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st RAW novel - Chapter 3
02. 예상치 못한 가시는 언제나 아프다
아침 식사가 고역스러웠다. 연석은 나이프로 깊게 잘라 낸 스테이크를 시뻘건 소스에 푹 담갔다. 벌겋게 고기에 밴 소스가 뚝뚝 식기 위로 떨어졌다. 연석은 남은 고기를 다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왜, 입맛이 없어?”
“어젯밤에 좀 무리를 했더니요.”
“손은 어쩌다가 다친 거야.”
“간만에 손을 좀 썼더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회장님.”
“조심해야지. 넌 내 뒤를 이을 유일한 후계자다.”
“그런 말씀 하시면 섭섭해할 사람 많아요.”
“난 되는 놈만 두고 키워. 그게 너다, 연석아.”
연석과 승계 다툼을 했던 차기 회장 후보는 있었으나 지난 사업에서 밀려 지지율이 하락했다. 재문을 일으킨 것은 윤 회장이었지만 재문을 지금처럼 높이 세워 놓은 것은 팔 할이 연석의 공이었다.
사실 차기 회장으로 연석이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재문과 구역 다툼을 하며 경쟁하던 석도그룹이 추격하기 힘들 만큼 앞서 입지를 다져 놓은 것도 연석이었다.
연석과 함께 차기 회장 후보로 거론되었던 후계자는 있었지만 회장이 버젓이 살아 있다. 후보로 거론된 놈들 중 하나라면 회장이 살아 있는 한 강제적으로 찬탈한 후계자 자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를 놈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지금 그를 노리는 것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연석은 자신을 향한 위험한 냄새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잘생긴 얼굴이 어째 많이 구겨졌구나. 우리 재문 황태자 아니냐. 그 잘난 외모 다쳐서 쓰겠냐.”
윤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데다 양자로 들이겠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아끼는 후계자니 붙은 수식어기도 했다.
“석도로 애들 좀 보내 놨다. 오늘 안으로 적당히 해결 보라 일러 놨어.”
“아셨습니까?”
“감히 내 후계자 몸에 자상을 입혀 놨는데 그냥 두면 쓰나.”
“이깟 자상이 어디 상처인가요. 경고는 충분히 해 뒀습니다. 당분간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연석은 식사를 마치며 완전히 입을 닦았다. 윤 회장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금은 석도지만 계속 널 노리는 놈들은 나올 거다. 범위는 넓어. 정해진 차기 회장, 거기다 능력까지 좋은 차기 회장을 그냥 두고 보고만 있겠냐. 제거 대상이야, 너.”
“식사 자리에서까지 일 얘기 할 거예요? 우리 차 이사님 체하시겠어요.”
윤 회장의 옆자리에 앉은 인영의 귀에서 은빛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윤 회장이 두 해 전부터 만나 온 어린 애인이었다.
“근데 이사님 손 정말 괜찮으세요? 흉터 남겠다.”
“괜찮습니다.”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연석은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당뇨는 좀 어떠세요. 입원까지 하셨던 분이 식사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 마라. 내 건 이래 봬도 특별식이다.”
윤 회장과 피식거리며 쓸데없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연석은 만사를 제쳐 두고 쉬고 싶을 만큼 피곤했다.
“참, 오늘 이경 회장이랑 골프 약속 있으시다고요.”
“그래. 그 양반이 안 그래도 한번 보자고 하는구나.”
“다녀오세요. 저도 그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연석은 담배 생각이 간절해 접시를 엎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제 밤새도록 피 냄새만 맡았더니 스테이크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마저 역했다.
연석은 먼저 자리를 나왔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국 출장을 갔던 석훈이었다.
“같이 식사하려고 왔는데, 내가 늦었나 보네. 형님은 괜찮아요? 애들 통해 들었어요. 하필이면 우리 영감 생신날.”
“그렇지 않아도 회장님이 너 기다리신다.”
“압니다. 아침부터 하도 부르셔서 옷도 못 갈아입고 오는 길이에요. 근데 형님 진짜 괜찮아요? 얼굴이 영. 형님 좋아서 목매달던 계집애들이 도망가는 거 아니에요?”
“도망가도 너한텐 안 가니까 걱정 마시고.”
“너무하시네.”
석훈이 키득키득 웃으며 제 수하들과 함께 레스토랑 룸으로 사라졌다.
