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 rushed after winning the first prize in the lotto RAW novel - Chapter 12
12화 해결사
“아, 이, 저, 어…”
끝났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할 오 팀장은 사과할 생각도 못 할 만큼 고장 나 버렸다.
“괜찮네. 필레미뇽과 곁들여 마실 와인이 사라진 것은 대단히 아쉽지만. 생각해보면 어차피 뱃속에서 사라질 액체일 뿐이잖는가. 그러니 그냥 마신 셈 치면 되겠지. 허허.”
회장님이 그 말은 내게 이렇게 들려왔다.
-그동안 우리가 함께 파트너십을 맺어 재미를 보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업관계가 영원할 수는 없으니. 언젠가 끝날 관계, 그냥 지금 마무리해도 되겠지. 허허.
‘진짜 망했네.’
수습할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질 않는다.
‘일반 와인이라면, 레스토랑에 있는 비슷한 등급의 다른 와인을 주문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저 와인이 전설의 와인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샤또 페트뤼스라는 것이었다.
‘가격이 500만 원에서 1,000만 원 이랬었지.’
함중훈 회장님이 특별히 준비했다고 했으니, 아마 가장 비싼 1,000만 원짜리 샤또 페트뤼스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구상민 씨가 저 와인을 주문하려 했었으니까.’
레스토랑에 재고가 없는 바람에 구상민 씨는 상당히 아쉬워하며, 내게 저 와인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었다.
‘…지금은 재고가 있으려나?’
베르나르에 방문한 지도 며칠이 지났으니, 어쩌면 재고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 팀장이 그 부분을 확인해 주었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곳 레스토랑에도 같은 제품이 있을지도 모르니, 제가 다시 주문을….”
그때, 깨진 와인 병을 치우던 웨이터가 곤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해당 와인은 현재 재고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등급의 레드 와인도 현재는….”
말끝을 흐리는 웨이터의 표정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오 팀장을 향해 회장님이 말씀하셨다.
“괜찮네. 한 끼 정도야 와인 없이도 먹을 수 있지. 안 그런가?”
아니다.
함중훈 회장님은 매일 와인을 마실 정도의 엄청난 와인 애호가였다. 그런 분이 특별히 준비한 와인을 깨뜨렸으니.
‘난리 났군.’
“으….”
점수를 따야 하는 자리에서 오히려 점수를 잃게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였을까.
오 팀장이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으려 했다.
“그, 그럼 남아 있는 것 중에 제일 비싼 와인 아무거나 주….”
‘이런…!’
제일 비싼 아무 와인이라니. 레스토랑의 메뉴들을 미리 조사하고 숙지했다면, 저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었다.
‘정확한 이름으로 주문했어야지…!’
이래서야 마치 이번 미팅을 대충 준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무래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연달아 실수하는 것 같았다.
설마, 아무리 오 팀장이 업무시간에 게임이나 하는 뺀질이라지만. 이런 중요한 자리에 메뉴 이름도 숙지하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가만히나 있지, 저런 식으로 말하면 점수를 더 잃게 되잖아.’
아니나 다를까. 함중훈 회장님의 표정이 살짝 굳어가는 것이 보인 나는, 재빨리 오 팀장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오 팀장님, 원래 저희가 주문하려고 알아봤었던 꽤 괜찮은 와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로 시키시죠.”
여기에서 오 팀장이 눈치 없이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말해버리면, 그걸로 이번 미팅은 끝나는 거다.
“…아. 그, 그랬었지.”
다행히 오 팀장도 그 정도의 눈치는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네, 그럼 그 일단 그 와인으로 주문하실까요?”
“그래… 그래야지….”
“…”
“…….”
무언가 이상했다. 바로 적당한 와인 이름이 튀어나와야 할 오 팀장의 입은, 제 입술을 꽉 깨물고만 있었다.
‘이 새끼, 설마 진짜로 메뉴 이름도 숙지 안 하고 온 거야?’
이건 진짜 답이 없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하라는 말인가.
‘끝났다.’
그렇게 내가 포기하려던 순간, 우연히 내 시야에 한 음식이 들어왔다. 그것은 검은색의 오븐 구이 치킨이었다.
‘저건…’
그 요리의 정체와, 그것에 잘 어울리는 와인이 머릿속에 떠오른 나는 곧장 웨이터를 불렀다.
“도메인 드 라 로마네 꽁띠 몽라쉐 그랑 크뤼로 한 병 가져다주시죠.”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오…”
함중훈 회장님의 얼굴에는 흥미가, 오 팀장의 얼굴에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자네, 그 와인이 레드 와인이 아닌 것은 알고 시켰나?”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 그럼, 왜 박살 나버린 레드 와인이 아니라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와인이었으니까요.’
