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 rushed after winning the first prize in the lotto RAW novel - Chapter 20
20화 루미에 패션쇼 (2)
따스한 봄이 다가왔지만, 해가 진 저녁의 거리는 여전히 쌀쌀했다.
“여기인가?”
코엑스 케이팝 광장, 코엑스 아티움 건물 앞에 설치된 거대한 무대.
오늘 GA패션의 첫 번째 브랜드, 루미에(Lumiere)의 런칭쇼가 열리는 장소를 바라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요란하군.’
남자는 대형 무대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소문을 들었거나, 듣지 못했어도 궁금증에 몰려든 구경꾼들. 그리고 각종 카메라 장비를 든 방송국 직원들이 무대 근처에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으 추워 죽겠네.”
“왜 하필 야외에서 이런 야단법석을 떠는 거야? 실내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근처에서 들려오는 방송국 직원들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쌀쌀한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패션 잡지사, ‘퍼펙트 스타일’의 기자인 알렉산드로는 그런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동감이야. 이런 날씨에 야외 런칭 쇼라니.’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경관을 활용할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볼 거라고는 높게 올린 빌딩밖에 없는 곳에서 야외 런칭 쇼를 한다?
‘할 짓 없는 재벌들의 돈지랄이겠지.’
어디서 주워 들은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합쳐, 이런 괴상한 기획을 짠 게 분명했다.
‘아만다의 부탁만 아니었어도.’
편집장의 신경질만 아니었다면, 볼 것도 없는 이런 자그마한 나라에는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K-POP에 빠진 전 여자친구 때문에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운 게 잘못이지.’
알렉산드로는 적당히 보다가 호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곳이 패션의 고장 이탈리아 밀라노도 아니고. 런칭쇼를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냐는 심정이었으니까.
‘기사도 대충 적어야지.’
알렉산드로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착석했다.
‘그런데 저 커다란 천막은 대체 뭐야?’
무대의 양쪽, 그러니까 관객석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거대한 천막으로 덮인 무언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무슨 깜짝 이벤트라도 할 생각인가?’
그렇게 알렉산드로의 마음속에 약간의 호기심이 생겨났을 때.
펑-!
빠밤!
화려한 불꽃과 함께, 런칭쇼가 시작되었다.
거대하고 환한 조명이 무대 위를 비추며, 알렉산드로도 이름은 들어본 적 있는 K-POP 아이돌 그룹이 등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두둥- 두두둥-!
생각보다 신나는 리듬에 알렉산도르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못 들어 줄 정도는 아니군.’
마침내 아이돌의 그룹의 노래가 끝나자, 조명이 무대의 가장자리 끝을 비추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루미에 패션쇼의 진행을 맡은 유재혁입니다! 반갑습니다!”
사회자는 가벼운 인사 후에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방금 유명 아이돌 그룹, 별빛소년단의 공연을 보고 왔는데요, 언제 들어도 참 감미로운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자, 그럼 이어서 다음 무대를 보겠습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이번엔 바다 소녀라는 이름의 유명 여자 아이돌 그룹이 등장해 공연을 이어나갔다.
‘노래는 좋아. 그런데….’
알렉산드로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패션쇼이지 아이돌 공연장이 아니잖아.’
그는 신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도, 속으로는 불쾌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전 여자친구가 알려준, 이럴 때 쓰는 말이 있었는데….’
알렉산드로는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생각났다. 이런 속 빈 강정 같으니라고.’
마침내 적당한 한국 속담을 떠올린 그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오!’
이탈리아로 돌아가면 써먹을 기사 제목이 떠올린 알렉산드로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제목은 패션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동방의 작은 브랜드로 해야겠어.’
이윽고 아이돌의 무대가 끝나자, 다시 사회자가 등장해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봐, 알렉산드로. 너도 편집장 등쌀에 떠밀려 온 거야?”
“마르코? 자네가 여긴 왜?”