***
나연은 그날 밤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벌써 그 일이 있었던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침 비가 내리는 골목은 고요했다. 밤새 모든 것이 다 씻기기라도 한 것처럼.
지도 교수가 세미나 자료 정리를 부탁해 내내 약학관에 있던 나연은 들여다보던 논문을 덮고 연구실을 나오며 상윤에게서 온 문자를 읽었다.
상윤과 커피를 마시러 교내 카페에 가기로 했다. 받아먹은 것도 있으니 돌려주는 게 예의라 생각했다. 그날, 얼굴도 보지 못하고 커피만 덜렁 주고 간 것에 대한 미안함의 뜻이었다.
카페에 먼저 도착한 상윤이 그녀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선배 뭐 마실래요?”
“너랑 같은 거.”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나연은 지갑을 꺼내 펼치다가 안에 꽂아 둔 명함을 발견했다. 차연석. 멍하니 그 사람이 준 명함을 보고 있는데 아르바이트생이 그녀를 불렀다.
정신을 얼른 수습하고 돈을 꺼내려 했지만, 옆에서 상윤이 이미 계산을 마친 뒤 웃고 있었다.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나연은 미안한 마음에 디저트를 주문하며 돈을 건넸다. 그럴 필요 없다고 한사코 말리는 상윤을 보면서도 나연은 기어이 디저트를 주문했다.
“그러면 곤란한데.”
“오늘은 제가 사 드린다고 했잖아요.”
“그건 핑계지. 오늘 내가 사고 또 그 핑계로 너랑 한 번 더 봐야 하는데.”
상윤은 나온 커피와 디저트를 받아 들고 자리로 향했다. 나연은 그를 따라 앉았다.
“선배.”
“너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잖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선배.”
“같이 실습할 때 티 많이 냈었는데. 알고 있었어. 너도 대강 눈치챈 거. 뭐, 그러라고 티 낸 거지만.”
나연은 그녀를 향해 싱긋 웃는 상윤을 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다. 알고 있었다. 미주의 말대로 사람은 사람으로 잊기 위해 상윤을 만나 볼까 고민도 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일단 데이트부터 하라는 미주의 조언대로 그의 부름에 아무 말 없이 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부리는 수작에도 눈 감고 넘어갔었다. 오늘처럼.
“선배, 전요.”
“너 혹시 태민이 때문에 그러니?”
“…….”
“그래서 그러는 거야?”
아직도 옛 연인을 잊지 못했냐고 묻는 어조에 절로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저도 그 사람 잊고 싶어요. 근데 선배랑 같이 있으면 자꾸 생각이 날 것 같아요.”
“내가 태민이 친구라서?”
“네.”
“오늘 그 말 하려고 나 보자 한 거구나?”
한참을 서로 말없이 커피만 보고 있었다.
“그래. 나도 그래서 너한테 섣불리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어.”
상윤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 좋아하는 거 가볍게 생각한 거 아냐. 어쨌든 태민이 놈 내 친구였고. 근데 걘 너 버리고 간 애야. 그런 놈 때문에 네가 힘들어한다는 게 난 가슴 아프다.”
“저 두 달 전에 집 내놨는데 이번 달까지 비워 주기로 했어요. 취직하고 새 출발 할 거예요.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 다 잊고 다시 시작할 거예요. 거기엔 태민 오빠도 있어요.”
“거기에 나도 있는 거니.”
“…그런 건 아니에요. 좋은 선배예요. 선배는. 여전히요.”
“선후배 사이로 남자는 말이구나.”
상윤이 씁쓸하게 웃으며 잔 아래를 문질렀다. 그녀의 답을 예상한 사람 같았다. 미주는 이것저것 재지 말고 관계를 만들라 했지만, 나연도 상윤도 쉽게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따지지 않고 가까이하기엔 껄끄러운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사랑했던 남자의 친구라는 게 가장 컸다.
“그래. 좋은 선후배 사이.”
“미안해요, 선배.”
상윤이 커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그녀의 손에 머그잔을 쥐여 주었다.
“저 아직 태민 오빠한테서 벗어나지 못했나 봐요.”
나연은 한참 동안 쥔 머그잔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결국 그와 헤어진 2년 동안 자신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걸까. 그의 흔적을 지우기만 급급했던 거다. 바보처럼.
“참, 시험은 잘 봤어? 이틀 전이었던가? 곧 결과 나오겠네.”
