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306
외전 10 – Together
딩동─
벨을 누르고 얼마 있지 않아 문이 열렸다.
토요일 오전 9시. 격일마다 은하의 아침을 챙겨 주는 제휘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의 오피스텔을 방문했다.
다만 오늘은 한 가지 용건이 더 있었는데…….
“헌터님, 좋은 아침입니다!”
문이 열리고 은하의 모습을 확인한 제휘는 활짝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좋은…….”
아직은 조금 졸린 얼굴로 인사하던 은하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제휘의 옆에 누군가 또 한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에.
“크흠, 잠시 실례 좀.”
여우처럼 쭉 찢어진 눈에 큰 키, 그을린 피부에 탈색모를 높게 묶은 여자였다.
표그루. 망치 길드의 마스터 표의혁의 조카로, 한국에서 손꼽히는 뛰어난 제작 헌터였다. 현재는 여차여차하여 제휘와 정식으로 교제하고 있는 사이기도 했다.
은하는 그녀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어쩐 일로 당신이 여기에?’ 하는 눈빛에, 그루 대신 제휘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그루 씨도 오늘 헌터님께 볼일이 있다고 해서요. 괜찮다면 같이 들어가도 될까요?”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은하는 흔쾌히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들였다.
제휘를 뒤따라 쭈뼛쭈뼛 신발장으로 들어서는 그루의 양손에는 이삿짐만 한 종이 가방을 들려 있었다. 등에는 커다란 보자기 같은 것을 메고 있기도 했다.
“그건…….”
은하가 살짝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앞서 집 안으로 들어갔던 제휘가 펄쩍 뛰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야!”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연인의 비명에 덩달아 놀란 그루가 홱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허, 허, 헌터님? 이, 이게 어떻게 된……. 이, 이런 망측한……!”
소파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잠든 에단. 그리고 그를 보고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제휘가 보였다.
‘아.’
은하는 그제야 제휘에게 에단이 돌아왔다는 것을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약 10분 뒤.
아직 한창 꿈나라인 에단을 겨우 방으로 옮긴 은하는 제휘에게 한차례 상황을 설명한 뒤, 그루와 함께 식탁에 앉아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제휘는 이 일을 대표님께서도 알고 계시냐는 둥, 그래서 저 남자를 계속 이 집에 두실 거냐는 둥 이것저것 물어보았으나…….
“인간! 왜 이렇게 늦는 거냐!”
제휘와의 놀이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루시의 재촉에 결국 후다닥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미안, 미안. 고양아.”
“고양이가 아니라 루시라고 했어!”
“그래, 루시. 오늘은 새로운 양모 볼을 가져왔어. 분홍색이랑 노란색 두 개.”
“뭐, 뭐라고……?!”
제휘가 거실에서 루시를 전담하는 동안, 그루와 은하는 식탁을 떠나지 않고 따듯한 커피 한잔을 들었다.
제휘의 말에 따르면 그루는 은하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 것 같던데, 웬일인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어딘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용건이 있다고 했던가.”
결국 커피 잔을 홀짝이던 은하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루는 “아, 대단한 건 아니고…….” 하며 눈을 도르르 굴리더니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기억을 되찾았다고 들었어. 그래서─.”
부스럭부스럭.
그녀는 챙겨 온 종이 가방과 보자기를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거, 필요할 것 같아서.”
그루는 직접 보라는 듯 식탁 위의 짐들을 향해 힐끗 턱짓했다. 은하는 가장 먼저 보자기에 싸인 기다란 물건을 펼쳐 보았다.
“……이건.”
내용물을 확인한 은하의 눈이 사뭇 커다랗게 변했다.
구불구불한 레이스 장식에 흑장미 문양이 새겨진 검은 양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은하가 들고 다니던 ‘우아한 양산’과 꼭 닮은 물건이었다.
은하는 이어서 다른 종이 가방을 확인했다.
“이전에 그쪽이 가지고 있었던 아이템만큼 좋지는 않겠지만, 뭐 나름대로 쓸 만은 할 거야.”
“…….”
종이 가방 안의 물건은 검고 화려한 드레스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검은 구두였다. 모두 흑염의 프린세스 아이템과 놀랍도록 동일한 디자인이었다.
은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아한 양산’은 데바와의 전투 때 파괴되어 버렸고, 드레스와 구두 등 다른 아이템 역시 종래에는 다시는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그루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서, 똑 닮은 아이템들을 제작해 온 것이었다.
“헌터님께서 입원해 계신 동안, 그루 씨가 1년 내내 만드신 거예요. 재료도 직접 구하셨대요.”
거실 쪽에서 제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랬지!”
