어요.”
“아니, 아니다.”
정 회장이 흐느끼는 연화를 달래며 손을 다독였다.
한참 후, 거실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에게 연화가 다가왔다. 일어서는 두 사람을 앉으라 손짓하고 그녀는 발갛게 부어오른 눈을 민망한 듯 한 번 만져 보았다.
“서진 씨.”
“네.”
“내 아들 많이 아끼나요 ”
“……네.”
서진이 달아오르는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
“이기적인 사람이라 내 아들 아끼는지만 먼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내 생각만 하는 말 하나만 더 할게요…… 잘, 해 줬으면 좋겠어요. 부족한 나한테 받지 못한 것도 다.”
한혁이 고개를 들어 자신들을 고요하게 바라보는 연화의 눈을 보았다.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데 연화는 그저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서 할게. 두 사람 행복할 생각만 해.”
한혁이 연화에게 머뭇거리며 다가섰다.
“……어머니.”
연화가 일어서 한혁의 등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붉어지는 그의 눈시울을 보며 연화가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내가 너 보내려니 서운한가 봐.”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 연화가 자리에서 일어선 서진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사랑만 받고 사랑만 해 줘요. 내 아들, 누구보다 잘해 줄 사람이에요.”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쯤에 내려와 눈치만 보며 서 있던 예린이 그제야 통통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급히 내려왔다.
“와, 잘된 거죠 그쵸 ”
예린이 한혁을 짓궂게 올려다보았다.
“오빠 진짜, 거짓말은. 언니 안 좋아한다며. 그때 느낌이 확 왔는데, 내 눈을 속이려고.”
한혁이 예린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오빠, 멍청하게 거기 서 있지 말고 언니 옆으로 가라. 쓰러질 거 같은 표정이다.”
“예린아. 말버릇하고는!”
연화가 예린을 곁눈으로 보자 예린이 생긋 웃으며 한혁을 끌고 서진 옆으로 갔다.
“그리고 엄마도 이제 말씀 끝났으면 퇴장.”
손까지 흔들며 연화를 데리고 올라가는 예린을 보며 한혁은 서진의 어깨를 감쌌다. 그제야 긴장이 풀어지는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서진은 몸을 완전히 기대고 긴 숨을 쉬었다. 한혁이 조용히 팔을 쓰다듬었다.
대문을 빠져나가 둘은 천천히 조용한 골목길을 걸어 내려갔다. 한혁이 문득 서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오늘도 고생시켰네. 미안.”
“여기, 카메라.”
서진은 자신의 입술에 부딪혀 오는 그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생중계하라 그래.”
한혁은 서진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