그것은 구상민 씨가 샤또 페트뤼스 대신 주문했던 와인이었다.
‘자, 여기에서 포장을 잘해야 해.’
지금부터 설명을 잘못했다간 재계약은 물 건너갈지도 모르며, 한 번 나선 이상 그 책임은 내가 지게 될 테니까.
‘뭐, 그래도 상관없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회사에서 잘려도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에. 나는 부담 없이 설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먼저, 준비해주신 샤또 페트뤼스 와인을 날려버린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저 또한 너무 아쉽네요. 스테이크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필레미뇽과 함께 전설의 와인을 음미할 기회를 날렸으니까요.”
함중훈 회장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샤또 페트뤼스에 대해 잘 아나?”
“포므롤 와이너리에서 메를로 포도 품종만으로 생산하는 와인이며,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가문에서도 즐겨 마실 정도의 최고급 와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었다. 그때, 구상민 씨의 고급스러운 설명에 감명받아 달달 외웠던 것을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함중훈 회장님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현민 대리라고 했었나? 상당히 박식하구만.”
“감사합니다.”
“그럼, 마저 설명해보게. 와인에 대해 잘 아는 자네가 왜 레드 와인이 아닌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는지를.”
와인에 대해 잘 알기는 개뿔. 내가 아는 것은 샤또 어쩌고랑 몽라쉐 그랑크뤼 뿐이다.
그러니 나는 그냥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을 조금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테이블 위에는 소고기 요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치 오도로도 있고, 얇게 저며낸 하몽도 있죠.”
나는 아까 눈여겨 보아두었던 검은색 오븐 구이 치킨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또한, 저 치킨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닭이라는 아얌 세마니로 만든 요리입니다.”
“정확하군.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가?”
“레드 와인은 기름기 있고 맛이 진한 붉은 고기 요리에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최고의 레드 와인은 지금 마실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나는 움찔거리는 오 팀장을 무시하며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다행이라면 다행일까요? 이 테이블에 절반은 최고급 해산물과 가금류의 담백하고 섬세한 요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똑똑.
때마침, 웨이터가 내가 주문한 와인을 가지고 왔다.
나는 곧장 아이스 버켓에 담긴 몽라쉐 그랑크뤼를 꺼내어 회장님의 빈 잔에 따르며 최대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고급 해산물과 가금류 요리에 어울리는 최고의 화이트 와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답이었을까? 아니면 오답이었을까?
알쏭달쏭한 얼굴을 한 함중훈 회장님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몰라, 나는 최선을 다했어.’
결과가 좋든 나쁘든, 이제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하하하!”
내 설명이 잘 통한 걸까?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터뜨린 함중훈 회장이 이내 웃음을 거두며 내게 말했다.
“설명은 좋았네. 그런데 어설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잘 말하긴 했지만, 결국 와인 좀 마셔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들이 아닌가?”
‘역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도 아니고, 미식가이자 와인 마니아인 회장님의 앞에서 있는 지식 없는 지식을 가지고 떠들었으니. 당연히 먹힐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니, 재계약은 물 건너간 듯싶었다.
회사에 복귀하면 오 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나 또한 책임을 져야 할 텐데. 시말서는 쓰기 귀찮으니, 대신 사직서나 적어야겠다.
…고 생각할 때였다.
“그런데, 그 배짱이 참 마음에 드는구만.”
“…”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싶어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표정이 나쁘지 않은데?’
마치 기특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인자한 눈빛이랄까.
왜 회장님이 내게 이런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오는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내 자식들은 능력은 준수하지만, 간땡이가 소갈딱지만 해서 영 쓸만하지 않아. 그런 점에서 자네가 참 마음에 들어. 1,000만 원짜리 와인을 날려 먹으면 누구라도 자네 상사처럼 정신이 나가버릴 텐데, 그렇게 뻔뻔하게 수습을 시도하다니 말야. 하하!”
그건 내가 오 팀장처럼 이번 업무에 부담을 느끼지 않으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 덕에, 회장님은 자신의 소심한 후계자들과 비교하게 되었고. 덕분에 나를 좀 더 좋게 보아주셨던 것 같다.
“나는 늘 미팅을 직접 한다네. 그것도 되도록 젊은 직원들하고만 하지. 왜냐하면, 가끔씩 이렇게 싹수 좋은 놈이 튀어나오면 무척이나 즐겁거든. 하하하!”
‘다행인 건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만.