“그래도 취업 준비까지 아직 또 남은 것도 있고 바쁘네요.”
“나도 얼른 이 지긋지긋한 학교 졸업하고 뜨고 싶은데. 좋겠다. 나연인 이제 정말 약사 되는 거네.”
“결과 나와 봐야 아는 건데요, 뭐.”
“네, 네. 겸손도 하세요.”
결국 마주 보며 웃었지만 나연은 마음이 좋지 못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저 마셨다.
피곤한 몸으로 골목을 걸었다. 골목 끝자락에 있는 집으로 향하는 길은 늘 멀었다. 상윤과 시간을 좀 보냈더니 날은 금세 어두워졌다. 나연은 지친 다리를 부지런히 옮겼다. 이제 조금 쉬겠구나, 하던 기분 좋은 생각은 그녀의 욕심이라는 것을 모텔 가로등 밑에 기대어 선 남자를 발견하고서야 알았다.
“오… 빠?”
오래전, 집을 나갔던 오빠 태성이었다. 태성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를 발견한 새까만 양복 차림의 양아치 건달들이 시시껄렁하게 차에서 내렸다. 차라리 오빠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면 했었다.
나연은 인스턴트커피를 탄 종이컵을 내밀었다. 태성이 바닥에 앉지 않고 서성거렸다.
“왜 온 거야?”
“커피 마시란 말보다 왜 왔냐고 묻는 게 먼저네.”
“그럼 마시면서 말해. 왜 온 거야. 아빠가 병원에 계실 때도 코빼기도 안 비치던 사람이.”
코웃음을 치는 태성이 발에 걸린 담요를 걷어차 옆으로 던졌다. 이리저리 방 안을 살피는 그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널 예뻐했지 나는 아니었잖아.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아직도 동네 건달들이랑 어울려? 아버지가 오빨 왜 싫어했는지 스스로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까불지 마. 어차피 너 예뻐해 주던 엄마도 아빠도 없어, 지금은.”
허리를 굽히고 종이컵을 든 태성이 커피를 홀짝거렸다.
“모텔 내놨더라? 팔렸어?”
그래서 온 것이다. 그래, 돈이 아니면 태성이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마약에 손을 대 집 안에 경찰이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식구들에게 돈을 뺏기지 않으려 입 안으로 지폐를 쑤셔 넣었던 사람이었다. 아빠마저 돌아가셨으니 이젠 남은 돈을 들고 가려고 온 것이다.
“어디 있어? 돈.”
“오빠가 무슨 자격으로?”
“왜 자격이 없어. 어쨌든 이 집 핏줄 반은 나도 가지고 있는데.”
뜨거운 커피를 한 번에 몽땅 비운 태성이 자신의 권리를 들먹였다. 염치없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이 집안을 위해 제대로 된 일 한 번 한 적 없는 사람이다.
“너 대학 보낸다고 돈 얼마나 들어갔어. 네가 자격 운운할 입장은 아닐 텐데?”
그래서 집안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교복을 입기 시작했을 때부터 기를 쓰고 공부했다. 장학금도 여러 번 탔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를 와서도. 그런데도 태성은 못마땅해했다.
태성의 모친은 두 사람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태성을 출산한 뒤 그와 헤어졌다. 결혼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파혼했다고 들었다. 그 후 가정을 꾸려 낳은 딸이 나연이라는 사실이, 원치 않았던 반쪽짜리 동생이 그는 못마땅했던 거다.
한 가정의 이방인이 되어 버린 게 나연 때문이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만 아니면 세 식구는 완전한 피를 나눈 가족이었으니까. 그래서 나연의 모친은 항상 태성을 세심히 살폈지만 그럴수록 태성은 더 엇나가기만 했다.
“듣기론 돈도 많이 벌었다며. 정상적인 장사를 했을 거라곤 생각 안 하지만.”
시니컬한 나연의 대꾸에도 그는 태연하다 못해 능청스럽기만 했다.
“원래 돈이란 건 있으면 있을수록 굴리기가 좋은 놈이거든.”
이미 상윤과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왔다. 더 이상은 넘어가지 않아 종이컵만 쥐고 있는데 그가 서랍 문을 열었다. 탁, 탁, 거칠게 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좁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나연은 더 이상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나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아, 안 돼. 그 돈은!”