그는 경쟁 잡지사의 기자이자, 알렉산드로의 대학교 동기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편집장이 얼마나 지랄을 떨어대던지.”
마르코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서로 고생이군.”
“그러게나 말이야. 대체 이런 요란만 떠는 패션쇼에 뭐 볼 게 있다고. 가만 보면 너나 나나 감 떨어지는 편집장 밑에서 고생이라니까.”
알렉산드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르코의 말에 긍정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둥! 둥! 둥! 둥!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패션쇼의 하이라이트. 런웨이가 시작되었다.
따라라라-
싱그러운 봄에 어울리는 따듯한 느낌의 음악이 흘러나오며, 첫 번째 모델이 등장했다.
그는 큰 키에 길쭉한 신체 비율을 가진 남자였다. 모델은 민트색 조끼와 연한 카키색 팬츠를 입고 느린 걸음으로 런웨이를 걸었다.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신비로운 패턴의 가디건이었다.
‘뭐지?’
알렉산드로는 가디건에 새겨진 무늬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묘하게 빠져드는 느낌이야.’
신비로운 느낌의 무늬도 무늬였지만, 민트색과 카키색의 조화도 훌륭했다.
‘…봄의 새싹을 연상시키려는 의도인가?’
드디어 무대의 끝에 도달한 모델이 포즈를 취하자, 무대 위의 3D 전광판에서 푸른 잔디가 펼쳐진 드넓은 언덕이 나타났다.
후웅-
‘응? 갑자기 어디서 따듯한 바람이…’
조금 전까지 쌀쌀한 날씨에 몸을 떨었던 알렉산드로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아까 전 보았던 천막으로 감춰져 있던 거대한 온풍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니까, 정말로 푸른 언덕 위에 올라온 기분이군.’
아주 잠시 포즈를 취한 모델이 뒤돌아 사라진다. 이어서 다음 모델이 나타났다.
두 번째 모델은 여리여리한 몸매의 여자였다. 그녀는 민트색 바디 수트와 블루 트리밍이 매치 되어있으면서도, 신비로운 금태 무늬가 음각된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살랑살랑-
그녀가 가볍게 걸을 때마다, 따듯한 바람이 모델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이거 설마?’
두 모델의 모습에 알렉산드로는 깨달았다.
‘그렇군. 두 모델은 예고편인 거야.’
카키색과 민트색, 그리고 화이트의 조화.
‘땅에서 피어나는 새싹, 그리고 녹기 직전의 눈.’
그것은 이제 막 다가온 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라-
흘러나오는 음악이 바뀌었다. 포근한 따듯함에서 조금 더 화려하게.
이번에는 여성 모델 둘이 등장했다. 한 명은 몸에 딱 붙는 하늘색 미니 원피스를, 또 한 명은 노란색 민소매 드레스에 유니크한 나비 패턴의 스카프를 걸치고 무대 위를 걸었다.
얇은 면의 하늘색 미니 원피스는,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눈에 띄는 꽃무늬 패턴이 인상적이었다.
반면, 민소매 드레스는 나비와 같이 살랑거리는 움직임으로, 하늘색 원피스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렇게 두 모델이 무대의 끝에 다다라 포즈를 취하자, 3D 전광판의 화면이 바뀌었다.
푸른 언덕에서, 꽃이 만개하여 아름다운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언덕으로.
‘봄의 꽃과 나비?’
알렉산드로가 직관적으로 컨셉을 깨달았을 때. 어딘가에서 펑!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벚꽃?’
그것은 벚꽃을 표현한 분홍색의 얇은 한지 조각이었다.
두 여성 모델은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두 팔을 벌려 온몸으로 봄을 받아들였다.
봄날의 따스함.
그것이 지금 무대의 메시지였다.
‘다음은 뭐냐!’
어느새 런웨이에 집중하게 된 알렉산드로가 기대감 가득 찬 눈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따다다다-!
음악의 템포가 빨라지며, 귀여운 스타일의 남성 모델이 등장했다.
