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 rushed after winning the first prize in the lotto RAW novel - Chapter 50
50화 상처 입은 연주자 (2)
나를 보자마자 대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지현 씨는 이른 아침부터 나를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오늘 제가 여기 온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네, 근형이에게 들었거든요.”
“…못 본 새 둘이 많이 친해졌나 보네요.”
“그럼요! 이제 우리는 이제 문자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한…. 아니, 이게 아니라. 연주자 필요 없냐니까요?”
연주자라. 물론, 필요했다.
‘그런데 이지현 씨가 이런 걸 왜 묻는 거지?’
나는 왠지 그 이유가 어제 보았던 그 연주 영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연주자를 구하고 있긴 합니다.”
“지, 진짜요? 그럼 혹시 제가 굉장히 실력 좋은 피아노 연주자를 한 명 알고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
이상했다.
연주자를 부탁하는 이지현 씨의 모습은 어딘가 간절해 보였으니까.
‘설마, 그 연주자가 이지현 씨 본인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엊그제 우리 가게에 찾아왔다는 것과 오늘 나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이.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봐야겠어.’
그렇게 내가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려던 그때, 수녀님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현민아!”
“아니,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수녀님들은 내가 온 줄 몰랐는지, 깜짝 놀라 하며 반가워했다.
“밥은?”
“간단하게 먹고 왔어요.”
“그래도 배고플 것 같은데, 이따가 애들 아침 식사할 때 같이 좀 먹어.”
나는 어릴 때처럼 나를 대해 주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졌다.
“원장님은요?”
“지금 주방에… 아니다. 지금쯤이면 원장실에 계실지도 모르겠네. 너 온다고 새벽부터 뭐를 좀 만들고 계셨거든.”
“아, 설마 한과…”
수녀님들이 대답 대신 조용히 미소만 짓는 것을 보니 맞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자.”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조금 이따가요. 지금은 가져올 게 좀 있거든요.”
그리고 나는 수녀님에게 뭔가를 부탁하려다, 이내 멀뚱하게 서 있던 이지현 씨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이지현 씨, 조금 전 그 이야기는 이따 마저 하고. 지금은 저를 좀 도와주시겠어요?”
“…뭘 도와요?”
나는 이지현 씨를 데리고 자동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트렁크를 열어, 그녀에게 커다란 종이 쇼핑백 2개를 손에 쥐여주었다.
“자요. 그거 가져가서 애들 좀 나눠주세요.”
“이게 뭐예요?”
“선물이요.”
“아, 이번에 해외여행 다녀오시면서 사 오신 거죠?”
“…제가 해외여행 갔다 온 건 어떻게 아셨나요?”
“당연히 가게 직원에게 들었죠.”
“…….”
그녀가 엊그제 우리 가게에 찾아온 것은, 아무래도 나를 만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턱-!
나는 먼저 2개의 쇼핑백을 더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고, 다시 쇼핑백 2개를 더 꺼내며 트렁크를 닫았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쇼핑백 안에는 디즈니 캐릭터 인형이랑 장난감, 음반, 워터볼 그리고 각종 굿즈 등이 있어요. 애들이 원하는 것 하나씩 가져가게 해주시고. 만약 동이 나면, 지금 바닥에 내려놓은 쇼핑백에 몇 개 더 있으니 가져가서 나눠주세요.”
“네에? 선물을 종류별로, 그것도 여유분까지 사 오셨다고요?”
놀라는 이지현 씨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애들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넉넉하게 사 왔어요.”
“…산타클로스가 따로 없네요.”
산타라는 말에 나는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10월의 산타클로스라니. 괜찮은 어감이지 않은가.
“좋은 생각이네요.”
“뭐가요?”
“10월이든 11월이든 12월이든. 아이들 입장에선 매달 산타클로스가 보고 싶지 않겠어요.”
1년에 12번 등장하는 산타라니. 그 어떤 아이가 싫어할까.
‘한달에 한 번씩, 애들에게 선물을 주러 오는거야.’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상상하니, 절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무튼, 부탁한 대로 선물 좀 나눠주고 계세요. 저는 원장님을 좀 뵙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이지현 씨를 먼저 들여보낸 후, 나는 조수석에 따로 놔두었던 책들을 챙겨, 원장실로 향했다.