그의 손에 들린 지폐로 시선이 닿았다.
태성은 히죽거리며 지폐를 넘겼다. 연석이 방값 선불로 주고 간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남기고 간 돈이었다.
“야, 너 스폰 있었냐? 제법이다? 반반하게 생긴 게 제 엄마 닮았더니, 그래도 쓸모는 있네.”
“내놔. 다시 돌려줘야 하는 돈이야.”
일어서 그의 팔을 콱 쥐는데 태성이 키득거렸다.
“이런 식으로 돈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네.”
태성이 비열하게 웃으며 그녀의 가방을 통째로 빼앗아 갔다. 지갑을 꺼내고 가방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러지 말라 손을 뻗어도 밀쳐 내는 힘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튕긴 몸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태성이 지갑을 꺼내 열었다. 이리저리 살피던 태성이 그녀가 바르게 넣어 둔 명함을 꺼냈다.
“이리 줘.”
“이 남자가 진짜 네 스폰서야? 섹파?”
태성이 명함을 앞으로 내보인다. 너와 이 남자가 아는 사이라는 게 믿을 수 없다는 음성은 격양돼 있었다. 눈동자 가득 욕망이 들어차 있다.
“아니야.”
“그럼 어떻게 이 남자 명함이 네 지갑에 꽂혀 있어. 설명이 안 되잖아. 네깟 게 어떻게 재문 이사 명함을 가지고 있냐고.”
“손님이었어. 우리 모텔에 왔던. 그뿐이야.”
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고 믿기 힘든 말이었다. 재문의 전무이사라는 사람이 모텔방에서 잠을 잤다는 말은 그녀가 들었어도 믿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사실이었다. 그뿐이라는 것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도, 전부 사실이었다.
“넌 이래서 안 된다는 거야. 그깟 거짓말을 하는 거부터가 이미 나를 개좆으로 보는 거 아니냐. 어? 너는 내가 만만해? 하긴, 말해 뭐 해. 어릴 때부터 그랬는데. 스폰한테 받은 돈 너 혼자 다 먹으려고 했냐?”
“그런 거 아니야. 정말 그냥 손님이었어.”
미친년. 낮게 읊조리는 태성이 코웃음을 친다.
“돈 되는 년을 코앞에 두고 몰랐네.”
태성은 나연이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던 그녀의 커피까지 단숨에 비웠다. 손목이 쥐어 잡히는 건 한순간이었다. 태성이 남자 하나를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나연의 반대쪽 팔을 잡았다. 쥐는 힘 때문에 팔이 아파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히죽거리며 웃는 남자에게서 돈 냄새가 났다. 새 돈 냄새. 사채업? 노름판?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태성과 남자들에게선 나쁜 냄새가 났다.
연석과는 또 다른 냄새였다. 싸구려, 기분 나쁘고 비열하고 질 낮은, 저질스러운 냄새.
“얼마나 더 받아 낼 수 있어.”
“…….”
“재문 이사한테 얼마나 더 받을 수 있냐고. 돈. 어차피 섹판데 몇 번 더 자 주고 돈 받을 수 있잖아.”
“아니라고 그랬잖아.”
“이년이 끝까지.”
붙잡힌 손목 그대로 끌려갔다. 자신을 돈 되는 데에 이용하겠다고? 무슨 짓을 할지 짐작해 봐도 떠오르는 건 질 나쁘고 더러운 것들뿐이었다.
“그렇게 봐도 너 도와줄 엄마도 아빠도 다 죽고 없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릴까.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나연은 눈물을 삼키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졸업하고 약사가 되면 모든 게 다 끝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착각이었다.
***
대리석 벽으로 이루어진 룸살롱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담배를 문 마담이 나연을 스쳐 지나갔다. 밤이 오면 장사가 시작되는 곳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복도가 시끌벅적했다. 요란한 차림의 여자가 나연을 향해 다가왔다. 나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네가 태성 오빠 동생이라며? 예쁘게 생겼네.”
“저한테 뭐 하시려고 이러는 거예요?”
“글쎄. 난 너 쉴 만한 곳 좀 내어 주라는 말밖엔 못 들었는데. 잠시 대기실 가서 쉴래? 아니면 룸 하나 잡아 줄까? 손님들이 노는 곳이라서 그렇지 쉴 만해. 원래는 안 되는 건데 태성 오빠 동생이라니까 그 정도는 뭐.”