거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른 그루는 쑥스러운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거실에서 들리는 “아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한 번 팍 찌푸린 그루가 다시 은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두랑 드레스 그리고 양산은 어떻게든 흉내 내서 만들어 봤는데, 펜던트랑 티아라는 재료도 부족한 데다 보석 세공 쪽으로는 내가 영 소질이 없어서.”
미안하게 됐어. 중얼거린 그루는 마치 술을 마시듯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술을 꾹 닫은 채 식탁 위 아이템들을 응시하고 있던 은하가 천천히 손을 뻗어 양산을 쥐었다.
“……아니, 이걸로도 충분해.”
차가운 금속으로 된 손잡이가 맞춤 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손에 꼭 맞았다. 은하는 이 온도와 촉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워, 최고의 장비야.”
감사히 받을게. 양산을 쥔 은하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머쓱한 듯 코를 훔친 그루는 짧게 대꾸했다.
“……별말씀을.”
* * *
1997월 9월.
세상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30년 이상이 흘렀다.
“헐! 야, 저기 게이트 터진 거 아니야?”
“어디, 어디?”
세상에는 여전히 몬스터가 등장하고, 게이트가 출현했다. 현재도 서울 한복판에 왕왕 나타나는 게이트에 때로는 혼란이 빚어지고 비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검은 비가 세상을 뒤덮었던 그때와는 이제 달랐다.
“검은 불이다!”
누군가 게이트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파아아앗!
게이트 입구 쪽에서 퍼져 나온 검은 불꽃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혔다. 그에 따라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메라 플래시가 기다렸다는 듯 눈부시게 터졌다.
또각─
밝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검은 불길이 점차 잦아들며, 맑은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흑염의 프린세스! 잠시 인터뷰 좀 가능할까요?”
“이쪽 좀 봐 주세요!”
“언제부터인가 티아라와 펜던트가 보이지 않는데요! 궁금해하는 시청자 여러분들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벌 떼처럼 몰려든 기자들과 일반인들은 한곳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윽고 완전히 사라진 흑염 속에서 차분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은하는 엷게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약속이라면 혹시─.”
타앗!
익숙한 몸짓으로 위로 뛰어올라 인파 속을 벗어난 은하는 약속한 장소로 서둘러 이동했다.
늘 가던 꽃집에 들러, 늘 사던 꽃다발을 사고, 늘 걷던 언덕을 지나자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나아!”
“여기예요, 여기!”
녹색 언덕 위로 손을 붕붕 흔드는 민주와 아연이 보였다. 벌써 도착해 있었던, 눈에 익은 다른 이들의 모습도 하나둘씩 눈에 들어온다.
언덕을 오르는 은하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비석 근처 나무 그늘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시우가 은하의 등장에 벌떡 상체를 세웠다. 그 모습은 마치 내내 기다리던 주인이 귀가한 것을 본 강아지 같아서, 은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은하 선─.”
“몬스터가 꽤 많았나 봐? 옷이 더러워졌잖아.”
시우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휙 하고 선수를 치고 나타난 것은,
“내 옷 벗어 줘?”
에단이었다.
“……끼가.”
인상을 팍 구긴 시우가 무어라 나직이 욕설을 뱉었는데, 민주는 또 그것을 잘도 주워들었던 모양이다.
“어라, 늑대 형! 욕했다!”
“안 했어.”
“맞네, 질투? 와, 질투?”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아연이 짓궂게 시우를 놀려 댔다. 이럴 때는 또 죽이 잘 맞는 민주와 아연이다.
한편 그러거나 말거나 에단은 은하에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러게 나도 데려가지 그랬어.”
“넌 ‘적당히’를 모르니까. 게이트를 없애는 게 아니라 상가 전체를 없앨지도 모르지.”
“은하, 강한 남자는 싫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에단 너는─.”
그 순간, 은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방금 문득 코끝을 스친 그 향기는.
“…….”
은하는 이끌리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덕 반대쪽에서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검은 정장의 남자.
‘백이준.’
이곳에 오면 분명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다.
은하와 그녀 곁에 있는 모두를 보고 조금 놀랐던 걸까. 하얀 꽃다발을 안고 있던 그가 멈칫 제자리에 섰다.
“앗.”
이준을 뒤따르던 붉은 곱슬머리 남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은하의 존재를 확인했다.
데이빗 무어. 미국에서도 한번 신세를 진 적 있는, 이준의 수행원이었다.
“보스, 가 보세요.”
작게 속삭인 데이빗은 “파이팅!” 하며 겁도 없이 이준의 등을 떠밀었다. 이 일로 얼마나 큰 핀잔을 듣게 될지는, 일단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당황스러운 기색의 은회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은하는 먼저 걸음을 떼 그곳으로 걸어갔다.