그는 연분홍색 스웨트 셔츠와 베이지색 슬랙스, 그리고 박하색 모자 쓰고 있었다.
‘응? 저건…’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모델은 팔목에 스타일리쉬한 검은색의 레더 팔찌를 끼고 있었다.
‘뜬금없는데, 묘하게 잘 어울리는군.’
비유하자면, 다 그린 그림 위에 떨어진 검은색 물감이었으나. 물감이 떨어진 위치가 절묘해 그림의 완성도를 높인 느낌이었다.
그렇게 모델이 무대의 끝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음악의 템포가 더욱 빨라지기 시작하며. 3D 전광판의 화면이 언덕에서 하늘 위 구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어…!”
하늘 위에 자유로운 민들레 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따라라라-! 빠밤!
모델은 포즈 대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지며, 애쉬 그레이의 머리가 드러났다.
‘머리색도 뜬금없지만, 잘 어울리는군?’
고민하던 알렉산드로는 마침내 이번 컨셉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유! 봄의 자유로움을 표현한 것이구나!’
그렇게 한껏 춤을 추던 모델이 뒤돌아 퇴장하고. 마지막 모델이 등장했다.
‘저 남자는…’
이번 모델은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주변 분위기를 압도하며 모두의 시선을 강제로 끌어모으는 느낌이랄까.
다라라라-!
느린 곡조의 몽환적인 음악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이번에는 3D 화면이 먼저 바뀌었다.
‘검은색?’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의 공간. 그 안에서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나고, 사라졌다.
저벅.
모델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피어나는 꽃들.
여름에도 입을 수 있을 만큼 얇은 소재로 만들어진 검은색 코트의 허리춤에는, 금색의 신비로운 무늬가 새겨진 끈이 달려 있었다.
저벅저벅.
모델이 걷고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허리끈. 그 허리끈의 끝에서 온갖 꽃들이 피어났다.
알렉산드로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모든 시선을 흡수하는 듯한 모델의 런웨이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이곳의 모든 이들이 모델의 런웨이에 집중하였을 때. 마침내 모델이 무대 끝에 다다랐다.
파파파밧!
화면 속 꽃들이 폭발하듯,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이 흩날렸다. 그러다 돌연, 음악이 꺼지고.
팟-
조명도 꺼졌다.
잠시 무대 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그렇게 약간의 기다림이 시작되고.
웅성웅성.
사고인가 하는 작은 의문이 생겨났을 때.
파앗!
조명이 무대 위를 다시 비추었다.
“앗!”
그곳엔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모델이 손을 흔들며, 무대 위에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저건…’
마지막 모델의 컨셉을 알아채지 못했던 알렉산드로는, 모델들이 서 있는 순서를 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시작. 두 번째는 봄의 일상. 세 번째는 자유로운 봄의 생기. 그리고 마지막은 봄의 끝이었던 거야.’
봄의 시작과 끝이라니. 참으로 알찬 구성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재밌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밀라노의 패션쇼와는 또 다른 느낌의 매력에 그는 푹 빠져버리고 말았으니까.
‘3D 전광판의 효과도 좋았어. 공간에 제약이 없으니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잖아.’
게다가 야외에서 패션쇼를 관람하니, 정말로 화면 속 장소에 있는 듯한 착각까지 일었다.
‘끝난건가?’
사회자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제 완전히 쇼가 끝난 모양이었다.
‘아쉽군.’
처음 마음과 달리, 루미에 런칭쇼를 더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시던 알렉산드로는. 근처에서 자신과 똑같이 입맛을 다시는 마르코를 발견했다.
흠칫.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저 녀석보다 먼저 기사를 써야 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호텔로 달려갔다.
‘제목은….’
그날 밤, 호텔 방에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새벽녘까지 울려 퍼졌다.
***
5주 뒤.
“너튜브에 올린 루미에 패션쇼 영상 조회수가 1억이라고요?”
나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