똑똑.
방안으로 들어서자, 한과를 정성스럽게 포장 중이던 원장님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어?”
“하하. 원장님이 보고 싶어서, 달려왔죠.”
보고 싶었다는 말이 약간 쑥스러우셨는지, 원장님은 괜히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셨다.
“얘는… 나이를 먹더니 능글맞아져선. 아무튼 일단 앉으렴.”
그 말에 따라 자리에 앉은 나는, 원장님과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특히, 나는 미국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씀드렸는데. 원장님은 이런 류의 이야기를 상당히 좋아하셨다.
“디즈니 랜드에서 열차를 탔는데요,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던지. 순간, 몸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어머, 대단하구나? 그런데 내가 아는 현민이는 겁이 많아서, 그런 무서운 건 절대 타지 않는데…”
아차.
원장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
“솔직히 말해보렴. 누구랑 같이 갔니?”
역시.
어줍짢게 허세를 부리기엔 원장님은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셨다.
“먼 미국 땅에서 제가 같이 갈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아무튼 다음으로 할리우드에 갔었는데요. 거기에서….”
“호호. 이야기를 돌리는 것을 보니, 어떤 여성분이랑 같이 놀러 간 모양이구나?”
“…그래서 할리우드 광장 바닥에 손바닥이 찍혀 있었는데요. 그 크기가….”
나는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 했지만, 계속 짓궂게 물어오는 원장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같이 간 친구는 아일라라고 하는데요. 아일라는….”
아일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원장님의 입가엔 미소가 점점 번져 가고 있었다.
“우리, 현민이. 다 컸네.”
“…….”
“어른이 다 되었어.”
사춘기 아들이 처음으로 이성과 엮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님마냥, 원장님은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계셨다.
‘이래서 내가 일부러 아일라 얘기를 안 하려 했는데.’
약간 민망해진 나는 원장님에게 분명히 밝혀두었다.
“우리는 원장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래~ 그렇겠지~”
“…….”
틀렸다.
아마 앞으로 몇 달은 이걸로 나를 놀리시려 들게 뻔했다.
‘화제를 돌리자.’
나는 들고 온 쇼핑백에서 원장님께 드릴 선물을 꺼내었다.
“어머, 그게 뭐니?”
“루이보스 차랑 함께 먹을 과자예요.”
루이보스는 카페인이 없고, 항산화 작용이 뛰어나. 면역력이랑 스트레스에 좋다고 하여 원장님 건강을 위해 구매했다.
하지만 이건 보너스일 뿐. 메인 선물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요.”
내가 몇 장의 LP판을 꺼내 내밀자, 원장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뭐야?”
“비틀즈 LP판이에요.”
그런 내 대답에 원장님이 반색하셨다.
“비틀즈라고?!”
“네. 원장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사 왔어요.”
원장님은 예전부터 팝송을 좋아하셔서, 보육원에는 늘 팝송이 흘러나올 정도였었다.
‘덕분에 내가 영어 듣기 하나만큼은 잘하게 되었지.’
조금 더 할리우드다운 선물을 사 오려 했던 나는, 그때를 회상하며 원장님이 좋아하실 비틀즈 음반을 골랐던 것이었다.
“고맙구나. 안 그래도 요즘 가지고 있던 LP판들이 전부 망가져서 적적했었는데.”
원장님은 내가 선물한 앨범을 들고 곧장 먼지하나 없이 깨끗한 턴테이블로 향하셨다.
지직-!
-♪♩♬
약간의 잡음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음반의 첫 노래는 ‘Let It Be’였다.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원장님은 오랜만에 듣는 팝송을 흥얼거리며 미소를 지으셨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하게 보여, 나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LP판을 선물하길 잘했네.’
LP판 특유의 감성 있는 노래가 원장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원장님의 미소도 진해져 갔다.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마침내 노래가 끝났을 때, 원장님은 카트리지를 들어 올리며 턴테이블을 종료하였다.
“고맙구나, 정말로. 오랜만에 팝송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나도 뭔가를 줘야지.”
원장님은 책장 가장 위쪽의 고급스럽게 생긴 보관함을 꺼내, 내게 내미셨다.
“열어보렴.”