“안녕.”
지난번과는 달리 반말로 건네는 인사. 그에 이준의 입술이 소리 없이 살짝 벌어졌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허공을 유영하던 은회색 눈동자가 이윽고 다시 은하에게 닿았다.
“……안녕.”
“윌리엄은?”
“……오늘은 두고 왔어.”
“그럼─.”
은하가 이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내일 놀러 가도 되나?”
은하가 하는 말에 꼬박꼬박 답하던 이준이 말문이 막힌 듯한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방금 뭐라고…….’
잘못 들은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답지 않게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는 이준에게, 은하 역시 답지 않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가위질 실력이 꽤 늘었거든.”
‘아직도 그 약속 기억해? 우리 윌리엄 미용해 주기로 한 거.’
‘기억하지.’
언제나 그렇듯, 문득 불어오는 바람은 그리운 옛 기억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아버지께서 윌리엄을 데리고 한국에 오신대. 그, 그, 그래서 말인데, 오늘 임무가 무사히 끝나면 내일…… 그…… 뭐냐, 우리 집…… 노, 노, 노, 놀러 올래?’
그러나 그 바람은 더 이상 이준을 할퀴지도, 괴롭히지도 않았다.
“……응.”
옅은 금발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그에 따라 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곱게 접혔다. 그때처럼.
“놀러 와.”
아니, 그때보다 더 환하게.
“언니, 준비 다 됐어요!”
아연이 이쪽을 향해 소리를 쳤다. 기다렸다는 듯 이준을 비아냥대는 듯한 시우의 목소리와, 칭얼대는 에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인지 물어도 될까요.”
“은하, 나 추워. 이리 와.”
사아아아─
언덕 전체로 겨울 끝자락에 머물던 바람이 느릿하게 불어왔다. 그렇지만 에단과는 달리 은하는 어쩐지 하나도 춥지 않은 것 같았다.
“응, 지금 가.”
은하는 어머니의 묘비 앞에서 엇비스듬하게 옮겨 섰다.
“엄마, 인사해.”
푸른 실로 엮은 소원 팔찌를 매단 손목이 스르륵 움직여 모두를 향했다.
“내 친구들이야.”
사아아아─
그에 대답하듯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왔다. 언제나 쓸쓸해 보이던 엄마의 비석 앞에는 은하가, 시우가, 그리고 모두가 준비해 온 색색의 꽃다발이 틈새도 없을 만큼 가득 놓여 있었다.
꽃다발에서 포근한 향기가 다가와 은하를 감싸 안았다.
아, 역시 하나도 춥지 않았다.
은하는 살짝 고개를 들어 묘비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적 엄마와 함께 살았던 동네가 이곳에서는 한눈에 보였다. 지금 살고 있는 으리으리한 오피스텔 건물도, 늑대 길드의 본부도, 저 멀리 잠시 머물렀던 판자촌과 그보다 커다란 흰 리본 나무도 보였다.
은하는 이 고즈넉한 언덕 위에서 그 모든 풍경을 새까만 눈에 가득 담아 보았다.
“헌터님, 도시락 열어도 될까요?”
묘비 근처 햇볕이 잘 드는 잔디 위에 이미 돗자리를 펼친 제휘가 물어 왔다. 은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생선 요리는 다 내 거다!”
제휘의 도시락 바구니에서 툭 튀어나온 루시와,
“어! 소시지! 이건 내 거!”
“야, 건들지 마. 내가 먼저 찍었어.”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아연과 민주.
“선배, 이곳에─.”
“아, 편하고 좋네. 개 냄새만 빼면.”
그 뒤로는 은하가 앉을 자리 위에 재킷을 깔아 두는 시우와 보란 듯이 그 위에 앉아 버리는 에단이.
“보스, 뭐 하십니까? 보스도 가시지 않고요.”
“내가 어련히 알아서…….”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는 무어라 중얼대고 있는 데이빗과 이준이 보였다.
“헌터님, 빨리요!”
은하의 도시락을 확보한 제휘가 재촉하듯 은하를 향해 소리쳤다.
“네, 갈게요.”
비석 곁에 잠시 검은 양산을 내려 둔 은하는 녹색 잔디를 밟고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누군가 말했다.
사람은 나무와 같아서 큰바람이 불 때마다 하나씩, 또 하나씩 잎사귀를 떨어트리곤 한다고.
그래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차갑고 혹독한 겨울이 오면 앙상한 가지만 남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은하야.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은하는 이제 알았다.
그럼에도 뿌리가 그곳에 박혀 있다면,
그곳에 흔들림이 없다면,
기어코 봄은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