“됐어요. 보내 주세요. 저 가 봐야 해요.”
“그건 좀 곤란한데. 태성 오빠가 너 붙잡아 두라고 했거든.”
정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여자가 구석에 선 나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통이 몰려왔다. 대리석 벽도 새로 깐 빨간 카펫으로도 감출 수 없는 지하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복도를 걷다가 술에 취한 남자와 어깨가 부딪혔다. 힐긋, 쳐다보는 남자의 눈이 시뻘겋다. 음욕이 그득한 눈. 나연은 걸음을 빨리했다.
복도 가장 끝 방 앞에 선 여자가 문을 열었다.
“으음, 응.”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의 다리 사이로 빨간 머리를 한 여자가 얼굴을 묻고 있었다. 거무죽죽하게 올라선 성기를 핥고 빨며 쭙쭙대던 여자가 채 삼키지 못한 침을 뱉을 때마다 남자가 희열에 찬 얼굴을 했다.
혀를 내어 끊임없이 귀두를 문지르고 성기를 빠는 여자는 이 부끄러운 행위를 숨길 마음이 없어 보였다. 분명 스커트까지 입고 있는데 여자의 팬티가 테이블 위에 있었다.
“아, 이것들이. 연애질할 거면 방을 따로 잡으라니까.”
남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아까 모텔에서 그녀를 억지로 잡아끌고 간 남자였다.
“바빠서 빨리하고 끝내려는 거잖아. 모른 척해, 그냥.”
“손님 받는 룸에서 이 짓거리를 하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해.”
“너희들 몰래 숨어서 쉬는 룸인지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유리야, 됐으니까 빨리 넣자. 하도 보채서 안 되겠다.”
하는 수 없이 룸 문을 닫은 여자가 치를 떨었다.
“징그러운 것들. 안 되겠다. 따라와.”
여자를 따라 복도를 반쯤 걸었을 때였다. 반대쪽에서 태성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걸어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나 내보내 줘. 뭐 하자는 거야?”
“혜미야, 얘 데려가서 옷 좀 갈아입히고 화장 좀 시켜라. 손님 온다.”
“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네 스폰서 말이야. 네가 한번 제대로 모신다고 오라고 했어.”
태성이 즐거운 듯 웃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명함을 까딱거리며 보여 준다. 차연석의 이름이 새겨진 명함이다. 그가 비열하게 올라간 입술, 키득거리는 눈으로 나연의 턱을 쓸었다.
“무조건 최고 비싼 걸로 두 개 이상 팔아라. 안 그럼 넌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아. 안 되면 몸 굴려서라도 돈 받아 내. 알겠어? 네가 무슨 재주로 이런 거물급 스폰서를 잡았는진 모르겠는데 나도 네 덕 좀 보자.”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차피 떡 한두 번 쳐 본 사이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빼. 이게 끝까지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지, 씨발년. 제대로 접대해라. 초 치면 알아서 해. 어차피 스폰 관곈데 어련히 잘 하겠냐마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했지. 어차피 그래 봤자 안 올 거야. 그런 사이 아니니까.”
“뭐 해. 성혜미. 데려가서 준비시켜.”
태성이 나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 바쁜데. 정말.”
여자는 나연을 대기실로 데려갔다. 손님 맞을 준비에 한창인 여자들이 모여 화장을 하고 있었다.
“누구?”
“태성 오빠 동생. 이복동생이었나? 암튼 뭐 그래. 너 이리 와 봐.”
“저 좀 도와주세요. 저 나가야 해요.”
“무슨 소리야. 너까지 이럴 거야? 나 바빠. 얼른 너 분칠해 주고 나가 봐야 해.”
반강제로 옷이 벗겨지다시피 했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짧은 원피스는 아무리 끌어 올려도 가슴이 다 덮이지 않았다. 위를 올리면 치마가 짧아지고 아래를 내리면 가슴이 드러난다. 파인 가슴골을 의식할 여유도 없이 하이힐을 신은 발이 아파 왔다. 하이힐은 잠깐만 신어도 발이 아파 대학교 면접장에서 신은 이후로 한 번도 신지 않은 신발이었다.
“이리 나와.”
“헛고생하지 말고 그냥 풀어 줘. 어차피 안 올 사람이야.”
