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 rushed after winning the first prize in the lotto RAW novel - Chapter 70
70화 불길 속으로 (1)
전에 미국 여행을 다녀온 경험 덕분인지, 의외로 스위스 여행 준비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패션쇼의 뒷마무리(해외 판매 건에 관해 내 승인이 필요한 사항들이 많았다.)와 라이브 카페의 점검 등이 필요했기에, 총 열흘이라는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여행 준비 도중, 나는 강진수 사장의 귀국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미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생깨나 한 것 같은 몰골의 강진수 사장은, 자신이 없는 동안 루미에를 잘 이끌어주어서 고맙다며 내게 선물을 주었다.
“신형 롤렉스 서브마리너 모델입니다. 전에도 롤렉스를 드렸기에, 이번에는 다른 브랜드로 선물해드릴까도 했었지만. 아무래도 윤현민 씨 나이도 그렇고, 디자인 측면에서도 롤렉스가 가장 어울릴 듯싶더군요.”
브랜드가 어디건 상관없었다.
시중가 2천 7백만 원짜리 시계를 선물 받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강진수 사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이기형 부장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회사를… 그만 두셨다고요?”
“네, 그렇게 되었네요.”
눈엣가시가 사라져서, 후련해야 할 강진수 사장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흐음….’
나는 굳이 여기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다만, 이기형이 그만둔 이유가 스위스에서의 일과 관련이 있음을 어림짐작할 순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행 준비를 마무리해야 해서요.”
“아, 어디 여행이라도 가시나 보네요.”
“예. 간만에 좀 멀리 가보려고요.”
일부러 스위스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뭔가 귀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좋으시겠군요. 여행은 언제 가십니까?”
강진수 사장의 물음에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이요.”
그날 저녁, 나는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
.
.
‘이제는 일등석이 아니면 타질 못하겠네.’
일등석은 물론, 굉장히 비쌌지만. 편안하고 안락한 의자와 최상의 서비스, 여유롭고 조용한 공간. 무엇보다 장시간 앉아있음에도 전혀 피로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여행을 즐기기도 전에 지쳐선 안 되니까.’
그렇기에 나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주겠다는 스티븐 에필버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었다.
그가 예매해준다는 비행기 티켓이 퍼스트 클래스가 아닌, 이코노미석일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세계적인 감독이 쩨쩨하게 그러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기껏해야 비즈니스석 정도로 예매해줬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내가 직접 하는 편이 나았다.
‘조금 쉬고 싶던 차에 잘 되었지 뭐.’
어차피 패션쇼가 끝난 뒤, 해외여행을 갈 생각이 있었기에. 이런 예상 밖의 지출은 별 상관이 없었다.
‘원래는 뉴욕으로 넘어가서 루카스 씨를 만날 생각이었지만. 뭐, 스위스도 나쁘지 않지.’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취리히에 도착한 나는, 예약해둔 크라이스트 호텔로 향했다.
“환영합니다.”
호텔 프론트 직원에게서 카드키를 받은 나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붙잡아 최상위층을 눌렀다.
띵.
순식간에 최상위 층에 도착한 나는, 현대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복도에 감탄했다.
‘스위트룸이 있는 층은 다른 건가?’
객실로 향하는 길조차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보였다.
‘룸 A라고 했었지?’
스위트룸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이 호텔만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 호실 번호가 따로 있진 않았다.
띠리릭-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혼자 쓰기엔 굉장히 공간이 나를 반겨주었다.
“오.”
킹사이즈의 침대, 100인치의 TV, 그리고 특히 엄청나게 넓은 통유리 창문으로 스위스의 전경이 훤히 보이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스티븐 에필버그 씨와의 약속은 저녁이니… 아직 5시간 정도 남았네.’
꼬르륵-
스위스에서 먹을 음식을 기대하며 아침 기내식을 먹지 않았던 나는, 배가 아주 고파왔다.
‘일단 나가볼까.’
