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04
01003 Omnibus – Queen Of Silhouette. =========================================================================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칠해져 금세 비가 쏟아질 듯 궂은 날씨였다.
“가십니까.”
이날도 중앙 관리 기구에 출석하러 가는 김수현은 입구까지 따라 나온 세라프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효을 씨와 이야기할 게 있어서. 오늘 일찍 와달라고 하더라.”
“이렇게 이른 시간에…. 상황이 안 좋습니까?”
“생각보다 황금 사자와 고려의 갈등이 심해서…. 뭐 그래도 처음보다 많이 나아졌어. 언제까지 질질 끌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수심(愁心)이 역력한 음성이었다.
걱정해주는 게 기꺼웠는지 김수현은 실없이 웃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일에 허덕거리는 남편을 근심하는 사랑스러운 아내라고 생각할 장면이다.
하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며칠 전 옥상에서 첫 운우지정을 나눈 둘은 이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탐하는데 푹 빠졌다.
세라프도 사양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십오 년 동안 바라보기만 했었던 시간을 보상받겠다는 듯 요즘 마음껏 사랑받는 중이었다.
또 고아한 외모와 다르게 잠자리 중 남자를 후리는 맹랑한 기질도 있어서 한 번 정을 통하기 시작하면 김수현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덕분에 오늘 새벽도 천사의 나긋나긋한 속살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눈도 못 붙이지 않았는가.
“식사도 못 하시지 않았습니까.”
“응?”
“날이 춥습니다. 따뜻한 음식으로 속이라도 덥히고 가시지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럴까?”
애간장을 살살 녹이는 목소리.
거기다 왼팔을 살그머니 감싸며 당기는데 누가 거절할 수 있으랴.
잠시 후, 두 남녀는 서로 꼭 붙어서 식당으로 사라졌다.
이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저 다정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이유정이 말문을 열었다.
“정말로 밥만 먹는다는데 예비 배터리 하나.”
“설마요. 저는 오빠가 세라프 씨를 식사한다는데 하나 걸죠.”
눈을 게슴츠레 뜬 김한별이 말을 받았다.
서로 번갈아 본 둘은 이윽고 동시에 청력을 올리며 식당으로 귀를 기울였다.
– 수현. 뭘 드시겠습니까?
– 맛있는 거.
– 맛있는 거…?
– 몸도 따뜻해지는 거면 좋겠는데.
이유정이 입을 말아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김한별은 입맛을 다시며 주머니를 뒤졌다.
– 그나저나 아무도 없네…. 세라프? 갑자기 탁자 위는 왜…. 아니 왜 누워? 거기 식탁이라니까?
– 알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왜….
– 수현이 맛있는 걸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 응?
– 어제 목욕탕에서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제 몸이 너무 맛있다고…. 그래서….
이유정의 눈썹이 올올이 치켜졌다.
곧 낯뜨거운 신음이 흐르자, 왼손으로 턱을 괸 채 듣고 있던 김한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거렸다.
물론 손을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이 씨!”
이유정이 신경질적으로 예비 배터리를 던졌으나, 맵시 있게 잡아챈 김한별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매번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아이 씨…. 야, 돌려주면 안 돼? 나 몇 개 안 남아서 그래. 응?”
“안 돼요. 저도 이제 이백 개밖에 없어요.”
“많잖아!”
“여기서는 충천이 불가능하잖아요. 그리고 애초 세라프 씨가 그렇게 추파를 보내는데 알아채지 못한 언니 잘못이에요.”
“아 진짜 너무하네!”
이유정이 발칵 소리쳤으나 김한별은 개의치 않았다.
자기한테 화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이유정이 붉디붉은 눈동자로 식당을 노려보는 게 그 방증이었다.
“미쳤나 봐. 아무리 신혼이라지만 뭐 저렇게 섹스를 많이 해? 아주 눈만 맞으면 섹스야, 섹스!”
“그러게요. 세라프 씨는 적당이라는 말을 모르는 것 같네요.”
부른 배를 어루만지던 한소영도 동의했다.
그러나 갑자기 왜 그러냐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사방에서 어이없다는 눈초리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유정도 기막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소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세상에….”
“자기가 현대에서 했던 일은 벌써 잊었나 봐. 양심도 없지.”
“그때는 오빠가 불쌍했죠. 병원에 갇혀서 꼬박꼬박 단백질 뽑히고….”
무수한 비난이 쇄도했다.
지은 죄가 있는 한소영이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고, 주변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김수현을 향하던 분노가 엉뚱하게 한소영으로 돌려진 셈이다.
“?”
그때 입을 가리며 웃던 정하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모두 왁자하게 떠드는 가운데 한 명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고연주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비가 내릴 듯 말 듯한 밖을 가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가라앉은 무표정은 혼자서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평소라면 앞장서서 대화를 주도했을 텐데.
상념이라도 하는 걸까?
생각하는 순간 고연주의 팔이 움직였다.
손에 쥔 길쭉한 걸 입으로 가져가더니.
“연주 씨!”
정하연이 황급히 소리 지르자, 흠칫 놀라며 행동을 멈췄다.
한참 두 눈을 깜빡거리더니 손에 쥔 전자 담배를 보고 탄식했다.
“아…. 미안해요. 몰랐어요.”
어수선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미안하다는 말에 놀랐기 때문이다.
사람인 이상 당연히 실수할 수 있으나 상대는 그림자 여왕이다.