올 리가 없다. 노란 장판에 앉는 것도 익숙하지 않아 하던 남자였다. 기껏해야 태성 같은 양아치들이 운영하는 이런 룸살롱 따위에 올 리가 없었다. 나연은 헛웃음이 났다. 한데 태성이 되레 코웃음을 치며 소리 내어 웃는다.
“이미 룸까지 모셔 놨으니까 접대나 잘해. 그래도 네 엄마가 너 반반한 얼굴 하나 준 건 고맙네. 큰 거 두 개는 무조건 팔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 동생 덕 좀 보겠네.”
안 되면 항문이라도 핥아서 최대한 챙겨 나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렇게 태성이 웃을 때까지만 해도 그 말이 거짓인 줄 알았다.
문을 열고 그 남자와 만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럼 편안히 머물다 가십시오. 뭐 해, 들어가 보지 않고.”
나연의 등을 떠미는 태성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화이트 셔츠, 블랙 타이, 왼 팔목에 시계, 상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는 분명, 그때 명함을 건네주고 갔던 그 남자였다. 그와 함께 있던 성식조차 보이지 않고 룸 안엔 오직 그 남자 혼자였다.
나연은 고개를 들지 못해 먼발치서 담배 연기만 맡고 있었지만 그저 분위기만으로도 남자는 딱히 술을 즐기러 온 사람 같진 않아 보였다.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동시에 등골까지 긴장이 치고 올라왔다.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뱉어 내는 옅은 숨소리에 이상하게 귓가를 훑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늘한 위압감이 들었다.
나연은 치마 아랫단을 잡아 내렸다.
“어디 가. 불러 놓고.”
그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비참했다.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 남자와는 스치듯 몇 번 마주친 사이에 불과한데. 도망치고 싶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웃음기 하나 없는 남자는 지난번과는 달랐다. 나긋하게 가라앉은 중저음은 같았지만 말 한마디에도 미세한 억양의 차이를 느꼈다. 남자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기분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거다. 그것이 말 한마디에도 오롯이 느껴졌다.
“뭐 해. 화끈하게 모시겠다며. 네 오빠가 입이 닳도록 말하던데, 네가 접대 하나는 죽인다고.”
태성이 그렇게 전화한 모양이었다. 그가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었을 말을 이 남자는 왜 들어 준 것일까. 온통 머릿속이 엉망인 채로 나연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엉거주춤 대각선 자리에 앉자 그가 자신의 옆자리를 성의 없이 툭 쳤다. 더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우악스레 뺨을 때리고 손찌검을 하는 태성과는 달리 이 남자는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 온몸을 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협박 같은 시선에 나연은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말려 올라가는 치맛단을 부들대는 손으로 내려 가렸다. 차마 다 가릴 수 없이 올라간 치마 위로 팬티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영락없이 그쪽으로 쏟아지는 남자의 시선이 차디찼다.
“숙맥처럼 굴더니. 또 그건 아니었나 보네.”
오해라고, 그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참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을 열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 번 써먹으라고 했더니 생각지도 못하게 갖고 논다, 너?”
“…저희 오빠가 잘못 전화했어요. 그러니까 이만 가, 가셔도….”
대기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지배인이 노크를 했다. 허리를 꺾어 숙이며 들어온 지배인을 보는 그가 담배 하나를 다시 물었다.
“뭐 해, 불붙여 드리지 않고.”
지배인이 속닥거리며 채근했다. 빤히 쳐다보는 차연석의 시선이 아프도록 꽂혔다. 나연은 테이블 위에 놓인 라이터를 가져와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딸각거렸다.
어디까지 굽히고 들어가는지 지켜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해 본 적이 없으니 서투른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남자는 재촉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두고 볼 뿐.
그게 더 무서웠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상대의 기 같은 건 단숨에 찍어 누른다. 간신히 불을 켜고 부들거리며 손을 내밀자, 가관이라는 듯 웃는 차연석이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가 담배를 빨아들이자 새빨갛게 불이 붙는다. 남자의 붉은 입술과 긴 속눈썹, 오뚝한 콧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그가 가까이 다가와 붙을 때 언뜻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담배 냄새와도 섞이지 않는 향수 냄새. 지난번 모텔방에 왔었을 때 그에게서 맡았던 냄새였다.
“제대로 모시겠다면서 뭐 해. 알아서 준비해 봐. 돈 쓰라고 부른 거 아냐?”
“…그런 거 아니에요.”