TV로만 접했던 스위스의 거리가 궁금했던 나는 빠르게 짐만 풀고 호텔 밖으로 나와, 적당한 식당을 찾았다.
“라자냐와 브라트부르스트 하나, 그리고 와인 한 잔 주세요.”
스위스는 치즈로 유명한 나라이기에 치즈와 관련된 음식이 발달해 있었다. 또한 취리히는 스위스의 대표적인 독일어권 도시이기에, 독일의 소시지 문화도 엿볼 수 있었다.
‘라끌렛과 같은 제대로 된 치즈 요리도 먹어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잠시 후 웨이터가 가져다준 라자냐와 브라트부르스트의 맛은 명불허전이었다.
‘치즈의 풍미가 살아있는 라자냐와 독일 소시지 특유의 짠맛이 은근 잘 어울리네.’
그렇게 음식을 와구와구 먹다가 조금 물릴 때쯤, 레드 와인 한 모금으로 입안을 리프레쉬 시켜주니.
“음~!”
산해진미가 따로 없었다.
‘맛도 맛이지만, 경치가 기가 막힌 데?’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고, 따사로운 햇볕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은. 도시 한 가운데의 취리히 호수가 훤히 보이는 야외 테이블이었다.
이렇게 끝내주는 경치의 호수를 바라보며 식사하고 있으니, 없던 입맛도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도시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명품이 진짜 많이 보이네.’
내가 가장 먼저 구경한 곳은 스위스 최대 쇼핑의 성지, 반 호프 거리(Bahnhofstrasse)였다.
취리히 호수로부터 1KM나 이어지는 거리엔, 명품 판매장이 많이 모여 있었다.
여성들의 눈이 돌아갈 만한 명품 가방은 물론, 남성들이 환장하는 명품 시계가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기에. 거리를 걸으며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강진수 사장에게서 선물 받은 롤렉스 시계도 저기 보이네.’
그렇게 여러 명품을 구경하던 나는, 문득 우리 루나리스 패션의 옷도 이 거리에서 판매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한 번 고려해봐야겠어.’
끼익-
어디선가 들려온 덜컹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도시를 누비는 노면전차인 트램이 보였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하는 광경에 나는 신기함을 느끼며, 트램이 정차하고 출발하는 순간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음?”
그러다 나는 우연히 트램에서 지팡이를 짚으며 내리는 할아버지가 길바닥에 지갑을 떨어뜨리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저기요!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를 목청껏 불러보았지만, 거리가 멀었던 탓인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닥에 흘린 지갑을 누가 가져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얼른 달려가 지갑을 주워들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쫓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Was machsch du?”
어느새 다가온 심상치 않은 표정의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Jetzt hesch grad versuecht, min Portmonnaie z’stoh!?”
“…What?”
나는 할아버지의 입에서 들려온 독일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할아버지의 험악한 분위기로 보아 대충 오해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내가 지갑을 줍는 장면을 보신 게 아닌, 몸을 일으켜 뒤를 돌던 순간을 보신 모양이었다.
“I am sorry for the misunderstanding. I am not a bad person.”
“Wie bitte?”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듯 보였다.
나는 손짓과 발짓을 하며 설명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갈 뿐이었다.
‘아, 그래!’
스마트폰 번역 어플의 존재를 기억해낸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Schurke!(나쁜 놈!)”
딱!
나는 졸지에 할아버지가 휘두른 지팡이에 얻어맞고 말았다.
연세가 있으신 탓에,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도움을 주려다 졸지에 나쁜 놈이 되어버린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Verpiss dich!”
할아버지는 벙쪄있는 내 손에서 지갑을 낚아채어, 다시 제 갈 길을 가시기 시작했다.
‘…….’
괜한 오지랖이었던 걸까.
나는 방금까지 좋았던 기분이 조금 안 좋아졌다.
‘…그래, 오해하셨을 수도 있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솔직히 너무 억울했다. 좋은 마음으로 선행하려던 것뿐인데, 이 먼 타지에서 길거리에서 지팡이로 얻어맞았으니 말이다.