“요즘 젊은이들은 몸만 사릴 줄 알지, 이 모험심이 없어. 나 때는 맨땅에 헤딩하듯이….”
회장님의 길고 긴 ‘나 때는 말이야’를, 지루하지 않은 척 계속 들어야 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
와인에 대한 헤프닝이 마무리된 뒤, 나는 회장님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나갔고.
“그럼, 살펴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변수로 가득했던 미팅은 나름 좋은 분위기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 그럼 재계약은 어떻게 되었냐고?
탁탁.
새 계약서가 지금 내 품 안에 있었다.
부릉-
회장님을 배웅한 나와 오 팀장은 회사로 복귀하기 위해 자동차에 올라탔다.
“…….”
“…….”
오 팀장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고, 나 또한 그와는 별로 대화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조용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끼익.
그리고 그런 정적이 깨어진 것은 회사에 도착해, 주차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도중이었다.
“…야.”
앞서 걸어가던 오 팀장이 나를 불렀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뭐가 말입니까?”
우뚝.
멈춰선 오 팀장이 복잡한 눈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몰라서 물어? 오랜만에 봤더니 인간 자체가 바뀌었잖아! 맨날 음침하게 다니던 놈이 갑자기 밝아지고. 옷도 후줄근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잖아! 지난 넉 달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졌냐고!”
무슨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오 팀장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
그렇게 약간의 정적이 흐른 후, 오 팀장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이 노력한 거지?”
“…예?”
“시치미 뗄 필요 없어. 아무런 노력 없이 사람이 그렇게 확 바뀔 리가 없잖아.”
“…….”
“입원해 있는 동안, 너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죽을 만큼 노력했을 거야. 아까의 그 해박한 와인 지식도, 늘어난 배짱도. 모두 네가 노력했던 것들이겠지.”
아하.
오 팀장은 그걸 그렇게 해석했던 건가.
하지만 오해였다.
‘단단히 착각했네.’
뉘앙스로 봐서는, 나쁜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착각해버리면, 나중에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적당히 둘러대자.’
그렇게 내가 조금이나마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고맙다. 큰 실수를 만회시켜 줘서.”
나는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지난 3년간 오 팀장이 내게 감사 인사를 한 적이 있던가?’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더욱더 충격이었다.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했다. 앞으로는 너. 아니, 윤 대리에게 섭섭하게 하지 않을게.”
‘…헐.’
사과라니.
오 팀장이 내게 사과하다니. 내일의 해가 서쪽에서 뜰 징조가 아닌가.
“그럼, 나는 먼저 올라가서 부장님께 보고드리고 있을 테니까. 오늘 고생한 윤 대리는 조금 쉬었다가 천천히 올라와.”
나는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오 팀장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사람이 변한 건 내가 아니라 오 팀장님 같은데.’
변화가 하도 극적이라 오해를 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뭐, 괜찮겠지.’
오해야 나중에 풀어도 당장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변화가 내게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오 팀장님과의 관계 개선이 내게 이득으로 돌아온 것은, 와인 사태로부터 열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윤 대리, 잠깐 나 좀 봐.”
늦은 오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오 팀장님이 나를 불렀다.
“이번에 패션 사업부가 시범 운영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들었죠.”
“패션 사업부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면, 특진의 기회와 특별 보너스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그거 회사 인트라넷에 공문으로 올라왔잖아요. 이미 다 읽었습니다.”
“그래? 잘됐네. 그럼 잘 들어봐봐. 내가 방금 임시 패션 사업부에 관한 회의를 하고 왔는데, 패션 사업부의 팀원을 몇몇 부서에서 차출하자고 결론이 났어.”
“그래요?”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오 팀장님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윤 대리, 혹시 관심 있어?”
“…네?”
“생각 있으면 내가 추천해줄 수 있는데.”
놀라웠다.
원래라면 이런 좋은 기회를 오 팀장님이 내게 넘겨줄 리 없었으니까.
“왜 직접 안 하시고요?”
“나는 머리가 굳어서, 그런 쪽으로는 능력이 안 돼. 하지만 윤 대리는 가능성이 있다고 봐. 요즘엔 옷도 잘 입고 다니고 말야.”
“하하….”
나는 멋쩍게 웃으며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옛날이라면 기겁하여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음껏 도전할 수 있고, 언제든 실패해도 괜찮았다.
‘재밌겠네.’
나는 지금까지 회사에 다니며, 이런 특별한 프로젝트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모두의 인정을 받는 직원들을 보며 부러워한 적도 많았다.
‘이젠 나도 할 수 있어.’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오 팀장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프로젝트 제가 한번 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