가만히 듣고 있던 지배인이 그럼 최고로 준비해 드리겠다며 대기시켜 놓은 술상을 준비했다. 착착 안으로 들어오는 술병과 안주는 그냥 보기에도 최고급들로 줄을 지었다. 한 병에 몇천을 호가한다는 K사 컬렉션 양주들이었다. 제대로 잘 모르는 나연이 보기에도 입이 벌어지는 술상이었다. 누가 봐도 이 남자의 돈을 노리고 공들여 준비한 상이었다.
허리가 떨어져라 인사를 하는 지배인의 입이 귀에 걸렸다.
“지금 부르신 아가씨가 마음에 안 드시면 따로 애들을….”
“됐으니까 나가.”
지배인이 쫓겨나듯 고개를 숙이고 룸을 나갔다.
다시 불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뭘 멀뚱히 있어. 더 팔아야지. 그렇게 목석같이 앉아만 있으면 어디 돈이 나오겠어?”
돈을 쓰라고 그를 부른 것이라 남자는 오해하고 있었다. 하긴 오해가 아니지. 태성이 그를 부른 건 순전히 이 남자 지갑을 벗겨 먹으려는 속셈이니까. 그가 생각하는 오해가 오해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뻣뻣하게 굴어서 어디 밤 손님 받겠냐며 그가 혀를 쯧 찬다. 가슴 한편이 따끔거렸다.
“이럴 거면서 방값은 왜 받기 싫다고 뺐어.”
“…죄송해요.”
“얌전한 척 거절하면 하는 짓이 가상해서 더 주기라도 할까 봐? 아니면 네 오빠랑 손잡고 한판 더 거하게 뽑아 먹으려고?”
“…….”
“너 내가 재밌나 보다? 실실거리고 상대해 주니까 웃겨?”
죽은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떠한 답도 남자의 오해를 풀기엔 역부족이란 걸 알았다. 저 같아도 믿지 않았을 거다. 가쁜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안면으로 담배 연기가 길게 흩뿌려진다. 남자가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단 뜻이었다.
“뭐라도 해 봐. 재미없잖아. 할 줄 아는 거 없어?”
남자가 쏟아 내는 가시 박힌 말이 나연의 가슴을 움푹 파고들었다.
“방금 나간 그 남자 좆이라도 빨아 봐. 재밌으면 배로 얹어 줄 수도 있고.”
뭐? 나연은 하도 꾹 쥐고 있어 축축해진 치맛자락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테이블을 채우고 방을 나갔던 아까 그 남자를 불러왔다. 연석이 남자를 향해 턱짓을 했다.
“저 남자 거 빨면서 동시에 네 구멍도 만져. 잘 알 거 아냐.”
“…….”
“아니면 뒷구멍이라도 만지든가.”
참담한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기만 했다. 나연은 시야가 노래지고 있었다.
“왜, 거긴 아직이야? 만져 봐. 가르쳐 줄 테니까.”
질 낮게 놀길 원하니까 질 낮게 상대해 주겠다잖아. 시키는 대로 하면 태성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주겠다고 그의 얼굴이, 그의 시린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감히 이 남자를 이런 식으로 불러내다니. 그는 단단히 화가 나 보였다.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소리 없는 작은 반항에 연석이 남자에게 이만 나가 보라 고갯짓을 한다. 눈치를 보며 섰던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다시 이어진 정적 사이로 나연의 울음기 섞인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건 또 싫은가 보다?”
“…….”
“재미없다.”
안주 위로 담배를 지져 끈 남자는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일어서는 남자의 긴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지갑을 꺼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함께 딸려 나온 종이는 그냥 보기에도 수표였다. 뜯지도 않은, 아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술병과 안주 위로 수표가 팔랑이며 떨어졌다.
나연은 치맛자락을 꾹 쥐어뜯었다.
“부족하면 다른 새끼 뒤 닦아. 이런 거 질색이니까. 차라리 대놓고 달라고 해서 그래, 귀엽기는 하다.”
“…….”
“다신 전화하지 말고.”
남자가 우아한 걸음으로 테이블을 지나갔다. 걸어가는 구두가 너무도 깨끗해 꼭 자신이 더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테이블 위에 두고 간 담뱃갑과 라이터만 바라보던 나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꾹꾹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흐윽, 읍. 끄윽, 흐으.”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엄마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