“음…”
그때, 누군가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나를 불렀다.
“Excuse me….”
아홉 살에서 열 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꼬마야, 무슨 일이니?”
“죄송합니다.”
아이는 내게 대뜸 사과를 해왔다.
“방금 아저씨를 때리셨던 분이, 우리 할아버지인데요.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할아버진 영어를 전혀 못 하시거든요.”
아이는 자신을 케빈이라 소개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크게 사기를 당하셨데요.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힘들어졌고, 결국에는 할머니마저 떠나셨데요.”
“…….”
“할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해지는 일이 가끔 일어나게 되었데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돈을 버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어렸던 우리 아빠를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요.”
케빈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케빈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사기를 당해, 돈에 집착하는 성격이 되었고. 가끔 정신이 희미해질 때면, 사람들과 트러블이 생길 때가 종종 있다는 것.
‘그래서 내가 지갑을 주웠을 때,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지팡이를 휘두르셨던 거군.’
할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는 동시에, 열심히 할아버지를 변호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나는 안 좋았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기특하네.’
나는 케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케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시 내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얻어맞으시기 전에, 미리 나서서 말렸어야 했는데…. 할아버지가 저에게도 화를 내실까 봐 무서웠어요.”
어차피 케빈이 와서 말렸다고 한들, 저 조그만 몸으로 뭘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오히려 뒤늦게라도 말리지 못했다며 사과하러 온 아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미안하면, 나를 좀 도와줄래?”
“…네?”
나는 케빈의 조그만 손을 이끌어, 근처의 초콜릿 상점으로 들어갔다.
“내가 너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 좀 있거든.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어떤 초콜릿을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그런데, 좀 도와줄래?”
케빈은 의욕이 넘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상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돌아온 케빈의 손에는 얼굴만 한 크기의 축구공 초콜릿이 들려있었다.
“이거요! 이게 이 가게에서 제일 맛있는 초콜릿이에요.”
“그래? 골라줘서 고맙구나.”
나는 케빈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주며, 계산대로 향해 결제를 마쳤다.
“그런데 하나만 사세요? 친구들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그건 한국으로 돌아갈 때 사려고.”
“그럼 이건…”
나는 씨익 웃으며, 케빈에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자, 맛있는 초콜릿을 골라준 보답이야. 맛있게 먹어.”
얼떨결에 내게서 초콜릿을 받아 든 케빈이 당황하더니, 이내 상기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하였다.
“감사합니다!”
낯선 땅에서 만난, 착한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어서 먹어보렴. 엄청 맛있는 거라며?”
“아뇨, 집에 가서 할아버지와 나누어 먹으려고요.”
그 말에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럼 어서 가보렴.”
“…다시 한번 저희 할아버지가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아이에게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케빈도 안심이 되었는지, 배시시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네왔다.
“우리 할아버지는 취리히 주립 박물관 근처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세요. 시간 되실 때 놀러 오시면, 저도 선물을 드릴게요! 그럼, 즐거운 여행 되세요!”
달려가는 케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역시, 여행은 즐거워.’
이렇게 예상치 못한 만남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자, 그럼.’
시계를 확인해보니,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다시 초콜릿 가게로 돌아가, 이삭 보육원의 수녀님들과 아이들에게 선물할 초콜릿을 배송 주문한 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스티븐 에필버그와 대화를 나눌 건데, 지쳐있으면 안 되니까.’
약 한 시간의 휴식을 취한 나는, 곧바로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그런데.
퍼엉-!
길을 걷던 도중, 어디선가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이어지는 비명에 나는 무언가 잘 못 되었음을 느끼고, 굉음이 들려온 방향에서 멀어지려 했다.
그런데….
‘…저기는?’
굉음이 들려온 곳이 하필이면, 취리히 주립 박물관이 있는 방향이었다.
‘케빈…!’
불길한 느낌이 든 나는, 어느새 굉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