보관함을 열자, 그 안에는 동그란 나무 조각에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예전에 인도 주민에게서 선물 받았던 옴 펜던트란다.”
“옴 펜던트요?”
“그래, 힌두교에서 기도를 상징하는 옴(OM)문자를 새긴 목걸이인데. 착용하고 있으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는구나.”
행운이라.
‘하하, 그럼 안 그래도 좋은 운이 더 좋아지려나?’
방금 떠올린 실없는 생각에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원장님의 선물을 소중히 챙기었다.
“한과도 이따 돌아갈 때 챙겨가렴.”
“네. 감사해요, 원장님.”
“자, 그럼 이제 다른 수녀님들도 만나고, 아이들과도 놀아주러 가려무나.”
고개를 끄덕인 나는 원장실을 빠져나와 다시 수녀님들이 모여계신 곳으로 향했다.
“와아! 현민아, 너무 이쁘다.”
“고마워!”
수녀님들의 기뻐하는 반응을 보아하니, 수녀님들의 취향에 맞게 각각 다른 선물을 사 온 것은 정답이었다.
‘이 맛에 선물하는 거지.’
내 선물에 기뻐하는 수녀님들과 저 멀리, 꺄르르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형…!”
특히, 아까 조수석에서 꺼내 온 크로키북과 각종 인체 모델이 그려진 책을 선물 받은 근형이는, 감격하여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해왔다.
“그래, 그거 보면서 연습 잘하고. 알아보니까 그 책 한국에는 없는 거라더라. 잘 간직해.”
“네, 형!”
처음 보았을 때의 까칠함이 많이 사라진 녀석을 보니, 대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기 사부아라는 식당을 갔는데, 음식이 정말 맛있었어. 특히….”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반짝이는 근형이에게 여행 후기를 들려주고 있었을 때. 아이들에게 선물을 모두 나누어 준 이지현 씨가 다가왔다.
“윤현민 씨, 이제 이야기 좀 해요.”
“조금 더 이따가….”
나는 이지현 씨와의 대화를 나중으로 미루려 했으나, 어딘가 진지해 보이는 그녀의 분위기에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요.”
근형이에게 양해를 구하며 일어난 나는, 이지현 씨와 조용한 장소로 향했다.
“이지현 씨, 매니저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네? 우리 매니저요?”
이지현 씨가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아, 현민 씨 가게 매니저 말씀이시구나. 그렇다는 건 엊그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셨다는 거죠?”
“네, 우리 가게에 찾아와 연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제가 아….”
“혹시, 엊그제의 일이 이지현 씨가 소개해주고 싶다는 연주가가 관련이 있습니까?”
두 눈이 커다래진 이지현 씨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런 그녀의 반응에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유가 뭐죠? 배우 생활도 잘하고 계시는데, 왜 굳이 우리 가게에서 일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예에?!”
깜짝 놀라는 이지현 씨는 이내 실소하며 말했다.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알겠는데요. 결론만 먼저 말씀드리면. 엊그제 피아노를 연주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쌍둥이 동생인 이지혜예요.”
“예? 쌍둥이 동생이라고요? 그게 무슨…”
이지현 씨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동생은 유망했던 피아노 신동이었어요. 하지만 ‘어떤 사건’에 의해 집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될 정도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다시는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게 되었죠.”
“…….”
“그런데 엊그제,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생이 스스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거예요. 심지어 윤현민 씨의 가게에서 피아노 연주까지 하게 되었죠.”
“…동생분이 그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고요?”
“네. 왜 하필 윤현민 씨의 가게로 찾아갔던 건지는 말해주지 않았어요. 다만, 그 가게에서라면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어요.”
이지현 씨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탁드릴게요. 무급이라도 좋으니, 우리 지혜가 거기에서 일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다.
‘영상 속 이지혜 씨의 연주 실력은 수준급이었으니까.’
게다가 배우 이지현 씨와 외모가 똑같아서 가게 매출에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안타까워.’
모종의 이유로 좋아하는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다니. 그런 사연을 듣게 되었는데, 돕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지혜 씨를 한번 만나봐야겠는데.’
그렇게 다음날.
나는 이지현 씨를 통해 이지혜 씨를 마주할 수 있었고.
후다닥-!
“이지혜 씨…”
나를 발견한 이지혜 씨가 갑자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