성격이 모났다기보다는 애초 사과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고연주의 소양이니까.
“걱정하지 마요. 이래 봬도 무 니코틴, 액상만 넣은 거니까.”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고연주가 전자 담배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정하연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몸에 안 좋은 건 마찬가지예요. 특히 임신 중에는….”
“뭐 그렇기는 하죠. 어쨌든 비밀로 해줘요.”
순순히 수긍한 고연주는 손에 힘을 줘 전자 담배를 부러트렸다.
끙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속이 좀 안 좋아서.”
*
온종일 흐릿하던 날은 저녁이 돼서야 빗방울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한가로운 오전 오후를 보낸 정하연은 막 연구실에서 나온 참이었다.
그러나 방으로 가던 걸음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단에서 멈췄다.
일 층 라운지를 돌아보는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고연주를 발견했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정하연은 이윽고 식당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들고 돌아왔다.
“뭐해요?”
살금살금 다가가 찻잔을 건넸으나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고연주는 하염없는 눈으로 어깨만 으쓱거렸다.
귀찮아하는 느낌이었지만, 차는 받았다.
홀짝 들이켜는 모습을 확인한 정하연은 천천히 옆자리를 차지했다.
“아침부터 쭉 이러고 있었던 거예요?”
“…….”
“속 안 좋다면서요. 좀 나아졌어요?”
“…….”
대답은커녕, 반응조차 않는다.
하지만 밝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었다.
“유정이가 한별이와의 내기에서 진 게 굉장히 분했나 봐요. 다 오빠 때문이라고, 오 년 전으로 돌아가면 오빠랑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씩씩거리던데.”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고연주가 실소를 터트렸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눈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만날 거다, 안 만날 거다. 우리는 의견이 좀 갈렸는데, 연주 씨는 어때요?”
“저도요.”
“네?”
“글쎄요. 별로 만나고 싶지 않네요.”
마침내 고연주가 입을 열었으나 상당히 뜻밖의 말이었다.
설마 즉답할 줄 몰라서 정하연은 선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음…. 왜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고연주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
“…무서우니까.”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었다.
쏴-.
서먹한 정적이 내려앉는 사이, 대지를 치는 빗소리는 서서히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힐끔 얼굴을 흘겼으나 표정은 여전히 읽기 어렵다.
만나고 싶지 않다.
무서우니까.
의외라면 의외인 말이었다.
전자는 별 뜻이 없다손 쳐도 후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설마한들 고연주 정도 되는 사용자가 매너리즘에 빠졌을 리는 만무하고.
차라리 임신 중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다.
생각을 정리한 정하연은 입을 열었다.
“혹시 뭔 일이라도 있었어요? 말해봐요. 털어놓으면 속이 좀 편해질 거예요.”
“아니요.”
고연주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부인했다.
“단지 가끔, 아주 가끔 어색해서.”
“어색해서?”
“그냥, 절 둘러싼 모든 상황이요. 이렇게 클랜에 자리 잡고, 아이도 배고,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고, 그리고….”
“그리고?”
주절주절 늘어놓던 말이 문득 흐려지자, 정하연은 놓치지 않고 반문했다.
“그 사람이 이만큼이나 변했다는 것.”
약간의 틈을 두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사람.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터.
비가 오니까 센티멘털해졌나 봐요? 라고 웃으려던 정하연은 생각을 고치고 말을 정정했다.
“이해해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잖아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에요. 아마 하연 씨는 모르겠죠.”
돌연히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목이 타는지 고연주는 식은 차를 쭉 들이켰다.
“저는, 저만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사용자 김수현의 모습을 알고 있어요. 왜냐면 우리는 지난 오 년 동안 매우 많은 비밀을 공유했으니까요.”
결코 자랑하는 어조가 아니었고, 뻐기는 것도 아니었다.
“저는 말이죠. 딱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오히려 감상에 젖은, 희미한 떨림마저 묻어나오는 음성이었다.
“간혹 그 기억이 떠오를 때…. 저는 현재가 몹시 낯설어진답니다. 못 견딜 정도로 말이죠.”
거기까지 말한 고연주는 입을 닫았다.
정하연은 함부로 말하기보다 침묵을 지켰다.
말문이 다시 열린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거 알아요? 홀 플레인에 비는 자주 내리지 않는다는 거.”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영리한 정하연은 곧바로 상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날도 비가 내리는 날이었나 보네요.”
고연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혹시 그 사건 기억해요? 안현이 친 사고였는데.”
“현이가 친 사고라면….”
한두 개가 아니었으나 단숨에 떠오르는 건 있었다.
“용이 잠든 산맥?”
“아니요. 그거 말고.”
“그럼…?”
“용이 잠든 산맥보다 전에. 하나 있었잖아요.”
그전에 있었던 거?
혼잣말로 중얼중얼하던 정하연은 문득 아차 탄성을 질렀다.
“아! 그거라면….”
시간을 돌려, 이야기는 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작품 후기 ============================
사실 본편 연재 중에 적으려다가 삭제했었는데, 이렇게 연재하게 되네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옴니버스 고연주 스토리는 이제껏 보셨던 외전과 180도 다른 분위기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내용에 따라서 일부 독자님은 눈살을 찌푸리실 수도, 불쾌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점 미리 양해를 구하며, Queen Of Silhouette – 殺門 파트 시작하겠습니다. _(__)_
PS. 딱지는 계속 보내는 중입니다. 🙂